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례를 준비하며
다시는 주례를 맡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단호히 내치지 못해 돌아오는 토요일(11월 16일) 주례의 자리에 서야한다. 수필을 쓰면서 오랫동안 글벗으로 연을 맺은 신랑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어 어물쩍 받아들인 예식으로 서울에서 거행된다. 제자들 때문에 그동안 얼추 백 번 가까이 주례의 자리에 섰었다. 그렇지만 이순의 중반부터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주례를 맡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고 실천에 옮겼다. 그 이후에는 피치 못할 한두 번을 제외하고 정중하게 사양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례를 맡아야할 자리가 아니다. 신랑과 신부가 모두 현직 선생님으로서 장남과 장녀인 까닭에 양가 모두 개혼(開婚)이다. 게다가 신랑의 아버지는 은행의 고위 간부이고, 신부 아버지는 중견기업 대표이다. 그런 까닭에 주례를 맡아줄 사람이 즐비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촌구석에 사는 내게 주례를 맡기는 내막이 엄청 궁금하다. 시시콜콜한 사정을 구태여 챙겨봐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기쁜 마음으로 집례자(執禮者)로서 의무와 정성을 다해 예식을 이끌어야 할 책무가 지금 내게 지워진 짐이다.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주례를 앞두면 넌짓넌짓 준비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이나 심리적인 부담 때문에 편편치 않아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 꼴이다. 우선 주례사를 어떤 내용으로 구성할 것인지 생각하여 예식 전 두 주일 정도 전까지는 준비하여 숙지해야한다. 그것도 지나치게 길거나 짧으면 낭패스럽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주례사는 십 분에서 십오 분 사이에 소화할 수 있어야 무리가 없다. 한편 준비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는 일이다. 결혼식 당일 이발을 하면 너무 티가 나는 까닭에 며칠 전에 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런 이유에서 이번 결혼식엔 일주일 전인 지난 토요일(11월 11일)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손질했다. 그러고 나서 결혼식 당일 아침에 이발소에 들려 드라이라도 하면 금상첨화이다. 또한 주례를 설 때마다 새 구두를 사서 신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미 신던 구두일 경우 아무리 바빠도 깨끗이 닦아서 정갈한 모양새를 갖추는 게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오늘(11월 13일) 결혼식 당일 신을 구두를 수선소에 가지가 가서 손을 보고 깨끗이 닦아 신발장에 모셔 두었다.
아내와 함께 옷장을 뒤졌다. 예식장에 입고 갈 양복이며 넥타이를 비롯해 와이셔츠를 점검했다. 물론 속옷이나 양말 따위를 들춰보니 마침 새것이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터를 물러나 집안에서 구들직장 노릇을 한지 일곱 해째 때문이었을 게다. 색깔이나 줄무늬가 있는 와이셔츠는 당장 꺼내 입고 나서도 새것이나 다름없이 말끔했다. 그런데 유독 흰 와이셔츠는 오랫동안 입지 않고 방치해둔 때문일까. 목 부분이 누렇게 변색되어 주례의 자리에 오르며 입으려 생각하니 께름칙했다. 성스러운 예식 자리의 집례자로서 정갈해야 한다는 뜻에서 새것을 하나 구입해 모셔 놓았다.
예식의 진행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사회자가 이끄는 대로 따르면 만사형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따금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사소한 사고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사회자의 미숙으로 일부 내용의 순서가 뒤바뀌거나 아예 빠뜨리고 진행해서 바로 잡아야 하는 경우가 돌발한다. 이럴 경우 어떻게 어떤 순간에 끼어들어 매끄럽게 진행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처럼 오지랖 넓게 주례로서 당일 예식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따위의 공연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하기야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지켜볼 하객이 거의 없기에 공연한 노파심이며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례의 자리에 오르면 작은 험이나 실수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걱정이 따르게 마련이다.
주례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하객에 대한 느낌은 별로다. 진지하게 주례사를 하는데 제대로 듣는 사람은 기껏해야 신랑 신부와 양가의 혼주뿐이다. 주례가 집례(執禮)를 하는 동안 소곤거리거나 껄껄대는 만무방 같이 방자한 낯선 모습, 식장 안팎을 마구 오가며 눈치 없이 방약무인으로 떠들어대는 무례한 행동거지는 예의에 한참 동떨어진 망동(妄動)에 가깝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주례사가 필요한 것인지 자괴감을 느꼈던 적이 적지 않다. 그래서 앞으로 혼례는 양가의 가족과 가까운 붙임붙이 몇몇만 초대되어 진정한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문화가 뿌리 내린다면 여북이나 좋을까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입때까지 수없이 경험했던 주례 중에 특별한 몇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나는 신설학과의 창설교수(founder)였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첫 주례는 1회 졸업생이었다. 재학시절 학회장을 하던 G군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얼결에 주례를 떠맡는 촌극이 벌어졌다. 전혀 준비 없이 도깨비에 홀린 듯 창졸간에 등 떠밀려 주례의 자리에 올라가 정신없이 허둥대다 초주검이 돼 내려왔다. 혼례를 망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회상해도 등에 진땀이 날 정도이다. 첫 주례 이전의 일이었다. 첫 주례를 맡았던 G군의 동기인 K군이 학훈장교(ROTC)로 임관 직후 주례를 부탁해 왔다. 내 나이를 생각할 때 어불성설이었다. 정중히 사양하며 훗날 자녀들의 혼례에는 필요하다면 주례를 맡겠다는 말빚을 지는 약속을 얼결에 해버렸다. 그렇게 서른 해 전쯤에 무심코 던졌던 말갈망을 위하여 몇 해 전에 그 제자의 딸 혼례에 주례를 맡았던 경험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서울이나 대전을 비롯해서 부산에 뿌리내린 친구들의 자녀 결혼식에 하객이 아닌 주례의 자리에 섰던 경험이 이채롭게 회억된다.
단골 주유소 사장과 면을 트고 수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 분이 어딘가에서 내가 주례를 하던 모습을 지켜봤더란다. 게다가 지역 신문에 두 해 가까이 연재했던 나의 기명(記名) 칼럼을 빠짐없이 읽었다고 했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지내던 어느 날 주유소에 들렸더니 반갑게 대하며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의례적 인사 뒤에 쭈뼛쭈뼛 아들 혼례에 주례를 부탁했다. 아들은 현직 전문의(專門醫)로서 은사나 지인들이 즐비할 터인데 참으로 엉뚱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여러 날 간곡하게 청을 거듭해 결국 받아들였었다. 예식장에 입장한 신부 중에 예쁘지 않거나 눈부시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주례의 자리에서 언뜻 살폈던 신부 중에서 그 댁의 며느리는 단연 으뜸의 미인이었다. 지역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 왕좌를 차지했다던 풍문은 결단코 명불허전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번이 내가 맡는 주례의 마지막일 게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어느 누가 정중하게 청해도 완곡하게 사양할 각오이다. 이런 관점에서 더더욱 정성을 다해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며 ‘모범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보람되고 존경받는 삶을 누리길 기원한다.’는 당부를 주례사의 맺음말로 들려줄 참이다.
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첫댓글 각종 출판회 행사에서 교수님의
축사를 들을때마다 가슴에 새겨 왔었는데
결혼식 주례사도 기회가 되면 듣고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