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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황태자비(三類皇太子妃)※ 外
■ 외전#[눈물의 꽃에 바람이 내려앉다、]
여기저기 스산한 바람이 대나무 숲 사이를 휘몰아칠 무렵, 암흑속에서 왠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머리는 칠흑같이 검은색. 허리를 넘어 엉덩이까지 오는 긴 머리가 붉은색 실로 묶인 듯 하나가 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무한한 대나무 숲은 이 곳을 어느 깊은 산 속으로 보여지게 하지만 사실은 무림에 위치한 어느 객잔의
넓디 넓은 뒷마당(?)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음같이 차갑게 빛나는 날카로운 검 한자루를 두 손에 쥐고 있었다.
“네 녀석이 간댕이가 부었나보구나. 그래, 여기까지 줄기차게 날 쫓아다닌 이유는?!”
“.....묘영. 무림의 해결사 검은 꽃. 현재 마교의 신검혈룡대를 맡고있으며 휘하에 직속호위부대는 없음, 직속부하는 비월. 맞지?”
“와! 대단하네. 정말 대단하군. 역시 무림의 정보통 청화문이군.”
입꼬리만 움직여 살짝 비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청화문도 제자의 심장을 겨누는 그녀.
살짝 치켜올라간 크고 날카로운 눈매, 오똑한 콧날, 붉은 빛이 만연한 입술. 그 모든것이 그녀의 미모를 한층 빛나게 하고있다.
지금 이 객잔의 뒷마당에서 수십명의 관객들에게 둘러쌓인채 서로 칼을 뽑고 있어야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십여분 전 객잔의
1층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고있던 묘영의 눈앞에 갑자기 이 소란스러운 청화문도 사내녀석이 나타나 다짜고짜 검을
뽑아들고는 ‘너를 잡아가겠다!!!’라는 아주아주 어이없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암흑속의 마녀 ‘검은 꽃’ 묘영에게 그딴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확실한것은
지금 묘영은 그 무례한 놈이 자기를 잡아가겠다는 허튼소리를 했기 때문도, 다짜고짜 검을 뽑았기 때문도아닌 단지 점심식사를
방해받아서 무.척.이.나 화가 나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에 대해 무척이나
민감했기 때문에 밥을 먹는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화가 치솟는, 그런 특이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간에, 지금 청금루(靑金樓)에는 130년 객잔 운영중에 처음 벌어지는 ‘뒷마당 비무’가 마악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건 그렇고. 날 찾아온 이유나 말해.”
“아까 말했는데 못 들었나? ...너를 잡아가기 위해서라고 말했을텐데? 귀가 안좋은 모양이군.”
“.....장난하나..?”
강철금이라도 꽤뚫을만큼 시퍼렇게 날이서있는 검을 청화문도에게 겨누고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되어있는 그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묘영은, 그 어이없는 말에 그만 실소를 흘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실소가 청화문도에게는 독이 되었는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들고있던 검에 검기를 주입시키는 그였으니. 순식간에 은색이었던 검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푸른색을 띄었다.
“장난이 아니야. 청화문주님은 너를 원하신다. 나는 너를 잡아가야해.”
“뭐, 뭐?!!”
“......후우. 역시 귀가 안좋구나.”
마지막, 그자가 흘리듯 내뱉어놓은 한마디에 자극을 받아버렸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깜짝 놀란 그녀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청화문도의 제자녀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귀가 안좋아.. 난청이군.’이라며 금방 목이 달아나도 아무렇지 않을 말을 지껄인다.
하지만 묘영은 그의 혼잣말을 듣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아마 패닉상태인듯 했다. 아아.. 자신을 잡아가겠다니.
그것도 뭐, 별다른 이유도 아닌 겨우 청화문주가 자신을 원한다는 그런 하.찮.은 사실 하나 때문에!!!!
“......너는, 미안하지만 오늘 죽어줘야겠군.”
청화문도의 불쌍한 제자씨는, 그 순간 묘영의 눈에서 불꽃이 화르륵 타 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네가 순순히 날 따라가 줄 것 같지는 않군. 그렇다면 비무로 결판을 내자!”
“.....그건 나도 바라던바다. 호오... 네 녀석이 나의 검을 3초이상 받아낸다면 내가 순순히 널 따라가마.”
“뭐? 지금 날 얕보는거냐?!”
“.....얕보는거 아냐. 귀찮을 뿐이지. 아무튼... 먼저 공격해라!”
여유만만한 듯, 검을 상대의 목 부분에 집중시키더니 빈틈을 찾으려는지 검 끝으로 그를 샅샅히 훑어내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공격을 시도하려는지, 큰 소리로 초식을 외치며 발도를 시키는 청화문도. 거 참, 용기만 가상한 녀석이었다.
“청성무화룡검법 제 2장 광염(光炎)!!”
그가 청화문의 대표 검법인 ‘청성검법’의 변형초식 ‘청성무화룡검법’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청화문 내에서도 제법 한가닥 하는
놈인지 검기를 주입시킨 그자의 검에 검강의 기운이 깃들었다. 그 것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묘영은 ‘오호라’라며 의미심장한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청화문도는 검강을 유지하려 무아지경에라도 빠졌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윽고 검강의 힘을 받아낸 검이 큰 획을
그리며 묘영을 향해 뻗어나갔다. 무척이나 빠른속도여서 그녀가 그 검을 피했는지 어쨌는지는 살필 틈이 없었다.
“묘영!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호오.. 네 녀석도 제법 하는 놈이로구나. 청무검법은 아무나 익힐 수 있는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응?”
“...그렇게 봐준다니 고맙군. 아무튼 이 검법을 피한 너 또한 소문대로 대단하구나!”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받아친 묘영은 곧바로 피어오르는 먼지구덩이 속에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몇 분이 지나고
먼지가 걷혀진 지금에서야 옷을 변색시킨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그의 검법이 화려하고 위력적임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군더더기가 너무 많았고 검강이 제 위력을 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묘영이 그의 검을 받아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그자의 실력이 아직 묘영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묘영의 입가에는 매혹적인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럼 이젠 내가 공격할 차례군.”
그렇게 말한 묘영은, 들고있던 검을 눈높이까지 끌어올리며 검법을 펼칠 준비를 하였다. 그녀쯤 되는 고수의 위치에 다다르면
별도의 발검초식을 외칠 필요는 없었던 듯, 조용히 초식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하였으니.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검법이었으나
막아내고, 피하는 청화문도의 위치에서 보면 무척 강압적인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으읏...! ..앗!...”
“...하나..둘....셋......!”
“......하아압!!!..”
청화문도의 버릇없는 제자녀석이 자신의 초식을 하나도 받아내지 못 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그녀는 첫번째 초식을 펼쳤다.
마악 두번째 장으로 넘어가려던 차에, 이미 전력을 소진해버린 듯 한 그의 마지막 일갈성을 들어버린 묘영은 2장으로 넘기려던
초식을 멈추고 살짝 몸을 비틀어 다리를 공격해오는 검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냈다. 타악. 그자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역시... 일초도 받아내지 못했군?”
“....으윽.....!”
묘영의 비웃음섞인 오묘한 목소리에, 검을 놓쳐버린 그 사내는 분하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면서도 무릎을 꿇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 그러자 묘영도 얼굴에서 비웃음을 싹 거두고는 진심으로 ‘그 정도면 훌륭한 검법이었다’라며 위로의 말(?)을 건냈다.
그 때였다. 멀찍히 떨어져 위험한 비무대결을 지켜보던 관중들 사이에서 커다란 박수소리가 난 것이.
“흐음. 훌륭한 비무였습니다.”
왠 젊은 사내가 박수를 치며 묘영에게 다가왔다. 입고있는 옷을 보아서는 높으신 양반댁의 자제나, 어느 문파의 후기지수인 듯
하였지만 그자에게서 극상의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것으로 보아, 그저 귀족가의 후계자인 듯 하였다. 준수하게 생긴 외모의 사내는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띄우며 묘영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자의 웃음이 그리 외설적으로 보이지많은 않았다.
“뉘신지는 모르나 그리 훌륭한 비무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황실의 관리입니다. 우연히 이 곳에 들렀는데 마침 여협과 저 자의 비무를 보게 되었지요.”
“그렇습니까? 아무튼, 과대평가를 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잠시만. 이름이 뭐라 하셨죠?”
“묘영. 묘영입니다.”
뭔가 아주 급해보이는듯한 묘영은 사내에게 이름을 알려주곤 바로 옆에 있던 담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지고 말았다. 비록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졌으나 황실의 관리라던 그 젊은 사내의 마음속에는 묘영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깊이 새겨지고야 말았다.
“묘영.... 묘영이라... 잊지않겠소. 나는 당신의 눈부신 검에 반해버렸습니다.”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묘영이 사라진 쪽을 향해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사내이다. 워낙에 단순하여 처음 본 여인에게 반해버린
그 사내의 이름은 월하선. 무천월가 월중표의 장남으로 일찍이 황실에 나가 지금은 영선위표감이라는 위치에 있는, 야심찬 사내였다.
**
태선제(泰宣帝) 제위 36년째 되던 해 어느 겨울. 그는 58세의 나이로 어린 황태자 서휼을 두고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황위는 장남이 죽은 후 그의 후계자였던 차남의 차지가 되었고, 17세의 철부지 소년같은 황태자는 그날부로 금한의 새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침상 머리맡에서 백성들을 보살필 줄 아는 훌륭한 황제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소년. 그가 바로 금한의
48대 황제인 광무제(洸懋帝) 천 서휼이었다. 대부분의 황태자들이 20대 초중반에 즉위하는것에 비해 열 일곱이라는 나이로 황제位에
오른 그는, 어머니인 보선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할 것이라는 대소신료들의 예상을 깨고 첫 날부터 파격적인 정치를 시작하였다.
황위에 오른 첫 날. 그 날 하루는 금한 뿐만 아니라 이웃의 다른 황제들도 모두가 즉위 첫 날에는 연회를 베풀고 축하인사를 받느라
하루를 소진해버린다. 하지만 천 서휼,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축하연을 열자고 진언하는 마당에 그는 혼자서 밤을 새며 아버지
황제가 죽은 뒤로 편전에 쌓여만가는 100여개의 상소들을 모두 처리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정사(政事)를 다스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궐 내 내명부 서열을 개편하였다. 황제의 축하연을 기다리다 잠든 이들은 모두 다음 날 아침부터 조헌례를 다니느라 바쁘게 되었으니.
그 뒤로 서휼에게는 한동안 ‘여자보다 일을 좋아하는 황제’라는 암묵적인 별호가 항상 뒤따라다녔다.
그렇게 온 나라안이 시끄러웠는데도 변함없이 새 황제 밑에서 태종무영상位를 맡게 된 월하선. 그는 금한의 3대 세가중의 하나인
무천월가 가주 월중표의 장남으로 18살의 어린 나이에 관직을 받아 황실의 녹을 먹고 살 정도로 출중한 실력과 준수한 외모를 갖춘
장차 나라에 큰 일을 할 것이라는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새에 황실의 기대주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문, 부모님의
후광과 더불어 스스로의 두뇌도 명석하여 조정 출세의 길이 탄탄대로인 그는 23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물론 여인이 없어서 혼례를 못 올린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앞다투어 딸자식들을 시집 보내려는 치열한 전쟁이
암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머리, 외모, 가문 이 세가지 중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는 그가 아직도 장가를 들지 않은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 것은 바로 그의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예쁘고 마음씨만 착하다면
그 누가 시집을 와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녀’를 만난 후 부터는 아무리 예쁘고 참한 여자를 만나더라도 마음에 들지않았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단단히 빠져있는 듯 하였다.
“묘영..이라 했던가..? 후우.. 그녀를 다시 만날 방법이 없을려나..?”
“도련님, 서운입니다.”
“들어와.”
“부르셨습니까.”
월하선, 그의 처소 휘영당(輝影堂) 장지문 밖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더니 호위무사 겸 충복인 서운이 들어왔다. 그가 윤허를
하자 살며시 들어와서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살 색을 보지 않는다면 곁에 없는것으로
착각 할 정도의 완벽함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로 월하서는 주시하자 그도 고개를 들어 서운을 쳐다본다. 독특하게도 월하선의
큰 동공은 이 나라에는 몇 없는 묘안석(杳眼晳)이라 불리우는 안쪽이 밝고 바깥쪽이 어두운 특이한 색이었다. 마치,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토백석(土白石)의 그것과 흡사하게 말이다.
“서운아, 네가 우리 가문에 들어오기 전 어느 문파의 소속이라고 했지? 무림 출신이라지 않았느냐?”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문주님을 보좌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천당문이라... 내가 무림사에는 정통하지 못하다만, 사천당문이라면 정파에 속해있는거야?”
“예. 사천당가는 중립문파이긴 하지만 사파보다는 정파에 가깝습니다. 헌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혹시, 묘영이라는 여인을 아느냐? 그 여인도 무림에서는 꽤나 이름 난 여협인듯 싶던데.....”
“도련님께서 어찌 묘영을 아십니까?”
“아는게로구나.”
“무림에서 살다 온 사람치고 묘영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는 사파인 마교소속이긴 하지만 실력이 출중하고 미모가 뛰어나
다른 정파, 사파의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거의 유일무이한 여인입니다. 오히려 그녀를 모르는것이 이상하죠.”
“....그렇구나. 헌데, 무림의 여인들도 혼인을 해...?”
사천당문에서 지내다 온 서운은 의외로 무림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월하선도 무술을 익히는 사내인지라 무림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에 비하면 별로 알지 못 하였다. 아무튼간에 묘영이 그리 뛰어난 여인이라고 하니 더욱 그리워하는 마음이
애틋해지는 그였다. 게다가 서운은 그가 던진 마지막 질문에서 자신의 주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는 대충 알게 되었으니.
“대부분 혼인을 하지 않고 평생을 사는 여협들이 더 많습니다. 무림 여인들이 자주 쓰는 술법중에 주안술이라는 술법이 있는데,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평생을 아리따운 20대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무공이 높거나 배분이 높은 여인들은 혼인을
하기 보다는 지위와 미모를 이용해서 여러 사내들을 거느리고 삽니다.”
“흐음..... 그렇다면 혼인을 하지 않는거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원한다면 한 사내와 혼인을 하여 평생을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끄응...”
“...혹, 묘영 여협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일전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무림맹에 폐하의 교지를 전하러 다녀온 적이 있어. 헌데 내가 묵은 객잔에서 소란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더구나. 알고보니 묘영, 그녀와 왠 무림 사내의 비무였다. 휴우..... 그 비무 때 본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못살겠구나.”
그 말을 하는 월하선의 눈빛이 묘연해졌다. 애틋하고, 누군가를 깊히 그리워하는 듯 한 애절한 눈동자. 서운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십여년이 넘도록 모셔왔던 주군이기 때문에 눈빛 하나만 보더라도 그의 속 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으니. 솔직히 묘영, 그녀는
여인에겐 관심이 없는 서운이 보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게다가 무술실력까지 부러울정도로 뛰어났다. 세간에서는 장차 그녀가 현
암흑마제의 뒤를 이어갈 새 교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만큼 실력이 출중하였으니.
“허면 왜 그 때 도련님의 마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할 새가 없었다. 그녀는 비무를 마치고 담을 넘어 사라져버렸어..”
“역시 묘영 여협이네요. 허면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확실히 마음을 전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만난다면.. 그녀를 꼭 잡고 말겠어!”
“그 정도 마음가짐이라면 충분합니다. 허면, 소인이 자리를 주선해 보겠습니다.”
“뭐? 서운이 네게 그런 재주도 있었느냐?”
“사천당가에서 지낼 때 쌓아두었던 친분이 아직까지는 유효합니다. 걱정마세요, 하선 도련님.”
서운은, 평소 때의 그 답지 않게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운 채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무례하게도 주군의 명도 없이 나가버렸지만
월하선은 서운을 벌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에게 오히려 상을 줘도 모자랄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그 날 비무가
끝난 뒤 턱을 따라 흐르던 땀을 닦으며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에게 위로의 말을 건낸 묘영의 따스한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잡고 놓지 않으리라. 평생 함께하자는 구혼이라도 해봐야 사내로서의 체면치레라도 되지 않겠는가.
두 손을 꼭 쥔 채, 다짐아닌 다짐을 작게 읊조리는 월하선이었다.
며칠 뒤, 이제나 저제나하며 묘영과 자신의 만남을 주선해보겠다던 서운의 연락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찰나, 아침도 굶은 채
‘오늘쯤이면 연락이 오겠지-’라던 월하선의 귓가에 반가운 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도 목소리에 감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실리지 않는 무덤덤한 목소리였으나 오늘따라 단조로운 그의 목소리는 월하선의 궁금증을 더욱 자극시키고 있었으니.
“도련님. 서운입니다.”
“어서 들어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운을 맞아들이는 그. 서운도 오랜만에 보는 주군의 얼굴이 반가웠던지 한층 밝은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 발을 들였다. 여느때와 같이 흑색의 무복을 간소하게 차려입은 그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있었다. 서운이 안으로
들어오자 월하선은 자리에 앉으며 다짜고짜 일의 척도를 물어보려 하였지만, 그의 궁금증은 서운의 손짓 하나에 해소되었으니.
착착.
월하선이 권한 느티나무로 정교히 만든 의자에 앉자마자 손을 들어 박수를 두어번 치는 서운. 무슨 일인가 월하선이 의아해 할 새도
없이 장지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그 안으로 그가 꿈에도 그리던 얼굴이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묘영, 그녀였다.
“..아, 아니..!”
“묘영, 들어오세요.”
“예, 서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언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 발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운의 말에 묘영은 작고 귀여운 발을 안쪽으로 들였다. 그녀는 하선과
객잔에서 만났던 때의 흑색의 간소하고 편한 복장이 아닌, 진홍색 여자용 무복을 입고있었는데 몸에 꼭 알맞아 무공으로 단련된 그녀의
황홀한 몸매가 다 드러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안으로 들어와 장지문을 조심스레 닫자, 월하선은 몹시 흥분하여 금방이라도 졸도
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묘영을 향해 다가갔다.
“묘영 낭자, 절 기억하십니까?”
“아, 그 때 객잔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때... 그 분 맞죠?”
“예. 월 하선입니다.”
“월 공자이셨군요. 헌데 어찌 서운을...?”
“서운은 제 호위무사입니다. 아무튼, 묘영 낭자. 다시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제게 낭자라는 칭호는 과분합니다, 공자. 저는 무림의 여인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칭호는....”
“아닙니다, 낭자. 저는 묘영 낭자를 다시 뵈어서 정말 기쁩니다.”
월하선이 ‘낭자’라고 불러주자 묘영의 두 뺨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일전 비무를 할 때와는 또 다른 여성스러운 모습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서운이 곁에있어 불편한지, 아니면 아직도 단호히 말을 할 용기가 없는지 계속 겉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묘영은 아직
하선의 속마음을 모르는 듯, 그를 ‘객잔 비무 때 만난 준수하게 생긴 공자’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도련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서운이 하선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넓디 넓은 침실에는 묘영과 그,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묘영낭자...”
“월 공자께서 저를 만나겠다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저는 예전 사천당문의 문주님께 독문술을 사사받은 적이 있어요. 헌데 그 때 서운을 만난 인연으로 이렇게 그를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신다는 분이 그 때의 황실 관리라던 월 공자이신줄은 몰랐네요.”
“그래요? 아무튼 그 때 비무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훌륭했습니다. 파혈신대성검법은 아무나 익힐 수 있는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어머, 파혈검법을 아시나요? 무림인들도 파혈검법은 잘 알지 못하는데.. 놀랍군요, 월 공자.”
“묘영 낭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서운이 무림출신 호위무사라 여러가지 지식을 많이 알려줬습니다.”
아무래도 월하선,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위해 끊임없이 말을 하는 듯 싶었다. 다행히도 묘영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하였고 그는 더욱 신이나서 여러가지 무림에 대해 아는 지식들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순조롭게 보내는 듯 하였다. 그러다 별안간
묘영이 월하선에게 자신을 만나겠다고 한 연유를 물어보게 되었으니.
“저...... 묘영낭자.”
“예, 공자?”
“.......묘영 낭자의 멋진 검술을 사사받고 싶습니다.”
“예? 고, 공자.. 제 검술은 사문의 것 입니다.. 사문의 사람이 아닌 이상 가르쳐 줄 수도 없거니와., 배우는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러니까, 묘영낭자의 곁에서 평생 검술을 사사받겠습니다.”
“.................!!”
“허락해주실래요?”
묘영의 칠흑같이 검은 동공이 순간 커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하선의 아름다운 묘안석이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묘영이 눈을 질끈 감았으나, 그 느낌은 지울수가 없었으니. 빠져버린걸까. 그의 아름다운 미성과 독특한 묘안석에.
숨막히는 공허가 그녀를 짓눌렀지만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함에 눈을 떠버렸다. 그러자 바로 눈 앞, 아주 가까이 묘안석이 있었다.
“나는... 나는....... 휴, 좋아요. 월 공자의 묘안석을 매일 아침 침대 위에서 보고싶네요.”
순간 월하선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살짝 고개를 숙인 묘영의 두 뺨이 붉게 물들어있는 것을 못 본듯 지나치는 묘안석의 사내였다.
이윽고 그의 방 문에서 10장이상 떨어진 거리에 조용히 호위를 서고있던 서운의 귓가에 천지를 뒤흔드는 기쁨의 함성소리가 들려왔으니.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지나가는, 거의 일년만의 일이었다. 모든것이 잘 되겠지. 사실은, 묘영이 자신에게 객잔의 비무에서
마음에 꼭 드는 준수한 사내를 만났다는 사실은 주군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서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보고할 필요도 없어져버렸으니.
행복하길 빕니다. 그리고 조심하세요. 묘영은 너무 아리따워서 어느 사내나 보자마자 홀딱 반하고 말 테니까요. 명심하세요, 주군.
품 속에 꼭꼭 가둬놓고 주군의 여인으로만 삼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시는 주군께서 묘영을 보고싶다셔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겁니다.
하늘이 맑았다. 가을의 하늘은 여지없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배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하늘은 월하선과 묘영,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빌었지만 그 아름다운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 후 묘영은 그녀를 닮아 총명하고 어여쁜 딸, 사영을 낳고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역시
하늘은 뛰어난 사람을 일찍 데려가는듯 하였다. 월하선도, 그녀가 죽은 뒤 애닲아하였지만 곧 기운을 내서 그녀가 남기고 간 선물, 사영을 최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하.지.만! 핏줄은 못 속인다고 하였던가. 사영이 일곱살이 되던 해, 딸이 옷을 단정히 차려입지 못
했다고 야단 좀 친게 화근이 되어 그날로 사영은 7살 어린나이에 가출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제 어미가 살던 무림으로! 월하선은 하나뿐인
딸을 야단친 것을 땅을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무림에 속해버린 아이를 어찌 되돌리겠는가! 그저 딸 아이가 세, 네달에 한번씩 집에 오는걸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었으니. 하지만 월하선과 사영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딸 사영이 속해있는 문파도 제 어미 묘영이 속해있던 마교의 새로운 이름인
태사우라는 것을! 게다가 사영이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지옥마제가 여차하면 어머니 묘영의 정혼자가 될 뻔 했던 것을 말이다!
아마 이 두가지는 평생 묘영의 무덤속에 파묻혀 사라지겠지. 월하선은 오늘도 여지없이 묘영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품을 그리워했다.
이제는 일년에 두, 세번 집을 찾아오는 딸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뿐인 딸이, 제 어미 묘영을 쏙 빼닮은 딸이 입궐을 하였기 때문이다.
가슴 속 깊은곳에 묻어야겠지. 묘영, 사영. 자신의 모든것을 주었고, 그로인해 기쁨을 얻었던 두 여인의 이름을... 이제는 가슴에 묻어야겠지‥、
-이제는 초야에 묻힌 부원군 월하선(月昰善), 그의 가슴시린 사랑이야기 ‥ THE END-
아직 끝이 아닙니다. 외전이 끝났을 뿐입니다. 에필로그를 기다려주세요-★
첫댓글 우와 처음 본 소설인데 재밌게생겼어요(?) 처음부터 읽어야겠어요오♡ 몇일이 걸릴 지라도 이 글에 다시 답변을 다는 날까지 작가님 기달료주세요! ^-^
꺄, 감사합니다 김물결님^^ 님 소설도 가끔 읽었어요~ 황제가 독특하구 신후라는 계급이 특이하더라구요~ ㅎㅎ 감사해요~
헛...! 이제서야 다 읽었네요. ㅠ_ㅠ재밌어요 재밌어요ㅠ_ㅠ!!
이 보잘것 없는 소설을 다 읽어주시다니ㅠ0ㅠ 넘넘 감사합니다 ㅎㅎㅎ
아하.............................그랬구나. 운명적인 만남(?!) 요요요 기다릴게~
꺄아! 지금 인짱에 있는거져....? ㅋㅋㅋ묘영이랑 월하선두 이쁘지 않아~? 묘영이랑 사영이랑 흡사하게 닮았....ㅋㅋ
응 사랑이 묘해묘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뻐 묘영 짱 너무 일찍 떠났어 ㅠㅠ
사랑이 묘해.........ㅋㅋㅋ 말 맘에든당 ㅎㅎㅎㅎ 묘영이 살리고싶지만 소설에서 사영은 엄마가 읽찍 죽은 시점이라 ㅠㅠ
뭐야..ㅠ 월하선도 사영이 엄마때문에 그렇게 무림에 못 가게 했던거구나... ㅠ.ㅠ왠지 슬픈건....?
앙앙 ㅠ.ㅠ 사영이 엄마가 무림인이라 그런건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