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향/이병률
살짝 열린 작업실 문틈으로 누가 빼꼼 고개를 들였다
손가락 끝은 화병의 백합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몇 마디를 내뱉었으나 충분히 외국인이었다
그녀가 그 꽃을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백합 향기에 가던 길을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에 들여놓은 백합의 반을 덜어 안겨주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 뒤를 따라간 적이 있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묻고 물어
한사코 그 사람을 알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누가 햇볕에 널어놓은 허름할 대로 허름한 빨래를 한없이 올려다보다
그만 마음이 젖고 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계간 《미네르바》 2024년 가을호
첫댓글 백합향을 생각하며 긴호흡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