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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남북학자,
발해유적 첫 공동발굴
남북한의 역사-고고학자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만나, 분단 후 처음으로 잃
어버린 우리 민족사 발굴에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1천년 전 발해 유적지에서
잃어버린 민족사의 고리를 연결해 줄
중요 문화재를 발굴, 첫 개가를 올렸다.
조선일보와 대륙연구소, 문화방송 발해
유적 발굴조사단은 1993년 5월 27일
러시아 우스리스크시 교외의 코르사콥카
발해사원에서 불황과 연꽃문양이 새겨진
발해 수막새기와의 완형을 발굴했다.
발굴된 수막새의 문양은 고구려의
수막새 문양을 대표하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배치를 그대로
전수받고 있어,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
을 계승-발전한 우리민족 국가임을
입증하는 실물 사료가 되고 있다.
발굴조사단은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
되는 이 수막새모양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통을 이었으며, 또한 통일신라와 친연
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의미
를 높이 평가했다.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한 발해
지역공동발굴작업으로 기록된 이번
만남은 러시아 극동역사 고고민속학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남북한 발굴단이
연해주 발해유적지에서 별도 지역을
선정, 발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2015년 영국 옥스퍼드대
785년만에 첫 여성 총장 지명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1230년 총장 제도를 도입한 지 78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총장이 탄생했다. 이 대학 창학은 1096년으로 알려져 있다.
27일(현지 시각) 옥스퍼드대 총장선출위원회는 테러리즘을 전공한 정치학자인 루이스 리처드슨(57·사진) 세인트앤드루스대 총장을 임기 7년의 새 총장으로 지명했다. 총장 선출위는 “교육자이자 학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인물”이라고 했다. 리처드슨은 외국인(아일랜드인)이고, 과거 옥스퍼드대와 아무 인연이 없다는 점에서도 파격적 인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년 1월 취임한다.
미국에서 대학 총장을 ‘프레지던트(president)’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영국에서는 ‘바이스 챈슬러(vice chancellor)’라고 한다. ‘챈슬러’는 재단 이사장 격으로서 명예직에 가깝다. 리처드슨은 옥스퍼드대의 제297대 ‘바이스 챈슬러’이다. 296대까지는 예외 없이 남성이었다.
그는 총장에 지명된 소감으로 “엄청난 영광이다. 옥스퍼드를 세계 최고의 연구·교육기관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입학 과정을 더 균형 있게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가난한 학생들을 더 많이 받아들이겠다고 시사한 것이다. 리처드슨의 부모는 물론 6명인 그의 형제·자매 대부분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내 인생이 남다를 수 있었던 건 교육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린 기회를 다른 사람들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큰 관심사”라고 했다.
그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대 역사학과를 나왔다. 국제로터리클럽이 주는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가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됐고, 하버드대 래드클리프고등연구소(RIAS) 소장도 지냈다. 2009년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대에서 이 학교 사상 첫 여성 총장으로 취임해 근무해왔다.
저서로는 9·11 테러를 분석한 ‘테러리스트들이 원하는 것’이 유명하다. 테러리즘에 관심을 가진 이유에 대해 그는 “아일랜드인으로서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왜 학살을 자행하는 조직에 가담하는지 흥미로웠다”고 했다.
그는 연구뿐 아니라 열정적 강의로도 정평이 나 있다. 하버드대에서 뛰어난 학부 강의를 하는 교수에게 주는 ‘레빈슨상(Levenson Prize)’ 수상자이고, 미국정치학회(APSA)가 주는 ‘우수 강의상’도 여러 번 받았다. 남편은 의사이며 세 자녀가 있다.
▶2015년 TV아사히 구로야나기씨,
토크쇼 혼자 1만회 진행… 세계 신기록
▶2014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고양종합 터미 널에서 불이 나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
▶2014년 다음-카카오톡 합병
▶2013년 대한민국의 예술 경영인
김주호 사 망.
▶2012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스웨덴 의 가수 로린이 유포리어를 불러
우승을 차지하다.
▶2011 년 보스니아 내전의 전범 라트
코들라 디치가 세르비아에서 체포되었다.
▶2010년 자메이카군경과, 무장된 마약
갱단 과의 유혈 충돌로 60여명이 사망했다.
▶2010년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곽지균 사 망.
▶2009년 한국 철학계의 태두(泰斗)
김태길 전(前)학술원회장 별세
▶2008년 5월6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박종구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과
마우로 델 암브로죠 스위스 연방 교육
연구청장 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스위스연방 각의 간의 과학 및 기술분야
의 협력에 관한 협정"이, 발호에 필요한
국내절차가 완료되 었음을 상호 통보한
날인 2008년 5월 26일에 발효되 었다.
▶2008년 중국 동부와 남부에서 시작된
심한 홍수로 148명이 사망하고 130만
명이 대피하는 등이재민이 발생하다.
▶ 2008년 미국의 영화감독,
배우 시드니 폴락 사망.
▶ 2008년 일본의 아나운서
가와다 아코 사망.
▶2007년 전도연, 한국 여배우 사상
첫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2006년 안젤리나 졸리-브래드 피트 커플
아프리카서 득녀
▶2006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시 부근
리히터 규모 6.3 강진 발생
▶2006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대한 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
차관 이 미국은 한국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청와대가 일본
정부에 응분의 조치 를취할 것을요구하다
▶2005년 국보 1호인 숭례문 주변에
조성된 숭례문광장 준공
서울 남대문(숭례문) 주변에 녹색광장 2480평을 조성하는 공사가 완공돼 27일 개장했다.
또 남대문 주변 도로에 횡단보도가 5곳 만들어져, 걸어서 이 광장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시는 25일 잔디와 나무를 심어 만든 이 광장을 ‘숭례문 광장’으로 이름짓고, 27일 개방한다고 밝혔다. 5곳의 횡단보도는 숭례문 광장에서 남대문시장, 북창동, 염천교 쪽으로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서울시 관계자는 “작년 5월 시청 앞 서울광장 조성, 올해 4월 20일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 신설에 이어 숭례문 광장이 만들어짐으로써 서울의 중심 가로인 광화문~서울광장~숭례문~서울역에 이르는 보행벨트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건조된 숭례문은 서울에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지만, 1899년 전차(電車) 노선공사로 주변 성곽이 철거되고, 일제시대 도시계획에 따라 주변이 훼손된 이후 도로 한가운데에서 섬처럼 고립돼 접근이 차단돼 왔다.
서울시는 개방에 맞춰 숭례문의 야간 조명시설을 개선, 더욱 또렷한 단청과 용마루 등을 볼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한국 슬로바키아 정상회담
▶2005년 한,중,일 중앙은행 총재
통화스와프 계약체결식
▶2004년 FC 포르투, 유럽축구연맹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서 우승
▶2004년 제1차 남북 장성급 군사 회담이
금 강산에서 열리다
▶2003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창건 300주년
5월 27일로 시(市) 창건 300주년을 맞은 러시아 제2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소요 예산만 15억달러(약 1조8000억원)가 투입됐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주(州) 주정부 주도 하에 지난달 23일 축제개막 선언과 더불어 공식행사는 6월 1일까지 열흘 동안 펼쳤지만, 시(市)는 연중 축하공연과 다채로운 행사로 국민 축제를 만들어 갔다. 각종 행사들은 2003년 1월 1일부터 시작됐으며 12월 31일까지 계속 되었다.
러시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300주년 기념 축제를 러시아가 아닌 유럽인의 축제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길거리 축제에서 정상회담까지 국민과 대통령이 모두 참석하는 국민행사로 이끌었다. 100여개 극장에서 동시 축하공연이 시작됐으며, 국제 영화제가 펼쳐졌다. 네바강의 요트 경기, 과학의 날 행사, 표트르 대제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으며, 네바강상 청동 기마상과 성 에카테리나 성당이 새로 단장돼 공개됐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러시아·프랑스 전쟁기념관(1812년방)과 제정 러시아 권위의 상징이었던 호박방은 완벽하게 재현돼 일반에 공개됐다.
지난 27일에는 일본인 야마가토 히로의 레이저쇼가 네바강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대상으로 펼쳐졌다. 달리기 축제, 콘서트 등 체육과 예술행사들이 줄지어 개최되었다.
5월 31일엔 러시아·EU(유럽연합) 정상회담, 6월 1일에는 미·러 정상회담이 열려 축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등 45개국 정상들이 몰려들어 정상 간 외교전이 펼쳐졌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는 1703년 5월 27일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를 건설한 것이 시초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승리 후 발트해(海) 진출을 위해 1712년 제정(帝政) 러시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서구 문명을 도입, 여느 유럽도시 못지않는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네바강 자연과 어울리는 경관은 유럽 최고 관광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1년 러시아 민주화 과정에서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 지명을 되찾았다. 레닌 혁명 다음해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시민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로 기억하고 있다.
시인 푸슈킨이 ‘유럽을 향해 열린 창’으로 묘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탄생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900일 동안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바람에 8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제2의 표트르’를 자처하는 푸틴 대통령은 표트르 대제가 그랬던 것처럼 친(親)서방 정책을 내세우며, 강한 러시아 건설의 야심을 보여왔다. 푸틴 대통령은 행정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기는 구상을 하고 있는 등 이곳을 러시아 중심지로 부각시키려는 강한 의욕을 보였다. 시민들은 ‘표트르 대제 이후 300년이 지난 지금 표트르가 환생했다’며 푸틴 대통령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제 55 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
▶2002년 타이완 여객기 추락
225명 모두사망.
▶2002년 콜롬비아 대선
무소속 우리베 당 선.
▶2001 년 최초의 한국 모터 챔피언십
자동차 경주 대회 개최.
▶2000년 정주영회장,
건설등 이사직서 사퇴
▶2000년 출판계 원로 조상원씨 별세
▶1999년 새 플라스틱 주민증 갱신
지난 1983년 일제히 갱신된 현행 주민등록증을 대체하는 새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이 1999년 5월 27일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됐다. 새 주민등록증 발급 대상자는 1999년 기준 17세 이상의 기존 주민등록증 소지자 3554만9000명과 일제 발급 기간에 새로 17세가 되는 신규자 63만8000명 등 총 3618만7000명이었다.
새 주민등록증은 가로 85.6mm, 세로 54mm, 두께 0.82mm의 신용카드 크기의 형태이다. 수록되는 항목은 사진,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발급일자, 발급기관장 등 7개로, 호주, 본적, 병역사항, 특기번호 등이 없어졌다. 종이 주민등록증은 2000년 6월 1일부터 사용이 중지됐다.
▶1991년 한국-체코 체육교류협정 체결
▶1990년 세자르 가비리아
콜롬비아 대통령으로 당선
▶1988년 평화의 댐 1단계 준공
https://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66555.html
▶1988년 전자현미경 발명한
독일의 전기공학자 루스카 사망
전자현미경 발명한 독일의 전기공학자 루스카 (Ernst August Friedrich Ruska) 독일 서 베를 린에서 사망(1906년 12월 25일 독일
하이델베르크 에서 출생~ ) 최초 전자 현미경의 설계를 포함한
전자광학에서의 업적으로 198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1931년 자기
코일이 전자 렌즈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으며 1933년 몇 개의 코일을 연이어 사용하여 최초의 전자 현미경을 만들었다.
▶1988년 미국상원,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 비준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1987년 미국-베트남, 관계정상화 합의
▶1985년 12년 만에 제8차 남북적십자
회담 참석차 북한적십자 대표 서울에 도착
▶1981년 정부 한국선원의
베트남 기항 허용
▶1980년 계엄군 광주 진입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개방 선언
▶1976년 레소토왕국의
레아부아 조나탄 수상 방한
▶1974년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내란
예비음모-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기소(2차 인혁당 사건)
▶1973년 소련, 한국인에 첫 입국 허가
▶1971년 축구 골키퍼 레프 야신 은퇴
동서냉전으로 살벌하던 1971년 5월 27일 잠시 `철의 장막`이 열렸다.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은 한 위대한 스포츠인의 은퇴를 지켜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인 10만명의 인파로 가득했다. 서유럽의 팬들도 이 날만은 주저없이 `철의 장막`을 넘었다. 구 소련의 골키퍼 레프 야신은 이렇게 국경과 이념을 떠나 수많은 팬들의 축복과 아쉬움속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야신은 골키퍼의 대명사이자 전설이었다. 신의 손, 거미손, 문어발 등 뛰어난 골키퍼를 칭찬하는 수많은 별명들이 야신으로부터 비롯됐다.
야신은 1953년 23세의 늦은 나이에 모스크바 다이나모팀 골키퍼로 데뷔했다. 같은 클럽의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야신을 눈여겨보던 선배 골키퍼의 권유가 축구입문의 계기가 됐다. 야신이 지키는 골 문은 이때부터 철옹성으로 변했다. 야신은 축구 골키퍼로서 완벽한 신체조건을 구비했다. 1m 88의 키에 팔과 손가락이 유달리 길었고 반사신경이 뛰어났다. 여기에 차분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은 팀 동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데뷔 1년 뒤 국가대표로 뽑힌 야신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 금메달과 1960년 유럽선수권 우승컵을 소련에 바쳤다. 1963년엔 골키퍼로선 유일무이하게 `올해의 유럽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월드컵에서도 1958년 스웨덴대회, 1966년 영국대회, 1970년 멕시코대회에 3연속 출전하며 수많은 명장면을 남겼다. 이런 야신에게 소련 정부는 최고의 훈장인 레닌상을 수여했다. 야신은 현역 시절 150개의 페널티킥을 막아냈고, 국가대표로 뛴 78경기에서 70골만을 허용했다.
야신은 199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월드컵과 함께 영원한 전설로 살아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1994년 미국월드컵부터 최고의 골키퍼에게는 ‘야신상’을 수여하고 있다. 야신은 1999년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체육인`에 뽑히기도 했다.
▶1969년 티우 월남대통령 방한
▶1968년 일본 전공투 결성
▶1968년 제1차 한국-미국 국방장관 회담
워싱턴서 개최
▶1967년 경인고속도로 기공
▶1966년 민주사회당 창당준비확대대회
에서 서민호대표 김일성과 면담용의 표명
(6.3구속)
▶1966년 일본,
우리 문화재 1,326점을 반환
보물 452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청자
귀형수주·靑磁龜形水注·고려 12세기)와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문화재가 1965년 6월에 체결된 `한일문화협력협정`에 따라 한국으로 반환됐다. 1905년 이후 망국의 치욕을 안고 남의 땅에 넘어갔던 문화재 1천3백24점은 61년 만인 1966년 5월 27일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왔다. 수리를 위한 삼국신라시대의 칼2점을 제외하한 나머지 문화재들은 43개의 상자에 담겨 이날 오후3시 경복궁 국립박물관에 옮겨졌다. 일반에게는 7월에 공개됐다.
한일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돌아온 문화재는 신라 고구려시대의 도자기가 90건 97점, 고고자료 84건 3백34점, 석조미술품이 2건 3점, 한말에 수집된 도서8백52책 그리고 체신자료 20건 36점들이며 이등박문이 명치천황에게 바친 고려자기 97점도 포함돼있다.
반환된 문화재 중 대표적인 것은 보물 452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청자귀형수주·靑磁龜形水注·고려 12세기)로 연꽃 위에 거북이 앉아 있는 모양으로 약탈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귀한 자료로 평가되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도 반환되었다.
▶1964년 인도 초대 총리 네루 사망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전세계 비동맹 운동의 기수였던 자와할랄 네루 전 수상이 1964년 5월 27일 사망했다. 75세였다.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서 식물학과 지질학을 전공한 네루가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도로 돌아온 때는 1912년, 23세 때였다. 네루는 인도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인도의 현실을 자각, 인도자치획득동맹과 인도국민회의파에 가입해 인도독립을 위해 애써왔다.
인도는 전쟁이 끝나면 인도에 자치를 부여하겠다는 영국의 권유에 1차대전에 참전했으나, 전쟁이 끝나도 영국이 당초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 통치 강화법인 `롤럿 법안`을 제정하자 간디를 지도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불복종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때 네루는 전국을 순회하며 비참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인도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독립할 때까지 9차례 9년간의 감옥생활을 한 네루는 마침내 1947년 8월15일 인도가 독립해 공화국이 되자, 신생 공화국의 수상 겸 외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옥중 생활을 하던 중 홀로 된 13세 외동딸 인디라 간디에게 3년 동안 편지를 보냈는데,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세계사와 조국의 독립에 눈을 뜬 그녀 역시 인도 최초의 여성 수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63년 공화당 대통령후보에
박정희 지명
▶1961년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칭
▶1961년 최고회의 비상계엄 해제하고
경비계엄 선포
▶1960년 터키 육군의 무혈쿠데타 성공
▶1959년 서울 등 비상계엄 해제
▶1958년 미국 군표 갱신
▶1952년 파리서
구주방위공동체 조약 조인
▶1949년 칠레, 대한민국 승인
▶1946년 군정법령 70호
인신매매 금지령 공포
▶1941년 독일 최대 전함 `비스마르크호`
연합군에 의해 침몰
▶1938년 스톡홀름서
북구 5개국 중립조약 조인
▶1937년 미국 금문교 개통
1937년 5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골든게이트를 가로지르는 금문교가 개통됐다. 금문교는 1964년 뉴욕의 베러자노내로스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토목기사 스트라우스의 감독아래 1933년 착공하여 이날 개통됐다. 금문교 공사는 빠른 물살, 폭풍과 안개 등으로 많은 어려움 끝에 완공됐다. 6차선의 자동차 전용 현수교인 금문교는 2줄의 케이블에 매달려 길이 2,825m이고, 다리위의 탑의 높이는 227.5m이며, 주탑과 주탑사이의 거리가 1,280m이다. 다리의 중앙부는 해수면으로부터 81m나 되는 높이여서 다리 밑을 대형선박과 비행기도 통과 할 정도이다. 금문교는 붉은색의 교량으로 주위의 경치와 장관을 이뤄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제2회 월드컵(이탈리아) 개막
▶193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개막
▶1927년 여성운동단체 근우회 창립,
회장 김활란
1927년 5월 27일, 일제하 여성이 처한 현실을 타개할 목적으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창립대회를 열었다. 임시 집행부 초대 회장은 김활란이 맡았다.
민족주의·사회주의 양파로 분열됐던 여성운동세력이 통합을 모색한 것은 3개월 전에 창립된 신간회가 자극제가 됐다. 창립후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뒤따랐지만 이들은 교육의 성차별 철폐, 여성에 대한 봉건적 인습 타파 등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조직을 키워나갔다. 특히 부녀자·아동의 야간작업 및 시간외 작업 금지와 탁아제도 도입 등은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주장이었다. 일본조차 이들을 “조선여성운동의 최고역량을 집중하고 진용을 정비한 최고 권위 있는 여성집단”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해마다 규모가 커져 한때는 전국에 60여개 지회에 회원도 수천명까지 늘어났으나 김활란 퇴진 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득세하고 광주학생사건으로 다수의 간부가 검거·투옥되면서 침체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1923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출생
▶1917년 한강 인도교(구교) 기공식
▶1911년 미국의 제38대 부통령
(1965-1969) 험프리 출생
▶1910년 세균학 의학자
로베르트 코흐 사망
▶1906년 의병해산조칙 내림
▶1905년 러시아 발트함대,
대한해협에서 궤멸.
파도 거칠고 안개 자욱했던 1905년 5월27일 새벽, 러시아 발트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가 일본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에게 전해졌다.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를 가르는 마지막 일전, 전운이 감돌았다.
8개월 전, 중국 뤄순(旅順)을 향해 발트해 탈린을 출항한 발트함대가 대서양을 거쳐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월. 뤄순이 함락됐으니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라는 전갈이 왔다. 한반도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2만8800km나 되는 항해로 연료는 거의 떨어졌고 병사들의 몸도 지쳐있었다. 발트함대는 일본 함대가 진해만에 숨어있는 것도 모르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질러가기 위해 폭이 좁은 대한해협을 선택했다. 러시아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하는 발트함대를 파견한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동아시아를 관할하는 태평양 함대가 있었지만 뤄순과 블라디보스톡으로 나눠져 있는데다 뤄순은 일본 함대에 포위돼 있었고, ‘전함 포템킨’으로 유명한 흑해함대는 국제협정에 묶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할 수 없었다.
발트함대는 30여척도 넘는 함선으로 편성됐지만 함선은 구식이었고 병사들도 주로 농민들로 구성돼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이에비해 일본은 맹훈련을 거듭하며 다가올 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경, 포격전이 시작됐지만 속도ㆍ화력 어느것 하나 일본 함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침몰 19척에 나포 5척, 4800여명이 전사하고 6100여명이 포로가 됐다. 러시아 짜르체제 붕괴의 서막이었고 신흥 제국주의 국가 일본으로선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륙침략으로 이어지는 짧은 팽창시대의 출발이었다.
▶ 1883년 미국 브루클린 다리 개통
▶ 1871년 파리코뮌, 수립 2개월 만에 붕괴
1871년 3월 28일 사상 최초로 노동자 정부를 천명하며 파리에 수립된 파리코뮌이 2개월 만인 5월 27일 마침내 와해됐다. 프로이센군과 결탁한 부르조아 공화파의 정부군이 파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5월 21일부터 1주일이 지난 이날 페르라쉬즈 묘지에서 농성중이던 마지막 남은 200여명의 코뮌 수비대는 정부군의 총칼에 쓰러져 갔다.
블랑슈에서는 120명의 여성부대가 끝까지 저항하다 전멸했으며 살아남은 수비대도 전원 총살당했다. 마지막 `피의 일주일` 동안 발생한 사망자수는 3만에 달했고 5만명이 체포됐다. 레닌은 코뮌을 가리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낭만적 질풍노도 시대가 맞이한 찬란한 절정이었다"고 평했다.
▶ 1840년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사망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1840.5.27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한 채 사망하다
이날 카파렐리 사제는 오래 전부터 품은 생각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겼다. 수개월째 병석에 누워 있다가 임종을 맞이한 어느 음악가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성직자가 죽어가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의 굳은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어딘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이 환자에 관해서는 꽤 오래 전부터 괴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악마가 들어 있소" - 임종 당시의 한 마디
이탈리아 제노바의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한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얻은 그의 경이적인 연주 실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사제가 오늘 환자를 찾아온 주된 목적도 그것이었다. 곧 지옥으로 향할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영혼이 구제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후두 결핵을 앓고 있던 환자는 침대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음악가의 고백과 참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 때문이었을까? 사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환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 한발 한발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그저 손짓만 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물러서기는 커녕 한층 더 집요해지는 사제의 질문에 마침내 환자도 짜증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거의 들릴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 다음, 음악가는 갑자기 바이올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사제는 비명을 지르며 그 집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했다. 악마와 결탁했다는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존경받는 성직자의 증언이라서 그랬을까? 이 소문은 그간의 구구한 추측에 대한 확증으로 여겨졌으며, 아무런 검증이나 의심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그 음악가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던 것일까? 그런 소문이 근거 없음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임종의 자리에서까지 뜬소문에 대한 추궁을 받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너희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다고 말해주마 하는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소문이 퍼지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 그에게는 아무 상관없었으리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는 바로 그날, 14세 된 아들이 혼자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도시 니스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1840년 5월 27일, 오후 5시 경의 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해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서나 반년이면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고, 파가니니는 열네 살인 1795년에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동안 궁정 악사로 일하던 파가니니는 1810년부터 본격적인 연주 여행에 나섰으며, 이탈리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를 순회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파가니니는 고난이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유명해졌지만, 일각에서는 진지한 음악이 아니라 경박한 잔재주를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하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는가 하면, 현을 한두 개만 걸고 연주하고,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는 등, 그의 놀라운 실력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처음에는 그의 어마어마한 명성을 반신반의하던 관객들조차도 한두 곡만 듣고 나면 모조리 그의 팬이 되어 열광할 정도였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으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의 모습(1832)
파가니니의 연주화를 알리는 포스터(1831).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광의 도가니 였다. 관객들이 실신했고, 악마와 마녀가 춤을 춘다는 등 다양한 입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한 재산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결국 사망한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야박한 데가 있다.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났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로선 알 수 없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놀라운 남국의 마법사의 연주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해진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연주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명민한 이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 멈추는 순간, 파가니니는 연주를 시작한다.” (베를린 공연 직후,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중)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에 관해 논평한 어느 신문 기사 중)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사후 3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얻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평생 헛소문에 시달리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은 파가니니였지만, 죽음조차도 그에게 곧바로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생전의 악평 때문에 사후에는 더욱 매몰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당일, 그러니까 1840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그의 사후 수난은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증언을 파가니니에게서 억지로 끌어낸 카파렐리 사제는 니스의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전했고, 교회 측에서는 곧바로 이 유명한 음악가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치던 조종을 중도에 모두 멈추도록 지시했다.
파가니니는 고향인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그의 후원자인 디 체솔레 백작은 긴 여행 동안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를 시켜 그 음악가의 시신을 방부 처리했다. 하지만 교회 측의 반대로 파가니니의 시신은 제노바로 가지 못하고 수년간 타향에 머물러 있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신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자, 백작은 이 불운한 음악가의 유해를 자기 소유인 어느 작은 섬의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후 4년 뒤인 1844년에야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로 돌아갔지만, 역시 교회 측의 반대로 인해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지하 납골당에만 임시로 안치될 수밖에 없었다. 파가니니의 시신이 영구 거처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6년의 일이었다. 아들 아킬레가 수없이 청원과 뇌물 공세를 펼친 끝에, 파가니니의 시신은 마침내 지하 납골당에서 나와 교회 묘지에 정식으로 묻힐 수 있었다.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던 14세의 소년은 이미 50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사망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대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 1703년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탄생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는 1703년 5월 27일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를 건설한 것이 시초가 됐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승리 후 발트해 진출을 위해 1712년 제정(帝政)러시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서구 문명을 도입, 여느 유럽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1년 러시아 민주화 과정에서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 지명을 되찾았다. 레닌 혁명 다음해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시민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로 기억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900일 동안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바람에 8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564년 프랑스 종교개혁가 칼뱅 사망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1564년 5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무덤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추모객들을 위해 단지 `J.C`라는 약자만 새겨놓았을 뿐이다.
프랑스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초상화.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사제를 지망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부했으나, 부친의 강권에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는 중세의 여느 부르조아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귀족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종교개혁운동에 본격 나선 그에게 최초의 시련이 닥쳐온 것은 24세 때인 1533년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니콜라스 콥의 이름으로 발표된 한 연설이 문제가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로 그에게 체포명령이 떨어졌다.
바젤에서 숨어 지내던 중 교회를 초기 사도 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것을 다짐하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며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그는 박해와 도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내다가 제네바로 초빙돼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칼뱅은 제도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중심으로 바꾸었으며, 교회 안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다. 칼뱅의 사상은 제네바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프랑스의 위그노파, 네덜란드의 고이센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청교도 등 여러 파를 탄생시켰다.
https://youtu.be/7JTQsgXOEc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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