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강론>(2023. 11. 15. 수)
(루카 17,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이 이야기에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아홉 사람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27).”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된 것은,
사실은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인 것입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것은,
‘나아만만’ 엘리사 예언자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시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모범이 되기는커녕 다른 민족 사람들보다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자주 꾸짖으셨습니다.
왜 이스라엘인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선택하셔서 부르셨고, 그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특별한 민족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서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이 특별한 은총과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계속 경고하셨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도
그런 상황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했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말은, 그냥 가버린 아홉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이 은총을 받은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병에 걸린 것은 부당한 일이며,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아홉 사람이, 병이 나은 뒤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않았다면, 그들은 겉으로는 ‘간청’했지만
속마음으로는 ‘요구’했을 것입니다.
‘내 것’을 내놓으라고, 또는 ‘내 것’을 돌려달라고......
그 아홉 사람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억울해하고,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일이라고 항의하고,
그러면서 내 것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자기 요구를 안 들어 주면 다른 신을 섬기겠다고 ‘협박’하다가
결국 다른 종교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있는,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신 일은, 나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 믿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내 할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은총을 받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다 보면 주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과 앞으로 받게 될
은혜에 미리 감사드리는 것도 ‘해야 할 일’입니다.
만일에 겸손하지도 않고, 감사드리지도 않고,
또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글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겸손, 감사, 찬양, 간청은 모든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이야기의 맨 끝에 있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그의 치유를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버린 아홉 사람은, 병의 치유가 취소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나는 지금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겸손, 감사, 찬양, 간청은 모든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