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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사람됨과 진로>-한일수 | |
작성자 : 김수복 | 2012-08-06 11:41:21 조회: 62 |
<안철수의 사람됨과 진로>-한일수 “한일수님이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글 내용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읽어보셔도 손해는 없을 것 같다.” <안철수의 사람됨>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3&uid=131854 안철수의 ‘낯선 단정함’, 구체제 종식시킬까 (진실의길 / 편집부 / 2012-08-01)
<안철수의 생각>이 사실상 그의 출마 선언이라고 본다. 여러 조사에서 안철수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7월 30일자 한겨레신문 조사에서 안철수는 48.8%의 지지를 얻어 박근혜를 3.9% 앞서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출마를 말리는 사람이 출마하라는 사람보다 많다. 출마 찬성은 41.3%인데, 반대는 46.6%나 된다. 정치 전문가의 견해도 엇갈린다. 강준만처럼 적극적인 환영파도 있지만,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도전이라거나 정당정치에 대한 부정, 현실정치에 대한 왜곡이란 시각도 있다. 정당은 더 심하다. 새누리당은 야당 공약 짜깁기라는 험담과 '위험한 아마추어'란 말로 그를 폄하하고 있고, 민주당 주자들은 문재인을 제외하곤 장막 뒤에서 나오라며 부정적 평가 일색이다. 이런 이중적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추후에 따져볼 것이지만, 그가 기존의 정치문법 안에서는 독해불가한 정치인이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을 쓰면서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안철수와 기존 정치문법 사이의 간극을 과연 어떤 단어로 표현할 것인가였다. 필자는 ‘낯섬’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정확한 국어는 낯설음이다. 낯설음 대신 낯섬을 택한 이유는 안철수의 차별성은 낯설음과 단정함이 결합한 형태이기 때문에, 낯설음이란 단어가 갖는 부정적 의미를 의미론적으로나 맥락상(context) 어떤 쪽으로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낯설다'란 개념이 문학적, 철학적으로 의미 있게 쓰인 것은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를 예술의 중심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예술의 목적은, 사물을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며, 예술의 여러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게 하여, 지각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문학과 예술은 결국 새로운 형식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환기시키고, 사물에 대한 싱싱한 감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말과 같다. 나중에 브레히트의 소격이론으로 연결되는 이 “낯설게 하기”란 명제는 20세기 문학과 예술이론에 큰 반향을 주었다. 나는 앞으로 그가 낯선 까닭을 살펴보려고 하거니와, 소위 정치평론가들이나 기존 정당들이 안철수가 낯설고 두려운 까닭은 그가 기성정치의 문법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래서 기성정치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글머리에 밝혀두고 간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적이다. 인간은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반기는 습성을 본능으로 학습했다. 그러나 모든 익숙함은 최종적으로 환멸을 만들어 낸다. 정치체제 또한 그러하다. 하나의 체제가 더 이상 구성원 대다수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할 때, 우리는 그 체제를 구체제라 부른다. 안철수는 이미 구체제가 되어버린 이른바 ‘87체제’를 무너뜨리라는 국민의 바람 속에서 태어난 정치인이다. 따라서 과거의 정치문법과 다르고, 관행과도 다르며, 정치 행위(퍼포먼스)와도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철수는 우리 정치가 처음 만나는,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드물 정치 지도자이다. 그는 지역감정에 초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고, 과거의 정치적 채무에 발목이 잡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며, 유권자들에게 구질구질한 현재에서 벗어나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겠구나란 희망을 주는데 최적화된 후보이다. 심지어 빈부격차와 계급갈등, 남북문제 등의 함정도 그를 다치게 하기 힘들다. 한국정치라는 진흙탕 속에서 이런 연꽃이 피어나다니. 바로 그 감탄과 차별성이 그에게 박근혜를 능가하는 지지를 안겨다 주는 이유다. 그의 '낯섬'은 2장에서 살펴볼 그의 특질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어서, 글의 전개상 그의 특질들을 먼저 살피고 다시 돌아와 그의 낯섬이 어떻게 그의 장점이 되는지, 소위 정치 전문가들이 쌍지팡이를 들고 반대하는 그의 정치적 퍼포먼스와 출마선언 등에 왜 유권자들이 열광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생각은 세 가지 좌표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유교적 관점이다.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의대에 진학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평생 존대를 했다는 어머님의 일화나, 매우 겸손한 언행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청춘콘서트' 등의 행동은 그가 유교적 교양과 배움 속에서 성장했음을 드러낸다. 그에게는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이 흐르고, 동시대인에 대한 공감과 소통의 진정성이 있다. 그의 올바름은 본질적으로 정(政)은 정(正)이라는 유교적 가르침과 통한다. 그의 <생각> 중에서 가장 강한 서술어를 사용하는 부분은 정의에 대해 언급할 때이다. “반드시”, “꼭”, “필사적으로”란 강렬한 형용어는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그 정의는 서양의 전형적인 정의-반드시 복수를 동반하거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식의 정의와 다른 형태의 정의이다. 그의 정의는 올바름이 이 땅 위에 구현될 때 모든 것이 잘 다스려진다는, 인의의 정치를 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의이다. 공자와 맹자가 이천년 전부터 강조해온 제왕의 덕목이다. 두 번째 좌표는 과정을 중시하는 존재론적 사고이다. 그의 도저한 성실함은 자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런 성실함은 그의 삶을 관통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를 상호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런 삶을 통해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목적보다는 관계의 조화를 추구하는 안철수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다. 예컨대 박근혜가 5.16을 구국의 결단이며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때, 안철수는 '배워서 남 주려고' 공부하러 CEO 자리에서 떠났다고 말한다. 과거에 붙들려 한풀이 하겠다는 자와 스스로를 내던져 당신을 돕겠다는 자가 싸우면, 구경꾼들은 대체 누구를 응원할 것 같은가. 마지막으로, 그는 관계를 중시하는 네트워크형(網形) 인간으로 강한 도덕적 품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다.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성할 때 다양한 방법이 있다. 수직적 관계도 있고 수평적 관계도 있으며 다자간 상호 연결 방식도 있다. 그는 단연 다자간 연결 방식적 인간이다. 다자간 연결방식은 지금 인터넷망의 구성원리인데, 일부에서 연결이 차단된다고 해도 다른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 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네트워크형 인간은 한 가지 이상의 목적으로 가지고 일을 하게 되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누구나 동의하는 바이겠지만 그는 도덕적 바탕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도덕성은 앞에서 살펴본 특질들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그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의 도덕성은 사회에 대한 봉사와 헌신으로 표현되는 바, 이는 고래로 모든 성공한 자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는 이 봉사와 헌신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정치인이다.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번역하는 '클래식(classic)'은 '클라시쿠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로마는 세금을 거두기 위해 여섯 단계로 시민을 구분했는데, 클라시쿠스는 이 중 최상위계급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클라시쿠스는 함대, 선단을 의미하는 클라시스에서 온 말로써, 클라시쿠스란 국가에 전쟁이 나면 여러 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기부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라는 일본 사상가는 이 점에 착안하여 나라에 전쟁이 나면 선단을 기부하는 클라시쿠스처럼 인생에 큰 위기가 왔을 때, 함대처럼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바로 '고전'이라는 재미있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안철수가 여러 번의 기부와 헌신을 통해 국가에 대규모 함대를 기부했다는 사실에 반론을 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살펴봤다. 그런 그가 왜 낯선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를 곰곰이 되새겨 봐도 낯설 까닭이 없다. 그가 낯섬의 대상이 된 까닭은 정치를 하겠다는, 그것도 국회의원도 서울시장도 아닌 대통령을 해보겠다는 뚱딴지같은 선언 때문이다. 선례가 없지는 않다. 그처럼 기업 CEO 출신으로 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정주영 정몽준 문국현 등의 선행주자들이 있었고, 더 멀리는 인촌 김성수나 쌍용을 만든 성곡 김성곤, 제철보국의 박태준 등이 기업가로도 유명한 정치인이다. 불발에 그쳤지만 대우 회장 김우중도 정치를 해보려다가 김영삼에 밉보여 회사는 망하고 결국 프랑스로 쫓겨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정치는 안철수와 같은 기업가 출신들이 이미 여러 번 데뷔한 곳이고, 사실 동서고금을 통 털어서 정치와 사업이 분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기업인들 중에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한 사람도 이미 여럿 있었다. 그런데 왜 안철수는 이다지도 낯설고 익숙해지지 않은가.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기존의 정치문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식의 정치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기존 정당을 불신하며, 보스를 섬기지도 스스로 보스를 자처하지도 않고, 기존의 관행적인 정치 퍼포먼스를 거부하는 정치인이다. 그러면서 대단한 정치적 파워를 갖고 있고 그것을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이미 구사해서 성공시켰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이다. 바로 이 점이 한국 정치에서 안철수란 존재를 낯설게 만드는 이유의 전부다. 나는 강준만의 글을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언론에 소개된 그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진영논리에 빠져서 도무지 민생을 돌볼 정도의 타협도 이뤄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강준만은 이를 ‘증오의 정치’라고 불렀는데, 나로서는 ‘멍청이들의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그것이 국리민복에 모기눈물 만큼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인들이 존경을 받는 곳이 드물지만, 한국처럼 정치가 조롱당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한국 정치는 진보했지만, 그 진보는 자생적이거나 스스로 가진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희생에 힘입은 것들이었다. 한국 사회의 비약적 발전은 구체제적 정치의 후진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이명박이 국가를 수익모델 삼아 '삥'을 뜯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 정치가 더 이상 이런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다간 나라가 거덜나겠구나라고 느낀 일군의 유권자들이 있다. 야당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한편에는 이명박보다 더 심할 것으로 보이는 박근혜가 있다.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권자, 특히 20-40대 유권자들이 안철수를 찾아낸 것이다.
안철수는 '발견된 존재'이며, 직접 민주주의 방식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간접민주주의 방식인 정당의 존재가 부정당했기 때문에, 안철수가 추대된 것이다. 안철수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이 발견한 것이지, 안철수 스스로가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만, 소위 '안철수 현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른바 안철수식 정치의 낯섬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정당정치 외곽에서 평지돌출한 자이며, 자기들만의 당리당략에 빠져 국가와 국민을 돌보지 못하는 구체제적 양당 정치를 불신하는 유권자들이 선택한 자이다. 기존의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에 신물을 낸 유권자들이 불러낸 후보더러, 너는 왜 우리 식의 관행에 따르지 않느냐란 불평을 해봤댔자 소용없는 일이다. 안철수는 여러 번 '구체제'란 말을 쓰고 있는데, 구체제란 극복 대상이지 승계 대상이 아니다.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는 우리의 합의에 따라 보편적인 정치 형태로 굳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스스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정당정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 일정한 유권자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안철수의 낯섬은 기존 정치의 시각에서만 그런 것이고, 새로운 정치의 시각에서 볼 때, 구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각으로 볼 때는 용납할 수 있을 정도의 범위 안에 있다. 물론 매번 새로운 인물을 야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고 이를 흔들어 떨어뜨려서 죽으면 할 수 없고 안 죽으면 샤먼으로 쓰던 고대 원시인들처럼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내 생각으론 이 번 한 번 정도로 그쳐야 할 것이다. 안철수의 '낯섬'은 그의 삶이 그리는 '단정함'과 맞물려 있다. 그가 얼마나 단정하고 반듯한 인간인지를 상론할 필요도 없다. 강남 아줌마들의 로망이 안철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를테면 자기 자식을 안철수처럼 키우고 싶다는 말인 줄 안다. 그러고 싶다면 우선 부모들이 안철수의 부친처럼 살아가기 바란다. 다북쑥도 삼밭에 나면 곧아진다는 것인데, 애비 에미는 거지처럼 살면서 자식은 반듯하길 바라면 쓰는가. 아무튼 그의 반듯함은 공공성, 헌신, 긍정적 미래, 공감 등의 단어들과 어울려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 자신은 진로를 결정할 때 자기는 세 가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의미가 있는 일인가, 열정을 지속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에는 도덕적 판단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길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은 길이었기에 가능하다. 대통령으로서의 결정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이긴 하다. (* 2부 이어집니다) <안철수의 진로>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3&uid=132366 ‘신사’의 한계 넘으려면 ‘공동정권’ 받아야 (진실의길 / 편집부 / 2012-08-04)
안철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신사(紳士)'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명청(明淸)시대 지배계급이었던 신사는 신(紳 : 관직 경험자)과 사(士 : 학위 소지자)로 나뉘는데, 중앙권력을 일부 위임받아 향촌을 지배했다. 나중에는 폐해가 극심하여 결국 청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까지 한다. 젠틀맨이 귀족 아래, 요먼 위의 중소지주 계급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처럼, 신사란 말도 계급적 의미로 출발한 것이다. 물론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신사로 부르기 보다는 “성공한 착한 부르주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노무현에게 단단히 덴 경험이 있어서일 것인데, 그런 분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그를 부르주아로 규정하는 순간 이미 전선이 확정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분석이 무의미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에게 안철수가 유의미한 까닭은 박근혜를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성공한 착한 부르주아라는 규정은 비록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부르주아지를 살필 자료도 많지 않고, 그렇게 규정할 경우 더 이상 그를 분석할 필요도 사라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신사'라고 규정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안철수의 가장 큰 약점은 현실 정치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생각>에서 원론과 각론에 대해 비교적 충실하게 그의 국정운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로는 정태인의 것이 발군이다(http://sisun.tistory.com/m/919). 다만 그런 구상을 과연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국회를 통해서 법을 만들거나 바꾸는 것으로 표현될 것인데, 그에겐 그럴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참조- 제1부] 안철수의 ‘낯선 단정함’, 구체제 종식시킬까 그에게 있는 것은 유권자들의 지지뿐이다. 하지만 정책을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도 없고, 증세를 담화문 발표로 결정할 수도 없다. 안철수의 정치를 비민주적이라고 말할 때,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 지적은 옳다. 정치는 선거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의 지지와 후원이 없다면 대통령은 기껏해야 행정적 절차를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탈당을 하는 시점에선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진배없어지는 까닭도 여기 있다. 그렇다고 안철수가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실험이 실패로 끝난 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본인은 정작 새로운 정당에 대해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 로마의 팽창이 제국을 요구하자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원로원을 무력화시켰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제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700년 이상 공화정을 유지했던 로마시민들에게 제정(帝政)은 로마의 페르시아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로마의 제정화를 우려한 원로원 파에 의해 암살당한다. 하지만 그가 양자로 삼은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로마를 제정으로 이끈다. 카이사르의 힘은 무장한 로마군단이었고, 옥타비아누스의 힘은 일차적으로는 무력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끈기 있고 조용히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기만한 그의 치밀한 두뇌였다. 우리 앞에는 더 이상 존속해서도 안 되고 존속할 수도 없는 ‘87체제’가 놓여 있다. 이것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빚은 체제이긴 하지만, 대단히 제한적인 시대정신만을 갖고 있다. 안철수의 말대로 하자면 복지와 정의와 평화를, 내 식대로 정의하자면 복지와 평등과 미래비전을 담을 수 없다. 게다가 박근혜는 87체제마저 퇴색시킬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1차적으로 그녀의 집권을 막고, 2차적으로 새로운 체제와 새로운 시대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신사이기만 해서는 절대로 풀 수 없는 현실 정치란 덫을 안철수는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현명한 머리가 있기를 기대한다.
그의 두 번째 문제점은 말할 것도 없이 '검증'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안철수는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국민 앞에 노출시켜 왔다. 공직에 도전하는 자에게 그가 과연 적합한 능력을 갖췄는지, 그에게 부적합한 과거는 없는지, 그의 사고의 방향과 전략은 과연 안전한 것인지를 따져 묻는 과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생략한 결과 히틀러가 튀어나왔고, 일본의 텐노[天皇]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안철수의 검증과정에서 대단한 것이 나올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글자 그대로 반듯한 사람이다. 또 살아온 인생살이가 그닥 오래되지도 않는다. 만으로 박근혜가 60세, 문재인이 59세, 손학규가 65세, 김두관이 53세다. 반면 안철수는 이제 50세(1962년생)다. 게다가 이권에 개입해서 떡고물 챙길만한 이력도 없었다. 경제범죄, 특히 재벌들의 경제범죄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더니, 2003년에 최태원 구명 청원서에 서명했다더라는 과거가 폭로됐는데, 그런 정도가 지금껏 뒤져서 나온 허물이라면 거진 '성인' 수준이다. 박근혜의 정수장학회가 장물이란 사실을 굳이 상기할 필요는 없다. 그럼 무엇을 검증하자는 이야긴가. 인맥을 공개하란 말이다. 구체적으로 찍어서 말하자면 '섀도우 캐비넷'(야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짜 두는 예비내각)을 밝히라는 말도 된다. 안철수는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어떤 자를 어떤 자리에 기용할 것인지, 어떤 집단의 연구보고서를 국정운영의 기본으로 삼을지를 밝히란 말이다. 내가 박근혜를 반대하는 이유 중 큰 부분이 바로 이 것이다. 그녀 주변에서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책을 결정할 것으로 보이는 집단이 죄다 70년대 박정희 시대 인물이라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김영삼은 “머리는 빌려도 건강을 빌릴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는데, 나중에 나라를 말아먹음으로써 중요한 것은 누구 머리를 빌릴 것인지 정도는 결정할 수 있는 머리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정치에 있어서 참모의 역할은 매우 크고 중요하다. 안철수 혼자 만기친람할 수 있는 고려적 시절도 아니고, 대한민국은 안 교수의 말마따나 세계 11위권의 나라다. 누구를 등용하고 누구의 조언을 들으며 나라를 운영할 것인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런 인재풀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럴 기회가 없지 않았는가. 알려진 그의 측근으로는 법륜스님, 유민영 대변인, 강인철 변호사, 김호기 교수 등이다. 일설에 의하면 300명에 달한다는 그의 멘토그룹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과연 그들로 족한 것인가? 일단 대권을 잡으면 인재는 구름처럼 물려들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인재들이 인재이기는 한 것인가? 안철수의 인맥과 인재풀에 대해 조속한 시간 안에 노출과 검증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3. 잘난 안철수, 범용한 자를 용납할 것인가 안철수는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뛰어남이 오늘날 이 엄청난 인기와 지지를 불러 모은 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뛰어난 사람은 대체로 범용(汎用)한 자의 무능함 또는 보통의 능력을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회사도 “안철수연구소(이후 '안랩'으로 바뀜)”이지 않은가. 그 어렵다는 서울의대 진학에 동기 최초로 교수 발령,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 백신 개발, 안철수연구소 창립, 와튼스쿨 MBA취득, 카이스트 석좌교수, 100회에 달하는 전국 청춘콘서트 등 이 모든 것이 본인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라는 사실이 경이로울 정도다. 그러나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에게 적대적일 것이 거의 분명한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과도 불편한 동거를 해야 할 가능성이 많다. 이전 글에서 누누이 강조했지만, 정치란 분배를 결정하는 것이다. 밥그릇 싸움만큼 치열하고 저열한 것이 어디 있는가. 새누리당의 그 간의 행적을 놓고 보자면, 안철수가 제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펴고자 한 대도, 매사에 어깃장을 놓고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줄기차게 할 가능성이 많다. 마찬가지 이유로 민주당 역시 '불임정당'이란 치명적인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일정부분은 협력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민주당은 안철수당이 아니다. '러닝셔츠'의 전통과 지역토호들의 웅거지라는 점에서 민주당 역시 새누리당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에게 각자의 몫을 챙겨줄 만큼 우리나라 살림살이가 넉넉한 것도 아니고, 5년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차차기를 놓고 서로 경쟁할 잠재적인 대권주자들은 지방에서 힘을 키우며 자신의 정치적 영지 확장을 위해 애를 쓸 것이다. 세계 경제 역시 그만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런 첩첩산중을 안철수가 과연 홀로 걸을 수 있다고 보는가? 그의 경력은 훌륭하지만, 개인의 능력만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아인슈타인도 이스라엘 대통령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결국 고사했다. 과학자로 사는 것이 더 이스라엘에게 좋을 것이란 이유를 대며. 그는 누군가와 협력해서 국정을 운영해나가야 할 것인데, 그 '누구'는 안철수에 비해 '범용'한 자일 것이다. 과연 그는 일반적인 능력을 가진 자의 범용함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지적이 과하다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정치는 조직 중에서 가장 뜨거운 조직사회다. 조직은 머리수로 결정된다. 그가 갖고 있는 고고한 이미지와 뛰어난 품성과 엄청난 개인적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록 어중이떠중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지지하고 표로 그 지지를 확인시켜주는 대중이라는 점이다. 안철수는 근경보다 원경이 멋있다는 김대중을 닮았다. 김대중을 만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의 박학다식함과 경륜에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김영삼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큰일나겠구나란 생각이 들만큼 부족하고 조마조마한데, 인간적 풍미는 제법 있었다고 한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줄 때에도 김대중은 사람 앞에 앉혀 놓고 뒤로 돌아서 지갑을 꺼내 돈을 세어서 줬고(받기까지 얼마나 민망했을까), 김영삼은 지갑째 건네줬다고 한다. 김대중이 걸었던 민주화 투쟁의 길에는 열광적인 지지자가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너무나 뛰어났기에 참모그룹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을 몰랐다. 박지원이나 권노갑은 가신이자 집사이지, 참모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안철수가 비슷한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에게는 팀플레이를 해본 경험이 없다.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안은 민주당 대권주자와 권력을 나눠서 공동정권을 꾸려나가는 길뿐이다. 공동정부는 안철수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는 없지만, 안철수의 약점을 상당 부분 상쇄시킬 수 있는 대안이 된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며, 과거 민주화 투쟁 당시에도 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민주당 역시 구체제의 한계 안에 있는 정당이지만, 신당 창당을 배제한다면 민주당 말고 누구와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 민주당을 배제하고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맞지가 않고, 결국 소외되고 말 호남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누를 수 없을 것이다. 신당 창당은 보수층의 새누리당 결집을 촉발할 것이고, 결국 원내에서 극한투쟁이 상시적으로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을 고쳐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행히 친노그룹의 약진에 따라 민주당 내부에는 영남과 호남이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친노진영의 좌장이라 할 문재인도 그에게 이미 공동정부를 제안한 바가 있다. 나는 안철수와 문재인이 이 시대에 함께 나타난 것이야 말로 지독하게 지도자 복이 없는 대한민국에게 걸린 마지막 빙고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그 둘이 분노하는 지점이 동일하고(그들은 정의구현에 매우 관심이 많다), 새누리당의 정치적 확장에 반대하며, 구체제 청산에 뜻을 같이 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의지(욕심으)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등 떠밀려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 흔쾌하기 어려운 게 일반적인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공공화하고 있다. 개인의 삶을 공공의 그것으로 환치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순신의 백의종군이 아닐 수 없는데, 그간의 언술로 미뤄볼 때 두 사람 모두 자기를 앞세우기 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소함을 버릴 줄 아는 공리주의자로 보인다. 묵자의 겸애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공공선을 위해 개인을 버릴 수 있는 지도자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이명박조차 겪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문재인과 안철수가 스스로 원해서 그 자리에 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게 권력이라고 하지만, 나눌 수 있다면 구체제의 종언과 신체제의 성립이 가능해질 것이다. 안철수가 말하는 기업생태계나 새로운 사회적 협약은 결국 두 세력,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과 재벌로 대표되는 자본의 양보가 절대적이다. 이들을 길들이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현재의 야당 세력이 두고두고 집권하는 것뿐이다. 이성적 설득이나 법적 강제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 역사상 자본과 권력이 대화로 양보한 적이 있던가? 그런 환상은 집에서 혼자 있을 때나 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야권의 집권이 거듭 되어, 양보하지 않고는 어쩔 수가 없구나, 체념할 때야 비로소 새로운 사회적 협약이 맺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공동정부는 범야권의 지속적인 집권을 위해서도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다. 이 방식 안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직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인재풀이 채워질 수 있다. 양보와 협력이 기본이 되기 때문에 갈등과 투쟁을 줄일 수도 있다. 물론 잘 굴러갈 때가 그렇단 말인데, 안철수와 문재인(또는 다른 그 누구라도)이라면, 그들의 출발이 역사적 소명의식이기 때문에 기대를 걸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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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6 11:41:21 116.120.33.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