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탐구 - 자각의 흐름을 계발하기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이 생각들이 아니다"는
탐구에 유용한 예비 단계일 수 있으나
그것이 탐구는 될 수 없다.
탐구는 심리학자가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심적인 탐색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마음의 기능, 충동, 기억 혹은 성향에 대한 탐색이 아니라,
이런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순수한 '내가 있음'에 대한 탐색이다.
그것은 존재의 느낌, '내가 있다'는 느낌을 향해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하나의 진언이 아니다.
그것을 되풀이하여 염하는 것은 초기 단계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가반이 주신 힌트 하나는,
의식을 머리 속에서 집중해서는 안 되고
가슴 오른쪽의 영적인 심장 안에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과 존재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적인 심장을 생각하거나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보고 싶을 때는
당신의 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눈을 사용한다.
심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어디에 있다고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눈으로 사물을 보기 전에
거울을 보고 눈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필요한 것은 그 체험을 갖는 것이지
그것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심장에 대한 이 이야기는 하나의 힌트일 뿐이지만
아주 유용한 힌트이다.
인간은 행위하고, 생각하고,
존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존재함은 다른 두 가지의 저변을 이룬다.
왜냐하면 먼저 존재하지 않고서는
행위하거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그 둘에 의해
워낙 가려지기 때문에 잘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화면들이 투사되는 영사막에 비유될 수 있다.
그 화면들을 받쳐주는 것은 화막이지만
화면들에 가려져 지각되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순간적으로,
우리가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그것이 순수하고 자발적이며
원인 없는 행복임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또한 순수한 무념의 의식이다.
탐구의 목적은 우리가 자기 의지대로,
그리고 갈수록 더 오랜 시간 동안
존재를 자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그것에 대해 명상하는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는 반면,
탐구에서는 주체만이 있다.
당신은 어떤 새로운 것,
당신 자신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함에, 당신의 자아에
당신의 '내가 있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유지하면서
생각들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보통 당신이 생각을 멈추면 당신은 잠에 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탐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마음이 종종 잠에 떨어지려고 한다.
압도적인 졸음이 당신을 엄습한다.
그러나 탐구를 그치고 다른 일에 마음을 쓰면
졸음이 사라지는데,
이것은 그것이 실제로 피로해서가 아니라
무념의 의식에 대한
하나의 본능적 저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들 그 자체는 훨씬 집요한 장애물이다.
그것들은 끝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마음 속으로 쇄도한다.
당신이 그것들을 몰아내면
다른 생각이 뒤에서 슬며시 들어온다.
당신이 생각들에서 벗어낫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딴 생각들을 하고 있다.
유일한 방법은 끈덕짐이다.
부단히 깨어 있음. 생각에 휩쓸리지 않는 것.
맑은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듯,
생각들을 초연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 생각은 무엇인가? 그것이 누구에게 왔나?
나에게,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그러면서 당신은 마음을 다시 탐구로 가져온다.
마음은 나무에서 나무로 잽싸게 건너뛰는 원숭이에 비유될 수 있다.
늘 들떠 있고, 가만히 있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이 들떠서 움직이지 않도록 제어하고,
탐구에다 꽉 붙들어 매야 한다.
그러나 장애가 되는 것은 마음의 헤매는 본성과
생각들의 끝없는 연쇄만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생각들의 배후에 있는 에고 충동(ego-drive)이기도 하다.
이것이 생각들에게 힘을 주고, 생각들을 쫓아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당신은 에고란 없다는 것을 이론상 납득할 수는 있고,
에고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이따금 동요 없는 행복인 그 존재-의식을 잠깐씩 엿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이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거나
이 친구 혹은 이 그룹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
당신은 이런 비판이나 저런 모욕에 화를 낸다.
당신은 직업의 불안을 느끼기도 하고,
당신의 소유물에 집착하며, 돈과 권력을 동경한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 에고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한 에고도 존재한다.
에고가 없다면
누가 분노나 욕망, 혹은 좌절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탐구가 단순히 차가운 탐색이 아니라
하나의 전투임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의 모든 길이 그러하다.
에고, 혹은 외관상 존재하는 에고가 소멸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 모든 길에 공통되는 하나의 필수 요소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멸시키느냐이다.
당신으로 하여금 욕정, 오만 등의 다양한 악덕을
개인적으로 공격하고
그에 반대되는 미덕들을 함양하게 하는 길들이 있다.
그러나 자기탐구는 더 직접적이다.
그런 방법들은 나무의 가지들을 잘라내는 것과 같다.
뿌리와 줄기가 남아 있는 한 새 가지들이 자라날 것이다.
자기탐구는 나무 자체를 뿌리 뽑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약 에고에게서 하나의 배출구를 박탈하면
(예컨대 독신을 강제하면)
다른 것들이 발달할 것이다
(예컨대 식탐이나 허영심).
그러나 에고 자체가 해체되면
그것이 거느리고 번성하던 악덕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꺼질 것이다.
그러나 에고가 실제로 해체되기까지는
부단한 전투가 치러진다.
이것이 자기탐구가 목표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의 어떤 이론이나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자기탐구를 일정 수준 수행하고 나면
순수한 무시간적 존재를 점점 더 자주,
더 오래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순수한 자각이자 동요 없는 행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심적인 것이 아니지만 마음은 그것을 자각한다.
그것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의 진동 혹은 파도 없는 고요함으로서
신체적으로 느껴진다.
일단 이 자각으로 깨어나면
그것은 심지어 당신이 '명상하지' 않고 있을 때도
자발적으로 나타난다.
혹은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 행위에 대해,
일상적인 삶에 대해 저변의 한 흐름으로서 지속된다.
당신이 말을 하거나 심지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러하다.
방법과 관련하여 이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왜 바가반이 당신의 헌신자들에게
세간의 삶 속에서 탐구하기를 더 바라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매일 '명상' 좌선을 하는 것은 유익하고 대부분의 경우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가능한 한 매일 일정한 시간을 명상에 할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마음이 명상에 익숙해져서,
마치 밥 먹고 잠자는 신체적 기능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쉽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직업과 가정적 의무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난 직후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이 최적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바가반은 사람들에게 늘 탐구를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즉, "이 일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면서
'내가 행위자다' 하는 환상 없이 모든 활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날의 활동을 하는 가운데 내내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예리하게 깨어 있으면서
존재의 느낌이 올 때마다가
그것을 반기는 것과 맞먹는다.
'명상'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부단한 자각과 기억하기가
기억났을 때의 집중 못지않게 필요하다.
처음에는 곧잘 잊어먹겠지만 그것과도 싸워야 한다. '
자각의 흐름'을 계발하고 그것을 육성해야 한다.
노력 없이 성공하기란 어렵다.
이것이 바가반이 규정하신 길이다.
그것은 형식과 교리에서 독립해 있다.
그것은 어떤 의식(儀式)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주부나 상점 주인도 승려나
요기 못지않게 보이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길이다.
바가반의 은총은 당신을 향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이 길 위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장 온전하고 가장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변함없는 지지물이자 다함없는 보배이다.
출처: 탐구사 홈페이지-<마운틴 패스>
1966년 1월호 중아서 오즈번 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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