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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설과 연기설
정석준
도서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초가을의 하루해가 어느새 서편 하늘에 기우러져 있었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추리닝 차림을 한 사람이 걸어 왔다. 가까이서 보니 K였다. K와는 동기ㆍ동창인데다가 나하곤 막역한 사이다. 학창 시절에는 문예반 활동을 같이 했고, 요즈음에는 취미삼아 4군자를 같이 배우고 있다. 그러고 보니 K하고는 취향 등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꽤 많은 것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신봉하고 있는 종교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교회 장로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나는 명색이 불교 신자라는 점이다.
“도서관에 갔다 오니?”
“그래, 운동하러 나왔구먼?”
“바쁜 일 없으면 같이 산책이나 하자?”
“그러자구나!”
집에 가도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쾌히 승낙했다. 그와 황성 공원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K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문제(창조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느냐?”
그 친구는 기독교의 창조설을 굳게 믿고, 불교의 견해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내게 그러한 질문을 한 것은 내가 청소년불자 지도 ․ 육 성 에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식견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그 같은 질문을 했으리라.
친구의 질문을 받고 내가 반문했다.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지으면 몇 시간이 걸리겠느냐?”
“모래로 어떻게 밥을 지어?”
“그렇지.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없지?. 그런데도 모래로 밥을 지으면 몇 시간이 걸리느냐?고 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성립돼지 않지. 마찬가지로 친구가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는 것은,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야.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없이 그저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
“이 세상이 그저 존재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군.”
“기독교는 시작과 끝, 창조와 심판이라는 일회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불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無始無終) 순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기독교와 불교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지.”
“이 세상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원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시작과 끝이 없잖은가? 불교의 연기론에 의하면 인(원인)은 연(조건)을 만나 과(결과)를 만들고, 과는 또 인이 되어 연을 만나 과를 만들고…이 연기법을 자신의 문제와 결부시켜 보면,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은 현재의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 과거는 또 그 과거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서, 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를 따져 보아도 과거가 끝이 없고, 그뿐 아니라 현재는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그 미래는 또 그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서 미래로 따져 보아도 연기는 끝이 없는 것이다. 이 연기법칙으로 볼 때 우주 현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한 번 들어보게?”
“경주 남산에 가면 흔들바위가 있지? 그 흔들바위가 천 년 만년, 아니 수억 년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 일까?”
“그야 흔들바위도 부서질 날이 있겠지.”
“바위가 부서지면 무엇이 될까?”
“큰 돌이 되겠지.”
“큰 돌이 부서지면?”
“큰 돌이 부서지면 자갈이 될 것이고, 자갈이 부서지면 모래, 모래가 부서지면 흙이 되겠지.”
“그럼 흙이나 모래나 자갈이 굳어지면 또 무엇이 될까?”
“그야 단단한 암석이 되겠지.”
“이와 마찬가지로 물에 열을 가하면 수중기가 되고 수증기가 증발하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땅에 떨어지면 눈 비가 되지만 에너지의 총량에는 변화가 있을까, 없을까?
“그야 우리가 물리시간인가 화학시간인가…기억이 알쏭달쏭하군.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곳으로 전달할 수 있을 뿐 생성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배워서 알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 모든 존재는 변화할 뿐 생멸은 없는 것이지. 그러니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런대도 친구는 왜 누가 만들었다고만 생각하는가?”
“성경(창세기)에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20세기 최대의 석학자로 손꼽히는 버트란트 럿셀이란 사람이 뭐라고 말 했는지 알고 있나? 그는‘나는 왜 크리스찬이 아닌가?’라는 주제의 강연에서‘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상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고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1원인에 도달한다. 이 제1원인을 (기독교에서는)하나님이라고 부른다.…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처럼 원인이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세계도 원인이 없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서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었지.”
“성경(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이름은 ‘나 여호와’와는 ‘스스로 있는 자(Iam who Iam)’라고 하셨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니까 원인 없이 존재할 수가 있는 분이시지.”
“그렇다면 그 성경은 누가 쓴 것인가?”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지. 그러니까 일점일획의 오류도 있을 수가 없지.”
예수의 처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임박한 재림은‘성경무오설'이 포괄하는 핵심 교리이다. 유대인의 창세 신화와 종교, 역사와 전설을 담은 구약도 무오류이므로, 신약의 예수에 관한 종교를 이스라엘의 민족신 야훼의 종교와 결합시켰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했으며, 최초의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은 죄(원죄)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6천년에 불과하며, 아담은 흙을 빚어 만들었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탄생했다. 지구를 뒤덮었다는 노아의 홍수는 4300년 전에 발생했다.
성경무오설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를 할 때 첫째 날에 빛과 낮ㆍ밤을 만들고, 둘째 날에 하늘, 셋째 날에 육지와 바다ㆍ식물, 넷째 날에 해와 달ㆍ별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으로는 지구는 하루에 한바퀴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이때 태양의 빛을 받는 때가 낮이며, 태양빛을 받지 못하는 때가 밤이다. 그런데 성경은 첫째 날에 빛과 낮ㆍ밤을 만들고, 넷째 날에 해ㆍ달ㆍ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성경에는 셋째 날에 식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 탄소동화 작용을 하여 생장(生長)하고 있으므로 태양이 없으면 하루도 생존 할 수가 없다. 이는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그리고 넷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무수한 별들을 지구 장식품으로 궁창에 메달아 놓았다고 했는데, 이러한 창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는 천동설(天動說)이 나왔다.
기독교의 천동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며, 태양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지구는 그 둘레를 자전하면서 공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地動說)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천동설을 축출한 지동설(태양중심설)도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갈릴레오가 죽은 지 3백년 후에, 태양계는 은하수의 한 변방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우주에는 우리가 속한 은하수 같은 은하계가 수백억 개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경 기록은 과학ㆍ역사적 사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근대 서구에서 성서를 신도의 삶과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되, 역사ㆍ문화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텍스트로 읽는 흐름이 우세해진 건 이런 까닭이었다. 근본주의 교회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시했다.
현재 이처럼 꽉 막힌 기독교는 유럽이나 미국 동부에서는 보기 드물고, 오로지 미국에서도 교육수준이나 경제상태가 저급한 남부 일부지역, 그리고 이 지역출신의‘꽉막힌 선교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ㆍ아프리카 등 일부 피선교 지역에서나 서식하는 기현상이다.
친구에게 성경무오설에 대해서 논박(論駁)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종교 간의 대화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수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 친구는 그 친구 나름대로 기독교 신앙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나 또한 내 믿음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쟁(論爭)은 자칫하면 서로 간에 감정만 상하게 할 뿐 부질없는 짓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일체 존재의 고정불변성(固定不變性)을 부정하는 사유 체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기본 입장에서 볼 때 우주의 근원(기독교에서는 이를 하나님이라 한다)이라는 용어가 꼭 적합한 개념이라고 볼 수가 없다. 불교의 연기사상(緣起思想)이나 공사상(空思想)은 사실상 우주의 근원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공사상은 연기사상의 다른 표현으로, 연기는 곧 공(空)인 것이다. 공이란 우주의 일체 사물은 그 본성에 있어서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며, 그러므로 공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공성(空性)의 도리를 용수(龍樹)는 “생기지도 소멸되지도 않으며(不生不滅), 영원하지도 끝나 버리지도 않으며(不常不斷),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도 여러 개로 차이가 나 있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존재론적으로 공은 모든 존재의 무자성성(無自性性)과 연기성(緣起性)을 의미하며,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法)라는 관념도 없는 세계이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하나가 변하여 많은 것이 되고 또 그 하나가 많은 것 속에 들어가 본질이 된다는 전변설(轉變說)이나, 생주신(生主神)이 우주를 출생시켰다는 설 등을 모두 부정하고, 연기설에 의한 우주 생성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세계나 우주는 어떤 원인이 있으므로 관계가 일어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는 불교의 연기론적(緣起論的) 세계관은 우주 기원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유일신의 창조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오늘날에는 빅뱅(big bang)이론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빅뱅이론 이전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중력이론(重力理論)이, 그 이전에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萬有引力法則)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 뉴턴은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으로는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 뒤 아인슈타인 나타나 중력이론(重力理論)을 발표했다. 중력이론에 의하면 우주에 수많은 별들이 떠 있는 것은 중력(重力)이 있기 때문이며, 이 중력이 원심력(遠心力)과 평행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주는 정지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A.프리드만과 A.G.르메트르가 빅뱅이론을 제안하였는데, 1940년대 G.가모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이 우주론은 우주가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우리 은하계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대폭발설은 현재‘표준 우주론'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또 남는다. 빅뱅 이전(최초의 대폭발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현재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 빅뱅이 여러 번 있었다면,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 한다는 불교의 교설과 상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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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교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잘 비교해서 보여주는 멋진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지으면 몇 시간이 걸리겠느냐?” 최근에 들어본 말중 가장 의미있는말중에 하나네요 ^^
유익하고 논리정연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