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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비슷하지만 낯선 아일랜드의 역사
https://www.ebs.co.kr/tv/show?prodId=441203&lectId=60345504
아일랜드인들과 우리는 정서나 역사적 경험에서 비슷하다. 강한 애국심, 자신들 역사를 수난의 역사로 생각하는 경향, 식민지 경험,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인 점 등이 매우 흡사하다. 우리와 비슷하지만 낯선 아일랜드의 역사를 알아본다. 출연자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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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일랜드 공화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7만 달러를 넘는 성공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잡종화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불순하게 섞여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유지해야 한다. ...............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 취할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반일 프레임에서 벗어나 진정한 극일이 무엇인지 아일랜드의 경험을 도움 삼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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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비슷하지만 낯선 아일랜드의 역사-슬픈 아일랜드
저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박지향입니다.
저는 서양 근현대사, 영국사학, 아일랜드 역사 그다음에 제국주의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습니다. 오늘의 키워드는 슬픈 아일랜드입니다.
흔히 우리 한국인들은 이태리인들과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볼 때는 사실 우리는 아일랜드와 비슷합니다. 이태리인들과는 노래를 좋아하고 잘한다는 것밖에는 별로 비슷한 점이 없어요. 그런데 아일랜드와 우리는 정서적으로나 역사적 경험에서 매우 비슷합니다. 강대국 옆에서 겪은 고초와 식민지 경험, 강한 민족주의 정서 현재 아일랜드 섬이 북 아일랜드와 남쪽 에이레 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 그것이 이제 우리의 분단 상황과 비슷하죠.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인 점 등이 매우 흡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아일랜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죠. 지금부터 우리와 비슷하지만 낯선 아일랜드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한국과 아일랜드는 어떤 점에서 유사할까요? 일단 지정학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우리 두 나라는 상당히 유사합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나라라고 불렀어요. 인류 역사상 이처럼 고난을 겪은 민족은 없었다. 우리는 정복되고 멸시받은 민족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한 나라는 이웃에 있는 사악한 영국이라고 말을 했던 것이죠.
한편 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자부했고 또 그렇게 평을 들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하얀 껌둥이라고 불렀고 더럽고 무식하고 거짓말쟁이고 항상 술에 취해 있고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고 폄훼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영국에 돌리면서 자기들에게는 면죄부를 주었어요. 그래서 영국의 우월함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아일랜드 민족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앞세웠습니다. 모든 자신들의 불행과 잘못은 이제 영국 탓이라고 그렇게 한 것이죠. 그러나 영국인들은 그렇지 않았죠.
사실은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을 증오하면서도 모방했습니다. 이거는 아일랜드인들만이 아니고 식민지 경험을 겪은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렇게 증오하면서 모방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한 2천년대 초반까지도 계속이 됐어요. 그때는 아일랜드가 상당히 경제적 성장을 보여서 잘 살게 됐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제3세계의 의식을 가진 제1세계였다는 평을 들었던 것입니다. 한국 아일랜드는 20세기 후반에 아주 경제적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아일랜드는 여전히 분단 상태에 있다라는 점에서 비슷하죠.
아일랜드 섬은 현재 북아일랜드와 남쪽의 에이레 공화국으로 분당이 돼 있는데 북아일랜드는 현재 영국의 일부로 존속을 하고 있고, 아일랜드 남쪽은 에일의 공화국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한반도의 분단 상태하고 매우 흡사한 것이죠. 이처럼 한국과 아일랜드는 여러 면에서 가장 비슷한 그런 역사적, 정서적 경험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이제 브리태니아라고 하는 영국을 의인화한 존재의 사진이에요. 대단히 당당하고 사자를 옆에 항상 거느리고 있는 이런 당당한 모습이죠. 그에 반해서 아일랜드의 사람들은 거칠고 정말 이성적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는 술 취한 모습모습으로 영국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일랜드와 영국은 어떻게 만났을까요? 켈트족의 일부가 아일랜드 섬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 정도부터입니다. 아일랜드의 초기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은 기혼 후 432년에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도착해서 이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이에요. 사실 성 페트릭은 오늘날도 아일랜드의 수호신인데 재미있게도 성 페트릭 스스로는 아일랜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영국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이 가톨릭이 아주 완전히 아일랜드에 정착을 하게 되는 것이죠. 12세기에 영국인들의 일부가 아일랜드 섬으로 또 이주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이 그 당시에 이주해 온 영국인들은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은 16,7세기에 이주해 온 신교도들이었어요.
16,7세에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영국은 튜더 왕조였죠. 그때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를 둘러싸고 로마 교황과 이제 갈등을 벌이고 가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영국 국교회라는 것을 수립을 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 아일랜드에 이주하는 사람들은 신교도였던 것이죠. 그래서 원래 거기에 살고 있었던 가톨릭들과 새로 이주해 온 영국인들 신교도인들 간에 이제 갈등이 이제 아주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될 때 1798년경에 아일랜드에서 봉기가 일어나요. 영국에 대항하는 봉기, 그런데 이때가 언제냐면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전쟁이 전개되고 있을 때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일랜드의 봉기를 주도한 사람들이 영국의 적국이었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봉기를 계획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영국의 입장에서는 이제 아일랜드를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영국의 방위를 위해서라도 아일랜드를 그냥 저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 생각을 해서 1800년에 아일랜드를 공식적으로 합병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그다음 사건, 중요한 두 나라 간의 사건이 이제 감자 대기근이에요. 1846년부터 1850년 정도까지 계속이 됐는데 이 감자 대계기론으로 인해서 아일랜드인들의 한 100만 명 이상이 이제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 사건을 겪으면서 아일랜드 사람들의 영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굉장히 강화됩니다.
영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완전히 정점을 치는 것이 언제냐 하면은 1916년에 일어났던 부활절 봉기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이때도 역시 1916년이면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예요. 그럴 때에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 중에서 일부가 영국의 적국인 독일의 지원을 받아서 이번에 또 봉기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이제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전쟁은 무슨 전면전은 아니고 게릴라전이에요. 그래서 이 게릴라전에서 이제 두 양측이 전부 다 지친 끝에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것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거는 영제국 하에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을 유지하는 이런 형태의 타협이었는데 이러한 자유국이 1922년부터 한 20여 년 계속되다가 결국 아일랜드는 1949년에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일랜드와 영국은 12세기부터 시작을 한 오랜 갈등의 역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에 온 영국인들은 누구일까요? 아일랜드의 인구 구성을 보면 압도적인 다수는 물론 원주민인 켈트인들입니다. 그들은 게일인이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인구 구성을 이루고 있는 요소는 튜더 시대 이전에 온 영국인들인데 이들은 가톨릭이었고 원주민들하고 별 문제가 없이 동화를 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16, 17세기 튜더 스튜어트 시대에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신교도들이에요. 이들이 앵글로 아이리시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이라고 불리면서 아이랜드의 엘리트로 이제 굴림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면서 한동안 아일랜드의 엘리트로서 이제 군림을 하게 됩니다.
물론 신교도들 안에서도 구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영국 국교회를 믿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다음에 이제 스코틀란드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장로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881년 당 기준으로 아일랜드의 인구 구성을 보면은 영국 국교회를 믿는 신교도들이 12%, 그다음에 장로교를 믿는 신교도들이 9%, 나머지가 79% 정도가 이제 가톨릭 원주민들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신교도 안에서도 이제 구분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대에서는 서로 일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이야말로 이제 아일랜드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존재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단히 유명한 인물들이 이들 영국계 아일랜드 출신들이에요. 갈리버 여행기를 쓴 그 유명한 조나폰 스위프트, 그다음에 보수주의 이념의 기초를 닦은 애드먼드 버크, 그다음에 나폴레옹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죠. 웰링턴 공작이 이제 워터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파를 함으로써, 나폴레옹이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몰락을 하게 되는데 그 웰링턴 공작, 그 다음에 19세기, 20세기에 이 영문학을 아주 화려하게 장식했던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그다음에 조지 버나드쇼. 예이츠는 192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워너트셔는 1925년에 노벨상을 받았어요. 이렇게 그냥 아주 대단히 유명한 사람들이 사실은 영국계 아일랜드입니다. 저도 사실은 오스카 와일드가 더블린 출신이라는 걸 듣고 이제 굉장히 놀랐어요. 와일드는 아주 전형적인 영문학의 어떤 정통적인 문인이었는데 그가 더블린 출신의 영국계 아일랜드인이었다는 사실을 저 자신도 사실 잘 몰랐던 것입니다.
이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태어난 땅 아일랜드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영국 문화에 대한 흠모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웰링턴 공작이 어떤 사람이 이제 그에게 당신은 더블린에서 태어난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이제 하니까 월링턴 공작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그래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사람이 말이 되는 건 아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영국 적 기원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19세기 후반이 들면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이제 고뇌가 깊어지게 됩니다.
이 그림이 이제 1798년에 영국에 대항한 아일랜드인들의 봉기인데 이 봉기를 주도한 사람들도 사실은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영국계 아일랜드인이 얼마나 심각한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관계에서 이제 아주 심각한 대사건이 바로 감자 대기근 사건이죠.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1840년대에 이제 감자 마름병이라는 것이 돌면서 감자 수확이 이제 폭망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아사자가 100만 명 이상이 나오는 이런 대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사자가 100만 명 이상 나왔다는 것 그리고 고향 땅을 떠나서 이제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100만 명이 나왔다는 것 이 사실만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 내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이제 많은 질문들이 있었고 또 설명들이 제기가 됐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이제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일랜드인들은 이렇게 말을 해요. 하나님이 감자 마름병을 보내셨지만 대기근의 원인은 영국이다. 이렇게 이제 대기근이 오로지 영국 탓이다.
이렇게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제 믿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이제 영국의 책임을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되는데 영국인들이 사실 이 감자 대기근 초기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구제 작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46년 9월부터 대기근에 이제 징조가 보였는데 영국 정부가 이제 직접적으로 급식소를 설치하고 한 거는 47년 전반기에 이르러서예요.
그러니까 1년 거의 2년 가까이의 시간을 그냥 보낸 것이죠. 자 그렇다면 그 영국 사람들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했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국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이제 두 가지로 우리가 설명을 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그 당시에 영국 정부, 위정자들, 지식인들의 정신 상태가 어떤 것이냐 하면 자유방임 경제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제는 호황과 불황이 이제 주기적으로 오게 되는 것이고 이런 마음병으로 인한 경제적인 불황은 또 다시 극복을 하게 되면 이제 호황으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까 정치가 너무 경제에 간섭을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자유방임 경제였고 영국인들이 이때 이러한 자유방임 경제를 믿었습니다.
또 하나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영국인들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아주 게으르고 술에 찌들어 있는 그런 사람들로 이제 무시를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대기근은 이러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게으름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필요악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 대기근 후에 어떤 식으로 대응을 했을까요? 아일랜드인들의 다수는 가톨릭 교도들이죠. 그러니까 그들은 이제 산아제한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냥 생기는 대로 낳는 게 이제 자식이었는데 대기근 후에 놀랄 정도로 아일랜드인이 늦게 결혼을 하고 자녀수를 줄이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대기근 자체는 1850년경에 끝났지만 그 후에 1870년까지 여전히 한 200만 명 이상이 나라를 떠났어요. 그래서 1870년대 80년대에 이러면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서 살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40% 이상이 해외에 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거대한 디아스포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 해외로 이제 주로 어디로 갔느냐 하면 영국의 맨체스터와 같은 산업지구 그다음에 이제 뉴욕, 오스트레일리아 이런 곳으로 이제 이주를 해갔는데, 그나마 이주할 비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갈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근데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이제 또 100% 안전하게 도착을 한 것도 아닙니다. 약 20%가 배 위에서 죽거나 혹은 도착 직후에 사망을 했어요. 이러한 대기근을 겪으면서 아일랜드 사람들의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급속히 강화되기 시작을 합니다.
대기근 후에 이제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에 대해서 갖는 이제 적대감이 강화되기 시작을 했다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이제 아일랜드 사람들 간에는 영국 정부를 믿을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이제 자치를 획득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운동이 전개됐습니다. 이것이 이제 아일랜드 자치 운동이라고 하는 것인데, 중요한 건 이게 이제 완전 독립이 아니고 영 제국 내에 남아 있지만, 독립국가의 비슷한 내치에 한해서는 이제 자취를 하겠다 그러니까 캐나다나 이제 호주와 같은 그런 식의 정치 체제를 요구하는 그런 운동이었어요.
이 운동을 전개한 지도자가 바로 찰스 파넬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파넬은 역시 영국계 아일랜드 신교도였지만, 가톨릭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도 무한한 신뢰와 충성을 가지고 있었던, 마치 무관의 왕과 같이 아일랜드에 군림을 한 그런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0여 년 동안 아이랜드 자치 운동을 이끌었던 파넬이 1890년에 갑자기 이제 몰락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제 파넬이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영국 여성 오셰이 부인이라고 하는 유부녀와 내연 관계에 있으면서 이제 자식까지 낳고 살았다 하는 것이 졸지에 이제 폭로가 되는 것이죠.
그 폭로를 한 사람은 바로 그 오셰이 부인의 남편이었어요. 그동안은 이제 파넬의 정치적인 권력을 이용을 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다가 갑자기 이제 부인과 자기 부인과 파넬의 내연관계를 폭로를 했던 것입니다. 가톨릭 교도들 사이에서의 충격은 이제 말도 못했죠. 특히나 민족의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그냥 철떡같이 믿었던 그런 사람들한테 하멜의 이런 내연 관계는 심각한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이제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은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의 지도력을 벗어나서 우리들끼리 이제 민족 운동을 전개를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이제 강한 그런 이제 의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을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가톨릭 신앙이야말로 바로 아일랜드인들의 정체성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가톨릭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에 대해서 이제 영국계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반항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저항을 하게 되는 것이죠.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 신앙만이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이라고 말을 했고 이에 대해서 개신교를 믿는 신교도들은 우리는 이 땅에서 수백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아일랜드 음식을 먹고 살았다. 우리가 아일랜드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제 반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1890년대부터 한 2, 30년 동안 누가 아일랜드 민족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이제 양 집단이 갈등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그동안 자기 스스로가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영국계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파넬의 몰락과 가톨릭 민족주의의 강화와 더불어서 이제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이 이제 대두를 하게 되는데 자치 운동이 이제 정치적인 운동이었죠. 그런데 이제 정치적인 운동이 이제 좌절하면서 이제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운동은 이제 문화적인 그런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계 아일랜드 신교도들과 가톨릭 아일랜드 간의 두 문명의 전투라고 하는 것이 이제 전개가 됩니다.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수비대에 있고, 어쩌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인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아일랜드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의 주장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일랜드가 그동안 너무나 영국화됐다라고 하는 점을 지적을 하면서 이제 문화의 민족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탈연극화를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 탈영국화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언어를 이제 되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이제 모든 아일랜드 거주민들이 다 영어를 당연하게 사용을 해왔는데 이제 오랜 자신들의 언어인 이미 사장되어 버린 게러를 부화를 시켜서 게이어를 일상의 언어와 공적인 언어로 이제 사용을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이제 게이로 부흥 운동을 시작을 한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어디서 따왔느냐 하면은 독일 민족주의의 피시테와 헤르더가 주장을 했던 언어 민족주의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민족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언어를 잃어버린 민족은 결국은 그 혼을 빼앗긴 것이고 살아남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 이제 언어 민족주의의 아주 핵심인데 그 입장을 취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 이 에로를 사용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됐을까요? 그때 인구가 이제 400만이라고 치면은 게이로를 사용하는 사람은 3만 명이 채 안 됐습니다. 그 정도로 사장되어 버린 그런 언어를 이제 다시 살리려고 하는 그런 게이로 부흥 운동이 1890년대에 이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영어를 사용하지만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라고 주장을 하는 게 영국계 아일랜드 신교도들의 입장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이제 영어로 시를 쓰고 영어로 극을 쓴 윌리엄 버틀러예요. 예이츠는 이제 아일랜드를 대단히 깊이 사랑한 그런 민족주의자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게이러의 부흥 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로서 이제 표현을 했습니다. 그의 입장은 뭐냐 하면은 영어로 쓴 아일랜드 문학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영어라고 하는 근대어를 세계 포용어를 씀으로써 오히려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이제 예이츠의 입장이었습니다. 예이츠는 이 아일랜드의 민담에 나오는 그런 여러 영웅들 이런 사람들을 소재로 하는 극과 시를 써서 아일랜드 문예극장이라든가 에비 극장과 같은 자신이 창설한 극에서 상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아일랜드성을 개인적인 것 에서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뭐냐 하면 영국의 물질 문명에 대한 적대감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영국의 물질 문명에 대한 적대감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엇을 제시했느냐 하면은 이 아일랜드의 민족 순수하고 청교도적이고 경건한 그런 아일랜드 민족 그들의 또 대표는 누구냐 바로 농민이었죠. 그래서 이 개일 민족주의자들은 농민을 미화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그런 아일랜드의 농민들이 그처럼 그렇게 경건하고 순수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 아일랜드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극작가의 조지 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싱은 요절했어요. 그래서 작품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정말 천재적인 작가였고 그가 아일랜드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실제로 존재하는 농민 보고 싶은 농민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농민을 아주 연구를 하고 그들을 이제 주제로 해서 극을 썼는데 그 싱에 그게 나오는 농민이라는 사람들은 대단히 영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기는커녕 떠돌이 남자를 따라서 이제 남편을 떠나버리는 아일랜드의 여성의 모습이라든가 혹은 또 아버지를 죽였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그런 한량의 모습 이런 거를 이제 있는 그대로 이제 보였던 것이죠. 그렇지만 싱의 극이 상연이 됐을 때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이 이제 극장에 와서 이제 소동을 벌이고 이제 난동을 벌이고 아일랜드 민족을 이제 폄훼하지 말아라 이렇게 이제 하면서 예이츠를 위시한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의 회의가 굉장히 깊어지게 됩니다.
에이츠는 어떻게 해서 그 아일랜드 민족주의자가 됐느냐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도 됐지만 그가 일생 사랑한 모드 건이라고 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이 모드 건이 역시 영국계 아일랜드인이었고 대단히 이제 아주 강렬한 민족주의자였어요. 개인 민족주의자였어요. 자신의 영국의 출신 기온을 완전히 부정을 하는 이런 사람이었고 예이츠는 그 모드보을 평생을 사랑을 했는데 모드 건의 영향에 의해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깊숙이 관여를 하게 됩니다.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관계에서 정말 넘지 못할 그런 선을 넘은 사건이 바로 부활절 봉기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1916년 4월 부활절 일요일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일부가 공화국을 선언을 하면서 이제 영국에 대항해서 공기를 일으킨 것인데 이때도 역시 1916년이라고 하는 때는 1차 세계대전 중이었죠. 이번에는 이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의 적대국인 독일의 무기를 지원을 받아서 이제 봉기를 기획을 했습니다. 약 1600명 정도가 참가를 했고 이들이 이제 현재도 존재하는 아일랜드 중앙우체국 앞에서 엄숙하게 아일랜드 공화국을 이제 선언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지나가던 이 더블린의 시민들이 그래서 뭐 하는 짓이야 이런 식으로 이제 차갑게 반응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부활절 봉기라고 하는 사건은 정말 거대한 그러한 결과를 야기하게 됩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결과는 장대했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부활절 공기에 딱 맞는 말입니다.
영국이 이제 굉장히 잔인하게 진압을 했어요. 그래서 봉기가 진압이 됐을 때에 영국군을 포함해서 약 450명이 사망을 하고 2600명 정도가 이제 부상을 당하는 그런 심각한 전투가 전개가 됐습니다. 부활절 봉기라고 하는 사건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사건 자체는 굉장히 미묘하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가져온 그 결과는 정말 중대했는데 이 사건으로부터 피의 희생을 통한 민족의 부활이라고 하는 신화가 탄생을 했어요. 그는 이것을 무서운 미의 탄생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 봉기를 지도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패배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들에게 패배는 곧 승리였습니다. 영웅적 패배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고 공기를 주도했던 패트릭 피어스라고 하는 시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솟아나고, 애국적 남자들과 여자들의 무덤으로부터 민족이 솟아난다. 우리는 아마 실수로 죄 없는 사람들을 살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혈은 정화이고 신성화다. 이처럼 피해 희생을 통한 순교와 폭력의 메타포를 부활절 동기는 아일랜드인들한테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봉기 후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했어요. 우리는 어머니 무릎에서 예수가 인류를 위해 죽었고, 패트릭 피어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고 배웠다. 페트리피에어스와 그 공기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와 마찬가지의 구원자의 지위에 오르게 됐던 것이죠.
이처럼 피의 희생을 통한 민족의 부활이라고 하는 그런 신화는 1960년대 이후에 아일랜드 공화국 군, 아이알레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폭력 행위에도 계승이 됩니다. 부활절 봉기기가 끝난 후에 영국과 아릴랜드는 이제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는 그런 관계로 이제 치닫게 됐던 것이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바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이제 전쟁을 이제 벌이게 되는데 이건 사실 전면전은 아니에요. 게릴라 전의 모습을 띄었고 이때 이제 활약을 한 것이 바로 마이클 콜린스. 조직을 한 ira라고 하는 아일랜드 공화국 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마이크 콜린스는 영화에서도 이제 많이 보셨을 텐데 사실 아이어레이는 이제 수적으로는 몇 십명밖에 되지를 않아요.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성공적으로 영국을 상대로 해서 이제 게릴라전을 전개를 했던 것이죠. 그래서 1년여에 걸친 그런 영국 아일랜드 전쟁 끝에 양측이 전부 다 이제 감당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에 갔을 때에 이제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아일랜드 조약이라는 것을 이제 맺게 되는데 그 내용의 이제 핵심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아일랜드는 자유국으로 이제 자유국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제국 내에 남는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영 제국 내에 이제 명목적으로는 속하는 이런 식으로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거를 수립하자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뭐냐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은 절대로 아일랜드 자유국에 포함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영국에 남는 걸로 이렇게 해서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가 분단이 되는 이러한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 바로 영아일랜드 조약이었어요.
마이클 콜린스는 이 조약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비록 완전 독립이라고 하는 자신의 목표에는 못 미치지만 당시 영국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이 이것이다라는 걸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조약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타협 안에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굉장히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이었죠. 그들은 이제 이 마이클 콜린스와 조약에 서명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이제 내전을 벌이게 됩니다. 1922년 초부터 23년 한 5월달까지 한 1년 반 정도에 걸쳐서 이제 내련 상 아일랜드는 내전 상태에 이제 돌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은 민족주의자들 내에서 이제 이번에는 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그 와중에 마이크 콜린스는 암살이 됩니다. 그는 이미 이 영아일랜드 조약에 서명을 했을 때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죽음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다. 이렇게 이제 예견을 했던 것이죠. 결국은 내전 끝에 영국과의 타협을 지지하는 자유곡 파가 이제 승리를 하게 돼요. 그래서 결국은 이제 자유국이 아일랜드 자유국 아이쉬 프리 스테이트라고 하는 것이 1922년부터 1949년까지 지속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1949년에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내전에서의 핵심이 뭐였느냐면 영국 왕에 대한 충성의 문제였어요.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제국에 남아 있는 한은 영국인들한테 특히 영국 왕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를 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거를 이제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것이 이제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는 이제 1922년부터 아일랜드와 남쪽에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이제 분리가 분당이 됐던 것이고 아일랜드는 네 개에 주로 이제 구성이 돼 있어요.
아일랜드는 1980년대 이후에 놀랄 만한 경제 발전을 보이게 되는데 그전까지는 이제 아일랜드가 굉장히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949년에 아일랜드 공화국이 이제 정식으로 출범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후진국 상태였어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고 또 이들은 이 경제적 민족주의를 이제 추진을 했어요. 그래서 자립, 영광스러운 가난 이것을 내세우면서 우리들끼리 가난해도 우리들끼리 산다 이런 식의 이제 경제 정책을 펼쳤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1980년대에 이르면은 실업률이 18%를 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쯤 되면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대중은 영광스러운 가난보다는 더 많은 일자리와 구를 원한다. 이렇게 이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한 대중의 열망에 이제 아일랜드 정부도 이제 부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980년대에 전면적인 경제 개혁을 이루게 돼요. 그래서 그전까지는 민족주의라고 그럴까요 경제적 민족주의라고 할까요 나라 문을 꽁꽁 닫아두고 이랬었는데 이때 이제 대규모의 외국 자본을 이제 유치를 하기 위해서 세금을 대폭 낮추고 특히 이제 법인세를 대폭 낮춥니다. 그리고 이제 직접 투자를 이제 유인을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아일랜드로 이제 직접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죠.
아일랜드 가장 강점은 무엇이었냐면은 이제 영어를 쓴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이제 유럽이라고 하는 거대한 시장에 이제 가까이 있다는 점 그리고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은 값싼 노동력이 있다는 점 이런 점들이 이제 아일랜드의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에 아일랜드 경제는 아주 놀랄 만큼 성장을 하게 돼요. 마치 기적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2천년경에 이르면은 이제 아일랜드는 케트 호랑이다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이 호랑이라고 하는 거는 사실은 아시아의 호랑이들로부터 연유한 것이에요. 이 아시아의 호랑이는 누군가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이 네 나라의 급속한 이제 성장을 보면서 평자들이 아시아의 호랑이 혹은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것에 빗대어서 이제 아일랜드를 켈트 호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그림이 이제 그 켈트 호랑이를 타고 있는 아일랜드 기업인의 모습이에요. 아일랜드의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잘 묘사하고 있는 사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8년에 이제 금융위기가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오고 아일랜드도 이제 여기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어요. 그렇지만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회복을 보입니다. 그래서 2015년 이후에는 아주 놀랄 만한 회복세를 보여서 연 평균 성장이 14% 정도 되는 그런 정도의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보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아일랜드를 뭐라고 부르냐 하면은 켈트 호랑이를 넘어서 켈트 피닉스라고 불러요. 피닉스는 이제 결코 죽지 않는 새를 의미하죠. 그만큼 아일랜드 경제는 지속 가능한 경제다 이렇게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2022년 1인당 gdp가 어느 정도냐
10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전 세계에서 2위예요. 아일랜드는 경제 규모가 작기 때문에 gdp 자체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 1인당 gdp를 계산을 하면은 10만 달러라는 것입니다. 1위는 제가 알기로는 룩셈부르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아일랜드 경제를 생각할 때 국내 총생산하고 국내 총소득하고를 조금 구분을 해야 돼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일랜드 경제에는 이제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직접 투자가 많이 들어와 있는데 따라서 국민 총소득은 항상 국내 총생산보다 gdp보다 약 30%가 낮습니다. 1인당 gdp가 10만 달러라고 치면 1인당 gni는 약 7만 달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로도 현재 2022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4위라는 것입니다. 이거는 영국의 1인당 gdp나 gni를 훨씬 앞서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가 지금 한 4만 5천 달러 정도로 제가 알고 있는데 거의 두 배 가까운 그런 1인당 gni나 gdp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일본 경제보다 그만큼 앞서 있는가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이러한 아일랜드 경제 성장 그들이 이제 영국 경제를 장악하고 누르고 앞서가는 모습에서 우리가 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일랜드의 이런 경제 성장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놀랄 만한 사회 변화에서 우리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톨릭 교회가 이제 쇠퇴한다는 것이죠. 1922년에 시작한 아일랜드 자유국 그다음에 아일랜드 공화국 시대에도 가톨릭 교회는 이제 막강한 세력을 떨쳤어요. 그래서 아일랜드는 마치 신정 국가와 같다 이런 말을 들을 정도였는데 이러한 대단히 거대한 경제적 변화와 더불어서 이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이제 아주 쇠락을 하게 됩니다. 1971년 당시 인구의 96%가 일요일 미사에 출석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2005년쯤 되면은 50%도 채 되지 않는다. 이럴 정도로 이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약화됐습니다.
그것을 이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낙태법이에요. 낙태를 합법화하는 것이죠. 아일랜드는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였고 따라서 낙태가 불법이었어요. 그래서 아일랜드 여성들은 이제 낙태가 필요할 때 주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낙태를 수술을 받고 돌아오는 이런 사례가 이제 만연했었는데 2018년에 드디어 낙태가 합법화됩니다. 물론 이렇게 조용히 합법화된 것이 아니고 엄청난 사회적 소독과 소요 속에서 이제 양측의 대립 속에서 이제 간신의 낙태가 합법화가 됩니다. 이 사진이 바로 이제 2018년에 낙태 법안이 이제 통과되기 직전에 아일랜드 여성들이 시가 행진을 하고 이제 데모를 한 그런 사진이죠. 우리는 이제 우리의 권리를 찾겠다는 모습이고 이것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 보수주의자들의 아주 치열한 반대가 있었는데 결국은 합법화에 성공을 합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근성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굉장히 폐쇄적인 민족주의적인 정서, 이것도 이제 대단히 많이 완화가 되게 되는 것이죠. 그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영국에 대한 태도 변화예요. 아닌데 사람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식이였습니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것도 다 영국 놈 탓이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모든 것을 영국에 이제 사슬하는 이런 태도였는데 2천년대 초에 여론조사에 의하면은 아일랜드인들의 60%가 영국을 가장 잘 통하는 나라라고 이제 간주를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요소가 뭐냐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잡종화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불순하게 섞여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유지해야 한다
라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아일랜드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했지만 현재는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앞서 나갔고 민족주의 정서에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 됐습니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 취할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반일 프레임에서 벗어나 진정한 극일이 무엇인지 아일랜드의 경험을 도움 삼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민족이라고 불렀어요. 물론 이런 의식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그들의 역사는 사실 우리보다 더 슬픈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아일랜드 공화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7만 달러를 넘는 성공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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