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딜방아가 있는 곳간 옆 감나무에 하얀 감꽃이 피어났습니다. 산에는 청미래 열매가 콩알만큼 커졌습니다. 써레질을 한 동이네 논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햇살이 비치자 논에는 파란 하늘도 담기고 앞산의 푸른 소나무도 담깁니다.
동이 할아버지와 동이 아빠는 쪄내 온 모를 논에 던집니다. 논물이 일렁입니다. 논에 담겼던 하늘과 나무들이 한데 섞여 어우러집니다. 동이 할아버지가 중얼거립니다.
"그래, 밤 사이에 별을 담고 바람도 담았으니 이제 모 심어도 되겠지?"
오늘은 마지막으로 증조할아버지 산소 옆에 있는 논에 모내기를 하는 날입니다. 다른 곳에 있는 논에는 이앙기로 모를 심었지만, 산소 옆에 있는 논만은 남의 손을 빌지 않고 가족끼리 모를 심었습니다. 동이네는 이 논에서 나는 쌀로 추석에 차례를 지냈습니다. 동이 할아버지가 힘없이 말합니다.
"아범아, 모심는 일은 올 해로 끝이로구나."
"아버지도 참. 전 지긋지긋한 농사, 속이 후련합니더. 누가 농사꾼을 알아주기나 합니꺼?"
"아범아, 니는 내 마음 모른데이. 한 평생을 땅과 함께 살았는데 이젠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동이 아빠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읍내로 나가 조그만 가게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농사짓기가 싫어서 동이를 읍내 중학교에 보낼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힘드실 테니 밖에서 동이와 함께 못줄이나 잡아 주이소."
"아이다. 평생 해 온 일을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해야 안 되겠나."
할아버지는 논으로 들어가 모를 한 움큼 집어 심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모를 아예 심지 않은 상훈이 할아버지가 일을 도우러 왔습니다.
"자네가 이 논만은 늘 식구들끼리 모를 내는 건 알지만, 내 좀 도와주러 왔네."
"그러게나. 지금껏 손수 지어 조상들께 차례를 올렸는데 고집 부려 뭘 하겠나."
"난 자네네 모심어주고 어제 내려 온 우리 손자와 서울 아들네 집으로 가네."
모를 심는 동이 할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상훈이 할아버지 얼굴에도 더욱 주름이 깊어집니다.
"어이. 우리 모내기 소리나 한판 함세."
"그러세. 이 소리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만. 그럼 자네가 메기면 내가 받음세."
동이 할아버지와 상훈이 할아버지는 소리를 시작합니다.
"서마지기 이 논배미 반달같이 떠나간다
제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모야모야 노랑모야 너 언제 키 커서 열매 열래
이 달 크고 저 달 커서 구시월에 열매 열지
사대야 같은 이 못자리 장기판만큼 남았구나
장기야 판이사 좋다마는 친구야 없이 못 두겠네
이 논에다 모를 심어 잔잎이 훨훨 영화로다.
우리야 부모님 산소들에 솔을 심어 영화로다."
동이 할아버지와 상훈이 할아버지는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릅니다. 노랫소리는 골짜기를 타고 돕니다. 지저귀던 산새들도 할아버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 듯 조용합니다. 못줄을 잡고 있던 동이는 할아버지가 하는 모내기 소리를 따라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동이입니다.
그러나 어제 서울에서 온 상훈이가 생각났습니다.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간 상훈이는 이제 시골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반가워서 손을 잡았는데 하얀 얼굴과 부드러운 손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도시로 가면 모두 상훈이처럼 멋지게 보일까?"
못줄을 잡고 동이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거칠어진 손바닥을 만져 봅니다. 매끄러운 상훈이의 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동이와 산과 바람을 담았던 논에는 어느 새 푸릇푸릇한 모로 덮였습니다. 모를 심은 논 위로 하얀 구름이 떠가고 산비둘기가 날아갑니다.
동이 엄마가 새참을 이고 논두렁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동이는 얼른 뛰어가 엄마 손에 들려있는 양은 주전자를 받아듭니다. 동이가 조심조심 걸어오다 소리칩니다.
"할아버지, 참 가지고 왔어요."
동이 엄마는 새참을 논 옆 뽕나무 밑에 내려 놓았습니다. 뽕나무에는 까만 오디가 조롱조롱 달려있습니다. 동이는 얼른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까만 오디를 따 입에 넣었습니다. 달짝지근한 오디 맛이 혀 안에 퍼졌습니다. 할아버지가 뽕나무 밑으로 오며 말씀하셨습니다.
"동이야, 우짜노. 이 뽕나무의 오디도 올해로 끝이구나. 많이 따 묵어라." 동이는 냉큼 나무에서 내려오며 할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을 바라봅니다.
"동이야, 이젠 벼농사 짓고 싶어도 몬 짓는 거 알제? 이 마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가야 안 하나."
"할아버지, 누가 뭐래도 이 논은 우리 논인데, 우리가 이렇게 벼를 심으면 되잖아요."
동이는 더 이상 벼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할아버지도 그러면 얼마나 좋겠노."
할아버지가 동이 입에 묻은 오딧물을 닦아줍니다. 동이의 입가에 묻은 달콤한 오딧물이 할아버지의 가슴 속으로 까맣게 퍼집니다. 할아버지는 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칩니다.
"아이구, 왜이래 자꾸 가슴이 답답한지 모르겠네."
할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논 옆에 있는 증조할아버지 묘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버님, 이제 가을걷이가 끝나면 이곳을 떠나야 합니더. 세상이 우찌 될라고 농사 짓는 사람을 땅에서 내쫓습니꺼. 이 좋은 곳에 골프장이라니, 말이 됩니꺼."
잠자코 있던 상훈이 할아버지가 동이 할아버지를 달래듯이 말했습니다.
"우리야 조상들 때부터 가꾸어 오던 논밭이지만 이제는 벼농사를 지어 봐야 아이들 교육도 못시킨다하니 우짜겠노. 세상이 변해 외국쌀이 헐값에 밀려오는 판에 더 이상 농사지어 봐야 목구멍에 풀칠도 못할 낀데, 자네도 인자 미련 좀 버리라."
"젊은 것들이 뭘 알겠노. 힘이 들어도 논에 벼꽃 피는 재미로 살았는데…, 아무리 잘생긴 꽃이 있다 해도 나는 세상에서 벼꽃이 제일 귀하고 고마운 꽃인 기라. 지금까지 이래 살아 온 것도 다 그 덕분 아이가. 동이 애비는 보상금으로 읍내에 나가 장사할 궁리만 하니…."
"농사짓는 기 얼마나 힘드노, 이제 동이 애비를 이해해라. 세상이 자꾸 변해 가는데 우짜겠노."
동이 할아버지와 상훈이 할아버지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모내기가 끝나자 상훈이 할아버지를 배웅했습니다.
"내 가끔 읍내로 자네 찾아 오끄마. 그라고 자네 아까 보니 자주 한숨을 쉬고 가슴을 치던데 어디 안 좋나? 병원에 한 번 가 봐라."
"병원은 무슨, 내가 아픈 것 봤나? 요즘 들어 한 번씩 가슴이 답답하고 그렇다. 도시야 편하기는 하겠지만 공기가 안 좋다카이 자네나 건강 잘 챙기라."
할아버지와 상훈이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 서로 걱정을 했습니다.
동이는 상훈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어깨가 더 굽어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쟁기를 깨끗이 씻어 그늘에서 말렸습니다. 말린 쟁기를 디딜방아가 있는 곳간에 갖다놓았습니다. 동이도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쓸데도 없는 쟁기는 와 힘들게 씻고 그랍니꺼. 다 버리고 갈낀데요."
동이는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는 아빠가 야속했습니다. 늘 큰소리만 치던 할아버지였는데 아무 말 없이 허공만 바라봅니다.
'어휴 아빠는. 할아버지 속도 모르고…'
동이는 쟁기를 깨끗이 씻어서 곳간에 두어도 이젠 쓸모가 없다는 것을 할아버지도 모르실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 쉽니다. 낮에 마신 막걸리 때문인지 기분이 알딸딸합니다. 동이가 다가 와 할아버지를 위로 합니다.
"할아버지, 이사 갈 때 쟁기 다 가져가요."
"어이구 기특하기도 하지. 할아버지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동이밖에 없구마. 동이야, 니도 상훈이가 서울 가고 나서 친구가 없어 허전했제? 이 할애비도 상훈이 할아버지가 떠난다니 서운하다. 읍내로 이사 가면 친구가 생길 테니 조금만 참아라."
동이는 할아버지가 자기 마음을 훤히 들여 다 보는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온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담뱃대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아들여 공중으로 내 뿜었습니다. 담배 연기는 실타래를 풀듯이 가느다랗게 하늘로 올라갑니다. 농악대의 상모 끝에 달린 열 두발 하얀 오리처럼 뱅글 뱅글 돕니다.
신명난 상쇠의 꽹과리소리에 맞춰 징소리 장구 소리가 들려옵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깃발이 펄럭입니다. 청년이 된 동이가 상모를 까딱이며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 나락들도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마을에서 동이 할아버지와 늘 말벗이었던 상훈이 할아버지도 아들이 사는 서울로 가고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조금씩 힘이 없고 말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밥맛도 없고 일 할 기분도 점점 없어졌습니다. 동이는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이 자는 동이는 자주 헛소리를 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가 요즘 힘이 없으세요. 주무실 때도 헛소리도 자주 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요."
"아빠도 알고 있어. 내년부터 농사 못짓는다고 저러시잖아. 동이야, 너도 할아버지따라 논으로 쏘다니지만 말고 공부 좀해라. 읍내아이들은 학원도 여러 군데 다녀서 얼마나 똑똑한 줄 아나? 너도 내년에 중학생이 되면 읍내 학교에 다녀야 한다 아이가?"
동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감기 한 번 안 할 만큼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리에 힘도 없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 정신까지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았습니다.
"벼꽃을 봐야 돼. 벼꽃을…".
할아버지는 점점 헛소리가 심해지고 잠도 자주 설쳤습니다. 밤에도 논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이 말렸습니다.
동이는 아침마다 할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갔습니다. 이른 아침 논에서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릅니다. 뚝새풀 이파리에는 이슬이 반짝입니다. 동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논두렁을 걸어갑니다. 할아버지의 다리가 후둘거립니다. 할아버지는 논에 물이 적당히 차 있는지 벌레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제법 논에 뿌리를 내린 어린 벼들이 속삭입니다.
"동이야, 할아버지랑 어디 가니?"
동이는 개구리가 폴짝 뛰어든 논을 내려다보며 종알거립니다.
"벼야, 벼야. 빨리 꽃을 피우렴. 그래야 우리 할아버지가 좋아하시지. 꽃을 많이 피워서 주렁주렁 열매 맺어라."
동이는 손으로 벼를 쓸어 주었습니다.
"동이야, 너도 벼꽃이 좋으냐?"
"예,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은 다 좋아요."
할아버지는 벼를 만지고 있는 동이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심은 벼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벼 포기도 제법 통통해지고 이삭을 피우기 위해 쑥쑥 자라났습니다. 산들바람이 벼 위에 슬쩍 누웠다가 지나갑니다. 벼들은 간지러운 바람결에 몸을 기울이다 스르르 일어나곤 합니다.
할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가도 바람에 실려 온 벼 냄새를 맡고 일어납니다.
"벼 냄새가 짙은 것을 보니 곧 꽃이 피겠구먼."
할아버지는 논으로 갔습니다. 해님이 따뜻한 기운을 듬뿍 뿌려 주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벼에 이삭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벼 포기에는 연둣빛 이삭이 고개를 삐죽이 내밀며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마와 등에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외국에 나가 쌀 개방을 반대하다 불꽃이 되어 하늘나라로 간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외국 쌀이 밀려와도 벼꽃을 피우며 살고 싶었습니다.
"귀한 벼꽃, 많이많이 피어라."
벼이삭마다 하얀 벼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삭 사이사이에 피어난 아주 작은 벼꽃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내밀며 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흔들어도 곧 떨어질 듯 매달려 있습니다.
"며칠 있으면 벼꽃이 가득 하겠구먼 그동안 비만 안 오면 풍년이겠어."
마지막 벼꽃을 피워 내기 위해 할아버지는 정성을 쏟았습니다. 집으로 돌아 온 할아버지는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아 대문을 바라봅니다.
"동이가 학교에서 올 때가 됐는데…."
곳간 옆 감나무에서 매미소리가 들립니다. 집은 텅 비어 조용합니다. 동이 아빠와 엄마는 가게를 알아보러 다닌다고 농사일에는 뒷전이었습니다.
"올 농사 다 지어놓고 알아봐도 될 텐데, 한심하기는…. 아이쿠, 또 가슴이 조이는구만. 으음."
할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마루에 누웠습니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떠가고 무더운 여름날은 바람 한 점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득한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별을 따세. 별을 따세. 하늘 잡고 별을 따세.
줄기 줄기 물줄기 골짝골짝 산줄기…."
할아버지는 노랫소리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농악대의 상쇠가 된 동이가 신명나게 꽹과리를 칩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할아버지를 맞아 주었습니다. 누런 나락이 익어가는 들판에서 할아버지도 춤을 춥니다. 하얀 수염을 한 할아버지가 동이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했네. 자네가 피워낸 벼꽃에서 이렇게 많은 나락을 얻었다네."
할아버지는 마음이 무척 편안했습니다. 하얀 벼꽃이 핀 푸르른 논이 황금빛 들판과 겹쳐 옵니다.
할아버지 상여가 떠나갑니다. 동이는 꽃가루가 뚝뚝 떨어지는 벼를 한 아름 안고 달려왔습니다. 동이는 할아버지 상여 위에 벼꽃 한 다발을 올려놓았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꽃이에요. 품에 안고 가세요. 할아버지가 왜 이 꽃을 좋아하시는지 저는 다 알아요."
할아버지를 실은 상여는 물안개가 엷게 낀 논두렁을 지나갑니다. 여름날 아침, 벼꽃가루가 물안개와 함께 논 위로 피어올랐습니다.
떠나가는 할아버지 상여 위에 하얀 꽃가루가 소복이 내려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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