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蓄音機)
축음기(蓄音機)는 음을 기록 및 재생하는 기구이다. 영어로 Gramophone, Phonograph, Talking Machine 등으로 불린다.
의미만으로는 음악을 재생하는 모든 기구가 축음기가 될 수 있지만, 훗날의 물건들과 구별하기 위해 보통은 초창기에 나온 완전 어쿠스틱의 재생기만을 가리킬 때가 많다. 초창기 에디슨의 원통형 축음기부터 HMV 등 유명한 회사들은 흔히 아는 나팔이 달린 태엽 축음기를 제작했다.
태엽과 나팔 시대의 축음기는 흔히 아는 LP판 대신 SP판을 사용한다. 이 시대에는 에디슨의 다이아몬드 디스크 같은 물건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수동식 태엽에서 벗어나 전기 동력을 사용하게 되고부터는 '전기 축음기'의 약자로 '전축'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80년대까지도 오디오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한국에서는 SP를 재생하는 기계와 LP를 재생하는 전자기기를 둘 다 축음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 SP와 LP는 녹음 방식도 다르고 재질도 달라 호환성이 없다. 옛날식 나팔 달린 축음기는 유성기라고 불렀다. 야인시대 같은 일제시대를 다룬 작품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품이다.
처음의 축음기는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했다. 이전에 소리의 파형을 기록하는 포노토그래프라는 기계가 있었으나 기록한 소리를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기계는 에디슨의 축음기였다. 전에는 1분정도 밖에 기록할 수 없었던 에디슨의 원통형 매체를 바로 개량하여, 더 오래 음악 혹은 다른 음성 매체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본격적으로 오디오가 사람들에게 보급될 수 있도록 한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크기와 재질, 기록 방식을 달리 하면서 SP판, LP, CD, SACD , DVD 그리고 디지털 음악 파일까지 발전해왔다. 이 과정에서 사라진 매체도 적지 않다.
최초의 축음기와 실린더 레코드의 등장
최초의 축음기는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Phonograph이다. 전신소에서 일하던 에디슨이 송신 속도를 상향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것이 음악처럼 들리는 데 착안하여 음악 기록 장치를 발명하였다고 전해진다. 1879년에 소리를 기계진동으로 바꾸어 이 진동에 대응하여 주석박에 홈을 파서 소리를 기록하였다. 실린더 레코드의 시작. 이것은 10년 후인 1887년에 소리를 더욱 충실하고 용이하게 기록할 수 있는 납관을 사용한 납관식 축음기로 개량되었다. 초기의 녹음은 소리를 기계적 진동으로 바꾸어 이 진동을 녹음침에 전하여 레코드에 홈을 팠다. 재생은 이 레코드의 홈에 바늘을 대서 기계적 진동을 얻어 이것을 진동판에 전하였다.
표준시간 음반(SP판)의 시대
에디슨의 발명으로부터 몇년 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연구소에서 에디슨의 원통형 축음기를 개량하여 소리 저장 매체로 주석 대신 왁스를 바른 원통을 사용하는 Graphophone을 개발했다. 1887년 에밀 베를린너가 아연 재질의 원반을 매체로 이용하는 Gramophone을 개발한다. 초기 그라모폰은 원통형 축음기에 비해 음질이 좋지 못했다. 베를린너는 엘드리지 존슨의 도움으로 그의 그라모폰의 음질을 원통형 축음기 수준으로 개선하여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었다. 표준시간 음반의 등장이었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미국에서 원통형 축음기와 원반형 축음기가 시장에서 경쟁을 했으며 저렴한 가격과 마케팅으로 인해 원반형 축음기가 시장의 승자가 되었다. 주로 재즈와 블루스, 동양의 경우 초창기 트로트가 상당한 인기를 구사하던 1800년대~1940년대 정도까지만 주로 생산했으며 LP판 기반의 전축이 등장한 이후 사라졌다. SP판은 이후 나올 LP판에 비해 저장공간이 작아 한면에 거의 1곡씩만 들어간다. 축음기에 SP판을 올리고 태엽을 감아 바늘을 그 위에 올리면 음악이 나오는데 1곡이 끝나면 바늘이 내려온다. 뒷면을 듣고 싶으면 돌판을 뒤집어서 다시 축음기 위에 올려놓고 구동시키면 된다.
장시간 음반(LP판)의 시대
일반적으로 음반을 회전시키기 위한 크랭크와 태엽, 그리고 소리 증폭을 위한 나팔관과 재생용 바늘이 결합된 구조로 되어 있다. 간혹 대형 몸체에 화려한 장식이 된 물건도 있고, 가구의 일종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보통 축음기에 사용되는 판에는 미세한 홈이 파여 있는데, 바늘을 움직이는 판 위에 놓게 되면 바늘이 이 미세한 홈들을 지나면서 진동하게 되고, 그 진동을 나팔관[5]이 증폭시켜서 사람이 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를 키운다.
국내의 경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때 굉장히 많은 물건들이 수입되었다. 인사동 이나 황학동 풍물시장 뒷골목에 가면 골동품들이 널려 있으며 물량은 많은 편이다. 골동품 가격은 저렴한 편이지만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물건이 많다.
골동품이지만 신품상태의 상태가 좋은 제품을 구하고 싶으면 이베이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가끔 좋은 중고물건이 올라오는데 경매 입찰로 구매하면 된다. 보통 미국사람들이 판매자인데 상태가 좋은 축음기는 미국 현지에서도 가보급이라 가격은 굉장히 비싼 편이다.
레코드 위에 올려두면 스스로 돌며 재생하는 축음기도 시판중이다.
의외로 최근까지 인도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인도의 불량한 전력 공급 사정으로 인해 전기가 전혀 필요없는 축음기가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시골에서는 쓴다고 하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신품인데 이상하게 저렴한 축음기'는 십중팔구 인도에서 생산한 제품이다. 물론 음질은 '소리가 나긴 한다' 이상을 기대하면 안된다. 인테리어 용으로는 안성맞춤일 듯.
축음기는 빅터 축음기, 에디슨 축음기, 콜롬비아 축음기 등 여러 브랜드가 존재했는데 이중 당시 상당히 인기가 많았던 쪽이 '빅터 축음기(Victor Gramophone)'이다. 빅터는 국내에도 많이 흘러들어왔으며 '죽은 주인을 그리워하는 강아지' 문양이 그 회사의 상표인데 황학동 종로 등지의 연로하신 분들에게 물어보면 '개표 축음기' 라고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에 가면 온갖 축음기를 관람할 수 있다. 다소 고가의 입장료 임에도 빈티지 문화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각광받는 장소이다. 축음기외에도 1920~30년대 공중전화기, 주식시세일람표 등 3층 건물 전체가 빈티지 물품으로 가득 차 있다. 박물관장이 빈티지 문화 매니아로 해외까지 나가 구해왔다고 한다. 개인 소장품이라 물건을 구매할 수는 없고 관람만 가능하다.
당시의 축음기는 아날로그 방식을 사용하였기에 재생되는 소리는 지금의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빈약하지만, 이런 소리를 좋아하는 팬층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한다.
원래 축음기는 일본식 표현이고 한국에서는 유성기(留聲機)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축음기에 밀려 유성기 쪽이 쇠퇴한 상태이다. 중화권에서는 현재도 유성기라고 부른다.
종이 깔대기와 바늘로도 간이 축음기를 만들 수 있다.만드는 방법 간단히 종이로 된 바늘을 걸고 손으로 돌려도 소리가 나며, 판매되는 제품도 있다.
그래미 어워드의 로고와 트로피는 축음기 모양인데, 그래미라는 단어부터가 축음기의 영어인 그라모폰에서 따온 것이다.
첫댓글 개가 듣고 있는 축음기는 에디슨 축음기 입니다. 그림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데 화가가 이 그림을 에디슨축음기회사에 판매하려고 했는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RCA회사에 바로 그림을 구입해서 RCA Victor 로고로 사용되면서 유명해 졌습니다. 1940년~1960년대까지 라디오, 오디오제품은 진공관이 대세였으며 우리나라는 너무 못살아서 진공관 라디오도 아주 귀했습니다. 일본이 미국 마란츠 회사를 인수하면서 트랜지스터 라디오, 오디오를 생산하면서 가전제품은 Made in Japan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축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일본에서 한철 지난 제품을 가져다가 라이센스 생산을 했습니다. 한때 세운상가는 가전제품 수리하는 기술자들로 가득했고 구로공단 등지에는 공돌이, 공순이 들이 전자제품을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납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는 공업고등학교가 인기가 좋아서 수도공고, 용산공고, 신진공고 등 너도나도 공고에 입학했습니다. 요즘은 상고를 정보고, 공고를 산업고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농고와 수산고등학교는 정말 실력없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인문학교 나와서 취직도 못하고 빌빌거리는 것 보다는 영농기술과 해운업에서 일하는 것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고등학교만 나와서는 어디 이력서도 내기 힘든 세상이 되었지만 사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일선에서 일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일선에서 일하려면 1년동안 수습기간이 필요합니다. 군대 필하고 회사에 입사하면 26~7세 정도 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20살에 입사하면 1년동안 수습사원으로 일할 수 있고 군필하고 다시 입사하면 23살이면 정식근로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젊었을때 3~4년은 황금같은 시간으로 고생도 사서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졸친구들이 승진하는데 훨씬 유리한 조건을 직원들에게 부여하기 때문에 고졸친구들인 승진시험을 포기하거나 야간대학을 다니는 친구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실력이 아닌 학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대한민국의 현실인듯 싶습니다.
본인은 대학 문턱에도 못갔지만 관련 자격증을 2개나 있어서 취직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고 업무에 적응하는데도 다소 힘들기는 했지만 대학나온 친구들보다 실무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저에 능력은 25살에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 정도로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습니다. 한전에 근무할 때는 대졸 사원이 과장 진급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6개월동안 일도 안하고 공부에만 매달리지만 2년에 한번 있는 시험에 3수, 4수 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수험생은 자신의 업무를 다른사람이 대신 처리해야 하므로 고객응대에 지장을 초래하며 이러한 시스템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