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여성시대 뿅뾰뵹뿅뿅
24쪽
함께 살던 할머니 고순분 여사는 김지영 씨가 남동생 분유를 먹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분유를 얻어먹다 할머니께 들키기라도 하면 김지영 씨는 입과 코로 가루가 다 튀어나오도록 등짝을 맞았다. 김지영 씨보다 두 살 많은 언니 김은영 씨는 한 번 할머니에게 혼난 이후로 절대 분유를 먹지 않았다.
"언니는 분유 맛없어?
"맛있어."
"근데 왜 안 먹어?"
"치사해서."
"응?"
"치사해서 안 먹어. 절대 안 먹어."
김지영 씨는 치사하다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몰랐지만 언니의 기분은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혼내는 게 단순히 김지영 씨가 더 이상 분유를 먹을 나이가 아니라거나 동생 먹을 게 부족해진다거나 하는 이유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메세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 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 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 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41쪽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46쪽
그 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 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 듯이.
63쪽
아랫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면서 김지영 씨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세상의 절반이 매달 겪는 일이다. 진통제라는 이름에 두루뭉술 묶여 울렁증을 유발하는 약 말고, 효과 좋고 부작용 없는 생리통 전용 치료제를 개발한다면 그 제약회사는 떼돈을 벌텐데. 언니는 뜨거운 물을 담은 페트병을 수건에 둘둘 말아건네며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야. 암도 고치고, 심장도 이식하는 세상에 생리통 약이 한 알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이라니. 자궁에 약 기운 퍼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나봐. 여기가 무슨 불가침 성역이라도 되는 거야?"
68쪽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74쪽
김은영 씨는 다녀왔던 교대에 원서를 냈고, 합격했다. 기숙사에도 합격했다. 스무 살,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딸 앞에 간단한 살림살이들과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당부들을 늘어놓고 돌아온 어머니는 김은영 씨의 빈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애인데 집에서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정말 가고 싶은 학교에 가도록 두었어야 했다고, 나처럼 만들지 말아야 했다고. 딸이 안쓰러운 건지 어린시절의 자신이 안쓰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96쪽
그 여자 선배는 내내 단과 수석이었고, 외국어 점수도 높고, 수상이력, 인턴 경력, 자격증, 동아리와 봉사활동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스펙이었다고 한다. 선배가 꼭 가고 싶었던 기업이 있었는데, 학과로 들어온 취업 추천에 남학생들만 네 명이 선발되어 면접을 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학생이 푸념하듯 털어놓은 것이다. 선배는 추천 기준을 알려달라고, 납득할 이유가 없으면 공개적으로 문제 삼겠다고 지도 교수에게 강하게 항의 했는데, 몇 명의 교수를 거쳐 학과장 면담까지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수들은, 기업에서 남학생을 원하는 뉘앙스였다, 군대를 갔다온 것에 대한 보상이다, 남학생들은 앞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등의 선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것은 학과장의 대답이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어쩌라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안 되고, 잘 나면 잘 나서 안 되고, 그 가운데서 또 어중간해서 안 된다고 하려나? 싸움이 의미없다고 생각한 선배는 항의를 멈추었고, 연말에 치러진 공채에 합격했다.
"우아, 멋지다. 그래서 지금 회사 잘 다닌대?"
"아니. 6개월인가 다니다 그만뒀대."
어느 날 문득 사무실을 둘러보았는데 부장급 이상으로는 여자가 거의 없더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임산부가 보이기에 이 회사는 육아휴직이 몇 년이냐고 물었더니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과장부터 사원까지 다섯 명 모두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단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고, 고민 끝에 사직서를 냈고,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선배는 여자를 자꾸 안 되게 만드니까 이러는 거라고 대답했다.
100쪽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 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준 거야."
태워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할 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이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105쪽
졸업식이 이틀 남은 날, 오랜만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둘째 딸 졸업식 날에 하루 임시 휴업을 할지 저녁 시간에만 장사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김지영 씨는 졸업식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정신 상태까지 들먹이는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부었는데, 김지영 씨에게 새삼스럽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그 때는 '불합격' 이 외에 어떤 말도 김지영 씨를 자극하지 못했다. 자신의 꾸중에도 딸이 속상한 기색없이 무덤덤하자 아버지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이제껏 더 심한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견딜 수가 없어졌다.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세워들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딱, 하고 단단한 돌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110쪽
김은실 팀장은 4명의 팀장 중 유일한 여자 팀장이었다. 초등학생 딸이 하나 있었는데,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며 육아와 가사는 완전히 어머니께 맡기고 본인은 일만 한다고 들었다. 누군가는 멋지다고 했고, 누군가는 독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뜬금없게도 남편을 칭찬했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보다 고되다는 둥 요즘은 장서갈등이 사회문제라는 둥 하며, 장모를 모시고 사는 걸 보면 만난 적은 없지만 김은실 팀장의 남편은 좋은 사람일 거라고 했다. 김지영 씨는 17년 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가 어머니가 미용 일을 하러나간 동안 잠깐씩 막내를 봐주셨을 뿐 삼남매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등의 돌봄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른 집안일도 거의 안 하셨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드시고, 어머니가 빨아놓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청소한 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아무도 어머니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111쪽
"그리고 앞으로 내 커피는 타 주지 않아도 돼요. 식당에서 내 숟가락 챙겨주지 말고, 내가 먹은 그릇도 치워주지 말아요."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김지영 씨의 일이 아니라서 그래요. 그 동안 신입사원을 받을 때마다 느낀 건데, 여자 막내들은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더라고. 남자들은 안 그래요. 아무리 막내고 신입사원이라도 시키지 않는 한 할 생각도 안 해. 근데 왜 여자들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123쪽
김지영 씨는 미로 한 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
135쪽
"그리고 잔소리 안 듣는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 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 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구체적인 가족계획이라든가 출산시기를 얘기해본 적은 없지만 정대현 씨도 김지영 씨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정대현 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136쪽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 지도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나, 나도... 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 할 거고. 일하고 와서 또 집안일 도우려면 피곤할 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 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김지영 씨는 정대현 씨의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는 데에 비하면 남편이 열거한 것들은 너무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렇겠네. 오빠도 힘들겠다. 근데 나 오빠가 돈 벌어 오라고 해서 회사 다니는 건 아니야. 재밌고 좋아서 다녀. 일도, 돈 버는 것도."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억울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43쪽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그래도 김지영 씨는 우울해졌다. 정대현 씨가 김지영 씨의 축 쳐진 어깨를 도닥였다.
"애 좀 크면 잠깐씩 도우미도 부르고, 어린이집도 보내자. 너는 그동안 공부도 하고, 다른 일도 알아보고 그래. 이번 기회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많이 도울게."
정대현 씨는 진심이었고, 그런 남편의 뜻을 잘 알면서도 김지영 씨는 불쑥 화가 났다.
"그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149쪽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 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 고 난이도를 후려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 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150쪽
어머니는 짬짬이 김지영 씨의 집으로 죽집 메뉴들을 포장해날랐다.
"비쩍 말라가지고는 애도 낳고, 젖도 먹이고, 혼자 잘 키우는 거 보면 대견하다. 모성애가 이렇게 위대하구나."
"엄마는 우리 키울 때 어땠어? 힘들지 않았어? 후회하지 않았어? 그 때 엄마는 위대했어?"
"아유, 말도 마. 하여간 늬 언니는 그 때도 빽뺵 울었어. 밤이고 낮이고 하도 울어서 내가 병원을 몇 번을 갔는지 모른다. 애는 셋이나 되지, 늬 아빠는 기저귀 한 번 가는 법이 없지, 늬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세 끼 따박따박 드시지. 할 일은 많고, 잠은 오고, 몸은 아프고, 아주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김지영 씨의 어머니 뿐 아니라 이미 아이를 낳아 키워 본 친척들, 선배들, 친구들 중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TV나 영화에는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만 나왔고, 어머니는 아름답다고 위대하다고만 나왔다. 물론 김지영 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울 것이다. 하지만 대견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하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들어하는 것조차 안 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151쪽
머리만 좀 지끈거려도 쉽게 진통제를 삼키는 사람들이,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다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 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
164쪽
김지영 씨는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왈칵왈칵 쏟으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왔다. 중간에 아이가 깨서 우는데도 모르고 집까지 정신없이 유모차를 밀며 달렸다. 오후 내내 멍했다. 아이에게 데우지도 않은 국을 먹였고, 깜빡 기저귀를 안 채워 옷을 다 버렸고, 세탁기 돌려놓은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원이가 잠든 후에 꾸깃꾸깃해진 빨래들을 널었다. 회식을 하고 12시가 넘어서 들어온 정대현 씨가 붕어빵 봉지를 내려놓고서야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닳았다. 종일 밥을 먹지 않았다고 말하자, 정대현 씨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김지영 씨의 대답에 정대현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댓글 다 초딩들이 쓴 거야. 그런 말 인터넷에나 나오지 실제로 쓰는 사람 없어.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해."
"아니야. 아까 내가 직접 들었어. 저기 길 건너 공원에서 서른 쯤 된 양복 입고 회사 다니는 멀쩡한 남자들이 그랬어."
김지영 씨는 낮에 있었던 일들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 때는 그저 당황스러웠고 수치스럽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는데 다시 상황을 복기하고 있으려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이 떨렸다.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 짜리 커피 한 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이 아니라 1500만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73쪽
주말에 분리수거를 하면서 보니 폐지함에 초등 수학 문제집이 잔뜩 있었다. 모두 아내가 푼 것들이다. 이제껏 그 많은 문제집들을 버리며 나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아내의 귀엽고 특이한 취미 생활 정도로 넘길 수도 있는데, 나는 이상하게 거슬렸다. 아내는 수학 영재였다. 학창 시절 내내 온갖 수학경시대회를 휩쓸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열 두번의 중간·기말고사 모두 수학 만점이었고, 학력교사에서는 안타깝게도 수학을 한 문제 틀렸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초등 수학 문제집을 그렇게 풀어 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묻자 아내는 재밌어서, 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당신 수준에 그게 뭐가 재밌니? 유치하기만 하지."
"재밌어. 엄청 재밌어.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 밖에 없거든."
184쪽
김지영은 어처구니 없고 부당한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 입을 닫아버린다. 그 때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지영은 집, 학교, 거리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여성혐오' 라고 명명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나아가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얼마나 숱한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어머니는, 배 속의 셋째가 또 딸이라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 울면서 낙태를 했다. 할머니는 '아무'보다 못한 존재인 손녀들이 '감히' 귀한 손자 것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짝꿍이 김지영을 좋아해서 괴롭히는 것이니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바바리맨을 잡은 중학교 친구들은 학교 망신을 시켰다며 근신 처분을 받았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위협을 당했을 때 아버지는 고등학생인 김지영이 자초한 거라며 혼을 냈다. 그녀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은 말하는 존재였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 후에 못내 억울하고 분했기 때문이다. 임심으로 '특혜' 받는다고 조롱하는 남자 동료들의 말에 화가 나 "늦게 출근 할 생각이 없다." 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곧 후회한다. 스스로도 너무 힘들었을 뿐 아니라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육아를 위해 결국 직장을 그만 둔 김지영은 위로한다며 열심히 돕겠다고 하는 남편에겐 "그 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어?" 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이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말을 해도 상황은 그대로이거나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점점 목소리를 잃어갔다.
첫댓글 잘읽었어♡ 근데 좀빡치네...ㅎㅎㅎ 책이지만 현실아녀ㅠㅠ
고마워 잘 읽었어 맘아프고 불편하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사실에 또 한번 다짐해본다 ㅠㅠ
이 책을 영화로 접했는데 영화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올라오네
잘보고가!고마워
여샤 잘 읽엇어 ㅎㅎㅎ
혹시 필사 할 때 공책에 적어두는 거야 아니면 핸드폰 메모장? 이런 곳에 적어두는 거야? 그런 건 필사라고 하는 게 아닌가..?ㅜ
나는 노트에 적어두는데 필사는 손으로 쓰는 거나 폰 메모장이든 괜찮은 걸로 난 알고 있어
@뿅뾰뵹뿅뿅 그렇구나 저거 다 적을라믄 손 아프지 않어?? 보통 몇 시간 해?
@양심적으로살자 난 그냥 문장 하나를 통채로 외워서 노트에 생각나는데까지 적고 하는 편이라 글씨를 별로 신경 안 쓰고 적고있어 시간도 보통 몇 시간이라기 보다는 파트 별로 나눠져있는 책은 보통 2,3파트 읽고 적고 안 나눠진 책은 그냥 내가 읽고 싶을 때까지 읽다가 적고 하고있어
너무 잘읽었어 여시야ㅠ 책 읽었을때의 그 감정이 사르르 살아나는거같아서 너무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