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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가질 기쁨
빌 4:1-7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1-7 /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내 마음은 여러분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며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주님 안에서 진실한 믿음을 굳게 지키십시오. 2) [마지막 충고] 이제 나는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간청합니다. 모쪼록 주님 안에서 한마음이 되어 더 이상 싸우지 말고 다시 친구가 되십시오. 3) 나의 진실한 협력자인 여러분에게도 부탁합니다. 이 여인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인들은 글레멘드를 비롯한 여러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 나를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그들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자기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6) 걱정에 싸여 지내지 말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기도하십시오. 필요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남께 감사드리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7) 그러면 여러분은 인간의 이해를 훨씬 더 초월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할 때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안정시키며 안식을 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1-3) 빌립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안디옥에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계획은 1차 전도 여행처럼 소아시아 지역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었지만 환상 중에 본 마게도냐 사람으로 인하여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빌립보로 가게 됩니다(행 16). 주님의 섭리 가운데 마게도냐로 오게 되었고, 귀신 들린 여종까지 고쳐주었는데, 그로 인하여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고 감옥에 까지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 빌립보는 아픔의 장소가 아니라 그리움의 장소입니다.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났고 간수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곳의 교인들이 사랑스럽고 사모하며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교회가 두 여인의 다툼으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주 안에서 서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흔들리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초소를 지키는 군인처럼 굳건하게 서라는 군사적 용어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불협화음이 아닌 아름다운 곡조처럼 하모니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되 지휘자 되신 주님의 지휘에 아름답게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영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그 시작은 성도가 먼저 주님과 영적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 이 서신을 쓸 당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갇힌 자가 자유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정말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 안에 있기에 기쁜 삶을 살고 있듯이 너희들도 나처럼 주님 안에 거하면 기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 안에 있을 때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게 됩니다. 또한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감사한다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영원한 평강이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영원히 지키게 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무엇 때문에 기뻐하나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염려하나요? 당신의 삶의 기준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길 때마다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죄책감, 두려움, 의무감으로 섬겨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일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마음은 바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 설 교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빌 4:6-9 / 피종진 목사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 이 세상에 염려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염려가 없는 곳이 없고, 염려가 없는 사람이 없고, 염려가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찬송 290장) 찬송가 가사 그대로 우리는 염려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란 말은 헬라어에 보면 ‘마음이 나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염려’란 둘 이상의 관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나뉘어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아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을 훼방합니다. 그러면 염려하는 이유와 염려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염려하는 이유
①세상 일이 앞서질 때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 일이 더 앞서질 때 염려하게 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28)고 하셨습니다. 생활의 염려는 마음을 둔하게 합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 마음이 둔해지면 기쁨도 없게 됩니다.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 10:41) 세상 일이 너무 많아지면 염려하게 됩니다. 사람이 양다리 걸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려고 힘쓰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②먹고 사는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하나님은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26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주신다고 했습니다(마 6:33).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 양식과 물에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출 23:25). 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신 28:1~6). 전도서 5:19에도 보면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③미래의 일 때문에 염려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가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미래의 일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내일’이라는 미래를 편안하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함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당장 절망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하루 하루의 생활을 책임져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④마귀와 사탄이 염려하게 합니다. 마귀와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근심 걱정하고 염려하게 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않는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2. 염려하지 않는 비결
①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염려는 불신앙의 산물(産物)입니다. 염려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입니다.
②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바울은 빌립보 옥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기뻐하는 일은 염려가 없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주십니다.
③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사람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싸매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친구도 많이 사귀게 되고, 어려운 일도 오히려 화가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한이 맺히면 죽을 때까지 한을 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감사가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감사가 있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런 분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함을 베풀며 사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⑤하나님께 합당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무엇에든지 하나님께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신앙생활의 기본 덕목입니다.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며, 사랑할만하고 칭찬할만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⑥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염려 없는 삶을 살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잠언 16:3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씀했고, 베드로전서 5:7에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⑦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시 37:7) 어려움이 있어도 기다리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기다리며, 주님을 위하여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염려를 제거하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36에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일과 먹고 사는 것, 미래의 일 때문에 마귀와 사탄이 주는 염려를 하지 말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고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하나님께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기다림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염려에서 해방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며 기도하라
빌 4:6-7 / 이용효 목사
이규태 씨의 글에보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병은 감사 결핍증”이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가게 주인이 “Thank you,” 하지 아니하고, “또 오세요.” 라고 하는데,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신난다.”라는 말이 앞선다고 합니다. 누가 자기에게 도움을 주어도 고맙다는 말은 별로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미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감사하다”라는 말입니다. 가게에서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사도 땡큐라고 합니다. 미국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평범한 일에도 “Thank you” 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우리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로제티(D.G. Rossett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신론자의 가장 나쁜 순간은 그가 진실로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감사할 대상이 없습니다. 멋있는 경치를 보고도 그저 멋있다고 말할 뿐이지, 감사할 대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1.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염려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거나 호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염려는 마음에 혼란을 주고 우리 생활에 활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는 그 순간은 감사가 사라지고 만족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어두운 불안과 함께 불평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스티브란 이름의 청년이 생명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종합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검사결과 에이즈 바이러스가 검출되어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는 놀라운 통보를 받았습니다. 평소 건실하게 살아왔던 이 청년은 검사결과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뼈가 바싹 바싹 마르는 심령의 고통을 철저히 경험했습니다. 얼마 후 이 청년은 자신의 주치의사를 만나 사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는 평소에 그렇게도 건강했던 청년이 며칠 사이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 눈이 충혈 되었으며, 탈진으로 인해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다른 의사에게 재검진을 받아보도록 권유했고, 재검진 결과 에이즈 음성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예전과 정 반대의 검사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결국 먼저 번 검사는 오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청년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면역세포의 숫자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수치보다 더 좋지 않게 나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2주 후 또 다시 검사해본 결과 의외로 면역세포가 정상인보다 훨씬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건강상태가 이처럼 며칠 사이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검사 결과 나쁜 소식을 들은 이 청년은 극도로 근심하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면역기능이 아주 나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전의 검사결과가 오진으로 판명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 기쁜 소식이 심령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어서 그의 면역체계를 전보다 더욱 더 강하게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방 부족 중에 아주 용하다는 무당은 매년 그 해에 죽을 사람을 한두 명씩 지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목 받은 사람은 그 해에 나이가 많든 적든 예외 없이 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마을 사람들은 그 무당을 마치 신처럼 받들며 숭배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떤 사람이 어째서 그런 일이 있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조사결과는 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해에 죽을 사람으로 지목된 사람은 그 날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두려워 하다가 병들어 식음을 전폐하다 보니 결국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염려는 짐승을 올가미로 목을 조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영혼을 올가미로 숨통을 조이는 것입니다. 염려와 싸우십시오. 이는 영적 싸움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안 해도 되는 염려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염려는 영적인 것이기에 그 속에는 사탄의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셔야합니다. 영적이라서 우리의 육으로는 못 이깁니다. 성령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나의 염려를 파괴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컵에 공기를 제거하려면 물을 가득 채우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주시는 평강으로 채우십시오.
우리의 삶에 염려 할 것이 많습니다. 염려할 일은 있으나 염려를 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을 염려로 채우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중의 새도 들의 풀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하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주시고 나를 선택하셨고, 그의 살과 피를 주시어 나를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짜리입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에어 포스 원(Air Force One)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에어 포서 원은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말합니다. 이 비행기에는 첨단 적외선 미사일 방어 장치와 유도탄이 장착되어 있으며, 동체내부에는 핵폭발 때, 발생하는 강력한 파장에 버틸 수 있는 방탄장치가 되어있습니다. 한마디로 "날아다니는 백악관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이륙하자마자 테러리스트들에 의하여 에어 포스 원이 점령당합니다, 대부분 승객들이 죽거나 인질이 되었고, 대통령만이 짐칸에 몸을 숨깁니다.
그러나 결국 테러범들은 소탕되고, 에어버스 원도 추락을 하는데, 추락 직전 미국 대통령은 다른 구조비행기로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구조되어서 그 비행기 안에 들어오니 그 비행기 기장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부터는 이 비행기가 에어포스 원입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합니다.
그 비행기는 평범한 비행기이었지만 대통령이 타니 아주 특별한 비행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는 순간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4:7, 5:17)
어느 날, 손가락들이 최고의 논쟁을 벌였습니다. 엄지가 말했습니다. “최고라고 할 때 내 손가락을 사용하니까 내가 최고야!” 검지가 말했습니다. “최고를 가리킬 때 내 손가락을 사용하니까 내가 최고야!” 중지가 말했습니다. “내가 키가 제일 크니까 내가 최고야!” 약지가 말했습니다. “결혼반지 낄 때 내 손가락에 끼니가 내가 최고야!” 소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마디 했습니다. “너희들! 나 없으면 병신 된다!”
여러분 한분 한분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찾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실재로 당신을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19세기 초만 해도 우라늄은 가치 없는 광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과사전에도 ‘희귀하고 무거운 백색 광물로 별로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 광물을 통해 원자력이 개발되었습니다. 현대 문명의 원동력이 그 가치 없는 광물에 담겨있었습니다. 내게도 그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십시오. ‘나’는 결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빛으로 비춰보면 나를 통해 영원한 가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 실망하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당신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고 믿음을 가지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빌 4: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낙심은 우리의 영혼을 황폐하게 합니다. 내 영혼에서 나오는 막강한 능력이 내 삶에 역사하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시오.
그러므로 당신의 성품, 조건, 환경, 소유, 가족, 친구, 직업, 학력, 외모 등으로 인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능력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2.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는 일번적으로 우리들이 드리는 것이고 간구는 희랍어로 데에시스 라고 하는 말로서 열정적으로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번 기도하다가 포기하는 것은 간구가 아닙니다.
어렵습니까? 힘이 듭니까?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염려할 시간이 있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인도선교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그 유명한 월리엄 케리는 “기도의 능력으로 불의의 세력을 멸하고 성난 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난세를 평정하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폭풍우를 잠잠케하고, 마귀를 추방시키고, 사망의 결박을 풀며, 질병을 치유하고, 태양을 멈추게한다. 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하십니다. 신명기4:7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 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우리들이 매일 쓰레기를 봉지에 담아 청소차에 실어 보내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염려와 근심 걱정 불안과 두려움의 쓰레기들을 기도에 실어서 보내버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3. 고난이 오래 갈지라도 계속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태입니까?
인생의 길이 너무 험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제 상황이 어렵더라도 그것을
원망과 불평 낙심과 절망으로 연결시키지 마십시오.
고난의 시기는 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시간입니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저를 뜻대로 빚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역경을 통해 저에게 큰 유익을 주실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움을 즐거움을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우리의 발걸음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고 고난가운데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당신이 이미 받은 복에 대한 감사를 할 줄 몰라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가 이미 받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 부모는 자식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주고 싶고, 뼈가 어스러지도록 고생할지라도 보람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자식이라도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기쁨을 잃었습니까? 열정이 식었습니까? 실패하였습니까? 되는 일이 없습니까? 사람으로 인해 속상합니까? 괜찮습니다. 계속하여 감사하여 보십시오.
몇 번 감사하다가 그만두지 마시고 계속하여 감사하시면 잃은 것을 다시 찾게 될 것이고 영육간에 복이 임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성전에 있다는 것 이것이 기적임을 아십니까? 지금 내가 예배드림이 최고의 복임을 아십니까? 오늘 떠오르는 태양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십니까?
다 잃어 버렸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십시오.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매우 불우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가 살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큰 상처를 받은 후 고아로 성장했고, 청년 때는 혁명당에 가담함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기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4년 동안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 결혼한 아내는 자신의 옛 연인과 만나는 이중적 생활을 하며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결국 아내는 병들어 죽었고 그는 재혼해 아들을 얻었지만 그 아들도 추위로 병들어 죽으면서 그에게 상처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또 하나 그에게 있었던 큰 상처는 자신의 간질병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품위 있
그런 상처 속에서도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 ‘분신’, ‘백야’와 같은 대작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깊은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상처는 기도로 대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간질병까지도 ‘거룩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깊은 감사를 하였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 1795~1881)이 <프랑스 혁명사> 라는 대작을 쓸 때의 일입니다. 수년에 걸쳐 써 온 이 책의 원고를 완성한 칼라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하고 돌아와 보니 하녀가 칼라일의 원고 뭉치를 낡은 책으로 오인해 그만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하나님의 뜻" 으로 생각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세계적인 명작 "The French Revolution: A History" 을 남겼습니다. 그는 절망의 순간을 감사함으로 이겨내었더니 하나님께서 더 큰 성공의 복을 허락하신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난 앞에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 더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싫은데 의사가 하라고 하니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해도 나중에 모두 건강이 좋아졌다고 좋아 합니다. 여러분, 감사의 삶은 억지로라도 해야만 합니다.
내속에서 불평과 원망이 생기면 감사해야지 하고 굳게 마음을 먹어야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보답한다면 그것은 곧 감사일 것입니다.
모든 것 은혜로 주셨으니 우리는 감사해야지요.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감사해야지요.
주안에서 은혜 받고, 사랑받고 있으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감사와 감격이 내속에서 충만할 때에 내 속사람이 크게 변합니다. 내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나의 심령의 상처를 치료시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때에, 우리의 성품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세계관도 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감사절을 맞아하여 더욱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의 심령에, 가정에, 하는 일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까지 기도하라
빌 4:6-7 / 권오서 목사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멀트노마 신학대학에서 25년 이상 성경과 신학을 강의한 데이비드 니드햄(David C. Needha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좌초의 근원은 언제나 기도생활이 쇠약해진 데에 있다. 기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이며, 그것을 더욱 많이 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적게 하고 있다.”(하워드 헨드릭스 외, 그리스도인의 8가지 기본훈련, 61)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전쟁에서 싸우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을 포기하는 교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고, 그나마 계속하고 있는 교회들도 정작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교회가 이미 세상이라는 거대한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전투를 포기한 모습처럼 보여져 두렵기조차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라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말씀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이 몰려오면서 모든 희망이 사라지더라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빌리 그레이엄,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 169)
본 론
1. 기도에 대한 오해
모든 성도들이, 모든 때에, 모든 장소에서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⑴ 반복적인 기도는 신앙이 없는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아시고 기도제목도 아시기 때문에, 반복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은 기도제목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문제에 대해 단 한번만 기도하는 것을 신앙의 표현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의 행위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막 14:39)”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닥쳐올 문제에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반복해서 기도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에 대해 세 번 기도했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2:8-9). 학자들은 이 “육체의 가시”가 질병인지 악한 영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도가 같은 문제로 세 번 기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문제 때문에 괴롭거나, 근심이 많거나, 마음이 무거우면,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복해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문이 열리기를 원할 때 어떻게 두드려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로 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데이비드 아일랜드, 물위를 걸을 수 있는데, 왜 빠지십니까?, p.35-36)
⑵ 기도하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갖는 시간을 게을리 해 왔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너무 실망시켜 드렸기에, 막상 기도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죄송한 마음이 들어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죄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기 전에 만약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때야 말로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교제가 성립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들이 와서 “아빠,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전 무심결에 그렇게 해요, 죄송해요. 저를 도와주세요.”하고 말하는 것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누구나 “얘야, 좋다. 그것을 이야기해 보자꾸나. 네가 때때로 진실을 말하는 데 왜 어려움을 느끼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는지 살펴보자.”라고 말할 것입니다.(하워드 헨드릭스외, 그리스도인의 8가지 기본훈련, 67)
혹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 말씀드릴 자격이 없어서 기도하는 것이 어려웠다면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격이 있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늘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니까, 뒷바라지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속 썩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을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키는 것은 자녀라는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자격이 따로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도하고 있지 못하거나, 기도할 용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면, 기도하고 싶을 때까지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기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라는 것은 어느 때에든지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싶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든,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바쁘고, 힘들어서, 기도할 여력이 없어도 기도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만한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는 수학이 아니니 기도의 횟수가 기도의 힘이 되는 것이 아니며, 기도는 수사학이 아니니 기도의 웅변이 기도의 힘이 되지도 못한다. 또한 기도는 기하학이 아니니 그 장단(長短)이 기도의 힘이 되지 못한다. 기도는 음악도 아니니 그 음성의 아름다움이 힘이 되지도 못한다. 기도는 또한 논리학도 아니니 그의 논조가 문제되지 못하며, 기도의 논리 정연한 그 방법이 기도의 힘이 되지도 못한다. 심지어 신학까지도 기도의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음의 열심, 이것은 기도의 가장 큰 힘이며 가장 유용한 요소다.”(신경직 엮음, 기도뱅크, 45)
소경 바디매오를 아시죠?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너무 크게 부르짖으니까, 사람들이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왜 그토록 예수님을 간절히 불렀겠습니까? 오직 의지할 분이 예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그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신다면 조용조용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런 태도로 기도할 수 있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박광철, 신앙생활 ABC, 기도편)
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등,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인정하며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과 은혜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이 잘 안 나올 때에는 찬송을 한곡 부를 수 있습니다. 음정이 틀리면 어떻습니까? 박자가 맞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음악선생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께 향하고 있는지만을 보십니다.
⑵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은혜, 위험에서 보호하신 은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 은혜, 좋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주신 은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주신 은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감사도 연습하십시오. 연습이 되면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은 감사할 내용이 없어도 연습하다보면 감사할 제목들이 많이 생깁니다. 감사가 많은 기도일수록 신앙 성장에 유익하고 기도응답이 빠릅니다.
⑶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경건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백, 손과 발과 눈과 마음으로 지은 죄에 대한 자백,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에 대한 자백, 기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은 불충성에 대한 자백, 이런 자백을 해보았습니까? 안 믿는 사람을 일주일 내내 만났는데 한 번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번 달에는 수입이 더 많았는데, 나만을 위해서 썼습니다.” 이런 것을 자백해보았습니까? 아내 혹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말할 수 있었는데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한 경험이 있습니까? 진정한 자백은 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언 28장 13절에서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⑷ 하나님께 중보하십시오.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서, 나라의 통치자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교회 목회자와 사역자들을 위해서,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서, 병들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북한 등 공산권에서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을 위해서, 어려운 선교지에서 불편과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하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직장과 가정과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중보기도가 제일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⑸ 개인의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부르짖음입니다. 자신의 건강과 학업과 직업과 봉사와 장래를 위해서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것에 대하여 사실대로 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병든 분은 완쾌를 위해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공급을 위해서, 믿음의 성장과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3.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의 사람’ 하면, 죠지 뮬러를 떠올립니다. 그는 5만 번 응답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조지 뮬러의 생에 걸쳐 드린 그의 기도가 그가 살아 있을 동안 다 응답받은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신뢰하고 매일매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원칙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과 인내를 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막막할지라도 잠시 후, 혹은 몇 시간 후 곧 응답을 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또 어떤 기도는 수년, 혹은 수십 년 걸려도 믿음과 인내를 그대로 유지하며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작은 것들이 들어왔을 때에도 더 풍성하고 더 나은 것들을 또 예비하셨으리라 믿고 계속 믿음과 인내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설 때 불굴의 기도를 드릴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는 그 축복이 주어지기까지 계속 믿으며 기대하며 기도해 나갔습니다. 어떤 기도 제목에서 10년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기도에서는 19년 동안 믿음과 인내를 기도하였습니다.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확신할 수만 있다면 용기를 내서 새롭고 진지하게 기도에 몰두하라.” 그는 또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가장 명심할 점은 응답이 내려지기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는 일이다.”(홍일권, 기도의 파워포인트, 93, 95)
성도 여러분, 신실한 믿음과 인내하며 기도할 때 결국 하나님 앞에 무너지지 아니할 장벽은 없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나 사람이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실패의 최대의 적은 불신이며, 기도를 포기하고 중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1장 24절 말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응답이 더디다고 불신하지 마세요. 믿고 구하시면 됩니다. 믿고 구하시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고 구하시면 질병이 물러갑니다. 믿고 구하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고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때의 일입니다.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던 중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죽었습니다. 소경이었기 때문에 거지로 살던 아내가 죽자 세 자녀는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고아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너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제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해야 할 그 일을 볼 수만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의 마음 속에 계속해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쓰는 달란트를 주었단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그 사람, 존 번연은 감옥 안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써내려 갔습니다.(신경직 엮음, 기도뱅크, 56)
평생을 기도해도 응답이 더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사순절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서약하신 분들은 반드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간 동안 해야 할 기도제목을 가지고,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응답받습니다.
정 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책들의 저자, 바운즈(E.M. Bounds)는 기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많은 데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도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숭고하고, 가장 약해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기도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아무도 막지 못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평생해야 하는 일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항상 배워야 하는 위대한 작업이다. 기도와 거룩한 삶은 하나이다. 기도의 골방은 게으른 사람들의 휴식처가 아니라, 영적 전쟁의 현장이요, 최전방이다. 기도의 골방은 그리스도인에게 힘을 공급하는 발전소와 같다.”(박광철, 신앙생활 ABC, 77-78)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응답받는 성도,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성도는 기도함으로써 응답받아야 합니다. 반복적인 기도를 해도 괜찮습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도하세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중보하며,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응답받을 것을 믿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하는 성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기도에 목숨 거는 한 해가 되어 응답받음으로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염려할까? 기도할까?
빌 4:6-7 / 홍문수 목사
어느 생명보험 회사에서 성인남녀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일상생활 중에 불안감을 느끼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62%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불안 요인으로 건강 문제, 경제 문제, 불의의 사고, 노후 문제 순으로 꼽았습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안이라는 말을 완화시켜 ‘염려’라는 말로 바꾸어 질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아마 100% 그렇다고 응답할 겁니다. 그렇죠. 세상에 염려나 근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솔로몬 같은 사람조차 염려와 근심이 있었죠. 전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아시다시피 그는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백한 것을 보면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역사 가운데 보면, 나폴레옹 같은 사람도 염려가 많았어요.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호걸 중 하나가 아닙니까? 항상 용맹스러운 그를 보고 측근이 슬며시 물어봤습니다. “각하는 세상에 두려운 게 없으시죠?” 그러자 나폴레옹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웬걸, 나도 있지. 1주일에 한 번 이발사에게 면도를 할 때 혹시 이 자가 적들에게 매수당해 면도날로 나를 찌르면 어쩌나 몹시 염려가 된단 말이요.” 좀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그로서는 진지한 고백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청년은 청년대로 염려가 많습니다. 대학 못 가면 어떻게 하지, 졸업은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취직은 또 어떻게 하지? 결혼은 잘 할 수 있을까? 장년은 장년대로 염려가 많습니다. 직장에서 혹시 쫓겨나면 어쩌지, 사업이 망하면, 가정에 혹시 우환이 생기면, 자녀들이 혹시 잘못 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합니다. 중년이나 노년도 나름대로 염려가 많습니다. 혹시 몹쓸 병에 걸리면, 혹시 사고가 나면, 혹시 노후에 먹고 살 게 부족하면, 혹시 일찍 죽으면 어쩌나 염려합니다. 심지어 아이들도 염려가 많아요.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엄마에게 대뜸 물었습니다. “엄마, 나 중학교 안 가면 안 돼?” 하도 주변에서 공부, 공부 하니까 염려가 된 겁니다. 이렇게 따져 보면, 대기업 회장인들 대통령인들 어찌 염려가 없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이 왜 불행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염려가 많아서 불행한 겁니다. 염려만 없앤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염려 없애는 법(염려 퇴치법)을 함께 살펴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 앞에 닥쳐오는 염려를 물리치고 늘 행복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염려 : 백해무익한 인생의 독소
한 마디로 백해무익합니다. 인생을 망치는 독소입니다. 열심히 염려하면 인생아 잘 된다면 얼마든지 염려해야죠. 아무리 염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죠.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또는 목숨을)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염려해도 작은 키가 쑥쑥 자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수명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염려는 무익할 뿐 아니라, 아주 해롭습니다. 여러분, 염려라는 단어가 영어로 뭐죠? worry입니다. 우리말로는 별게 아니죠. “워리~” 강아지 부르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영어로는 이게 아주 무서운 단어입니다. 고대 앵글로색슨어 ‘워겐’(wyrgan)이란 단어에서 유래했다는데, ‘물어뜯다’ 이런 단어입니다. 지금도 자주 쓰이지 않지만 영어 사전에 몇 번째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잠17:22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good medicine)이라도 심령의 근심(crushed spirit)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이 바로 염려죠. 영어 성경 보면 crushed spirit이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인가요? 마음이 으스러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몸도 망가뜨립니다. 가장 단단한 뼈가 마를 정도니 몸이 남아나겠느냐 말입니다.
실제로 염려 때문에 마음이 병들고, 이어서 육체까지 병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현대병 중에 심인성질환(心因性疾患 Psychogenic Disease)이 많잖아요. ‘신경성 ~ ’ 이런 마리 붙은 병들이 그런 겁니다. 이런 병들은 다 염려가 많아서 생기는 겁니다. 신경성위궤양, 신경성 관절염, 신경성 심장병, 심지어 신경성 기침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가 35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엄청나죠. 그런데 자식이나 남편을 보내놓고 염려하다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무려 100만 명입니다. 염려가 무서운가요? 전쟁이 무서운가요? 염려가 전쟁보다 보다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한 심리학자는 염려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염려는 인간을 서서히 죽이는 느린 형태의 자살 행위(slow suicide)이다.”
염려는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 망가뜨립니다. 여러분, 혹시 ‘노시보(nocebo)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플라시보(placebo) 효과의 반대입니다. 플라시보 효과는 마음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픈 사람에게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을 주고 괜찮을 거라고 했더니 정말 나았다는 겁니다. 노시보 효과는 그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자꾸 하면 정말 그렇게 나빠진다는 겁니다. 병들면 어쩌지, 내가 병들었나봐 이러면 정말 병들 수 있습니다.
[2] 염려를 이기는 법 : 기도
염려가 백해무익하기에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염려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염려를 이겨보려고 합니다. 흡연과 음주, 정신안정제 복용, 대화(수다) 등으로 이겨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건 다 임시변통입니다. 잠시 마음을 돌려놓을 뿐, 금세 더 큰 염려가 엄습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점을 칩니다.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몰라요. 좋은 소리 듣고 싶어서 점쟁이를 찾아가는데 대개는 나쁜 소리를 듣고 옵니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죠. 설사 좋은 소리 듣는다고 해도 그 말이 정말 맞나 의심이 생기고 또 다른 염려가 생깁니다. 무엇보다 그런 게 거의 틀리기 일쑤입니다.
어느 가수의 이야기입니다. 결혼할 때 어른들이 궁합을 보고 반대를 합니다. 궁합이 좋지 않고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30세 이전에 이혼할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다는 겁니다. 그는 마음이 꺼림칙했지만 신앙이 있어서 무시하고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지금 40대 중반인데,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걸 믿고 염려를 물리쳐보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러면 도대체 이 백해무익한 ‘염려’, 이 나쁜 놈을 어떻게 처치할까요? 일반적으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심리요법이죠. 마음을 바꿔 먹는 겁니다.
어느 어촌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어부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몇 명 죽었습니다. 한 청년의 아버지도 죽었습니다. 장례 치른 후 청년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갑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말립니다. 청년이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당신들의 아버지는 어디서 돌아가셨나요?” “그야 침대 위에서지.” “오늘 밤에 어디서 주무시죠?” “침대 위에서 자지.” “그러면 제가 바다에 나가는 것도 문제없잖아요.” 그 청년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죠. 생각을 그렇게 정리하면 염려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조차 근본적인 염려 퇴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고 염려가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정말로 확실한 염려 퇴치법이 있습니다. 그 비법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바울이 숱한 역경 가운데 염려하고 근심하다가 터득한 비결입니다. 말하자면 임상실험이 끝난 좋은 방법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사도라도 연약한 인간인데, 왜 염려가 없었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다 수시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투옥됐습니다. 목숨에 위협도 느꼈습니다. 본문 빌립보서를 기록한 그때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면서 ‘기쁨의 서신’이란 별명이 붙어 있죠.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염려를 물리치는 비법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죠. 6절. “아무 것(nothing)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everything)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를 중단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prayer), 간구(supplication), 구할 것(requests) 3중 강조입니다.
여러분, 염려의 반대말이 뭐죠? 평안입니다. 그런데 평안이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평안이 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염려의 또 하나 반대말은 기도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시죠.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guard)” 기도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평안이 임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병에 공기가 가득합니다. 공기를 빼내려면 어떻게 하죠? 물을 가득 채우면 됩니다. 일단 물로 가득차면 공기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하고 평안을 얻으면, 우리 마음이로 그득 채워져 있는 한 염려가 감히 침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염려 안하고, 기도 안 하면 염려한다”(Prayer, No Worry. No Prayer, Worry.)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면 가장 효과적일까요? 바울이 뭐라고 했죠? 다시 6절 하반절을 보세요. “ ...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려면 먼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하고 맡길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맡기는 게 뭔지 잘 가르쳐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벧전5:7이예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cast)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맡긴다는 것은 던져버린다(cast)는 뜻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항하든지 망하든지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겁니다.
2005년 12월에 미국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났습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한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다 1개월 된 아들을 이불에 싸서 3층 아파트 창밖으로 던지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들을 살려주세요!”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침 아래서 구경하던 한 아마추어 야구팀 캐처가 아이를 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때 신문(동아 2005년 12월 17일자) 기사 제목이 이랬습니다. “3층서 던진 아기 나이스 캐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이스 캐처(Nice Catcher)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염려는 던지면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죠? “나이스 캐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그 어떤 문제보다도 크신 분인 줄로 믿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위험해도 하나님은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여호와 이레(창22:14)이심을 믿습니까? 아멘입니까? 정말로 아멘이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게 염려를 퇴치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강력합니다. 그런데 감사하면서 하는 기도는 초강력(superpower)합니다.
아마 바울이 전하는 이 말씀을 들은 빌립보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을 겁니다.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 말씀대로 기도하고 이 말씀대로 평안을 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모두 다 익히 알고 있는 바울의 간증이 있죠.(행16:16~40 참조) 바울이 빌립보에 처음 갔을 때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신내린 점쟁이)을 구해줍니다. 정신이 온전해지자 점을 칠 수 없게 됐는데, 그 주인이 수입이 끊어지지 난리를 칩니다. 바울을 이단자로 몰아 고발했고 바울과 실라는 체포됩니다. 애매하게 매를 잔뜩 맞고 차꼬에 채워진 채 투옥됩니다. 그런데 그 밤에 어떻게 하죠? 행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밤중에는 상처가 더 아팠을 텐데 찬송하며 기도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했다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내일 아침이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감옥에서 영영 썩어야 될지도 몰라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염려가 됐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앞날을 책임져 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믿음으로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나이스 캐처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셨나요? 행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유유히 걸어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멋지게 역사하십니다. 간수가 졸고 있다 깜짝 놀라 자결하려고 했죠. 불쌍하잖아요. 무슨 죄가 있어요?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데. 바울이 도망가지 않고 간수를 만류합니다. 잠깐! 죽지 마! 우리 여기 다 있어! 탈옥하지 않을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자기 죽을지도 모르는데 간수 살리려고 희생하다니! 감동 받은 간수가 집으로 모셔다 목욕 시키고 잘 대접합니다. 그때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으리라!” 이미 마음이 활짝 열린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히고 당당히 출옥합니다. 간수 가족들이 루디아의 가족들과 더불어 빌립보교회 개척 멤버가 된 거예요. 빌립보교회 교인들치고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기에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실천함으로 승리했을 겁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은 이처럼 놀랍고 놀랍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제 묻겠습니다. 염려하실래요? 기도하실래요? 여러분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세상 사노라면 계속해서 염려가 엄습해 옵니다. 그러나 결단하고 기도하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여러분, 앞이 캄캄합니까? 눈 딱 감고 기도하십시오. 잠이 안 옵니까? 기왕 못자는 것 일어나 기도하십시오. 한숨이 나옵니까?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부디 오늘 말씀대로 염려 대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염려 많은 이 세상이지만 늘 평안을 누리고 행복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
빌 4:6-7 / 김남준 목사
전쟁을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공격을 받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급로입니다. 그것을 통해 먹고 입고 쓸 수 있는 보급품들이 원활하게 공급되어야만 병사들이 정상적인 군인으로서 제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런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 은혜의 통로인 기도의 세계를 무너뜨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와 예배 생활이 이미 몸에 배인 사람들은 좀처럼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전략은 이런 틀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도 이 신앙생활들을 효력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예배를 드려도 하나마나 하게 만들어 하늘로부터 성도들에게 신령한 것을 공급하는 통로를 막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염려'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염려'라는 방해물로 우리의 마음을 갈리게 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훼방하려고 합니다.
사실 요즘과 같은 때에는 얼마나 염려할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된 것은 '의식주'에 관한 염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마태복음 6장에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모든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 왜 말씀을 달리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방 사람들도 자기네 신에게 먹고 입고 쓸 것을 구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 마음의 자세가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염려함으로 자기의 신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가 아닌 온전한 신뢰 가운데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입고 쓸 것을 공급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내가 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임을 알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염려의 근본적인 원인을 캐어보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오는 연합의 약화'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도와주실 것이며 나와 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시종일관 개입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는 곳에는 염려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고 염려하는 그것들이 충족됨으로써 자신의 염려가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기루를 쫓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러한 염려로 말미암아 불안한 상태에서 생기는 욕망을 신앙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핍으로 인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을 때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 되겠다고 하는 쪽으로 마음의 기대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염려에 대한 신자의 진정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인가요? 여러 가지에 대한 믿음이 있겠지만 성경은 먼저 이것을 강조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비록 결핍이 있어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너무 귀하게 생각하신다고 하는 것이 경험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시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물질이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런 결핍과 염려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점검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물질을 의지하며 기대며 산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기대며 산 사람인가. 이것을 점검하는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거품으로부터 가득 찼던 신앙을 걷어내고 진실해져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적절한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는 안약을 발라서 보고, 벗은 자는 벗은 것을 발견하고 옷을 찾아서 입고 가난하게 된 자는 금을 사서 믿음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고 하는 그런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때 경제적인 위기의 상황들을 극복하고 교회를 비옥하게 하는 비결을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염려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충성심이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시킨 것입니다. 주변에는 교회 건축을 하면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목회자들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근심이었는데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의는 간 곳 없고 마음이 갈라져서 자신만 영적으로 고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근심과 개인이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한 근심이 그렇게 칼로 자르듯이 잘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이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근심이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마음이 갈라져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는 상황에 대한 염려가 한 사람을 지배적으로 점령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할 때에만 이러한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그러면서 두 번째로 사도는 염려는 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고 나옵니다. 우선 기도의 범위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일'입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기도로 덮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염려는 고도의 집중을 요합니다. 하루도 염려를 하지 않은 적이 없고 무시로 염려를 합니다. 그래서 염려에 집중된 사람들은 기도에 집중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염려를 하다보면 기도의 세계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리게 됩니다. 형체는 남아 있는데 실질적인 기도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염려가 계속 번져가서 행동개시를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라는 그 작은 작용 하나가 가진 엄청난 파괴력입니다. 얼마나 놀라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끌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염려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기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기도가 안 될 때는 기도는 '하는 것'이고, 기도를 잘 할 수 있을 때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우리를 몰고 가셔서 기도가 되게 해주시기 전까지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생활을 안 하면서도 뭔가 풍성한 삶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굉장한 염려가 있었는데 한참 기도하면서 살다가 보니까 사라져버린 것을 여러분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평강이... 지키시리라"
마지막 세 번째는 평강입니다. 신기하게도 기도하자마자 응답되는 예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응답해주시고도 상당 기간동안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빨리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 속에서 고통하는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라고 합니다. '지각'은 희랍어로 '이해'라는 뜻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해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는 약속은 즉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인간의 모든 이해, 혹은 지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을 지켜주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응답은 즉시 될 수도 있고 나중에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든지 그것 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이 이런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맺음말
그래서 똑같은 결핍 속에 살면서도 사는 그 삶의 방식이 두 가지입니다. 똑같이 염려가 떠오르는데 어떤 사람은 염려가 생겨도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계속 피어올라서 결국은 그 사람의 삶을 삼켜버리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 떠오르는 염려를 즉시 기도로 덮어서 그 염려를 고사시키고 오히려 그 일이 없었더라면 누릴 수 없었던 하나님의 더 큰 평강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너그러움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평강이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을 때에는 자기를 절제하고 억제하면서 좀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강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고갈되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칠어지고 황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가 가져다주는 파괴적인 힘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염려를 품고 있지만 결코 그 염려와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염려와 평강이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작정하고 무릎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우리의 가정을 섬기도록 결심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처럼 불안하고 어두운 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면서 거룩한 평강 속에 살아서 불안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에게 여러분 안에 있는 평강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여러분들의 그 가르침과 증거가 훌륭한 구원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여하면서 사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평강을 누리라
빌 4:6-7 / 조상호 목사
지난 90년대 초 걸프 전쟁이 끝난 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미국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세계 평화를 이끌어 가는 나라로서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정치학자들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PAX AMERICANA라는 말입니다. '팍스'라는 말은 '평화'를 의미하며 'PAX AMERICANA'라는 말은 '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를 뜻합니다. 그러나 PAX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되지 못합니다. PAX는 공격하고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 얻으려는 평화인데, 물리적 역학작용에 의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구상에 전쟁의 위협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미국 내에 총격이 사라지지도, 흑백문제가 없어지지도, 마약문제가 줄어들지도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오히려 걸프전쟁 이후에 더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가정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했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평안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중부 어느 도시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지 15년이 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진 고생 끝에 큰돈을 벌어 그 돈으로 2남1녀 자녀들을 다 결혼시키고, 수 만평의 큰 땅에 대 저택을 짓고 남편은 BMW를, 아내는 Benz를 굴리며 살았지만, 아내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부부는 남편의 BMW를 함께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곁에 타고 있던 아내가 묘령의 여자로부터 자주 걸려오는 전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대체 그 여자가 누구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오히려 아내의 결점을 열거하며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시속 100Km로 달리던 자동차의 급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습니다. 그 순간 자동차는 급회전을 하다가 고속도로 난간을 들이받은 후 6미터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남편은 현장에서 핸들에 가슴이 부딪혀 즉사했고, 아내는 중상을 입고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지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나, 정치가 잘 발달한 선진국에 살면 저절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수 만평의 대저택 안에 살고 2억원짜리 BMW를 타고 다니면 저절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외부적인 조건이 아무리 훌륭해도 평강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평강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평강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평강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범죄 결과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가, 자연과의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평강을 누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셔야만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평강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 평강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매 주일예배 마지막에 제가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민6:26)의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29:11)에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사26:12)에서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눅1:79). 이상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그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평강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면서 불안한 마음이나, 걱정하는 마음이나, 두려워하는 마음, 등이 생긴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음을 주시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을 줍니까? 사단이 가져다줍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들 때, 예수 이름을 외치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악한 흑암의 세력들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평강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강을 누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염려하지 말고
시인인 W.H. 오우든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 혹은 '염려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엄청난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 비해서 살기가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은 과거에 없었던 고민과 염려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과거는 힘들게 산에 가서 나무를 주워다가 밥을 해먹던 시대에서, 지금은 부엌에 있는 조그만 스위치만 켜도, 가스가 나와 밥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가스 폭발 사고라는 고민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걸어서 여행을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손쉽게 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자동차 사고, 기차 탈선 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등을 염려합니다. 과거에는 손수 소나 돼지를 길러 그것으로 식탁을 꾸미고, 텃밭에서 손수 기른 채소를 뜯어다가 어렵게 식탁을 꾸몄지만, 요즈음은 식품점에 가서 돈만 내면 얼마든지 사다가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너무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광우병에 걸린 소인지, 농약을 친 콩나물인지, 톱밥을 섞은 고춧가루인지 불안해하며 과거에 없던 새로운 염려할 것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염려할 상황이 아닌데도 염려를 한다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먹어도, 누구를 만나도, 항상 염려합니다. 안 해야지 하면서 다시 하고, 안 한다고 하면 먼저 합니다. 현대인들이 염려 병에 걸렸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염려를 하는데, 오히려 염려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염려란 괴물은 우리로부터 평강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말하면서 염려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염려란 헬라어 원어 '메림나오'는 '쪼갠다', '나눈다'라는 뜻의 '메리조'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누스'가 합해진 말입니다. 즉 염려란 '마치 마음을 천갈래, 만갈래 쪼개지고, 나뉘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염려의 특징은 비생산적입니다. 염려는 엄청난 해를 끼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미군은 약 20만 명이었고, 같은 기간동안 미국 국내에서 총20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200만명 중에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사람보다, 염려로 인해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5배나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가 무섭습니다. 염려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를 안개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말해 의하면, 서울 광화문 일대를 지상에서 높이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를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염려를 계속하다보면,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선한 이웃도 보이지 않고 다 사기꾼으로 보입니다. 염려를 하다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 풍자적인 기독교 작가는 어린이들을 위한 인상 깊은 한 이야기를 지었습니다.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는 제목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새야, 저 아래 땅위에서 허덕거리며 걸어다니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인간들의 꼴을 보란 말이야." 그 옆에 있던 참새가 말합니다. "물새야, 아마 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여러분, 왜 그렇게 허우적거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며 염려하십니까? 염려와 걱정은 멀리 던져버리십시오. 염려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염려는 고민하게 합니다. 잠자지 못하게 합니다. 한숨 나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염려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깊은 염려를 하십시오. 계속 염려를 하십시오. 그런데 대개 염려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염려해도 소용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염려합니다. 과거에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을 되새기며 묵상하듯이 염려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것들을 염려한다고 과거가 바뀌어집니까? 사업에 실패한 것 다시 생각한다고 실패한 사업이 돌이켜집니까? 공부하지 않아 시험에 낙방한 것 고민한다고 시험 성적이 올라갑니까? 아닙니다. 과거를 염려한다고 지나간 날들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또 미래에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사건을 가정해서 미리 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내일 일을 미리 오늘로 가져다가 염려한다고 미래가 보장됩니까? 아닙니다. 미래에 아직까지 일어나지 아니한 일들을 미리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 나누어놓는 염려를 내던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온갖 고민과 염려를 내어 던져버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목사님, 염려하지 않는다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됩니까?"라고 질문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염려를 내려놓는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 애써 무관심으로 대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평강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6절을 보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샘 속에 잠기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독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아뢰라고 했는데, 기도라는 말과 간구라는 단어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기도란 말은 <프로슈케>라는 헬라어로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께 향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간구란 말은 <데에세이>라는 헬라어로서 '필요한 것을 요청하다', '도움을 요청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먼저 내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심령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주위를 바라보던 시각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던 시각이 전능하신 하나님,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비로소 간구 할 수 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아니하고 간구부터 하면 오히려 문제에 눌려 버립니다. 이것은 과녁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화살을 정확히 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아니하면 염려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평강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을 아뢰기 보다, 먼저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는 사람은 의심 없이 믿음으로 간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간구는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전에 한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 거창고등학교 정영창 교장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이 분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많은 부채로 인해 큰 어려움에 빠져 있는 거창고등학교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가진 노력을 해도 빚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 4월, 학교가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분은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목숨걸고 매달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성경, 찬송, 그리고 담요 하나를 가지고 거창읍에서 40리 떨어진 어떤 산마루 언덕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1주일을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제가 미국 유학을 갔다와서 이 나라에 새로운 교육을 해 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학교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 응답의 확신이 없고 너무 너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사흘 밤부터 그는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정 그러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1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서 동아일보에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하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협박하며 죽기 살기로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시원하더랍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학교 서무과에 편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조우복이라는 미국의 한 성도가 수표를 보내왔습니다. 2,050불 짜리 수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이 금액은 정확하게 학교의 모든 부채를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또 십수년이 흘렀습니다. 1971년에 이영창 교장선생님은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제대로 된 강당 하나 없지 않습니까? 본관 건물이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다시 한번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후 다시 한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목사님이 22만불 수표를 보내왔습니다. 결국 거창고등학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학교요, 교육계에 신선한 모델과 자극이 되는 학교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문제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문제란 괴물은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커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 문제는 작아집니다. 그러므로 문제로 향하던 시각을 주님께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기도에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3. 감사함으로 이뢰라
저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할까 합니다. 저는 과거 평신도로서 한국에 있을 때, 장로교회를 출석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니까 아마 25년 정도 장로교회, 그것도 보수 중에 보수교단이라고 하는 예수교 장로교 합동측 교회만 다녔습니다. 다른 지역에 이사를 가든지 여행을 가더라도 주일날에는 과거 통일찬송가 하나로 정리되기 전에 사용하던 새찬송가를 사용하는 장로교회만 찾아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저는 새찬송가를 쓰지 않고 다른 찬송가를 쓰는 교회에 모르고 들어갔다 할지라도, 다시 나올 정도로 장로교 합동측 교회만을 고집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학업과 직장 때문에 아예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여전히 장로교회를 다녔지만, 너무 심령이 고달프고 은혜가 사모될 때는 때때로 금요일저녁 철야예배나, 토요일 오후 토요예배 시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참석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열정적인 조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많은 은혜를 받고 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꼭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서 한가지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설교를 마치고 신유기도를 하고 나서 목사님께서 "무슨 무슨 병이 나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 갑자기 미친 듯이 "아멘!"하며 두손들고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상했습니다. "아니 응답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변화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경망스럽게 굴까? 이래서 내가 장로교회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더라도 순복음교회로 옮기지 못한다니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로교인인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막11:24)의 말씀을 접하면서 저의 눈이 확 뒤집혔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고 오늘 본문 6절을 읽으면서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다시 한번 6절을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러분, 너희 구할 것으로 어떻게 아뢰라고 합니까?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응답해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접하는 순간, 그 동안 내세웠던 알량한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바로 제가 그렇게도 경망스럽다고 생각한 그 분들, "아멘!"하고 외치며 두 손들고 일어났던 사람들의 믿음이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믿음으로 감사하며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저의 축농증 치료를 기도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치유를 받았지만, 13년 동안 심한 축농증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물 혹이 코 속에서 자라나서 콧구멍을 막아 버려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지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고 기억력이 자꾸 감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 당시에 만난, 이빈후과 전문의사는 그 혹을 떼어 내어도 다시 자랐기 때문에 완치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불치의 병인 축농증을 치유받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토요예배의 신유기도 시간이 끝나고 나서 아무리 기다려도 조목사님께서 "축농증이 치료받았습니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개월이 지나도 축농증 치료에 대한 말씀을 한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멘!"하며 두 손을 들고 일어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후 시간이 흘렀고, 저는 호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호주에 도착해서부터 과거에 그렇게도 싫어하던 순복음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예배 시간에 정바울목사님이 축농증 치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으로 코를 잡고 있다가 믿음으로 "아멘!"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당시 안양순복음교회의 조용목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말씀을 전하시고 신유기도를 마치신 후, "무슨 무슨 병이 나았습니다"라고 하시다가, 갑자기 "오늘 축농증이 있는 분 나으셨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과거 서울에서 결단한 대로 "아멘!"하며 두 손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의심하지 않고 치료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치의 병이라고 여겼던 축농증이 치료되어 어느 날 냄새가 솔솔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저의 축농증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는 (약5:15)의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식적으로라도 잠자리에서 감사 기도를 하며 잠을 잡니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가장 먼저 감사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를 나오면서 운전할 때, 오늘 새벽에 주실 은혜를 생각하며 계속 감사기도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원하시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응답이 되지 않았지만,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응답이 되지 않았지만,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빌4:6)을 가지고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직 사랑과 은혜가 충성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간구하였으면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넘칠 줄로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시간 찬양팀의 "왜 슬퍼하느냐"는 찬양을 경청하며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인자와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하지마 내가 널 붙들어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방향
빌 4:6-7 / 빅지온 목사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방향이라 그랬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성공하고 승리하게 되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절대로 실패할 존재도 아니고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할 존재들입니다. 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증거는 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주위에 어렵다고 오그라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춥다고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주위 환경과 상관없이 계속자랍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키워 보면서 날씨가 춥기 때문에 아이들이 키가 오그라드는 법이 없습니다. 다소간 조금 이렇게 웅크리고 앉을 수는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생명은 자랍니다. 아무리 나무가 겨울에 안 자라는 것 같아도, 아무리 나무가 겨울에 다 죽은 것 같아도 겨울에도 자랍니다. 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소간 어떤 외부의 변화에 그 상황 변화는 나올지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생명은 계속해서 자랍니다. 자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봄철이 되면 늘 그 아쉬운 것이, 봄철을 느낄 시간이 별로 없어요. '봄이다!' 그러면 벌써 초여름입니다. 그래서 봄철이 되면 늘 남는 것은, 저는 제가 지금까지 여기 살면서 봄철에는 아주 뭔가 이 안 좋은 인상이 남아 있어요. 왜냐하면, 옛날에 저기 봄철이 되면 여기 옆에 '경북 농약' 인가? 해 가지고 크게 그 모래더미가 쌓여져 있었습니다. 뭐, 교회보다 더 높았는지, 모래더미가 쌓여져 있었어요.
저희는 저 밑에 새시 문 하나로 이제 밑에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봄철 되면 왜 그렇게 바람이 부는지. 바람이 불면 왜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는지. '휘이~익' 거리고 이건 뭐! 아마 조금 뭔가 영적인 문제 있다 그러면 무서워서 못 있을 정도로 그렇게 소리가 나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막 먼지가, 모래가 소복하게 밑에 쌓여져 있을 정도로 모래가 날아와 가지고 쌓여져 있고, 또 우리 집에는 봄철 되면 먼지가 아주 알레르기에 안 좋으니까! 뭐 봄철 되면 반 죽다가 살고 이런 과정에 있었습니다. 바람이 그렇게 불데요. 그래서 바람이 싫다!
그런데 생명은 바람이 불어도 자랍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그렇게 해 보니까! 한번 말씀을 드린 적도 있습니다 만은, 왜 봄에 바람이 많이 불어야 되느냐? 그건 생명의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더라 구요. 왜냐하면 나무가 봄철에 뭘 빨아올립니까? 물을 빨아올리잖아요. 물을 빨아올리는데 겨울 내 굳어있던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자면 흔들어 줘야 된데요. 몸을 풀어줘야 된데요. 그러니까 막 바람을 일으켜서 나무가 온통 몸 뿌리 채까지 흔들릴 수 있도록 온몸을 막 뒤틀고 흔들어주면, 이게 물이 잘 올라온다 그래요. '아, 바람이 불어도 생명은 자라고, 바람이 불면 더 생명은 활발하게 성장하는구나!' 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은 주었다는 사실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위대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난 주일에 제가 '생명을 받았다!' 뭐가 됩니까? 되어지는 배경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왜 앞으로 되어 지느냐? 반드시 되어질 수밖에 없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믿습니까? 이걸 확신합니까? 이게 지금 잠시 안 된다! 바람 부는 것! 그래서 좀 가지가 좀 귀찮지만, 뭐가? 몸을 흔들어야 되는 거니까! 이때에 뭔가 우리가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좀 곤란하죠.
그래서 먼저 성경에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구원과 믿음이 바로 참 기초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생명 아닙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뭡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 안에 확신입니다. 이것이 있는 만큼,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그때부터 내게는 생명이 주어졌는데 이 생명의 사실이 확신되어지는 만큼,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누림' 이라 그럽니다. 이걸 가지고 구체적으로 기도로 실제적으로 누리죠. 그러면 그 만큼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을 바로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했지만 생명 받은 열두 제자들이 주변에 상관없이 '당신은 바로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 라는 말이 '메시아'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거짓으로 아니면 모형으로 이 땅에 왕도 보내고, 제사장도 보내고, 선지자도 보냈지만, 참 왕, 참 제사장, 참 선지자! 여러분과 저의 죄악과 죄를 해결하시고 저주와 재앙에서 건져내실 참 누구입니까? 제사장으로... 그리고 우리가 죽음과 멸망에서 대신 죽으셔서 이런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사단의 손길에서 해방 받게 해 주실 메시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주심으로 약속하신 언약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왕으로 오셨습니다. 흑 암과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저주로 인해서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사망에 빠졌던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영접하는 순간에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뭐가 되었어요? 자녀가 되었습니다. 생명 주셨습니다. 자녀가 되었다! 이것은 뭔가 '받았다, 안 받았다.' 이 문제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믿는다, 안 믿는다.' 이것은 따라 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것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요. 어려움이 나오고 문제가 나와도 믿어져서 믿는 것이지, 어려움이 나오니까 자꾸 흔들린다! 그러면 시작부터 여러분 다시 한번 살펴봐야 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아,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 아닌가보다!' 그건 처음 시작이 잘못이에요. 조금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아, 아버지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그러더니만 진짜 내 아버지 아니네!' 그건 시작부터 다른 겁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믿는 것은 그런 배경이 없어요. 뭐 이상한 일을 당했다. 뭘 당했다. 상관없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우리 자녀들을 키울 때에 우리 민족성에 비해서 뭐냐하면요. 이런 어떤 씨족관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뭐냐하면, 다른 아이를 키우지 못해요. 또 우리 민족에 그 어떤 정서적인 배경이 조금만 뭐 이상하면요. '내 아버지가 아니라서 그래서 그런가 보다!' 이렇게 해 가지고 상당히 어렵더라 구요. 자기의 아버지는 뭐, 어지간히 좀 두들겨 맞아도 '아버지가 아니니까 그렇다!' 생각이 안 나옵니다. 자기 친아버지에게 언짢은 소리를 들어도, 뭐라 또 꾸지람을 들어도 막 '우리 어머니가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아예, 어떤 문제나 사건이 있어도 부모 확실히 믿는 믿음에서는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흔들리지 않아요. 이것이 흔들리게 될 때에 뭐가 옵니까? 상처가 옵니다. 마음의 상처가 옵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뭐냐하면, '하나님의 방향' 이라 그랬을 때에 제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생각이 안 바꾸어지면 마음에 상처가 와요. 참 어려운 문제가 옵니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받았습니다. 확신이 없고 복음을 받는 즉시 우리 생각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말씀했죠. 우리 생각이 누구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는 생각이 온다는 자체가 이건 위대한 겁니다. 이건 아무도 못 말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생각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생명이 들어오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이게 오잖아요. 생각이, 내 생각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이 될 때는 어지간히 어렵고 힘들어도 마음에 상처가 안 와요.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내 생각이 다른데서 문제가 어려운 문제고, 괴로움의 문제가 오면 이 문제가 흔들리게 되고 거기에서 상처가 나와서, 바로 상처라는 것이 뭐냐하면요.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저주와 재앙이 오고 문제가 생기는 거죠. 받아합시다. "생각이 치유되면 따라서" 뭐가 치유되어요? 마음이 치유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너희 마음과' 뭘? '생각을 지키시리라!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래서 생각과 마음이 치유되는 배경으로 뭡니까? 우리 마음에 늘 평강이, 생명을 가진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 사실이 회복이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 생각이 바로 안 되게 되면 우리 마음에 참 상처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이 사단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범사에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이번 치유 사명자 대회에 갔을 때에 우리 목사님들하고 사모님들이 모이면서 제가 다르게 이렇게 반을 편성을 했는데 그 메시지를 좀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서 있는 게 힘들어 가지고 앉아 가지고 조용, 조용히 말씀을 했어요. 제가 우리교회 25년 간 가까이 한 교회에서 쭉 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물론 여러 가지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생각하는 것하고 우리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하고 비슷해서 그렇다. 비슷해서... 그러면서 한가지 예를 들었어요.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교인들 생각이 내 생각하고 다르다! 그럴 때에 누가 상처를 받느냐? 교인들이 상처를 받게 되더라 구요. 그런데 이것이 상처를 받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상처를 통해서 뭐냐? 거부하는, 목사를 거부하는 이런 사단의 뭔가 통로가 되더라 구요. 그런데 타이밍이 거기 맞았더라 구요.
그래서 하나의 예를 들었어요. 이번에 이 자동차를 사면서 EQUUS를 사주려고 그럴 때에 제가 도저히 내가 부담이 되니까! 사지 마라! 그랬다 구요. 왜? 내가 거기에 내 생각이, 마음이야 갔었지. 그런데 우리교인들이 혹시 그런 어떤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일부이지, 다는 아닙니다. 내 말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인들은 GRANDEUR도 과분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내가 EQUUS를 타고 돌아다녔다! EQUUS를 볼 때마다 마음에 뭘 가져요? 뭐가 나와요? 상처가 나와요. 생각이 안 맞을 때는 이게 나옵니다. 내가 EQUUS를 타고 돌아다니면 이 불황에, 이 어려운 때에 뭐가 그렇게 돈이 많다고 목사님은 EQUUS 타고 돌아다니나! 볼 때마다 이렇게 마음에 상처가 나옵니다. EQUUS를 바라볼 때마다...
그런데 나도 다행히 그게 싫어요. 그래서 우연인 것이 아니고 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은, 내 생각하고 또 우리 교인들 생각이 맞았기 때문에 그래도 지금까지 은혜롭게 목사가 결정하면, 그래도 생각이라도 비슷하니까 따라오고 같이 가고 또 정서가 같아지고 그런 것이지 뭐 잘하고 못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한 것 같으나 굉장히 중요한 문제더라! 이랬더니 만은 마치고 난 후에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목사님, 진짜 이런 말은 남한테 들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 각 교회마다 문제가 여기서 터진답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이해를 못한다. 말하자면, 쉽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뭐가 안 되느냐?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생각이 달라요.
도저히 교인들은 목사님 생각이 이해가 안 되니까? 뭐냐? 목사가 하는 일을 볼 때마다 뭐가 옵니까? 마음에 상처가 오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어떻게 하느냐? 사단이 역사 하는 겁니다. 목사는 또 교인들을 볼 때마다 뭐냐? 생각이 다르니까! '교인들이 진짜 너무 한다! 뭐, 교인들이 하는 짓이 뭐 저런 짓이냐!' 뭐냐하면, 상처가 나오는 겁니다. 목사가 상처가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또 메시지가 상처 있는 메시지가 나가네요! 이걸 사단이 망가뜨리려 합니다. 그래서 일단 생각이 다르다는 문제가 마음에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통로를 완전히 열어놓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고통과 재앙과 저주들이 타고 들어온다! 이것이 간단한 것 같으나 목사님들이, 정말 우리 교인들의 생각이 어떠냐? 이걸 좀 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고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 생각이 어떠냐?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게 안 되면 치유가 안 되더라 이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하는 것은, '뭐, 여러분에게 생각을 나처럼 같이 해달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없어요. 뭔 이야기냐? 신앙 생활에 하나님의 방향이 하나님의 생각에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생각이 안 맞아졌다. 범사에 신앙 생활에 고통이 옵니다. 어려움이 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 이건 범사에 어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이루어지는 축복이 있으니,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오면 자연적으로,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인격이 내 안에 이루어진다." 왜?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오니까! 누가? 내가 누구를 닮습니까? 하나님을 닮잖아요. 하나님의 생각이 내 안에 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자연적으로 받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고,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구원의 역사 아닙니까! 구원의 역사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세웠습니다. 전도의 역사 아닙니까!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 전부 여기게 맞추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인도합니까? 그때부터 성령이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그때부터 나와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뭡니까? 기쁨이 오게 되어 있어요. 기쁨이, 감사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생각이 안 맞으면 과거를 생각하게 돼요. 늘 원망과 늘 불평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갈 때에 하나님의 뜻을 광야에서 뭡니까? 믿음 회복해서 어디까지? 가나안까지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늘 눈만 뜨면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요.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니까, 하나님의 방향과 다르니까, 뭔 생각을 하느냐? '아, 우리가 너무 어렵다. 먹을 것도 박하고 맨 날 먹는다는 것이 만나 하나 뿐이고 이건 기름진 것도 아니고 맨 날!' '그래서 우리가 몸이 쇠약해졌다.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우리가 장관을 몇 세워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목적은 지금 빨리 믿음을 회복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간다는 생각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게 안 맞거든요. 그러니 기적을 주어도 상처가 나오고 범사에 이게 안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뭐가 나오느냐?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받아합시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는다." 왜?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똑 같으니까! 하나님 바라보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내게 은혜 주시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거든요. 그러니까 생명의 확인이 나오는 만큼 뭡니까? 새 힘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범사에 불평이 나옵니다. 범사에... 그래서 우리 인간이 우리도 모르게 뭐냐하면, 받아합시다. "과거는 추억으로 아름답고 현재는 어려움으로 더럽다!" 이리 돌아갑니다. 현재 절대 감사가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방향과 맞을 때에, 하나님의 생각과 맞을 때에 여러분 현재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눈이 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구세대가 다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지 압니까? 믿음 없는 세대를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가는 구체적인 영적 전쟁이 일어나야 되는데 번번이 실패할 거란 말이죠. 그러니 뭐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 가는 도중에 뭘 회복시켜 주려고 그러느냐 하면요. 믿음 회복 시켜 주려는 겁니다. 검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생명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 정말맞구나! 정말 그대로 이루어지는 구나!' 이 검증이 필요합니다. 검증이 되기까지 어려움이 올 수 있어요. 고통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검증하는 하나님의 과정 속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과거가 좋았도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를 보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같이 안 나오니까! 상처를 받게 되고 과거로 돌아가자!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는 원망이 나오는 겁니다. '왜, 이런 문제를 당하고 있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 난 청년들만, 어린 아이들만 딱 성장해서 거기서 '아, 하나님이 다 하시는 구나! 문제 아니구나! 하나님이 전부 다 구나!' 그러니 여러분이 뭘 지금 깨달아야 되느냐 하면, '아, 문제없구나! 바람이 불어도 괜찮구나! 추워도 괜찮구나! 사건이 생겨도 괜찮구나!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나는 죽을 수 없고 나는 망할 수 없는 존재구나!' 생명의 확인이 딱 붙잡아 지게되면요. 흔들릴 필요 없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면 큰 계획이 저절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여러분으로 뭘 위해서 이런 문제를 주셨느냐? 이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더 큰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보이니까, 현재 문제 앞에서 저절로 바울처럼 현재에 우리가 뭐가 나옵니까?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게 안되면 '현재 참 더럽구나! 고통스럽구나! 원망스럽구나!'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원망하는 마음이 자꾸 나옵니까! 옛날이 좋았다고 나옵니까! 뭐가 안됩니까!' 하나님 마음과 달라요. 하나님의 생각과 달라요. 하나님의 방향과 달라요. 그러면 근본문제로 돌아가서 '내게 지금 불 신앙과 불만 속에 있는 내 마음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시옵소서.' 정말 진지하게 거짓말하지 마시고 정말 이 생명의 역사를 확인해야 됩니다. 그것이 물론 앞으로 기도해야 될 문제가 나가겠습니다 만은, 그렇게 실제로 되어지는 사건들이 정시기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이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루 한번이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이 극복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과연 뭐, 전도 포럼 하는데 아무리해도 안됩니다. 그래서 뭐부터 해야 되겠느냐? 다락방 모일 때에 기도포럼부터 먼저 해야되겠다. 저는 이 당 회원들 모여 가지고도 이것부터 먼저 해야 되겠다. 당 회원들 '뭐, 당장 전도한다!' 이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전도한다! 그런 어떤 배경에는 늘 류 목사님 이야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령관이 따발총 들고 다니면서 뛰어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뭔가 사령관은, 사령관이 명령하고 지도하고 이 전체를 이끌어 나가야 됩니다. 그 앞에 나가서 따발총 들고 돌아다니고 사령관 찾으면 아무도 없다! 이건 전쟁에 지는 겁니다. 당 회원들은 뭔가 벌써 어떤 수준에 와 있어야 됩니다. 전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되고 뭔가 구체적으로 전도하고 뛰어 다니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뭔가 메시지를 이루어서 인도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야 됩니다. 이게 안 되면 뭔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자꾸 다른 데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 어렵다. 힘들다!' 이렇게 됩니다. 현재가 감사가 안 나오죠. 여러분이 조금만 이런 배경이 이루어지게 되면 현재는 너무 하나님 앞에 감사 정도가 아니고 '이런 일을 계획하신 하나님!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 '백 번, 천 번 최선을 다하자!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 계신다!' 암만 고함을 질러도 하나님의 방향에 안 맞으면 그게 안 되어요. 받아합시다. "생명이 확인되는 만큼 나는 죽고 예수가 내 안에서 주인이 된다는 사실이 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여러분 이 사실이 배경이 안되면, 생명의 배경이 안 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사람 죽이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하나님이 주인 아닙니까! 내가 죽는 다는 말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가 확인되는 만큼 내가 움직일 필요가 없거든요. 수단, 방법, 뭔가 불 신앙 이런 것이 나올 것이 없어요. '내가 뭘 해야 되겠다!' 나올게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주인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죽는다.' 이 말이 상관없어요. 이게 되는 만큼 나는 자연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누가 삽니까? 내 안에서 계시는, 나를 오늘에 이 자리에 세우시고 오늘에 이 일을 하게 하신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생명! 생명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뿐이거든요.
그러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안에서! 이 말이 안 들어가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종교 중에 종교라 그럽니다. 이것이... 저는 초기에 제 성질이 더럽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은, 확실히 성질이 순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못 땠습니다. 겉보기에는 얌전한 것 같고... 속 내면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혹시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오해 할 수가 있어요. '참, 얌전하다.' 이러는데, 그러니 옛날 사람이 참 말을 잘 했어요. '얌전한 게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고 그러니 이걸 죽이는 것이 나 자신 아닙니까! 내가 주장하고 내가 살아가고 못 땠다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 '내 주장이 세다' 는 것이 이 못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세고 내가 자꾸 나오니까! 이걸 죽이겠다싶어 가지고 선택한 것이 처음에 뭡니까? 나를 죽이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더라 구요. 밥을 안 먹는 것이 나를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뭐 마음껏 죽인다고 그렇게 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 받는다고 그렇게 했는데, 끝까지 도사리고 이게 겨울이면 웅크리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막 밑에 깔려져 도사리고 있는 것이 '나' 라는 겁니다. 내 중심입니다. 이게 안 죽어요. 그렇게 있다가 딱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느새 마치 봄철에 새싹이 돋아 오르듯이 파릇파릇 뭐가 올라옵니까? '나' 라는 것이 돋아 오릅니다. 아무리 해도 이게 안 사라져요.
그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나' 라는 것이 있는 한, 상처가 나옵니다. 여러분 지금 뭐, 교회에서 상처받았다. 더러운 겁니다. 그게!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죽어버렸는데 무슨 상처가 나옵니까! 내가 죽었다는 배경이, 예수 생명이 확인 안 되고, 그리스도의 배경이, 이 생명이 확인 안되면 백 번 죽었다 그래도 그건 거짓말입니다. 왜? 내가 주인이 되어 있는데, '나' 라는 것에 내 마음에 상처가 안 받을 수가 없죠. 그러니 뭐 목사한테 상처를 받았다. 더러운 소리입니다. 왜? '나' 라는 게 누구입니까? '나' 라는 것을 통해서 누가 인도합니까? 귀신이 나를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짓말에 속았고 거짓말에 넘어가고 자꾸... 자존심은 전부 허상입니다. 내가 뭐 같이 느껴지는 것 전부 허상입니다.
여러분 본질상 진노의 자녀! 내가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의는 헌 옷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게 강조 될수록 더욱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죽인다. 내가 나를 죽인다!' 거짓말입니다. 죽일 수가 없어요. 안됩니다. 본질상 생명이 안 들어가면 이게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었는데 생명은 누구로? 예수 그리스도! 내 생명의 주인입니다. 확인 될수록 내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그 손에 맡깁니다. 나는 그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처가 나올 이유가 없어요. 상처가 나올 이유도 없습니다. 뭐 일꾼들끼리 상처가 되고 어떻고 그건 진짜 그 출발이 더러운 것의 출발입니다.
아직까지 여러분 뭘 깨달아야 되느냐? 이걸 바로 알아야됩니다. 출발부터 여러분 다시 확인 하셔야 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 감사가 나옵니다. 현실에 멸시받는 것 같으나 아닙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되어 가지고 내 생각이 멸시받는 것이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최고의 자리에 앉혀 놓았습니다. 받아합시다. "모든 만물 중에, 모든 만물 중에 인간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최고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 거기다가 예수 생명을 주셨다. 절대적으로 망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다!" 믿습니까? 받아놓고 왜 감사가 안 나옵니까? 내가 살아서 내가 마음대로 하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할 백성들이 이게 안 되니까!
지난주에 제가 말씀했죠. 왜 자꾸 속느냐? 왜, 자주 속고, 자구 돈에 넘어가고, 돈 잘 빌려주고 이런 사람들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내가 돈 띠였다고 이라지만 아닙니다.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돈 빌려 달라고 그러면 돈 빌려주지 마세요. 그건 교회 안에서 돈 빌려 주는 것보다, 생명의 문제이지. 이래가지고 교회 권찰 들이 돌 빌리고 다니거든 여러분 그 돈 빌려주지 마세요. 말씀은 따라 볼 수 있을지라도 그건 빌려주면 문제가 생겨요. 왜? 빌려주는 그때부터 언제 주나? 이래 가지고 자연적으로 사람이 거기 매여 버리게 됩니다. 안 빌려주면 아무렇지도 안을 것인데... 이게 엄청난 문제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에 뿌리다.' 그랬는데요. 돈으로 사단이 엄청나게 역사를 합니다. 이게...
그리고 제가 이 교회를 건축한다는 문제를 앞에 두고 가만히 뭘 느끼느냐 하면요. 여러분 교회를 건축하는데 드린다는 것은,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안 되고 오래 있으면요. 여러분 돈으로 시험이 점점 더 들지 싶어요. 하나님 앞에 드릴 때 빨리 드려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안 되면요. 더 띠이고 더 얽히고 뭉치고 이렇게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여러분 기도하면서 뭘 바라 봐야 되냐 하면요. 우리가 건축한다는 이걸로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을 확인하고, 정말 이 생명이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게 되면요. 그때부터 뭐가 오느냐? 여러분과 제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뭐라 그랬어요.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오느냐 하면요. 본문말고 시편 1편을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게요. 시편에 제일 먼저 이 말씀을 한 이유를 좀 알아보셔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부터 우리 2절까지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어요. 시작!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아멘. 그만큼만 합시다. '복 있는 사람' 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악인' 이라는 것은 죽은 자입니다. 여러분 부모 앞에서 정말 건강하게 살아 있으면요. 그 자체가 복이고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관계에서 이것을 많이 강조를 했죠.
그래서 오늘 뭐 우리 뭔가 그 표어 속에서 '하나를 놓던지, 둘을 놓던지 건강하게만 자라라' 이런 표어까지 내걸고 안 있습니까! 부모 앞에 악인이라 그럴 때는 뭐냐하면, 악이라 그럴 때에 다른 게 아닙니다. 생명 없으면 부모에게 아무리 비단옷을 입고 나 자빠져 있어도 그건 슬픔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뭐, 살이 쪄서 통통해도 죽은 놈은 그건 부모에게 슬픔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시편 배경은 생명이 있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다. 의인입니다. 그 다음에 생명 없다 죽었다. 악인입니다. 그렇게 표현된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한다. 꾀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뭔가 자꾸 거짓말에 잘 속아요. 거짓말에 잘 넘어가고 거짓말은 자꾸 잘 듣게 됩니다. 들으라는 말씀은 안 듣고 주일날 말씀 붙잡고 들어라 그러면 절대로 잘 안 되는데 이웃집에서 뭐 이상한, 황당한 소리를 하면, 왜, 그렇게 잘 믿는지! 누가 싹싹 속이면, 어찌 그리 잘 넘어 가는지! 홀딱 넘어 가 가지고 수 천 만원 다 내어놓아 버리고... 이 지경입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됩니다. 이게 지금 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근본문제부터 좀 짚어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되어 버리면 안 속여져요.
저는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큰 소리보다도 내 마음을 좀 느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요. 저에게 향해서 여러 가지 사기 치려고 들어오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초기에 교회 지을 때에는 더해요. 요즘은 워낙 소문이 나 버리니까, 안 들어오는데... 그런데 요즘도 뭐, 들어와 가지고 뭐, 어떤 사람은 수 천 만원씩 돈을 맡기려고 그러고, 그래서 뭐냐하면, 내 마음에 약간 허영이 있거나 들떠 있으면요. 그걸 받게 됩니다. 그리 넘어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자를, 수 천억 더 이자를 붙여준다 그래도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뭐가 되느냐 하면, 속여지지가 않아요. 어지간히 속이려고 들어와도 안 속여집니다. 왜? 속이려고 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뭐가 되느냐? 거짓말이 따라와야 속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악인의 거짓말을, 하나님을 떠난 자의 거짓말을 '사주팔자'라든가, 이상한 것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뭐, 지금도 가끔 가끔 그런 것이 있어요. 아침에 까치가 울면, 다 헛말인 것을 알면서도 좋은 손님이 오시려나! 헛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사단은 그것을 비집고 들어오더라 구요. 그러니까 지난주에도 말씀 안 했습니까! 사주팔자 뭐 띠를 쭉 나열해 놓고 글 써놓은 것! 보지 마세요. 여러분 보면 틀림없이 거기 생각이 듭니다. 사단이 거기에 배경이 되니까! 내가 말띠다. 말이 기다랗게 대가리를 보이거든요. 그러면 뭐 써 놓았거든요. 그러면 그걸 보는 즉시 뭐냐하면, 나도 모르게 거짓말은 그렇게 내가 믿고 확실히 말하고 있으면서도 뭐 '동쪽으로 가면 어떻다!' 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귀가 열립니다. 사단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다.' 그럴 때는 절대 여기에 속여지지 않습니다. 생명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안 속게 되느냐? 구체적으로 안 속게 되는 배경이 '악인의 꾀를 쫓지 않으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 오만하다는 것은 교만이고 이 자존심과 다 연결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자가 하나님 떠났기 때문에, 자기중심입니다. 자기가 주인 됩니다. 이걸 가지고 오만한 자라 그랬습니다. 그들은 전부 자기 생각이요, 자기 방법이요, 자기 생각과 합리성에 안 맞으면 판단이 됩니다. 불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에서는 말씀이 약속했다! 믿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여러분들이 말씀을 받을 때에 뭐가 회복되느냐? 믿음이 회복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방향에 맞았다.' 라는 간단한 증거가 확실히 있다면, 주일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다음에 문제와 상황이 올 때에 절대로 믿음에 흠집이 안 나와요. 믿습니다. 믿음이 내 마음속에 다 확인되어집니다. 말씀이 더 확실히 믿어집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했죠. '말씀이 믿어진다' 는 말 가지고, '말씀을 확신합니다.' 이 말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표현이 잘 안 되어서, 말씀을 '확~신 한다!' 그랬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말씀을 확~신 한다!" 진짜 말씀을 읽으면요, 마음에 자연스럽게 확신이 와져요.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주야로 묵상하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방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도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인도를 받는 즉시 성령의 크신 은혜를 받고, 인도를 받을 때에 당장 위에서 돈 덩어리가 떨어지느냐? 그게 아니라 그랬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정말 생명이 있느냐? 확인하는 검정의 역사가 나오더라 구요. 반드시...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신다 그랬는데 '복을 주실 수 있는 사람이 됐느냐?' 는 사실을 반드시 검증합니다. 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이 사실인데도 그 약속한 말씀이 사실인 것을 믿고 있느냐? 검증을 하더라 구요. 이스라엘 백성을 유월절에서 딱 떠나서 홍해를 가르고 떠나가기 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한다! 다시는, '다시는 애굽 인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는 배경 가운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뒤에는 누가 옵니까? 애굽 백성들이 따라옵니다. 그때에 거의 어떻게 합니까? 근본 문제가 흔들려 버리더라 구요. '이 모세 영감아, 우리를 왜 여기 와서 죽이려고 하느냐!' 죽을 줄 알아요. 금방 또...
받아합시다. "그래도 안 죽는다." 예, 시험 들고 더러 벌벌 떨 때도 있어요. 이게 믿음이 회복 안 되면 나옵니다. 그러면 혹시 뭐, 한번 벌벌 떨고 막 다급해 가지고 원망한번 했다고 '아이고 나는 생명 하나도 없구나!' 이러시면 안 돼요. 받아합시다. "그래도 생명이 있어서 홍해를 건너게 되었다." 그런다고 다 죽이려 그러면 한 사람도 못 갑니다. 그래가지고도 끝까지 안 된다 그럴 때는 데려가더라 구요. 하나님이 그런데 경건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딱 건넜습니다. 건너고 나니 구원의 노래가 안 나옵니까! 그때 막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반드시 검증하는 시간을 주셔요. 그건 왜 주느냐? 받아합시다. 믿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회복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40년 동안 광야를 주셨느냐? 열흘도 안 되어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주느냐?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면 되는구나! 이것 회복 시켜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냐에 따라서 세상구조 문제가 아닙니다. 유럽에 가축구조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요.
뭡니까? 구제역이 한번 일어나 버리니까요. 가축제도 가축 시장들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축시장 완전히 바꾸어져버렸어요. 우리나라 입맛조차 바꾸어져 버렸습니다. 옛날에 해물탕 잘 안 먹던 사람이요. 요즘 해물 탕 집에 줄이 이어져 있더라 구요. 심방할 때 꼭 점심 먹으러 해물탕 집에 갑니다. 전 같으면 소고기 집에 갔을 것인데, 여러분 그게요. 하나님이 이렇게 까딱 해버리니까 생각조차 바꾸어져 버립니다. 소고기 집으로 가던 것이 해물 탕 집으로 가자! 이렇게 바꾸어져 버리더라 구요. 전능하십니다. 그걸 우리가 너무 안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믿도록 하기 위해서 검증하는 시간을 주시더라 구요.
닭고기 안 먹었습니다. 전에... 요즘은 할 수 없이 닭고기를 먹어요. 왜? 소고기 먹으면 죽을까 싶어 가지고... 그래서 신문에 보니까 닭고기가 2배, 3배 수입이 되고 들어오는데 감당을 못해요. 소고기 집에는 파리 날리고 앉았고 그리고 잘 안 되던 닭고기 집들이 지금 막 번창합니다. 완전히 하나님이 한번 이렇게 한번 까딱해버리니까, 하나님 생각이 이렇게 딱 돌아가니까, 전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래도 안 믿는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 마음같이 알려고 상처받고 돌아다닌다. 그런 걸 내가 어쩝니까? 믿으세요.
주일날, 그래서 여러분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이 말은 뭐냐? 말씀이 확립이 되어야 묵상이 들어옵니다. 주일날 말씀이 확립이 되어야 기도가 나옵니다. 그때부터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볼 때마다 뭐가 나옵니까? 새 힘을 얻습니다. 새로운 능력의 역사! '맞아,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이게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왜, 여기에 수단 방법이 나옵니까? 인간 계산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자연적으로 기도라는 것이 저절로 나오게 되고 축복의 역사가 나오죠. 그래서 여러분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회복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 다음에 이 생명이 회복되면 그때부터 뭐가 옵니까? '그리스도뿐이구나!' 나옵니다. 그때부터 여러분 자신도 모르게 어려운 문제만 당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요. 주여 불 신앙하는 내 마음에, 안 믿게 되는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오직 주님만이 모든 문제 해결자입니다. 이게 들어오면요. 저절로 마음에 치유가 됩니다. 마음에 치유가 돼요.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져요. 내 생각이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바꾸어집니다.
그게 뭐냐? '아, 말씀이 성취되는구나!' 말씀 붙잡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말씀을 붙잡고 나가게 될 때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어지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됩니다. 이것이 뭐냐? 변화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가정이 변한다. 남편이 변한다.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아, 이게 맞구나!' 성취되는 이런 역사가 보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다!' 안 되는데도 해결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어제 치유 전문사역에 보니까, 와서 잠깐 늦게 무슨 말씀을 하느냐 하면, 참 다락방이 이상하다. 왜 그러냐 하면, 너무 들떠 가지고 콱 꼬집었는데도 '아야!' 안 그러고 '그리스도' 그러더랍니다. '아야!' 하고 난 후에 '그리스도' 그러면 이해가 되는데, 그러니 이것이 뭐로 나가느냐 하면,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안 되었는데도, 막 고통이 나와 죽을 지경인데도 예수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다. 이것만 가지고 내 세워 가지고 '집안에 문제없어요. 예 문제없어요. 그리스도!' '어려움 없어요. 예 어려움 없어요. 그리스도!' 여러분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움이 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적용이 됩니다. 이게 적용입니다. 말씀적용이 여기서 나옵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확인을 하고 어려움이 있다면 긍정을 하세요. 아프다는 것, 긍정하고 내가 불 신앙인 것, 긍정하고 그게 안 되면 긍정하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신령과 진정으로 그럴 때에 '신령' 이라는 것은 '성령의 인도' 라고 보고 대게 '진정' 이라는 것은 '말씀' 이지만은 진정이라는 배경에서는 진실하다는 말이 상당히 깔려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왔을 때에 말씀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정말 진실하구나!' 이게 오기까지 여러분 스스로 '아! 내가 너무 거짓말이 많구나! 너무 가증 되구나!' 이게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이제 정말 진실하십시다. 하나님 앞에 안 되면 안 된다. 그래요. 안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안 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 그러니까! 기도 잊어버리고, 안 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셔 가지고 '야, 필요하냐? 괜찮아요.' 이러면 예수님 뭐라 그러겠어요. '그래 괜찮아!' 그냥 놔두고 갑니다. 전부 이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정말 우리 알아야 될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야 됩니다. 주여 문제 있습니다. 문제 있습니다! 여기 앉은 분들이 묵은디이든지, 새로 온 분이든지 다 문제 있습니다. 인정하세요. 그래서 주일날 말씀 듣는 겁니다. 불 신앙을 회복하려고, 믿음을 회복하려고,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려고... 그래서 치유되고,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고 절대로 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회복하려고... 그래서 기도하면 주께서 허락하시고 이루어주신 것을 믿고, 이제는 내 생각과 내 뜻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확립되고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 붙잡고 '주여 진실로 내가 이 모습입니다. 지금 내게 오시옵소서.' 진정한 영접기도가 나옵니다. 영접이라 그럴 때에 우리가 근본적인 문제에서 '주님 자꾸 오시라는 것' 이 뭐 영접에 대한 옛날에 아직 영접이 안된 사람들이 자꾸 오시라 그래서 죄 용서라 그러는데 상관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내가 불 신앙하고 연약함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이 불 신앙하는 나한테 오셔서 내게 믿음 회복 시켜 주시고 주님의 마음과 같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방향에 맞아서 받아합시다. "현실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문제를 찬양하게 하옵소서!" 왜?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뛰어 넘어
빌 4:6-13 / 김동호 목사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매우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진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창 2:7)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생기는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가치관과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과 똑같은 마음과 정신과 가치관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자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을 잃고 산다면 우리 인간의 존재가치는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그냥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영과 함께 자유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유는 하나님의 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미신은 운명과 팔자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자유와 부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운명과 팔자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는 선택을 의미하며,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어 주셨습니다.
인생을 건축에 비유한다고 할 때 미신은 우리의 집이 신의 마음대로 지어져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것을 저들은 운명이라고 말하고 팔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의 집을 당신 마음대로 지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건축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뒤에서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부족하여 실수할 때에도, 인생을 망칠 때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구속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까지도 소유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은 소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가 선택한 소유입니다.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버림 받는 어처구니없는 아픔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어 당신을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 인간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주셨고 또한 소중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 외에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과 자유를 배재한다면, 그가 아무리 부자라고 하여도, 출세하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누려야 할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이 소중한 영과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탄에게 귀 기울여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소중한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게 되었고 소중한 자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면서부터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과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거꾸로 보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자유를 잃었습니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려고 하는 자는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는 자는 세상의 종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은 세상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얽매여 종처럼 살아갑니다. 세상에 울고 웃으며 좀더 좋은 세상을 꿈꾸며 좀 더 세상과 환경에서 살기 위하여 쓸데없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그것도 많이 먹고,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살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려고 합니다. 좋은 것을 먹고, 풍족히 먹고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의 종이 되어 밤낮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염려하여 사는 것은 지나친 것이고 위험한 것입니다. 적절한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넘으면 그 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똑 같게 됩니다. 아니 더 위험하게 됩니다. 그 위험은 보통 위험이 아니라 재앙적인 위험입니다. 지금 우리 지구는 그와 같은 재앙에 직면해 있습니다.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종이 된 인간이 자신의 끝도 없는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과도한 생산 시스템을 가동함으로 지구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지 않으면, 그리하여 세상에 대하여 소박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지구는 우리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집착에 의하며 파괴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세상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공부를 하고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합니다.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입으려고 죽어라고 공부하고 죽어라고 사업하고 죽어라고 직장엘 다닙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지구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파괴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도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 당황스러운 것은 세상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우리 사람들은 공부만 하고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예수까지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함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어서 남보다 더 부자가 되고, 예수 믿어서 남보다 더 출세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더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더 출세를 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자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사람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더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더 크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대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의 시민권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빌 3:20) 그런데 저 자신을 포함한 요즘 우리 크리스천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 아니하고 땅에 있는 듯 합니다.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하여 (그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닌데) 예수를 믿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을 무조건 부정하고 부인하는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을 무조건 악하게만 보는 영지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크리스천은 땅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땅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땅과 세상을 뛰어넘어 자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이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대로 구김 없이 살았습니다. 부한 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 때문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믿음의 능력은 자신에게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족하며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세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과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꽤 많은 책을 썼습니다. 제 책 중에 가장 팔리지 않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재판만 찍고 더 이상 찍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책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함철훈’이라고 하는 사진작가를 만나 그의 사진과 삶에 매력을 느껴 그와 함께 출판한 책입니다.
그 책 중에 ‘하늘을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오늘 그 글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고려대 기독 학생들의 채플에 갔다가 사진가 함철훈씨를 만났다. 한번 얼굴을 익힌 적이 있어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슬라이드의 주제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주제만 듣고도 감동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을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수요예배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한 장도 볼 수 없었지만, 본 것 만큼이나 감동을 받았다. 흥분된 어조로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사진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 묻혀 나는 그를 잊었다. 그런데 기독 교수들의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포항에 위치한 한동대학교에 갔다가 거기서 그를 또다시 만났다. 함께 식사를 했 는데 여전히 흥분하며 나의 설교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의 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그 사진을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고 드디 어 식구들과 함께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느꼈 던 감동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평소 늘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는 실력 있는 사진작가다. 큰맘 먹고 일하지 않아도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든지 넉넉하고 편안한 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것을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찍고 싶어 하시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거의 3년 가까이 한 달에 6만원 하는 창고 같은 방, 아니 창고에서 생식을 하며 버텼다. 모세와 바울 그리고 다윗과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그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고집을 통하여 그의 사진들이 나왔다. 그의 사진에 메시지가 실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사진에 나타나면서부터 그는 흥분했다. 세상에 없는 부요함으로 부요해지고, 세상에 없는 기쁨으로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가난함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말하기 전 까지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신천옹(信天翁, albatross)의 사진이 있 다. 그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 놓았다. 그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다 알아 낼 수 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놓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내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 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 발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놓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 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굴레를 훌훌 털어버리고 참으로 자유 로운 삶,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바울의 삶을 오늘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는 기쁨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참된 부요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천국 즉 하늘을 사는 사람이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를 아는 순간, 그 분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간, 하늘을 믿는 신천옹(信天翁)이 되는 순간, 그가 믿는 하늘이 자신 의 것이 되어 땅에서도 하늘을 하는 기막힌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삶이 부유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거의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뛰어넘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믿음으로 하늘을 품고, 믿음으로 하늘을 살아, 세상의 형편과 처지에 일희일비(一喜 一悲)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평범한 삶과 신앙
빌 4:6-7 / 조용기 목사
‘평범한 삶과 신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신앙인으로서 평범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월 초하루부터 12월 31일까지 행하고 사는 것이 평범한 삶인 것입니다. 그 평범한 삶 위에 특별한 일들이 가끔 일어나지만 우리가 평범한 신앙생활을 잘 간수 하고 지켜나감으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아버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감사찬양하라
우리가 매일같이 평범하게 지켜야 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누가 꼭 그래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의무감을 느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 믿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감사 찬양하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의 선지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감사 찬송을 했습니다. 많이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서 쇠고랑에 묶여 있는 그가 무엇이 기쁠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아버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한 삶이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평범한 생활 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사업을 하는 종을 이렇게 잡혀 나가서 감옥에 갇혀서 얻어맞게 만들어줍니까? 하나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하나님 계시면 우리를 빨리 돌봐주시옵소서.” 그런 원망을 할 것 같은데 바울과 실라는 원망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모든 생활 속에 하나님 섭리가 계시고 하나님 인도가 있으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얻어맞은 것도 고맙고 철고랑에 채인 것도 감사합니다. 배고픈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감동을 했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그 기도에 감동을 느꼈어요. 하나님이 감동을 느꼈으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만 아마 보좌에서 일어나서 빌립보시를 잡고 흔들어버렸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빌립보시 전체가 지진으로 진동을 하고 그 지진이 흔드는 바람에 감옥 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의 고랑찬 고랑이 다 끌러지고 대단한 자유와 해방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로 26절에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여러분, 지진 일어난 한가운데 있어본 사람들 없겠지요? 저는 미국의 산호세 집회를 할 때, 호텔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잠을 자려고 하는데 어 어디서 “웅~” 하는 소리가 나요. 그러더니만 문 창문이 “다다다다” 해요.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잠자기 전에 이렇게 잠 잘 자라고 장난을 하는가 보다. 아 그런데 침대가 흔들거려요. 아 해도 너무 심하다. 그러니까 “긴급이요. 긴급이요!” 하고 전화에서 소리가 나면서 지진이 일어났으니 모두 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서 내려오라고 하더라구요. 내가 20층 가까이에 있는데... 아유 급하니까요 아무것도 눈에 안 보여요. 전등불은 꺼져 버렸지요. 그래서 내가 문을 박차고 나가니까 복도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어요. 전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애들 다 복도에 나왔는데 그때 제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 어려운 위기에 나는 매달릴 수 있는 줄이 있고, 설 수 있는 반석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이제 죽었다고 우왕좌왕하고 야단 이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를 한번 해야 되겠다. “여러분이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국에서 목회하는 조용기 목사입니다. 지진이 집을 흔들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내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무서운 질병에서 건져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전부다 나를 따르시오.” 그러니까 내가 앞에 서고 줄을 전부 서서 내 뒤에 따라오는데 “하나 둘, 하나 둘, 예수님, 예수님, 지저스, 지저스” 따라 하시라고. 전부다 따라서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하고 20층 계단을 걸어서 밑에까지 내려왔습니다. 위험을 당하니까 다른 사람은 안 따라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님. 예수님.” 하는 나에게 전부 다 따라붙더라고요. 우리가 위험을 당할 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얼마나 든든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 말에 의하면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을 주시고 달보고 감사하면 태양빛을 주신다고 우리가 불평과 원망과 탄식을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면 파멸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중에 빌딩 밖에 나와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마이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도 사람들이 내 말밖에 안 믿어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께서 붙들어주신다는 이 바울과 실라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 성경 빌립보서에 보면 이와 같이 바울과 실라를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셔서 지진을 일으켰다고. 그러니 여러분 다 예수 믿고 천당 가야 된다. 우리 사는 것이 무엇이냐? 태어났다 먹다 죽다. 이것밖에 없다. 태어나서 별로 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하다 앞으로 가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그 다음 먹고 살다가 그다음 죽는 것 밖에 없어요. 내가 요 며칠 전에도 우리 형제, 자매들 조카들 모인 자리에서 내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살다가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죽는 것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일하는 말하는 나도 지금 먹다입니다. 다음은 죽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별 볼일 없어요. 여러분 미래를 제가 다 예언해 줄 수 있습니다. 뭐 쉽습니다. 지금 먹다. 얼마 있다가 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평범한 생활로 삼고 거기에 의하여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다른 소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소망이 커져도 죽음을 통해서 다 놓아놓고 가지 걸머지고 못갑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는 건지심을 받으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굉장히 영화로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것처럼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 코에 향기를 맡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네가 바라고 소원하며 꿈꾸는 일이 이뤄지도록 간구하라
그 다음에 여러분 생활 속에 바라고 소원하고 꿈꾸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바라는 소망하는 꿈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이 여러분 생애 속에 들어오면 꿈을 이루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일이 안돼요. 아브라함이 칠십 오세에 가나안 땅에 와서 아들 주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10년 동안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아들을 안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안 주신다고 낙심을 했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꿈을 가지고 기도해야지, 그냥 아들 주시옵소서. 아들 주시옵소서. 어떤 아들을 달란 말이냐? 나에게 분명한 꿈을 실은 기도를 해야 되지 않겠냐?” 하나님이 저녁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무얼 보느냐?” “별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별이냐?” “저 하늘에 가득한 별이 나를 비춥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저 별들을 가슴 속에 받아들여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별들을 바라보고 자기 아들이 별들처럼 많을 것을 마음에 확신하고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시고 그가 그 다음에 기도할 때 이삭이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보고 믿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범한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바라고 소원하며 꿈꾸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여러분 앉은 자리에서 행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소원을 둔다는 것은 꿈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소원과 꿈은 같은 말입니다. 꿈을 갖고 행하게 하신다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소원을 보고 소원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 소원을 분명하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소원과 꿈을 가지면 하나님이 마음속에 깊은 평안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원을 가지고 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이 꿈을 이루어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꿈을 이루어주시옵소서.” 말 많이 하지 말고 간단한 기도로 “꿈 이루어주시옵소서. 하나님 보시다시피 아시다시피 내 가슴속에 있는 꿈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마음속에 놀라운 향기가 마음에 가득 차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한데 기가 막히게 평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네 소원이 이루어졌다. 나는 엄청나게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마음에 꿈을 붙잡고 요 근래 기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마음에 큰 평안이 기도원에 가서 굴에서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다가와요. 그 다음 마음에 아주 꿀맛 같은 향기가 들어와요. 그러더니만 “네 기도를 내가 들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말 행복하고 기쁜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평안과 향기로움이 마음속에 성령으로 다가옵니다. 그 다음 걱정이 안돼요. 아무것도 걱정이 안돼요. 입으로는 걱정한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평안해요. 너무 평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할 지경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꼭 해보십시오. 꿈을 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응답될 때 그 평안이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내가 기도를 하는데 그냥 받은 줄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응답할 때가 되면 마음속에 이루어진 확신을 주십니다. 마음에 이루어진 확신을 갖고 감사하면 편안하게 됩니다. 편안하게. 다른 사람에게는 염려하는 척 하면서도 자기 속에 굉장한 평안이 들어오면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꿈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가지고 꿈을 마음속에 꾸면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신문에 보면, 이런 기사들이 실려 있는 것을 봅니다. 1840년에는 시속 50km로 여행하면 인간은 질식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6년 전에 1840년대 신문에 사람이 시속 50Km로 여행을 못한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이다. 그러고 또 1901년에는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 비행기 하늘에 뜨는 건 있을 수가 없다고요. 1926년 신문에 보면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달에 간다고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속 50Km이상은 못 달린다고 하는데 시속 600Km 넘는 열차가 나오고 있습니다. bullet train이라고요. 총알기차가 나와 있습니다. 시속 3,500km로 소리보다 3배나 빠른 비행기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고 달에는 벌써 사람이 갔다 왔습니다. 꿈을 꾸기 전에는 전부 안 되는 것을 말했는데 사람들이 꿈을 꾸니까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과 같이 일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가능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은 꿈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발전하지 못합니다. 꿈이 있어야 불가능의 강을 건너고 불가능의 산을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꿈은 소위 말하는 기적이 생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아주 감동적인 기사를 보았는데 미주 중앙일보에 2016년 6월 25일 신문인 것인데 중국 시골 마을에 사는 쟈하이샤와 쟈원치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중국 발음으로 한자 이름을 가졌는데 여러분 외우기 힘들 겁니다. 그냥 듣고만 계세요. 최근 미국 CNN 방송의 다큐멘터리로 제작이 되어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장애인인데, 한 사람은 3살 때 사고로 두 팔을 잃었고 다른 사람은 병으로 한쪽 눈을 잃고 나머지 눈도 사고로 인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붙잡았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어두움을 말하지 않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공장과 채석장으로 환경이 오염된 고향에 나무를 심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지의 정부가 이들의 상황을 감안해서 무상으로 황무지 땅을 제공했지만 묘목조차 살 돈이 없어서 묘목을 사서 심지 못하고 다른 나무에 가서 가지를 꺾어와 가지고서 심어 물을 주어서 키우는데 될만합니까? 나무를 꺾어서, 가지를 꺾어서 황무지에 심어서 물을 주고 이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 결과, 먼지만 날리던 황무지가 푸른 숲이 되었고, 홍수철이 되어도 마을이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모험에는 한계가 있을지라도, 우리의 정신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꿈은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환경이 황무지 같을지라도 꿈과 희망을 붙잡으면, 황무지를 푸른 숲으로 바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무 묘목도 살 돈이 없어가지고서 현지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땅에 파묻고, 물을 주고,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계속해서 말라죽어지면 또 심고, 또 심고, 또 심고. 환경에는 제한점이 있어도, 저들의 꿈은 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도시가 푸른 숲의 우거진 자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꿈을 격찬을 합니다. 그 두 사람이 꿈을 가지매, 숲이 우거지는 도시를 만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14년이라는 세월동안에 그들은 마음에 꿈만 안고, 꿈을 바라보고 뛰었습니다. 목표 있는 분명한 꿈을 가지고 뛰니깐, 그 꿈이 믿음을 생산하고, 믿음이 기적을 낳게 된 것입니다.
3.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어라
그러고 우리 평범한 생활 중에 꿈만 꿀뿐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어라. 믿음이란, 꽃 몽우리가 활짝 피어나듯 마음에 믿음이 평안의 향기를 뿜으며 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믿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향기가 뿜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복 주실 때, 이름을 바꾸어준 것과 같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매일 매시에 부르라고 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요, 새라를 사라 ‘많은 자녀들의 여주’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그렇게 자꾸 부르니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지 않습니까? 없는 자식의 아버지, 없는 자식의 어머니로 많은 자식이 있다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한자는 그렇지 않지만은, 우리 아버지가 제 이름을 ‘조용기’라고 해가지고서,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름을 쓸 때마다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격려 안 해주면 내가 나를 격려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로 2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 아닙니까?
4. 입술의 고백이 있게 하라(입술의 고백과 여리고 성의 무너짐)
또 평범한 생활 가운데 우리가 긍정적인 입술의 고백을 꼭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이 엿새 동안 한 바퀴씩 돌고, 이레째 여섯 바퀴를 돌고, 일곱 바퀴 마지막 돌면서 고함을 쳤습니다. 그들이 고함을 치자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여호수아 6장 20절)’ 성령께서는 우리 입술의 고백을 따라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 23절)’ 태산준령도 입술의 고백 앞에서는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1절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게 다 입술로 그렇게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6절로 47절에 다윗이 골리앗 보고 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 신앙고백도 다윗이 자기에게 한 것입니다. 아무도 격려 안 해줄 때, 자기가 자기를 격려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석봉 토스트, 연봉 1억의 신화’라는 책이 나와 있지요. 김석봉씨가 대표로, 그는 신실한 크리스찬이었는데, 길거리에서 토스트를 팔러 나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는 직장도 없고, 직업도 없기 때문에, 토스트를 구워서 길거리에 나가서 아침밥을 못 먹고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요기를 하도록 그렇게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파는 토스트로써 1년에 연봉이 1억이 넘었으니깐 굉장하지 않아요? 그는 직장도 없고, 직업도 없고, 길거리에 서서 장사를 했으니깐 낙심이 될 수 있는데, 매일 마다 길거리에 나가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쳐다보고 “석봉아! 일 할 수 있으니 나는 기쁘지 아니하냐?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니 나는 예쁘지 않느냐? 매일 일이 생기니 너는 바쁘지 않냐?” 하루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을 향해 믿음의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어요. 내가 나보고 격려를 늘 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매일 옷 입듯이 입습니다. 저는 아침에도, 그리고 저녁에 잠자기 전에도 조용기 “너는 십자가 밑에 나가서 십자가를 바라보라.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너의 죄를 용서하고 너의 허물을 씻어 주신다. 예수님의 채찍에 맞으신 그 공로 때문에 너의 병은 고침 받아 건강하여진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으므로 너는 그 대가로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는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철폐했으니, 네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네 안에 있으므로 너는 죽어도 음부에 들어가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라서 낙원에 들어간다. 감사합니다.” 그것을 밤낮으로 외우고 다니니까는 마음에 굉장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가 그렇게 하면 굉장히 좋습니다. 자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 그런 격려를 해주고, 성도들은 이웃에 있는 분들에게 격려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보면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나 혼자만 할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입술의 고백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사도행전 3장 6절)’ 자기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 말 중에, 장 자크 루소가 쓴 세계적인 명저 ‘에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포기의 풀이 성장하려면 따뜻한 햇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풀이 햇볕을 받아야 자라나는 것입니다. 식물이 성장하려면 햇빛이 꼭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칭찬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에도 남편을 자꾸 칭찬하면 굉장히 좋은 남편이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칭찬해야 돼요. 부모는 자식에게 욕만 하지 말고, 칭찬을 해 줘야 돼요. 식물이 성장하려면 햇빛이 꼭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칭찬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귀로 듣는 보약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칭찬은 귀로써 듣는 보약입니다. 사람은 칭찬을 받을 때 그 마음에 의욕과 생기가 넘쳐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간에, 이웃 간에 따뜻한 칭찬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보약을 찾아 먹는 것처럼 칭찬은 듣는 보약이니, 여러분 중에 귀로써 보약을 많이 잡숫지 못한 분이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 가시거든 가족들에게도 칭찬을 해 주십시오. 귀로 보약을 주는 것입니다.
동물원의 코끼리는 발톱에 염증이 생기기 쉬워 발톱 관리가 필수라고 합니다. 그 큰 바윗덩어리 같은 코끼리가 걸어 다니는데, 그 발톱이 썩는다는 것입니다. 그 발톱을 깎아 줘야 되는데, 코끼리가 발톱 깎아주도록 얌전하게 있지 않고 막 고함을 치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쇠줄로 묶어가지고서 억지로 잠잠하게 만들고 발톱을 깎는데, 이렇게 안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사육사가 코끼리하고 친해져야 되겠다고 조금만 잘한 일 있으면 코를 쓰다듬어 주고, 칭찬을 해주며 “이야 너 괜찮다. 너 굉장한 놈이다. 너 이쁘다.” 그렇게 칭찬을 해줬어요. 이 코끼리가 발톱 깎으려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손대지 못하게 하는데, 이 사육사가 오면 나무에 코를 딱 얹어 놓고, 다리를 딱 얹어 놓고 깎으라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코끼리도 칭찬을 하니깐 순종을 하더래요. 저기 보소, 자기 다리에 철조망 위에 다리를 얹어놓고 깎게 한단 말이에요. 저게 칭찬의 힘인 것입니다. 사육사가 원하는 반응을 코끼리가 보일 때마다 쓰다듬어 주고 교감을 했더니, 이제 코끼리가 스스로 앞발을 올려놓고 “깎으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기 나온 사진이 바로 제가 준비한 원고 속에 넣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를 원하고,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내 귀가 들은 것은 그 신앙고백을 따라서 내가 하겠다고 했으니, 우리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편 94장 22절에 ‘야훼는 나의 요새이시오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편 91편 1~3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세계는 다 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이 있어야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장 10절)’ 입으로 고백을 하지 아니하면 내 소유가 되지 못 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결 론
절대 긍정적인 생각과 목표가 확실한 구체적인 꿈과 확신에 찬 믿음과 감사 찬송이 가득한 입술의 고백이 여러분의 생활에 변화와 창조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평범한 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생각하고 입술로 고백하면, 거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승천함으로, 나는 예수님을 통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고 입술로 고백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마음을 꽉 채우면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꿈을 낳고, 꿈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입술의 고백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아무리 깨달았다 해도, 입술로 고백하지 아니하면 내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은 약을 먹잖아요? 약을 아무리 포켓에 넣어 다니고, 손에 들고 다녀도, 안 먹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세상의 약과 같습니다. 음식과 같습니다. 입으로 고백을 해야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성경의 약속의 말씀은 진짜로 효과가 있는 영적인 보약입니다.
이 하나님 말씀을 읽어서 깨닫고, 믿음으로 이걸 말하면, 그 말 파장이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한다. 실제적으로 효과 있습니다. 영적인 말씀을 자꾸 고백하면, 그 말씀이 몸속에 들어가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 생활에 평범한 일이 되도록 말씀을 가지고서 긍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되고, 구체적인 꿈을 꾸고, 믿음을 갖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그렇게 나가면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일 하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큰 소리를 합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능치 못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 가정, 생활, 사업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부여잡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적극적인 목표가 있는 꿈을 꾸고, 기도하여 마음에 믿음을 가지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역사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아니하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헐벗고 굶주린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잘못된 말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 자선 광고에 보면 아프리카에 있는 어린이들이 하루에 우리가 만 원씩만 줘도 굶어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있어야 보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더 잘 살게 되어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저주한 세계가 되어서, 태어난 사람마다 저주 속에서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저주를 다 청산해준 것입니다. 저주가 사라지니 가시와 엉겅퀴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따르게 돼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사라지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바람을 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기야! 너는 축복 받은 사람이다. 너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한번 그렇게 말해 볼까요? 여러분 이름을 말하세요. 하나, 둘, 셋! 아멘! 네 믿은 대로 될 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