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물체 주머니 외 2편
이은규
단풍나무 씨앗이 여기 왜 들어 있을까
친절한 재배법, 묘판에 파종하여 10cm 자랐을 때 세 뼘 간격으로 옮겨 심는다 발아가 시작되면 건조하지 않도록 물을 준다
그 물체 주머니 있잖아요
단추, 주사위, 고무공, 조개껍질과 돌멩이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씨앗 봉투
지난 가을 내내 헬렌과 니어링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책 제목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그러나 나는 도무지 어렵기만 해요 아름다움도 삶도 사랑도 마무리도, 웬일인지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뾰죡해집니다
작은 시골 마을 버몬트에서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지급자족했다고 하지요
우리 상상해볼까요 둥근 탁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 사이 달콤했을 저녁의 공기를
시럽이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오래 젓는 일상, 일생
처음으로 함께 본 전시회 티켓, 여행 기념으로 나눠 가진 네잎클로버 키링 그리고 산책길에 주운 반은 푸르고 반은 붉게 물든 단풍잎이 담겨 있던
우리들에게도 물체 주머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탁상시계 건전지함에 한 사람이 숨겨놓은 시간이 이렇게 흘렀군요, 라는 쪽지의 문장은 내내 고요하고요
그러나 나는 아직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물랐으면 좋겠고
버몬트 숲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갈 텐데 나는 지워진 한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볼 뿐입니다
이제 물체 주머니는 열리지 않아요
밤, 단풍나무 씨앗도 잠드는
수박향, 은어
한낮의 여름
수박 향이 나는 물고기에 대해 알고 있니
은어라는 이름의 물고기래
때로 어떤 문장은 화석처럼 박힌다
언젠가 우리 물 맑은 곳으로 떠나자, 약속
뾰족했던 마음이 한결 둥글어질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눈동자보다 깊은 수심은 없어, 어디에도
흐리고 비 흐리고 가끔 비
물고기에게서 어떻게 수박 향이 날까
은어는 초록 이끼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대
허공에 떠다니는 우울을 알뜰하게 모아
바라봤다 나는
우리 사이, 이끼와 수박 향의 거리만큼 가깝게 먼
흥얼거리는 콧노래도 없이 투명한 한낮
약속처럼 언젠가는 오지 않았고
몇 번의 여름을 서툴게 배웅하는 동안
나는 잃어버린 적 없는 시간을 그리워했다, 때때로
저기 밤의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목소리
은어가 돌아올 때까지 뭘 하며 지낼 거야
여름이 오지 않기를 믿으며 바라며
뭘 하며 지낼 거야 한 사람이 사라지면
원이 닫히지 않기를 바라며 믿을래
종이 위 빗방울이 마르는 동안만 뭉클할 것, 내내
이제 수박 예쁘게 자르는 방법을 지우며
수심을 다스리자, 초록 이끼로 번지는 우울들아
먼 데 화석으로 밤을 건너는 물고기자리
살구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한다
손차양, 한 사람의 미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만들어준
세상에서가장 깊고 가장 넓은 지붕
그 지붕 아래서 한 사람은
한낮 눈부신 햇빛을
지나가는 새의 부리가 전하는 말을
부고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빗발을
오래 바라보며 견뎠을까, 견딤을 견뎠을까
한 생이 간다 해도 온다 해도 좋을
이제 한 사람은 없고
긴 그늘을 얼굴에 드리운 한 사람만 남았다
살구나무 잘 있지요
안 들리는 안부는 의문문과 평서문 사이에 있고
살구꽃은 수줍음 또는 의혹
남은 한 사람의 과제는
살구라는 여린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그 이름 안쪽에 누군가 숨겨놓은 비밀비밀
살구殺狗, 나무에 개를 매달아 손님께 살뜰히 대접하자
다음 해 하양과 분홍을 다투며
꽃들이 만발했다는 오래된 이야기
나무의 기억들이 나이테에 새겨지듯
수줍음과 의혹으로 가득 찬 페이지는 무겁다
때로 어떤 예감은 법칙보다 서늘하고
저 새는 왜 오래된 이야기를 물고 왔을까
후드득 살구 한 알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먼 속삭임들, 닿을 텐데 닿을 것만 같은데
― 이은규 시집, 『무해한 복숭아』 (아침달 / 2023)
이은규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시집 『다정한호칭』,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시창작 동인 ‘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