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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0-16 /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12) [목표를 향한 달음질]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께서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내게 바라는 사람이 될 그날을 향해서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13)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아직 나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는 데 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14) 목적지까지 달려서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상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일을 바탕으로 하여 내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상을 주시려고 나를 하늘로 부르고 계십니다. 1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을 달리하는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16)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됐든지간에 이제는 같은 원칙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바울은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하기를 소원합니다. 자신이 온전히 이루었다 여기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푯대를 향해 하나님의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진 인생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10-11)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고 밝혔는데(8), 10절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게 된 그는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본받아,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했습니다(갈 5:24).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갈 2:20; 엡 2:1-5).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숱한 고난과 역경을 체험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깊이 알고자 했습니다.
푯대를 향해 좇아감(12-16)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열심과 헌신은 매우 간절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관하여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쫓아가서 잡으려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여 자신이 완전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가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의미는 그분의 영광을 경험하여 그분께 완전하게 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자기 삶의 푯대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곧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오직 한 가지 일, 곧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존귀하게 하는 일만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푯대요 그것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내 삶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섬기는 일과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고자 원하지만 하나님은 작은 일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그러한 행동들을 예배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의 뜻을 늘 삶 속에서 새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달음질하며 사는 삶
빌 3:10-14 / 인명진 목사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 했습니다. 쉬운 성경에는 힘껏 달리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려간다, 힘껏 달려간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발자국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좁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달려간다, 쫓아간다 하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의 감옥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 모르지만 제가 옛날에 있었던 감옥은 0.7평으로 바로 누울 수조차 없어서 비스듬히 누워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달리기를 합니까? 세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는 곳이 감옥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좁은 감옥에 갇혀서 나는 지금 힘껏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좁은 감방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을 가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를 가두고 꼼짝 못하게 했던 감방의 벽도, 굳게 닫힌 철창문도 그를 가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현실적인 장벽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달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더 말할 것도 없이 바울 안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육신을 꼼짝 못하게 했던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그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을 넘어서서 달려갈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9-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 우리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조건과 제약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 옷에 매이고 돈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돈에 매여서 살고, 어떤 집에서 사는가 하는 집에 매여서 어떤 차를 타는가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현실적인 장벽에 얽매여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현실적 장벽을 뛰어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가 좁은 감방에 갇혀 있었지만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았습니다.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달려가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 그런 모든 세상의 조건이 얽매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와 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서 달려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든 세상의 일들에 얽매어 뒤뚱뒤뚱 다리를 질질 끌며 살아가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우리들은 모든 것에 얽매여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좁은 감옥에서 바울은 달려가는 삶이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의 삶이어야 합니다. 근심 때문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돈 때문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저런 조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돈 때문에 매여서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워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넘어서는 달려가는 인생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세상의 조건 가난이나 실패나 무능력이나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사는 삶이 예수를 믿는 삶입니다. 내가 지닌 세상적인 여러 조건들이 나를 얽매이지 않는 삶이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로 무엇을 향하여 그렇게 달려간 것입니까? 14절에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고 했고 12절 말씀에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달려간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간 것입니다. 우리가 축구 경기를 할 때도 그냥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골대를 향해서 찹니다. 분명한 목적 골문을 향하여 골을 차는 것이 축구입니다. 아무렇게나 공을 찬다고 하면 백전백패입니다. 하기야 자살골도 있습니다. 자살골을 넣은 선수는 평생의 불명예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도 자살골을 넣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망하는 곳에다 골을 차는 자살골을 넣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년도 며칠 남지 않았지만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분주하고 바쁜 나날을 살았습니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벌써 12월 1년이 다 지났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무엇을 위해 어디로 그렇게 열심히 달려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바쁘게 달려온 것입니까? 혹시 자살골을 넣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것은 아닙니까? 목적 없이 달려간 사람은 자살골을 넣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말을 합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관 3,40대에 CEO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생은 100m달리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빨리 달린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 경기도 아닙니다. 인생의 성공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짧게 살아도 그럴듯한 목적, 영원히 가치가 있는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오래 살아도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역사에서 보는 대로 100세 살았다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이름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짧게 살아도 제대로 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산 사람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살았던 짧게 살았던 목적을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주위에 생각밖에 목적없이 인생을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막상 당신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질문을 하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목표,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잘 공부시켜서 출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업의 성공이나 물질을 인생의 목표로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출세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창피하다는 것을 부끄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되돌아보면 알게 됩니다. 사업의 성공, 아이들의 교육, 물질이나 출세를 인생의 목표로 살았던 사람은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어디에 내놓을 만한 목적도 없이 살다가 죽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며 남겨놓은 것이 무엇인가 를 생각할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는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을 보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더라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았는가에 그 사람의 인생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있는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인생의 목적을 목표로 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것 자체로 인생을 실패한 사람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제 인생이 성공할 것 같습니까? 실패할 것 같습니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제대로 가진 사람은 결과에 상관없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목적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고 열심히 살아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것 자체로 실패한 사람이고 제대로 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것 자체로 이미 성공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내 인생의 목적인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적을 가지는 순간 여러분의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인생의 목적이 어떻게 내 인생의 목적이 되었는가 하는 과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웬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정해준 대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이 정해준 대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간혹 아내에게 꼼짝 못하고 끌려다니고 아내가 정해준 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 부모들이 자녀들의 인생의 목적을 정해줍니다. 자식의 인생의 목적을 부모가 정하는 것은 자식의 장래를 망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자기가 정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정해준 것도 안 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만이 진정한 인생의 목표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해주신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이 정한 인생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잡아가는 것이 사도 바울이 스스로 정한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사도 바울의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인생의 목표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가 정해준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생의 목표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 바닷가에서 고기잡으며 지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목표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정한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평생 동안을 그 목표를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간 것입니다.
사실 지금 로마에서 감옥살이를 하는데 안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간다고 하니 에베소서의 장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렸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고 로마로 가게 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이기 때문에 죽음의 유혹이 있지만 인생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 것입니다.
모세나 베드로나 바울은 자신이 세운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평생을 통해 하나님이 세워주신 목적을 향하여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인생행적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 영화를 보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표를 목표로 삼고 사는 순간 결과와 관계없이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실패한 삶일지 모르지만 영원한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누가 베드로를 바울을, 모세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영원한 인생의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정한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목적으로 삼고 달려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목표를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하루를 살아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성공한 인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를 다른 사람이 정해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생의 목표를 목적으로 삼고 살 때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결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 지내온 과정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성공여부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정한 목표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향하 달려가는 삶은 성공한 삶입니다. 물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때 장애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표대로 살아갈 때 돈을 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성공하지 못할 지도 모르고 내 시간을 내놓을지도 모르고 내 건강을 돌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내가 가족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목표대로 살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목표가 있어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현실적인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건강도 허락하지 않고 가족하고 지내는 시간도 없어지고 육신이 지쳐 병들고 취미생활 못할 것 같은 현실적 제약 때문에 주저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가둔 감옥의 벽을 넘어서 목표를 향해 날아가듯이 주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제약과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서야 달려갈 수 있습니다. 내가 정한 인생의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상급, 베드로에게 주셨던 상급, 사도 바울에게 주셨던 상급을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 후서에서 자신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한 면류관을 받을 일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귀한 인생의 삶 주님께서 상을 주시기에 아깝지 않은 귀한 성공하는 인생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신 목적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빌 3:10-16 / 이정선 목사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서도 ‘면장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는 것이 병이다’ 또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에도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하셨습니다. 모르는 게 약 같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지,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른다는 것, 즉 무지하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커다란 해악입니다. 엊그제 수능시험이 있었는데, 80살 되신 할머니가 시험을 보러 왔습니다. 못 배운 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그랬겠어요? 그 할머니가 꼭 대학을 가려고 수능시험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능시험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배우지 못했다는 불행에 항거하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알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믿는 것을 맹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성과 지성을 가진 인간이 입력된 대로 작동하는 기계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에 근거해서 믿는 지적이고 의지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알면 바로 믿게 되고, 잘못 알면 잘못 믿게 됩니다. 우상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신인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믿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믿음이 특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이 구원 얻을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잘못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데 있어서 지식이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가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물론 우리가 다 신학박사가 되지는 못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신자들이 다 신학박사가 되면 가장 좋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학박사는 못 된다 해도 어느 정도 기본은 되어야지요. 기본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아주 기초적인 것만 알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더 높은 수준의 지식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식의 진보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쌓았던 명성이나 지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빌 3:8). 그래서 이전에 유익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올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적 사고에서 안다는 것은 피상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런 문화권에서는 한두 번 만난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아무나 안다고 하면 큰일 납니다. 깊은 관계에 들어가야 비로소 안다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이 안다고 했을 때는 대충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하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아무리 잘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이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한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나를 부활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권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나도 부활하게 된다는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많은 경우에 신자들의 믿음이 피상적인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긴 있는데, 몸 밖에 있어요. 몸 밖에 있으니까 그 지식에 따른 삶의 실천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수는 많지만 사회에서 말빨이 서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말은 잘하는데 행동은 딴판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이런 게 나오더군요. 한국에는 수백 명, 수천 명 모이는 큰 교회들이 지역마다 하나씩은 있은데, 예배시간만 되면 그 일대가 주차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큰 도로까지도 교통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예배드리러 온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예배드리러 가야 하는데 주차할 곳이 없으니 불법으로라도 주차를 하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번호판을 가려놓고 들어가기도 하더군요. 예배드리러 온 사람의 차 때문에 나갈 수 없게 된 차의 운전자가 자기 차를 막고 있는 차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겁니다. 차를 좀 빼달라고 하기 위해서지요. 그렇지만 예배중인데 전화를 받을 리가 있나요? 그러니 꼼짝없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뉴스 화면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의무를 앞세워 공중도덕을 무시하는 것이 보기 안 좋다고요. 손봉호 박사는 말하기를 ‘고등 종교는 이기심과 세속적 가치의 극복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회가 대형화와 성공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어요. 그러니 종교의 신뢰도에 있어서 기독교가 불교보다 훨씬 낮게 나오지요. 참 창피한 노릇입니다.
기독교가 신뢰를 얻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올바른 생각이 집단이기주의라는 왜곡된 형태로 구체화될 때가 많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편을 드는 거예요. 썩 내키지는 않는 예입니다만, 정치하는 사람들을 지지할 때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성실하게 잘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 정치인이 기독교적 믿음과 가치에 입각해서 국민들을 섬기고 국가와 사회에 정의를 구현하려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 지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고 행세는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부도덕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오히려 훼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런 사람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개념이 없더군요. 기독교인이라고만 하면 그가 비리를 저질렀든지 무슨 꼼수를 쓰든지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지 무조건 지지하면서,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경건하게 미사에 참여하고 나가서 총질하는 마피아들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라고 지지하면 되겠냐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율법으로 먹고 살면서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파괴하는 바리새인들을 하나님의 적 1호로 규정하셨습니다. 도덕적인 가치판단도 없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편 들어주는 것은 참 한심한 일입니다. 최근 들어 안티기독교 세력이 준동하게 된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피상적이고 몸 밖에만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어느 정도까지 나아가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데까지입니다.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시고 나는 구원과 영광만 얻겠습니다’ 하는 것은 염치가 없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 속에 들어가야 그 고난으로 인한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나도 똑같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의미와 성격을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그에 합당한 삶이 뒤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나중에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의 제물이 됩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일이 문자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하여 또한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회피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면서라도 주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신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했던 것은 부활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의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했습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말인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고난도, 어떠한 수고도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부활에 이른다는 것,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내주고라도 얻어야 할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그것을 이미 얻었다거나 온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아직 경주가 끝나지 않은 달리기 선수와 같습니다. 선수가 아무리 빨리 잘 달려도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상을 주는 법은 없습니다. 경주에 참가하고 있는 선수는 1등으로 달리든지 꼴찌로 달리든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야 합니다. 물론 1등을 목표로 하는 경주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실력이 뛰어난 선수는 대충 달려도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삶으로 참가해야 하는 경주는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되어 구원 받은 성도는 죽는 날까지, 즉 믿음의 경주를 마치는 그날까지 날마다 성장하며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고 더 많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그렇지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 즉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성화는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성취를 했고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이제 됐으니 그만 해도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가는 순간까지 우리의 성화는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앞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화의 삶을 살다가 도달하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 가지고 사는 거예요.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뻐하라고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은 성화를 완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될 수 없다고 했지요.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것을 깨닫고 이해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신자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거예요.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어떤 사람은 아직 교회의 문화가 어색하기도 합니다. 또 각자의 성품이나 배경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빌 2:2)고 권면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의견차이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고 충돌해서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는 모두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로서 각자의 성숙도는 서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여 영적 성숙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미숙하냐고 책망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하기까지 기다리며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분량이 많은 사람이 아직 믿음 적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뱁새가 황새 흉내 내다가 가랑이 찢어져서도 안 될 것이고, 황새가 뱁새처럼 걷다가 넘어져도 안 될 것입니다. 새로 믿은 사람이 눈에 보이게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목사로서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래 믿은 사람이 새로 믿은 사람보다도 더 못하게 처신하는 것을 보면 실망스럽습니다. 영적인 성숙도가 각자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고 한 마음을 품어 함께 주를 섬기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깨지고 상한다면, 그것은 교회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신자, 오늘 우리가 그런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각자의 분량대로 충성하고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 바로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함께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가는 꿈을 실현해가도록 합시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10-16 / 최지승 목사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한 일, 잘못한 일, 즐거움과 아픈 상처, 아쉬운 일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나누어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다시 시작하며, 금년을 반성하고 내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부족했고 실패한 일들이 있을지라도 새마음과 결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세월의 매듭을 잘 엮어가는 송년주일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말씀은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귀한 지혜를 선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누구보다 자랑할 것들이 많고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혈통적으로는 베냐민 지파 출생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학문적으로는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히브리 사상은 물론 헬라사상에도 능통한 학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칭함을 받는 경건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여호와 신앙에 대하여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까지 바울은 그가 열정적으로 신뢰하고 자부하던 바리새파의 경건생활과 그의 신앙을 수호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기 위해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최전방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회심한 이후로 그가 믿는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열정적으로 전파하는 신학자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 속에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몇권의 책으로 써도 부족할만큼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혈통과 가문, 종교적 열정, 탁월한 학문과 사회적 지위는 충분히 자랑할만했고 또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큼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날로부터 그의 인생은 before와 after 즉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땅의 것으로부터 영원한 하늘에 둔 바울은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게 유익하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만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임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세상에서 자랑하고 가치있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얻은 새생명,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얻은 생명과 부활의 소망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확실한 자랑거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달은 중요한 진리는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오늘의 나를 만들어왔다고 자부했었습니다. 나의 혈통, 지혜와 지적인 활동, 나의 열심이 나를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성공적인 인생의 대열에 서도록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수를 만난 후 그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런 육체적, 인간적인 조건이 나를 의로운 인간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한량없는 은혜, 값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가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하여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완성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전에는 솔직히 말해 늘 그런 태도로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고백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아직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여러분에게 한 가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내가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 푯대를 향해 힘껏 달리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목표지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게 주실 그 상을 위해 오늘도 달리는 중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앞날을 위한 최선의 준비입니다. 내 노력과 성장과 성취에 만족하며 자랑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뭔가 이뤄보려고 애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쓸쓸한 연말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해 지나친 자긍심에 빠지거나 또는 이루지 못한 패배의 상처에 붙잡혀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장애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만일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 하였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말씀했습니다. 성취감이든 패배감이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부지런히 달려가기 바랍니다. 상처가 상처로만 남으면 생명을 위협하고 사망에 이르지만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면 더 나은 건강을 위한 활력이 됩니다. 혹시라도 지난 날의 상처 때문에 아직도 아파하며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구하며 오늘 바로 치유의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연말이 되면서 고국과 해외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이 단톡방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와 축복의 글들을 주고 받는 중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느 목사님이 동료 목회자들에게 보내온 따뜻한 글을 읽고 위로가 되어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해 드립니다.
[찰스 브래슬린 플러드(Charles Bracelen Flood)가 쓴 『리의 지난 날들』이라는 책에 보면, 남북전쟁 직후 로버트 리라는 사람이 켄터키주에 사는 한 여인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리의 방문을 받은 여인은 자기 집 앞마당으로 리를 데리고 가서 폭격에 맞아 반쯤 타버린 흉한 몰골의 고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아끼던 나무가 북군 병사가 쏜 대포에 맞아 그렇게 되었다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녀는 리가 북군 병사를 욕하든지 나무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리는 단호한 어조로 “부인, 나무의 모습이 보기 흉합니다. 빨리 깔끔하게 잘라내 버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은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는 리의 말 속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아픔에 묶여 아직 접해 보지도 않은 미래의 좋은 날들까지 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묻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소망을 품고 새 출발하라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루벰 알부즈(Rubem Alve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망을 품는다는 것은 미래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품는다는 것은 그 가락에 맞춰 춤추는 것이다.”
사업에 실패했든, 가정이 두 조각났든, 질병의 위협이 있든, 자녀에게 문제가 있든, 일상이 평온하든, 아무 일이 없든,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 먹기에 따라 새출발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기에 우리는 소망이라는 그림을 그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매여 오지도 않는 미래마저 힘들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1,13)]
이 말씀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소망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을 포로가 되어 지내겠지만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돌보시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며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읍시다.
이 말씀이 실패하고 낙심에 빠진 개인들에게 소망의 약속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더 크게는 전체 한국교회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치료의 약속으로 들려지기 바랍니다. 교회의 부흥을 꿈꾸지만 도리어 허약한 모습만 보였고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며 냉소와 비판의 홍수를 온 몸으로 받아야만 했던 우리의 지난 일년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커다란 상처와 자존심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 중에도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이런 상처들을 통해 더 강건하고 겸손한 교회와 기독인들로 만들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성장과 부흥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픔과 고통스런 치유과정을 통해 기독인들이 자신들의 헛점을 발견하여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며 교회의 내실이 튼튼하게 다져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관솔이라고도 부르는 소나무 가지에 박힌 옹이는 나무의 상처를 치유하는 송진이 덩어리져 만들어진 단단한 부분입니다. 옹이가 박힌 소나무는 목수의 대패날과 톱날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목재로서는 쓸모가 없어 목수들에게 천대를 받습니다. 하지만 원목의 자연스런 무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옹이가 만들어내는 무늬는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 소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깊고 은은한 향은 소나무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만들어 낸 바로 이런 옹이에서 나옵니다.
거친 삶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치유의 과정을 통해 삶의 여유를 회복하면 그 상처는 단단하게 굳은 소나무의 옹이처럼 오히려 인생의 깊은 향을 내는 상급이 됩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즈음에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체험하면서 여러분이 그간 겪었던 여러 아픔들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변화되어 나타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겨 이웃에게 위로와 기쁨을 나눠주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몸의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결승점을 향해 치달리는 육상선수들의 모습을 TV 스크린에서 느린 동작으로 보신 적이 있지요? 0.1초를 단축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와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몸을 던진 후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선수들은 비록 1등은 못했을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 달리는 바울은 경기장에서 온 힘을 다해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육상 선수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직 결승점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곧 다다르게 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아 살기를 힘썼던 성숙한 그리스도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 마쳐갈 때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하며 시상대 앞으로 부름을 받아 주께로부터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며 그 순간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또 한 번의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목표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푯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며 최후에 주께로부터 받을 영원한 상급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힘써 달려온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지난 해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 살았는지 돌아보는 아침이 되기 바랍니다.
바울의 말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립시다. 성공과 실패도, 기쁨과 슬픔도, 자랑거리와 부끄러움도 뒤로 넘기고 이제부터 다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힘써 달려가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히12:12) 하셨습니다. 웃음기 잃었던 얼굴을 밝게 펴고, 지쳐서 축 처진 어깨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연약해진 기도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 안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길 빕니다. 모든 소망을 주께 두고 주를 향해 달려가오니 주여 나를 붙잡아 주소서 하는 믿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한 일, 잘못한 일, 즐거움과 아픈 상처, 아쉬운 일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나누어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다시 시작하며, 금년을 반성하고 내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부족했고 실패한 일들이 있을지라도 새마음과 결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세월의 매듭을 잘 엮어가는 송년주일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말씀은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귀한 지혜를 선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 누구보다 자랑할 것들이 많고 육체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혈통적으로는 베냐민 지파 출생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학문적으로는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히브리 사상은 물론 헬라사상에도 능통한 학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칭함을 받는 경건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여호와 신앙에 대하여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까지 바울은 그가 열정적으로 신뢰하고 자부하던 바리새파의 경건생활과 그의 신앙을 수호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기 위해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최전방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회심한 이후로 그가 믿는 기독교의 십자가 복음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열정적으로 전파하는 신학자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 속에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몇권의 책으로 써도 부족할만큼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혈통과 가문, 종교적 열정, 탁월한 학문과 사회적 지위는 충분히 자랑할만했고 또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큼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날로부터 그의 인생은 before와 after 즉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땅의 것으로부터 영원한 하늘에 둔 바울은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게 유익하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후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만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임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세상에서 자랑하고 가치있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얻은 새생명,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얻은 생명과 부활의 소망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확실한 자랑거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달은 중요한 진리는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열심과 의로움으로 오늘의 나를 만들어왔다고 자부했었습니다. 나의 혈통, 지혜와 지적인 활동, 나의 열심이 나를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성공적인 인생의 대열에 서도록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수를 만난 후 그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런 육체적, 인간적인 조건이 나를 의로운 인간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한량없는 은혜, 값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가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하여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완성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전에는 솔직히 말해 늘 그런 태도로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고백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아직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여러분에게 한 가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내가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 푯대를 향해 힘껏 달리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목표지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게 주실 그 상을 위해 오늘도 달리는 중입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앞날을 위한 최선의 준비입니다. 내 노력과 성장과 성취에 만족하며 자랑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뭔가 이뤄보려고 애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 쓸쓸한 연말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해 지나친 자긍심에 빠지거나 또는 이루지 못한 패배의 상처에 붙잡혀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장애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만일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 하였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말씀했습니다. 성취감이든 패배감이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부지런히 달려가기 바랍니다. 상처가 상처로만 남으면 생명을 위협하고 사망에 이르지만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면 더 나은 건강을 위한 활력이 됩니다. 혹시라도 지난 날의 상처 때문에 아직도 아파하며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구하며 오늘 바로 치유의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연말이 되면서 고국과 해외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이 단톡방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와 축복의 글들을 주고 받는 중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느 목사님이 동료 목회자들에게 보내온 따뜻한 글을 읽고 위로가 되어 우리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해 드립니다.
[찰스 브래슬린 플러드(Charles Bracelen Flood)가 쓴 『리의 지난 날들』이라는 책에 보면, 남북전쟁 직후 로버트 리라는 사람이 켄터키주에 사는 한 여인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리의 방문을 받은 여인은 자기 집 앞마당으로 리를 데리고 가서 폭격에 맞아 반쯤 타버린 흉한 몰골의 고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아끼던 나무가 북군 병사가 쏜 대포에 맞아 그렇게 되었다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녀는 리가 북군 병사를 욕하든지 나무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리는 단호한 어조로 “부인, 나무의 모습이 보기 흉합니다. 빨리 깔끔하게 잘라내 버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은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는 리의 말 속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아픔에 묶여 아직 접해 보지도 않은 미래의 좋은 날들까지 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묻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소망을 품고 새 출발하라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루벰 알부즈(Rubem Alve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망을 품는다는 것은 미래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품는다는 것은 그 가락에 맞춰 춤추는 것이다.”
사업에 실패했든, 가정이 두 조각났든, 질병의 위협이 있든, 자녀에게 문제가 있든, 일상이 평온하든, 아무 일이 없든,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 먹기에 따라 새출발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기에 우리는 소망이라는 그림을 그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매여 오지도 않는 미래마저 힘들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1,13)]
이 말씀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소망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을 포로가 되어 지내겠지만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돌보시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며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읍시다.
이 말씀이 실패하고 낙심에 빠진 개인들에게 소망의 약속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더 크게는 전체 한국교회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치료의 약속으로 들려지기 바랍니다. 교회의 부흥을 꿈꾸지만 도리어 허약한 모습만 보였고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며 냉소와 비판의 홍수를 온 몸으로 받아야만 했던 우리의 지난 일년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커다란 상처와 자존심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 중에도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이런 상처들을 통해 더 강건하고 겸손한 교회와 기독인들로 만들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성장과 부흥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픔과 고통스런 치유과정을 통해 기독인들이 자신들의 헛점을 발견하여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며 교회의 내실이 튼튼하게 다져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관솔이라고도 부르는 소나무 가지에 박힌 옹이는 나무의 상처를 치유하는 송진이 덩어리져 만들어진 단단한 부분입니다. 옹이가 박힌 소나무는 목수의 대패날과 톱날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목재로서는 쓸모가 없어 목수들에게 천대를 받습니다. 하지만 원목의 자연스런 무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옹이가 만들어내는 무늬는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 소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소나무의 깊고 은은한 향은 소나무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만들어 낸 바로 이런 옹이에서 나옵니다.
거친 삶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치유의 과정을 통해 삶의 여유를 회복하면 그 상처는 단단하게 굳은 소나무의 옹이처럼 오히려 인생의 깊은 향을 내는 상급이 됩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즈음에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체험하면서 여러분이 그간 겪었던 여러 아픔들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변화되어 나타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겨 이웃에게 위로와 기쁨을 나눠주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몸의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결승점을 향해 치달리는 육상선수들의 모습을 TV 스크린에서 느린 동작으로 보신 적이 있지요? 0.1초를 단축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와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몸을 던진 후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선수들은 비록 1등은 못했을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 달리는 바울은 경기장에서 온 힘을 다해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육상 선수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직 결승점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곧 다다르게 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아 살기를 힘썼던 성숙한 그리스도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 마쳐갈 때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하며 시상대 앞으로 부름을 받아 주께로부터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며 그 순간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또 한 번의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목표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푯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며 최후에 주께로부터 받을 영원한 상급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힘써 달려온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지난 해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 살았는지 돌아보는 아침이 되기 바랍니다.
바울의 말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립시다. 성공과 실패도, 기쁨과 슬픔도, 자랑거리와 부끄러움도 뒤로 넘기고 이제부터 다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힘써 달려가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히12:12) 하셨습니다. 웃음기 잃었던 얼굴을 밝게 펴고, 지쳐서 축 처진 어깨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연약해진 기도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님 안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길 빕니다. 모든 소망을 주께 두고 주를 향해 달려가오니 주여 나를 붙잡아 주소서 하는 믿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으로 삽시다
빌립보서 3:10-16 / 배의신 목사
오늘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이자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소망인 부활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뿐이라면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내하며 진리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음 구절인 20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즉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름답고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부활한 영의 생명으로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두고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지켜가야 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1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는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마음도 몸도 따라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명언 중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고, 마음이 가는 곳으로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됩니다. 즉 진정으로 부활을 소망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활신앙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 생명의 길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 부활신앙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들어간 첫 성이었으며, 유럽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초청을 받고 유럽에 건너가 최초로 세운 교회였습니다(행 16:11-40). 그 곳에서 얼마의 제자를 얻었지만 박해로 감옥에 갇혔고, 찬송 중에 기적이 일어나서 감옥을 나오기도 했습니다(행 16:16-26). 그 와중에 간수의 온 집안에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는 등 바울에게는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전도 여행 때에도 들렀고, 다른 교회에서는 물질적 원조를 받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은 기꺼이 받았습니다(빌 4:15-18).
이처럼 사도 바울은 친밀한 교제를 하던 빌립보 교회에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 중에는 ‘기뻐하다.’는 단어가 무려 16회나 사용되었고,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내용이 21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내용은 바울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였으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부활신앙입니다.
※ 부활신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14-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은 부활신앙의 근본원인을 말씀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은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면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너도 이제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본문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곧 세상을 따르던 옛 사람의 죽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가사로 된 복음송(1249)을 불러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이 고백처럼 지금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지금 나는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 사람인 나는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이 고백과 함께 우리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완전한 부활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부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가 옛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주셨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간의 죄를 대신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영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의 부활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의 부활을 이루어 영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육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죽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 육신도 부활할 것입니다(고전 15:51-52). 만일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죽음을 보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완전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고전 15:51-52).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 그러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10-12절을 봅시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도 온전한 부활의 삶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 13-16절을 봅시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사도 바울도 자신은 아직 완전한 부활의 삶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부활의 삶을 푯대로 삼고 달려간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도 계속적으로 부활신앙의 삶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이 살아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그 성도에게 ‘아무 곳이나 무덤이 많은 곳에 가서 무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욕도 하고 칭찬도 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성도가 저녁 무렵에 다시 목사님에게 와서는 무덤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성도님이 그 무덤에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니 그들이 화를 내던가요? 그리고 칭찬을 하니 좋아하던가요?” 그러자 성도는 “목사님 그들은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성도에게 “내일은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무 사람이나 잡고 욕을 해보고 오십시오. 그러면 내일은 영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그 성도가 흥분한 상태로 목사님께 왔습니다. 그 성도는 ‘목사님이 아무에게나 욕을 해보라고 해서 욕을 했다가 뺨만 맞았다.’고 하면서 ‘왜 이런 일을 시키느냐?’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사람에게 욕을 하고 칭찬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은 그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하던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을 했다가 맞은 이유는 당연히 그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죽은 사람은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도 반응이 없으며, 어떤 영적인 일에도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며, 자신의 죄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세상의 죄악을 볼 때에 가슴이 쓰린 것은 그 영이 살아있다는 표가 됩니다.”
에스겔 9: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지는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기관 천사에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천사들에게 ‘서기관 천사의 뒤를 따르면서 이마에 표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고 표가 없는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영이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구별됩니다.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게 되며 세상의 죄악을 보면서 탄식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며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일에 반응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20-21절을 봅시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나타내는 삶입니다. 부활절 하루만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365일 매일 매 순간을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신앙의 삶이 그러하지만 특히 부활신앙은 생활 속에서 실천되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뵈올 수 있고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습니다. 이제 매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일에 반응하는 부활신앙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 잡힌 바 되라
빌 3:10-16 / 김광일 목사
‘다이히만씨, 당신은 왜 부자입니까’ (Warum sind Sie reich, Herr Deichmann)’라는 책은 탄광촌 작은 신발 수선집을 유럽 최고의 신발 기업으로 만든 다이히만사 최고경영자 하인츠 호르스트 다이히만(Heinz Horst Deichmann)의 이야기입니다. 다이히만은 독일 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뒤셀도르트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다가 1956년 의사직을 포기하고 경영에만 매진하여 다이히만사를 유럽 최고의 신발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발을 위한 국민차’로 불리는 다이히만사는 고객이 원하는 신발을 최소 이윤만 남기고 공급하는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벌 수 있는 한 최대로 벌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절약해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자’ 라는 목표아래 수많은 지원 사역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인도에 나환자촌을 세워 물질적, 의료적으로 지원하고, 아프리카 탄자니아에는 병원과 학교를 건립해 지역민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과는 사막을 농지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말과 행동’이라는 구호단체를 설립하여 독일은 물론 제3세계의 여러 나라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경영자의 나눔 정신을 이어받은 직원들은 자신의 월급의 일정액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이야기하는 다이히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내게 얼마나 많은 신발을 팔았느냐고 묻지 않으실 겁니다. 그 분은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지, 복음을 전파했는지 물으실 겁니다. 나는 그 일을 할 뿐입니다.” 독일에서 13번째 가는 부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보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주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 사람이 바로 다이히만 (H. H. Deichmann)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쉬지 않고 달려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 역시 달리는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예수에게 잡힌 바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달렸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달려가십니까? 무엇에 잡힌바 되어 살아갑니까? 마치 소가 코를 꿰어 끌려가는 것처럼 억지로 세상풍조에 끌려가고, 사람들에게 끌려가지는 않습니까?바울처럼 예수께 잡힌 바 되기 위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예수께 잡힌 바 되려고 하였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온전을 이루려고
피터 드러커(Peter F. Druker)는 “New Society”라는 저서에서 기업가 정신이 가장 강한나라로 한국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드러커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지배할 때 의도적으로 기업 정신과 리더십을 기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 6·25 전쟁을 통하여 나라가 잿더미가 되었지만, 한국은 잠재되어 있는 기업정신을 살려 세계 경제 강국으로 발돋음하게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드러커는 이병철 회장, 정주영 회장, 김우중 회장을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뽑았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가난이었으며 맨 주먹으로 기업을 일으켜 한국 경제적 기반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 맨손으로 대우그룹을 일으킨 김우중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저서에서 6·25때 대구로 피난을 가서 살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14살 어린 나이로 4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신문팔이를 하였는데 하루에 100부를 팔아야 겨우 끼니를 이을 수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신문을 받아 거리를 돌면서 ‘신문 사세요’ 외치며 한 부씩 팔았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빨리, 많이’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방천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하기 위해 도중에 신문을 사려는 사람이 있어도 팔지 않았습니다. 일일이 거스름돈을 주다 보면 손님을 빼앗길까봐 거스름돈을 하나씩 접어서 준비하였습니다. 더 좋은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더욱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사겠다는 사람들에게 우선 신문을 돌리고 신문 값은 나중에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방천시장에서 신문팔이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100부 이상을 팔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 발상은 훗날에 대우기업을 일으킨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과거를 잊어버리고 온전히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렸던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여기의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와 같은 뜻의 단어가 앞 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또한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같은 뜻의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였습니다. 온전히 얻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잡은 줄로 알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일을 잡으려고 달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온전함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태도를 보십시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소극적으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잘못한 것도 잊어버렸고, 잘한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앞에 있는 것을 잡는 일에 집중한 것입니다. 새로운 각오로, 오직 한 일 즉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예수께 잡힌 바 되어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푯대를 향하려고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에 성공한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형제는 고등학교 중퇴 학력을 가진 평범한 자전거 기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계획하고 노력하여 비행기를 발명하였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들은 일찍이 예수를 영접하고 주일에 일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비행 성공률이 높은 날씨라도 주일에는 비행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술과 담배는 물론, 도박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학벌도 시원찮은 라이트 형제의 실험을 가족 외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꿈꾸고 노력했습니다. 손재주가 비상해 자전거를 수리하고 제작해 벌어들인 돈으로 비행기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밤에는 수학, 물리학, 항공학 공부를 하며 본격적인 비행기 실험을 하던 3년 동안 아예 언덕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비행기를 만들어 균형을 잡지 못하면 다시 만들고, 추락해서 산산조각이 나면 또다시 만드는 등 하루에도 20번 넘게, 석 달 동안 1,000번 넘게 글라이더를 하늘에 띄웠습니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사람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앞으로 천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는 ‘플라이어’라는 이름을 가진 유인 동력 비행기를 처음으로 띄워 3m 높이로 12초 동안에 36m를 날며 비행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에 두 형제는 비행기 제작 회사를 차려 많은 돈을 벌었지만,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롤스로이스 자동차 회사 공동 창업자 롤스(C. S. Rolls)는 이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비웃음을 통한 계속적인 비난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것에 영향 받지 않았다. 대중들의 견해가 돌아서서 일약 유명해졌지만, 그들은 역시 거기에도 영향 받지 않고, 자신의 조용한 방식대로 매일의 작업을 지속했다.” 만약 이들이 현실에 안주하며 세상과 타협하였다면 절대로 비행기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와 같이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 잡힌 믿음으로 푯대를 향해 달려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달려가노라.” 여기의 동사 “달려가노라”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했음을 밝혔습니다. 물론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였으며 확실한 푯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 푯대만 바라보며 달려갔습니다. 그의 믿음은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 달려가는 믿음입니다. 끌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달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발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 성공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빈손으로 왔기에 또한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께 잡힌 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감으로 온전함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상급을 위하려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펴낸 '내한선교사총람'에 의하면 1885년부터 한국을 찾은 외국인 선교사는 90년대 중반까지 총 2,956명이었습니다. 그중 1,529명의 선교사가 광복 이전에 한국 땅을 밟았고 10%는 질병과 사고로 한국에 뼈를 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녀를 잃기도 했고 배우자와 사별하는가 하면 본인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수모를 몸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루비 켄드릭(Lubye R. Kendrick) 선교사의 비문에는 “내게 백 개의 목숨이 있다면 모두 다 조선을 위해 바칠 것이다”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중국도 1900년 발생한 의화단 사건 때 189명의 선교사들과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교했던 선교사 중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에릭 리델(Eric Liddell)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자녀인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육상 4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올림픽의 영광을 뒤로 한 채 그리스도를 위하여 중국에서 20년을 사역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가택연금을 당했고 영양부족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그의 불꽃같은 삶은 영화 '불의 전차'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의 부 때문에 주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도 고난도 상급의 통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예수께 잡힌 바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달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린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며 계속하여 달렸던 것입니다.
당시 올림픽 경기 가운데 달리기 시합이 끝나면 승리한 선수의 이름이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면 시상대에 올라가 황제가 주는 상급인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달려갈 길을 마치면 하나님이 부르시고 상을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위하여 달렸습니다. 위에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발견되어지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1700년대 영국 사회가 타락했을 때 옥스퍼드 대학 기숙사에 키가 160센티도 안 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새벽 4시에 일어나 조용한 곳에서 말씀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매일 그렇게 하자 한 명씩 숫자가 늘었습니다. 숫자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그 모임을 ‘홀리 클럽(Holy Club-거룩한 공동체)’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임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임을 이끌었던 작은 청년을 향해 메소디스트(Methodist)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방법주의자, 원칙주의자’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대로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였습니다. 웨슬리는 그 원칙을 가지고 북미 인디안 선교를 갔지만 3년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원칙주의자에게 성령이 임하자 불같은 전도자가 되었고, 웨슬리를 통해 영국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감리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부족해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께 붙잡힌 바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 달리십니까? 왜 달려야 하는 지 이유를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께 잡힌 바 되어야 합니다. 손봉호 박사는 ‘오늘날의 교회는 주인을 잃어버린 개’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해도, 발로 걷어차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주인이 데리고 나온 개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질과 비판을 받는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을 찾아야 합니다. 주인이신 예수의 손에 잡힌 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달려야 합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온전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감으로 예수께 잡힌 바 된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뒤에 있는 것과 앞에 있는 것
빌 3:10-14 / 崔仁根 牧師
서울 KBS방송국에서 아침에 내 보내는 인기프로 [아침마당]이 있습니다. 거기에 특별 강사가 나와 인생의 성공을 위한 Tip을 가르쳐 주는 한 강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고 또 목소리였는데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강의 내용을 따라가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TV선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남자한테 너무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네... 떡이다, 딱이다!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습니다." 뭐 이런 식의 광고인데 천호식품 김영식회장이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20만원의 돈으로 1년 10개월 만에 22억이라는 엄청난 빚을 다 청산하고 대한민국에서 정직한 식품회사로 대박을 터트린 장본인입니다. 그가 하는 강의의 내용은 매우 평범하였습니다. "성공이 안 되거든 성공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방법입니다. 바로 여기세 이 종도 하나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잘 배우고 본받으면 최소한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이 종이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지금도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원익, 유일곤, 그리고 나 이렇게 늘 1-3등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등치가 제일 큰 유일곤은 꼭 학기말 시험 때면 나를 불러내서 평소에 안 하던 밥도 사주고 같이 놀자고 합니다. 그 꾐에 끌려 저녁 내내 놀다가 온 이 어리석은 종은 꼭 학기말 시험을 망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똑 같이 놀았는데 어떻게 유일곤이는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열을 올리고 살펴보았더니 나와 헤어져 돌아간 그 밤을 온전히 다 세우고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이 종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뒤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것은 본받으라는 김영식회장의 지론과 일치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오늘 한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을 한 번 따라 가보고 그의 장점을 본받아 보려고 합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가 쓴 편지가 곧 성경이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가 벌써 2천년이 지났는데도 그를 모르는 신자는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하고 그가 택하였던 방법이 있다면 오늘 우리들도 본받고 배워서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서 존경 받는 그런 멋들어진 인생과 신앙생활을 오늘 우리들도 배워 가야 하겠습니다. 함께 마음 귀를 모으고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뒤에 있는 것과 앞에 있는 것
먼저 사도 바울이 가진 그 중심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빌 3:12-14 -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정확한 그의 사상이었습니다. 이 짧은 몇 마디에 참으로 오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요 마음의 소중한 결단이요 삶의 목표입니다. 그는 가감 없이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그리고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세상 줄 놓고 주님을 따라가다가 감옥에까지 갇혔고 사도 중의 사도인 놀라운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인품이 "겸손"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그의 인생의 멋들어진 가치를 따라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겸손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그를 본받고 한번뿐인 우리들의 인생을 사도 바울과 같이 멋들어지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겸손히 배워보도록 하십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안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처럼 좋은 방법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자리에 안주하며 변화를 만들어가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제한되어 있는데 고집과 아집에 갇혀 세월만 낭비하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일어나 배우고 결단하는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속사람이 겸손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배우고 닮아가려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본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겸손한 자를 좋아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겸손한 자는 배우고 새롭게 변화를 만들어 내지만 교만한 자는 결코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망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 앞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교만을 넘어 사도 바울과 같이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잠 8:13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 11:2 /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5:25 /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잠 16:5 /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 16:18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8:12 /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이상의 말씀들은 언제나 우리 성도들이 마음에 새겨 두고 경계로 삼고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어떤 길을 따라 우리들에게 임하시게 되는지 길라잡이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흥망성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앞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놓았고 위대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그는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빌3:12-13).
사람이 얼마나 겸손하면 이처럼 위대한 사도가 되어 주님을 따르면서 감옥에까지 들어갔는데도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겸손은 순간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입술에 붙은 말로서 하는 것도 더 더욱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이와 같은 겸손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제자들이 몰려 와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첫째도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니라"고 말입니다.
폴란드의 세계적 천문학자로 지동설을 주장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문에, "주 하나님, 저는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원치 않고, 바울에게 베푸셨던 자비를 원치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십자가상에 함께 못 박힌 오른쪽 강도에게 베푸셨던 긍휼을 원하나이다."라고 쓰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주님 중심적 겸손이며 신앙입니까? 죽는 순간에도 오직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는 자세, 바로 그것이 진정한 겸손일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종은 우리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의 겸손을 이렇게 정의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구하고 이웃들의 유익을 더 생각해 주는 자세."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겸손한 사람이 있어 세계의 매스컴이 칭찬과 박수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러시아의 소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계 올림픽에서 실제로 있었던 아름다운 미담입니다.
미국 일간 USA투데이는 소치 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프린트 준결승에서 안톤 가파로프(러시아)의 스키가 부러지자 캐나다팀의 코치인 저스틴 워즈워스가 도와준 사건을 보도하며 "올림픽에서 단지 메달과 시상대, 기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12일(이하 한국시간) 소개해 주었습니다. 가파로프는 경기 중 크게 넘어져 눈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습니다. 장비를 추스른 그는 상위권에서는 이미 벗어났지만, 경기를 완주할 생각으로 망가진 스키를 신고 다시 눈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승선 근처의 언덕에서 왼쪽 스키가 결국 반으로 쪼개졌고, 가파로프는 경기를 완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스키 한 짝을 들고 가파로프에게 달려와 부러진 스키를 자신이 가져온 것으로 갈아 끼워주었습니다. 그 남자는 바로 캐나다 대표팀 코치인 워즈워스였습니다. 그는 다른 코치들과 함께 서 있다가 가파로프가 곤란에 빠진 것을 보고 자신이 맡은 선수를 위해 남겨놨던 예비 스키를 가파로프에게 주기로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워즈워스는 이후에 "가파로프가 마치 덫에 갇힌 것처럼 보여 그냥 둘 수가 없었다"며 "그가 결승선을 통과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경기장에서는 상대가 저야 내가 이기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이기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적에게 장비를 주어 함께 경기하도록 하는 처사는 가장 멋진 올림픽 정신이요 나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더 챙겨주는 진정한 겸손의 용기인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론으로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빌 3:13-14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것은 단순한 한 문장에 불과하지만 우리 인생의 성공과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요 삶의 복된 자세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바울 되게 한 진리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된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이 말씀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버린 소용없는 과거에 매여 살았는지 모릅니다. 손해 본 것 때문에, 미움을 받았던 것 때문에, 배신당한 것 때문에, 그릇 판단했던 것 때문에... 숱한 과거에 붙잡혀서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렇게 소중한 세월만 낭비해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부디 오늘 사도 바울을 본받아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낭자들이 LPGA(미국 여자 골프연맹)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진출해 있고 한국 선수들이 거의 상위권을 석권하고 있어 세계적인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LPGA에서 우승하려면 하루 18홀 경기를 나흘 동안 계속해서 최고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총 72홀을 경기해야 하는 길고도 힘든 여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순간적인 판단 잘못이나 경기 실수로 소중한 점수를 잃어버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탄식하고 머물고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경기는 계속되고 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은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마음은 뒤에서 잘못한 실수에 사로잡혀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골프에서는 뒤에서 잘못한 것을 머리에 남겨 두는 것을 가장 금기시 합니다. 거기에 사로 잡혀 있다가 소중한 다음 홀을 망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골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또한 지난 과거에 매달려 쉼 없이 다가오는 앞날의 값진 삶을 망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는다고 말입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한 말씀만 가슴에 담고 따라 살아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과거는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해무익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지 편집인인 프레드 셰드씨는 옛 명언을 멋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재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오." 거의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톱밥을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톱밥을 켤 수 없지요." 셰드씨는 외쳤습니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이지요.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걱정하는 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야구계의 원로 인코니 매크에게 그가 진 게임 때문에 걱정을 한 일이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예, 나도 전에는 종종 그랬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흘러간 개울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찧지 못하며 도리어 당신의 주름에 톱질 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삶의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양 격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road."(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뜻이 있으면 길도 있기 마련이고 목표가 있으면 달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처럼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마음의 소원을 가진 자에게는 그 소원을 이루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종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시 107:9 /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한 소원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소망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깊은 뜻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본받아 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빌 3:14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나님께서 주실 상",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참으로 멋지지 않습니까? 지금 러시아의 소치(Sochi)에서는 세계 동계 올림픽이 한창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빼어난 선수들이 금메달을 앞에 놓고 사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너무나도 멋있습니다. 상을 향해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오늘 우리들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노력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겨루어 보겠다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멋진 것입니다. 비록 금메달을 따지 못할지라도 상을 향해 도전해 보는 그 정신은 인생을 멋들어지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을 갖춘 것이기에 당당하고 소망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한 가지 귀한 사실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도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처럼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 11:6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 상을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을 포기한 삶은 결코 제대로 된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화요일까지 단 하나의 메달도 없이 세계 순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우리나라 이상화선수가 500미터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므로 단숨에 10위권으로 올라섰습니다. 개인의 영광도 말할 수 없지만 국제무대에서 이처럼 나라를 올려 세우는 것이 바로 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에 어쩌다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몸으로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을 오르고 무거운 역기를 어깨에 메고 강한 훈련을 하면서 허벅지 둘레를 36인치가 되도록 힘을 키웠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딸의 다리를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고 울먹이는 모습에서도 이와 같은 금메달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로서의 미와 아름다움 대신 이상화씨는 금메달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을 목표로 하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도 감옥에 투옥되어 빌립보서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쫓아가는 삶이 그렇게도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표를 수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는 그렇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고백합니다.
딤후 4:6-8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무엇입니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주실 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온 삶을 미련도 후회도 없이 최선을 다해 잘 살았었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인생입니까? 이 종은 오늘날까지 40년이 넘도록 교회를 섬기며 숱한 인생들의 임종을 비켜 보았지만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생을 사도 바울과 같이 이처럼 멋들어지게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상을 생의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키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모두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이폰의 주인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그 많은 돈을 남기고 56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자 많은 매스컴들이 그를 아름답게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오로지 돈만 위해서 살다가 죽었다. 그 많은 돈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하거나 도네이션을 한 흔적도 없다. 그는 성공한 부자였으나 실패한 인생을 살고 말았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바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바 목적 있는 상을 바라보고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 모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하나님 앞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신 한 평생을 어떻게 살다 왔는지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표 있는 삶, 바로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60억이 넘는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실패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공한 삶을 다 살아가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하게 적당하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공할 수 없다면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 그 삶의 방법을 배워야 하고 또 본받아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삶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인 삶에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성공자로, 또 승리자로 우뚝 서 있는 사도 바울을 찾아 그의 삶을 배우고 본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겸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철학과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을 본받고 배워서 우리들도 바울과 같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실 상 받으러 간다."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 날을 주님의 날로 기억하고 예배자로 헌신하는 진정 구별된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이처럼 하늘 상을 목표로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 멘
비전을 품고 가는 젊은 교회
빌 3:10-16 / 서화평 목사
이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젊음입니다. 젊은은 사람에게만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젊어야합니다. 젊은 교회가 소망이 있습니다. 젊은 교회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하나님은 비전을 품고 가는 젊은 교회를 들어 쓰십니다. 젊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의 신앙은 건강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노화됩니다. 노화되면 다시 젊어질 수 없습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아무리 애썼어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늘 젊을 수 있습니다. 한 때 노화현상을 일으켰던 교회도 다시 젊어질 수 있습니다. 오래된 교회 중에는 "우리가 모 교회"라며 역사와 전통만 자랑할 뿐 일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는 늙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더 힘있고, 비전을 품고 가는 젊은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샘물교회는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비전을 품고 가는 젊은 교회입니다.
그럼 교회가 어떻게 해야 젊어질 수 있습니까? 즉 젊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1. 젊은이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가 젊은 교회입니다.
현대 교회의 보편적인 구조는 역삼각형입니다. 어른과 노인은 많은데, 교회학교 아동부나 청소년들이 부족합니다. 어른은 몇 천명 모여도 아이들은 몇 십명, 몇 백명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좋지만 앞으로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는 교회는 지금은 부족해도 앞으로가 나아지는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샘물교회는 비전을 품고 가는 젊은 교회입니다.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큰 소망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유치, 아동부, 청소년부, 청년부를 집중 양성해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사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말합니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 문제를 잘 돌파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샘물교회는 비교적 청년들이 많은 편입니다.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탄력이 있고, 교회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젊은이들 양성을 위해 더욱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청년들이나, 아이들을 보면 정말 사랑해 주세요. 그들을 보면 꼭 안아주시고 칭찬도 많이 해주세요. 또한 이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가 비전이 있고, 젊은 교회입니다.
2. 생동감 있는 교회가 젊은 교회입니다.
젊음의 특징은 힘과 패기입니다. 정열이 있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나이는 젊지만 생동감이 없으면 그는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교회는 짧은 역사, 연륜을 가진 교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생동감 있는 교회가 젊은 교회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생동감이 있는 젊은 교회는 기도의 불로 뜨겁습니다. 가슴에는 주의 사랑으로 넘쳐서 곳곳에 훈훈한 사랑실천이 일어납니다. 찬양도 뜨겁습니다. 선교의 열정도 풍성합니다. 교회가 살아있는 듯 합니다. 이런 교회가 젊은 교회요, 하나님이 쓰시기를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기성화 되면 우선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저 전통과 의식만 따집니다. 움직이는 것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의자하나 옮기는 것조차 회의를 거쳐야 합니다. 이런 교회는 늙은 교회입니다.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뜨거워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생동감이 있어야 합니다. 생기발랄해야 합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동감 있는 젊은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속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해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복음으로 변화를 시켜 나갑니다.
찰스 콜슨(Charles C0lso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법률 담당 특별보좌관으로서 당시 실세 가운데 실세였었습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키신저도 콜슨의 조종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몰려 7개월 간 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천 정치인들이 콜슨을 도와 전도했습니다. 이때 콜슨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점차 신앙이 깊어진 그는 출옥 후에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었고,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콜슨이 쓴「Born Again」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는 자기의 신앙을 간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간증합니다. "나는 매일 세계의 중요한 일들을 다 주무르며 살았다. 내가 큰일을 하는 것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이다. 세계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그는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참된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동감 있는 신앙으로 젊게 살아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도 생동감이 있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전을 품고 가는 젊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생동감이 넘쳐야 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활기가 넘쳐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 품고 주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 생기 있는 교회를 이루어 가는 주역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꿈을 가지고 달려가는 교회가 젊은 교회입니다.
젊다는 것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비전이 없이 사는 사람은 스무살이라도 힘이 없습니다. 의욕이 없습니다. 그러나 60, 70세의 노인이라도 비전을 품고 달려가면 청춘입니다. 우리 교회가 젊은 교회인 것은 이제 6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꿈을 안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샘물교회도 꿈을 가지고 달려가는 젊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새 역사를 이루어가겠다는 꿈이 없으면 결코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저 되는 대로, 주어진 대로만 일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성전확장과 앞으로의 성전건축 등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모델이 되고, 주의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꿈을 가지고 달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영원한 젊은이입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의 바울은 이미 60대였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옥중에서 회고록을 쓰는 것이 아니고, 땅 끝가지 선교할 꿈, 서바나지역 선교(스페인)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꿈을 가지고 달렸습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영원한 젊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꿈과 비전을 품은 자는 기적을 창출해 낼 수 있습니다. 한 가난한 집의 다락방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동화를 쓰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곱 살 때 구두수선공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지지 못한 그였지만, 그의 가슴은 꿈과 비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불행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꿈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려주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입니다. 이처럼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은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꿈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비전이 없이 사는 자입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 John Maxwell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말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에 자극을 받아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오늘 당장 필요한 것에만 심취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을 능가하는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큰 비전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꿈을 향해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큰 비전을 갖고 달려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의욕을 잃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거대한 비전을 심어준 것입니다.
혹시 무엇 때문에 실망하시고, 체념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오랫동안 침체상태에 빠져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부터 모든 낙담과 퇴보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죽은지 나흘 째 되어도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절망과 패배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네 병상에서 일어나라" "네 죽음의 절망에서 일어나라" 우리 모두 꿈을 안고 힘차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힘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도는 꿈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결코 이 땅만 바라보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윌리엄 페더의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5달러 짜리 지폐를 길어서 주웠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길바닥만 보고 다녔습니다.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데에 전 생애를 소모했습니다.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가 되었고, 수천 개의 동전도 길에서 주웠습니다. 이런 것을 줍기 위해 땅만 바라보고 살았기에 그는 일생동안 푸른 하늘도, 아름다운 꽃과 와 자연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넝마주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넝마주의는 꿈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입니다.(골3:1,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성도가 힘있고 복된 것입니다.(히12:2)
뒤에 있는 것, 지금까지 자기가 한 것에 집착하고 반추하는 것은 노인들의 특징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젊음의 특징이고 특권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한 분 한 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젊어지시기 바랍니다.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젊어지시기 바랍니다. 샘물교회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젊은 교회, 생기가 넘치는 젊은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꿈을 품고 달려가는 교회가 되어 젊은 교회로 주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향하여
빌 3:10-16 / 박조준 목사
사냥꾼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쏘아 총알에 맞은 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만 조금 나고 살아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땅에 떨어진 새를 들어올렸더니 그 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만일 저를 새장에 가두어 두시면 아저씨의 비밀을 다 이야기 할 거에요.
아저씨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아저씨 친구들이 다 알게 되면 큰일 아니에요? 그 대신 저를 놓아주시면 아저씨가 성공할 수 있는 세 가지 지혜를 가르쳐 드릴게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그 새의 말이 하도 신기해서 성공의 비결을 알려 주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놓아 주기로 약속했습니 다. 그러자 그 새는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마세요. 무 슨 일이나 한번 살펴보시고 우선 시험해 보세요.둘째, 능력 한계 이상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그 렇게 되면 실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셋째, 실수를 했을 때 그 것으로 너무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이 성공의 비결을 새로부터 들은 사 냥꾼은 약속한 그대로 새를 공중에 놓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새는 날개에 힘을 주어 날아 올라가 맞은편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에요. 그러니까 저를 놓아 주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저는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아마 이것만 있으 면 아저씨는 억만장자가 되고도 남을 거에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새가 앉아 있는 나무로 달려가 그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는 처음에는 제일 낮은 나뭇가 지에 앉아 있었는데 사냥꾼이 가까이 오르면 그 다음 윗가지, 그 다음 윗가지로 올라갔습니다. 사냥 꾼은 새가 위로 올라가면 그 새를 잡으려고 같이 위로 따라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나무 꼭대기까지 거의 올라가서 그 새를 잡으려고 팔을 벌리다가 그만 나뭇가지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서 사냥꾼은 나 무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 새는 사냥꾼을 향해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에요. 제가 세 가지 지혜 를 가르쳐 주었는데 몇 분도 못 되어서 다 그르치고 말았어요.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 지 말라고 했잖아요? 제게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했지요? 그 말을 왜 그대로 믿지요?둘째, 능력 한계 이상의 일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며 무엇 때문에 잡을 수 없는 저를 잡으려 하세요? 셋째, 물릴 수 없고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지도 말라고 제 가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저를 놓아 준 다음에 다시 되돌리려 저를 잡아 가두려 했지요? 이것은 하 나의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새와 어리석은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새가 사냥꾼에게 준 이야기를 우리는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녁 읽은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빌립보서 3장 12-14절까지의 말씀을 다 함께 읽었으면 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 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일생을 경주자가 경주하는 것에 비유해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승리하는 경주를 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온몸을 기 울여 달려가야 합니다. 몸은 미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눈은 그 목표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 러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 으려고 좇아간다 고 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잘못 내렸던 결정, 남에게 심하게 한 말, 우리 가 범한 죄, 실수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 는 과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거는 우리에게 남아 있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가슴 에 슬픔에 안겨 주고 우리의 나아가는 앞길에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에 서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나쁜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있는 그대로 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에는 지워버리고 싶지 않은 행복한 시간들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인에게 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 는 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뒤를 돌아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후회하는 일도 가치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후회 가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흔들 리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은 현재의 모든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 른 길로 인도하는 후회는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후회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회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후회는 좋은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고매한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도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참된 후회는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악의 충동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 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후회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개 다음에 오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잊어버립니다.예 레미야 31장 3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 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용서를 Forgive 라고 하고, 잊는다는 말을 Forget 이라고 합니다. 용서하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은 같은 어근입니다.
우리는 뒤엣 것은 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 니다. 우리가 이 격변하고 격동하는 환경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면 승리자가 되고, 적응하지 못하면 역사의 지각생이 되고 낙오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자가 되려면 남이 쉬고 있을 때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남이 걸을 때 우리는 힘차게 달려야 합니다. 역사는 곧 변화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이 변화에 창조적으로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 그런 민족만이 역사의 영광스러운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역사가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긴장된 역학 관계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도전이란 무엇입니까? 역사가 우리에 게 내놓은 숙제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응전이란 무엇입니가? 역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입니다. 역사의 도전에 지혜롭고 용감하게 응전하면 역사의 우등생이 됩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도전에 지혜롭고 용감하게 응전하지 못하면 역사의 낙제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 사의 자랑스러운 우등생이 되고 역사의 영광스러운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진 민족과 개인이 인생의 성공자, 역사의 승리자 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 목표도 없는 사람과 민족은 반드시 인생과 역사의 패배자로 전락하고 맙니 다. 여러분, 성공을 원하십니까? 승리를 바라십니까? 목표를 분명히 세우세요. 그것이 이상이라도 좋고, 비전이라고 해도 좋고, 꿈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비전을 추구하는 것입니 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목표 를 달성하기 위해서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 단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먼저 뜻을 세우고, 목표를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세우되 큰 목표, 높은 목 표,옳은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목표를 세우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해서 인생의 대업을 성취한 사람을 보면 모두 마음 속에 간절한 소원, 분명한 목 표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를 위해서 먼저 목표를 세웁시다. 내 마음에 간절한 소원,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위하여 내 정성을 쏟고 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강한 사명 감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자나깨나 일심전념으로 그 생각에 몰두하면 그 소원에서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일에 온 정성 을 기울이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정신일도 하사불성 (精神一到 何事不成) 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신이 한 목표에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때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고 요청한 일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가나안 여인이 그렇게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예수님은 처음에 못 들으신 척 하셨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르짖으니까 제자 중 한 사람이 와서 선생님, 이 여 자가 아까부터 와서 이렇게 졸라대는데 그저 한 말씀하셔서 돌려 보내시면 좋겠어요. 이거 도무지 시끄러워 못 견디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인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계 속 요청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합당치 않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이 가나안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씀이었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화를 내지 않고 개 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부스러기라도 좀 주세요. 하면 서 매달렸습니다.
이때 그만 예수님이 감동을 받았습니다.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정성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 면 그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기적을 낳습니다. 기도의 힘은 놀랍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목표가 있다는 말처럼 힘찬 말이 없습니다. 하루에는 하루의 목표가 있습니다. 한 달에는 그 달의 목표가 있습니다. 일 년에는 일 년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산다는 것 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입니다.목표가 없이 사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나 다름이 없습니 다. 목표가 분명히 서 있는 인생이 산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 목표도 없이 그날 그날을 무의 미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은 허황된 목표를 가지고 그날 그날을 무사안일 속에 허송세월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성공학의 권위자인 미국의 나폴레옹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99퍼센트의 사람들이 분명한 목표를 갖지 못하고 살고 있는 현실은 현대 문명 사회의 최대의 비극이다. 고 했습니다.그렇습니다. 목표가 없는 인생은 곧 비극입니다. 목표가 없는 인생은 생기가 없고 기쁨이 없고 충실감도 없습니다. 우리 의 목표가 분명하고 간절해야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굴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뜨거운 소원이 나의 존재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힘이 솟구칩니 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외부에서 나를 끌어 잡아 당기는 힘입니다. 목표는 하나의 추진력이요 견인 력입니다. 내 목표가 내 머리 속에서 잠시도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와 목표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 목표가 나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자나 깨나 목표를 마음 속에 간절히 사모할 때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의지, 나의 행동, 나의 노력, 나의 시간, 나의 생활이 모두 목표를 이 루기 위해서 집중됩니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책임감이 강합니다.
그래서 행동을 신중히 합니다. 시간을 아껴 씁니다. 우리는 왜 목표를 확실히 정해야 합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목표가 없으면 부패하고 타락합니다. 구약 잠언에 꿈이 없는 국민은 망한다 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목표와 꿈과 사명이 없을 때 허무주 의에 휩쓸리고 무의미감에 빠지고, 공허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무기력하게 되고, 허 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우리의 삶에 힘을 주고, 생기를 주고, 보람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고, 소 망을 주는 것이 목표요, 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꿈을 가지고 높은 목표를 가지고 삽시 다. 그리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분투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웠으면 초지일관의 정 신과 시종여일의 태도로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지속성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천리길도 한 발자국씩 모여서 도달합니다. 망망대해의 물도 작은 물방울의 무수한 축적입니다. 목표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일조일석에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묘목이 정정한 거목이 되려면 숱한 풍상 속에 긴 세월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조급한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쉬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가노라면 목표에 도달하게 됩니다.프랑스의 문필가 앙드레 모로와 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을 사는 기술은 하나의 공격 목표를 선택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시키는 데 있다. 고 했습니다. 승리는 쉬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세운 다음 그것 이 꼭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확신은 기적은 낳고, 훈련은 천재를 만든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겐 집념이 필요합니다. 성 공과 승리는 집념의 산물입니다.
집념은 한 가지 일에 끈덕지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념에는 무서 운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꼭 이루어 놓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착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 이나 쉽게 단념해서는 안됩니다. 칠전 팔기의 의지력을 가지고 집중해서 노력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옆에는 수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한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여기에 도전해야 합니다.성공하는 사람과 실패 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의 차이입니다. 나는 계속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노라면 언젠가는 내게 기회가 올 것입니다. 라는 윈스턴 처칠 경이 남긴 말은 유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백절불굴의 투지와 칠전팔기의 끈 기를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 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목표를 향해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 극적으로 걸리기 쉬운 것, 방해가 되는 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꼭 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만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 버 려야 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뽐낼 것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난 날의 일만을 자랑합니까? 지금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바쁜 사람은 과거의 일 자랑하고 앉아 있 을 시간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르러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그 목표에 가 있어야 합 니다. 뒤를 봐도 안됩니다. 옆을 구경해도 안됩니다. 우리의 눈은 목표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물론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표만 정해놓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없으면 그것은 공상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려 면 힘써야 합니다. 힘쓰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 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도전적인 말입니까? 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여럿 이 달려도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인내해야 골인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승리적인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목표를 분명히 정하세요. 목표를 분명히 정했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있게 달려가야 합니다.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 고 달려가야 합니다. 죄의 짐은 벗어버리고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인내로 달려가야 합니다. 앞에 있는 상을 잡으려고 좇아가십시다. 그럴 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신령한 삶이 이끄는 삶을 사십시오
빌 3:10-16 / 이일기 목사
세계의 뉴스 하면 요즘은 단연 중동 지역 이라크 아닙니까? 이번에도 북부 바쿠바의 한 경찰서 앞에서 이라크 주권 이양 후 최악의 자살 차량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04, 07 29, 09 30).
최소한 68명이 숨지는 등 희생자가 120명을 넘고 있다고 하는데 또 중남부에선 연합군과 저항세력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또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로 한 번 눈을 돌려 볼까요? 요즘은 신문이나 매스컴을 대하기가 무척이나 두려워요? 얼마 전에 30대 주부가 14층 고층 아파트에서 두 딸을 창밖으로 내 던지고 자신도 아들을 안고 창 밖으로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30대 주부는 두 자녀를 약물로 죽게 하고 자신은 2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죽었으며 60대 할아버지까지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회사 부도로 자살한 중소기업사장 60대 부부, 그리고 지난해에는 온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투신자살 등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뉴스에 일일이 나오지는 않지만 하루 평균 36명이(2002)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전에는 간간히 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이 성적 때문에 자살을 해 왔지만 요즘 들어서는 어른들이 자살 대열에 끼어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가 멀다 하고 자살 건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자살 열풍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해진 이런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현실의 삶과 미래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의식이 없을 때, 삶의 초점이 없을 때 조그만 어려움만 와도 삶을 팽개치는 포기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고귀한 생명을 함부로 버리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 때에만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어서 오늘의 말씀을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십시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1. 인생은 목적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전 3:1 /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0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0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사 43:07 /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기독교의 신앙관에서 보면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계획하셨고 그렇게 살도록 예비하셨습니다(엡 01:03~06).
그러므로 목적 있는 삶이란 이 땅 위의 삶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 내세의 삶을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가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꿈이 없으면 망한다고 하죠? 꿈이 있으면 일어나거니와 꿈이 없으면 방자해진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잠 29:18).
꿈이 있는 사람은 겸손해지며 문제가 생겨도 계속 전진을 할 것이나 그러나 꿈이 없는 사람은 그 인생의 방향 자체를 수시로 바꾸어 버리고 맙니다.
인생의 꿈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요, 꿈이란 뚜렷할수록 더 강한 추진력을 이루어 나감을 아시지요?
강한 꿈을 가지십시오. 강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 얼굴과 두뇌를 보나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꿈을 보십니다.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에게 미래가 열리는 법이지요. 꿈은 곧 상상력 아니겠습니까? 실패와 좌절은 우리 속에 있는 상상력을 소멸시키지만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상상력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누구인가?(정체성. identity)
나는 과연 중요한 존재인가?(중요성. importance)
삶에 있어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영향력. impact)
이상의 질문을 항상 자신에게 던지면서 고귀한 인생의 삶을 살아나갈 때 삶의 방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 게 될 것입니다.
잠 19:21 /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나의 계획에 집중하기보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집중할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도달할 수 있는 신령한 목적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만드신 그 목적과 함께 시작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 속에 빠졌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욥이 경제적 고통, 질병에 의한 고통, 자식을 잃은 슬픔, 부인과 친구들까지 이해 못하는 심한 심리적 고통 속에서도 결국에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욥 40:03), 자기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던 것을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엡 3:7 /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라는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며 가장 중요한 삶의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그 목적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나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 안다고 해도 그 아는 것만큼 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강력한 도전, 심각한 도전을 내가 오늘 하여야 할 것 아닐까요?
목적 없는 산만한 신앙생활을 이제 여기쯤에서 멈추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능력을 회복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삶으로 인해 온 세상이 우리의 모습에 매료 되어 주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히 이루어져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신령한 삶을 사는 신앙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도 없는 놀라운 네 가지의 축복이 마음껏 주어집니다. ①첫 째, 죄를 용서받은 축복입니다. ②두 번째, 마음의 평화입니다. ③세 번째,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④네 번째 삶의 진정한 목적을 아는 축복입니다.
2003-11-05, 대학 수학능력 고사 1교시를 치르던 전북 남원의 한 여학생이 시험장 부근 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능을 친 다음 날 서울에서도 역시 한 여학생이 수능 성적이 낮게 나와 대학도 못 가게 생겼다며 아파트 25층에서 떨어져 숨졌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까?
한 마디로 자살을 택한 것은 이들에 있어서 원대한 삶의 목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고귀한 목숨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만 것이죠?
몇 년 전에는 한 학생이 우수한 성적을 받아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 지 얼마 후 책상 서랍에서 그 학생의 유서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자살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위해 공부했습니다만 합격한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는 분명 삶의 목적이 상실 된 사람이 아닐까요?
잘못된 입시 제도로 한 해 무려 200명이 넘게 자살하는 참담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삶의 목적이 있습니까? 그 삶의 목적이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여 인생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 신령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롬 1:1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으니.
딤후 1:11 /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고,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일군이 되었고,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다고 자신의 신령한 삶의 목적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분명한 삶의 목적은 복음이며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빌 3:7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0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0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3.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산 바울을 말씀을 들으십시오.
빌 13-14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새 번역)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가 이 세상에 온 이상 무엇인가를 남겨놓고 때가 되면 떠나갑니다. 그것을 우리는 행적(行蹟)이라고 하죠? 그런데 그 행적을 놓고는 나 외의 사람들, 후세의 사람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평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객관성도 결여되어지고요.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따르게 마련이고 보면 이왕이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행적을 놓고 어떻게 평가하실 것이냐 하는 겁니다.
히 9: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다면 나의 짧은 삶의 시간들 속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즉 음악이든지 예술이든지 사업이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활용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겨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목적의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십시오.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 믿음의 성공자 사도 바울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롬 14: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전 9:25-27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얼마나 당당합니까? 삶의 목적을 알면 이렇게 활력이 생기는 겁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사는 일이 짜증나십니까? 왜 사는지 모르십니까? 죽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십니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없는 사람은 목적이 있을 수 없으며 목적이 없는 삶은 의미 또한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면 삶의 소망도 없게 되고요?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까? 그건 아니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비극입니다.
신령한 삶의 목적을 따라 살다간 사도 바울의 메시지, 성공적인 삶을 살다간 그의 생활 철학의 메시지를 조금 더 들어 보는 것이 우리의 생활에 도움이 되겠지요?
빌 1:20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딤후 4:6-8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삶의 5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면서 산다면 복된 삶의 축복의 삶이 되어질 줄로 알아 여기에 질문을 던집니다.
①내 삶의 중심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예배(worship)에 관한 문제.
②나는 어떤 성품의 삶이 되어야 하는가? 제자도(discipleship)와 관련 된 문제.
③내 삶을 어디에 기여해야 하는가? 섬김(service)에 관한 문제.
④내 삶은 어떤 전달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불신자를 향한 선교(mission)에 관한 문제.
⑤내 삶의 동역자는 누구인가? 교제(fellowship)에 관한 문제.
마 6:33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목적이 있고 초점이 맞추어진 삶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님께서 주신 목적에 이끌려 살면서 거룩한 선한 뜻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왜 사시는데요
빌 3:10-16 / 김동호 목사
오늘 설교제목은 제가 보기에도 참 도발적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꼭 한번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을 위해서 꼭 이 질문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정확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왜?’라는 질문을 참 많이 하였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 그 해답을 찾지 못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을 하려고 들지 않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일을 잘 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해 내는 것 같습니다. 맹목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그 들 중에 정말 탁월한 사람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위하여, 행복한 삶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도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가지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만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생존자체가 문제가 될 때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질문은 사치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 배부른 사람들의 겉멋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자체가 문제가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입니다. 유희입니다.
굶지 않기 위하여, 특히 어린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하여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루 세끼 굶지 않고 한데 잠 자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함부로 하찮은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존자체가 얼마든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존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리만큼 절박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정도 사람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행복을 느낄 수도 없다는데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좀더 잘 먹고 좀더 잘 자는데 에만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생존자체가 위험한 세상에서는 그저 굶지 않고, 한데 잠 자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그것이 해결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의 해결만으로는 더 이상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는 일에 목숨과 인생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좀더 좋은 것을 먹으며, 좀더 좋은데서 잠을 자며, 좀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그리고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남보다 좀더 좋은 것을 먹으며, 남보다 좀더 좋은 곳에서 잠을 자며, 남보다 좀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죽기 살기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 보이며, 그 유치하고 작은 우월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유치하고 작은 우월감이 주는 작고 유치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너무 많은 낭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낭비 때문에 우리는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생각하고 살 여유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먹은 음식 중 가장 비싼 음식은 75,000원에 10%의 봉사료와 10%의 세금이 추가되는 값의 음식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선택하여 지불한 것은 아니었고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대접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한 끼 식사에 거의 10만원이나 하는 식사를 하니 마치 귀족이 된 것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제가 잔 호텔 중에 가장 비싼 호텔은 아마 하루에 약 300불정도 되는 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밤 잠을 자는데 30여 만원이나 써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을 여행 할 때 30불 정도의 여관에서도 자 보았습니다. 그래도 물론 화장실이 있어서 샤워를 할 수 있고, 깨끗한 시트카버가 있어서 하루 밤 잠을 자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다만 30불짜리 여관에서 잠을 자면 서민 같아 보이고,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면 자신이 귀족 같아 보인다는 차이는 분명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은 4억5천 만 원 정도하는 집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의 집을 장만하려면 거의 평생이 걸립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역시 자신의 평생을 드려서 벌어야 할 만큼의 돈을 집에다 쏟아 붓는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희 보다 조금 더 편리하고 귀티 나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려면 돈이 생각밖에 많이 듭니다. 그러려면 그도 역시 그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평생을 벌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귀족이 아닌 귀족 같아 보이는 생활을 위하여 자신의 온 삶을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왜 사시는데요?’라고 묻는다면,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열심히 사시는데요?’라고 묻는다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묻는다면 ‘귀티 나게 귀족처럼 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별 것도 아닌 우월감이 주는 작고 유치한 행복’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릭 워렌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저는 릭 워렌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그와 같이 좋은 책을 썼다는 것도 좋지만, 그와 같은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이 더 좋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제목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희망적인지 모릅니다. 다만 문제는 ‘그 책을 사서 공부를 한 사람들 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의 제목과 같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그것도 허탄한 욕심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여전히 먹고 마시는 일에만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좀더 좋은 것을 먹고, 좀더 좋은데서 잠을 자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남보다 좀더 좋은 것을 먹고, 남보다 좀더 좋은데서 잠을 잠으로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너무 좋은 것만 먹다가 비만이 되고, 영양의 밸런스가 깨지고,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하다가 운동부족이 되어 오히려 건강을 상하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 헛된 욕심에 온 인생을 다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긍정을 하고 수긍을 하면서도 우리들은 좀처럼 그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욕심이라는 것이 워낙 강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만 헷세의 데미안에 보면 ‘새는 알을 까고 나아온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고 하는 자는 다른 한 세계를 파괴하여야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른 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거듭남을 위하여 반드시 파괴하여야만 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욕심이 이끄는 삶‘입니다. 거듭남을 위하여 새로 창조해야만 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릭 워렌 목사님이 말씀하신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은 대량생산품으로 생산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식처럼 낳으셨습니다. 자식처럼 낳으신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 낳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기대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목적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며,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 끼에 10만 원 짜리 식사를 하고, 하루 밤에 30만 원이 넘는 곳에서 잠을 자고, 귀티 나는 귀족처럼 살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릴 때 정말 위대해지고 훌륭해지고 아름다워지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구원을 얻어 이 땅과 저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고 살려면, 우리의 삶을 욕심이 이끌도록 내버려두지말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삶을 이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욕심이 이끄는 삶에서 벗어나면 시간과 물질에 많은 여유를 갖게 됩니다. 3천 원짜리 칼국수를 먹어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고, 30불짜리 여관에서 잠을 자도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10만 원짜리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3천 원짜리 점심을 먹게 되면 당장 97,000원의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쓸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3천 원짜리 칼국수만 먹고 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한 끼에 10만 원 짜리 식사는 문제가 있습니다.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30불짜리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되면 270불의 돈을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하여 쓸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꼭 30불짜리 여관에서만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혼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하루에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고 폼을 잡아야만 한다면 그는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목적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욕심에 이끌리는 삶을 살다보면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가 되고 맙니다. 욕심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다보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한 자가 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 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 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의 취미는 나이를 먹는 것입니다. 앞으로 바뀔는지는 모르나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50살이 되었을 때 참 기뻤습니다. 나도 드디어 50대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54살이 되었을 때 참 기뻤습니다. 50대도 초반이 아닌 중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50대 초반보다는 50대 중반이 좋습니다.
50살이 되었을 때 저는 매우 중요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천명(知天命)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보면 사람 나이 오십을 천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천명의 나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맞았습니다. 저도 50이 되고 보니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남은 인생을 그 천명에 집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천명이 나를 이끌도록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명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집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아주 심각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제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10만 원 짜리 식사를 하고, 300불짜리 호텔에서 잠을 자면서 누리는 호사스러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쓸데없는 우월감이 주는 값싼 행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최선을 다하여 욕심이 이끄는 헛된 허영으로부터 자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절약하고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절약과 포기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물질과 능력과 시간을 천명에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저는 2002년 중반부터 금전출납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나의 구체적인 삶을 체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평균으로 보면 안 4, 밖 6 정도의 비율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2005년도에 들어와서는 안 1, 밖 5의 비율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작정한 건축헌금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완납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상상도 안 되는 그런 비율이 나왔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비율은 상식적인 비율도 아니고 평균적인 비율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상의 경우 내가 집중하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나?’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비율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뒤엣것은 잊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오늘 ‘욕심이 이끄는 헛된 허영과 그것이 주는 작고 유치한 행복’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푯대를 정하고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그 푯대를 천명(天命)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바울은 그 천명과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상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상이 바로 구원, 천국, 행복,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위하여서라면 자기 몸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지라도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을 위하여 바울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천명이었고 그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그 목적에 이끌려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선택하였고, 그 목적에 그의 온 삶을 집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천명과 목적에 집중한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상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주는 유치한 우월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삶이 부럽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바울처럼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온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은 천명과 목적입니까? 아니면 욕심입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왜 사시는데요?’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왜 사시는데요?’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자신 있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고 대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부활의 능력
빌 3:10-16 / 김용규 목사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우리가 몸으로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 위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선택되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선택에서 제외됩니다. 그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에도 해당됩니다. 자동차도, 카메라도, 휴대폰도 편리하고, 기능이 더 나은 것들이 선택되어 집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능력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알고자 한 것은 부활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부활을 가져다주는 능력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죄악과 죽음에서 구원하는 능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있는 제자들의 영혼들을 깨웠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 능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두 번째 부활의 능력은 삶의 능력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약한 사도 바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수많은 매를 맞고도 그날 저녁 한밤중에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결국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누가 이러한 사도 바울을 꺾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을 살게 하고, 그가 삶의 능력으로 넘쳤던 것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 안에 계셔서 바울을 살게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서 삶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어디론가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비겁하고 두려움이 많던 제자들이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 갔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단 하나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숨어있던 그들을 살게 하였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기적은 특별한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 자체가 기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예배드리는 이곳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변화가 바로 기적입니다. 누가 예수 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주님이 계시므로,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더라도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가 해를 받지 않을 것을 믿고 담대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능력은 영생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됩니다. 믿는 자에게 산 소망은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망은 부활을 통해서 완전히 멸망당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영원히 사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썩고, 사라지며, 없어지는 소망입니다. 반면에 하늘의 소망은 영원하고, 썩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위험 앞에서도 하늘의 소망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구원의 능력, 삶의 능력, 영생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푯대를 행하여
빌 3:10-16 / 강용규 목사
야곱은 당시 최강국의 왕인 바로를 만납니다. 가진 것이 없는 야곱임에도 강국의 왕인 바로를 축복합니다. 곡식을 얻으러 온 사람이 곡식을 주는 바로를 야곱이 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8장에는 야곱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며, 49장에는 야곱의 자손들인 열두 지파에게 하늘의 복을 베풉니다. 야곱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남을 축복한 것을 보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성서학자들의 말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인생을 혼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사도 바울의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나는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오늘도 달려간다.”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놓인 푯대를 향해서 달리는 인생을 자신의 인생이라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놓인 푯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두 번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인생을 살다 갑니다. 한번 사는 인생 성공한 삶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 비결을 함께 배우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나아간다.” 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오직 한 일은 영어 성경에서는 "One thing I do."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일이 아닌 오직 한 가지 일, 그 일을 위해서 달려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집에 초대를 받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를 씁니다.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 일로 마르다의 입에서 불평이 나오고, 동생 마리아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 마르다를 향해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네 동생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절대로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다 하라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한 가지 일은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말합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단 한 번 사는 인생을 살면서 꼭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일까요? 강남의 빌딩 10개를 사는 것일까요? 강남의 금싸라기 땅 만 평 사는 것일까요? 자식을 하버드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일까요?
삭개오는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얕보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명예와 물질의 꿈을 다 이루었지만, 그는 외롭고 허무했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꼭 해야 될 한 가지 일, "One thing I do." 는 바울의 고백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바울의 과거를 극복하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의 삶을 보면, 그는 누구나 알아주는 정통파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것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늘 앙금처럼 남아있는 과거도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바울은 동의했습니다. 사도가 된 뒤에 그는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마가는 루스드라 전에 바울을 두고 되돌아 가버렸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 할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기를 바랐지만,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도중에 떠난 사람을 바울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바나바와의 관계에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후에 바울은 마가를 품지 못하고 내쳤던 일에 대해서 후회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크리스챤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또한 바울에게는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울 정도로 복음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과거의 아픔이든, 자랑이든 이런 것들을 다 극복합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일,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그 일을 위해서 날마다 달려가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바울이 과거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일이 그가 해야 할 일 오직 한 가지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 것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과거의 실패와 과거에 남아있는 것들과 발목을 잡는 일들을 넘어서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랑까지도 넘어서게 해 줍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그 일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한번 밖에 살지 않는 이 인생을 마칠 때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켜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달려라!
빌 3:10-21 / 조상호 목사
지난 17일 새벽, 미국의 보스톤으로부터 뉴스 속보가 세계곳곳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마라톤 경기 소식이었습니다. 세계 유수의 마라톤대회 중에서도 가장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105년의 역사를 가진 보스턴마라톤대회 경기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뉴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우리 한국의 이봉주 선수였습니다. 그가 보스톤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선수가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947년과 1950년에 우승한 이후, 50년 동안 황영조, 김재룡 등의 많은 선수들이 도전했다가 실패했었는데, 51년만에 이봉주선수가 영예의 월계관을 쓰게된 것입니다. 사실 보스톤 마라톤대회가 시작되기 전의 초점은 이봉주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91년부터 무려 10년 동안 보스톤 마라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아프리카의 케냐라는 나라였습니다. 이번에도 케냐 선수들은 자그마치 8명이나 초청을 받았고 에디오피아, 남아공 등의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전체 초청선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태극머리띠' 하나 질끈 동여맨 이봉주 선수는 '폭풍의 검은 바다를 헤엄치는 한 마리의 누런 황소'처럼 아프리카 선수들을 제치고 끝까지 질주하여 당당하게 1위로 골인하여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마라토너 최고의 영예인 '보스턴의 월계관'을 쓴 그는 이 시대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봉주 선수의 보스톤 우승 소식은 17일 새벽,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라톤 우승 소식이 한국에 전해지자 나라가 분위기가 다 밝아졌습니다. 그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분야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울해하던 국민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기쁨을 주었습니다.
저 또한 이봉주 선수의 보스톤 재패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요, 저는 그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에 대한 기사를 읽고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가 획득한 메달과 트로피는 꼭 그 만큼의 땀과 눈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로 지난 십수년 동안 옆을 돌아볼 틈도 없었습니다. 부모님 뵙기는 잘 해야 일년에 한 두번이고,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봉주 선수는 올해 나이 31세인데, 피끓는 20대를 그렇게 외롭고 고달프게 보냈습니다. 그는 마라톤에서 따낸 메달 개수만큼 부모의 정을 잃었고, 대회 출전횟수 만큼 친구를 잃었습니다. 작년 12월3일 후쿠오카마라톤 때는 은메달과 결혼식까지 맞바꾸기까지 했습니다. 약혼녀 김미순씨와의 결혼식을 위해 받아둔 날이 후쿠오카대회와 겹치자 마라톤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보스턴의 금메달을 향해 미국으로,충남 보령으로 떠돌며 오로지 달리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는 그 소식을 훈련지인 보령에서 받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봉주는 꿈에 그리던 '보스턴 월계관'을 쓰고도 끝없이 속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 묘소를 찾으면 살아 생전 그토록 보고싶어 했던 '보스턴의 금메달과 트로피'를 영전에 바쳐놓고 참았던 눈물을 다 쏟아낼 작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봉주 선수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위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믿음의 마라톤에서 승리하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루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어떠한 대가를 치루어야 할까요? 어떻게 달려야 할까요?
1. 과거를 정리하라
사도 바울의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헬라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달리기 경주에 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 곳곳에 "달음질"을 신앙생활에 비유하여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달음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여기에서 말하는 '뒤에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잊어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잊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의 인간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과거에 자기가 누렸던 유대인이라는 자부심과 배울 만큼 배웠다는 학벌, 그리고 전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의식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3장 7,8절에서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경주에 방해받지 않도록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또 다른 데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앞을 보고 전진할 따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들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 주신 모든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주신 은혜는 감사하되 우리의 목표는 과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과거는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버릴 때 버리지 아니하면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제가 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호주에서 평신도로 있을 때, 낚시광이었던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십니다. 저는 때때로 시드니북쪽 약160Km 떨어져있는 뉴카슬이라는 곳으로 갈치 낚시를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갈치라는 어종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무리를 지어 떼로 다닙니다. 한번 잡히기 시작하면 한 두시간 동안 수 십마리를 잡을 수 있지만, 갈치 떼가 지나가고 나면 밤을 꼬박 세운다할지라도 한 두마리 잡을까 말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치 낚시를 갈 때도 채비가 철저해야 해야 합니다. 만약 낚시할 타임에 낚시 채비를 한다고 시간을 허비해 버리면 나중에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한번은 장인 어른과 함께 그곳으로 갈치 낚시를 간 적이 있습니다. 아마 92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인께서 낚시를 하시다가 낚시 바늘이 바위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한번 바위에 걸리면 손해가 막심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갈치 낚시를 할 때는 물에 뜨는 우끼에 야광을 달고 그 밑에는 갈치 이빨이 날카롭기 때문에 쇠줄과 납으로 만든 추를 단 후, 바늘을 한 개도 아니고 세 개씩 매어 달기 때문에, 낚시 바늘이 한번 낚시 바늘이 바위에 걸리면 호주달러로 약 6불 정도가 날아가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데 장인께서 낚시 바늘이 바위에 걸리자, 6불을 아끼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때에 갈치 떼가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그냥 6불 날려보낸다고 생각하시고 낚시 줄을 중간에 잘라버리고 다른 채비를 하시지요" 그랬더니 "조서방! 6불이나 되는 것을 아까 와서 어떻게 자르나" "아버님! 저희들은 여기까지 160Km 달려왔습니다. 또 돌아가려면 160Km를 달려야 합니다. 기름 값도 기름 값이지만, 이곳에 오기 쉽지 않은데, 갈치떼 다 가고 나면 빈바구니 들고 가시겠습니까?" 어른께서는 아깝다고 생각하셨지만, 할 수 없이 칼로 낚시 줄을 잘라 버리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17마리를 잡는 동안 장인께서는 4마리밖에 못 잡으셨습니다.
여러분, 인생 마라톤에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과거를 정리하십시오. 지나간 과거가 정리되지 아니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리할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줄을 과감히 잘라버려야 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 바다에 가서 보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달렸습니다. 이제 멀리 달려왔겠지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날이 새어 주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때 이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요? 밤새도록 달렸다고 생각한 보트가 제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트를 매어 놓은 줄을 풀지도 않은 채 제자리에서 계속 달린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1미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르십시오. 과감하게 정리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묶고 있는 줄은 자르지 않으면서 왜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하느냐고, 가정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왜 교회가 부흥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과거를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를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나를 자유하지 못하게 합니까? 그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에 방해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쭉쭉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2. 집중하며 나아가라
바울은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예수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의 소망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또 14절을 보겠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2절과 14절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좇아가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디오코>는 '추적하다'라는 의미로, 사냥할 때 사용되던 말입니다. 사냥개가 먹이를 발견하고 먹이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 14절에 언급된 '푯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코포스>입니다. 이 말은 본래 달리기 경기를 하면서 골인지점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 둔 기둥을 말합니다. 즉 달리기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는 골인지점이 바로 <스코포스>, 다른 말로 푯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사냥개가 먹이를 발견한 후 전력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전에 표범 비슷하게 생긴 치타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치타는 지상에서 사는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짐승입니다. 무려 시속 70마일 즉, 110Km 이상 달릴 수 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 치타에게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치타는 먹이를 잡기 위해 사냥을 할 때, 풀을 뜯어먹고 있는 짐승들이 수십, 수백 마리가 되어도 그 중에 딱 한 마리만을 목표로 삼습니다. 치타가 찬스를 보고 있다가 먹이를 향하여 질풍처럼 달려가면 풀을 뜯어먹고 있던 짐승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치타가 처음 목표로 삼은 먹이를 좇아가다가, 도중에 쉽게 잡을 수 있는 다른 짐승이 근처에 있어도 치타는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치타는 독야청청 처음 목표한 먹이만을 끝까지 좇아가서 잡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치타처럼, 사도 바울처럼 세운 목표에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에 위기를 맞는 이유를 아십니까? 집중할 곳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뒤엣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배우자에게 집중하면 위기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자꾸 생각하고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곁눈질하고 다른 사람과 내 배우자를 비교하니까 결혼생활에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좋은 점을 찾아내고 배우자에게 집중하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중하면 됩니다. 다른 샘지기와 내 샘지기를 비교하고, 다른 목사님과 내 목사님을 비교하고, 과거에 한국에서 다녔던 교회와 현재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를 비교하면 신앙생활에 발전이 없습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앞으로 전진하지를 못합니다. 제가 과거 부교역자로서 청년 사역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자매들에게 가장 인기 없는 형제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지조 없는 형제입니다. 이 자매에게 프로포즈해서 안 먹히면 저 자매에게 프로포즈하고 또 다른 자매에게, 계속해서 돌아가면서 프로포즈하는 형제가 가장 인기가 없습니다. 그의 외부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자매들에게는 인기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내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남자라고 낙인이 찍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돋보기를 아실 것입니다. 햇빛이 온 세상에 비칠 때는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돋보기로 빛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 불이 일어납니다. 두꺼운 종이도, 두꺼운 천도 손쉽게 태워 버립니다. 이것이 집중의 힘입니다.
여러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목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박사의 말처럼 목표 없는 신앙인은 표류하기 쉽습니다. 목표 없이 쏜 화살이 결코 사냥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푯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세상의 것이 우리의 푯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푯대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돈을 향하여 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쌍용, 기아, 해태, 등 한국에서 잘 나가던 그룹들이 돈 문제로 위기에 빠져있습니다. 명예와 권력을 푯대로 삼았던 사람들도 그 명예와 권력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는 5.18사건의 주범으로. 노태우씨는 물태우로. 직전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씨는 경제를 말아먹어 버린 무능력한 대통령으로, 현 김대중대통령도 정치문제, 경제문제, 노사문제, 통일문제, 요즈음은 일본 교과서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우리의 스코포스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푯대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진정한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진정한 푯대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스코포스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히12:1,2)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달려갔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그의 주위에 있었지만, 그는 진정한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애의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해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목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집중하면 반드시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바울이 목표로 하는 하늘의 상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미래를 준비하라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쾌락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피쿠로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토익이라는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스토익 쾌락주의자들은 고도의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쾌락주의자들은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쾌락주의자들의 문화와 풍습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는 완전하게 주님을 닮을 수 없으니 이 세상에서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향락을 누려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향하여 18절에서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복음을 받고도 세상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땅에 것을 생각하고 힘쓰는 행위는 다름 아닌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지적 앞에서 나는 어떻습니까? 땅에 일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땅에 것만 바라보고 살지는 않습니까?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소년이 길에서 5달러 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줍고 나서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이 있은 후였습니다. 그 소년은 또 다시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녔는데, 그만 그것이 그 소년의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길을 갈 때, 항상 땅바닥을 보며 갔습니다. 결국 그가 일생동안 길에서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수천개의 동전, 그 외에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동안 땅에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아름다운 꽃과 새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결국 넝마주이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되는 줄로 믿습니다. 땅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땅의 것으로 살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하늘의 것으로 살 줄로 믿습니다. 미래를 쳐다보고 사는 자는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것에 목숨걸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권면 합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사도 바울은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1절에서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주님이 오시면 자신의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마냥 주저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라톤의 이봉주 선수 이야기를 한번 더 하겠습니다. 이봉주 선수는 마라톤 월계관을 쓰기 위해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17일 새벽 우승한 제105회 보스턴마라톤대회까지 이봉주가 출전한 대회는 무려 25개라고 합니다. 그가 이제까지 참가한 공식대회에서만 그는 서울∼부산을 왕복하고도 200km나 남는 거리인 1,054km이상을 달렸습니다. 이를 400m 트랙으로 환산하면 2,637바퀴나 됩니다. 그러나 그가 마라톤 경기에서 달린 거리는 풀 코스를 달리기 위해 준비한 훈련량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마라토너들이 마라톤 경기에 나가기 위해 달리는 거리는 약 2,000∼2,500km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계산하면 마라톤에 입문하기 전의 5000m, 1만m, 10Km, 20Km 등의 경기를 제외하고도 이봉주 선수는 지금까지 최소 5만km, 최대 6만2500km를 달렸습니다. 이것은 서울∼부산을 100번 이상 달린 거리를,지구를 두바퀴 돌고도 남는 거리를 이봉주 선수는 발로 달린 것입니다. 그는 승리의 월계관을 쓰기 위해 엄청나게 달린 것입니다. 그는 또 다른 승리의 월계관을 위해 앞으로도 달릴 것입니다. 그는 이번 보스턴 경기가 끝난 후에 곧바로 한국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코치와 함께 오는 8월에 있을 세계선수권대회 마라톤 코스를 사전 답사하기 위해 캐나다에 들렸다가 한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인천공항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피로가 풀리는 대로 또 다시 달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봉주 선수가 승리의 월계관을 쉽게 쓰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준비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코스를 사전 답사하고 경기 코스와 비슷한 훈련지를 물색한 후, 그곳에서 이를 악물고 달리며 경기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준비를 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요?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사업가는 사업가로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신부로 세워지기 위해 준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오실 날을 위하여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닮아가고자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미래를 준비하십시오. 준비하되 우리에게 닥쳐질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흠없고 티없는 아름다운 신부로 세워지기 위해 날마다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의 면류관 쓰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과거를 정리하십시오. 떼어낼 것을 떼어내고, 잘라버릴 것을 잘라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푯대요 진정한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며 미래를 준비하셔서 찬란한 승리의 면류관을 얻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빌 3:12-16 / 김광일 목사
2009년 11월 5일자 경향신문에 60대 할머니가 운전면허 필기시험 950번째 도전하여 합격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주인공은 68살의 차사순 여사입니다. 완주 소양면에 사는 차여사는 2종 보통 필기시험 커트라인에 턱걸이하며 합격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녀가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한 것은 2005년 4월입니다. 전주 중앙시장에 채소를 내다 파는 차여사는 면허를 따서 운전을 하려고 환갑을 넘긴 나이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1차 관문 필기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면허시험장 출근길이 시작됐습니다. 거의 매일 운전면허시험장을 찾아 시험을 치렀지만 매번 합격선 60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면허시험장에 가기 위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거의 하루를 소일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들인 인지대만도 500만원이 넘는데다 시험장을 오가며 버스비와 식비 등을 합하면 1,000만원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차 할머니는 “계속 떨어지니까 창피해서 주위에 알리지 않았지만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워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2005년 4월부터 면허증 취득에 나선 할머니는 필기시험에서 949번이나 떨어지는 등 모두 960번의 도전 끝에 2010년 5월 면허증을 손에 넣었습니다. 차 할머니의 소식은 ‘의지의 한국인’ 이란 이름으로 세계 통신사를 통해 타전되면서 뉴욕 타임즈등 해외언론에 소개됐고, 시카고 트리뷴 신문에는 ‘960Times’ 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례적으로 차 할머니의 사진을 싣고 “아이들에게 도전정신을 가르치고 싶다면 차 할머니의 사진을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라. 아이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960번의 실패 끝에 운전면허를 따낸 올해 69세된 대한민국 할머니라고 말하라”고 조언하며 그녀를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기억시켜야할 ‘집념과 끈기의 귀감’ 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달려야 할 목표는 부름의 상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것은 부르심의 뜻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 자랑하던 것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 받은 것, 베냐민 지파, 바리새인, 학자라는 신분을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위해 달려가겠노라 고백합니다. 성취 지향적이 아니라 가치 중심적으로 살았던 모습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가 시상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의 ‘부름의 상’은 충성스런 성도가 받는 상을 뜻합니다. 성경에 보니 하나님은 정치를 잘한 왕에게 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부강한 나라로 만든 왕에게도 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다스린 왕에게 상을 베푸셨습니다. 맡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을 때 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첫째로 오직 잡히리라
이기풍(李基豊)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안수 받은 7명 목사 중의 한 분입니다. 이기풍은 본래 주먹을 쓰던 불량배로 선교사들에게 반감을 가져 행패를 부렸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 턱에 흉터가 있는 이유도 이기풍이 던진 돌 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합니다. 한번은 꿈속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기풍아. 기풍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말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로 가서 제주 선교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갖가지 우상숭배로 가득 차있는 영적으로 어두운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매도 맞고 굶주리기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후 그를 기념하는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관이 제주도에 세워졌습니다. 그가 쓴 종이 한 장, 그가 신던 신발 짝 하나도 찾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가 어떻게 예수께 잡힌 사람이 되었습니까? 선교기념관에 이기풍목사가 사모님께 남기신 유언장이 있었습니다. 첫 머리에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예수께 오직 잡히리라는 자세로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단순해져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잡다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께 붙잡혀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든 것이 예수께서 자신을 잡으셨기에 되어진 일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의 “그것은” 소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셨다면 분명 특별한 소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소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무엇엔가 잡혀 사는 존재입니다. 대부분 돈, 명예, 쾌락, 질병,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인질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질로 붙잡혀 고생을 하면 풀려나서도 마치 인질로 잡혀 있는 것 같은 상태가 얼마간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붙잡혀 남들과 대화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마귀에게 붙잡히면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무엇에 사로잡혀 일을 저지릅니다. 오직 예수에게 잡혀야 합니다. 예수에게 잡혔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앞이 보입니다. 부름의 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둘째로 오직 달리리라
‘나는 달린다’ 라는 저서는 독일 외무장관 요쉬카 피셔 (Joschka Fischer)가 2년 동안 달리고 달린 내용입니다. 피셔에게 48세였던 1996년은 위기의 절정이었습니다. 아내와 이혼했고 75㎏이었던 몸무게는 과로와 폭식, 운동부족으로 112㎏으로 늘었습니다. “나는 나의 삶 전체를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체중을 줄이는 것도 중요했지만 삶을 재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해야만 했던 피셔는 1996년 가을 아침 독일 본의 정부청사 앞에서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심장은 터질 것 같았으며 더 이상 달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셔는 중단하지 않고 매일 아침 달렸습니다. 갈수록 몸의 상태가 호전됐습니다. 라인강변을 따라 달린지 1년 만에 피셔는 75㎏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98년부터 마라톤 완주에 성공하며 함부르크,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달렸습니다. 현직 장관의 달리기와 엄청난 감량은 당연히 독일 언론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달리기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육체와 운동, 노력과 내적인 평온, 나는 이런 매일의 체험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나는 달리기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목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정체된 삶도 달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계속 달릴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인생이란 달림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왜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리는 것으로 삶을 설명하였습니까? 푯대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서는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끝까지 달려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바라본 푯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마침내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온전함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무리 이룬 업적이 뛰어나도, 아무리 경건과 영성이 뛰어나고, 아무리 자신이 양육한 제자들이 많아도 주님과 같아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달렸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오직 달린 것입니다.
셋째로 오직 행하리라
선교사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가 인도에서 복음을 증거 했으나 사역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열매가 없어요. 이제 지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존스에게 물으셨습니다. “존스야, 네 앞에 사과나무가 있는데 지금 사과가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직 철이 아니기에 사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사과나무 뿌리가 땅 속에 깊이 박혀 있고 사과나무 잎이 태양 빛을 받는다면 언젠가 사과 열매를 맺지 않겠느냐? 너의 사역에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하나님은 스탠리 존스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는 그 후 포기하지 아니하고 사역을 계속한 결과 많은 영혼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급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 없음에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군대가 한 줄로 행진해 나가는 것처럼 그대로 가면 됩니다. 예수 한 분으로 족하며 믿고 의지하며 살아 온 그대로 계속해서 나가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완전을 향하여 매일 매일 달려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름의 상을 목표로 달려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삶은 항상 좋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힘든 고난과 시련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좌절하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달려야 합니다. 시련이 있으면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어에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Keep going! -계속 가세요!” 입니다. 좋은 일이라고 확신하면 계속 그 일을 고수하고 “Keep going”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85년도 뉴욕 마라톤 대회에 린다 다운 (Linda Down)이라는 여성이 참가했습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그녀는 목발인 크러치를 양쪽 겨드랑에 의지하여 마라톤 풀코스를 12시간 만에 완주하였습니다. 온 몸을 앞뒤로 흔들며 뛰는데 모든 인파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고된 코스를 완주한 그녀에게 레이건 대통령도 전화로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마라톤을 다 마치고 그녀가 고백하였습니다. “나에게 강한 의지와 노력할 수 있는 인내와 크러치를 받칠 수 있는 두 겨드랑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치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리는 선수와 같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부름의 상을 위하여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 잡혀야 합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해의 끝에서 새로운 다짐
빌 3:12-16 / 김필곤 목사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소련으로 도망가 영주권을 가지고 살았는데 히틀러는 도망간 유대인을 잡아 넘길 때마다 많은 돈을 주었답니다. 러시아 경찰들은 돈벌이가 생겨 유대인들만 보면 영주권 조사했는데 유대인 두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본 경찰은 영주권 조사를 하려고 따라 갔답니다. 한 명은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한 유대인은 영주권이 없었습니다. 영주권이 없는 유대인이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며 "네가 도망쳐라."라고 했답니다. 경찰은 도망가는 유대인이 영주권이 없구나 생각하고 쫓아가 잡았답니다. "너 영주권 없지?" 경찰이 물었습니다. "있어요." "어디 봐." 그는 영주권을 보여 주었습니다. 경찰이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쳤어?"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의사가 나에게 약 먹고 뛰라고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따라가는 것을 보았으면 서야지?" 유대인이 말했답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경찰님에게도 약 먹고 뛰라고 그런 줄 알았어요." 2012년 한 해 부지런히 달려왔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지고 감사하시는 성도님도 계시겠지만 만족하지 못한 결과 앞에 낙심하는 성도님도 계실 줄 압니다. 올 해로 끝이 아니라 내년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2012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오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다짐을 하길 원할까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인생의 푯대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인간의 교훈서나 자기 개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때 감옥에 있었습니다. 노년의 때입니다.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금을 받고 편안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보장된 노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안정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 한 채도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때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인간적으로 볼 때는 파산되고, 부도나고, 실패한 때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연말이 되었는데 별로 되어진 것도 인간적 희망도 없는 때입니다. 이 때 바울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14절 같이 읽겠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 포기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후회하거나 낙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무엇을 향해 달려간다는 말입니까? “푯대”입니다. 목표물입니다. 그 목표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출세하는 것, 사업에 성공하는 것, 부자가 되는 것, 건강, 명예, 권력이겠습니까? 바로 뒤에 나옵니다. ‘부름의 상’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 그 상의 성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만 인생을 완주하고 주어질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 상급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故) 함석헌 선생님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 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명정을 주시고 내 대신 살아 달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내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살다가 보면 때로는 잘되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고, 때로는 웃는 일도 있고, 때로는 우는 일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푯대가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분명한 목표가 있듯이 이륙하는 비행기가 착륙지점이 있듯이 우리 인생은 분명한 푯대가 있습니다. 늘 시선을 고정하는 푯대 말입니다. 바로 그 푯대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영광스런 상급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견딜 수 있고, 희망과 기쁨에 부풀어 있었던 것은 영원한 상급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목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인생 결승점에서 잘했다 칭찬하실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나가야 합니다(14b).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서 12장 26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그 나라의 상급에 대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자꾸 곁길로 가고 힘이 없어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니라"(히11:6).
어제 저녁 눈이 왔습니다. 저녁에 눈을 치우고 아침 새벽 4시에 나가 보니 또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혼자 눈을 치우는데 여전도사님이 오셔서 같이 눈을 치웠습니다. 반절 치우고 반절은 놓아두었습니다. 와서 누군가 치우며 하나님의 상급받을 자가 있겠지 홀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왔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최 집사님이 와서 혼자 남아 있는 반절의 눈을 다 치우고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늘에 상급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올 한 해 주님을 위해 수고한 모든 것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처럼 주일날 한 번도 놀러가지 못하고 교사로 헌신하고, 성가대로, 찬양 리더로, 식당 봉사로, 가난한 사람 구제로, 장학 사업으로, 최빈국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어려운 나라에 교회를 건축해 주는 일로 헌신하고 수고한 모든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몇 개월 전에 몇 년 동안 적금을 들어 해외에 가족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헌금한 집사님 부부가 계십니다. 쓰지 않고 허비하지 않고 적금을 모아 해외에 교회를 짓겠다고 헌금한 그 마음을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늘의 상급이 크실 줄 믿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주님 안에서 목표를 새롭게 다짐하는 연말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선한 행위에 대한 상급의 약속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1-42)”
물질의 충성에 대한 상급도 약속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물질과 가정을 희생하면 금세와 내세에 크게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인생의 푯대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흔들리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의 끝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데 필요 없는 과거를 잊어버리길 원하십니다.(13b)
바울은 지나온 과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겠다.”고 말씀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지나온 과거는 잘 된 일도 있고 잘못된 일도 있습니다. 잘 된 것에 집착하면 자랑이 되고 교만이 됩니다. 과거 잘못된 일에 집착하면 올무가 되고 거침돌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삶이란 시간 속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은 잘되었던 잘못되었던 다시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단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자는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할 사람이 살아 온 뒤를 자꾸 본다면 어떻게 제대로 경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 후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 못 중 하나가 무엇이겠습니까? 시시 때때로 과거 애굽 생활에 집착하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자유가 없는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미화합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예수 안 믿었을 때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았을 때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우리 주님을 위해 사는데 필요 없는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데 방해되는 걸림돌은 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지난 해 실패했던 것, 가슴 아팠던 것을 다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잊어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에 집착하면 좌절합니다. 과거의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과거에 집착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우상 장사의 아들입니다. 자기 부인을 두 번이나 비겁하게 이방 왕에게 내어 준 자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형과 아버지와 삼촌을 속인 사기꾼입니다. 이삭을 어떻습니까? 그도 아버지를 본받아 아내를 외간 남자에게 내어 준 사람입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살인자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간음한 사람입니다. 과거의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 속에는 밑바닥 인생에서 시련을 이기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비천한 신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목축업과 도살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빵집 아들이었으며, 천체 망원경을 발명한 케플러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선술집에서 종업원 노릇을 하였습니다. '전기분해의 법칙'으로 유명한 패러데이는 대장간 집 아들이었습니다. 프랑스가 낳은 천재적인 물리학자이자 대수학자인 라그랑주의 아버지는 투기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성공했다면서 "만약 내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아마도 오늘날의 위대한 수학자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과거의 올무에 잡혔다면 역사 속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맛있는 과일은 빛만 있어도 안 되고 빛과 어둠이 적당히 조화되어야만 합니다. 몇 번 실패했다고 실패한 과거에 집착하여 의지를 꺾지 말아야 합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평생 모은 재산인 뉴져지주 웨스트오렌지에 있던 공장과 연구시설 (당시 평가 2백만불)이 전소하였습니다(1914/12/09). 24세의 아들 찰스군이 불탄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67세의 아버지 에디슨 곁에 와서 위로의 말을 하자 에디슨은 부인까지 불러내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기존 건물과 묵은 시설이 아까와 뜯어 고치지 못하는 나의 작은 마음을 책망하시려고 새 것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는 패배를 내일의 성공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의 끝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데 필요 없는 과거를 잊어버리길 원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3:12-13a).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대단한 일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곳에 교회를 세웠고, 수만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12a, 13a). 그는 계속 기록 향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12b). 12,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미 얻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올 한해 무엇인가 얻은 것이 있습니까? 취업이 되었습니까? 원하는 학교에 진학을 하였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부를 얻었습니까? 건강을 얻었습니까? 열심히 전도하여 생명의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열심히 봉사했습니까? 이미 얻었다고 만족할 때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전거는 가지 않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 일독을 하였습니까? 조금 온유해졌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까? 이룬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숙과 성취에 만족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은 머물 때 썩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만 해야 하겠다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년에 더욱 열정을 내어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지막 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연말이 되면 이제 내년에는 그만해야 하겠다고 자꾸 회피하고 싶은 경향이 있습니다. 사명 붙들고 더욱 바울처럼 열정을 가지시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목표가 분명한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고자하는 열망 그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목표만 세웠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이 사역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바울은 죽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면 기도하여 기적을 일으켜 간수를 변화시켰고, 편지를 통하여 양육하였습니다. 마지막 사도행전을 마치면서도 셋방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의 열심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고후11:2)”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열정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힘을 다하여 복음 전하는 일, 말씀을 가르치는 일, 상담하는 일에 수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려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저녁 한 집사님이 식사를 하자로 해서 등산을 하고 교회에서 청소를 하신 여러 집사님들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부부가 바닷가에 가서 일출장면을 찍었다고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내가 입맛이 까다로워 좋아하는 음식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 몇 시간씩 밤에 차를 타고 먹고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온 일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업도 잘하시고 부부가 아주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집사님이 열린 교회에서 목회하면 나보다 더 잘 하시겠다”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21번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면 최소한 21번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군 조종사가 모의 훈련을 몇 번 하는 것이 실전에서 가장 효과적인가를 알기 위한 조사에서 나온 법칙입니다. 늘 남보다 뒤떨어진다는 의식에 발목 잡힌 사람에게는 100번의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안 되어도 100번 반복하면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머리가 달라붙으면 전류를 흘려보내 감전시키는 실험에서 거머리는 떨어지고 붙고를 반복하다가 100번째에는 안 붙는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없는 거머리도 100번이면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거머리도 100번에 통했다면, 사람이 100번 반복하면 통한다는 것입니다. 습관과 관련하여 "10년 법칙"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취에 도달하려면 최소 10년 동안 집중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성공하는 사람들의 열정 포트폴리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넬슨 만델라, 지미 카터, 달라이라마를 위시한 세계적인 기업가, 정치가, 학자, 작가, 음악가, 크고 작은 기업의 CEO들, 퓰리처상이나 아카데미상 수상자들, 교사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노벨상 수상자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성공한 전 세계 200여 명의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 지속적인 성공 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년에 걸쳐 이들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행동과 사고방식의 패턴을 찾아냈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을 도출해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열정'이었다고 합니다.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열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추구한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이루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정의 사람들입니다. 열정을 가지면 절망적 상황도 희망의 거름이 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표준)
2012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새해를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인생의 푯대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의 끝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데 필요 없는 과거를 잊어버리길 원하십니다.(13b)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3:12-13a).
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 이필재 목사
연초가 되면 개인도 단체도 국가도 모두 새해에 대한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표를 세워봤자 지켜지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으니 소용없는 일이다. 마음만 더 산란해진다.” 특별히 어떤 나쁜 습관에 대한 정리를 목표로 하면 더 안 된다고 합니다. “나는 새해부터 술을 끊겠다.” “담배를 끊겠다.” “도박을 안 하겠다.” 이런 목표를 세우는데 언제나 답은 똑같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러면 아예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더 좋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잘 안 지켜져도 목표는 세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목표는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한 목표를 내 머리에 자꾸만 입력시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효과가 있는 작동을 하도록 우리 뇌의 구조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9번 실패했어도 한 번의 성공을 위해서 목표를 세우라고 심리학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선한 결심이 자꾸만 무너지는가? 이것도 심리적으로 작용을 하는데 과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여태까지 했던 일인데 결심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이런 심리 작용이 나로 하여금 그 길을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평생 하던 일을 이제 끊어봤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런 체념적 심리작용이 언제나 나에게 장애물이 되고 방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바울 사도는 뭐라고 합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말은 바보같이 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뒤에 것에 구애받지 말고 오늘이 그 시작이라는 새로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두 가지 반응이 언제나 나타납니다. 과거가 너무 화려했던 사람도 그것이 방해가 됩니다. 너무 과거에 좋았던 기억이 오늘을 좌절하게 만드는 영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명심이나 아니면 명예심에 집착한 나머지 현재 위치를 비하하는 일들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누구였는데 지금 이런 일이나 하고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아마 우리가 외국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카터 대통령은 지금도 주일학교 선생님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 성경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합니다.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소문난 미국 목사님이 한분 계신데 선교사로 20년 살았습니다. 아주 잘했습니다. 돌아와서는 그를 후원하던 교회에 마침 담임 목사가 안 계셔서 담임 목사님을 하라고 해서 허락하고 얼마 담임목사로 사역하더니 그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물었더니 “그냥 교인으로 살아보겠습니다.” 목사님이 장로교회에 계셨었는데 “그러면 이 교회 장로로 계십시오.” 1년 하시더니 “장로로 못하겠습니다. 장로 하다가 싸움만 나고 마음만 불편해지고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뭐하실 겁니까?” “집사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집사를 하더니 “이것은 천사의 직분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평생 집사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까지 집사로 섬기고 계십니다. 괜히 교회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면 의견 충돌이 일어날 경우 마음이 불편해지고 어떨 때는 잠을 못 자는데 이 집사는 봉사만 하면 되니까 정말 좋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 별명이 천사 집사입니다. 여러분도 기억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대구에서 큰 대형 교회 목회하셨고 미국 오셔서도 목회를 잘하신, 저와 친구라면 친구이신데 김상구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저보다 7~8년 나이가 위이십니다. 아주 덕망이 있으신데 그분의 특징은 평생 화를 안내십니다. 화 안내시기로 아예 작정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화를 내지 말라고 했으니 나는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화 안내시는 것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은퇴하셨습니다. “이제 뭐 하실 겁니까?” 자기 후배 목사 교회에 가셔서 베이스 파트에서 성가대 하십니다. 제가 그 교회 부흥회를 하러 갔다가 그분을 만나서 성가대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늘나라 주인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어려운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과거 자랑을 하도 많이 하니까 “누구든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도 더욱 그러하다. 나도 과거를 한번 들춰내겠다.” 그러면서 쭉 말했습니다. “나는 8일 할례자요” 유대인은 8일 할례자만 출세합니다. 중간 할례자들은 취급도 못 받습니다. 할례 없는 사람이나 중간 할례자는 그 사회에서 사람 이하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들고 나온 것입니다. 8일 할례자만이 절대 평가 받고 신분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족속이요.” 유대인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순수 국적이 아닌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것을 지독하게 따지는 사람이 유대인들입니다. “나는 순수 국적이요 베냐민 지파요” 이것은 왕손이란 말입니다.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그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혈통이 순종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이스라엘 선교사 제이 목사는 지금 이스라엘에 가서 제일 겪는 고통이 뭐냐고 물었더니 “너는 왜 유대인이 한국 여자와 결혼했느냐?” 이게 제일 큰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물으니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무척 따집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만을 평가를 받습니다. 여러분! 이삭도 이스마엘도 다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이복형제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른 본처와 후처의 자손이라고 하는 그 문제 때문에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내가 바리새인이요” 복음서에 왜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그렇게 의견 충돌이 많았는가?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아는 게 많습니다. 누구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아는 체 못합니다. 우수성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했습니다. 최고 명문대학 출신이란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입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최고의 국가 법적 기구 회원이 되었고 최고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거를 다 들춰내고 마지막에 하는 말 “나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노라.” 똥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화려했던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래야 앞을 향해서 갈 수 있다. 나의 현재 크리스찬 삶에 지장을 주고 있는 과거는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나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이게 크리스찬의 삶의 모습이다.”
어떤 때는 반대로 과거에 죄를 많이 진 경험이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도 암흑가 주먹 출신들이 얼마든지 있고 북한 공산당이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반공포로로 석방되는 바람에 잡혀 있다가 살아난 사람 가운데 제 주변에만 해도 목사가 세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형당할 입장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부흥사로 잘 나가는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다른 분야의 세상의 많은 직업들은 과거가 험악하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서 나쁜 점수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국회에서 청문회 하는 것을 보십시오. “과거에 당신은 이런 것이 있었다, 저런 것이 있었다.” 하면서 별것을 다 끄집어내서 밝혀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떤 때는 과거가 험악할수록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과거를 잊어라.” 이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 앞에서는 “뒤의 것은 잊어버리라.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가라.” 지금 이렇게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큰 이유는 목표를 잘못 세웠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National Association For Mental Health”라고 하는 “정신건강협회”라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발표한 것 가운데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안내가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있는데, 첫째는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해봤자 나 같은 놈은 안 돼!’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안 된다고 합니다. 죽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자살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뇌에 자꾸 입력되기 때문에 그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사람 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답니다. 자기가 말하는 대로 나를 인도한다고 합니다. 행복한 조건들이 넉넉히 있는데도 불행 요소들을 자꾸 기억하려고 하면 구제불능적 사람이 됩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복하게 사는 둘째 비결이 자기 평가를 현실적으로 해서 목표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 같은 목사는 목사의 행복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목사가 재벌을 목표를 정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같은 목사끼리도 절대 남과 비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나보다 우수한 사람을 생각하면 별안간 내가 초라해지더라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그 사람이 행복합니다. 남의 부인 아무리 예뻐 봤자 제 아내만 못하단 말입니다. 이것을 자유함이라고 합니다. 이 자유함이 없는 사람은 별것을 다 마련해 주어도 늘 불평만 합니다.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니는 우리 갈보리교회 참 행복하다.’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항상 다른 교회 우수한 점을 들어서 불평하는 교인 많습니다. 그 사람은 그 교회에 가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어디 가도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통계로 보면 미인과 사는 남자들이 바람을 더 핀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연예인들은 왜 이혼율이 그렇게 높습니까?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는데도 오래 못살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삶의 현장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살면 넉넉히 성취할 수 있고 행복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성경말씀에 바울은 무엇이 목표였는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본래 바울 사도의 인생 목표가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로 유명하고 존경을 받는 철학자요 역사가인 알렉산드리아 필로라는 인물이 그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되는 것이 그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헬라 철학에 능통해야 되기 때문에 헬라 철학을 공부했고, 종교적으로는 율법의 전문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율법학교를 다 마쳤고, 바리새인이 되었고, 그런 조건들이 다 구비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와 유대의 인정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유대 교회에 충성하고 로마에 충성하기 위해서 스데반을 돌로 때려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서 옥에 가두고 “나같이 열정이 있느냐?” 온 천하에 최고의 열정이 있는 사람으로 부각시켰습니다. 그 일을 더 확대하기 위해서 이웃 나라 다메섹까지 진출하다가 길바닥에서 예수님께 잡혔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잡힌바 되어서 예수님이 그를 잡은 목표인 세계 선교에 쓰이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소원은 달라졌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하신 그 자체가 나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나는 좇아갑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자기 삶의 목표를 새로 정합니다.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니라.” 이렇게 목표를 정하고 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목표가 두 가지입니다. 1차적인 목표가 있고 2차적인 목표가 있는데, 1차적인 목표는 다 똑같고 2차적인 목표는 다 다릅니다. 1차적인 목표로 다 똑같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대로 내가 살아가겠다.” 이 1차적인 목표는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2차적인 목표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삶의 목표를 현실적으로 적응시키려면 손해가 난다는 판단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대로 살았다가는 괜히 손해난다. 돈 손해나고 시간 손해나고 인격 손해난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절대 손해가 안 납니다. 1899년에 어떤 사람이 콜로라도 롱먼트에 고기 집을 하나 내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믿음 좋은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기 집을 내놓고 파니까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고깃간을 유지하려면 자기 신앙에서 용납이 안 되는 일을 해야 유지가 되는 그런 상황이 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날에는 자기 신앙으로 봐서는 문을 닫아야 되는데 주일날 고객이 가장 많이 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하지만 내 신앙대로 살아야겠다.’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여보시오. 당신은 이 동네 와서 이제 거지 되겠소. 당신이 하는 일을 보니까 망할 짓만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사업이 된단 말이오? 이 어려운 세상에 손님이 토요일, 주일에 많이 찾아오는데 교회 봉사한다고 토요일에 문 닫고, 주일에 문 닫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자기 신앙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에 반대되는 일이 자꾸 생기니까 끝까지 고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의 예언대로 망해버렸습니다. 돈 한 푼도 없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거 보시오. 우리도 하나님 믿고 살지만 당신처럼 하나님 믿어가지고 누가 살겠소? 하나님도 당신 같은 사람은 도와주실 마음이 없을 거요. 현실에 적응하고 맞추셔야지….” 그래서 동네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필요 없소.” 그러면 그가 그렇게 신앙으로 지켰다는 자부심은 무엇입니까? 그가 고집하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신앙 일차적으로 정하고 내가 살아야지.” 그러니까 사업 성공을 목표로 정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자유함을 목표로 정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그 이름이 점점 미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사업가가 되어서 1971년에 95세로 죽었습니다. 그때 계산해보니까 미국 전역에 그의 상점, 백화점 1,660개 점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10대 크리스찬 기업가 중의 하나가 되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제이 시 페니(J. C. Penney)입니다. 우리나라도 무척 많이 도와준 사람입니다. 신학교에 장학금도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그 해 교회 표어를 “중단 없는 순례 공동체”라고 정했습니다. 지금 와서 결산을 내니까 우리 갈보리교회는 지난 10년 동안 영혼을 찾아 헤매는 지구촌의 순례자 같이 살았다고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더 이 교회가 중단하지 말고 그대로 이 표어대로 10년 또 가라고 제가 금년의 표어를 10년 전 것으로 정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주어지는 아름다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은 다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구체적 사역자로 제일 먼저 부르신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고 역사 신학에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를 선택하자마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첫 번째 주신 사명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나그네로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로 평생 살았습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어 영적 축복의 큰 은혜를 받았는데 팥죽 한 그릇 사건 때문에 나그네로 평생 또 살았습니다. 요셉은 17살에 고향을 떠났는데 110세가 되도록 나그네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히브리 민족은 끝없는 나그네, 바벨로니아에서 70년 나그네 생활, 애굽에서 440년 나그네 생활, 근래 역사의 1,500년 동안 방황한 나그네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전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유대 민족은 언제나 본국에서 사는 숫자보다 외국에서 사는 숫자가 훨씬 더 많은 민족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 아브라함의 혈통이 420만이요 귀화 민족이 80만이라고 해서 500만 이스라엘 인구가 되는데 해외에 사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미국에만도 유대인이 620만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신명기 26장에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인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신약 사도 시대에 와서 똑같은 순례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서 예수 믿는 믿음의 공동체는 다 순례자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떠나 디아스포라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순례자로 만드십니까? 나그네가 되어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 당시 남쪽은 애굽 문명이 있었고, 동쪽으로 연결된 끝없는 대륙과 지중해 해상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의 중심지라서 온 세계 사람이 드나드는 장소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애굽의 장사꾼이 거기 왔다가 요셉을 인신매매해서 은 20세겔에 사가지고 가는 모습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곳에 아브라함을 세웠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불빛 하나를 세계인이 오고가는 그 중심에 하나 세워놓음으로 말미암아 오고가는 수없이 많은 세계인에게 그 신앙의 불빛을 보여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나그네로 살게 하신 이유 가운데 이 땅이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본향으로 돌아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이 땅에서는 누구든지 외국인과 같은 심정으로,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순례자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너무 튼튼하게, 이 세상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튼튼하게 내 주변을 마련해도 우리는 언제나 미완성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 향해서 본향을 향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가대가 “이 세상 나그네 길” 찬송을 불러주었지 않습니까? 토인비 박사가 말한 대로 이 세상의 모든 문명은 종교를 기초로 이루어졌습니다. 인도 문명은 힌두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중국은 유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회교 문명은 이슬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애굽 문명은 아문 신종교 때문에 기초가 되어서 생긴 것이고, 서구 문명은 절대 기독교입니다. 인류 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헬라 문명과 로마 문명인데 그 문명들은 다신교적 종교 의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문명도 일본의 신도와 불교의 합작품입니다. 그러면 한국 문명과 문화는 뭐가 기초입니까? 무당종교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종교가 마지막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무당화 되는 것입니다. 지난 200년 동안 한국 기독교는 그 문제의 정리 때문에 수많은 갈등을 겪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 21세기 한국 교회가 가야될 목표가 어디입니까? 바로 기독교 문명과 문화의 확실한 정착이라고 생각하고 가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계의 확실한 것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이단들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번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단들이 한국에서 이렇게 잘됩니까? 바로 한국 종교인의 모든 기초가 무당 종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춤을 잘 추는 무당 같은 사람이 그럴 듯한 주문을 하나 작성하면 사람들이 비판도 하지 않고 우르르 몰려갑니다. 지금 대한민국만 해도 내가 재림 예수라고 춤을 추는 교주들이 수십 명 있는데 하나같이 다 잘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유일신과의 이해 부족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무당 종교는 다신교로 뭐든지 신개념을 두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무당 종교는 다신교 개념입니다. “어떤 것도 신 개념을 둘 수 있다.” 그게 힌두교나 무당 종교에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기독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분 밖에 안 계신 유일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무당 종교이기 때문에 이러한 다신교 개념들이 우리나라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의 메시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 바로 우리 교회는 그것을 푯대로 정하고 요즘 번성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 같은 것을 절대 배격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메시야요 구세주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교회 일을 고백하고 주님의 진리대로 섬겨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언론에까지 자꾸만 거론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대형교회 세습화 문제입니다. “마치 교회를 자신의 기업처럼 성장시켜서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훌륭한 일이냐?” 심심찮게 비판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감리교단에서 세습방지법을 총회에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비판해 보십시오. 외국에서는 세습이 오히려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그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도 오랄 로버트 목사, 로버트 슐러 모두 다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절대 비판 거리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 외국은 세습이 악습이 된 문화가 아닙니다. 세습이 더 아름다운 문화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습이 악습이 된 문화였기 때문에 이것이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에 왕 세습 문화라서 비록 나이가 10살 밖에 안 된 어린애라도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라를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국민이 다 겪어야 되는 문화에서 우리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아! 이 세습은 악습이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강한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는 북한이 세습 왕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세습을 악습으로 보는 문화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예수로 정하고 모든 일에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결정을 해야 그것이 살아있고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2013년도 1년도 우리 모두는 주님을 푯대로 바라보면서 이 한해에 우리에게 또 주어진 이 역사적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한 해 동안 우리 갈보리교회 모든 교우님들 가정에 하나님의 세밀하신 보호와 관심이 있어지기를 기도하고 성도 여러분! 우리 일 년 동안도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Christian Perfection.
빌립보서 3:12-16 / 김태환 목사
신앙생활을 여행에 비유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journey of faith (신앙의 여정)”이라는 말을 씁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 온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소아시아 지방을 누볐던 것도 “제 1차 전도여행” “제 2차 전도여행” “제 3차 전도여행”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제 4차 전도여행”이라고 합니다. 영어 표현으로 하면 “Paul’s First Missionary Journey” “Paul’s Second Missionary Journey” “Paul’s Third Missionary Journey” “Paul’s Fourth Missionary Journey”라고 합니다.
또 우리 믿음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할 때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2에 “우리 앞에 있는 경주를 열심히 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없애 버리고, 우리를 쉽게 옭아매는 죄를 벗어 버립시다.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And let us run with endurance the race God has set before us. We do this by keeping our eyes on Jesus, the champion who initiates and perfects our faith)”라고 했습니다. 또 디모데후서 4:7-8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I have finished the race),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 3장에도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과거의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힘껏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13절).” “I press on to reach the end of the race (나는 결승점을 향하여 힘껏 달리고 있습니다., 14절).”
모든 달리기에는 결승점이 있습니다. 출발선에서부터 그 결승점까지 달리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출발선에서부터 43.195 km (26.2 miles)를 달립니다. 보스턴 마라톤은 합킨톤 (Hopkinton)에 있는 한 지점을 출발해서 웰슬리 대학을 지나서, 보일스톤 스트리트 (Boylston St.)의 퍼블릭 라이브러리까지 43.195 km를 달립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100m 달리기를 좀 해 봤는데요. 100m는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마라톤은 2시간 넘어 달리는 것이니까 달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은데도 선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답니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경기이니까 빨리 결승점을 통과해서 이 경기를 끝을 냈으면 하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2절).” 다른 생각 없이, 목표를 향해서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주 (footnote)에 “이미 목표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I don't mean to say that I have already achieved these things or that I have already reached perfection. But I press on to possess that perfection for which Christ Jesus first possessed me”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직역하면 “내가 이 같은 일들을 이미 성취했다는 것이 아니며, 내가 이미 완전에 도달했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무엇보다 그것을 위하여 먼저 나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신 그 완전 (perfection)을 소유하려고 힘껏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인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그의 것으로 삼으셨을까요? 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요? 그래도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을 자꾸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학적인 상상력이 생깁니다. 그래야 신학적인 사고가 익숙해집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철학적인 사고가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철학적인 사고는 사물의 존재와 근원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고라고 한다면, 신학적인 사고는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도 “왜 (why)”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에게 대답하는 것을 듣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으셨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로마서 15:16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여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직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고쳐 말하면 “나의 직무는 이방인들이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할만한 사람들이 되도록 (to be an acceptable offering to God)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흠이 없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물을 고를 때 “흠 없는” 어린양을 골랐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성경에는 이 말씀이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It was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베드로전서 1:19)”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언제나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온전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는 것 아시지요?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nd all your mind., 마태복음 22:37).” 예배도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부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2% 부족한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 예배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그의 것으로 소유하셨을까요 (Why did Christ Jesus possess you)?” 한번 이 질문에 대답해 보시지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I have not yet reached perfection. But I press on to possess that perfection for which Christ Jesus first possessed me (나는 아직 완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것을 위해서 나를 그의 것으로 소유하신 그 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힘껏 달려가고 있습니다)”라고요.
오늘 설교 제목이 “크리스천의 완전 (Christian Perfection)”입니다. 과연 “크리스천의 완전”이란 말이 가능한 말일까요? 오히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은 없다” 이런 말을 더 많이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볼 때도 크리스천의 완전이란 말은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 자신에게도 완전 (perfection)이란 말이 부담이 많이 됩니다. “완전이라니? 말도 안 돼!”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의 완전에 말씀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도록 하여라 (Therefore you shall be perfect, just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마태복음 5:48, NKJV).”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If you want to be perfect),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1)!” “나는 여러분이 선함이 가득하며 완전한 지식이 있으며 (complete in knowledge, NIV), 서로 권면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마서 15:14).”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완전 (perfection”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완전해 지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Pharisees)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한 청년이 대화를 합니다. 그 청년이 먼저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청년이 다시 묻습니다.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 하지 마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런 계명들이다.” 그 바리새파 청년이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 다 지켜 왔습니다. 그 밖에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9:20)?”
이 청년은 분명히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완전하게 율법의 규정들을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 청년이 완전하지 않다고,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If you want to be perfect),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식으로 율법의 규정을 완벽하게 지켜서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완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perfect 하다, 아무 결점이 없다, 완벽하다, 전혀 결점이 없다” 이런 의미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의 완전이란 무슨 뜻입니까? 몇 가지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1. 크리스천의 완전이란 말 속에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인간은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인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다시 찾는 것이 크리스천의 완전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2. 크리스천의 완전이란 말 속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성장의 목표가 완전 (perfection)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4:13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We all come to the unity of the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to a perfect man, 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3. 크리스천의 완전이란 말 속에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곧 우리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완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이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계속해서 성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고과 생각을 완전히 지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죄가 들어올 여지 (room)이 없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성장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자신의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2,000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으로 드려지고 싶다"는 신앙고백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목표는 크리스천의 완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나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가고 (press on) 있습니다. 나는 이 경기 (race)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참고) 크리스천의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정리하는 사람은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입니다. 웨슬리는 그의 나이 23살이 되던 해인 1725년에, 제레미 테일러 (Bishop Jeremy Taylor, 1613-1667)가 쓴 "거룩한 삶과 죽음의 법칙과 훈련 (The Rules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을 읽고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필요를 깊이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전부를, 즉 그의 생각, 말, 행위 일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듬 해인 1726년에 웨슬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1471)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itation of Christ)"를 읽으면서, 종교의 내적 본질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기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1728년에 또 두 권의 책을 읽습니다. 바로 윌리암 로우 (William Law, 1686-1761)가 쓴 두 권의 책을 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실제적인 논문 (A Practical Treaties upon Christian Perfection)"과 "헌신적이며 거룩한 삶으로의 심각한 부름 (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웨슬리는 하나님께 반 쪽만 바치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자기의 몸과 생명, 그리고 전 재산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23살이면 대학생 나이입니다.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 시절에 이런 크리스천 고전들을 읽으면서 자기의 생각을 정리했던 것입니다. 웨슬리의 삶이 주는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왜 오늘 우리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런 위대한 도전이 없을까요?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의 고전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성숙하게 만들어 가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내 인생 모두를 주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
빌 3:12-16 / 오창우 목사
사람들은 행복한 교회에 다니길 원한다. 우리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힘쓴다. 당회가 가장 고민하고 애쓰는 것은..“어떻게 해야 교인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이다. 행복하니까...신앙생활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할렐루야! 서로 인사합시다. 행복합시다!(행복합시다!)
에릭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 라는 책은 우리들의 삶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소유를 많이 해야 하는 ‘소유의 가치’가 아니라...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가치’에..행복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 성경은 아주 짧으면서도 분명하게...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A. 하나님의 복음,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12-16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12절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2)13-14절 “위하여 달려가노라”
3)15-16절“온전히 이룬 자의 생각,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일, 그대로 행할 것”
-하나님의 마음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12절에는 ‘잡으려고 달려가고..’13,14절에는 ‘위하여 달려가고..’고 했다. 같은 ‘달려가기’ 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12절의‘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사자가 먹이를 발견하고 먹이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추적하여.. 소유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서 보는 것처럼..먹이를 찾는 동물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먹이를 향해 달려간다. 그 먹이는 그 때 그 때마다 달라진다. 멧돼지가 될 지..꿩이 될지..아니면 호랑이나 곰 같은 사나운 맹수가 될지 모른다.
그런데..13,14절의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푯대가 있다. 푯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달리기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는 골인지점이 푯대이다. 명예를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선수들은..금메달을 따기 위해..끊임없이 같은 길, 같은 거리를 반복하며 달리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한국이던 미국이던 아프리카라도 같은 진리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사도바울은 잡으려고 달려가는데..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린다는 ‘뒤의 것’은 무엇인가? ‘잡으려고 달려가는 삶’이고..‘아직도 잡지 못한 삶’이다. 그래서..이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가 있는 달음질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3 가지인데... 15-16절에 보면, ‘온전히 이룬 자들의 생각’, ‘우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타내실 것, 더 나아가..’‘그대로 행할 그 일’이라는 것이다.
프로골프의 박세리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박세리 선수는 과거에는 많은 우승을 했고 지금은 우승횟수가 거의 없는데도.. 지금이 행복하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도 단순히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하여 달려가는”즐기면서...행복하고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삶이다. 이것이 온전한 신앙인들의 생각과 하나님께서 적극 개입하시는 일과 신앙의 선조들조차 권장하시는 신앙인의 삶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푯대를 향하여 다려가 상을 받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여러분 행복하십시오..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B. 하나님의 계명,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이 되려면..?
첫째, 붙잡혀 살지 말자.
12-13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1)12절 / 온전히 이루지 못해..잡힌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2)13절 /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붙잡혀 살면 불행하다. (사명)
‘내가 왜 저런 놈을 만나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내가 왜 저런 자식을 낳아서 이런 개고생을 하는가?’‘내가 왜 저런 부모를 만나서 등록금을 걱정하고 남들이 다 입는 명품하나 갖지 못하는가?’‘내가 왜 이런 직장에서 저런 못된 상사를 만나서 이 모양인가?’‘내가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이런 고생인가..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이렇게 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붙잡혀 사는 사람들이다. 붙잡혀 사는 사람들은..동물원의 동물이나 노예가 되서 사는 사람들이다. 동물원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잠잘 곳..걱정할 것이 없으나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행복할 수는 없다. 감옥에 살면..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다 해주니까...그렇다고 감옥에 사는 것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유도 없고 희망도.. 삶의 의미도 없으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는 것도 붙잡혀 살지 말자는 것이다.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다메섹에서 붙잡으셔서...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제자들도 가지 않는 1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바나바라는 좋은 분과 같이 여행을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2차 전도여행을 가는데..바나바와 완전히 등져 버렸다.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동행을 한다고 했을 때 바울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1차전도 여행 때 힘들다고 돌아간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2차 전도여행에 따라가겠다는 말인가? 절대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라서..결국은 바나바와 결별을 한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의 많은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바울을 반대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시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어서..고린도서교회의 반대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후서 아닌가? 요즘 큰 교회 목사니들 중에는 은퇴할 때..교인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싸우는 것들을 보면서..세상 사람들이 나는 저런 교회에 가겠다고 할 것인가? 생각해 보라. 교인들의 배신감을..사도바울도 배신감에 사로잡혀 죽고 싶다고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천국에 가면..하늘의 상은 받을 것 아닌가? 아무리 주의 일이라고 해도..붙잡혀 살다보니까..일이 전혀 안 되는 것도 아닌데..좀 더 참을 걸, 좀 더 너그러울 걸..좀 더 베풀 껄 하면서 괜히 내 고집을 피웠다는 후회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자유하려고 이다. 죄에서 자유..지옥과 저주에서 자유..내 인생의 무능에서 자유...그런데 붙잡혀 살다보니까...가시 때문에 일 못하고 전도할 수 없다고 할 때..자신의 무능함이 보여 지고 자기 생각대로 안 되면 싸우게 되고..왜 예수를 믿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것이 붙잡혀 사는 인생이다. 사도바울은 붙잡혀 살았던 지난 삶을 후회하고 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목사도 붙잡혀 살면.. 불행하다.
새벽기도가 힘든 목사님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어떤 놈이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가?”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셨다고..해서 웃었다. 정태기 목사님께서 어떤 개척교회 목사가 크리스탈 강대상을 사기 위해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다고 걱정을 하시기도 했다. 크리스탈 강대상이 있어야만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가?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가 되어야 잡았다고 할 수 있는가? 일 중심, 결과 중심의 신앙은 붙잡혀 사는 것이다. 붙잡혀 사는 목사나 장로가 있는 교회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우리 가정도 붙잡혀 사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면 불행한 것이다.
예수께라도 붙잡혀 살고 잡으려고 쫒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사도바울은 아직 잡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해야..예수께 붙잡힌 것을 잡는 것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교인 중에도 붙잡혀 사는 사람들 중에는 나 아니면 이 교회는 망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철저히 마귀의 유혹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붙잡혀 살지 말자! (붙잡혀 살지 말자!) 아멘!(아멘!)
둘째, 부름 받아 살자.
13-14절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13절 / 오직 한 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2)14절 /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부름을 받아 살면 행복해 진다. (소명)
부름 받아 사는 사람들은..상황과 처지를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곳으로 보내셨을까? 를 생각할 뿐이다.
요셉은 노예가 되고 죄수가 되어도..그 상황이나 처지로 인해 원망불평을 하지 않고..오로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다. 노예로 살 때나 죄수로 살 때나..언제나 하나님과 관계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죽음이후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왜 형님들에게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제가 이곳 애굽 땅에 온 것은 형민들을 통해..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려고 하신 일입니다. 제가 조카들까지 잘 돌보겠습니다. 걱정하지마세요”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사는가?..요셉은 행복하다. 붙잡혀 살지 말고 부름 받아 살자! 할렐루야!
예수님은 부름 받아 사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 저녁때가 되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예수님은 저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원하셨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제자들은 반대한다.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이 있어도..빵을 살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예수님은 한 제자가 가져온 보리떡 5개을 가지시고 축사를 하신다. 성경에는 축사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랬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콩 한 알도 나눠먹는다는데..5개의 방이라도 나누게 하소서!”그리고 나눠주니까..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 하나님의 기적은..부름 받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부름 받아 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기적은 부름 받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도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싶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부름 받아 산다는 것은..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친구의 믿음이나..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하나님은 부름 받은 사람과 함께 하시고 무슨 일을 마나든지 만사형통하게 하신다.
붙잡힌 인생은..사람들에게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고난이 저주가 되지만 부르심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고난도 기쁨이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십자가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는..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인생의 마지막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의 생을 산다. 예루살렘교회의 방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알면서도..예루살렘으로 간다. 그곳에서 붙잡혔지만 땅 끝 이라는 로마에 까지 가게된 것이다. 바울은 이 일을 보면서..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제 사도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했다.
부르심으로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부르셨다는 것..이 사람의 아내로..남편으로 하나님이 짝을 지어 주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 때..행복은 저절로 온다. 부르심은 자녀교육도 행복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위로부터 부름의 상이 있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 하신 것은 ‘오직 한 일!’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일이 아니라...단 한 가지 일에 주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일에는 직장을 나가야 하는..청년이 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가? 붙잡으려고 달려가는 인생은 절대 안된다. 하지만..우리의 주일은 미국의 토요일이다. 나는 미국식으로 주일을 지킨다. 월요일에 새벽기도라도 나가고..십일조역시..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자..!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으려면..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직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말이다.
제레미 린, 그는 NBA 뉴욕 닉스팀의 가드이자 목사가 장래희망인 크리스천이다. 대만계 미국인인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이력과 함께 191cm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영리한 플레이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가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2월4일 '뉴저지 네츠'팀과의 경기이다.
2012년2월, 그날의 함성이 있기 전 린은 하부리그를 전전하는 연습생에 불과했다.
하버드대 졸업 후, 2010년 가까스로 골든스테이트워리어스팀에 입단한다. 29경기 2.6득점, 1.4어시스트의 저조한 성적으로 NBA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린은 반년 만에 방출되고 만다. 그 후 휴스턴 로케츠에 입단했지만 2주만에 다시 방출된다. NBA입단을 결정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좌절한 린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내 삶의 모든 중심은 내가 얼마나 농구를 잘하는지 증명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증명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다. 2011년 12월말, 다짐과 동시에 그에게 손 내민 팀은 뉴욕 닉스에서 여전히 벤치 신세의 연습생이지만 그에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만이 가지는 자유함이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모른 척하고 싶었던 현실과 팀 동료들을 새롭게 볼 수 있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최적의 환경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2월의 기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급하게 투입된 뉴저지 네츠 전에서 25득점, 7어시스트 린의 활약으로 팀은 승리한다. 연패하고 있는 팀을 구원한 선수는 임시계약만료일을 이틀 앞둔 NBA연습생 제레미 린이었다. 파죽지세로 5연승을 이룬 린은 모든 언론과 팬들뿐만 아니라 감독과 팀 동료들에게도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으며, 동료들의 플레이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거듭될수록 그를 중심으로 팀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2월15일, 6연승에 도전하는 뉴욕 닉스는 토론토 랩터스팀과 만나게 된다. 4쿼터 87대87 동점상황. 종료 10초전 “3점 슛!”이 들어감으로 승리한다. 하부리그를 전전하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려 했던 작은 체구의 동양인, 제레미 린이 승리를 결정짓는 그의 마지막 골은 골대로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한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나!”에서 “나를 쓰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어 그로 자유롭게 경기장을 누빌 수 있게 했다. 승패와 인기에 상관없이 그는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쏘기 위해 경기장을 향한다. 데살로니가후서1장12절에“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붙잡혀 살지 말고..부름 받아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C. 하나님의 도우심, 제사장된 성도의 기도
“하나님, 저희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믿음의 경주
빌 3:12-14 / 이정익 목사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은 소의 해라고 합니다. “소처럼 우직하게 살자”는 슬로건도 나왔습니다. 작가 심우섭이 상주시 사벌면 묵산리에서 있었던 전설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동네에 누렁소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이웃집 할머니가 너무 잘해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죽자 소가 병이 나서 앓다가 어느 날 고삐를 풀고 사라졌습니다. 혹시나 하고 할머니 무덤에 가 보니 거기 앉아 기진 한 채 울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사진을 보여주자 기운을 차린 소는 집으로 와 할머니 집부터 찾았습니다. 동네에서는 의리 있는 소라 해서 죽은 후 할머니 무덤 곁에 묻어 주었다고 합니다. 금년 한해는 우리 모두 이 소처럼 우직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성경에 그 소처럼 아주 우직하게 살았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본문은 그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내용입니다. 본문에서 빌립보교회에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겸손히 서로 섬기고 살아가라고 권고했습니다. 당시 핍박자들은 바울을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을 “개들(2)”, “행악자(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개는 그냥 개가 아니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악한 개들을 표현한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경멸의 대상을 말할 때 “개들”이라고 표현했고 특히 거짓 교사들을 표현할 때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바울을 괴롭히고 거짓 사도라고 부추겼지만 바울은 개의치 않고 오직 선한 전도자로 충실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 나는 오직 예수께로부터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12)”고 했습니다. 바울은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고 회심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가진 그의 목표는 “예수 안에서 완전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즉 “주께서 나를 구속해 주셨으니 나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당시 빌립보교회 교우들은 아직도 율법주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행위, 의식,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받은 영적은혜가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여기 뒤에 있는 것은 율법주의, 그의 이력, 혈통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나는 그것들에 대해서 미련이 없다, 나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만나 회심한 것이 다가 아니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 달음질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작은 체구의 사람이었지만 큰 생각, 큰 뜻, 깊은 믿음, 원대한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 바울의 생각과 각오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기 대
바울은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늘 상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달리는 자에게는 상이 있듯이 신앙의 마지막에는 상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기대와 미래와 오늘 심은 것이 있는 사람은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대가 있는 사람은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루게 됩니다. 노만 필 박사가 “꿈을 가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꿈을 가지려면 먼저 세 가지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일”입니다. 즉 계획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리게 되면 오늘 수고하고 준비하여 마침내 꿈을 이루게 됩니다.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우중 씨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동분서주 했습니다. 그때 마다 경쟁 대상인 미국의 건설사가 볼 때 작은 사람, 작은 나라에서 큰 건물을 짓겠다고 다니는 모습이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에서 어떻게 큰 건물을 짓겠다고 그러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김우중 씨가 “하루 8시간씩 일하는 미국은 그런 건물 짓지 못하지만 우리 한국은 하루 24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그런 일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정주영 씨는 50년 전에 “나의 소원은 우리 손으로 만든 배와 자동차들이 세계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50년 전 우리 손으로 그렇게 높은 빌딩을 짓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만든 배와 자동차들이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닌다는 것도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50년 만에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그림이 기리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계획이나 꿈은 내가 그리고 가지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꿈을 감독하시고 조정하시고 이루십니다. 어떤 분이 출근하니 책상위에 해직 통지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순간 원망과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가출해서 방황하다가 돌아와 아내에게 “나 죽고 싶소,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소”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아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니까 당신은 이 상황을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말에 남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떨쳐내고 건축업을 시작했는데 잘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며 호텔에 묵었는데 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모텔에 묵으니 시설이 너무 낡았습니다. 그래서 중간급 숙박시설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만든 것이 오늘 “홀리데인 인”이라는 호텔 체인점을 개발한 캐몬스 윌슨입니다.
세 번째는 “실현하는 일”입니다.
즉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는 엘리사가 소를 끌고 밭을 갈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가서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배설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선지자의 길이 아무리 어려워도 실패자로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로서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의 로마인들이 로마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배를 타고 아프리카 칼타고로 떠납니다. 마침내 도착하자 타고 온 배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습니다. 아무리 고향이 그리워도 구세계에는 가지 않겠다는 각오 때문입니다. 그것이 실현하는 태도입니다. 실현하려면 행동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도 못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지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실현하고 이루고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 심
사도바울은 12절과 14절에서 “달려간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나는 아직도 영적 성숙을 더 이루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고 또 하나는 “지난 시간 나의 삶에 오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쉴 시간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바울은 그 삶을 “달려간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열심히 전도자로 살아가는 모습 중에 대표적인 모습은 사도행전 14장19절 이하에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나타나 방해했습니다. 이웃 도시인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까지 와서 방해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전도를 하니 화난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동구 밖에 던지고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제자들이 둘러섰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장례 치룰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후 바울이 돌무더기를 헤치고 나왔습니다. 그때 그의 몸은 부러지고 깨지고 터졌을 것입니다. 그 몸으로 성내로 들어가 하루 밤을 지낸 후 다음날 더베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더베는 30여km 되는 거리입니다. 그 길을 순전히 걸어서 갔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고 기적으로 동반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물에 빠지면 건지시고 독사에 물리면 낫게 하시고 감옥에 갇히면 찬송하고 법정에 서면 일장 전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수반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자들이 고기도 잡히지 않는데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던지고 또 던지고 밤새워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예수께서 보시고 저들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고넬료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청하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2004년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남자 수영선수들이 사이판으로 전지훈련을 떠났습니다. 수영장에서 연습을 무제한 거듭하는 동안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선수는 중3 열네 살짜리 박태환 뿐이었다고 합니다. 박태환은 하루 보통 1만 5천m씩 연습했습니다. 1만 5천 m면 길이 50m 짜리 수영장을 하루 150번씩 왕복한 길입니다. 세계적인 수영선수가 되려면 총 5만 km를 연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길이는 지구 반 바퀴인데 하루 1만 m씩 16년 반을 헤엄쳐야 하는 거리라고 합니다. 한국 양궁선수들이 특히 잘하는 이유가 보통은 하루 연습량이 100발씩 쏘는데 한국선수들은 하루 300-500발씩 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올림픽이 가까워지면 밤에 불 켜놓고 천발씩 쏜다고 합니다. 이봉주는 마라톤을 위해 매일 30-40km씩 뛰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뛴 길이가 지구 5바퀴가 넘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이 없습니다. 뭔가 이루려면 남다른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당뇨병은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없던 것이 아니고 유전자가 감추어 있어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임신도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옛날에도 양가집 규수들만은 임신이 잘 안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운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서 수놓고 글 쓰고 평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감추어 있던 유전자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불임된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불공만 드리면 불임 규수들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감천이 아니고 하루에 108배씩 100일 동안 불공을 드려보십시오. 온 몸에 땀이 젓을 만큼 심한 운동이 됩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들었던 당뇨병 유전자가 다시 고개를 숙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불임자가 많은 것은 모두 편하게 살아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1960년대 새마을 운동할 때 새벽 일찍 일어나서 보리밥 한 그릇 먹고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곧 잠이 왔고 그때는 곁에만 다가가도 애가 생겼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때 그물이 채워지고 꿈이 이루어지고 땀 흘린 만큼 열매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쉬지 않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목 표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12절에서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삶에는 달려가는 목표와 푯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에, 그 신앙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달려가는 이유는 복음의 씨를 심기 위함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생산적인 삶은 복음의 씨를 심는 생활입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쉬지 않고 달려간 것도 복음의 씨를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장차 주어질 천국에서 주어질 상을 위해서 오늘 심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뛰어다녔고 부지런히 심고 다녔습니다. 예수를 만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숙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 그는 매일같이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르신 그 부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열심히 뛰고 달려갔습니다.
신앙생활은 심는 생활입니다. 오늘 열심히 심으면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심는 생활에서 가장 좋은 씨는 영혼을 구원하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전도는 가장 생산적인 투자입니다. 사도바울은 입버릇처럼 한 말이 “달려간다”는 말이었는데 그 달려가는 목적이 전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 골육지친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주께로부터 끊어져 저주를 받는다 해도 감수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얼마나 다급한 마음으로 전도에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시대에는 로마가 세상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로마가 전도되면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것도 잊고 가정이루는 일 따위는 바울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는데 뜻이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절박한 심정가지고 전도를 했고 복음의 씨를 뿌렸고 시간을 바쳤습니다.
전도는 이렇게 긴박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안일하고 안정되고 평안을 추구하면 못합니다. 북극 선교사 구루펠 일행이 배타고 북극으로 갔습니다. 마침내 북극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 배에 불 질러 태워 버렸습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도에 실패해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다른 방법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하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만 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왜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능력은 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머리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고로 구루펠 일행의 북극 선교가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 너무 머리나 땅이나 방법에만 의존하지 마십시오. 너무 현실이나 재미나 일이나 사업이나 오늘에만 매여 살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꿈을 잃게 되고 목적을 잃게 됩니다. 삶에서 목적을 잃게 되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어느 장로님이 4월에서 6월이면 골프를 치느라고 주일을 빠졌습니다. 목사님이 “이 다음 천국에 가면 골프를 실컷 치게 될 텐데 그러냐”고 하자 “천국도 골프장이 있습니까, 정말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이 둘이 다시 만났습니다. “천국의 골프장 알아보셨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했습니다. “알아보니까 분명히 있습디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확인한 것은 당신이 두주 후에 그 골프장에 부킹되어 있습디다.” 그때 그 장로님이 얼마나 놀랐을 것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이 최고입니다. “당신이 두주 후에 부킹되어 있더라.” 그 한마디 말에 골프에 대한 정이 뚝 떨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의 가장 숭고한 책무는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해는 사도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매일같이 달려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힘쓰면 주님이 여러분의 앞길과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전진하라
빌 3:12-16 / 박인걸 목사
대서양을 인류 사상 처음으로 횡단한 여류 비행사는 아멜리아 에어하트입니다. 1928년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횡단하던 중에 엔진이 고장 났습니다. 도저히 착륙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결국 횡단에 성공하였습니다.
기자들이 달려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엔진이 고장 났을 때 그 위급하고 어려운 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습니까?”그녀가 대답했습니다.“그것은 간단합니다.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바다 위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자들은 자세한 의미를 말해달라고 했습니다.“제가 위기에 있었을 때는 이미 대서양의 반을 넘어왔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포기하면 떨어져서 죽을 것이 당연했지요.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가는 것밖에 없었습니다.”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뒤 돌아가려 하거나 하던 일을 포기하려 합니다. 앞으로 전진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담대하게 앞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광야에서 수많은 위기와 위험한 일들을 만났습니다. 백성들 가운에 일부 세력이 계속 모세와 아론의 발목을 잡고 애급으로 뒤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앞으로 전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앞으로 전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상주시고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히12:2) 바라보면서 전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여호와 닛시의 축복을 주십니다.
영적 전진을 가로 막는 세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첫째, 대가를 치르지 않고 공짜로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마음입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주인에게 내 밀면 주인이“잘 했다 본전이라도 축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는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할지 몰랐던 종은 주인으로부터 내침을 당합니다.“악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 올 수 없다.”(시1:5)는 진리를 그는 몰랐습니다. 불노소득, 일확천금, 무전취객을 기독교는 죄악으로 여깁니다. 둘째, 형식주의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세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마16:11)고 했습니다. 형식주의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주일 예배, 새벽예배, 금요철야, 각종 헌금, 수많은 봉사들이 주님을 상대로 하지 않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한은 행위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은 전진이 없습니다. 향상이 없습니다. 셋째, 물질주의입니다. 물질주의의 다른 말은 현실주의입니다. 하나님 보다 물질의 가치를 앞에 놓는 행위입니다. 이런 신앙은 영적 전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침체 되거나 침륜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시험은 모두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2014년은 힘차게 앞으로 전진 해야 합니다. 팽이가 돌지 않으면 넘어지고, 비행기가 계속 날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금년에는 우리들의 신앙이 앞으로 전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본문에서 앞으로 전진 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 사도는“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전진해야 할까요?
(1) 분명한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빌3:14)
바울은“푯대를 향하여,”“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목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재확인해야 합니다. 인생은 다이나믹하게 살 줄 알아야 하며 그런 사람은 목표를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목표를 가진 사람은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인생들에게 목표를 주었습니다.“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창1:28)의 목표를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에 집착하느라 목표를 잃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으로 추방당한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시간 관리를 잘합니다. 시간이 많으면 사람이 타락합니다. 바쁘게 사는 사람은 죄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한눈 팔 시간이 없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유혹도 이깁니다. 한가한 사람은 유혹에 걸려 넘어집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긴 것은 목표가 분명했고 일이 바빴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①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몇 년까지 돈을 얼마를 벌겠다. 혹은 집을 사겠다. 사업은 어느 정도까지 확장하겠다. 어떤 일을 하며 살겠다. 몇 년까지 어떤 일을 하겠다. 금년에 책은 몇 권 읽겠다. 어느 나라를 여행 하겠다. 등등의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②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 분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 목표만 세우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부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절대로 만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인생의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③ 측정이 가능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탁상공론이나 추상적인 목표는 자신을 좌절시킵니다. 어떤 분은 뜬구름 잡는 목표를 세웁니다. 그런 사람들은 평생 시계추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④ 달성이 가능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 물질, 기술, 시간, 에너지, 열정 등을 감안하여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단시일 내에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성취감을 맛볼 수 있고, 다음 목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을 경우 자신감이 떨어지며 재 추진력을 얻기 힘듭니다. ⑤ 현실성이 있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천지가 개벽해도 안 될 일을 목표로 세우면 안 됩니다. ⑥ 시간적 선을 그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지 않은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고 추진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게으르거나 나태해 지기 쉽습니다. ⑦ 자신의 목표를 써서 벽에 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그 목표를 읽어야 합니다. 다짐해야 합니다. ⑧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을 믿어야 합니다. 목표를 세우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잠재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한한 에지가 발산됩니다. ⑨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⑩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토익 800점을 올리겠다면 학원에 등록을 하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해야 합니다. 살을 10킬로 빼겠다면 헬스를 시작하던지,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취직을 목표를 세웠다면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회사가 요구하는 스펙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보면“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2) 열심을 다해 전진해야 합니다.(빌3:12,14)
“달려가노라.”는 구절이 두군데 있습니다. 열정적 용어입니다. 도전적 용어입니다. 적극적 삶의 태도입니다. 진진하는 사람은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사도행전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1차 2차 3차에 걸쳐 소 아시아 지역과 북 로마 지역을 모두 돌며 전도하였습니다. 그 거리는 수천킬로미터에 달합니다. 가는 곳 마다 유대인들의 박해와 핍박이 있었습니다. 1차 전도 사역 때 루스드라에서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시체를 메고 성 밖에 내동댕이쳤습니다. 밤에 살아났습니다. 돌무더기를 헤집고 나온 것입니다. 이고니온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더베로 피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거리는 30-40킬로는 보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며 앞으로 전진 하였습니다.
그는 2차 전도 사역을 떠났습니다.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암비볼리,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 그곳 유대인들이 바울을 무섭게 박해하였습니다. 야반도주하여 베뢰아로 피했고 그곳에도 유대인들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급히 아덴으로 피하여 복음을 전한 후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비가 떨어져 생활이 곤란하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제조하여 생활비를 조달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전도 사역을 끝내고 3차전도 사역을 떠났을 때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큰 핍박을 받아 두란노 서원에 2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그의 열심은 누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바울 사도만큼 복음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가 세운 업적을 능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의 열정적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네다섯 개를 목표하고 있습니다. 스피드 스케이트의 이상화 선수와 피겨 스케이트의 김연아는 금메달을 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화 선수의 발이 인터넷 상에서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동양인으로서 서양 여성들과 겨루기 때문에 체격 조건에서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직 방법은 하나, 연습입니다. 노력입니다.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지 그녀의 발을 보면 여성의 발 같지 않습니다. 나무토막 같기도 하고, 여기 저기 갈라져 반창고로 도배를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하니까 세계에서 1등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숙연해 졌습니다.
수영의 박태환은 하루 보통 1만 5천m씩 연습했습니다. 1만 5천 m면 길이 50m 짜리 수영장을 하루 150번씩 왕복한 길입니다. 세계적인 수영선수가 되려면 총 5만 km를 연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길이는 지구 반 바퀴인데 하루 1만 m씩 16년 반을 헤엄쳐야 하는 거리라고 합니다. 한국 양궁선수들이 특히 잘하는 이유가 보통은 하루 연습량이 100발씩 쏘는데 한국선수들은 하루 300-500발씩 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올림픽이 가까워지면 밤에 불 켜놓고 천발씩 쏜다고 합니다. 이봉주는 마라톤을 위해 매일 30-40km씩 뛰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뛴 길이가 지구 5바퀴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세계적인 선수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진하는 사람은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는 분이시며(요5:17) 우리 주님 또한 열심히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동분서주 하셨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활동하셨습니다. 풍랑 이는 배 안에서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난리 법석을 떨 때 우리 주님은 얼마나 피곤하신지 그것도 모르고 주무실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금년에는 열심을 다 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3) 상급을 기대하며 전진해야 합니다.(빌3:14)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주장하는 상은 분명한 답이 없지만 11절과 12절을 살펴보면 부활을 칭합니다. 부활 때에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바울의 신학입니다. 바울의 인간 이해는 ① 몸(소마), 인간을 생물학적 몸으로 봅니다. ② 육(사릌스),자연적이고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존재로서 연약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③ 혼(푸쉬케), 의식과 지식과 의지를 가진 인간이지만 성령에 의하여 지배받는 인간은 아닙니다. ④ 정신(누스), 지적으로 생각하고 결단하는 자아를 의미합니다. ⑤ 마음(카르디아), 어떤 일에 대하여 이해하고 계획하는 자발적이고 감정적인 자아를 칭합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죄를 인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고장이 난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장난 인간을 완전히 고쳐 주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과 연합하여 그와 한 몸, 혹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며, 바울은 주께서 재림 하실 때 그리스도와 완전한 하나가 되는 부활로 나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을 그는 상급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신학은 오늘 우리들의 신학이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평생토록 전진하는 삶을 살았으며, 우리들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하여 목표를 세우고 열심을 다 하여 살면 그 목표한 것에 대한 결과가 큰 기대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이며 영적 법칙이고 우주적 법칙입니다.“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고 했습니다.
정주영 씨는 50년 전에“나의 소원은 우리 손으로 만든 배와 자동차들이 세계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50년 전 우리 손으로 그렇게 높은 빌딩을 짓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만든 배와 자동차들이 5대양 6대주를 누비고 다닌다는 것도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50년 만에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목표와 꿈이 이뤄졌으며, 열심을 다하여 달려간 결과가 현실화 된 것입니다.
김우중 씨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동분서주 했습니다. 그때 마다 경쟁 대상인 미국의 건설사가 볼 때 작은 사람, 작은 나라에서 큰 건물을 짓겠다고 다니는 모습이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에서 어떻게 큰 건물을 짓겠다고 그러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김우중 씨가“하루 8시간씩 일하는 미국은 그런 건물 짓지 못하지만 우리 한국은 하루 24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그런 일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열정과 목표는 마침내 결실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수주중앙교회 성도들이여 오늘 개인적인 목표, 가정의 목표, 사업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날, 일주일, 한 달, 그리고 1년, 더 나아가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십시오.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기대하십시오. 반드시 그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전진
빌 3:12-14 / 피종진 목사
2016년도 첫 주일에 밝은 얼굴과 생수가 넘치는 기쁜 마음으로 큰 희망을 품고 첫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합격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잘 못 끼우게 됩니다. 처음부터 잘 해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들은 처음에는 큰 희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지쳐서 중간에 포기하고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군병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최후까지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위대하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품은 위대한 소망이 성취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대한 사건들의 축복이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한국 속담에 ‘산이 크면 그늘도 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이 작으면 그늘도 작습니다. 한라산, 백두산, 알프스산은 굉장히 크고 높아 그늘도 큽니다.
그리고 피트 브랭크린의 저서에는 ‘작은 바람은 작은 불을 일으키고 큰바람은 큰불을 일으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므로 여러분도 위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도 큰일을 행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위대한 전진’을 향해 예수님과 함께 새해 첫발을 힘차게 내디디며 반드시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대한 전진’을 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첫째, 푯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삶을 영위합니까? 그것은 푯대에 따라 달려가고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이 푯대를 ‘비전’, ‘환상’, ‘꿈’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각각 가슴에 품은 뜻이 있고 소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4)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 신앙의 사역뿐만 아니라 평생의 삶에 있어 푯대가 분명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도 하나님이 주신 푯대가 있습니다. 그 푯대를 향해서 똑바로 걸어가면 어렵지 않습니다.
차량의 네비게이션이 운행할 때 바른길로 인도해주고 잘못된 길에서 바른길을 찾아 인도하듯이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에게 천만번이라도 옆길로 가지 않도록 이끌어주시고 또 세워주시고 때론 채찍질 하셔서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고 역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큰 비전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창세기 12장 이하에 보면 아브람의 생애가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을 불러 이끌어 내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게 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순종했고 조카 롯도 함께 동행 했습니다. 하란을 떠나가는 길에 예배의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12:8)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바로 예배를 통해서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손대어 하는 일마다 모든 일들이 형통하고 잘되어 아브람과 조카 롯은 성공하여 재산이 부유하고 양떼들도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여건이나 환경이 조성된 것은 아브람의 자신만의 꿈이 이루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의로운 길도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좋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롯에게 모두 빼앗기게 하시고 허허벌판 황무지 땅에 홀로 의지할 곳 없게 만드신 후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땅을 주리라고 약속했으며 자손도 땅의 티끌 같게 번성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창 13장) 이는 새로운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역사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후에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칭하고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예배를 통해서 승리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벨을 비롯하여(창 4장), 야곱은 벧엘(창 28:10~19)과 얍복강 앞에서(창 32장), 모세는 시내산에서(출 19장),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왕상 18장) 제단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이끌어 승리를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아온 나쁜 것이나 좋은 것을 떠나서 이제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2016년도를 예배로 출발하여 새로운 비전을 가지면 됩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한히 공급해주시는 에너지와 가능성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푯대 없이 무조건 달려가면 안 됩니다. 주어진 기회에 새로운 설계를 가지고 위대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365일이라는 황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시간을 헛되게 보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고 말했습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세월이 매우 급하다’, ‘촉박하다’, ‘긴박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미국에 유명한 찰스필드는 ‘확고한 목표는 성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공하려면 확고한 목표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최선의 방법이 되어 이루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안되는 것이 없도록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둘째, 달음질을 해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아멘.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 9:26) 아멘.
바울은 자기 삶과 자신에 대해 목표를 정하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허공을 치는 허송세월을 하여서는 안 되고 하루 하루의 삶이 뚜렷해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히 서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결심한 것을 실천하고 노력한 자만이 성공합니다.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 대한 통계에 의하면 10%는 꿈도 희망도 없이 실패자로 생을 마치고, 80%는 비전이나 희망이 없이 무의미하게 살다 죽는 사람이고, 10%는 삶의 목표를 정하고 남보다 노력하여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목표가 있으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게 됩니다. 운동장에서 경주할 때 어디를 향해 달려갑니까? 목표를 향해서 출발점에서 달려가야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도 우러러 하늘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응원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 사랑하기 때문에 달려가는 길을 하나님 우편에 일어서서 응원해주시고 지도해주시고 역사해주시고 도와주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갈 5:7)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는 잘 달려가다가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고 진리를 추종하다가 이단에 빠진 사람도 있었고 서로 당 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갈라디아교회를 향해서 끝까지 달려가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인내하며 주님만을 위해 전진하며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31)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달음박질하여도 피곤치 않도록 날마다 새 힘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불러 사명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밀타작을 할 때 (삿 6장), 베드로는 고기를 잡을 때 (요 1장), 모세는 호렙산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칠 때 (출 3장),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다가(왕상 19장) 불러주셔서 역사하셨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잠 21:5) 아멘.
셋째, 상을 얻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4) 아멘.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영웅이 됩니다. 국위선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메달을 목에 걸 때는 온 국민이 응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신앙의 메달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만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 아멘.
부지런히 행할 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시고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위대한 전진’을 위하여 ①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②달음질 하되 ③상을 받도록 최후까지 전진하는 충성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자
빌 3:12-14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천국에 입성하는 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천국에 입성하는 자” 여러분! 저는 지난주일 예배 후 1박2일 동안 남선교회 회원들과 함께 일영으로 단합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 도착해서 서로 두 손을 잡고 기도하는 시간도 갖고, 족구도 함께 하고, 맛있는 고기도 구워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피크를 이뤘던 순간은 윷놀이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뭐 거기까지 가서 재미없게 윷놀이를 했냐고 하시겠지만, 정말이지 제 평생에 윷놀이를 하면서 이렇게 신나게 웃고 떠들었던 적은 결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윷놀이는 보통 윷놀이가 아닌 ‘천국행 윷놀이’였기 때문입니다. 기존 윷놀이 판에다가 +1과 지옥이 각각 2개씩 추가된 윷놀이 방식이었는데요?
잠깐 설명을 해 드리자면 윷을 던져서 말이 +1에 도달하면 새로운 말을 하나 더 추가하고, 말이 지옥에 빠지게 되면 말이 몇 개가 함께 있어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그런 룰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옥 칸이 둘 다 천국에 거의 다다른 지점에 있어서 지옥에 빠진 팀은 영락없이 모두 다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바로 말 4개가 함께 가던 우리 팀을 그 지옥에 빠트린 장본인입니다. 그때 제가 너무 놀라서 탄성을 지르며 뒤로 쓰러지는 장면이 남성셀 카톡방에 고스란히 영상으로 실려 있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번 ‘천국행 윷놀이’에서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천국행 윷놀이는 천국에서 출발해서 천국으로 다시금 돌아오는 게임인데요? 우리네 인생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다시금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니 +1은 인생길에 복음을 전함으로 한 생명이 예수 믿고 값없이 구원받는 것을 뜻하고, 지옥은 제아무리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결국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주님이 부르실 때 당당히 천국에 입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인생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는데 있어 목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더더욱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푯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푯대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말은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쓰고 힘쓰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란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10년 동안 그리스도인 노릇을 하고도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예수님을 닮지 못했다면 이는 비극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10년 동안 신앙생활 해서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분명 감사한 일이지만, 10년 동안 신앙생활 한 결과가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못하다면 이는 확실히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생각난 말씀이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18절과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러분! 예수 믿은 결과가 이렇게 되어서는 결단코 안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를 믿었고 어떤 자세로 믿었길래, 그 많은 세월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처음 믿을 때 보다 예수님을 더 닮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푯대를 향하여 다시금 힘차게 나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천국에 입성하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과연 어떠해야만 할까요?
첫째로,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린바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붙들린바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서학자는 빌립보서가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략 60대에 접어들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나이 60대에 그가 있었던 곳은 불행하게도 로마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누비면서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그는 온전히 복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로마에서도 오로지 복음을 증거하는 데만 힘썼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복음 증거는 세계 역사를 뒤바꿔 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구 문명에 있어 바울의 위치는 대단합니다. 그가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유럽은 기독교 나라가 되었고,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되었던 겁니다. 어찌 보면 그는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은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정도라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되고 만족해서 '이제 좀 템포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말을 들으면 이건 좀 너무 심하다고까지 느껴집니다. 1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여러분! 이는 다시 말해서 '아직 나는 목이 마릅니다.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더욱 힘차게 달려가겠습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푯대란 무엇일까요? 그가 말하는 푯대란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과 앞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아리송하시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미워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붙잡히게 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으러 가다가 오히려 자기가 예수님께 붙잡힌바 된 겁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사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영광스런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는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이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이렇게 결심하게 된 겁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위해 살리라! 이 예수를 내 인생의 최대 목표,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살리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볼까?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 인생의 최고 목표요, 내가 달려갈 유일한 푯대다."
빌립보서 1장 20절 말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이 찬양 그대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만이 바울 인생의 최고 목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인생의 목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가 진정 주를 위해 살면, 모든 것을 아시는 주께서 상을 차려주시고, 잔이 넘치도록 내게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시편 23편 5절과 6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은 상장이 아닌 밥상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table입니다. 주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진수성찬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겁니다. ‘너희들 얘 건들면 알지? 얘는 내 아들이야, 내 딸이야!’ 하시면서 기름으로 머리를 발라주시는 모습...
그러할진대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여러분! 내가 진정 주님께 붙들린바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내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의 이 고백이 마침내 우리네 인생을 마감할 때의 입술의 고백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붙들리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 평탄의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비록 사방에 험산준령이 가로 놓여있다 할지라도 뻥 뚫리는 형통의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이십니다. 주님께서 간섭하시면 결코 능치 못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주님과 함께,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이제 우리도 인생의 참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참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아마도 세상사람 가운데 목표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꼭 한 가지씩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은 '피니스(finis)'인데요? 이는 종말이라고 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왜 ‘목표’와 ‘종말’이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종말에 다다랐을 때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 목표가 참된 목표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참된 목표가 있으십니까?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왕 목표를 정하려면 진짜 목표를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목표를 두고서 살고 계십니까?
건강입니까? 재물입니까? 가정의 행복입니까? 물론 건강도 지켜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가정의 행복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현실 생활에 바탕을 둔 이런 목표들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는 삶에 비해 내가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계획이나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때로 혼돈에 빠지곤 합니다. 아무리 열정이 있고 주님을 사랑한다해도 우린 현실에 얽매인 존재이기에 현실에 휩싸여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현실을 우선시 할 때가 늘상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실 생활에서 추구하는 바 - 건강, 물질, 권력, 가정의 행복 등 -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대치되는 것은 아닌지 항상 저울질 해봐야 합니다.
많은 성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라!" 이는 마음을 단순하게 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단순하게 가진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바라보라.’는 겁니다.
인생 - 생각해 보면 짧지 않습니까? 나이를 드신 어르신이나 심지어 젊은 친구에게 물어봐도 인생은 짧다고 말합니다. 그러할진대 왜 이토록 짧은 인생에 여러 가지 목표를 두고 사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오직 주님 한 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인생에 세운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 복음을 증거 하는 것!" 복잡하게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인생의 푯대 바로 그것은 예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예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인생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삼았느냐 하는 겁니다. 아니지요? 그 역시 세상 학문에 뛰어난 사람으로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또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서 인생의 목표가 바뀌게 되었을까요?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한 순간, 그의 인생 목표가 180도 바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 목표를 잘못 설정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왕좌왕 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한 목표가 없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목표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분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예수님을 만나야 진정 그 가치를 발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물론 예수 믿지 않고도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믿지 않고 이룬 인생의 목표는 결국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전도서 1장 2절과 12장 13절 말씀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아멘.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참된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누가 뭐라해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삶!’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후로는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된 것에 목표를 두지 마시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잡힌바 되어, 복음 전파에 올인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과연 무얼 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반드시 취해야 할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먼저 해야 할 일 첫 번째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으로써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현실에 만족해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인생의 푯대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푯대는 미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바울은 가말리엘 학부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요, 세상 권세를 누릴 만큼 누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고,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는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안한 일이 없을 정도로 정말이지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이제는 좀 쉴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지금 뭐라고 말합니까?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겠습니다."(2번) 바로 이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감당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감당할 만큼 다 감당했는데도 그는 다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네 육신의 몸은 운동과 식이요법을 통해서 비만에 이르지 않도록 무진장 애를 쓰지 않습니까?
하물며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비만해져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현실에 안주하면 비만증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미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신앙이 성장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멈추지 않고 계속 또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항상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주님 품에 안기는 그 날까지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해야 할 일 두 번째는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겠다는 겁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 지나간 것,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겠다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겠습니다.”(2번)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하여 돌아보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만약 사도 바울이 과거의 삶에 연연했다면 과연 복음을 제대로 증거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바울이 왜 과거의 삶에 전혀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과거의 삶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내 삶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름답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할지라도 깨끗이 용서받게 될 줄 믿고서 주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젠 우리도 ‘용서하십시다! 사랑하십시다!’ 용서하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면 진정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과거에 얽매이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여러분! 아픔이 있으십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그래서 이젠 아예 멈춰 있고 싶으십니까? 그럴지라도 멈춰 서면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누가 뭐라 해도 주께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는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시금 새롭게 소망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용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비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분명 목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서 21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 자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9번 이상이나 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기쁨이 어디서 솟구치는 것일까요? 14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겠노라 결단한 사도 바울의 용단을 보시고 주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그 어떤 것도 온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도 극복했습니다. 감옥이라는 환경도 극복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사도 바울에게만 임할까요? 아니지요?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도 분명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만 환경을 극복하게 합니까? 우리의 환경도 극복하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사면초가에 직면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해 주시기만 한다면,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환경도 우리는 완벽하게 극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심한 중병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 남모를 상처와 고통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에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가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전혀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도 남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간 끝에 마침내 바라던 천국에 입성하여 우리 주님과 영생복락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붙잡혀 사는 인생
빌 3:12-14 / 양인순 목사
우리의 삶은 항상 무엇인가를 붙잡고 삽니다.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기와 명예를 붙잡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과 재물을 붙잡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취미와 습관에 붙잡혀 삽니다. 어떤 사람은 술과 담배와 같은 것에 붙잡혀 삽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강아지 목에 줄을 매는 이유는 내 맘대로 끌고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줄도 무언가에 매여 있으면 누군가에 의해서, 아니면 세상의 어떤 힘에 의해서 끌려가게 됩니다.
김홍신 씨가 쓴 <인생사용 설명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시장>이라는 밀리언셀러 작가이며, 8년 연속 의정활동 1위 평가를 받은 국회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37년 6개월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폐암의 위험이 있거나 간접적인 살인행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 번쯤 끊어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보통 서너 갑의 담배를 피웠습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던지 ‘죽는 날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죽겠다’는 수필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스승께서 던지신 한 마디 말씀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 “아주 뜨거운 물 잔은 얼른 내려놓으면 되는데, 붙잡고 어쩔줄 모르니 델 수밖에 없다.”
그는 마음에 결단을 합니다. “세상을 끌고 가도 시원찮은데, 담배한테 끌려 다니다니” 그는 37년 6개월간 쥐고 있던 뜨거운 물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백해무익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에게 끌려 다니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금단현상으로 어려웠지만 의미 있고, 보람된 일, 사랑하는 일에는 끌려 다닐 수 있지만 백해무익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담배에는 절대로 끌려 다니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피우던 담뱃갑과 일회용 라이터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몇 년 동안 놓아두었습니다. 담배가 눈에 보여도 피우지 않아야 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말을 듣고 지인들이 ‘참 독한 사람’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홍신 씨는 말합니다. “독극물을 삼키는 사람이 독한 사람이지 어찌 버린 사람이 독한가?”
우리가 잘못된 것에 붙잡히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나쁜 습관이나 버릇에 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을 좀먹고, 내 신앙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속히 그 뜨거운 물 잔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물인 쥐도 독약인 줄 알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계속 독약을 품에 안고 끌려 다닌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모든 나쁜 습관과 버릇으로부터 자유해 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장 의미 있는 것에 붙잡힌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붙잡을 수 있는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2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잡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조차 없는 미련한 인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율법의 의에 매여 살았던 자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구원을 받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오직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순교의 현장에 증인으로 서있던 자입니다.
그러던 그가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의 말씀 앞에 거꾸러집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빛 앞에서 육신의 눈이 멀었지만 새롭게 영적으로 눈을 뜹니다. 이제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인생의 슬로건이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의 힘과 권력을 붙잡은 사람은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 붙잡힌 자들은 다 승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살았을 때는 세상의 힘을 붙잡았습니다. 그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미디안의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을 때, 그는 버림받은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순간 모세는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세상의 모든 줄을 내려놓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누구나 사명자가 됩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의 손에 붙잡힌 순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사명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이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인생이 바뀝니다. 내 삶의 가치가 바뀝니다. 내 인생의 꿈과 목표가 달라집니다. 어떤 고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주도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주님께 붙잡힌 인생으로 승리하며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삶의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는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잡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의 목표는 세상의 명예나 권세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후에 그의 인생은 오직 예수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그의 삶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바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목표가 빗나가면 아무리 수고하고, 많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은 모래성과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갖게 되면 자기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힘을 사용합니다. 세상을 섬기라고 주신 축복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게 됩니다. 결국 자신도 무너지고,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바닷가에 한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으러간 배들이 등대의 불빛을 보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 사는 나이 드신 할머니가 와서 기름을 좀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너무 딱해서 등대를 밝힐 기름을 좀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할머니가 다시 찾아와 다급하게 기름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번에도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기름을 주었습니다. 계속해서 할머니는 기름을 요청했고, 등대지기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기름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비가 내리고, 성난 파도가 무섭게 몰려오는 밤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등대의 불을 환하게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름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많은 배들이 항구에 돌아오지 못하는 조난당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등대지기의 사명은 언제나 등대의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에 이끌려서 기름을 주다보니 정작 등대를 밝혀야 할 시기에 등대를 켜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목표와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의 등불을 켜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등불을 켜야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등불이 꺼지면 그 인생은 방황하게 됩니다. 비록 특별 새벽기도회는 끝났지만 새벽을 깨우는 기도의 등불은 계속 타오르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는 하늘의 능력을 내 삶 가운데 채우는 비결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보고를 열고, 하늘의 복을 받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내 삶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힘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나눔의 등불을 밝혀야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섬김과 나눔으로 더 풍성해지는 교회” 라는 표어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섬기고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지 돌이켜보면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었지만 무관심과 게으름 때문에 더 나누고 사랑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밀알사회복지관 봉사팀과 함께 복지관에 갔습니다. 새해 첫 봉사라서 떡을 장만해서 식사하시는 분들께 나눠드렸습니다. 복지관 관장님과 대화 가운데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서울시에 25개의 자치구가 있는데 제일 재정 자립도가 높은 강남구가 3번째로 구제 대상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구룡마을과 달터 마을을 비롯해서, 대치동에 지하 쪽방이 많다고 합니다. 성지교회가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로서 아픈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그중 한 가지만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역에 많은 장애인들이 거주하는데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랍니다. 그분들의 간절한 소망 중의 하나가 죽기 전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해보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우선 10분 정도를 선정해서 제주도 여행을 한 번 시켜드렸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비행기 표도 50% 할인이 된다고 합니다. 이 분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요 기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 돌아와서 제주도 2박3일을 계산해보니 한 사람당 30만원이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제 장로님들께 말씀드렸더니 적극적으로 공감해 주셨습니다. 장애인의 날이 있는 4월 달에 실시하려고 하는데요 여러분 마음에 감동이 오는 데로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 가정에서 한 분을 보내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9분만 참여하시면 정말 우리 성지교회가 그분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주는 귀한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 해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에 집중하지만 사랑의 나눔과 섬김에도 최선을 다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이 정성껏 드리는 헌금을 지역사회를 섬기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아름답게 쓰려고 합니다.
지금 아이티에는 강진으로 인해 5만 여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1962년 국교를 맺은 이후에 대한민국을 전적으로 지지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랑의 손길을 그들을 향해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지만 모으면 큰 힘이 될 줄 믿습니다. 기쁨으로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지가족 모두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푯대를 확실히 세우고, 힘차게 달려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지역사회에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과거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만약 바울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혔다면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핍박자요, 훼방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 삶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감기와 같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를 딛고 일어서느냐’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뒤에 있는 것은 잊으라’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과거, 실패한 과거를 잊을 것을 권면합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용서받을 수는 있습니다. 용서는 잘못된 과거에서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이전에 나의 삶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과거의 실수와 허물 때문에 매여 있다면 이 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유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62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뒤에 있는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잘못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실수했던 것, 부끄러운 기억, 수치스러운 과거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어두운 과거를 이 시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과거의 역사보다 미래의 꿈을 더 좋아한다." 태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늘 눈앞에 그림자만 바라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도, 우리 교회도 과거의 모든 기억을 떨쳐버리고 열려진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이미 얻었다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 있는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나이는 60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배가 파산을 당하고, 수없이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었고, 그동안 사역의 열매로 보면 누가 보아도 훌륭한 사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노년은 좀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사역을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말하면 ‘나는 아직 불러주신 주님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뒤에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달려간다’는 헬라어로 ‘dioko’인데 의미는 사냥개가 먹잇감을 보고 전심전력하여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이신 박동진 옹이 있습니다. 그 분이 TV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매일 아침 하루 4시간 이상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너무나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한국의 최고 명창으로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고생을 하십니까?” 그 질문을 받은 박동진 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소리를 연습한다는 것은 내가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은 자기가 살아있음을 소리를 연습하는 그 순간을 통해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백을 들으면서 목사로서 참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렇게 연노하신 나이에도 자신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는 부름 받은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부르심의 소명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최선의 경주를 다하는 자에게 상을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푯대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주어지듯, 우리 주님도 승리의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많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위해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스 로코마크 교수(네덜란드 자유대학)는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1,80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후쿠사이’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어느 날 후쿠사이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 “수탉을 그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후쿠사이는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말합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 갔더니 이번에는 “이주일 후에 오라”고 합니다. 이주일 후에 찾아 갔더니 “두 달 후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3년이 되었습니다. 3년이 되는 날 친구를 찾아갔을 때 또 미루려고 하자 어이가 없어진 친구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친구의 화난 모습에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붓을 가져와 일순간에 수탉을 그렸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그려진 수탉이었습니다. 그림은 좋았지만, 친구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것을 왜 3년이나 기다리게 해?”하며 따졌습니다. 후쿠사이는 말없이 친구를 화실로 데려 갔습니다. 그곳에는 후쿠사이가 3년 동안 습작한 ‘수탉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예술적인 재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술은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력할 때 완성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참다운 예술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히 해서는 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의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뒤에 있는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녹슬게 하고, 무너뜨리는 나쁜 것들은 모두 잘라내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오직 예수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인생이 행복합니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푯대를 향해 계속 달려가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달려가는 이유
빌 3:12-14 / 이정익 목사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고 아시안 게임이 열립니다. 선수들은 저마다 4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훈련의 목적은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고된 훈련을 감수하며 땀을 흘립니다. 그들에게는 목표가 있고 푯대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선수는 42. 195km를 뛰어야 합니다. 그 거리를 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뛰는 동안 본인은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다 뜁니다. 그것은 골인지점이 있고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이 목표, 푯대, 목적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그것이 있으면 신나게 살 수 있습니다.
1985년에 뉴욕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선수가 완주를 했습니다. 그 여인은 린다 다운 씨라는 여성입니다. 이 분은 신체장애인 인데 목발을 양쪽 겨드랑에 의지해서 26,2마일 코스를 12시간에 완주한 것입니다. 온몸을 앞뒤로 흔들며 뛰는데 모든 인파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고된 코스를 완주한 그녀에게 당시 레이건 대통령도 전화해서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마라톤을 다 마치고 그녀가 이렇게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강한 의지와 노력할 수 있는 인내와 크러치를 바칠 수 있는 두 겨드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알고 보면 인간은 이렇게 위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값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목표와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들지만 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도 마치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선수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달려가는 경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쉬지 말고 달려가야 합니다. 이렇게 뛰어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 때문” 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것은” 소명입니다. 예수께로부터 부름 받은 그 부름의 목적입니다. 이 소명은 참 신성한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의무와 은사, 그것이 이 소명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인구가 80억이라고 하는데 그 80억 인구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습니다. 나처럼 생긴 생김새, 역할, 성격, 은사, 개성, 소명은 나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나의 가치입니다. 사람들이 이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뜯어고치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내가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면 분명 나에게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소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값이고 목적이고 삶의 이유이고 소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르니까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그런 소명을 발견하고 그 신성한 소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개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는 주어진 사역을 충실하게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소명의 삶입니다. 사할린에 가 보니까 선교사들이 고군분토 하고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위험이 상존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역자의 삶입니다. 소명 받은 삶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선교사의 보고에 따르면 참 아찔한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한 선교사가 테러를 당했습니다. 지하철을 타려는데 칼에 찔렸습니다. 몸에서 피가 흘렀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에서 여행 온 어느 모자에 의해서 간호를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한국의 모 교회 집사였습니다. 선교사와 집사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선교사를 간호하다 보니 아들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간호하던 여집사는 선교사 보다 도망간 아들이 걱정되어 아들을 찾아 가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선교사는 지금 찾아보아도 아들을 찾지 못할 것이니 조금 기다리면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조금 후에 그 아들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모자의 도움으로 이 선교사는 무사히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선교사의 사역의 길에는 언제나 이런 어려움이 기다립니다. 이런 어려움이 수반되기 때문에 이 사역의 길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손해 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합동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때 도망갔던 젊은이가 몇 년 후에 신학교에 갑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이 선교사가 당했던 테러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젊은이의 앞길을 새롭게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개인의 삶에 충실하고 사역자는 주어진 사역에 충실하는 것이 소명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인은 기업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끊임없이 전진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 그것이 국가에 공헌하는 일이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고 소명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일에 관심 쓰니까 기업이 부진하고 좌초하고 무너지고 마침내 쓰러지는 것입니다. 은행이 망하는 회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망해가는 회사는 화장실이 더럽고 사무실이 지저분하고 공장 내부가 전보다 더 지저분해지고 직원들이 불친절하며 회의가 잦고 길며 상하의 위계질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망하는 기업인의 특징은 사장이 정치와 도박에 관심을 갖고 역술인에게 의존하는 의존도가 높으며 오너의 친인척을 대표자로 내세고 자주 자리를 뜬다는 것입니다. 4,5년 전에 한창 벤처기업이 뜰 때 망한 순서를 보면 사장실이 넓고 호화로운 순서대로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길을 가로막는 요소들입니다. 소명을 잃어버리고 목적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예수께로부터 붙잡힘 때문에 이방 땅으로, 임금들 앞으로, 박해자들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갔습니다. 가서 자신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고 가르쳤고 설명했고 간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그 부름의 일을 위해서 오늘도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소명의 인생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보통 세 종류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과거에 매여살기 쉽습니다. 대화를 하면 언제나 과거를 말합니다. 지난날을 회고합니다. 늘 지난날의 회상에 잠겨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지난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에서 밝은 부분은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삶이 어둡습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다 뺏기고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오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깊이 파묻혀 골똘하게 세상에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오늘 현재에 너무 깊이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현재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돈과 즐기는 일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두 돈버는 일에 골똘해 살아갑니다. 그리고 살 빼는 일에 전쟁을 치룹니다. 보면 그만하면 괜찮은데도 모두 더 날씬해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오직 이 일에 매달려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 에어로빅 센터에 몸무게를 말해주는 전자저울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무게가 50kg인 사람이 저울에 올라가면 당신의 몸무게는 50kg 입니다 하고 말로 해 줍니다. 그런데 130kg인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저울이 “한사람은 내려주세요”하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오직 오늘만 생각하고 오늘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매일 찜질방에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뜨거운 불가마 속에 들어가 1분이라도 더 인내하며 살을 빼려고 땀을 쏟아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 지옥에서는 불가마 고치는 일에 한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불가마에 들어가 하도 연단을 받아서 지옥의 불가마는 기능을 상실해서 불가마의 열을 올리는 공사가 한창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니 내일이나 장래 그리고 앞에 있는 것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오늘에 집착해 살면 내일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지향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 미래적인 사람이 내일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뭔가 성취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피력한 인생이고 신앙관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앞에 있는 것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지난날은 그렇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입니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모두 허무, 후회, 부끄러움, 실수, 고난스러웠던 일들만 생각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지난날의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지난날 바울이 한 행동을 보면 오류가 많습니다. 모르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닌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대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심정으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할 것은 안주의식입니다.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이 이 안주의식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라, 기도도 많이 하라, 헌금도 많이 하라, 그러나 내일부터 하라.” 이 안주의식에 매여 내일 내일 하다가 그냥 죽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좋아하고 안주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안주의식을 극복하려면 피나는 노력과 수고와 자기부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에 와 보니까 젓과 꿀은커녕 물도 없는 황량한 빈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뿐 아니고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누구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할 대상이 바로 이 안주의식입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고향에 가서 묻히려는 마음도 알고 보면 안주의식입니다. 안주의식 가지고는 달려갈 길을 가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칼럼버스가 오늘도 우리는 서쪽으로 전진한다 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그 삶에는 모험이 들어있고 수고가 들어있었지만 그런 고난의 모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많은 섬을 발견했고 그 땅이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구상의 나라들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가 90세 때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이제는 쉬실 때가 되었는데 어떻게 세월을 보내실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이제 90개째 봉우리를 넘었으니 100번째 봉우리를 향해 가야지요.” 이렇게 멈추지 않고 마지막 까지 달려가려는 자세 때문에 모두 인류문명을 위해서 뭔가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보면 바울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는 “상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상이 참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상”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여러분도 어려서 이 상 때문에 일년에 교회에 나가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그 상 때문에 오늘 신앙의 길에 들어와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고 노력하게 하고 뛰게 만듭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없으면 선수들이 그렇게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선수들이 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연습하는 것을 보면 참 안쓰러울 정도로 연습을 합니다. 그 동기는 상 때문입니다. 금메달,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젊음을 불사르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땀 흘리게 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이 순교하는 것도 모두 이 상 때문입니다. 이 상 때문에 오늘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죽음도 불사합니다.
바울은 그 상 때문에 매일같이 분주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사명이 끝나갈 무렵 그는 의미심장한 말로 그 상을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자신 있는 기대요 소망이요 만족스러운 고백입니까. 마치 42.195 km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골인지점에 돌아와 손을 들고 나는 이제 완주했다 하고 만족스럽게 골인하여 마라톤을 끝내는 모습과 같습니다. 무슨 일이나 성공스럽게 마치고 끝내는 일는 아름답습니다.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하다 정년퇴임하는 일도 아주 귀한 일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학생이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졸업식 날 개근상을 받고 졸업을 합니다. 그 학생은 성적이 몇 등이냐를 불문하고 축하받을 학생입니다. 그 과정을 다 대가 없이 마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축하받을 일입니다. 평생 목회하다가 은혜롭게 모두가 아쉬워하는 가운데 목회를 은퇴하는 일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을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은퇴를 생각하면서 그 은퇴의 지점에 가까이 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게 주어진 소명, 목적, 삶의 이유,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도 다 이루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만족한 은퇴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신성한 부르심과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달려가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께로부터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달려간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달려가기 위해서 뒤에 있는 것 즉 옛날의 기억이나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주님의 소명의 이유를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달려간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신앙의 고백입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본이 되는 신앙 생활
빌 3:17-4:1 / 김필곤 목사
세르주 시코티가 쓴 <심리실험 100>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989년 워싱턴 대학의 심리학자인 멜초프와 무어는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지 이틀 미만인 신생아 4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답니다. 실험자는 아기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답니다. 그리고 20초를 주기로 아기에게 혀를 내밀기와 고개를 흔들며 도리질하기를 반복했답니다. 이 실험은 8분 동안 진행되었답니다. 이 행동들에 대한 아기들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비디오 촬영도 했답니다. 그 결과 멜초프와 무어는 어른이 혀를 내밀 때보다는 도리질을 할 때 아기들 역시 도리질을 더 많이 하고, 어른이 도리질을 할 때보다는 혀를 내밀 때 아기들도 더 많이 혀를 내민다는 사실을 확인했답니다. 아기는 어른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을 위한 모델로 이용더라는 것입니다. 어른이 행동을 멈추고 난 뒤에도 아기의 모방 행동이 지속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방의 천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인간은 모방본능을 갖고 태어나 이를 통해 학습하고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듯이 거울 뉴런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누구나 탁월한 모방능력과 모방본능이 있습니다. 모방하여 언어를 배웁니다. 모방하여 옷을 입습니다. 모방하여 노래를 합니다. 모방하여 밥을 짓습니다. 모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모방하여 피아노를 칩니다. 모방하여 제품을 만듭니다. 모방하여 범죄를 합니다. 모방하여 자살도 합니다. 모방하여 욕도 합니다. 제품이나 예술품이나 창조물들은 다 모방의 산물입니다. 모방을 잘 하면 원하는 것을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게 합니다.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때로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누구를 모방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위대한 학자가 되려면 위대한 학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존경받는 스승이 되려면 존경받는 스승을 모방해야 합니다. 성자가 되려면 성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누구를 모방해야 하겠습니까? 신앙생활 잘 하려면 누구를 본받아야 할까요?
1.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으로서 계속하여 본받는 일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바울도 흠이 있고 단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 한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흠과 단점까지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사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모범을 자신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율법주의자들과 무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나 무 율법주의자를 본받지 말고 복음주의자인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무 율법주의자는 이제 구원받았으니 율법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도덕주의자들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은 선이고 육은 악이니 어차피 악인 육신 생활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자유를 방종의 의미로 잘 못 이해하고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음주의자입니다. 구원받은 후 율법이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성화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자신과 같은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도 한때 율법적 행위를 통하여 의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독사에게 물렸지만 죽지 않는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유일한 구세주인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나 무 율법주의자를 본받지 말고 함께 복음주의자인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도적주의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닮기 위해 열심히 푯대를 향해 달려나가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빌3:7-14)
그런 믿음을 가지니까 자연스럽게 그 예수님께 평생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신 있게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에서 3 번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고린도전서 4장 16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교주가 되어 자신을 본받으라고 우월의식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단의 교주처럼 신앙의 교만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교주들은 추종자 신도들에 신적이며 왕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요합니다. 이단 교주들은 자기애적인 인격장애를 가진자들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시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자랑에 빠진 자들입니다. 공감능력이 결핍되자들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착취하고 조정합니다. 모두 소시오패스들입니다. 자기애적, 자아도취적 반사회성 성격자애자들입니다. 양복을 입은 뱀이 되어 거짓말과 사기와 조종에 능숙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고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독단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대변자, 대언자, 목자, 보혜사 등 신의 계시를 받은 자로 숭배하게 만듭니다. 이들은 본받을 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17절을 다시 보기시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바로 누구를 눈여겨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여겨 보라는 말은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하여 자세히 관찰하여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있듯이 그와 동일하게 행하고 있는 자들을 너희들은 자세히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울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모범을 삼고 사는 가까이에 있는 신앙인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앞에 소개된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을 말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신앙과 헌신에 있어 누구를 본받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신앙과 헌신에 있어서 자식들에게 나를 본받으라 할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목사로서 목사가 되려면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로로서 장로가 되려면 나 같은 장로가 되어라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권사로서 권사가 되려면 나 같은 권사라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안수 집사가 되려면 나 같은 안수 집사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가 되려면 나 같은 교사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가대가 되려면 나 같은 성가대가 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당당하게 자신을 본받으라 할 정도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삶은 전염되는 것입니다. 모이면 교역자 욕하고, 교인 흉보고, 서로 상처주고 흩어지면 험담하고 다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에 가면 자녀들 앞에서 교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역식구들 모여 놓고 구역예배 드리라고 하면 일부 예배 2부 흉보기 비평하기 잔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과감하게 멀리해야 합니다.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도 수차례 반도적주의자들에 대해서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권면에도 불구하고 아직 돌이키지 않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큰 슬픔을 느끼며 다시 한번 더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라는 말은 조용히 눈물만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고 애곡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단에 빠진 자식들을 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방송에 나온 신천지 이단에 빠진 자식들을 이단 무리에서 구출하기 위해 애쓰는 부모님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게 보입니까? 젊은 날 자식이 학교도 직장도 그만두고 이단의 교주를 위해 충성하는 모습을 모면 얼마나 부모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단에 빠져 지옥에 갈 것을 보면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원수라는 말은 ‘적, 대항자’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데 십자가의 원수들은 자기 의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은 의를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있고 영지주의와 같은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마침이 멸망입니다. 미래는 결국,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면 지상에서 방종을 일삼고 탐닉하며 풍요를 누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영원히 망하고 맙니다. 예수믿는 사람 같으나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교인은 될 수 있는데 신앙인은 아닙니다. 교회는 나와도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가라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구실을 대어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사람들입니다(마7:13; 계17:8,11).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계 17:8)” 죄인에 대한 형벌은 이땅에서도 시작되지만 사후에 절정에 달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불못입니다.(계20:15; 22:8) 그들은 사망 불못에 처하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그들은 배를 그들의 신으로 삶는 사람들입니다.
배는 상징적 의미로 미각의 쾌락이나 대식에 몰두하는 인간의 욕망을 말하고 있습니다(롬16:18). 당시 "로마는 식탁에서 망했다"라고 할 정도로 로마 귀족들은 오후 4시에 시작하여 자정이 넘도록까지 식사를 즐겼다고 합니다. 배가 차면 새의 깃털을 목구멍에 넣어 토해 내곤 또 먹곤하였답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첩들이 부채질을 하고, 소년 노예가 나무가지로 파리를 쫓으며, 여자 안마사는 사지를 주무르고, 거세된 노예들은 변기를 들고 생리 사인을 기다리고 서 있곤 했답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들인 돈은 노예 하나를 판 값과 맞먹었답니다. 오늘날 말하면 물신주의자들입니다. 물질이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반도덕 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미각의 쾌락과 포만감을 주는 저급한 육체적 욕망을 우상으로 삼고 사는 삽니다. 이들은 육욕의 만족보다 더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무절제하고 재갈 물리지 않은 욕구와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그들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요 소망인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그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자랑으로 여긴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반 도적주의자들은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수치스럽고 불명예로운 일을 저지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도되어 선과 악, 자랑스러운 일과 수치스러운 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재미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단들은 남의 교회에 들어가 교인들을 거짓으로 복음방에 데려가 성경 공부시키면서 거짓을 일삼지만, 그것을 모략이라고 악한 일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교회를 빼앗는 산 옮기기 작전을 하면서도 마땅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여성 성도를 성추행하여 감옥에 간 죄를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고난이라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넷째는 그들은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 분사형으로 “땅의 일에 마음을 쏟고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으므로 단지 이 땅의 일에 대해서만 몰두할 뿐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땅의 것을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물질, 명예, 쾌락, 세상적인 인기, 성공 등이 그들이 삶의 목표 전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본받아서도 안 되고 우리가 이런 자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결국, 멸망으로 인생은 끝나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3.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주 안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4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촉구했던 것처럼’이라는 말입니다. ‘서라’라는 말은 ‘확고히 서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잠자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초소를 지키고 서 있어야만 하는 군인들처럼, 혹은 우승한 경주자에게서 발견되는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처럼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 있으라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면 본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누구를 본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철저히 예수님을 신앙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닮은 꼴이 되었으니 이제 나의 닮은 꼴이 되면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으니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철저히 자신의 유익 대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고전8:13, 10:23,24,33) 항상 자신을 쳐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고전9:27)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빌2:7-8) 그리스도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고후11:23-27) 옥에 갇혔고, 수없이 매를 맞아 여러번 죽을 뻔 했습니다. 39대 태장 다섯 번 맞았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로마서 8장 29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본받았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표정짖는 것도 우리를 보면 예수를 보는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자신있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으니 너희들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신분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분을 변화시키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이 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이제는 거지를 따라다니면 거지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속이 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해적 선장이 될라면 열심히 해적 선장을 본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모범적인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대한민국의 모범시민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시민권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충성을 바치는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 아래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무와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당당하게 여겼던 로마 시민권보다 천국 시민권은 더 당당한 것입니다.
둘째는 소망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20-21).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은 누구를 기다립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날에 우리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약하고 죄에 빠질 수밖에 없고 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몸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만물을 복종케하는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가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성도는 변화된 몸으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살전4:13-18 고전15:51-5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날에 나 때문에 고생하였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너의 욕심대로 못하고 나 때문에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고 나 때문에 건강도 잃었고, 나 때문에 화려하게 살지 못하였고, 나 때문에 먹을 것 재대로 못먹었고 나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지고 갔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십자가 장식만 하고 다니지 않고 고생을 하였다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잘 먹고 살다 왔다는 말보다 주를 위해 고생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어느 주일날, 주일학교의 한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해주고 난 뒤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면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 중의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하기를 “선생님, 죽기 전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은 다음에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영광스러운 그 날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외치며 삶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