연중 제 25주일(가해)
제1독서(이사 55,6-9)는 성경 전체의 요약처럼 말합니다.
바빌론에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위로의 말씀(41,1-11)을 마감하면서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자비가 풍요롭고 쉽게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돌아서라고 합니다. 유배지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하느님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마음껏 섬길 수 있게 될 것이니 이제껏 살던 자기(불의한)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라고 합니다. 주님의 계획은 바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니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하느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우리와 달리 하느님의 생각은 항상 인간을 항한 사랑에 있으니 그것을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라고 하지만 지평선 안쪽에 있을 뿐이며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와 지식으로 대단한 일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보다 훨씬 광대하기에 헤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복음(마태 20,1-16)은 각각 다른 시간에 고용하고 똑같은 임금을 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포도밭 주인이 관리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일꾼들을 단체(복수)로 불러들이는데, 수확시기라서 그런지, 아니면 가지치기 때문인지 설명이 없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추수할 것이 많은 포도밭 주인은(9,37) 일꾼들이 더 필요했기에 이른 아침,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 인력시장에 나가 “일한 만큼 품삯을 줄테니, 가서 일하라”고 일꾼들을 불렀습니다. 주인은 당시 관습대로 일꾼들과 “정당한 삯”인 한 데나리온(토빗 5,15-16)으로 품삯을 정했고 일꾼들도 동의했습니다. 하루에 모든 일을 다 마치려고 했는지, 밭 주인은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서 아직도 일자리를 찾아 서성대는 사람들을 빈둥거린다면서 꾸짖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한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일이 끝나자 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는데,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나 새벽부터 일한 사람들이나 똑같이 계약한 대로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들이 받는 임금(한 데라니온)을 보고 맨 처음에 온 사람들이 기대했듯이, 그리고 우리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일찍 온 일꾼들에게는 적어도 대여섯 데나리온을 더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 온 일꾼들도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아들고는 마지막에 온 일꾼들과 자기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주인의 태도에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것을 가지고 “정당한 삯”을 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주인은 “네가 그들보다 더 밭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무엇이냐?”고 따지고, “내가 오죽해야 늦은 시간에 나가서 다른 일꾼들을 불러들였겠느냐?”고 호통치는 듯합니다. 마치 하루 종일 서성거렸을 텐데 일찍 포도밭에 불러주었음에 대한 기쁨을 잊었다고 야단치는 것 같습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포도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겠으니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했지, 해야 할 일에 대한 암시도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구원에 대한 보상과 하늘나라에 대한 유다인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처음 온 일꾼들은 하느님을 먼저 알았다고 믿음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주장하는 유다인들과 같습니다. 밭 주인이 짧은 시간 동안 일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임금을 준 것은 그들의 딱한 처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불러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렸던 인내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밭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똑같은 선물로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를 똑같은 일터, 즉 하늘나라로 부르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일찍부터 하늘나라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일꾼들의 거센 반항에 포도밭 주인은 합당한 계약과 “정당한 삯”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함께함은 물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성실하게 일한 이들에 대한 보상의 전권, 즉 구원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제2독서(필리 1,20ㄷ-24.27ㄱ)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택한다고 합니다.
바오로에게는 체포되고 감옥살이를 할 때도 그것이 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일이기 때문에 늘 기뻐한다고 합니다. 자기 삶 자체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 욕심에 기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죽는다 해도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좋은 일이지만, 필리피인들에게 더 많은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살아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에 합당하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권고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에 합당한 생활이란 자기 생각이나 자기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잣대로 삼아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이른 아침에 포도밭에 온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권리를 찾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자기 스스로 권리를 찾거나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새벽에 계약한 일꾼들은 하느님을 일찍 알았던 유다계 신자들을 뜻하고, 맨 나중에 계약한 이들은 뒤늦게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들로서 이방계 신자들을 뜻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이 두 부류가 같은 장소에서 전례에 참여할 수 없다고 탓하는 선민의식을 깨뜨려야 한다는 초기 교회의 아픔도 담겨있습니다. 세례를 일찍 받은 이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도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줄 줄도 모르면서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마태 19,30; 20,16).
하느님께서는 “정당한 삯”을 주시는 정의로운 분이시지만, 당신을 부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가까이하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는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은 자기에게 늘 자비로워야 하고, 자기는 타인에게 반드시 정의와 원리원칙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기준이나 생각과 하느님의 계획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와 자비를 늘 함께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길과 하느님의 길이 다르므로 우리는 부르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정의와 자비가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로마 8,28). 복음의 비유에서 풍기고 있는 흐름으로 보아 일찍 온 일꾼들이 중간에 포기하고 그냥 가겠다고 나섰다면,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반 데나리온조차 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장 커다란 유혹 가운데 하나는 자기 뜻을 하느님께도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쉽게 하느님을 원망하고 떠나게 됩니다. 또 다른 유혹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항상 복음이 잣대가 되어야 하는데, 늘 자기 생각을 잣대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계속 되뇌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 제이짱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