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입니다
창세 6,5-8; 7,1-5.10; 마르 8,14-21 / 연중 제6주간 화요일; 2025.2.18.
오늘 말씀에 따라서 제가 정한 강론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라고 하면 으레 개신교를 지칭합니다. 천주교는 ‘성당’이라고 지칭되지요. 이러다 보니,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는 교회 안 다녀. 성당에 다니지.”라는 말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고백문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서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성당을 믿는다고 고백할 순 없지요. 성당은 전례가 거행되는 건물을 뜻하는 말일 뿐이니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회 등으로 역사 안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부정확한 언어 관습 탓에, 천주교 신자들의 정당한 교회 의식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처음과 인류 역사 초창기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창세기는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워주려는 계시의 기록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바빌론 유배 후에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구전으로 전승되어오던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기도로 심화시켜, 또 바빌론 유배 시절에 배운 문화적 표상까지 곁들여 후대에 전해주었습니다. 즉, 이교인들이 신으로 숭배해 온 해와 달과 별은 신이 아니며 오히려 이 모두를 합한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가 하느님이시라는 것, 그런데 인간이 피조물임을 망각하고 하느님처럼 되어 보려던 교만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서 비롯된 죄악이 카인과 그 후손들에게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 1장에서 5장까지의 계시였습니다.
이는 옛날에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며 또 성경의 탄생지인 중근동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만도 아니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가장 깊은 의미를 일깨워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아담과 하와요, 카인과 아벨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태초의 혼돈 속에서 질서 있게,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고 아름답도록 창조하셨다는 메시지는 갈수록 혼탁해지는 세상, 죄악이 차고 넘쳐나는 사회 현실 속에서 믿는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창조 양식을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유일한 의인이었던 노아가 믿는 이들이 본받아야 할 예형이라는 메시지가 뒤따라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카인의 후손들이 죄를 저질러 세상에 악으로 가득 차자 하느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심판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지만 셋의 후손인 노아만은 하느님의 눈에 들었을 정도로 의로웠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노아를 포함한 가족 여덟 사람과 동물의 암수 한 쌍들을 홍수 심판에서 구해주기로 하셨고 이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노아는 홍수에서 구출될 수 있는 피난처로 커다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거의 백 년에 걸쳐서, 그리고 거인족들의 도움도 받아서 만든 방주의 규모가 대단히 큽니다. 길이가 삼백 암마, 너비는 쉰 암마, 높이는 서른 암마입니다.(창세 6,15) 오늘날 실제로 쓰이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 125m, 너비 29m, 높이 23m 정도 됩니다.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타운의 테마파크인 '아크 인카운터'에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실제 크기로 재현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에 대한 관심은 이미 고대부터 싹터 있었습니다. 2세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치쁘리아누스는 잔혹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주 기도문 해설’에서,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교회 안에 들어와야 구원될 수 있다.”는 일종의 격문을 동시대인들에게 발표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들과 그리스도 신앙 그리고 교회를 옹호하려던 호교적인 이 비유 표현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가톨릭교회 시대에는 제국교회의 경직된 법조문으로 바뀌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즉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경직된 해석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같은 일방적이고 야만적인 행태가 수백 년 동안 버젓이 유럽에서 행해질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그러다가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나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일이 가능해지자, 선교사들도 이 해석에 입각하여 전투적인 선교 대열에 나섰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 선교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 18세기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선교하려던 예수회원들의 실화를 다룬 영화 '미션'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보증으로서 교회가 노아의 방주임을 내세울 수 있으려면 그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그저 세례를 받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이 이러한 이치에 적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사흘 동안 듣던 군중이 안쓰러워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사실 이 기적 사건은 그 상황의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후의 만찬에서 세우실 성체성사를 염두에 두신 분명한 예표적 행동이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믿는 이들을 배불리 먹일 영적이고 보편적인 에너지 충전의 기회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마련된 것입니다. 금지된 선악 나무의 과실을 따 먹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 나무의 과실과도 같은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로 축성되고 변화된 성체를 받아 모시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희생적 사랑을 십자가로 알고 살아가는, 부활의 삶이야말로 구원의 충분조건입니다. 다시금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을 통하여 비로소 열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인류 역사상 시간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공간적으로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영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가장 체계적인 조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선교나 사목 활동이 세상의 죄에 맞서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부활의 행동을 전개하지 못하면 결코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 자처할 수 없습니다. 함량 미달인 제도 교회가 그저 “교회 밖에 구원 없다.”고 표방하며 안하무인격으로 교만하게 구는 자세로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거나 감동과 매력을 주기는 커녕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노아의 방주처럼 구원의 보증으로 자처할 수 있으려면 단지 형식적 믿음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이 구원이 필요조건이요 사랑이 구원의 충분조건이라면, 이 두 조건을 다 채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신비가일 것입니다. – 교황은 “앞으로의 세상에는 다수의 무신론자와 소수의 신비가만이 남을 것”이라고 내다본 바 있습니다 - 그리고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가르치고 촉구하는 평신도상이기도 합니다. 복음적인 교회 쇄신은 이들의 존재와 활동에 의해서만 이룩될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환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찾고, 정의를 기본으로 추구하는 보람 안에서 살며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희생적 사랑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리고 그런 삶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보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현대적인 신비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하고 깨달음이 아둔한 제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야단치셨지만, 매일 같이 또는 적어도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는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영성을 지녀야 하고, 삶과 일에서 실천하는 정의의 보람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져야 하며, 게다가 기회가 닿을 때마다 희생적 사랑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을 보고 듣는 신비가가 되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믿음과 사랑으로 사는 하느님의 방주이므로, 말씀과 성사와 애덕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아직도 숱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있으며, 무신론 풍조가 만연한 가운데 세상의 죄악이 줄어들지 않고 있아 혼돈스러운 우리네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질서 있고 조화롭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려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