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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내원사 (智異山 內院寺)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산청 나들목을 빠져나온 삼거리 정면에는 산청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의 명칭과 거리, 가는 방향
을 알려주는 커다란 안내판이 서 있다.
목적지가 정해진 발길이었으나 안내판을 본 순간 어디로 핸들을 돌려야 할지 잠시 머뭇거린다. 2년 전의 국새(國璽)사기사건
으로 배신당한 마음도 추스릴 겸, 과정이야 잘못되고 어긋난 것이었지만 당초의 취지 만큼은 새겨봄직하다는 생각으로 국새전
각전을 다시 찾기로하고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전각전이 있는 한의학 테마파크(동의보감촌) 쪽으로 2~3분도 채 달리지 않아 이내 차를 후진 시키고 말았다. 갈림길의
큰 안내판에서 몇 걸음 떨어져 얼굴을 내민 작은 안내판 하나를 스쳐지났기 때문이다.
가슴에 입은 상처는 아물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별 상관도 없는 내가 이럴진대 우리나라의 국새를 새긴 장소라며 자부심을
가졌던 산청사람들이야 오죽했겠냐는 생각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면서도 이미 내마음은 전각전을 거부하고 있었다.
미련없이 핸들을 돌렸다...
내원사(內院寺) 계곡
삼십 여분을 달렸을까 오는 도중에는 보기 힘들었던 '내원사'란 손바닥만한 표지판 하나가 가르키는대로 따라 들어가니, 기대와는
사뭇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식당은 물론 매매 플랭카드를 내건 펜션 등, 마치 정리되지 않은 유원지같은 분위기에 중장비가 굉
음을 내며 계곡의 돌을 파헤치고 있으니 눈 앞의 광경이 여간 어수선한 게 아니다.
지난해 8월 지리산 곳곳에 큰 생채기를 냈던 태풍'무이파' 피해 현장을 복구하는 공사였다. 당시 태풍 무이파는 지리산 일대에
엄청난 양의 집중 폭우를 쏟아 칠선계곡, 장당골, 내원사, 대원사 계곡 주변이 큰 피해를 입었다.
탐방로 주변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산사태가 났고, 계곡 주변 둑이 터져 농경지와 도로, 교량이 훼손되고 펜션 수채가 물에 휩
쓸려 갔다고 한다. 해당 지자체에서 올 여름 홍수기에 대비해 대대적인 복구 공사에 나선 듯했다. 그러나 주차장을 지나 경내로
다가설수록 세속의 먼지에 찌든 심신을 말끔히 씻어주는 계곡의 물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내원사 반야교
"날이 저물어 덕산사에 투숙하였다. 이 절은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언덕에 있는데 대나무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쓴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에 나오는 '덕산사'는 내원사의 옛
이름이다.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지리산 동쪽 자락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류하여 물소리가 가득한 절묘한 곳에 덕산사(德
山寺)가 있었다. 덕산사는 신라 태종 무열왕(재위 654 - 661) 때 무염국사(無染國師 801 - 888)가 창건하였으나 5백여 년 전에
소실된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지난 1959년 폐사지에 새로이 내원사(內院寺)가 창건되었다.
덕산이라는 말은 옛 부터 이곳 삼장면과 인근 시천면 등을 통칭하던 지명이다. 따라서 이 물줄기가 이르는 남강 상류를 덕천강
이라 부르고 인근 남명 조식 선생을 배향한 서원의 이름이 덕천서원이며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지명을 덕산이라 부른다. 이렇게
깊은 골짜기는 함양 백운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6.25전쟁 때 빨치산의 주 무대가 된다. 맨 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는 전설적인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마지막까지 항거하다 붙잡힌 곳도 바로 이곳이다. 빨치산 정순덕의 이야기는 뒤로 돌린다.
내원사 반야교
내원사로 들어가는 장당골 계곡 위에 놓인 반야교는 중앙이 약간 위로 올려져 있는 구조다. 중앙부의 양쪽으로 확폭(擴幅)구간
을 두어 통행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많을 때는 피해 설 수 있거나, 이곳에서 계곡의 멋진 풍광을 보며 즐길 수 있도록 마음 한 자
락 내어준 배려가 엿보인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반야교에서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계곡 물소리에 번뇌망상이 사라지고
반야의 지혜가 솟구치듯 몸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내원사
반야교를 지나 그다지 높지 않은 돌계단을 몇 개 밟고 서니, 지리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끝이 계곡으로 빠지기 전에 마지막
으로 한 번 봉긋하고 솟은 작은 봉우리 아래 올망졸망 터를 잡은 내원사 전각들이 보인다. 전각
의 크기가 작고 소담스러운 대신 절마당은 계곡물만큼이나 시원스럽고 넓게 확 트여 있다. 마치 시골의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선 느낌이다.
내원사 절터는 옛날 덕산사가 있던 곳으로 풍수상
명당터로 알려졌다. 그래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으로 큰 혼잡을 이루게되었는데, 수도하는 스님들이 불편해 하자 주지스님이 이를 걱정하였더니 어느 노승이 찾아와 “남쪽의 산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고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으면 해결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스님들은 개울에 통나무로 다리를 놓고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었다. 그러자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스님들이 조용히 수도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돌연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고 한다.
이상히 여긴 사람들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여 풍수설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봉우리는 고양이 혈이고,
절 뒤에 있는 봉우리는 쥐의 혈인데 여기에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조금 지나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스님들이 개울에서 커다란 통에 물을 길어 불을 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왼쪽에서 길어 쏟는 물은 오른편 개울에 떨어지고, 오른편에서 쏟은 물은 왼편 개울에 떨어지며, 앞에서 쏟은 물은
뒷산 봉우리에 떨어져 결국 불길을 잡지 못하고 절이 모두 전소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내원사의 주전각인 대웅전은 1960년대 지어졌다. 아담한 전각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처마는 겹처마에 단청이 되어 있고 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창호는 빗살창이며 건물의 기단과 주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사용했다. 그런데 대웅전 앞에 놓인 두 개의 석등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일본풍의 석등이 민망하게 서 있다. 며칠전 뉴스에
서 서울의 어디에서는 잘 모르고 세웠던 일본풍의 석등을 모두 철거키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웅전 내부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을 모셨고, 삼존불 뒤로는 후불탱이 좌우로 지장탱과 신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내원사 삼층석탑
대웅전 오른쪽에는 깨어지고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보물 제1113호로 신라시대 때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하여 파손된 것을 1961년 내원
사가 세워지면서 복원되었다.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으로 높이는 4.8m이다. 탑의 위쪽 옥개석(屋蓋石)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상실하였다.
또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
태이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4단씩 두었으며,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크게 치켜 올
려져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 개의 우주(隅柱)와 두 개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어
있다. 맨 위의 옥개석은 많이 부서지고 상륜은 없어졌으나, 이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하층기단 면석에 두
탱주를 구비한 석탑이다. 기단부의 구성, 지붕돌 및 각부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석탑이다.
삼층석탑과 비로전(毘盧殿)
비로전(毘盧殿)
삼층석탑 뒤의 비로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정면 3
칸,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띠살무늬의 창호에 어칸과 협칸은 각 3분합문이고 측면은 1분합문이 달렸다.대웅
전과 마찬가지로 기단과 주초석에 자연석을 놓았다.
- 비로전의 주련 -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원각산 중에 한 그루 나무가 생겨나
開花天地未生前 (개화천지미생전) 꽃이 피니 천지가 생겨나기 전이구나
不靑不白亦不黑 (불청불백역불흑) 푸른 것도 아니오 흰것도 아니오 또한 검은 것도 아니니
不在春風不在天 (부재춘풍부재천) 봄바람에도 없고 하늘에도 없어라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遮那佛像)
비로전의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내원사 북쪽 지리산 중턱 약 900m 고지에 있던 석남암사(石南巖寺)터에 있던 불상이었다.
1947년 석남리에 사는 동민이 폐사지에서 반출하여 자기집에 보관하였다가 후에 내원사에 양도하여 옮겨 온것이다. 이전할
때 무게를 덜기 위하여 불신(佛身)의 등과 무릎을 깎아 원형을 훼손한 크나큰 우를 범했다.
비바람에 의한 마멸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육계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되
었으며 둥근 얼굴은 부피감이 풍부하여 잘 파여진 얼굴로 우아한 자비의 얼굴 모습을 간직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있어 부처와 대중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비로자나불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좌상은 받침대와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배광(背光)과 일체로 되어 있다.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져 약 3분의 1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遮那佛像)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石造毘盧遮那佛)은 현존하는 비로자나불 중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
각사 편년 및 사상사 연구의 자료가 되는 중요한 석불이다. 이 불상의 대좌에서 나온 납석제 사리호(舍利壺, 국보 제 233호)
가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영태(永泰) 2년이라는 연호가 적혀 있어서 신라 혜공왕 2년 (AD 766)에 조성
된 것임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사리호에는 연호 외에 136자의 이두문이 음각되어 있어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다.
를 봉안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례로서 복장(腹臟)의 초기양식으로 보인다.
금 명복을 빌게 하며 석남사(石南寺)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석남사는 지금의 내원사 위, 써레봉에서
국사봉에 이르는 내원골 상단에 있던 절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 대좌에서 나온 사리호(舍利壺)
영태 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국보 제233호
1986년에 국보233호로 지정된 불교공예 사리장치로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불상 대좌의 가운데 받침돌 안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로 만들어진 항아리로 총
높이 14.5㎝, 병 높이 12㎝, 아가리 지름 9㎝, 밑 지름 8㎝이다.
몸통에 비해 도톰한 턱이 주둥이에 둘러져 있고, 밑 부분은 평편하고 넓어 안정감을 준다.
이 항아리 몸통에는 한줄에 8-11자씩 15줄 136자의 비로자나불상조상기(毘盧遮那佛像造像記)가 새겨져
있고 그릇의 밑바닥에도 4줄 22자의 이두문이 초서로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
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공양승과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들의 업이 소멸되기를 비는 일종의 기원문이다.
새겨진 글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애매한 곳도 있으나, 죽은자의 혼
령을 위로하고 중생을 구제하길 바라는 글로 되어 있다.
곱돌 항아리로 그릇의 안밖에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어깨에 한줄, 아랫배에
두줄의 쌍선을 음각하였다. 뚜껑의 윗면에도 두줄의 동심원을 음각하였고, 그 안에 간결하게 새긴 세겹의
연화문이 유일한 장식이다. 전체적인 제작 기법이나 뚜껑 처리 방식, 글자의 새김 등 미술사적 측면과 비로
자나불의 제작연대, 석불의 법사리 봉안은 물론 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의 조성 연대를 8세기까지 끌어올리
게 됨으로써, 불교사와 미술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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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의 글
일요일인데도 경내는 물소리만 들려올 뿐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다. 아까 절입구를 잘 몰라 길을 물어
봤던 공사현장의 인부 아저씨가 유일하게 목격된 사람이었다. 휴가나 피서철이 되어야 이 산골 절마당이
사람의 그림자로 어른거릴까....
몸마저 나른한 오후, 조금은 조급해진 마음으로 절마당을 나선다. 마당 한 켠에 장승처럼 서 있는 게시판
에는 한지에 정성스레 옮긴 글 하나가 눈에 띈다.
우리는 살면서 숱한 인연을 맺는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인연의 사슬에서 기쁨과 슬픔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만나지 말았어야 할, 맺지 말았어야 할 인연은 없었는가....
귀한 인연이기를....
- 법정 스님 -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 있게 말 할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반야교와 명옹대(明翁臺)
절마당을 나서 반야교를 건너기 직전에 다리 아래를 바라보았다. 처음 절로 들어오면서 눈에 띈 다리 아래
의 너럭바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나무로 기둥을 하고 너댓줄의 노끈을 묶어 바위 주위로 울타리를 둘러
놓았다.
일종의 안전휀스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만든 것 같았다. 밑으로 내려가 골짜기의 수려한 경치와 물소리를
벗삼으며 일탈이 주는 혼자만의 즐거움을 잠시 누렸다. 너럭바위의 가운데를 보니 '明翁臺(명옹대)'라는 글
씨가 음각되어 있다. 밝은 노인이 있는 곳....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인 이곳에서 밝은 빛과 맑은 물로 몸과 마음이 청정해진 노인이 있는 곳이라는 뜻
인가.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내원사의 옛 이름인 덕산사(德山寺)의 수맥이 더 이상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 장수가 들어다 막아 놓았다고 해 장수바위라고도 불린단다. '명옹대'글씨는 남명(南冥) 조식선생
과 뜻을 같이하고 교육에 힘쓴 정홍(鄭弘)의 글씨라고 한다. 그의 글씨가 맞다면 글자의 마모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근세에 새겼음이 분명하다.
반야교를 지나니 흐렸던 하늘이 환해졌다. 귓전에는 물소리만 아득히 들려오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다.
비로자나불의 광명원대함이 내원사 골골이 비춰지기를 기원하면서...
A Festival In The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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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고맙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
지리산 내원사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가람이네요,
고맙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한번 곡 가보고싶은곳입니다..()
산청쪽에 있는 사찰인가 봅니다.
기왕이면 조금 더 위치를 상세하게 언급해 주셨으면 좋았을걸요.
고적하니 좋은 절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