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혁의 「소리」감상 / 김기택
소리
김재혁(1959~ )
산책로를 걷다 보면
여름의 주머니를 뒤지는 소리들,
딱따구리는 제 골머리가 터지도록
나무의 속에다 딱딱한 공허를 털어놓고
날아가던 구름은 귀를 열고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나무들은 발가락으로 땅속을 헤집고
안 보는 듯 슬쩍 남의 허벅지를 훔쳐본다,
가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낙엽송들,
땀에 묻어나는 진하게 꿍친 생각들,
민들레는 고양이 눈을 노랗게 뜨고
입을 오므려 동그랗게 야옹 소리를 내고
돌멩이는 바람에 몸을 비비며
발꿈치를 돋운다.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
무수한 소리들 사이로 전류가 흘러
세상의 정적에 불이 들어온다,
수첩을 꺼내 든 나무들 소리를 끼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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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호젓하게 산책길을 걷는데도 시인은 몹시 바쁘고 흥겨운가 보다. 걱정거리와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어린이가 되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 산책자는 어린이처럼 온몸이 감각 덩어리가 된다. 오감은 주변의 모든 풍경을 빨판처럼 빨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러면 온몸은 사물의 작은 움직임에도 활발하게 반응하면서 함께 놀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무나 풀, 구름과 새는 비밀을 가득 품은 주머니가 되어 손을 넣어 뒤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에 의하면, 발로 걷는 것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이다. 걸으면 침묵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풍요로운 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귀를 한껏 열면 고요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서로 어울리며 놀고 있는가. 이 소리의 축제에서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조차 소음이 아니라 흥을 돋우는 전류가 되어 산책로를 환히 밝힌다. 이 감각의 향연, 호기심의 축제에서 어찌 시가 나오지 않으랴.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몫을 하고 싶어한다’고 니체도 말하지 않았는가.
김기택 (시인, 경희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