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이자 유학자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임고서원은 28번 국도의 임고 교차로 방면에서 69번 국도로 영천댐 방향으로 가다가 임고 삼거리에 있다.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 8) 정몽주(鄭夢周)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하여 이듬 해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선조 36)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장현광(張顯光), 1787년(정조 11)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하였다.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서원을 건립하여 구 서원과 신 서원의 2개 구조로 되어 있다.
임고서원 경내에는 묘우 문충사, 내삼문 유정문, 강당 흥문당, 정몽주 신도비, 유물보호각 심진각, 문루 영광루,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 등이 들어서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유사실은 유사가 집무를 보는 곳이고, 포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고사는 고직(庫直)이 거처하는 곳이다.
임고서원은 1965년에 복원되어 위패를 모셨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존영각·강당·포사(庖舍)·유사실(有司室) 등이 있다.
사우인 문충사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임고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두 번째 정일(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 『포은문집(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선생실기(芝峰先生實記)』 목판 71판, 『포은집』·『어사성리군서(御賜性理群書)』 11권 외에 200여 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임고서원은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서원 내의 은행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1만여 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임고서원은행나무(臨皐書院銀杏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양항리 161))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임고서원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7.4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전체적으로 수형이 웅장하고 안정된 형태로 자라고 있으며 생육도 양호한 편이다.
은행나무 남동쪽 20m 부근에는 가옥이, 북쪽 20m 부근에는 임고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가지의 생육은 당년지가 15㎝, 1년지가 20㎝, 2년지가 18㎝로 양호한 편이며, 엽색은 초록색이고 잎의 크기는 폭3㎝, 길이4㎝이며 수관의 엽량은 많은 편이다.
나무 보호를 위해 동공시술과 가지 조절 등 외과 수술을 실시하였다. 주변 토양의 토성은 양토이며 주위가 넓고 복토 및 토양 유실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수목 주위에 자연석으로 높이 0.4m, 둘레 34m의 보호책과 수관 폭 내 표토에 통기공 10개를 설치하여 토양에 산소 공급을 용이하도록 하였으며, 토양 배수는 양호하고 독립수로 서 있어 일조 상태도 좋은 편이다.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기념물)은 고려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세워졌다.
본래 임고서원은 운주산에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있는 부래산(浮來山)에 있었고, 은행나무 또한 그곳에 심어져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임고서원이 소실되자, 1600년경 현 위치에 서원을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에서 정성껏 차린 깨끗한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차려 놓고 기도를 드리면 부녀자는 사내아이를 낳고, 병자는 소생하며, 나무를 해치면 크게 벌을 받는다는 전설이 전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