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30년대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지역으로 강제 동원됐다. 가혹한 노동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속출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나가사키(長崎) 하시마 탄광에 끌려간 600명의 조선인 중 122명이 사망했다. 후쿠오카(福岡県)현 아소 탄광에 동원된 7996명 중에서는 5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극소수였다. 이 전 관장이 기념관 건립을 고집한 이유는 하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그를 움직이게 한 계기는 진폐증(폐에 석탄가루가 쌓여 점차 굳어지는 병)이었다.
고 이 전 관장은 16살 때부터 망간을 캤고, 결국 진폐증에 걸렸다. 그는 진폐증을 노동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맞서 싸우다 조선 동포들을 알게 됐다. 다들 글자를 몰라 보상 신청을 못 하거나, 돈이 없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 전 관장은 아들과 함께 3년 동안 13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났다. 22살 때인 지난 1943년 일본에 건너온 김갑선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람을 모집한다며 마을에 일본 사람들이 잔뜩 왔다. 갓 태어난 딸을 두고 일본에 가기 싫었지만 헌병이 가족을 고문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교토(京都)부 가메오카(龜岡)시에 위치한 오타니 광산에 끌려와 텅스텐을 채굴했다. 작은 트럭 한 대 무게와 맞먹는 1톤 광차(광석 및 자재를 수송하는 차량)를 미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밥은 보리밥 한 공기가 다였다.
이씨 부자가 만난 또 다른 증언자 정갑천씨는 아소그룹 산하 아카사카 탄광에 끌려갔다. 지하 1000m 에서 석회를 캐내는 노동에 동원됐다. 정씨는 “말만 모집이지 억지로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다. 낙반과 가스 폭발사고가 자주 있었다" 고 회상했다
또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조선 사람들이 한 번에 열 명이나 사망한 적이 있었는데 땅에 개 묻듯이 묻고 끝이었다”면서 “임금은 부모님께 송금했다고 들었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거짓말이었다”
그는 해방된 뒤에도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고향에 돌아갈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 맺힌 증언과 사진은 고스란히 단바기념관에 전시됐다.
이들을 만난 뒤 고 이 전 관장은 다짐했다. ‘조선인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기념관 건립에 매진했다. ‘이곳이 내 무덤’이라는 말은 고 이 전 관장의 입버릇이 됐다. 병원 입원 대신, ‘스테로이드’를 꽂은 채 기념관을 오갔다. 가족은 아버지의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온 가족이 기념관에 매달렸다. 첫째 아들은 직장을 그만뒀다.
기념관 건립은 녹록지 않았다. 가장 고된 일은 갱도를 확장하는 일이었다. 폭 90cm, 높이 120cm의 갱도를 방문객이 들어갈 수 있는 높이 2m, 폭 2m로 늘리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 이마저도 하루 10cm 정도 진척될 뿐이었다.
교토부, 게이호쿠초 등 일본 지자체에 융자와 운영보조금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단기간 독한 약을 대량 투여한 탓에 고 이 전 관장의 진폐증은 빠르게 악화됐다.
그는 결국 기념관 개관 6년째 되던 해에 숨졌다.
일본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던 지난 5월 24일,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건립 18년째를 맞은 단바기념관을 찾았다.
교토에서 출발해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을 1시간여 달렸다. 휴대폰도 되지 않는 외진 곳. 울창한 삼나무 숲속 단바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념관은 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기록을 보관한 전시관, 실제로 조선인 광부들이 숙식했던 함바집, 갱도 체험관으로 이뤄져 있다.
입구 정면에는 함바집이 자리 잡고 있다. 함바집 내부는 캄캄했다. 변소, 식당, 침상은 구분되지 않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몸을 눕힐 공간은 길이 2m, 너비 1.5m 남짓의 평상이 다였다. 20여명이 이곳에서 칼잠을 잤다. 식사도 형편없었다. 이들은 여기서 무청, 시래기, 고사리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함바집을 나와 갱도로 들어갔다. 한여름이었지만 내부는 서늘했다. 곳곳에 노동자들을 재현한 마네킹들이 서 있었다.
허리도 펴지 못한 채 괭이로 망간을 캐내고, 차오르는 지하수를 온종일 펌프질하던 모습 그대로다. 칠흑같은 어둠 속, 소라 껍데기에 기름을 넣은 등잔불에 의지해 노역하는 노동자를 묘사한 마네킹도 있었다.
이 관장은 “마네킹이 입은 옷은 어머니가 직접 미싱을 박아 만든 것”이라며 “다리가 고장 난 인형의 바지를 입히는 것이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웃었다.
갱도 옆 공터에는 강제동원노동자상(노동자상)이 서 있었다. 이 노동자상은 지난해 8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주도로 세워졌다. 건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건립식 당일, 일본은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의 입국을 거절했다. 노동자상만 흰 천으로 가려진 채 반입됐다.
노동자상 뒤에는 진분홍색 철쭉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이 관장은 “심은 적도 없는 데다 처음 본다”면서 “노동자들의 영혼이 위로받아 피어난 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집권 뒤 부는 우경화 바람은 단바기념관에도 불어 닥쳤다. 지난 2015년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橫浜)시 주요코하마 한국총영사관에 배설물을 투척한 것으로 알려진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가 깊은 산속까지 찾아와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상이 건립된 뒤에는 넷우익(인터넷을 기반으로 국수주의 성향을 띄는 이용자)이 무단으로 단바기념관에 들어와 사진을 찍어 온라인상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강제동원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항의 전화는 비일비재했다.
[일본의 냉대와 견제보다 큰 어려움은 돈이었다]
단바기념관은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양대 노총이 기부한 돈과 연 3000명 수준의 방문객이 내는 입장료로 연명하고 있다.
이 관장은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 돈이 가장 큰 문제다. 매년 지원금을 받지 않는 이상 이곳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한해 적자가 500만엔(한화 약 5085만원) 수준이다” 라고 털어놨다
시민단체 도움은 지난 2013년 이후 중단됐다.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를 꾸려 운영비를 모금했던 KIN(지구촌동포연대) 측은 현지 사정을 몰라 앞으로도 지원 계획을 섣불리 잡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단바기념관이 받은 정부 지원금은 이명박 정부 당시 포상금 500만원이 전부다. 이 관장은 지난 2009년 9월30일 재외동포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받았다.
이마저도 기념관이 아닌 이 관장 개인에 대한 보상이었다. 지난 2009년 이 관장이 받은 국민포장.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유일한 도움이다.
[이 외에 한국 정부가 단바기념관에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현재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할 정부 차원의 ‘컨트롤 타워’는 없다. 지난 2015년 12월31일 자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 희생자 위로금 지급 등을 담당하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동위)가 폐지된 까닭이다. 이후 업무가 행정안전부 소속인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으로 이관됐으나, 소속 민관조사관은 4명에 불과하다.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일부 업무를 공공재단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에 맡긴 상태다. 추모사업도 재단이 진행하는 사업 중 하나다. 재단은 ‘단바기념관을 도울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산하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은 강제동원 지원프로그램은 따로 없지만 심사를 거쳐 지원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전문가는 단바기념관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일본 내에서 강제징용을 기억할 만한 공간을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일본 공유지 내에 있는 ‘강제동원지’ 추모비석 등은 현재 철거되거나,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단바기념관은 개인 사유지에 세워져 있어서 향후 지속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