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이 있는 풍경 (외 1편)
정수경
눈이불 뒤집어쓰고
재개발지역 지키는 책상이 하품을 한다
반쯤 열린 입 속에
동짓달 청동하늘 그리려다
부러진 크레파스,
운전사만 태운 버스가
정거장을 빠르게 지나치고
깨진 유리조각에 목이 걸린 시계는
바람의 울음을 빌린다
서랍의 내력이 궁금한
관절 꺾인 담벼락 너머
석양이 야트막한 능선으로 녹물처럼 흘러내린다
뼈대만 남은 창문은
달 없는 밤을 처마 밑으로 불러들이고
혼수트럭에 실어 보냈던 내 젊은 날은
저 서랍 속에 있다
시간의 태엽을 되감는다
뒤늦은 근황이 발뒤꿈치로 키를 늘이며
낡은 사진첩에서 걸어 나온다
침침한 가로등이 찍어낸 추억들
한장 한장 인화되고
오랜 침묵이 흔들린다
가파른 절벽 쪽으로 기울었던 시간이
평형을 회복하자
실밥처럼 풀려나오는
해묵은 일상이 오히려 따뜻하다
세발자전거 탄 아이의 경적 소리에
후미진 곳이 화들짝 환해진다
아를의 방 후기
내가 피신해 있는 병실 유리창에
아를의 방이 흘러내린다
파란 창문이 저 혼자 열렸다 닫히고
벽에 걸린 초상화의 이마를 쓰다듬던 바람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내 고립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첫사랑은
복제미술품을 팔던 시절이었을까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다른 남자 손에 이끌려 내 방문 앞을 지나갔다
명치에 걸린 사랑이 내게 붓 쥐는 법을,
명도와 채도를 가르쳤다
나와 상관없는 현재가 침몰할 때까지
압생트를 마신다 저 지겨운
그림에 칼질하는 소리가 내 귀를 자르고 또 자른다
귓바퀴를 맴돌던 소용돌이는
캔버스 여백으로 붉게 흘러들었고
타히티에서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태양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론 강으로 별이 떨어져 내렸다
붉은 포도밭은 아주 잠깐 내 허기를 채웠을 뿐
납덩이같은 외로움의 무게를 덜 수 없었다
세상은 미쳤다, 미쳐버렸다
캄캄하게 태어나는 짙푸른 밤을 열어젖히고
유리창과 마주 선 내 앞에서
압생트에 젖은 커튼이
회오리치는 편백나무처럼 흔들리고 흔들린다
—《詩로 여는 세상》 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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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경 / 1960년 경북 문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2008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