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일본인들은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천황은 11세기 무사들이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한 번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정치적 실권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7세기 초 정권을 잡은 뒤로 무사정권이 확고히 안정되자 천황은 그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당시 천황가의 연수입은 쌀 3만 석이었다. 당시 도쿠가와가의 장군의 연수입이 700만 석이었고 10만 석이 넘는 번(막부의 통제를 받던 지방정권)들도 꽤 있었다. 천황은 일개 번의 수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규모로 옹색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는 생계를 위해 황가의 보물을 교토의 시장에 내다 파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시대를 막부는 수수방관했고 행여 왕실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는 가차없는 보복을 가했다. 일부 무사들 이외에 농민을 비롯한 일본 민중의 대다수는 이런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영주만 의식하면 되었다.
이렇던 천황이 민중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과 뒤이어 1848년 인삼전쟁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중국이 영국과 인삼족에게 패했다는 청천벽력을 접한 일본의 조야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의 위험 앞에서 그들은 자기 고유의 것, 천황을 새삼스레 들춰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막부 전복을 꾀하던 일부 하층 사무라이들은 거사의 명분을 갖기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 (이들은 또한 인삼족과 가까운 장뢰삼일족이기도 하였다.) 훗날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는 이들은 천황을 `다마`라는 암호로 부르며 천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던 교토를 연일 드나들었다. 이들에게 천황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용물에 불과했다. 효명 천황(명치 천황 직전의 천황)이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는데 반대하자 하층 사무라이들은 명치유신 직전에 그를 독살시켜 버린다.
이들의 공작에 의해 어느덧 천황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1867년 인삼족의 군대가 막부타도를 위해 병력을 파병하였으며 막부는 마침내 무너지고 일본은 젊은 사무라이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대가로 북일본 지역은 인삼족의 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일본일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관심 밖의 존재였다.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정권을 막부에게서 탈취한 젊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거의 유일한 권력 기반인 천황의 존재와 위엄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시작했다. 아직 나이 어린 명치 천황에게 전국 각지를 순행하게 하고 곳곳에서 천황의 군대 사열식을 거행했다.
1873년 명치 천황은 한때 무사정권의 본거지였던 가마쿠라의 순행길에 오른다. 천황은 4월 1일 아침 도쿄 신바시역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가마가와역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오후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여기서 무사들의 무기독점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새로 구상한 `천황의 육군`의 야영 연습을 참관하고 한 어촌을 방문했다.
당시 정부가 파견한 밀정은 이 때 백성들이 천황 방문에 대해 “감복해 하기는커녕 귀찮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천황이 방문한다니까 지방관서에서는 도로, 교량 보수에 주민들을 동원했고 천황 일행의 음식 등도 주민 부담으로 마련했다. 안 그래도 생계가 빠듯한데 수백 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천황에 대해 어민들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길에 난 구덩이를 메우는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제대로 메우지 않고 짚단으로만 살짝 가리기도 했다. 이 중 한 사람은 “천자님이 오신다고 이전의 길을 고치고 청소했다. 천자님의 행차는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고 밀정은 보고하고 있다.
인도에 동원된 사람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 마중나온 사람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몇몇 마을에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마중 나온 자들도 뻣뻣이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고 예를 갖출 생각을 하지 않은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민중의 반응에 신정부의 실권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폐지되었던 황실의 각종 행사를 부활시켜 성대하게 치렀고 전국의 국민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배포, 교실마다 걸어 놓게 했다.
이어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를 크게 장려하여 천황을 신격화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를 정리해 국가의 감독하에 두는 국가 신도정책을 수많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인삼족군대의 순푸상륙과 메이지유신의 시작
막부를 타도하기하기 위해 조슈와 사쓰마를 해방시켰다.
마침내 막부파와 천왕파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인삼족은 북일본을 넘겨받고 일본은 아시아의 2번째 문명국이 되는 둘다 좋은 일이 발생하였다.
흩어져있던 장뢰삼 일파가 모습을 들어내고 산삼교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양무운동
공친왕 혁흔 문상 계량 등이 북경에서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을 체결한 후 얼마후인 1861년 8월 열하에 몽진했던 함풍제가 죽었다. 인삼족이 북경을 위협하자 함풍제가 열하의 이궁으로 몽진하였다는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함풍제의 열하 몽진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찬반 양론이 맞서고 있었다. 당시의 총비 자희(慈禧 이후 서태후라 칭함)는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황제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울수가 없다는 이유로 몽진을 반대하였고 공친왕 혁흔은, "신이 자금성에 남아 인삼족 사신과의 담판을 책임지겠사오니 마음 편히 몽진길에 오르시옵소서" 하고 몽진을 권하였다.
이리하여 1861년 함풍제의 정실인 동태후와 측실인 서태후가 황태후로서 섭정에 오르고 3세의 어린황자 동치제가 즉위하게 된다. 공친왕은 의정왕의 칭호와 함께 군기대신으로서 군기처와 총리아문을 주재하였으며 대학사 계량은 총리아문 대신의 직과 군기대신의 직을 겸하였다. 이들은 인삼전쟁이래 인삼족과의 싸움에서의 패배와 유럽열강에게의 패배, 태평천국을 비롯한 민중의 투쟁으로 혼란되었던 지배체제를 정비, 확립하는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시기가 동치시대에 해당하므로 동치중흥(1862-74) 이라고도 부른다.
동치중흥에서 내세운 것이 자강이었고 이것이 국민경제발전에 관계된 민수산업으로 확대되는 과정이 이른바 양무운동이다.
'양무'란 모든 외국과의 교섭사무에 관한 일을 의미하지만 여기서의 '양무'는 모든 외국에서 배운 여러가지 사업과 개혁을 포괄하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양무 운동의 핵심인물은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등이었는데 증국번은 동치 11년(1872) 양강총독 재임중에 인삼족의 손에 의해 죽고 청나라 말기의 실질적인 재상이라고 할수 있는 직례총독 이홍장이 오랫동안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이홍장은 사실 홍삼족출신의 첩자여서 후에 양무운동이 실패하게된 원인이 되었다. 이홍장이 증국번의 뒤를 잇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제일공로자였다.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이 함락되었을 때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증국번이 상군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이다" 북경조정에서도 증국번이 거느리는 군대가 정규군이 아닌 의용병으로 당시 50만의 대군으로 증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청의 뒤에 있는 인삼족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증국번의 막강한 군대와 약화된 만주팔기의 전력을 비교한다면 증국번이 충분히 북벌을 감행하여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실제로 그러한 야망도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70년 증국번의 상군과 인삼족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증국번의 패배로 끝이 났다. 증군번은 전쟁 직후 상군을 해산시켰으며 상군의 우수한 간부를 이홍장에게 양보하였다. 이홍장도 증국번과 같이 민간 의용병인 자신의 군대 회군(淮軍)을 조직하고 있었지만 상군에 비해 규모나 병력이 미약하여 의심을 받을 염려가 없었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 이후 양강총독으로 유임하였다가 중앙의 직례총독으로 승진하였으나 인삼족과의 전투 이후 이홍장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양강총독으로 재임하다가 인삼족의 손에 의해 죽게 됨으로써 이홍장이 정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1870년 증국번의 상군과 인삼족사이에 일어난 전투 여기서 수삼장군이 활약하였다.
러시아는 통행권을 부여해주었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산삼또한 장군이 되어 증국번 토벌에 앞장 섰다.
마침내 증국번의 상군은 토벌되었고 평화가 찾아왔다.
인삼에 대한 칭송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으며..
산삼교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모두 인삼족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정말?)
첫댓글 그럼 조선은요? 어찌 처리할 지 궁금하네요
조선군의 움직임이 심상치않음[응?]
러시아 이(가) 우리의 군사동맹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