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렌트의 비유
<연중 제33주일 강론>(2023. 11. 19.)
(마태 25,14-30)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여기서 ‘탈렌트’는 ‘재능’을 뜻합니다.
그 재능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재능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재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탈렌트를 ‘성령의 은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7-9.11.29)”
우리는 세속의 사회적 불평등을, 즉 빈부 차이, 교육 여건과
환경의 차이, 주거 여건과 환경의 차이, 정치적 여건과 환경의
차이 등을 ‘탈렌트의 차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히 악이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명백하게 ‘죄’입니다.
사회의 ‘악’을 모두 ‘탈렌트의 차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했던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탈렌트의 차이’는 그런 불평등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것처럼 ‘은사의 차이’이고 ‘직분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더 좋거나 덜 좋은 것이 없고,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없습니다.
<다섯 탈렌트가 가장 좋은 것도 아니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가 덜 좋은 것도 아닙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6-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을 땅에 숨겼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실패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만일에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으로 투자를 했다가
원금까지 잃어버렸다면?
주인은 그를 꾸짖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려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돈을 땅에 숨기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돈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쓴 것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죄’의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그 두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한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라는 자신들의
직분을 더럽혔고, 그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헤로데가
물었을 때, 그들은 미카서 5장 1절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이라고 곧바로 대답했습니다(마태 2,4-6).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 지식도, 또 그들의 직분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이 첫째 종과 둘째 종에게 한 말을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결과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맡긴 일을 잘한 것에 대한 ‘상’으로 ‘많은 일’을 맡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일’은 지상에서의 신앙생활로,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주인이 맡기겠다는 ‘많은 일’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29절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에 합당하게, 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0절의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5,13).
아무것도 안 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주님께서 주신 은총에 합당하게,
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