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정원, 옛성, 평창마을, 솔샘, 흰구름,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
1. 일자: 2019. 2. 16 (토)
2. 산: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3. 행로와 시간
[구파발역(07:56) ~ 사비나 미술관(08:15) ~ (선림사) ~ 구름정원길(08:25) ~ 불광중(08:50) ~ 대호지킴터(09:14) ~ (불광사) ~ 옛성길(09:29) ~ 북한산 생태공원(09:37) ~ (전망대) ~ 탕춘대암문(10:22) ~ 평창마을길(10:27) ~ (구기터널삼거리) ~ 평창동 주택가(10:55) ~ 청련사(11:16) ~ (피아노) ~ 연화정사(11:57) ~ 형제봉지킴터(12:02) ~ 솔샘길/정릉탐방센터(12:45) ~ (식사) ~ 솔샘공원/흰구름길(13:26/13:32) ~ 빨레골(13:45) ~ 구름전망대(13:53) ~ 화계사(14:01) / 19km]
금요일 예보에 없던 눈이 아침에 내려 혼란은 있었지만 모처럼 눈 세상에 빠져들었다. 배낭에 아이젠을 놓고 길을 나선다. 구파발역 8시, 개천을 따라 길을 시작한다. 흐린 날씨로 일출의 여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개천은 은평 뉴타운을 관통한다. 사비나 미술관의 연노랑 외관이 시선을 끈다. 요즘 부쩍 아트 조형물에 관심이 많아진다. 새롭고 가치있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이 커진다.
선림사는 볼품없었다. 멀리부터 안내판에 붙어 있었던 장소치곤, 이름만 번지레하다. 그 좋은 위치에 특색 없는 절 집, 무엇이든 크면 좋은 줄 아는 이들의 욕심이 느껴졌다. 서울둘레길이 북한산둘레길과 만난다. 구름정원길, 실제는 이름을 품지 못했다. 그저 그런 산 초입 길, 꽃 피는 계절에는 다르겠지만 지금은 평범한 등로가 쭉 이어진다. 눈이 듬성듬성 쌓인 오르막을 넘어서자 불광중학교 후문이 나온다. 한동안 주택가 뒷골목을 돌다, 대호지킴터에서 다시 산길에 접어든다. 단체 산객이 많아진다. 이곳은 우이동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종주의 시발점이다. 그 길을 함께한 이들과의 지난 추억이 스쳐 지난다.
아쉽다 눈이 조금 더 내렸다면 백설이 푸른 소나무 가지에 붙은 멋진 설경을 보며 걸을 수 있을 텐데. 바위에 붙은 바람이 만들어 놓은 눈의 제각기 다른 형태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 눈이 점점 귀해지는 세상, 겨울의 낭만이 줄어드는 것 같아 허전해진다.
불광사도 특색 없는 암자였다. 생태공원을 지나 탕춘대 길로 접어든다.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 시절 찾았던 곳이다. 전망대에 올라 북한산을 조망한다. 흐린 날씨로 풍경이 감질난다. 쪽두리봉 지나 비봉과 문수봉 능선이 이어진다. 혹시나 하여 풍경이 트인 곳을 찾아 오르지만 감질만 더 난다.
무너진 성곽의 흔적이 보이더니 불쑥, 암문이 나타난다. 탕춘대성은 짧았다. 내려서는 길 끝에서 평창마을길 안내판과 마주한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정성을 많이 드린 주택들과 서민들의 연립이 혼재한다. 화려함 이면에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구기터널 부근 도로를 지난다. 꽤 오래 산길에 익숙해졌는데, 차가 질주하는 도로에 서니 혼란스럽다. 관성에 따라 무작정 걷다가 주홍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불안하다. 뒤돌아 나온다. 작은 암자가 있는 언덕을 올라서자 평창동 마을이 시작된다.
한국의 대표 부촌, 그 상징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담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자갈로 나무로 기와로 혹은 담쟁이로 한껏 치장한 벽을 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길에는 나다니는 이들이 없다. 고요한 정적만이 도로 위에 내려앉는다. 조심스레 걷는다. 이제는 담이 아니라 집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역시 같은 게 없다. 가진 자들은 남과 다름을 애써 표현하려 한다. 원시 종족의 지배층이 몸에 무언가를 치렁치렁 달아 노동에서 해방된 자신을 표현하듯, 한국의 부자들은 주택의 외형으로 부를 과시하고 있다. 바라보는 눈이 온갖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느라 조금 분주할 뿐 그 과시가 나쁘지 않다. 부럽고 멋지다.
청련사 앞을 지난다. 한눈에 봐도 부티가 난다. 벽체의 주 색이 노랑이다. 대개 건물에 노랑색이 사용되면 천박스럽기 마련인데 청련사는 그렇지 않다. 단청에 화려한 색에 매혹되어 한참을 바라본다. 지나는 바람에 풍경이 소리를 낸다. 눈과 귀가 동시에 즐겁다. 바람이 존재함은 피부가 스치는 서늘함과 함께 소리가 말해준다. 귀한 경험이다. 청련사를 지나서도 평창동 주택가는 오래 이어진다. 다만, 초입과는 다르게 이제 거리와 집 풍경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새로운 정보, 즉 차이의 새로움 또는 차이를 만드는 차이가 적어진다.
피아노 형상의 특이한 건물을 지난다. 나와 같이 둘레길을 걷는 이에게 부탁하여 담장에 기대 선 내 모습도 한 장 담는다. 담장에 기어선 채 찍는 사진은 웬만해선 실패가 없다. 연화정사를 조금 못 미친 앞이 확 트인 언덕에서 평창동 마을을 굽어본다. 북한산 기슭, 외딴 이곳이 한국 최고의 부촌으로 거듭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땅에도 팔자가 있나 보다. 바라보는 눈이 시원하다. 형제봉탐방센터에서 평창동과는 이별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르게 눈이 즐거웠다. 좋은 공부를 했다. 공부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이해라 한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받아드리고 발로 이어지는 여정이 값지고 즐거웠다. 둘레길 최고의 경험이었다.
긴 계단이 이어진다. 형제봉 권역에 들어섰다. 제범 산에 오르는 분위기가 난다. 응달에는 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눈 둘 곳을 몰라 했던 때가 조금 전인데, 사위 모든 풍경이 같다. 길에 정적이 찾아 든다. 형제봉 갈림을 지나 어지럽게 나뉘는 등로에서 오직 북한산 둘레길 표지만 따라 걷는다. 길의 이름이 솔샘으로 바뀌고 이내 정릉탐방센터 도로와 마주한다. 망설인다. 당초 솔샘공원까지 걷기로 마음먹었는데 조금 더 가 보기로 한다. 길가 음식점에 들러 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잔치국수를 우동보다 훨씬 좋아한다. 파와 유부만 올려진 심플함, 부담스럽지 않는 목 넘김과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솔샘공원을 지나자 둘레길 이름이 또 바뀐다. 이번에는 흰구름길 딱 봐도 어설프다. 거창한 이름은 역시 실제를 품지 못했다. 중간에 높다랗게 선 구름전망대도 별스럽지 않았다. 대신 빨레골은 그 이름부터 흥미로웠고, 이름이 실제를 상상하게 해 주었으며, 주변 계곡은 이를 반영했다.
사실 길을 조금 더 연장했던 건, 탬플스테이가 유명한 화계사를 보고 싶었던 것인데, 애써 찾은 절 집의 분위기는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우리 사찰의 진수인 공간의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름지기 절 집은 번뇌를 털어내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번잡스러움만 느끼며 화계사를 내려왔다.
< 에필로그 >
서울둘레길과 북한산 둘레길이 이리 길게 함께 할 줄은 몰랐다. 지겨울 만하면 바뀌는 둘레길 이름도 독특했다. 개천과 산과 도로와 절을 길에서 만났다.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경험을 한 반나절이었다. 그 중심에는 평창동 마을길이 있었다. 우연히 찾은 그래서 더욱 새로웠고, 수 많은 볼거리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제각기 다른 담장 치장이 내 눈에 들어온 연유가 궁금했다. 사비나 미술관의 특이한 외관과 바람에 날려 바위에 붙은 눈이 만들어내는 문양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다 평창동에서 발현한 게 아닌가 싶다. 한 가지 주제로 조형물을 바라보니 다름과 같음이 함께 보였다. 수준 높은 전시회를 다녀온 듯한 값진 경험을 했다.
만족은 기대와 현실의 차이임을 확인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