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최용현(수필가)
‘아비정전’(1990년)은 홍콩영화계의 거장 왕가위 감독이 ‘열혈남아’(1987년)에 이어 두 번째 연출한 영화로, 고독한 청춘의 미학적 걸작으로 불리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제목 ‘아비정전’은 ‘아비의 일대기’라는 뜻이고, 영어제목 ‘Days of Being Wild’는 ‘거칠게 산 나날들’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1991년 홍콩 금상장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장국영), 촬영상, 미술상을 수상했고, 대만 금마장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를 ‘화양연화’와 함께 5점 만점을 주었다.
혼자 사는 청년 아비(장국영 扮)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축구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아가씨 소려진(장만옥 扮)을 찾아가 작업을 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시계 좀 봐요. 지금은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1분전…, 당신은 나와 1분 동안 함께 있었어요. 지금부터 우린 친구예요.’ 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소려진도 ‘이 1분을 영원히 기억하겠어요.’ 하며 아비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아비의 셋방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소려진은 ‘저와 결혼 안 할 거예요? 하고 묻는데,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비는 ‘안 해.’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소려진은 ‘다시는 오지 않겠어요.’ 하면서 떠나간다.
소려진과 헤어진 아비는 댄서인 미미(유가령 扮)와 또 다른 사랑을 이어간다. 미미도 아비의 셋방에 와서 살면서 아비의 친구(장학우 扮), 아비의 양어머니와 마주치기도 한다. 어느 날 자신의 짐을 찾으러 온 소려진이 아비에게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말하는데, 아비는 ‘난 독신주의야.’ 하면서 매정하게 거부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미미는 아비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집착한다.
소려진이 짐을 찾으러 왔을 때, 때마침 이곳을 순찰하던 경관(유덕화 扮)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후에도 두 사람은 몇 번 더 만난다. 소려진은 ‘1분이 쉽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하면서 실연의 상처를 토로하고, 경관은 그녀의 상처를 위무해주면서 서로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소려진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면서 두 사람의 만남도 흐지부지 되고 만다. 경관 일을 그만 둔 남자는 평소에 꿈꾸던 선원이 되어 필리핀으로 향한다.
아비는 어려서 친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아 지금의 양어머니에게로 입양되어 성장한 것에 대한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있다. 양어머니는 남자관계가 복잡해서 자주 아비와 다투는데, 아비는 양어머니와 담판 끝에 기어이 친어머니의 주소를 알아낸다. 아비는 셋방 키를 친구에게 주고 친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난다.
한편, 미미는 자신을 짝사랑해 온 아비의 친구로부터 아비가 필리핀으로 친어머니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미미가 필리핀으로 아비를 찾아가겠다고 하자, 아비의 친구는 아비가 넘겨준 차까지 팔아서 미미의 여비를 보태준다. 그러면서 만약 거기서 아비와 잘 되지 않거든 자신에게 와달라고 말한다.
1961년 어느 날, 아비는 필리핀에서 친어머니의 저택을 찾아가지만, 친어머니의 거절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 술에 만취하여 필리핀의 차이나타운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비는 경관이었다가 선원이 된 남자에게 발견되어 그의 숙소로 따라간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친해진다. 다음날 아침, 아비는 기차역의 식당에서 한 남자와 위조여권 문제로 다투다가 그 남자를 칼로 찌르고 선원과 함께 도망쳐서 열차에 탑승한다.
선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위조여권 문제로 다투던 남자의 동료가 아비를 총으로 쏘고 달아난다. 자리에 돌아온 선원은 배에서 피를 흘리는 아비에게 ‘영원히 기억될 1분’에 대해서 말을 꺼내고, 아비는 선원이 소려진과 친했던 사이임을 알게 된다. 아비는 ‘소려진을 만나거든 그 1분을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은 잊었다고 전해줘.’ 하고 숨을 거둔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미는 막 필리핀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있고, 소려진은 여전히 매표소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양조위 배우가 좁은 골방에서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을 2,3분간 보여주다가 방에서 나가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것은 속편을 예고하는 것인데, ‘아비정전’의 흥행실패로 속편 제작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비정전’(1990년), ‘화양연화’(2000년), ‘2046’(2004년)을 시리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세 편 모두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고 여주인공이 소려진이다. ‘아비정전’의 시대적 배경은 1960~61년, ‘화양연화’는 1962~66년, ‘2046’은 1966~69년이기도 하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소려진을 떠나보낸 아비는 허전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듯 독백을 한다. ‘발 없는 새가 있지. 이 새는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지. 평생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죽을 때지.’ 그러면서 아비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속옷 차림으로 방에서 혼자 맘보춤을 춘다.
이때 흘러나오는 곡이 저 유명한 ‘Maria Elena’이다. 멕시코의 작곡가 로렌조 바르셀라타가 1932년 당시 멕시코 대통령의 영부인 Maria Elena에게 헌정한 곡으로, 첫 음률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한번 들으면 잘 잊히지 않는다. 이 영화 개봉 후,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이 음악이 유행하면서 이 춤 장면을 패러디한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아비정전’에는 남자 3인과 여자 2인의 5각 관계가 형성되는데, 한 커플도 맺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발 없는 새’ 이야기에도 드러나 있고, 양모와 친모 사이에 갈등하면서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비에게서도 보듯이,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당시 홍콩 주민들이 처한 불안한 상황과 맞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