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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옥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靑錄 최경식
삼국시대 문학에 관한 고찰
주최: 낙동강문인협회
주관: 낙동강 문학 연구소
소장 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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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문학에 관한 고찰* 발표자 청록 최경식
-서 론-
고대에서 삼국시대 문학이 현대에 까지 미친 영향에 대하여 찾아보았다.
고대의 문학은 우리 문학이 태동·형성된 시기이며
고대의 우리 조상들은 다른 원시 민족과 마찬가지로 음악, 무용, 시가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시종합예술을 즐겼다는 사실이 여러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오월제, 시월제 등이 고대 중국 측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형식은 비록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추수 감사제를 지내는 형식이지만 이 제천의식이란 것이 브라질의 리오축제 비슷한 것이며
몇 날을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축제이며
이러한 종합예술은 인간 생활이 복잡해지고 생활이 분화되면서 음악·무용· 시가 형태로 분리되고, 이 시가는 다시 신화와 전설이 주가 되는 서사 문학(설화)과, 축도와 기원을 내용으로 하는 서정시로 분화되었던 것이며
설화로는 건국 신화이면서 동시에 씨족 신화인 단군 해모수 금와왕 박혁거세 수로왕등의 신화가 있었다.
고대의 시가는 대체로 집단 창작의 흔적을 보여주었으며
고대 가요인 (구지가)가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집단적· 서사적이던 원시 종합 예술의 한 부분이었던 서정 문학적 요소가 분화하여 제요(祭謠 : 제사 지낼 때 부르는 노래)나 노동요 따위의 집단적 성격의 시가 문학으로 발전하다가 차츰 개인적 성격의 서정시로 발전되었으며
또, 한자가 일찍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삼국 시대에는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기도 하였고 서사 문학에서 점차 서정 문학으로 발달한 계기다.
고대문학이 우리말 문학시대이고 중세문학은 한문학을 상층의 공식적인 문학으로 삼고우리말 문학은 기층문화로 발전하도록 내버려둔 시대의 문학이며 중국에서 다듬어진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 문어와 인도에서 생긴 불교를 채택하면서 문화적 보편주의를 구현 했다는 성격이며
설화는 서사 문학의 원류가 되었고, 고대 가요는 서정 문학의 원형이 되었고
고구려는 용감한 기상이 반영된 웅혼한 서사 문학을, 백제와 신라는 온화한 서정 문학을 꽃 피웠고
신라 시대에 형성된 향가는 향찰로 기록된 최초의 정형 시었다.
[본론] 삼국시대 문학 -
삼국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한문을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적 체제를 정비하였고
이 중 한문 수용이 선결 과제였고 불교는 일반 백성들까지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명분론을 담당하였다.
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차별을 제도화하고 국가조직을 유지. 집행하기
위해 유교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한문으로 문장을 쓰는 능력이 우선 필요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건국 서사시를 기록하게 되어 비로소 기록 문학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국사 편찬에 종사한 사람을 태학박사, 또는 박사라고 했고
신라에서는 문사라고 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그 직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으며 후에 신라에서는
이들이 고급 문학을 담당하게 되어 고래(古來)로부터 이어온 문학 담당층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고구려 문학-
고구려는 한국에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다.
372년(소수림왕)북중국 전진에서 부견왕 사신과 승려인 순도를 보내면서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으며 고구려 불교는 광개토왕에 이르면서 크게 융성하여 평양에9개의 절이 세워 졌고 지방에도 많은 절이 생겼다.
지배 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상층의 문화와 하층의 문화가 분리되었다.
상층의 문화로 악(樂)이 생겼고 시(詩), 가(歌),무(舞)의 종합적인 공연이면서 통치 체제를 상징하고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며, 밖으로 문화 수준을 드러내고 안으로 백성을 감복하게 하는 것으로 무악(舞樂)과 가락(歌樂)으로 구분 되었으며 시를 노래로 불렸다.
실연의 슬픔을 노래한 유리왕의 황조가 있었고 명주는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 노래다.
-백제 문학-
한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가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로 들어왔으며 백제는 낯선 외국의 승려를 크게 환영했다. 이 점에서 불교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엿보인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온 이듬해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하였고, 552년(성왕 30)에는 일본에 백제불교를 전하였으며, 30대 무왕 때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미륵사(彌勒寺)라는 웅대한 절을 세워 백제의 불교문화를 꽃피웠으며 지금도 익산의 그 절터에는 한국 최고·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의 음악은 일본과의 교류에서는 뚜렷이 나타나지만 다른 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무등산(無等山)은 그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한 노래이고, 지리산(智異山)은 백제왕의 폭정을 규탄한 노래이다.
정읍(井邑)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정읍사(井邑詞)라는 제목으로 노랫말이 남아 있다.
-신라 문학-
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지리적 조건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일어나는 국제정세 동향과 새로운 문화추세 등에 대해 어두웠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오는 불교문화의 새 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를 전하려고 들어왔던 고구려의 고승 정방(正方)과 멸구자가 희생된 사실이 있었으며, 진흥왕대에 들어서면서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 창건했고 승니(僧尼)의 양성과 구법유학 지원, 불사리(佛舍利)와 불상의 조성 및 승통제(僧統制) 마련, 국선화랑(國仙花郞)의 단체 설치 등 불교문화를 진흥시켰다. 이후의 왕들도 불교문화의 보호와 진흥에 힘썼으며
유리왕 5년에 지어진 도솔가는 가악(歌樂)의 시작이 되었는데,
이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자는 주술, 또는 기원을 곁들이면서 국가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회소곡(會蘇曲)은 여자들의 길쌈 경쟁에서 불려진 노래다.
본래 악(樂)은 무(舞), 곡(曲), 가(歌)를 포괄한 개념이었으나 뒤에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눌지왕이 지은 우식곡(憂息曲)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아우가 귀국하자 잔치를 베풀어 지은 것이다.
신라의 궁중 예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풍부해졌고 우륵은 가야금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개인감정을 담아서 부른 것이 많았다.
-그 시대에 지어진 향가, 사뇌가란-
향가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유력한 주장이 중국의 노래에 대한 우리말 노래를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우리말 노래를 표기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서 표기된 신라의 노래를 말하는 것이며'사뇌가(詞腦歌)', '사내가', '도솔가' 등의 여러 명칭으로 쓰였으며 향가의 완성 형식인 10구체의 향가를 특히 '사뇌가'라 하였고
신라 26대 '진평왕조' 전후부터 시작되었으며, 12세기 정도(고려 광종까지)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 수 등 총 25수가 전해진다. 진성여왕 2년,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이 지었다는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월명사와 충담사 -
월명사(月明師)는 도솔가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었으며
도솔가는 경덕왕 때, 정치적인 위기를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대응으로 타개하고자하는 왕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두 줄 네 토막 형식이다.
유리왕 때에도 도솔가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도솔가'는 노래 갈래 이름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노래이다.
월명사는 화랑이 밀려나는 시대에 태어나 길거리를 방황했고, 고독한 시인으로 미타를 찾아 피안을 희구하는 생각도 가졌으며, 개인의 노래를 지어 내면적인 정서를 토로하기도 하였고 충담사(忠談師)는 안민가(安民歌)와 찬기파랑가를 지었으며
안민가는 경덕왕의 요청에 따라 지은 것으로 도솔가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노래이나, 보다 정치 상황과 밀착된 구체성을 갖는다.
불교 신앙의 노래
원왕생가(願往生歌)는 광덕(廣德)이 지은 노래로 종노릇을 하는 천한 사람도 불도를 닦으면 관음보살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는 승려가 만들어 놓은 기도문을 5살 된 희명(希明)으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그 아이가 작자인 것처럼 알려진 노래이다.
우적가(遇賊歌)는 승려 시인인 영재(永才)가 지은 것으로 이 때에 들어 사뇌가는 하층민에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신라의 다섯 가지 놀이
최치원(崔致遠)의 시 신라아영오수(鄕樂雜영五首)에 흔히 오기(五伎)라고 부르는 다섯 놀이가 나타나 있다.
금환(金丸)은 금방울을 굴리는 곡예로 직업적 재인이 숙달된 재주를 자랑했고
월전은 일종의 연극으로 난쟁이나 꼽추, 선비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고 대면(大面)은 금빛 가면을 쓰고 우아한 가락에 느린 춤을 추며 귀신을 쫓는 놀이며 속독은 탈을 쓰고 춘 춤으로 추측되며 산예는 사자춤이다.
이 다섯 가지는 오늘날의 오광대와 같이 다섯 과장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공연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사와 문학사-
고대적인 지기 중심주의에서중세적인 보편주의로 이행하는 데에는 불교 문학이 가장 긴요한 것 이였다.
건국 서사시의 단계를 넘어선 시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불경의 전례에 의해 삼국의 사상적 수준이나 표현 능력이 전례 없이 향상되었으며 고구려가 제일 먼저 받아서 신라에 한 동안불교를 가르치고 백제 불교는 번역과 저슬을 독자적으로 했다는 내용을 보아 고구려 못지않았고 신라는 늦게 받아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다. 불교 문학이 현대 문학에 영향이 크다고 본다.
통일신라는: 백제. 고구려 멸망시키고 민족적 불교문화에 주력했고
고려는: 개국 초부터 봉불정책에 따라 팔관회를 베풀어 행사했고 고승 예우했다
삼국시대 특징은: 교육기관 설립. 한자 사용. 역사 편찬. 과학기술발달. 삼국미술의 특징 등이 있다.
- 결 론 -
어느 나라의 문학이든 문학 속에는 그 민족이 살아온 내력과 그 민족의
심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으며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을 알고 싶으면 그 나라의 문학작품을 읽어 보면 되는
것이며 그 나라 사람들의 심성, 꿈, 현실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우리는 그 나라에 가보지 않고도 그들의 거의 모든 것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국문학에도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쌓아올린 사상, 감정, 역사, 문화, 생활상 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래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민족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 문학에서 찾기 힘든 우리 문학만의 고유한 특질로 인정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민족의 성질이 원래 고정된 질서(형식)에 얽매이려고 하지 않고 자유스러운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점을 느낄 수 있으며 예를 들어 봉산 탈춤의 춤사위라든가.
어느 나라의 춤도 그렇게 활달한 것 없으며 TV에서 택견 하는 것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나라 무술이 그렇게 헐렁헐렁 능청능청하면서 힘이 있는 것이 없으며 또 고구려 무용총의 사신도에 있는[태권도의 품새 동작]
어느 나라의 그림이 그토록 호호 탕탕하게 그려진 것은 없다.
바로 우리만의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점이다.
우리 문학에서도 이러한 성질이 그대로 나타나 고정된 형태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자유스럽게, 좀더 활발하고 활달하게 자꾸 새로운 형식으로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우리의 삼국시대 역사적 부침에서 그 시대의 문학이 오늘의 문학을 성장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문화가 살아 있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편안해 지며 문학은 함께 어울림이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주는 것이다. 꽃이 떨어져도 향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시인은 세월에 묻혀도 글은 남아 있으며 조금 좋다고 철 따라가지 말고 자만하지 말며 겸손하며 꿈을 가지고 획을 긋는 멋진 시인의 탑을 쌓는 낙동강문학의 시인으로 남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화이팅 합시다.
참조[국어교실 국문학 세계사 역사학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