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에 누관(樓館)이 있는 것이 다스림과는 무관한 듯하지만, 기분을 풀어 주고 마음을 맑게 하여 정무(政務)를 베푸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 또한 반드시 여기에서 얻어진다. 기분이 답답하면 생각이 어수선하게 되고, 시야가 막히면 뜻도 막혀 트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유람할 수 있는 장소와 멀리 조망할 수 있는 누대를 두어 넓고 원대하고 맑고 겸허한 덕을 길러 다스림이 이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도리어 크지 않겠는가.
청하현(淸河縣.포항시 청하면)은 바닷가 한구석에 붙어 있는 고을이다. 객관(客館) 동쪽에 옛날에 작은 누대가 있었는데, 협소하고 나지막한 건물이 성첩(城堞) 사이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답답한 가슴을 후련하게 하거나 맑고 탁 트인 경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득하게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장관(壯觀)이 지척에서 막혀 버리게 하고, 보이는 것이라곤 반 평가량의 네모난 못과 몇 그루의 매화와 대나무뿐이었다.
무자년(1528) 겨울에 현감 김후 자연(金侯自淵)이 처음으로 개축하고자 하여 옛 누대를 증축하여 높이를 높이고 면적을 넓히니, 아득히 펼쳐진 푸른 바다가 눈을 들면 바로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 누대에 오른 사람이 누대가 높은 줄을 모르되 하늘과 땅이 열린 듯이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이를 임명각(臨溟閣)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만 훌륭한 목수를 얻지 못한 탓으로 기초 공사가 부실하고 영건(營建.건물을 지음)이 잘못되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유무빈(柳茂繽)이 후임 현감으로 부임하여 지탱시키고 일으켜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울어져 버렸다. 그래서 청하현에 온 빈객들이 비록 한여름철을 만나 찌는 듯한 무더위에 시달리더라도 배회하다가 발을 멈추고 감히 누대에 오르지 못한 지가 거의 10년이 되었다.
정유년(1537) 가을에 철성(鐵城.관향이 경남 고성) 이후 고(李侯股)가 연로한 어버이의 봉양을 이유로 고을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청하현에 부임하였는데, 능숙하게 고을을 다스리는 여가에 개연(慨然)히 이 누대를 중수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지만 고을은 쇠잔하고 재정은 부족한 상황에서 피로한 백성들을 거듭 괴롭히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아전과 백성들의 미납(未納)한 조세를 찾아내어, 밀린 조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부담할 부역의 양을 책정하였다. 또 수사(水使) 이공 몽린(李公夢麟)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인근 고을 수졸(戍卒)들 가운데 부방(赴防.변방으로 파견)에 빠져 응당 벌을 받아야 할 사람 100명을 확보하고, 이들의 벌을 면제해 주는 대신에 그 힘을 쓰니, 백성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고도 공사를 해낼 수 있었다. 흙을 쌓아 기초공사를 한 뒤 건물을 정교하게 짓고 처마와 난간에 단청을 입혀 영롱하고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니, 재목은 대부분 옛것을 그대로 썼는데도 외관적인 모습은 완전히 일신되었다. 이에 그 편액을 해월루(海月樓)로 고치고 나에게 기(記)를 요청하였다.
내 고향(경주)은 청하현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한 번 가서 누대에 올라 경관을 바라보며 먼지 세상의 번뇌를 씻어 버리고 싶었지만, 조정에 매여 벼슬살이를 하느라고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누대의 아름답고 장엄한 경관은 그 이름을 가지고 생각해 보더라도 한두 가지는 알 수 있다.
난간에 기대어 시야가 닿는 곳까지 한껏 바라보면 가지가지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가까이 녹색 들판과 접하고 멀리 하늘빛과 섞여 울창하게 북쪽에 우뚝이 솟은 것은 내연산(內延山)이고, 높다랗게 서쪽에 빼어난 것은 회학봉(回鶴峯)이다. 소나무 숲이 원근에 있어 짙푸른 산색을 감상할 만하고, 연무와 이내가 아침저녁으로 만 가지 자태와 형상을 빚어내는데, 유독 바다와 달 두 가지만을 취하여 이름 붙인 이유는 누대에서 보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기록함이다. 그 큰 것을 보고서 마음에 터득함이 있으니, 어찌 눈을 즐겁게 하고 경치를 감상할 뿐이겠는가.
아침 해가 물결에 비치고 자욱한 해무(海霧)가 처음 걷히면 아득하게 펼쳐진 물이 하늘과 맞닿아 만리 밖까지 푸른빛을 띠고, 넘실거리고 철썩거리는 파도가 해를 삼킬 듯하며,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에 높은 누대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한껏 멀리 바라보면, 아득하기가 하늘로 올라가서 바람을 타고 은하수에 다다른 것과 같아, 사람의 마음을 툭 트여서 광대하고 화평하게 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도록 할 것이다. 이는 바다 보기를 잘 하는 것이라 하겠다.한편 대지에 날씨가 개고 하늘가에 구름이 흩어져 푸른 하늘에 달이 떠가고 흰 저녁 연무가 비낄 때면, 물빛과 하늘빛은 하나가 되고 별들은 빛을 숨기며 갠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맑고 깨끗한 빛을 띤다. 이때에 높은 누대에 올라가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맑고 높은 곳에 몸을 맡기고 끝없이 공허하고 밝은 곳에 눈을 붙인다면, 아득히 세속을 버리고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에 오른 것과 같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고 시원하게 하여 가슴속의 찌꺼기가 모두 씻기고 본연의 천성이 가슴속에 넘치도록 할 것이다. 이는 달 보기를 잘 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 군자가 사물을 보는 것은 세속의 안목과 달라서, 그 물(物)을 보면 반드시 그 이치를 깨달아 마음에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편안히 쉴 겨를이 없으며, 땅의 형세를 살펴 그 덕을 두터이 하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후(李侯)가 해월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어찌 의미없이 그냥 한 일이겠는가. 바다에서 그 너그러움을 취하고 달에서 그 밝음을 취하고자 함이다. 너그러움으로 나의 도량을 넓게 하고 밝음으로 나의 덕을 밝게 한다면 천하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인데, 더구나 한 고을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 누대에 오른 자가 그 편액을 보고서 그 뜻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세속적인 안목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계묘년(1543) 3월 하순에 자헌대부(資獻大夫) 의정부 우참찬인 여강(驪江) 이언적은 기(記)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