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 한민족의 뿌리
창세 8,6-22; 마르 8,22-26 / 연중 제6주간 수요일; 2025.2.19.
개인이나 집단이나 그 뿌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대단히 어렵기도 합니다. 근원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와 흔적들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는 주로 역사학계와 문화인류학계의 학설들로 추정되어 왔는데, 이 가설들은 대개 이러합니다. 근세 이래 바이칼 호수 근처의 동아시아 기원설이 한동안 유력하더니, 최근에는 아프리카 동부에서 기원된 인류의 일족이 한반도에까지 흘러왔다는 가설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설들은 우주와 인간 생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히 출현했다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믿기 어렵습니다. 물건 하나도 치밀한 기획과 설계 그리고 제작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고, 사건 하나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하물며 우주와 인간이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다거나, 물질에서 생명이 진화할 수 있다는 발상은 도무지 과학적이지도 않고 따라서 합리적인 추론이 아닙니다. 인류 문명을 진화시킨 과학의 대전제는 인과율이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없이는 결과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무신론을 신봉하는 진화론자들이 창시자로 신봉하는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습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사실이라고 인전하는 데에는 150여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고, 교과서에 실리는 바람에 대중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발생을 설명하는 빅뱅론처럼 진화론도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고합니다.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만약에 이 가설들이 진리라면 기원과 시작이 그러했으니, 인류의 운명이나 개인의 운명 역시 진화의 추세와 우연적 결정에 내맡겨져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개인이든 집단이든, 하물며 하나의 민족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하느님을 숭상하는 문화적 현상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민족의 뿌리를 추적하는 일이나 더군다나 그 집단이 하느님을 숭상하게 된 경위를 추적하는 일은 매우 정교한 과학적 추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주와 인간이 하느님의 질서 있고 조화로운 창조 기획에 따라서 창조되었음을 알려주는 창세기의 흐름에 따라서, 오늘 독서에서는 대홍수 후에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일이었음을 알려줍니다. 40일동안 내린 비 때문에 모든 숨쉬는 생명체가 죽고 나서(창세 7,21), 바다 속에 수심이 만미터도 넘는 거대한 해구들이 생겨나서 빗물을 가두고 그 대신에 수천 미터 가량으로 산맥들이 높이 솟아오르는 어마어마한 지각 변동이 생겨나는 동안 물이 빠진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대홍수 전후의 맥락을 감안하여 노아가 제사를 드린 지향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우선 대홍수로 심판을 받아야 했을 만큼 세상에 가득 차도록 사람들이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대신 참회하고 노아 자신과 일가를 구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룩하겠다고 다짐하는 지향이었을 것입니다. 참회와 감사 그리고 다짐의 지향으로 바친 제사의 전통은 노아의 후손들도 계승하였습니다. 특히 노아의 5대손인 에베르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 펠렉과 욕탄(창세 10,25)에게서 이 제사의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큰 아들 펠렉의 6대손인 아브람(창세 11,27)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칼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일이었습니다(창세 12,7). 작은 아들 욕탄은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창세 10,30) 이주했는데, 그 방향으로 보아 동아시아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에베르의 시대에 세상이 동서로 나뉘어졌습니다(창세 10,25).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루는 학자들은 무신론적 진화론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어서 대홍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대홍수로 말미암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가 다 죽어 사라졌고, 욕탄이 후손들과 함께 이주한 ‘스파르’ 지방이 방주가 도착한 산에서부터 동쪽 방향이었으므로 욕탄과 그 후손들이 이룩한 그 문명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세워진 문명이었습니다. 이것이 고조선 문명이라는 사실은 최근에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의 연대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방식으로 검사한 결과로도 뒷받침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는 펠렉과 그 후손들이 아시아 서쪽에 세운 수메르 문명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됩니다. 이 두 문명 모두 노아의 전통을 따라서 하늘에 드리는 제사의 전통을 간직한 문명입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전북 고창의 고인돌
수메르 문명을 이룩한 펠렉의 후손들이 높아 쌓은 제단을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하는데, 바벨탑도 바빌론에 세워진 제단 즉 지구라트 중의 하나였습니다. 수메르 문명인들이 주로 벽돌을 구어 쌓은 데 비해, 고조선 문명인들은 거대한 돌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를 고인돌(Dolmen)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이 약 7만여 기(基) 가량되는데, 그 절반이 넘는 4만 여기가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산동 지방에 몰려 있습니다. 고인돌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전남 화순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은 전북 고창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밝음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었습니다. 흰 옷은 염색하기도 힘들고 때가 타기 쉬운데도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도 흰 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불리었습니다. 박해시대 교우촌의 신앙 선조들도 주일이나 대축일 전례에는 흰 옷을 입었으며, 그 백 년 후 삼일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질 때에도 길거리에는 온통 흰 옷을 입은 만세꾼들이 물결을 이루다시피 했습니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거사 후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언도받은 날이 어제(1910.2.14.)인데, 그후 3월 26일에 안중근 토마스가 교수형을 받고 숨질 때 입었던 옷도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지어 보낸 흰 옷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와 눈을 뜨게 해 주십사 하고 청했기 때문인데, 예수님께서는 두 단계로 나누어 그가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후 나오는 예리코의 소경 치유 기사(마르 10,46-52)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이 이름 없는 채로 나오는 데 비해서 예리코의 소경은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리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아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청원하였으므로 단번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 바르톨로메오가 청원하던 기도를 미사의 초반에 도입하였으니, 그것이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가 이 기도로 두 번 청원했는데 미사에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청원합니다. 그만큼 간절함이 더합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처럼 단계적으로 눈을 뜨든 예리코의 소경처럼 단번에 눈을 뜨든,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일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큰 기적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바를 역사에서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가장 먼저 행할 줄 알았던 노아의 전통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또한 이를 계승했던 우리 민족의 정신 전통이 지닌 성경적 맥락도 알아보는 역사적 안목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우 여러분께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