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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함께한 사역
빌 4:14-23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빌 4:14-23 / 그러나 여러분이 이처럼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도와주려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15)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내가 복음을 들고 여러분을 처음으로 방문했다가 마게도냐를 떠나서 다른 지방으로 갈 때 재정적 도움을 준 이들은 여러분 빌립보 교회뿐이었습니다. 다른 교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16) 내가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여러분은 물자를 보내 도와주었습니다. 17) 그러니 어찌 내가 여러분의 선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여러분의 친절한 행동으로 오히려 여러분에게 풍성한 보상이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8) 이제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습니다. 아니, 필요한 이상으로 넉넉합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여러분이 보내 준 선물로 충분히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20)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21) [추신] 그곳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여기 나와 같이 있는 형제들도 문안합니다. 22) 특히 가이사의 궁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문안합니다. 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섬긴 일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투자라고 말합니다.
너희에게 유익한 풍성한 열매(14-20)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에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헌신한 빌립보 성도들의 고귀한 정신을 더욱 귀중히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서 처음 복음을 전하고 떠날 때에 오로지 빌립보교회만이 사도를 도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사도의 필요를 알고 헌신했습니다. 이러한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서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투자는 할 수 있는 투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투자임을 성도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인 열매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투자는 분명한 영적인 성장을 가져옵니다. 바울은 사도를 향한 성도들의 섬김이 구약시대의 제사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생명을 헌신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은 십자가에서 헌신하심으로 가장 완벽하고도 완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과 완전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은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은 그들의 풍족한 가운데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형편 가운데서 헌신하였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이고, 하나님이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빌립보 성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실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는 사도의 축복이자 사도가 확실한 보증이 된 것입니다.
문안의 인사(21-23) 사도 바울은 빌립보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작별의 인사를 하는 것으로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문안 인사를 통하여서 감옥에 있지만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기쁨이 바울에게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기쁨이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성도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의 삶인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우리의 소명에 일치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살아가는 데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역에 쓰임 받도록 주신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능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삶
빌 4:14-23 / 서명성 목사
교회에서 헌금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헌금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헌금을 자기 주머니에서 자기 돈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낸 헌금으로 목회자의 생활비를 충당하거나 교회 운영을 위한 경상비를 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선교헌금이나 감사헌금이나 건축헌금으로 전용하여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경적인 헌금관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했는가는 그가 어떤 직분을 가졌고 어떤 업적으로 가졌느냐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바른 헌금 생활은 건전한 신앙생활의 중요한 척도 중의 하나입니다. 헌금은 사람을 보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헌금을 드린다면 자기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때 헌금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입니다.
본문은 빌립보교회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도움과 후원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함께 마지막 문안 인사와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을 후원했던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칭찬을 듣고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로마 성도들로부터 문안 인사를 받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확진되는 어려운 시기에 있지만 빌립보 교회와 같이 마음을 다한 헌신을 통하여 섬기는 자들도 기쁘고 섬김을 받는 자들도 기뻐하고 궁극적으로 그 헌신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후원에 대한 칭찬(14-16절)
바울은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워지지 않는 극단적인 궁핍과 모든 필요가 넘치도록 채워지는 극단적인 풍부를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다시 말하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능력을 받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나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다는 그의 말이 혹시 빌립보 교우들이 보낸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그다지 감사할 것 없다는 식으로 잘못 전달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선물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잘하였도다’에서 ‘잘’이라는 부사는 ‘아름답게’, ‘멋지게’, ‘선하게’등의 뜻을 가집니다. 이는 영적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도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바울의 형편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선물을 보내 준 것을 자신의 괴로움에 동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괴로움’으로 번역된 단어는 ‘핍박’, ‘고통’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선교 사역 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어려움들이라기보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상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헌금을 보낸 것을 바울은 자기의 괴로움에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이 호칭은 빌립보인들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 아닌 빌립보에 살던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을 부르던 품격 높은 호칭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보여 준 재정적 후원과 헌신에 대해 감사와 기쁨을 표합니다. “너희도 알거니와”는 의미상으로‘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빌립보 성도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게도냐를 떠날 때’는 2차 선교 여행 때에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여 부득불 그곳을 떠나 아덴으로 내려간 것을 의미합니다(행 17:1-15). 그 어려움 중에 바울을 재정적으로 후권한 교회는 오직 빌립보 교회뿐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주고받는 일’은 상거래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서 수입, 지출에 관한 회계를 뜻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했고, 빌립보 성도들은 그 보답으로 바울을 물질로 후원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개척 초기에 신앙이 크게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열심히 바울을 도왔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바울의 선교를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에도 헌금을 보내 힘껏 바울을 도왔습니다. ‘참여하다’는 동사는 ‘동업자로 사업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기에게 대하여 선교 지원을 한 것이 단지 자기를 도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후원이 자신에게는 동역의 의미였음을 알려줍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선교 사역에 동참한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바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더니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고받는”일은 복음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입니다.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하면 말씀을 받은 자들은 주의 종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재정적인 부담을 져야 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바울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섬김은 한 번의 이벤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참여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후원의 영적인 의미(17-18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17절)
바울은 자기가 받은 선물들을 언급하는 것이 또 다른 선물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내가 선물에 마음이 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물’로 번역된 단어는 빌립보 성도들의 재정적 지원이나 헌금을 뜻합니다.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등의 표현들은 당시에 많이 사용하던 상업 용어들입니다. ‘유익하도록’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거래 계좌를 개설하도록’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의 복음 사역에 참여한 것을 마치 ‘거래 계좌’를 개설한 것처럼 표현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에게 ‘투자’한 것으로 여기기를 바라면서, 복음 전파에 참여한 그들에게 ‘풍성한 열매’로 맺히기를 원합니다. ‘풍성한’이라는 현재분사는 ‘증가하다, 많아지다’라는 뜻으로 투자한 자산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매’로 번역된 단어는 투자로 얻게 되는 ‘이익 배당금’을 뜻합니다. 바울이 그런 용어들을 사용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에 빌립보 교인들이 후원을 했습니다. 투자를 해서 그 대가로 배당금이 많아지는 것과 같이 바울의 복음 사역을 후원함으로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 어카운트에 크레딧이 많아지기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땅에서의 물질적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장차 하늘나라에서도 풍부한 배당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상급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에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는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영수증이 여기 있다’라는 뜻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것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풍부하다’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여 준 사랑과 관대함이 그의 필요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차고 넘칠 정도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18절)
여러 상업 용어들을 사용해 복음 전파에 동참한 빌립보교회를 칭찬하던 바울은 이제 구약의 제의적인 용어로 그들을 칭찬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헌금은 사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로 제물을 수식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향기로운 제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입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표현은 노아의 제사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창 8:21). 하나님의 백성이 바친 제물의 향기를 흠향함으로써 기쁨을 누리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향기가 올라갔습니다. 짐승의 고기가 불에 타면서 나는 냄새가 제사의 절정입니다. 바울은 헌금이 바로 그 향기라고 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헌금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물도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제물을 드린 자체만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는 행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돕기 위하여 드려지는 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여 바울을 도왔는데 하나님은 그의 풍성한 가운데서 빌립보 교인들의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넘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어렵다고 불평하거나 주눅이 들어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형편이 풀린다고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맡겨진 일은 능력 있게 처리하는데 유독 돈 문제에 약해져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지라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환경을 넘어서서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19-20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
19절은 빌립보 교회도 자신처럼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바울의 간구내용입니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여기서‘나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 헌금을 보내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녀들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 주시는지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즉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방법으로’채워 주십니다. “영광 가운데”라고 말한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이 더욱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풍성한 삶이 복음의 진보에 쓰이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역사를 보고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풍성한 대로”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성하시기에,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채워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이십니다(고전 1:5). 바울은 ‘채우시리라’는 미래형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미래에 채워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 바울의 삶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요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 물질적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 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고,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영생의 삶을 주신 하나님께 영원토록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서신의 본론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문안(21-23절)
바울은 빌립보교회 지도자들과 돕는 자들을 향해 문안하라고 지시합니다. 21절의 ‘성도’가 헬라어 성경에는 ‘모든 성도’(every saint)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 각각’에게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은 바울의 동역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22절의 “모든 성도들”은 바울이 갇혀있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감옥 안에서 행한 바울의 사역에 대한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이사 집 사람들’이란 황제의 직계 가족이나 친족을 의미하기보다는, 군인들과 성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들었습니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는 것을 계기로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의 집 안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바울을 감옥으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로마 황제의 집에 있는 감옥도 선교지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절)
바울은 축도로 빌립보서를 마무리 짓습니다. 축도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성도의 삶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들과 함께’있기를 간구하지 않고 “너희 심령에”있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심령’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내면적 인간의 심령이란 뜻합니다. 여기의 “너희”는 복수고, ‘심령’은 단수로 쓰였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한 심령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도록 간구합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이고(고전 15:10), 빌립보 성도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한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1:2에서 ‘은혜와 평강’을 빌었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과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빌립보서는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삶을 살려면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후원하며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사역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헌신을 기뻐하고 칭찬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고 선포했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 빌립보 교우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은 교우들은 큰 위로를 받으며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그 섬김은 하나님 보시기에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기쁨을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1) 나눔으로 복음에 동참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황제 숭배가 강한 빌립보 도시에서 신앙을 지키며 복음을 전한 일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바울을 위해 헌금하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헌신하게 하여 합력하여 헌금하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섬기게 하고 합력하여 기도함으로 바울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베푸시는 복과 영광에 동참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기꺼이 교회와 주님의 사역을 위한 괴로움에도 동참하여,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섬김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이뤄 가는 복음의 풍성함을 깊이 체험하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말과 혀로만 이웃을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수고와 헌신이 없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또 사랑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돼야 합니다. 우리는 나누고 베풀며 복음 사역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의 동역자로 사용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헌금은 하늘 구좌에 쌓입니다. 하늘 구좌에만 쌓이고 이 땅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구좌가 넉넉하면 이 땅의 삶도 넉넉해지고 평안이 있습니다.
2)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후원은 동역자인 바울을 풍족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을 ‘제물’로 언급합니다. ‘제물’은 구약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체성,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헌금’이 그 역할을 합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 시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이 여신 새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헌금은 제물을 바치는 심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제물 자체보다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더 중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헌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헌금이 제대로 사용될 때 복음의 진보가 있고 영혼이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위하는 삶이라면 기쁨의 샘이 금방 말라 버리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생수가 흘러넘칠 것입니다.
상급: 주 안에서 풍성히 채워지는 기쁨
바울은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풍성한 삶은 많은 재산을 소유할 때가 아니라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 아니라,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며 나눈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아낌없이 나누고 계속 베풀 때, 우리는 날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형편이 괜찮아서 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중에도 섬길 수 있는 이유는, 드리고 섬기고 베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쓸 것을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놀랍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풍성한 복의 통로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교회가 교회다워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더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활기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상처받은 자들이 치유를 받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가정이 회복되고 삶의 문제들이 주님의 은혜로 풀려지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교우들의 삶을 보며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능력 주심, 하나님의 복 주심을 믿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만족을 누리기 바랍니다. 성도 간에 교제를 회복함으로 기쁨이 충만하고 받은 은혜를 인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하늘나라의 ACCOUNT에 많은 CREDIT을 쌓으실 뿐 아니라 이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자신과 동행하고 협력했던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하고 축복하며 문안한 것처럼, 우리도 그동안 함께 했던 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며 교제할 때에 우리의 삶과 사역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심령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의 파트너
빌 4:14-16 / 김남수 목사
농사를 짓는 사람은 봄에 심은 씨가 나오면 가꾸기 위해서 수고하여 땀을 흘리면 추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은 슬픔과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며, 울면서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은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단을 거두게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은 기쁨은 고난을 거쳐서 온다는 것입니다. 수고를 거쳐서 고난이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고난 속에서 기쁨을 찾으면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정기적으로 조깅을 하십니다. 사실 뛰는 것은 재미없는 일입니다. 아주 힘들고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운동을 통해서 그 후에 몸의 상쾌함과, 건강과, 가벼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땀흘림과 수고를 늘 하고 그 후에 그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기본적인 원리를 잊어버리고 수고하지 않고 기쁨을 얻으려고 하고, 진정한 기쁨을 찾지 않고 진정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기쁨이 오는 것, 그냥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보다는 고난과,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수고를 통해서 기쁨을 주시는 것을 경험해야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기쁨을 상실하고 영적 침체와 디프레스에 들어갑니다. 먹을 것도 전보다 많고, 입을 것도 풍성하고, 환경도 좋은데도 불구하고 전보다 기쁨이 없이 즐거움이 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영적 디프레션이 오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처음부터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빌립보서는 가장 기쁨이 많은 충만한 기쁨의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감추어진 구구절절한 고난과, 수고와 고생과 희생과 헌신이 깔려 있어서 고난을 통한 희생, 희생을 통한 기쁨이 다 함께 따라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세상에서는 쾌락을 주고 고통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기쁨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착각해서 Fun이라는 즐거움이나 쾌락을 통해서 즐거움을 받을 생각을 하면 고난이 오게 됩니다. 고통과 쓴잔을 마시게 되지만 고난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쁨이라는 선물을 주시도록 영적 원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할 때에 영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함께 수고하는 고난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오늘날 운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농사를 짖는 것도 그런데 하물며 영적인 일에는 더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 기쁨을 상실하고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은데 생각해보면 영적인 고난과 역경과 희생과 수고를 두려워하고 쉽게 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표면에 나타난 기쁨이 있고, 그 이면에 희생과, 수고와, 고난이 늘 같이 있어서 그 고난을 통한 수고, 수고를 통한 기쁨이 늘 같이 왔다는 사실을 눈을 뜨고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거쳐서 출산을 하고 그 출산을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PD가 고백한 글을 읽었습니다.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이유에서 자연분만을 포기하고 무통분만법인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출산일을 조정할 수 있어서 좀 바쁜 날은 제쳐놓고 좀 한가한 날을 정해서 아기를 낳기로 하고, 또 아내가 허리가 약하기 때문에 힘들을 것 같고, 세 번째 제왕절개로 나으면 아이가 나오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머리가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면서 딸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아들만 생각하고, 한참 기다린 후에 그 분들이 딸이라고 하니 산실에서 혹시 아이가 바뀌지 않았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집에서는 첫딸이지만 그 집안에서는 8번째 딸이라는 말에 아내는 실신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아이와 부모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서 무엇에 취했는지 잠만 자고, 시도 때도 없이 앓고 병원을 드나들게 되었고, 또 아이가 생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한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이가 울면 짜증이 나고, 딸아이가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고 부담스럽기만 하다는 이상한 관계가 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문제가 무엇인가? 고민을 하다가 문제를 파헤치고 조사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을 만나고, project를 해결하면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가들을 만나고 찾아다녀 보니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론지었다고 합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 아무런 자발적인 생존노력없이 출산했고, 출산해서 모유를 먹지 않고 우유를 먹이면서 먹고 잠만자고 시도 때도 없이 약하디 약한 아이가 되었겠다는 것과, 또 딸을 낳았다는 실망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쉬운 출산에서 애정이 결핍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출산 현장에서 자연분만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켜보지 못해 태어난 아이와 감성적인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그때부터 아이와 함께 목욕을 하고 아이를 안아주고, 아기가 자기 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피부접촉을 하면서 감성적인 교류로 뜨거운 인간관계로 노력을 해서 누구보다도 가까운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듣게 됩니다.
유독 인간에게만 동물보다 힘든 출산의 고통을 주며, 오랜기간동안 길러야 성장하는 성장기간을 주셨으므로 인간이라는 존귀한 존재는 오랜시간 동안 힘든 출산의 고통을 통해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고, 거기서 생명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PD는 끝내 "생명의 기적" 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을 한 뒤에 많은 남편들이 아내가 출산할 때에 같이 산실에서 아내의 손을 잡고, 같이 그 괴로움을 느끼고, 태어나는 생명의 소중함을 경험하면서 출산을 돕고 경험한 사람들은 그 아이가 얼마나 소중하게 태어났는가 알게되고 아이에 대한 애착심이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사실 하나만도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여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대단한 기적입니다. 60억 중에서 1인을 택하여 결혼하고 1천200조분의 1의 확률로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천문학적 숫자의 확률입니다. 한 남성이 한 여성과 결혼하여서 아이를 출산하는 확률이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는 천문학적 숫자의 확률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어 출산한 생명이 고난과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라면 그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오는 즐거움을 거기서 오는 기쁨과 사랑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기쁨과 거룩한 만족이 우리에게 오려면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올 수 있다는 것을 교육해 주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 대한 투쟁을 계속할 때 그는 두 가지를 외치도록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인도를 떠나라" 하는 말을 외쳤습니다. 또 한 단어는 "카레가 야 마레가" 이 말은 "행동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저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비폭력 무저항 항의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충분히 희생하여 우리의 힘을 증명한다면 영국인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백년 동안 억누르고 있던 영국은 저들은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는 자유를 얻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은 "카레가 야 마레가"라는 "행동 아니면 죽음"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었다든지 행동자체가 죽음을 의미한다던지 각오하는 결심을 저들이 외쳤던 것입니다.
한번은 "소금전쟁"이라는 인도에서 거두는 소금에 대해 세금을 물려서 백성들은 그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고, 거기에서 나는 소금을 영국이 몽땅 가져다가 그것을 자기들이 팔았습니다. 무기로 싸울 것이 아니라 소금은 사람의 생명중에 중요한 것인데 어떻게 하든지 소금을 우리 것으로 만들자고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수 십만 수 만명이 행진을 해나가는데 앞에서 곤봉으로 계속 때리고, 총을 쏘고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걸어가며 그들은 끈임없이 "카레가 야 마레가"라는 말을 외치면서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그 희생을 통해서 자유를 반드시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달려갔던 것입니다. 마침내 영국은 손을 들고, 인도를 자유 해방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3.1운동 때 힘차고 자신있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길거리를 다녔습니다. 희생과 죽음을 각오한 것입니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고 해방을 갖기 위해서 압박 속에서 일어나서 희생을 치루고, 감격과 해방의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4.19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의 희생을 통해서 자유와 민주라는 새로운 감격과 기쁨을 우리가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제 빌립보서를 다시 보면서 이 고난, 이 희생, 이 수고를 통해서 영적 기쁨을 얻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수고를 해야 되며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보아야 될 것입니다.
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partnership" 때문에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 고난을 함께하는 Partnership은 함께 기쁨을 저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이 없는 것은 고난을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피했기 때문에 기쁨도 우리를 피해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Partnership" 복음에서의 파트너 쉽"
이제는 설교를 좀 바꿀때도 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한번만 설교하여도 불이 붙어서 뛰어나가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데 아무리 외쳐도 은혜는 받는데 행동이 없다면 고난을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 설교는 하나마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나의 괴로움입니다. 물론 금년 통계를 보니 작년 금년에 교구별로 목장별로 교인 통계를 보니 650명 정도의 새로운 가정이 늘었습니다. 거의 계획된 일정에 모이는 목장예배와 전체 교인들의 70-80%가 목장예배에 참석하고 또 목장에 소속되고 활동합니다. 아마 이 숫자는 평신도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간 대표적인 교회로서 머지않아 이 사례는 많은 분들의 연구와 모범적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목장에서 여러분들이 수고하고, 2001명의 고아를 support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고 행동에 옮기시고, support를 하셨고, 열심히 수고하신 열매인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파트너 쉽으로서 선교, 하나님이 주신 사역의 파트너로서 우리가 좀더 힘있게 파트너 쉽을 가지고 일하는 그 날을 위해서 저는 계속해서 이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없다면 설교자를 갈든지 아니면 설교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교인을 갈든지 아니면 둘 다 갈든지 무슨 해결이 나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랜시간 동안 잘 교육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설교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Order인 것입니다.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움직여야 되고, 그 말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설교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나의 고통입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그런 파트너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영광스럽게 왕으로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릴 그런 길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호산나 외침을 받으며 기적과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메시야 적 구속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길을 거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요청마저 거부하시고 죽음이라는 최후의 고난을 통해서 최고의 기쁨과 영광을 자기의 죽음을 그 고통을 보고 거기서 오는 기쁨과 구원의 참 기쁨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그 분이 오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괴로움에 함께 참예한 저들을 칭찬하였습니다. "너희가 나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그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만들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2:21-22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냥 기쁨이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 희생했을 때에 거기서 기쁨이 왔다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처해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도 희생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울 마음을 가지면 거기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올 것인데 파트너와 고난의 파트너는 영광의 파트너, 면류관을 같이 쓰는 영광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했습니다. 괴로움에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여러분! 기쁨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은 그냥 오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과 고난과 수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아니하고 열매를 거둘 수 없듯이 주님을 위해서 오는 영적 기쁨과 파트너쉽의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새 시대의 새 역사를 우리는 멀리서 구경하는 자가 아니고 팔을 거두어 부치고, 나의 시간과, 나의 몸과, 나의 물질과 젊음과 물질을 다 바쳐서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할 때에 남모르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 고난은 싫어하고, 기쁨은 요구했으며, 희생은 마다하고 축복을 기대했었습니다. 고생은 싫어하고, 기쁨은 요청했던 저희들이 고난은 기쁨을 가져오고 세상 것들은 즐거움과 함께 고통을 안겨주지만 하나님의 일은 고통과 함께 즐거움을 안겨주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있게 하신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복음의 파트너로, 고난의 파트너로 저희들이 함께 수고하는 영광스러운 축복의 자리에 가게 해 주시옵소서! 나태함과 게으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우리 생각 속에 어두움과 낙심을 가져오는 모든 원수들의 세력은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거룩한 역사에 함께 동역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의 풍성한 대로
빌 4:14-23 / 박조준 목사
빌립보서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6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빌립 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자주 장사인 루디아와, 바울과 실라가 옥고를 치 르는 동안 구원을 받게 된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가정이 모체가 되어 빌립보 교회가 시작이 된 것입 니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시작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도 바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각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사실 다른 교회는 사도 바울을 물질적 으로 돕는 일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만은 참으로 최선을 다해서 감옥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고마운 성도들의 사 랑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시간 생각한 빌립보 4장 10-13절에서 그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어떤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에게 선물 이 필요하지 않다든지 물질적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 바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nevertheless, however)라는 부사로써 그의 생활에 물질적 필요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운 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 였으니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는 괴로움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간의 의견차이가 있습니다. 모틴(Ralph P. Mortin)은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괴로움은 말 세에 있을 대환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헬라어 들립시스( )라는 말은 말세에 있을 7년 대환난이란 말에 쓴 것과 같은 낱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는 문맥으로 보아도 사도 바울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금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복음을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 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에 Compassion 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래 라틴말에서 나온 말인데 함께(Com) , 고통한다(Passion) 는 뜻이 있는 말입 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나는 상관없으니까 하면서 무관심하게 지낸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좋을 때 같이 기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을 볼 때 함께 괴로워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여러분,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봉변을 당한 이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그냥 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곳에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레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참 안되었군 하며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 다.아니면 저 사람은 무슨 죄를 범했기에 저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 여기는 강도가 나타나는 곳이구나. 여기서 어물거리다가는 나도 저런 어려움을 당할지 몰 라.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 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아 어쩌다가 저 사람이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까? 저 사 람 그냥 버려 두면 죽겠는데. 그러면서 그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려 거반 죽게 된 이 사람을 도 와주었습니다. 상처를 닦아 내고 싸매주고 그의 나귀에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부비를 주면서 잘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내가 지금 사업차 바쁜 일이 있어서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얼마의 치료비를 드릴테니 이 사람을 좀 잘 돌봐 주세요. 만일에 치료비가 더 들면 제가 갚아드릴게요.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 세 사 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수감 되어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슴 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만 아파한 것이 아니었 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당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고 그 에게 사랑의 표로 선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번에 처음으로 사도 바울에게 선물 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초기, 다시 말하면 사도 바 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해 그 곳에 교회가 세워지던 무렵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데살로니가 로 갈 때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그들은 바 울에게 물질을 보냄으로 주고 받는 일 에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 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신령한 것을 공급했고, 그들은 바울에게 물질적인 것을 공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서 복음으로 살 권리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장애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손으로 일 해서 자신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물질적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고 도움이 필요하 기도 했는데 이것이 빌립보 성도들을 통해 채워지게 된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 전 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계속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 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필요 합니다. 그 방면에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동차의 운전사라면 물질은 연료에 해당합니다. 운전사 없이도 차가 움직일 수 없지만 연료가 떨 어졌어도 차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결합할 때 차는 신명나게 달릴 수 있게 됩니다. 일을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드려서 일을 하고 자신이 직접 일할 수 없는 사람은 물질로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일은 중단없이 계속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제가 직접 농어촌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 직접 나가 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돕는 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합니 다. 우리가 직접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물질적으로 선 교사님들을 돕는 것으로 외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 다. 여러분이 국내 선교와 국외 선교하는 일에 참예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이 귀한 일에 참예하지 못하신 분 계시면 이제라도 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귀한 일이 많지만 복음을 전하 는 것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많은 물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하 시면 됩니다. 매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교 헌금을 할 때 이 헌금이 가는 곳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고, 저들이 힘있게 일할 때 하나님의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의 성도들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 회 성도들의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그들의 선물은 그들의 영적 성장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전에 보낸 선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사도 바울이 물질에만 관심 있는 사람같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진정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이 말이 조금 애매하게 표현되었는 데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이란 표현은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여기 헬라어 j 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말씀이란 말이 아니고 계정, 혹은 구좌(Account)라 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선물이 그들의 계정에 이익 배당 이 돌아가는 영적 투자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면에 사도 바울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고도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고 나니 기쁘면서도 감사했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 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그 행위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요, 유익이 되는가 하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으니라 함과 같으니라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 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 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 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려 넘쳤느니라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를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 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9:8-15)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삶을 통해서 과실이 번성하기를 소원하십니다. 로마서 1장 13절에도 이렇 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 다. 디도서 3장 14절에 보면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며 필요한 것 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8절에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된 우 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 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 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7-8) 오늘 우리가 주님께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물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물질이 없어도 그가 원하시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을 드리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우 리의 물질을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은 아시겠습니 다만 부모가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녀에게 조그마한 것만 받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세요.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두번째 이유는 그것이 그들 자 신에게 큰 영적인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받고도 이제 그를 다시 돌려 보내면서 선물 을 틀림없이 받았다는 것을 빌립보 교회에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 라는 말은 나는 모든 것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영수증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받은 것 은 그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풍부하다 는 단어에 이어서 풍족하다 고 말하고 있습니 다.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넘치도록 풍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물론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러 나 궁극적으로 볼 때 그 선물을 받은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선물은 단순히 바울 사도 에게만 기쁨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향기 란 말 이나 제물 이란 말은 모두 구약성경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선물을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 드렸지만 실상은 하나님 께 드린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한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행해진 것은 실상 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행해진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주어진 것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공급자인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넘치도록 풍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갚아 줄 만한 능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 나 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립보 4장 1 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 리라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의 하나님은 만물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풍성한 대로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풍족하게 했으니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풍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필요를 채워 주었 으므로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들이 나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었으니 하나님이 내 대신 당신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요 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은 예수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 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한 이 약속은 그들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주 안에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성도들은 똑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께서 그 무궁무진한 보고로부터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마음에는 있어도 가진 것이 없어서 필요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미국의 경우 6월 초에 졸 업을 하고 9월 초에 대학에 입학합니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생활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넉넉하게 지낼 정도로 수입이 많았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번에 고등학 교를 졸업하고 가을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을 기념해서 자동차 하나 사주세요.그랬더니 아버지는 선뜻 그래 사주마. 하고 대답했습니다.그 아들은 흥분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차의 모양 색깔 같은 것을 생각하며 아버지와 함께 가게에 나가 고르려고 아버지의 말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 준다고 대답만 하셨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으셨 습니다. 혹시 바쁘셔서 잊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서 독촉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잊지 않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개학할 날짜가 다가옵니다. 이 아들은 차를 미리 사서 좀 익히기도 하고 학교에 갈 때는 자기 차에 짐을 싣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버지께서는 자동 차 가게에 나가자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촉했습니다.아버지는 아시고 계신다는 말 씀뿐 같이 나가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학교에 가는 날이 다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여러 가지로 마음 속에 의심스러운 일이 생각났습 니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에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저 지금 학교로 떠납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잠깐 기다리라. 고 하시더니 새 성경책을 아들에게 건네 주면서 너 학교 기숙사에 들어 가면 이 성경 빌립보서 4장 19절을 읽어라. 하셨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께 대해 섭섭한 마음과 실망스러운 마음이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불만을 토할 수도 없고, 그저 예. 하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아니오. 라고 했습니다. 내가 자동차 사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사 준다고 대답하셨는데 누가 성경책을 몰라서? 그는 학교에 가서 등록을 마치고 기숙사 방을 배정 받아 짐을 풀 때 아버지가 주신 성경책을 방 구석에 처박았습니다. 그는 4년 동안을 불만 속에서 대학엘 다녔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아 버지가 준 성경 빌립보서 4장 19절을 읽으라고만 하셨습니다.4년이 지나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축하하기 위해서 오신 부모님 앞에 불평의 말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웃으면서 너 내가 준 성경 어디 있니?
4년 동안 처박아 둔 성경을 방모퉁이에서 꺼내왔더니 아버지께서 너 내 앞에 서 빌립보서 4장 19절을 읽어라. 하셔서 하는 수 없이 그 성경을 폈더니 거기 작은 종이 한 장이 끼어 있는데 보니까 4년 전 아버지가 끼워둔 자기앞 수표 한 장이 나왔습니다. 어떤 차라도 원하 는 대로 살 수 있는 액수가 적혀 있는 자기앞 수표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생각만 고집하다가 불행 속에 지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 활을 해야겠습니다.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 때의 사람들은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가 우리가 가장 배우기 어려운 산수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 보는 것이다. 고 한 말은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감사할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돕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음으로 인 해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이 풍성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심으로 인해 감사해야겠습니다.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빌 4:14-23 / 조상호 목사
어느 가정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졸업 기념으로 자동차 한 대를 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자동차를 사 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사주는 대신,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들에게 성경책을 한 권 주면서 틈나는 대로 읽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 4장19절은 인생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꼭 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자동차를 사주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잔뜩 나서 성경책을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손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방학이 되어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자동차를 사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성경을 읽었느냐, 빌립보서4장19절을 읽었느냐고 응수할 뿐 자동차를 사 주지 않았습니다. 4년이 지나고 졸업하는 날 부모님이 아들 졸업식장에 축하하러 왔지만, 그 아들은 별로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꿈에도 소원인 자동차, 앉으나 서나 자동차 생각으로 4년을 지내었지만, 자신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들이 자동차를 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졸업식이 끝났습니다. 그 동안 묶고 있던 기숙사의 방을 빼기 위해, 아들이 자신의 짐을 꾸릴 때 아버지는 기숙사 구석에서 성경책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책은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성경책 위에 먼지가 수북 싸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성경책 위의 먼지를 털어 낸 후, 아들에게 주면서 빌립보서 4장19절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말씀하신 빌립보서 4장19절을 폈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피에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리라"는 말씀과 함께, 자동차 한 대 값에 해당하는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4년 전에 자동차를 살 수 있는 돈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그것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들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4년 내내 자동차 없이 공부를 하다 보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는데,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미 풍성한 삶을 살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기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걱정하게 하고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우리를 고민하게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도 4년 전에 아버지께서 이미 자동차를 주셨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고민만 한 어리석은 아들처럼,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신다고 하셨는데도 그 약속대로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어리석은 아들처럼 고민만 하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19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은 황금 언약입니다.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19절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부분에 나오는 14절부터 18절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앞부분의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19절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1. 나누며 살아가라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있는 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나누며 사는 것이 풍요한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주는데 많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와 다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5장39절 이하에 나오는 '누가 나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들이대라'는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속옷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는데,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할 때 겉옷까지 주라'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또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오리만 가지 말고 십리를 동행해 주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롬12:20)을 보면 더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나를 못살게 구는 원수,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에게 오히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라고 합니다. 또 (마23:12)에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법칙은 높아지기 위해서 가능하면 자기 자신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법칙은 그 반대입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면 높일수록 오히려 낮아지고 낮추면 낮출수록 오히려 높아집니다. 세상의 법칙은 자꾸 쌓아야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법칙은 자꾸 베풀고 나누어야 풍성해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Paradox, 즉 역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세상 사람들의 법칙과 달리, 역설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러한 역설의 법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웃을 위해 물질을 나누며 살아가는 그들이 결국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의 나눔의 모습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15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사도행전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에 처음으로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받는 것으로만 끝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를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 지방을 떠날 때,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은 사도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 지방을 떠난 후,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사역할 때에도 계속되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사랑으로 나누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라고 항상 평안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고후 8:1,2)을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많은 환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극한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예루살렘 교인들을 도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섬겼습니다. 저는 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하면 돈 잘 버는 사람들로 인식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돈 버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을 보면 유대인의 손이 미치지 아니한 기업들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은 거의 유대인 투자회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면, 유럽의 최대은행인 로스 차일드 은행이 유대인 회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최대 은행인 Bank of America, City Bank, New York Bank 등이 다 유대인 소유입니다. 또 Exxon이라든가 Gulf라든가 Shell, Mobil과 같은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유대인의 소유입니다. 또 세계적인 관광호텔 체인인 Hilton 호텔, 20세기 영화사, 등이 다 유대인의 소유입니다. 확실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돈 벌어서 그 돈을 자기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자기들의 배만 채우기 위해 돈버는 시시컬렁한 돈 벌레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돈을 벌어 세계적인 인권운동이라든지, 평화운동이라든지, 복지분야라든지, 문화분야라든지, 예술분야에 기부합니다. 1965년에 미국에서 대흑인 인권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비용을 거의 다 유대인들이 보조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나눌 줄 아는 민족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큰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자인줄로 믿습니다. 은행에 엄청난 돈을 저금해 놓고 '돈, 돈'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돈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병에 걸리면 병자라고 하고, 약하면 약자라고 하고, 강하면 강자라고 하는 것처럼, 날마다 '돈, 돈'을 외쳐대는 사람을 '돈자'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에 끌려가는 사람은 돈의 노예입니다. 반대로 돈으로부터 자유 한 자가 진정한 부자입니다. 베풀고 나누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을 사랑으로 섬기고 물질로 섬기는 사람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보 교인들은 부자였습니다. 비록 그들은 많은 환난과 시련 가운데에서, 극한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어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부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부터 칭찬 받았으면 게임은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빌립보 교인들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한 분도 돈의 노예가 되어 돈에 끌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돈으로부터 자유하여 돈을 다스리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드려라
저는 우리 크라이스트처치 순복음교회에 부임해 와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의 가장 약한 부분이 헌금에 대한 설교입니다. 혹시나 처음 나오신 분이 헌금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시험에 들까봐 헌금에 대한 설교를 가급적 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3년 동안 딱 한번 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말라기서를 연속해서 강해 설교 할 때였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도둑놈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자'라는 설교를 딱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 생활하면서 헌금에 대한 설교로 인하여 상처받은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목사가 되어서도 헌금에 대한 설교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저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범죄요, 성도들의 축복의 문을 막는 악한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 그대로 말라기서를 설교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을 제한해서 안됩니다. 성도들의 축복의 문을 막아서도 안됩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그 비결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책망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딤후3:16,17). 설교자는 성도들이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훈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물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果實)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물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내게 물질을 보내주기를 원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자신이 물질에 대해서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것이 없어서 우리가 헌금을 하면 기뻐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욥41:11)에 의하면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고 분명하게 온 천하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 (시24:1)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성어린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 중에 신모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저의 집에 놀러왔다가 가고 나면 꼭 책 하나씩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친구 집에 가보면 조금 과장하여 표현하면, 내 책꽂이인지 그 친구 책꽂이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 책이 많이 꽂혀 있습니다. 또 저의 집에 와서 논 후에 책을 자기 집으로 자리 이동하다가, 저에게 들키면 시치미를 떼고 점잖게 빌려달라고 합니다. 빌려주지 않으면 남자가 책 한 권 가지고 치사하게 군다고 구박을 줍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제 책을 빌려 가면 제대로 돌아올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자리 이동시킨 제 책을 가져왔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자수라고는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그 친구가 어느 날 제 책을 가지고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저는 그 책을 받아들고 울 뻔했습니다. 20세가 넘은 제가 빌려간 제 책 한 권을 받아들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드리는 우리의 손길을 보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풍성한 은혜와 복을 허락하십니다.
제가 평신도 때의 일입니다. 호주에 도착한지 20일만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던 집에 도선생이 낮에 들어와 모든 패물을 넣은 가방을 통째로 가져갔습니다. 물론 결혼 때에 주고받은 반지, 카메라, 등,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결혼반지도 두달 밖에 차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물질에 대한 자유 함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동안 빌려쓰던 저희 교회가 자체 성전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전건축 헌금을 한다고 하는데, 저희 가정에는 드릴 물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만 하면 자꾸 소원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의 마음에 소원이 강하게 일어나 일정 금액을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두 살밖에 되지 않은 큰 아이 이름으로 저희 부부가 작정한 금액의 1/10을 또 작정했습니다. 물론 아내와 상의 한마디하지 않고 제가 독단적으로 작정했습니다. 당시에 저희 가정 형편상 부담이 가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작정을 했기 때문에 갚아야 했습니다. 생활비를 절약해가며, 아내의 짠돌이 작전으로 인해, 하나님께 약속한 금액을 조금씩 조금씩 수개월에 걸쳐 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91년부터 92년에 호주에 엄청난 불경기가 찾아왔습니다. 당시에 청소를 하던 한국 분들이 청소자리를 놓치고, 목수 일을 하던 분들이 일이 끊어지고, 가게를 하던 수많은 분들이 Bankrupt을 당하는 등, 교민사회에 돈이 돌지 않게 되자, 계들이 우수수 다 깨졌습니다. 이로 인해 권총으로 자살하고 한쪽에서는 폭행사고가 나는, 등의 여러 사건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비단 교민사회 뿐 아니었습니다. 현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직장은 각주마다, 각 도시마다 공장이 있는 호주에서 제일 큰 건설회사였습니다. 그런데 불경기가 되자 제가 근무하고 있던 공장은 400명 이상의 직원이 200명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 80여명의 한국 사람은 76명이 감원이 되어 4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공장에서 날고기는 10년, 20년, 30년 베테랑 기술자들도 모조리 감원 대상에 올라 명퇴 당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술 배운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는데도 감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신 30년 된 기술자는 명퇴를 당하였데 그 밑에서 기술을 배우고 겨우 1년 된 저는 계속해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호주에서 공부를 포기하고 직장에 뛰어든 이후에, 거의 7년 동안 한번도 직장으로 인해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일자리를 주셨고, 직장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호주에서 뿐 아니라, 뉴질랜드로 이주해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저희가 패물을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와 저의 패물을 보내오셨습니다. 그것들을 수개월 동안 끼고 또 차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또 뉴질랜드에 와서 출석하고 있던 교회가 성전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성전 건축이나, 성전구입을 하는 교회와 인연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게 성전건축의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저희에게 드릴 어떤 물질이 없었기에 한국에서 보내주신 패물을 몽땅 성전건축 헌금으로 몽땅 드렸습니다. 아마 저희 부모님이 아시면 섭섭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뉴질랜드에서도 또 저희 가정을 이끄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제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학비와 책값을 공부할 동안 내내 보내주셨습니다. 평균 1년에 한번씩 사람을 통해 양복과 넥타이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교 1년을 겨우 마쳤는데, 전도사 임명을 받았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출내기 전도사가 베테랑 목사님이 사역하던 더니든순복음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더니든 가는 비행기 표도 알지 못하는 분이 주셔서 가게 되었고 가재도구 등의 살림도 아는 분의 도움으로 매우 저렴하게 운송하게 되었습니다. 사택문제도 저희들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전임자가 살던 곳을 다 준비해 놓으셔서 저희들은 집을 구하는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더니든에서 1년6개월 동안 사역을 시키신 후, 하나님께서는 경험이 일천한 저를 베테랑 목사님이 5년을 사역하시던 이곳 대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자리는 저의 위치와 경험과 실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축복된 자리입니다. 여기 부임해 오기 전까지 이곳을 저의 사역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이끄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주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도 감사한데, 목사로 기름 부어주셨고 이렇게 목회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자다가도 눈물이 나옵니다. 저는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을 때, 그에 따른 축복과 풍성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역사하실 주님을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은행에 넉넉한 돈은 없어도, 창고에 먹을 것은 없어도, 제 소유하는 차 한 대 없어도 고민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우리 가정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길을 보십니다. 이웃과 나누는 손길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께 드리는 손길을 보십니다. 여러분,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이웃들을 축복하십시오.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의 것 떼어먹지 않고 드리십시오. 그리하여 결코 부도를 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어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풍성한 삶의 길
빌립보서 4:15-19, 마태복음 6:19-21 /
** 들어가는 말
‘세상의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합니다. 똑 같은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행복해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런 감동이 없고, 어떤 사람은 만족해 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평합니다. ‘풍성하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풍성하다는 기준도 저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5:10절에서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고, 잠언 27:20절에서는 “스올(지옥)과 아바돈(죽음의 곳)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스스로 풍성하다고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려는 ‘풍성한 삶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풍성함’을 뜻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빌립보서 본문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도왔던 일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이며, 빌립보 교인들이 보여준 친절함에 대한 감사와 위로와 격려의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아무도 돕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도왔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저 형식적으로 한 번 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힘들 때마다 필요한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라고 했는데, 이는 가진 것이 많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채우심에 대한 감사’를 뜻합니다. 바울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가진 것이 별로 없을지라도 풍족하게 여기며 만족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의 말씀으로, 진정으로 풍성한 삶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쌓아두면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게 될 것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본문의 전체 주제는 33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세상의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의 나라가 멀어질 뿐만 아니라 진정한 풍성함을 누릴 수 없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늘에 쌓아두면 하나님이 채우시는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 풍성한 삶의 길은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어느 대기업의 CEO가 불치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은 생명이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좋은 의사를 만나 극적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달 째 회복 병실에 누워 있던 어느 날, CEO가 급히 그의 비서를 불렀습니다. “여기 사례비가 있으니 어서 의사에게 가져다 드리게.” 갑작스런 상황에 비서가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예? 아직 치료비 결제 날짜는 많이 남았는데요!…” 그러자 CEO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목숨을 구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전 재산도 주겠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목숨을 건진 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재산 절반 정도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제는 이 사례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 나도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인 모양이야. 더 치졸해지기 전에 어서 지급을 하지 않으면 사례비도 주지 않는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 것 같다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듯이, 사람의 마음은 정말 간사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든지, 위기와 고통 속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줄 것처럼 하다가도, 나아지고 회복되면 아깝게 여겨지고 멀리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요. 혹시 여러분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했다가 환경이 나아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이런 삶의 모습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 본문 17-19절을 봅시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빌립보 성도들의 친절을 기쁘게 받으셨고 또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절의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는 말씀은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이 그들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삶의 열매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길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리는 헌금이라고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5-7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라 아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준비된 헌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헌물로 바친 것들은 내 소유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쌓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쌓여지는 보물은 헌물만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 삶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쌓여지는 보물입니다. 신명기 14:29절에서는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고, 15:11절에서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하시며, 잠언 19:17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10절에서는 바울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수고로움으로 얻은 물질을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하여 쓸 때에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쌓이는 보물이 됩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헌신과 노력, 땀 흘리는 수고로운 봉사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쌓이는 보물입니다. 사도행전 10:4절입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의 선한 행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까지도 하나님께 기억하신 바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3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하시며, 19절에서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행하는 모든 수고를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쌓이는 보물들입니다.
※ 풍성한 삶의 길에는 세상적인 보상도 따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이었습니다. 19절에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에 대하여는 말씀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는 사도 바울의 축복이자 하나님께로 향하는 의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풍성함으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 이는 대단한 축복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보상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맡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채우심’을 구한 것입니다. 이 채움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에 대한 모든 필요를 말합니다. 신명기 15:10절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하는 모든 섬김과 나눔의 일들은 더 큰 보상으로 채워주십니다.
YMCA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일로 시작된 구제가 큰 역사를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1940년경 필리핀 마닐라에 사는 10살 된 소년은 자전거를 사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었습니다. 더디어 자전거를 사기 위해 저축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빠와 엄마와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식량이 없어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소년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그동안 자전거를 사기 위해 모은 돼지 저금통을 깨뜨려 빵집으로 갔습니다. 그 돈 만큼 빵을 사서 작은 손수레에 가득 싣고 가까운 YMCA로 갔습니다. 소년은 YMCA 직원에게 ‘이 빵을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소년이 돌아가자 YMCA 간사는 크리스천 회원들을 긴급 소집했습니다. 간사는 회원들에게 빵을 가져온 소년의 관심과 섬김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회의는 소년의 빵을 경매에 붙여서 그 모금 된 돈으로 아프리카 지역의 아동을 돕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소년의 빵은 경매에 붙여졌고 많은 돈이 모금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뉴욕에 사는 한 부인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 부인은 약간의 돈과 함께 편지를 소년에게 보내 달라고 YMCA에 보내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자전거 없이 지내는 소년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이 돈으로 자전거를 사기 바란다.”
이것은 아주 작은 한 예일 뿐입니다. 저 자신의 경우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주님의 일에는 결코 공짜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42절에서 말씀하신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대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청년의 간증입니다. 이 청년은 이 땅에 작은 천국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면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신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청년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당신이 위로받고 쉴 수 있는 작은 천국을 만들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전 지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걸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마음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청년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민하지 말고, 다음으로 미루지도 말고, 지금 형제님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드리세요.” 다음날 청년은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바로 앞에 지팡이를 더듬으며 길을 찾아 헤매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외면하려던 순간 어제 그 자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청년은 이 맹인이 지금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 저 사람의 눈이 되어주자!' 청년은 그 맹인의 손을 잡고 그의 집까지 함께 가주었습니다. 이 후 청년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풍성한 삶의 길은 내게 있는 것과 나 자신까지 주님을 위해 드리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주님을 위해 살 때에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내게 채워주십니다. 잠언 11:24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이 시대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영과 육신의 모든 삶과 이 땅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가 필요를 채우시리라
빌 4:19 / 김근중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회사 교수인 서정민 교수에게 자기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선배는 정치인으로 성공하고 결혼도 재벌 딸과 했다고 합니다. 서교수가 그와 3년 동안 방송하면서 3년 동안 밥을 같이 먹었는데 식당에 가면 꼭 밥을 더 시킨다고 합니다. 그 식당은 설렁탕에 밥이 말려서 나오는 집인데도 공기밥을 두 그릇 더 시킨다고 합니다. 그 식당에서 나올 때 보면 두 그릇 중 한 그릇도 먹지 못하고 나온다고 합니다. 식당에 갈 때마다 밥을 더 시키지만 언제나 못 먹고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공기밥이 더 있으면 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6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너무 살기가 힘들어서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선배는 어렸을 때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에게 하는 첫마디가 "엄마 물 많이 부어~"였다고 합니다. 집이 가난하여 밥을 못 먹고 죽을 먹었는데 죽이라도 많이 마시려고 물을 많이 부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집에 들어가서 첫마디가 언제나 "밥있어?" 라고 한다고 합니다. 밥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 선배 뿐만 아닙니다. 서교수가 그 선배 집에 갔더니 90세 된 선배의 어머니가 손을 붙잡으면서 며느리를 가리키면서 "저년이 아들 밥을 안 줘" 하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선배가 당뇨라고 그 아내가 밥을 절제시킨 것 보고 어머니가 노망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서교수가 선배, 그의 아내와 어머니랑 같이 식탁에서 밥을 먹는데 그의 아내가 선배에게는 밥을 조금 주고 서교수에게는 많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선배의 어머니가 눈을 쏘아보더니 "니들 둘이 친하냐?"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서교수의 친구와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배경에서 이루어진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절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보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을 보고 상처받을 것이고 관계가 파괴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생애를 온전케 하고 행복하게 하는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밥입니까? 쌀이 항상 있게 하기 위한 돈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에 물직적, 신체적 필요도 있지만 감정적 필요와 영적 필요에 대해 집중해 보려 합니다.
1.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으면 "필요한 것이 아주 많지요" 하면서 많은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필요를 물으면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많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알려면 우선 '필요'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필요'(Need)는 욕구(Desire)와 욕망(Want)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욕구나 욕망은 우리가 스스로 육체적 즐거움과 만족을 얻기 위해 원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갖기를 원하고 구하는 것들은 대부분 욕구와 욕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욕구와 욕망의 것들이 다 불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욕구와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욕구와 욕망에 속한 것들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것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복의 수단으로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마6:33, 롬8:32).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욕망으로 인한 것들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우리는 욕구와 욕망을 필요로 정당화 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들을 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물건들을 얻어서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물건을 살 형편이 못 되는 데도 신용카드를 긁어서 삽니다. 결국 빚을 지게 되고 빚이 커지면 카드 돌려 막기를 합니다. 그로 인한 고통이 오게 되면 "하나님 저의 고통을 보시지요? 제가 빚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죠? 제가 빚을 갚지 못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를 원하시지 않으시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신다고 하셨죠?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지요? 하나님 제게 당면한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가 정욕으로 잘못 쓰려고 한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4:3).
하나님은 우리에게 욕심이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고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필요는 욕구나 욕망보다 좀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욕망처럼 일시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고통이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 만족을 주고 참 평안과 풍요와 행복을 주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것들입니다. 본문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했습니다. 필요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맞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건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꼭 영적인 것들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생을 온전케 하는 것이 있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필요'입니다. 다리가 3개인 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리 하나가 약해지거나 갈라져 있거나 다른 다리와 길이가 다르다면 조그마한 힘에도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 의자는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 다리 1개의 부족한 것이 채워질 때 그 의자는 온전하게 됩니다. 그것이 채워져야 할 필요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균형 잡히고 건강한 삶을 사는 데에 부적한 것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필요인 것입니다.
필요에는 드러난 외적 필요와 감추어진 내적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 보면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왜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 보면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 빚을 졌느냐고 물으면 자기 소득보다 과소비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 습관이 있는지 파고 들면 육체적으로 절제의 훈련이 안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열등감이나 과시욕 때문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이 알아서 채워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툴어진 신앙 관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에게 불면증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잠과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근친상간을 당한 일로 인하여 스스로가 무가치한 존재라고 느끼는 상처 난 감정의 치유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청년이 아버지와 싸웠습니다. 그나 독립하여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그가 수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무시와 비난에서 비롯된 열등감과 무력감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필요를 느끼는 자에게 채우십니다.
우리 삶에 현상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필요들이 욕구나 욕망의 것들이 아닌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적 필요 뒤에 숨겨진 본질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 필요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 필요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기 때문에 필요를 채우십니다.
마태복음9:20-22과 마가복음5:25-34과 누가복음8:43-48에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에게는 계속 하혈하는 질병이 고침받아야 했습니다. 하혈이 계속되는 질병으로 이 의원 저 의원을 헤매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치료할 금전도 필요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이웃과 친구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율법에서도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긍휼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상처와 분노로 자존감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만이 자신의 혈루증을 고칠 수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정식으로 요청도 못하고 뒤에서 옷깃을 살짝 만졌습니다. 그 즉시 혈루증이 그쳤습니다. 예수님이 아시고 누가 손을 댔느냐고 하자 그 여인은 자신이 옷에 손을 댔음을 고백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눅4:48). 예수님은 그의 신체적 질병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감정적 아픔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공동체로 평안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9:2-8과 마가복음2:3-12과 누가복음5:18-26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그는 온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이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고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괄시를 당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긍휼히 여기려 해도 본인 스스로 수치심과 자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그는 인생의 고난에 대한 본질적인 죄 문제로 번민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에게는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친구 4사람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다' 하는 소문을 듣고 중풍병자를 병상에 누인 채로 메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집 안에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병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막2:5). 서기관들이 그 말을 듣고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는 말이냐'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보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어렵지만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막2:11). 중풍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셨지만 더 근본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먼저 죄에 대한 자유를 선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외적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내적인 필요도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여 온전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적 필요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적 필요를 느끼면서 그 이면에 더욱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내적 필요를 인식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 주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의 고통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구원자)임을 계시할 필요를 느낄 때나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적의 대상은 항상 자신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임을 믿고 나아가는 자에게였습니다. 마태복음9:12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3. 필요를 채우는 데 방해 요인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필요를 채우는 데 방해되는 요인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필요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부인하는 사람은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문제를 보지 못하고 필요를 부인하는 자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이혼자의 90%이상이 재혼을 하게 되는데 재혼자의 70%이상이 또 이혼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가 결혼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카운셀러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어설픈 카운셀러는 그 여자의 말만 듣고 그 여자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기기 까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니?'라고 묻자 "아니 한가지도 없어 카운셀러도 순전히 남편 잘못이라고 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카운셀러도 내담한 여자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을 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 여자도 문제의 근본적인 점을 직시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남편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혼을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필요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왜 이 사람이 내게 이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내 행동이 어떻게 전달되기에 내게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채워져야 할 감정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가 드러나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역경을 이기는 법' 등의 책으로 소개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소재한 제일침례교회(First Baptist Church) 담임목사인 찰스 스탠리(Charles Staniey)는 아버지가 9개월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부인하며 살았습니다. 누가 물으면 '나는 아버지가 없어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거든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몰라요 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어요" 했습니다. 그런데 찰스 스탠리 목사가 40대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교회 비서가 9개월 된 자신의 아기를 안고 왔습니다. 그는 그 아기를 안고 "너 참 예쁘고 착하구나" 했습니다. 그러자 아기가 목사님의 눈을 바라보며 목사님의 말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엄마와 아기가 나간 후에 '아기가 나를 알아 보았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안았을 때 자기가 알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후 기도실에서 기도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들은 어떤 숲 속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마음 속에서 그분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강렬한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그 분들 대화 한 가운데 끼어 들어 함께 웃으며 그 분들 가까이서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하나님께 "왜 아버지를 빼앗아 갔나요?" 기도하면서 부정과 부인의 껍데기가 벗어지고 아버지와의 단절로 인한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서 존재한 감정의 부정적 요인이 있어서 평생의 감정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돈이 필요할 뿐 감정적인 필요나 영적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주 넘어지면서도 넘어지게 하는 거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분이고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롬8:32). 나타나는 아픔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자기를 자신에게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위로 받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보게 할 것이고 상처를 치유하고 감정적인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4:19)
성숙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
빌 4:14-20 / 김윤기 목사
레닌그라드를 가리켜서 제2의 파리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레닌그라드의 그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정교하게 건설된 도시를 우리 한국 사람들의 기술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정교하게 건설된 도시가 바로 쌍 페트로스부르그 입니다. 일찌기 도스도예프스키(Dostoevskii, 1871-1881)가 예언하기를 "러시아가 악령에 사로 잡혀서 70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악령을 쫓아내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던 그 예언 그대로 되었습니다. 러시아 땅은 1917년 레닌 (Lenin, 1870-1924)의 혁명이 일어나서 끔찍한 살상과 파괴가 자행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서 예배당의 90%정도는 파괴했습니다. 고리고 웅장하게 잘 지어 진 성전만 남아 있는데 그 성전도 박물관이나 혹은 창고로 개조해서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70년만인 1988년 고르바쵸프에 의해서 페로스로이카가 실시됨으로 마침내 공산주의는 1991년에 몰락하계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축해 놓았지만 신앙의 부패와 교권주의들의 횡포와 불쌍한 이웃을 외면하고 교리논쟁을 일삼고 선교를 하지 않아서 심판을 받아 그런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져 예배당 문이 열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 기간 중 에게해를 건너섰습니다. 에게해는 동양과 서양의 분기점입니다. 이제 바울의 선교가 동양(아시아)에 서 서양(유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에서 바울과 실라가 안식일 날 강가에 기도처가 있는가해서 나갔다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 가족을 전도하고, 또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좇아 내 준 일로 바울은 관원에게 매를 맞고 무고히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찬미했을 때 옥문이 열리고 마침내는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주장사 루디아와 빌릴보 감옥의·간수 가정이 모체가 되어서 빌립보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성숙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성숙한 모습을 찾아보고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 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교하는 바울을 위하여 처음에는 빌립보 교회외에 다른 교회가 참여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여러 교회가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 빌립보 교회외에는 아무 교회도 그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받은 물질보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훨씬 크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의 도움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선물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 선물의 배후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의 고상한 정신을 더욱 귀중히 여겨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손수 노동을 하였습니다(살전 7:9; 살후 3:7,8).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기 위하여 여러번 그에게 쓸 것을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객관적으 로 볼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물질적으로 덜 부유 한 사람들이었지만 사도 바울을 후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항상 최선을 다하 였습니다.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은 주는 일을 계속하였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는 내가 꼭 가서 해야만이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는 내가 못가면 남을 보내고 내가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상 우수한 전도자와 선교사가 있었으나 가장 위대하였다고 한 분은 선교 역사상에서 세계선교운동을 일으킨 모라비안 교회 창설자인 진젠돌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분은 본래 귀족의 아들로 백작 벼슬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자연히 재산도 많았으나 모든 재산과 지위를 오직 세계복음전 파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불행히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큰 충돌이 있었습니다. 구교도들이 압력을 받은 불쌍한 신교도 피난민들을 영접하여 자기의 소유지를 주어 농사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제공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예배당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것이 5∼6백 명되는 교회였습니다. 이들은 진젠돌프를 중심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성례식을 하는데 온 교우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해야겠다고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5∼6백 명되는 교회에서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웨스트 인디아와 저 북방의 그린란드까지 백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평균 4∼5명에 또는 1세대에 선교사 한 사람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오스왈드 스미스라고 하는 캐나다에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별로 크지 않는 그의 교회에서 선교사 3명을 앉혀 놓고 이 사람들을 외국 선교사로 보낼 것을 모든 교우들에게 호소했던 바 지금은 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인들에는 별로 부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로 된 교회였으나 그만큼 그들의 복음선교사업이 귀중함을 알고 협력하여 선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교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쟈바싱이란 인도인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공산주의자로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부름을 받아 선교사업에 헌신할 결심을 가지고 인도에서 10명 혹은 20명을 모집하여 기도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주일날 한번씩 모여서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60명을 파송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구호는 "가라, 그렇지 않으면 보내라."입니다. 가라! 네가 선교사로 가지 않겠느냐 못 가겠으면 돈으로라도 뒷받침해서 선교사를 보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동교회에서도 2개의 신학교와 국내 12개 교회를 선교비 월 십만원씩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약간의 선교비가 좀 부족해서 지연해서 보내는 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선교비가 지연되면 교역자들이 1개월의 생활비가 없어서 굶주리지는 않는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십시일반(十匙一飯)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교회를 위해 함께 선교 대열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선교비가 없으면 기도로 도와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올라가서 어느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를 이끌고 가서 천국문을 열고 저 밑을 내려다보게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담장 사이로 내려다보니까 그 밑에는 옛날 자기가 살던 세상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까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소경이 되어버렸는데 깊은 낭떠러지로 향하여 걸어갑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더이상 낙원에 있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는 세상에 내려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저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안내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저를 빨리 내려보내세요"라고 소리치다가 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 그 사람은 안내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선교국가에게 빚을 지고 삽니다 나도 선교 비나 기도로 하나님의 일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2.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18절)
본문 18절에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 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 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선물을 보내준 빌립보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감사의 태도로 경 의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비는 '향기로운 제물'로서 하나님이 받으셨 습니다. '향기로운 제물'은 구약의 제사의식을 반영하는 표현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 것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헌신적인 삶을 상징합니다(롬 12:1).
성경에는 성도가 천국에서 상을 받는 기록이 많습니다. 성도의 생애와 행 실과 신앙 인격과 그 공력을 불로 시험하는 과정이 있습니다(고전3:12-15). 금, 은, 보석, 나무, 집, 풀 등의 질과 등급이 있어 어떤 성도는 불 속에서 다 타버리고 상이 하나도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고 크고 많은 면류관을 얻을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전도한 영혼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재 림 할 때에 그들은 전도한 사람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영광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살전2:19). 또한 바울은 자기가 전도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요 기쁨이요 면류관인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 (빌4:1). 다니엘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사람은 별과 같이 영원토 록 비치리라 했습니다.(단12:3) 전도하지 않아서 멸망한 피 값을 우리에게서 받는다는 무서운 말씀도 있습니다. (겔3:18) 전도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피플스 교회 같은 경우는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치고는 건물이 너무 낡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해외에 15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관 바닥 중앙에 다음과 같은 표어를 새겨 넣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세계 선교"(World mission first)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세계 선교를 교회의 제일 과업으로 삼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많은 상급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교회에 선교비로 드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에게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십니다.(19절)
본문 19절의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은 그들이 풍족한 가 운데서가 아니라 부족한 형편 가운데서도 바울이 사역을 물질로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는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로 선교하는 사람이나 국가를 반 드시 축복을 하십니다.
독일이 세계 선교와 전도를 떠맡았을 때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고, 독일이 선교를 그치자 세계의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그 후 영국이 세계의 선교와 전도의 사명을 도맡았을 때에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고, 영국이 선교를 그만 두니까 이등국으로 내려갔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된 것도 전 세계적으로 선교와 전도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도 쓸 것을 채워 주시는 성도나 교회나 국가가 되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선교 대열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쓸 것을 공급받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
빌4:21-23
오승재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 <제일교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K시에 역사가 오래되고 큰 건물을 자랑하며 많은 헌금과 재력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제일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누더기를 입은 거지가 찾아 왔습니다. 안내를 보고 있던 집사님은 퉁명스럽게 "여보시오 어딜 올라오는 거요, 내려가 있어요" 하고 돈을 줍니다. 그러자 거지는 돈을 받지 않고 예배를 보러 왔다고 안내위원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부목사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예배보는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럼 성함은" "나 김부자요" "누구의 소개로 왔습니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듣고 왔소"
그날 거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다 끝나자 부목사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그게 정말이요"라고 말하고 다음 일요일에는 더 많은 친구를 데려오겠다며 살아졌습니다.
다음 주였습니다. 어른 거지 아이 거지 10여 명이 깡통을 차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거지들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헌금 주머니도 그들 앞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지들의 문제로 제직회가 열렸습니다. 제직회에서는 의견이 나누어졌습니다. 거지가 오는 것을 막자는 측에서는 거지 떼가 오면 교인이 떨어지니 청년들을 동원하여 거지가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대한민국 거지가 다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거지가 오는 것을 막는 것은 부당하니 구제부에서 옷을 입혀 같이 예배를 드리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장로는 거지들은 보통 거지가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온 것 같다며 거지의 출입을 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거지들은 그 교회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난 후 아이 거지가 부목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왕초 거지가 보자는 것입니다. 아이들 따라 부목사는 다리 밑에 누워있는 왕초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부목사를 보자 그는 반가운 듯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부목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구겨진 1000원짜리 지폐였습니다. 헌금을 하고 싶었지만 헌금 바구니가 자신에게는 오지 않아 드리지 못한 헌금이었습니다. 그는 부목사에게 무슨 말인가 가늘게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작가는 신앙인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만약 우리가 제일교회 성도라면 어떻게 했을 것같습니까?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구유에 나시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대학도 다니지 않았고, 우등상 한 번도 받지 못했으며, 고급 승용차 한번 타보지 않았고, 20평짜리 아파트에서 교향곡 한번 들어보지 못한 예수께서 더벅머리에 수염도 깎지 않고 귀신들린 자, 간음한 자, 세리, 굶주린 자, 소외된 자와 함께 들어오신다면 그 주위에 누가 앉겠습니까? 외적 요인으로 계층화되고 차별화된 도시 화려한 교회들, 그리고 그 교회에 다님으로 자신을 차별된 교인으로 대리 만족을 누리며 사는 교인들, 수적 팽창이 능력으로 착각하는 종교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종교인들, 그런 교회에 해어진 샌들을 신고 병든 자를 돌보느니라 한 달 동안 빨지 못한 너털거리는 옷을 입은 예수께서 들어오신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할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인 수 1만 명의 미국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했답니다. 청빙받은 담임목사는 노숙자가 되어 교회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렸답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하러 온 교인들에게 “배가 고픕니다. 음식이 필요한데 돈이 없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돈이나 음식을 주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답니다. 단지, 불과 3명만이 그에게 굿모닝 인사를 하였을 뿐 모두 다 그를 지나쳐 교회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예배 위원들에게 저지를 당하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앉게 되었답니다. 곧이어 사회자가 올라와서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담임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를 했답니다. “환영합니다. 스티펙 목사님. 교회 영접위원과 안내위원들이 목사님을 맞이하려고 약 1시간 전부터 교회 문밖에 나가 있었는데 미처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오셨는지요? 목사님 오셨으면 앞으로 나오시겠습니까?” 교인들 모두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기대에 찬 눈길로 새로 부임한 목사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모든 교인들은 경악했답니다. 교인들에게, 안내위원들에게, 예배위원들에게 냉대를 받고 맨 뒤로 쫓겨가 앉아 있었던 그 노숙자가 벌떡 일어나 성킁성큼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왔답니다. 바로 노숙자로 변신한 스티펙 목사였답니다. 그는 강단에 서자마자 곧바로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성경을 읽은 후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 주일 예배 직전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교인들에게 말하면서, “저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회들도 많고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제자들이 모이는 교회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라고 물으면서, “우리 교인들은 매주 (주일예배) 한 시간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옆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첫 부임 설교를 했답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인으로 한 지역교회에서 같은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란 서로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할까요?
1. 아름다운 교제의 출발은 서로 인사를 잘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21,22).
구원은 홀로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생활에는 세 가지 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관계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 셋째는 사역과의 관계입니다. 이 세 축이 건강하여야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름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방울이 만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듯이 우리 신앙인들은 한 지역 교회에서 만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처럼 만나 추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마감하면서 어떻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각각 문안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문안하라는 말은 인사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 편지를 받는 지도자들에게 바울의 안부를 각 성도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는 말도 되지만 성도가 서로 인사할 것을 권면하는 말도 됩니다. 바울이 인사하라고 한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는 한 가지 조건으로 지역이나 학연이나 혈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신서를 쓸 때 바울이 아주 강조한 말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마감을 할 때 여러 사람을 열거하면서 인사하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롬16:3,5,6,7,8,......23) 고린도 전서(고전16:20) 고린도 후서에서도(고후13:11),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에서 계속 강조하여 문안을 권면하고 문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성도와 관계에 있어 인사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자신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인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함께 있는 형제들 아마 디모데나 누가일 것입니다. 그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 집 사람 몇이 문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사 집 사람은 로마 정부의 가장 높은 관원들로부터 황제에게 고용된 가장 비천한 노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들은 옥중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왕궁의 고급 신하이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종들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시작을 문안으로 시작하고 마감을 문안으로 마감합니다. 가장 고상한 형태의 참된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고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인종이나 신분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한 가지 이유로 연합과 하나됨으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서로 인사하는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놀라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건물 형식 의식 성직 제도 등이 중요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여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핍박을 피해 카타콤의 지하에 피해 살았는데 어느 카타콤의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교제는 집단적 관계보다는 개인적 관계입니다. 몇 천명 몇 만명이 모이느냐가 문제가가 아니가 그곳에 개인적인 교제들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신앙인끼리 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문안(問安)은 문자 그대로 상대의 상황을 묻는 것입니다. 교회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교회가 갖는 독특한 정체성이자 사랑의 방식입니다. 서로 문안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관심을 갖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순종이 필요한 명령입니다. 정서적인 접근이나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의지적인 접근의 영역입니다. 정서가 허락하는 사람만, 감정이 허락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을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미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어 주었습니다. 로마서 5 장 5 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얼마든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강의실이나 극장이나 음식점과는 다른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하나가 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나아가 서로 종노릇하고(갈5:13), 서로 받고(롬15:7), 서로 기도하고(약5:16), 서로 격려하고(히10:24), 서로 짐을 지라(갈6:2)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아름다운 교제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름다운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서로 인사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사하는 것 그것 별거 아닌 것같지만 인사만 잘 해도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고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인사만 잘해도 먹고는 산다(하수근 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사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하수근 목사는 인사는 관심이고 인사는 정복이고, 인사는 나눔이고 인사는 소통이며 인사는 겸손이고 인사는 돌봄이며, 인사는 최고의 리더십이고, 인사는 사랑이며, 인사는 예배이고 인사는 복음이며, 인사는 전도이고 인사는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야신(野神)이라 불릴만큼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전략,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은 선수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인사하는 것을 가장 먼저 가르친 이유는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이고, 존중이 없다는 것은 겸손이 없고, 겸손이 없으면 오만하다는 뜻이다. 오만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선수들로는 승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게 인사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언젠가 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인사를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심방 가서 아이들과 같이 예배드릴 때 매일 이런 인사를 부모님께 하라고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인사만 잘 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이주연 목사는 “때론 백권의 책보다 한 번의 인사가 더 값질 수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선수들의 발목에 붕대나 감아주고, 경기장에 몰래 숨어들어가다가 경비원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던 운동을 꽤나 좋아했지만 가난한 월급쟁이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미국 프로농구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구단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팻 크로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담아 <내 안의 위대함을 느껴라>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자기 삶을 개척한 비법에 대하여 최우선으로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을 꼽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적정한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인사가 기회를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반기는 인사 하나가 큰 일을 이루는 현관의 문을 열어 주고 기회를 여는 길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큰 비용을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니라 진정으로 반가운 웃음으로 전하는 인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는데 참으로 간단하고 쉬운 것이 인사인데 이 간단한 인사를 잃어버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인사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전류와 같은 것인데 서로 깜깜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례함의 비용>이라는 책을 쓴 크라스틴 포래스는 무례함 역시 전염된다고 합니다. 무례함은 사방으로 퍼지면서 접촉한 사람들 모두의 삶을 무겁게 만드는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무례함을 그대로 방치하면 조직 전체를 풀죽게 만들 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은 덜 친절하고 덜 차분하고 덜 활기차고 덜 즐겁게 만든다고 합니다. 미국심리학회는 무례함으로 직장 내 스트레스가 미국 경제에 입히는 피해액이 연간 5,000억 달러(약 542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답니다. 크리스틴 피어슨 교수와 저자가 17개 국가의 중간관리자와 평직원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무례함을 당하는 쪽에 해당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48%가 노동력 투입량을 고의로 줄였답니다. 38%가 성과의 품질을 고의로 저하시켰고, 63%가 가해자를 회피하느라 노동 시간을 허비했으며, 78%가 조직에 대한 헌신성이 저하되었답니다. <포춘> 1,000대 기업의 중간관리자와 최고관리자들은 직원들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고 무례함의 후유증을 해결하는 데 근무 시간의 13%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인사하지 않는 상점 가기 싫어합니다. 무례한 당, 무례한 회사, 무례한 병원, 무례한 가정, 무례한 교회에 사람들은 머물길 싫어합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라고 말씀합니다. 예의가 밥먹여주냐고 무례하게 행하면 결국 아내도 밥을 안 해 줍니다. 예의가 밥 먹여줍니다. 인사만 잘해도 잘 삽니다.
2. 아름다운 교를 끝까지 유지하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23)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립보서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심령에 있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교회 내에서 권력다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에게도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축복 기도는 바울 서신 첫머리와 끝부분에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습니다.(롬1:7 ,롬16:27; 고전1:3,고전16:24; 고후1:1-2,고후13:13; 갈1:3,갈6:18; 엡1:2, 엡16:23-24; 빌1:2,빌4:23; 골1:2,골4:18; 살전1:1,살전5:28,살후1:2,살후3:18; 딤전1:2,딤전6:21,딤후1:2,딤후4:22; 딛1:4,딛3:15; 몬1:3,몬1:25) 바울의 13서신 중 26문장이 있습니다. 당시 일반 서신들은 안녕히라는 끝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은혜를 강조하며 끝냅니다. 바울이 성도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중요시 여겼는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은혜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성도의 교제에서도 은혜는 기초요 윤활유요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의 문제가 해결될 수도 없고, 은혜 아니면 두 여인에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교훈은 했지만 권력다툼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바울에게 선교 후원금을 보낼 수도 없고, 은혜 아니면 바울과 끝까지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 교회들에게 편지 하면서 항상 은혜를 강조하는 이유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면 초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이 은혜 아니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들이 대부분 그 편지를 받는 교회에 문제가 있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고린고 교회를 보십시오. 교회 분열 문제, 십가에 대한 오해,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 근친 상간 문제, 불신 법정에 송사 문제, 도덕적 태만, 이혼, 우상 제물, 방언 부활 교리 등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교훈하고 마지막 은혜를 간구합니다. 교훈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서로 누리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평안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 인간은 한순간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영혼 구원을 받는데도 은혜가 필요하지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서로 살면서 평생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는데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 떨어지면 그렇게도 좋은 관계도 한 순간에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다윗을 그렇게 아끼던 사울이 은혜가 떨어지니까 한순간에 시기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죽여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성자로 은혜가 떨어지면 악마로 변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꿈을 꾸었답니다. 하나님이 한 아름다운 자리를 그에게 보여 주며 그 자리는 프렌체스코의 자리이니 아무도 안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는 너무나도 부러워서 선생님 어떻게 선생님은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가장 큰 죄인이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제자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주었다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은혜 충만할 때는 모세가 불평하는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지만 은혜 떨어지면 같은 모세지만 지팡이로 반석을 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은혜 충만하면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성전을 건축하지만 똑같은 솔로몬인데도 은혜 떨어지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수많은 여인들을 첩으로 거르리며 정략 결혼을 합니다. 은혜 충만하면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무너뜨리지만 은혜 떨어지면 똑같은 다윗이지만 이웃 여인을 탐하여 간음하고 살인하는 짓을 합니다. 유다의 8대왕 요아스가 은혜가 충만할 때는 얼마나 선한 왕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지니까 배은망덕한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성전에 피해 목숨을 건졌는데 성전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왕이 되자 마자 무너진 성전을 보수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은혜 떨어지자 성전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부담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부담이 되어 선지자를 통해 전해주는 말이 자신을 정죄하는 말로 받아들여 집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바른 말을 전해 주는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 등의 열매는 사라지고 거짓, 교만, 탐욕, 보복, 악독, 변절, 시기, 이기심, 증오, 분노, 배은망덕, 음란, 우상 숭배 등이 마음을 지배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스탈린(Stalin)은 기독교 계통 학교를 다니며 신학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지만 은혜가 떨어지지까 아름다운 관계를 파괴하는 살인마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김일성도 모친이 권사였고 본인도 교회를 다녔지만 은혜가 떨어지니까 동족 전쟁을 일으켰고 북한 땅의 교회를 없애버린 악마로 변한 것입니다.
강도도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성자도 은혜가 떨어지면 마귀로 변합니다. 천사도 은혜 떨어져 교만해 지면 마귀로 변하지만 살인자도 은혜를 받으면 성자가 됩니다.
목사도 은혜 충만하여야 성도를 사랑하지 은혜 떨어지면 성도를 종교 사업 수단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다. 집이 참 좋아 보였답니다. "집사님, 집이 참 좋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예, 저희 남편이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서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요." 아들이 쓰는 방을 보았더니 벽에 상장들이 많이 붙어 있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물어 보았답니다. "아들이 공부를 참 잘하는 모양이지요?" 그러자 집사님은 기분이 좋아서 대답했답니다. "이 집안의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는 말은 늘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내친 김에 목사님은 한 마디 더 칭찬을 해주었답니다. "집사님은 인물도 예쁘시니 참 복도 많으십니다." 그런데도 그 집사님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인물이야 부모님을 잘 만난 덕분이지요." 잠시 뒤에 집사님은 다과를 준비해 나왔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함께 간 사람들도 덩달아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집사님을 보면서 목사님은 넌지시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는 다과를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사는 존재랍니다. 제가 다시 물어볼 테니까 이번에는 잘 생각해서 대답해 보세요." 그러면서 차례차례 다시 물어답니다. 집사님도 목사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바르게 대답했답니다. "이 집이 참 좋군요."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아들이 공부를 잘 하는군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지요." "집사님은 남편도 잘 만나셨고, 아들도 잘 두셨고, 인물도 예쁘시니 참 복이 많으십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남편과 아내가 아름다운 관계로 끝까지 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은혜를 풍성히 부어 주어 건강하게 해 달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과 부모가, 목회자와 성도가, 성도와 성도가 숨 멈추는 순간까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서로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한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처럼 아름다운 교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
빌 4:21-22 / 김필곤 목사
오승재 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 <제일교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K시에 역사가 오래되고 큰 건물을 자랑하며 많은 헌금과 재력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제일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누더기를 입은 거지가 찾아 왔습니다. 안내를 보고 있던 집사님은 퉁명스럽게 "여보시오 어딜 올라오는 거요, 내려가 있어요" 하고 돈을 줍니다. 그러자 거지는 돈을 받지 않고 예배를 보러 왔다고 안내위원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부목사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예배보는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럼 성함은" "나 김부자요" "누구의 소개로 왔습니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듣고 왔소"
그날 거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다 끝나자 부목사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그게 정말이요"라고 말하고 다음 일요일에는 더 많은 친구를 데려오겠다며 살아졌습니다.
다음 주였습니다. 어른 거지 아이 거지 10여 명이 깡통을 차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거지들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헌금 주머니도 그들 앞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지들의 문제로 제직회가 열렸습니다. 제직회에서는 의견이 나누어졌습니다. 거지가 오는 것을 막자는 측에서는 거지 떼가 오면 교인이 떨어지니 청년들을 동원하여 거지가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대한민국 거지가 다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거지가 오는 것을 막는 것은 부당하니 구제부에서 옷을 입혀 같이 예배를 드리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장로는 거지들은 보통 거지가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온 것 같다며 거지의 출입을 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거지들은 그 교회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난 후 아이 거지가 부목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왕초 거지가 보자는 것입니다. 아이들 따라 부목사는 다리 밑에 누워있는 왕초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부목사를 보자 그는 반가운 듯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부목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구겨진 1000원짜리 지폐였습니다. 헌금을 하고 싶었지만 헌금 바구니가 자신에게는 오지 않아 드리지 못한 헌금이었습니다. 그는 부목사에게 무슨 말인가 가늘게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작가는 신앙인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만약 우리가 제일교회 성도라면 어떻게 했을 것같습니까?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구유에 나시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대학도 다니지 않았고, 우등상 한 번도 받지 못했으며, 고급 승용차 한번 타보지 않았고, 20평짜리 아파트에서 교향곡 한번 들어보지 못한 예수께서 더벅머리에 수염도 깎지 않고 귀신들린 자, 간음한 자, 세리, 굶주린 자, 소외된 자와 함께 들어오신다면 그 주위에 누가 앉겠습니까? 외적 요인으로 계층화되고 차별화된 도시 화려한 교회들, 그리고 그 교회에 다님으로 자신을 차별된 교인으로 대리 만족을 누리며 사는 교인들, 수적 팽창이 능력으로 착각하는 종교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종교인들, 그런 교회에 해어진 샌들을 신고 병든 자를 돌보느니라 한 달 동안 빨지 못한 너털거리는 옷을 입은 예수께서 들어오신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할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인 수 1만 명의 미국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했답니다. 청빙받은 담임목사는 노숙자가 되어 교회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렸답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하러 온 교인들에게 “배가 고픕니다. 음식이 필요한데 돈이 없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돈이나 음식을 주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답니다. 단지, 불과 3명만이 그에게 굿모닝 인사를 하였을 뿐 모두 다 그를 지나쳐 교회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예배 위원들에게 저지를 당하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앉게 되었답니다. 곧이어 사회자가 올라와서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담임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를 했답니다. “환영합니다. 스티펙 목사님. 교회 영접위원과 안내위원들이 목사님을 맞이하려고 약 1시간 전부터 교회 문밖에 나가 있었는데 미처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오셨는지요? 목사님 오셨으면 앞으로 나오시겠습니까?” 교인들 모두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기대에 찬 눈길로 새로 부임한 목사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모든 교인들은 경악했답니다. 교인들에게, 안내위원들에게, 예배위원들에게 냉대를 받고 맨 뒤로 쫓겨가 앉아 있었던 그 노숙자가 벌떡 일어나 성킁성큼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왔답니다. 바로 노숙자로 변신한 스티펙 목사였답니다. 그는 강단에 서자마자 곧바로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성경을 읽은 후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 주일 예배 직전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교인들에게 말하면서, “저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회들도 많고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제자들이 모이는 교회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라고 물으면서, “우리 교인들은 매주 (주일예배) 한 시간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옆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첫 부임 설교를 했답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인으로 한 지역교회에서 같은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란 서로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할까요?
1. 아름다운 교제의 출발은 서로 인사를 잘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21,22).
구원은 홀로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생활에는 세 가지 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관계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 셋째는 사역과의 관계입니다. 이 세 축이 건강하여야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름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방울이 만나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듯이 우리 신앙인들은 한 지역 교회에서 만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처럼 만나 추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마감하면서 어떻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각각 문안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문안하라는 말은 인사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 편지를 받는 지도자들에게 바울의 안부를 각 성도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는 말도 되지만 성도가 서로 인사할 것을 권면하는 말도 됩니다. 바울이 인사하라고 한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는 한 가지 조건으로 지역이나 학연이나 혈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신서를 쓸 때 바울이 아주 강조한 말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마감을 할 때 여러 사람을 열거하면서 인사하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롬16:3,5,6,7,8,......23) 고린도 전서(고전16:20) 고린도 후서에서도(고후13:11),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에서 계속 강조하여 문안을 권면하고 문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성도와 관계에 있어 인사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자신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인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함께 있는 형제들 아마 디모데나 누가일 것입니다. 그들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 집 사람 몇이 문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사 집 사람은 로마 정부의 가장 높은 관원들로부터 황제에게 고용된 가장 비천한 노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들은 옥중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왕궁의 고급 신하이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종들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시작을 문안으로 시작하고 마감을 문안으로 마감합니다. 가장 고상한 형태의 참된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고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인종이나 신분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한 가지 이유로 연합과 하나됨으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서로 인사하는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놀라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건물 형식 의식 성직 제도 등이 중요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여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핍박을 피해 카타콤의 지하에 피해 살았는데 어느 카타콤의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교제는 집단적 관계보다는 개인적 관계입니다. 몇 천명 몇 만명이 모이느냐가 문제가가 아니가 그곳에 개인적인 교제들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신앙인끼리 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문안(問安)은 문자 그대로 상대의 상황을 묻는 것입니다. 교회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교회가 갖는 독특한 정체성이자 사랑의 방식입니다. 서로 문안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관심을 갖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순종이 필요한 명령입니다. 정서적인 접근이나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의지적인 접근의 영역입니다. 정서가 허락하는 사람만, 감정이 허락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을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미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어 주었습니다. 로마서 5 장 5 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도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얼마든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강의실이나 극장이나 음식점과는 다른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하나가 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나아가 서로 종노릇하고(갈5:13), 서로 받고(롬15:7), 서로 기도하고(약5:16), 서로 격려하고(히10:24), 서로 짐을 지라(갈6:2)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아름다운 교제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름다운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서로 인사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사하는 것 그것 별거 아닌 것같지만 인사만 잘 해도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고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 <인사만 잘해도 먹고는 산다(하수근 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사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하수근 목사는 인사는 관심이고 인사는 정복이고, 인사는 나눔이고 인사는 소통이며 인사는 겸손이고 인사는 돌봄이며, 인사는 최고의 리더십이고, 인사는 사랑이며, 인사는 예배이고 인사는 복음이며, 인사는 전도이고 인사는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야신(野神)이라 불릴만큼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전략,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은 선수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인사하는 것을 가장 먼저 가르친 이유는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이고, 존중이 없다는 것은 겸손이 없고, 겸손이 없으면 오만하다는 뜻이다. 오만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선수들로는 승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게 인사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언젠가 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인사를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심방 가서 아이들과 같이 예배드릴 때 매일 이런 인사를 부모님께 하라고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인사만 잘 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이주연 목사는 “때론 백권의 책보다 한 번의 인사가 더 값질 수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선수들의 발목에 붕대나 감아주고, 경기장에 몰래 숨어들어가다가 경비원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치던 운동을 꽤나 좋아했지만 가난한 월급쟁이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미국 프로농구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구단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팻 크로스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담아 <내 안의 위대함을 느껴라>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자기 삶을 개척한 비법에 대하여 최우선으로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을 꼽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적정한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인사가 기회를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반기는 인사 하나가 큰 일을 이루는 현관의 문을 열어 주고 기회를 여는 길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큰 비용을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니라 진정으로 반가운 웃음으로 전하는 인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는데 참으로 간단하고 쉬운 것이 인사인데 이 간단한 인사를 잃어버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인사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전류와 같은 것인데 서로 깜깜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례함의 비용>이라는 책을 쓴 크라스틴 포래스는 무례함 역시 전염된다고 합니다. 무례함은 사방으로 퍼지면서 접촉한 사람들 모두의 삶을 무겁게 만드는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무례함을 그대로 방치하면 조직 전체를 풀죽게 만들 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은 덜 친절하고 덜 차분하고 덜 활기차고 덜 즐겁게 만든다고 합니다. 미국심리학회는 무례함으로 직장 내 스트레스가 미국 경제에 입히는 피해액이 연간 5,000억 달러(약 542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답니다. 크리스틴 피어슨 교수와 저자가 17개 국가의 중간관리자와 평직원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무례함을 당하는 쪽에 해당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48%가 노동력 투입량을 고의로 줄였답니다. 38%가 성과의 품질을 고의로 저하시켰고, 63%가 가해자를 회피하느라 노동 시간을 허비했으며, 78%가 조직에 대한 헌신성이 저하되었답니다. <포춘> 1,000대 기업의 중간관리자와 최고관리자들은 직원들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고 무례함의 후유증을 해결하는 데 근무 시간의 13%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인사하지 않는 상점 가기 싫어합니다. 무례한 당, 무례한 회사, 무례한 병원, 무례한 가정, 무례한 교회에 사람들은 머물길 싫어합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라고 말씀합니다. 예의가 밥먹여주냐고 무례하게 행하면 결국 아내도 밥을 안 해 줍니다. 예의가 밥 먹여줍니다. 인사만 잘해도 잘 삽니다.
2. 아름다운 교제를 끝까지 유지하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23)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빌립보서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심령에 있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교회 내에서 권력다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에게도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축복 기도는 바울 서신 첫머리와 끝부분에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습니다.(롬1:7 ,롬16:27; 고전1:3,고전16:24; 고후1:1-2,고후13:13; 갈1:3,갈6:18; 엡1:2, 엡16:23-24; 빌1:2,빌4:23; 골1:2,골4:18; 살전1:1,살전5:28,살후1:2,살후3:18; 딤전1:2,딤전6:21,딤후1:2,딤후4:22; 딛1:4,딛3:15; 몬1:3,몬1:25) 바울의 13서신 중 26문장이 있습니다. 당시 일반 서신들은 안녕히라는 끝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은혜를 강조하며 끝냅니다. 바울이 성도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중요시 여겼는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은혜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성도의 교제에서도 은혜는 기초요 윤활유요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의 문제가 해결될 수도 없고, 은혜 아니면 두 여인에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교훈은 했지만 권력다툼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바울에게 선교 후원금을 보낼 수도 없고, 은혜 아니면 바울과 끝까지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 교회들에게 편지 하면서 항상 은혜를 강조하는 이유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면 초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이 은혜 아니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들이 대부분 그 편지를 받는 교회에 문제가 있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고린고 교회를 보십시오. 교회 분열 문제, 십가에 대한 오해,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 근친 상간 문제, 불신 법정에 송사 문제, 도덕적 태만, 이혼, 우상 제물, 방언 부활 교리 등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교훈하고 마지막 은혜를 간구합니다. 교훈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서로 누리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평안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 인간은 한순간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영혼 구원을 받는데도 은혜가 필요하지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서로 살면서 평생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는데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 떨어지면 그렇게도 좋은 관계도 한 순간에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다윗을 그렇게 아끼던 사울이 은혜가 떨어지니까 한순간에 시기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죽여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성자로 은혜가 떨어지면 악마로 변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꿈을 꾸었답니다. 하나님이 한 아름다운 자리를 그에게 보여 주며 그 자리는 프렌체스코의 자리이니 아무도 안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는 너무나도 부러워서 선생님 어떻게 선생님은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가장 큰 죄인이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제자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주었다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은혜 충만할 때는 모세가 불평하는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지만 은혜 떨어지면 같은 모세지만 지팡이로 반석을 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은혜 충만하면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성전을 건축하지만 똑같은 솔로몬인데도 은혜 떨어지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수많은 여인들을 첩으로 거르리며 정략 결혼을 합니다. 은혜 충만하면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무너뜨리지만 은혜 떨어지면 똑같은 다윗이지만 이웃 여인을 탐하여 간음하고 살인하는 짓을 합니다. 유다의 8대왕 요아스가 은혜가 충만할 때는 얼마나 선한 왕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지니까 배은망덕한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성전에 피해 목숨을 건졌는데 성전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왕이 되자 마자 무너진 성전을 보수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은혜 떨어지자 성전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부담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부담이 되어 선지자를 통해 전해주는 말이 자신을 정죄하는 말로 받아들여 집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바른 말을 전해 주는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 등의 열매는 사라지고 거짓, 교만, 탐욕, 보복, 악독, 변절, 시기, 이기심, 증오, 분노, 배은망덕, 음란, 우상 숭배 등이 마음을 지배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스탈린(Stalin)은 기독교 계통 학교를 다니며 신학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지만 은혜가 떨어지지까 아름다운 관계를 파괴하는 살인마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김일성도 모친이 권사였고 본인도 교회를 다녔지만 은혜가 떨어지니까 동족 전쟁을 일으켰고 북한 땅의 교회를 없애버린 악마로 변한 것입니다.
강도도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성자도 은혜가 떨어지면 마귀로 변합니다. 천사도 은혜 떨어져 교만해 지면 마귀로 변하지만 살인자도 은혜를 받으면 성자가 됩니다.
목사도 은혜 충만하여야 성도를 사랑하지 은혜 떨어지면 성도를 종교 사업 수단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다. 집이 참 좋아 보였답니다. "집사님, 집이 참 좋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예, 저희 남편이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서 열심히 일한 덕분이지요." 아들이 쓰는 방을 보았더니 벽에 상장들이 많이 붙어 있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물어 보았답니다. "아들이 공부를 참 잘하는 모양이지요?" 그러자 집사님은 기분이 좋아서 대답했답니다. "이 집안의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는 말은 늘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내친 김에 목사님은 한 마디 더 칭찬을 해주었답니다. "집사님은 인물도 예쁘시니 참 복도 많으십니다." 그런데도 그 집사님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인물이야 부모님을 잘 만난 덕분이지요." 잠시 뒤에 집사님은 다과를 준비해 나왔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함께 간 사람들도 덩달아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집사님을 보면서 목사님은 넌지시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는 다과를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사는 존재랍니다. 제가 다시 물어볼 테니까 이번에는 잘 생각해서 대답해 보세요." 그러면서 차례차례 다시 물어답니다. 집사님도 목사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바르게 대답했답니다. "이 집이 참 좋군요."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아들이 공부를 잘 하는군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지요." "집사님은 남편도 잘 만나셨고, 아들도 잘 두셨고, 인물도 예쁘시니 참 복이 많으십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남편과 아내가 아름다운 관계로 끝까지 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은혜를 풍성히 부어 주어 건강하게 해 달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과 부모가, 목회자와 성도가, 성도와 성도가 숨 멈추는 순간까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서로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한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처럼 아름다운 교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가이사집 사람들
빌 4:21-23 / 순상률 목사
세기의 전도자 바울이 생애 마지막 전도지인 로마에서의 행적은 상상을 초월하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순풍에 돛을 올린 배가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항해하듯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가호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종횡무진 복음의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4차 여행은 말이 전도여행이지 사실은 죄수의 신분으로 군인들에게 호송되어 갔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옥중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구금된 상태로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 주옥같은 서신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디모데후서)을 기록하였고, 또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빌립보 교회가 위문 사절로 보낸 에바브라 디도 편에 본서를 보내면서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 문안인사를 하였습니다. 본문 21-22절에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바울과 함께 믿음의 생활을 하며 로마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는 성도들과 그 중에도 가이사집 사람들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말씀 중에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특징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옥중에서 얻은 신자들입니다.
전도자에게는 복음 전도의 열정과 함께 전도하여 얻게 되는 복음의 열매를 두고 무한한 보람과 긍지를 가집니다. 죄와 죽음 아래 얽매였던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런 자들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나 디도를 그렇게 불렀고(딤전 1:18, 딛 1:4), 특히 로마 옥중에서 전도한 오네시모에게는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고 하였습니다(몬 1:10). 여기 말하는 가이사집 사람들도 로마에서 구금되어 있던 상황에서 얻은 전도의 열매들입니다.
(1) 복음 전도의 열정
사도 바울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빌 3:12).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붙잡힌 후로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동안 소아시아 일대를 휩쓸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고린도 등 희랍의 문화권을 장악하면서 드디어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 진출한 것입니다. 그가 기록한 로마서 1:13에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전도에 대한 열정은 단순한 열심에서라기보다 그 자신이 신뢰하는 복음의 위대성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한 후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채 근위병들의 감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엡 6:20).
(2)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요 은혜입니다. 바울 자신은 일찍부터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가 3차 여행을 마치고 에베소를 떠나면서 “내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고 그 뜻을 피력하였습니다(행 19:21).
그러나 그의 의도하던 로마 전도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유대인 폭도들에 의해서 테러를 당하고 천부장의 군사들에게 결박당한 것으로 무산되었습니다(행 21:30-36). 그 이후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 25:10).
이후 총독의 명에 따라 바울은 「아구사도대」라는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에 의해서 로마까지 호송되어 갔습니다. 그들이 타고 가던 알렉산드리아 배가 그레데 해역에서 광풍을 만나 죽음의 위기를 당했지만 그 때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능력을 행하게 하셔서 276명의 선원과 승객을 구조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중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말한 특공대가 40여 명이나 있었는데, 이런 위험 속에서 하나님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호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3) 복음의 신비로운 능력
로마서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신비로운 역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행사합니다. 마치 작은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로 자라고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놓은 적은양의 누룩이 전부를 부풀게 하듯이(마 13:31-33), 거기에 접하기만 하면 그 심령을 파고들어 변화를 일으키고 맙니다.
바울의 경우 철저하게 군사들에 감시당하고 있어서 스스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런 감옥생활의 제약 속에서 어떻게 각계각층의 그 많은 사람을 전도하며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8:30-31에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Ⅱ. 환난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반대개념으로 인식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로부터 납세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21).
(1) 기독교 박해의 상징인 가이사
가이사(Caesar)라는 이름은 로마 황제의 칭호입니다. BC208년 집정관이 된 섹스투스 줄리어스(Sextus Julius Caesar)에게 처음 붙여진 이름인데 그 명성을 크게 떨친 사람은 BC100-40동안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던 줄리어스 시저(C. Julius Caesar)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 중 역사가인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과 활동연대를 밝히면서 당시 가이사의 이름도 기록하였습니다. 가령 예수님 탄생과 관련하여 천하로 호적하게 한 사람은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BC 31~AD14)이고, 세례요한이 전도를 시작할 때는 그의 후임인 가이사 디베료(Tiberius)로 밝혀 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전도하고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의 가이사는 악명 높은 네로(Nero, AD54~68)황제입니다. 사도시대 이후 열 명의 가이사가 박해자로 이름을 남겼는데 그 중에도 네로가 가장 악랄하고 잔혹하게 교회를 박멸하려 했습니다. 네로는 일찍이 스토아(Stoa)철학의 태두인 세네카(Seneca Lucius)를 스승으로 두고 상당기간 선정을 베풀며 좋은 정치를 할 것 같다가 얼마 안가서 잔인한 본성을 들어내며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죽였고, 스승인 세네카를 위시하여 시위대장 불루스, 왕후 옥타비아 등 무고한 사람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AD 62년 로마 도시가 절반이나 소실된 대화재 때는 기독교인이 방화했다고 누명을 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감행했으며 그의 재위 기간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를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AD 68년 자기 손으로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였습니다.
(2)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
어느 시대나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는 피 흘리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활동할 당시에도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핍박이 자행되었는데 이것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한(요 1:11) 성경 말씀과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요 3:19)이 응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의 가이사들이 교회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첫째는 국가관입니다. 로마 정부는 국가지상(國家至上)주의인데 반하여 기독교는 세상 나라의 멸망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둘째는 비밀 결사(結社)문제입니다. 로마 정부의 허락 없이는 어떤 단체 활동도 못하게 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정기 모임을 가졌습니다. 셋째는 로마인들의 미신적 사상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는 것은 기독교인 때문이라는 말을 퍼뜨렸고, 그래서 더 미움을 사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사회적 풍습 때문입니다. 그 당시 부유층이나 귀족은 사치하고 음란한데 반하여 기독교인들은 이런 것을 배격하고 경건생활을 일삼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격리 되어 토굴과 암혈과 광야와 산중으로 유리하며 숨어 살았습니다(히 11:35-38).
(3) 박해 속에서 승리한 믿음
사도 베드로는 그 당시 환난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7).
실제로 핍박 속에서도 견디고 승리한 그들의 믿음은 위대한 승리의 미담으로 교회사에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초기 기독교도들이 수백 년간 숨어 지냈던 지하공동묘지(Catacomb)와 또는 맹수에게 찢겨 죽게 한 원형극장(Colosseum) 같은 지긋지긋한 박해의 현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유적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박해의 그늘에서 기독교 복음의 싹을 틔우고 구원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는 것은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옛날 엘리야 때 폭군 아합 왕의 궁내 대신 오바댜는 하나님의 선지자 일백 명을 오십 명씩 굴속에 숨겨두고 아침저녁 떡과 물을 주어 살려내었습니다(왕상 18:4).
여기 가이사집 사람들도 극심한 핍박이 자행되는 그 현장에서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폭정에 숨을 죽인 채 하나님의 권고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Ⅲ. 세계복음화의 주역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명령을 따라 오대양 육대주를 석권해 온 복음운동은 시대마다 환경이나 토양, 그리고 문화적인 이점을 선교의 전략에 활용하였습니다. 바울도 그가 말년을 보낸 로마에서 평소 가슴에 품고 있던 복음의 웅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자신은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매인 몸이었지만 그가 있는 곳이 세계의 심장부 로마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바울의 복음운동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제패하고 있어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모든 길이 그곳 로마로 관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다이나마이트(δυναμι󰐠)같이 폭발적인 복음의 위력을 가진 바울을 잠입시켰던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 생활을 하던 이태 동안 세계도처에서 온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그에게 접촉되어 복음의 전사로 세계 선교에 이바지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일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공유하는 인재의 양성에 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와 환경에 대처하며 언제 어떤 형대로든지 민감하게 뛰어 들 수 있는 요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이사집 사람들이란 왕족이나 근친들을 가리키는 말도 되지만 그 보다는 궁중에 소속되어 권력을 행사하던 관리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경학자 라잇풑(Rightfoot)은 근래 발견된 문헌에 비추어 로마서 16:3-16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이 대부분 가이사의 궁중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인물들로서 가이사의 궁중 요로에 포진하고 있다가 바울의 도착과 함께 신앙적으로 결집되어 복음사역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빌립보서 1:12-13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한 말씀은 이를 뒷받침 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교회의 지도자 베드로는 가룟유다의 후임으로 맛디아를 선출하면서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행 1:21-22).
곧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을 체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이사집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감내하여야 되는 고난과 죽음의 현장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무덤을 헤치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이 없었다면 그 모진 박해와 고난의 세월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계인의 성지순례 코스인 로마에 가면 이와 같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상징물들이 있습니다. 우선 콜로세움의 잔혹한 순교의 유물과, 카타콤의 그 캄캄한 지하 공동묘지는 십자가와 죽음의 현장이지만 한편 그 고난의 잔을 받았던 신앙의 결과는 마침내 박해자가 무너지고 그 곳을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은 생명과 부활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AD 313년 콘스탄틴(Constantinus)대제에 의하여 저 유명한 밀라노 칙령(Milan Edict)이 반포되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교회는 국가 권력에 의하여 확장되었으나 그 생명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와 고난이 없이는복음의 승리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울은 그가 심혈을 쏟아서 가르쳤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다른 복음은 없나니…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하였습니다(갈 1:7-8).
그러나 순수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야말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생명적인 능력을 발휘합니다(롬 1:16). 여기 옥중에 있는 바울과 더불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문안하는 가이사집 성도들의 신앙은 오늘날 온 인류에게 절실한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민족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상이나 이념의 갈등을 해소하며, 종교나 문화의 대립도 무의미하게 하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소망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