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미스터리 '사리'는 어떻게 생기나?
1, 舍利는 精神力의 결정체일까? - 세상 萬物은 꼭 必要할때 그 眞價를 발휘한다. 밥은 배가 고플때가 제일 맛있고, 술은 목이 마를 때가 제일 시원하다.
한때 高試工夫한답시고 道峰山 望月寺, 大願寺, 功德山 大乘寺 等 全國 名山 明刹을 돌면서 工夫를 했다.
1974년 여름과 가을 功德山 大乘寺에서 한 철을 보낼때였다.
四佛山 大乘寺는 性徹스님이 得道할 정도로 禪氣가 秀麗한 곳이기에 禪房이 유명해서 冬夏安居時에는 전국에서 수 많은 首座들이 雲集할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四面石佛像(註1)이 있는 禪도량 답게 厚德하시고 道가 높았던 이 절의 주지스님은 나를 어찌나 아끼고 좋아라 했는지 한 여름 무더울 때, 뜨거운 뙈약볕을 피해서 맥주를 깊은 우물 속에 담가 두었다가 더위를 이기려고 드실때 꼭 공앙주 보살을 시켜서 나를 불렀다.
"全 先生, 목이 마를 때는 穀茶가 좋아요. 같이 한 잔 하세"
이렇게 해서 주지스님이 찬 우물 속에 시원하게 칠링시켜 두었던 맥주를 얻어 마셨는데 그렇게 시원하고 淸凉할 수가 없었다. 역시 여름철 목마를 때 마시는 맥주 맛이 👍 다.
그렇게 그 깊디 깊은 산중에서 둘이서 閑談을 나누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어느새 黃昏이 西山마루에 걸리면서 칠링시켰던 맥주가 동이나곤 했기에 다시 채워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든 어느날,
"전 선생! 몇일 후에 문경군수와 경찰서장 등 유지들이 와서 사리친견식을 할건데 와요. 같이 친견합시다."해서 딱히 할일도 없는지라 "예, 그러지요" 했다.
舍利를 親見한다고 문경군수와 경찰서장이 왔는데, 공양주보살이 와서 전하기를 "주지스님께서 함께 參見하시게 모셔오시라"고 했으니 가시자고 했다.
그래서 군수.서장 등 지방 유지들 및 夏安居 중인 禪房首座들과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친견을 했는데, 주지스님께서 군수와 서장 및 내외귀빈들에게 묻는다.
"꼭 부처님처럼 보이지요?"라고.
이 말을 들은 두 분 중 서장은 "그러네요. 꼭 부처님처럼 보입니다"고 했으나 군수는 아무 말없이 그저 웃고 있고 선방 수좌들은 묵묵부답이였다.
그때 느닷없이 주지스님이 나보고 물었다.
"전선생은 어떻게 보이세요?"라고.
그래서 "아주 영롱하고 氣가 살아있지만 약간 타원형이라서 마치 콩알같이 보입니다."라고 답했드니 주지스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에이 信心이 부족해서 그리보여요. 信心이 돈독하면 부처님 처럼 보이실거고, 신심이 부족하면 콩알처럼 보이는 법이지요" 한다. 해서 엄숙했던 좌중이 한바탕 웃었지만, 참으로 名答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백태만한 크기에 계란처럼 약간 타원형이라 보는 사람의 심리 상태에 따라서는 사람얼굴 즉 부처 처럼 보일 수도 있을터이다.
하지만, 총 9차례의 대화재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녹아내리지 않아서 그 잿더미 속에서도 광채를 발했기에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하니 정신력의 결정체는 이렇게 참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후 1990년대 초반 道 닦으려 전국 名山大川과 大刹 및 숨어있는 山內 庵子을 찾아다닐때 그때 주지스님이 보고 싶어서 다시 대승사를 찾아갔는데, "山川은 依舊하나 人傑은 간데 없다"가 아니고 " 십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 말처럼 山川도 변했고 人傑도 온데간데 없는지라 공양주보살을 찾아서 물어봤드니 "벌써 10여 년 전에 入寂하셨다"고 해서 그리 섭섭할 수가 없었다. 꼭 다시 한 번 더 만나뵙고 싶었었는데... 참으로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1974년 가을 추석때 茶禮 상에 올리라고 그 당시는 日本으로 전량 수출되었기에 국내선 귀하디 귀했던 송이를 한 상자 주었기도 한 스님인데....
*註1, 四佛山의 산마루에는 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삼국유사' 卷 3 '四佛山條'에 진평왕 9년(587년) 커다란 붉은 비단으로 싸인 四面石佛이 하늘에서 功德山
(913m) 중턱으로 떨어졌다.
소문을 듣고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大乘寺라 사액하였으며, 법화경을 외는 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뒤 산이름을 功德山 또는 亦德山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공덕산은 숨겨진 우리산 244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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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는 눈이 보배
우리 민족의 반역자 이성계의 王師 노릇을 했었던 無學의 말처럼 '보는 눈이 보배'라고 신심이 깊으면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보이는 법이니 당연히 부처처럼 보일테고, 傷官格四柱이기에 金水傷官이 두개나 투철되어 있어서 나보다 더 많이 알거나 더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분석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검증하는 탓에 나처럼 부처 아니라 부처 할아버지라고 해도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이 아닐때는 인정하지 않는 이들 눈에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콩알만하게 조그만 사리는 그동안 대승사가 수차례 火災로 全消되었지만 불타없어지지 않고 한밤중에 全消된 화재현상에서 빛을 발해서 찾을수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볼수있다.
더욱 재미 있는 사실은 이 절에서 오랫동안 밥짓기를 하였던 공양주보살의 몸에서 스님들보다 더 많은 사리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하기사, 말이야 바른말로 겉으론 禪修行을 標榜 하면서도 속으로는 쓸데없이 私慾을 내는 조계종 중들보다는 一心專念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念誦하면서 부처님을 供養한 공양주보살이 더 진정성이 있으면서 信心이 더 깊었을터였기에 믿음과 精神力의 결정체인 사리가 더 많이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3, 사리란?
高僧이 입적하면 몸에서 나온다는 舍利가 지난 11월 29일 입적한 事判僧인 慈乘 에게서도 나왔다고 한다. 좀 생경스럽긴 하다.
지난 1993년 11월 10일 거행된 조계종 성철 스님 다비식(불교식 장례)에선 사리가 무려 110顆 넘게 나와 관심을 모았는데 理判僧인 李性徹 스님이야 15년간 長坐不臥한 고승이라 사리가 나오드라도 이상할께 없지만 다른 이들은 다소 의아하기는 하다.
여하튼, 이들 사리는 콩알 크기부터 쌀알 반쪽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불교계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사리는 본래 '신체'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Sarira'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舍利羅에서 더 줄여 현재의 舍利로 불린다. 梵語 '사리라'는 본래 '몸'을 뜻하는데 이것이 복수형으로 되면 유골이라는 뜻이다. 해서 사리는 몸 그 자체를 의미하므로 넓은 의미에선 시신을 화장하고 난 뒤에 남겨진 뼈 전체, 가루가 된 뼛조각까지 포괄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사리는 단순히 죽은 자의 몸을 가리키거나 그 뼈를 부순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를 향한 믿음이 충만한 불자는 사리의 의미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바라본다.
사리는 크기도 다양하지만, 색깔도 황금색·검은색·
붉은색·흰색 등이 뒤섞여 영롱한 빛깔을 띤다. 사리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도 사리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다. 이성계가 어느 날 대신들에게 '사리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고 묻자 하륜은 "정신을 수련하면 정기가 생기고 정기가 쌓이면 사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다의 조개에도 寶珠인 진주가 있고 뱀에게도 明月珠가 있으니 조개와 뱀이 무슨 道가 있어 그런 구슬이 생기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995년 인하대 임형빈 박사는 1993년 말 입적한 한 고승의 시신에서 수습된 사리 2과를 받아 1과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 사리의 성분은 일반적으로 뼈 성분과 비슷했지만 프로트악티늄·리튬·티타늄 등도 발견됐다. 사리의 굳기(경도)는 1만5000파운드 압력에서 부서졌는데 1만2000파운드에서 부서지는 강철보다도 단단하게 측정됐다. 하지만 사리 하나만 분석한 것이어서 모든 사리가 이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의학에선 사리의 발생기전을 어떻게 바라볼까?
가천대 길병원 비뇨의학과 오진규 교수는 "사리 성분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건 없다"면서도 "가능성이 큰 발생기전을 몇 가지로 추정할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뼈나 무기질이 불에 탈 때 열에 녹으면서 결정체가 만들어질 것'이란 추정이다. 오 교수는 "스님뿐 아니라 평소 돌이 없던 사람도 불에 타면 뜨거운 온도로 인해 사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둘째는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아서 몸속에 돌이 생겼을 것'이란 추정이다. 요로결석·담석이 대표적이다. 수행을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장기간 움직임을 최소화했거나 正坐 즉, 몸을 바르게 하고 앉아있는 방식으로 오랜 기간 지내면 신체 활동량이 크게 줄고 신진대사가 떨어져 몸 안에 결석·담석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했던 성철 스님은 15년간 長坐不臥(앉아서 잠을 잠)했을 정도로 정좌 생활을 유지했다.
셋째는 '금욕생활로 인해 정액이 굳었을
가능성'이다.
이는 물론 남성 스님에 한한다. 오진규 교수는 "남성이 금욕생활을 오래 해 정액을 배출하지 않으면 정액이 뭉칠 수 있다"며 "뭉친 정액이 돌처럼 딱딱해져 사리로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전립샘염이 생길 가능성도 커진다.
넷째는 '수산이 든 식품을 많이 먹어서'다. 수산은 요로결석의 성분이기도 하다. 수산이 든 식품을 장기간 섭취하면 결정체를 형성하는데, 이는 요로결석이 생길 위험을 높인다. 수산이 든 대표적인 식품이 녹차다. 차를 즐겨 마시는 스님에게 요로결석이 잘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오 교수는 "수산은 녹차뿐 아니라 홍차·시금치·고구마·
초콜릿·콜라에도 다량 들어 있다"며 "요로결석을 앓았던 사람은 이들 식품을 다량 섭취하는 데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원인 중 어느 한 가지를 사리의 발생 기전으로 특정할 수는 없다는 게 의학계의 지론이다. 오 교수는 "사리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종교적 의미가 있어 의학계에서 굳이 파헤치지 않았다"며 "사리의 발생기전을 언급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이런 다양한 추정을 가능케 하는 낮은 활동력, 장기간의 금욕생활, 차 문화와 분명히 연관 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4, 性徹이 본 사리란?
성철은 생전에 사리를 거두어 법력을 과시하는 풍토를 경계했다.
“사리만 나오면 뭐하나. 살아서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살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럼에도 세속의 관심은 온통 사리에 집중되었다.
성철 스님의 열반 후 남은 사람들은 성철의 사리를 찾았다. 무려1000여명의 사부대중이 습골을 지켜봤다.
이윽고 누군가 외쳤다.
“사리다, 사리가 나왔다.”
순간 이를 지켜보던 대중 사이에 환성이 터졌다.
밝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성철은 능히 고무신 한 켤레로도 도인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리가 당연히 그 증표가 돼야했다.
모두 110과의 사리를 수습했다.
스님들이 성철의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다비장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다비장 옆에 서있던 키 큰 떡갈나무가 제 몸을 떨면서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일행이 갈 길을 멈추고 나무를 쳐다봤다.
떡갈나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나목이 되어버렸다.
가장 가까이서 다비의식의 처음과 끝을 지켜봤던 나무였다. 사람들은 기이하다며 나무를 만져보거나 올려다보았다.
다비식을 마친 다음날 아침 공양이 막 끝났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放光이다, 백련암 쪽이다.”
그러자 절 식구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백련암 쪽을 바라봤다. 정말 오렌지색 빛 무더기가 백련암 뒷산을 휘감고 있었다.
구름인 듯 안개인 듯 빛을 품고 산등성이 위로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시 피어올라서 20여분간 백련암을 장엄하게 했다.
백련암에서 성철을 시봉했던 제자들이 보기에도
그 빛은 아침노을보다 훨씬 붉고 밝았다.
방광을 목격한 것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열반한 날 밤과 영결식 전날 밤에도 붉은 빛이 숲과 산등성이를 물들였다.
寺下村 사람들과 산 아래 가야면 주민들은 믿기지 않는다며 눈을 비볐다.
일부에선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일축하지만
봤다는 사람들은 침을 튀기며 목격담을 전했다.
일타 스님은 ‘성철대종사 사리탑비명’에 이렇게 썼다.
"7일 葬中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두 슬퍼하였고, 그 기간 동안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걸쳐서 일곱 차례나 방광을 하시니, 그 이적에 사부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했다."
성철의 사리가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고도 길었다.
날마다 1만 명이 넘게 몰려들었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사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아마 문도들과 몰려든 대중들에게 이렇게 일갈했을 것이다.
“이 미련한 곰들아, 살아 수행이 중요하지 죽어 사리가 무슨 소용인가. 아직도 사리장사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왜 당신네 본 모습은 보지 않고 남의 사리를 구경하러 그 고생을 하는가?”라고.
성철이 뭐라 하든 남은 사람들은 사리탑을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조각을 하지 말자, 높게 짓지 말자, 우리 시대 조형언어로 짓자’는데 뜻을 모았다.
무턱대고 전통양식을 모방, 모사하는 불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내 不生不滅, 不增不減인 우주의 결정체를 형상화한 圓 형태의 독안으로 사라졌다.
퍼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