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시한 농담에 혜진이가 크고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혜진이의 웃음소리는 예전과 같이 맑았다.
세상에는 이토록 변하지 않는 있는 법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오류가 분명하다.
혜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연찮게도 난 정말로 궁금한 것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난 얼굴에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혜진이에게 오랜만에 진진한 질문을 해보았다.
"근데말이야 ... 도대체 사랑이라는게 초코렛보다 좋은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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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13일 (1년 전)
"일어나 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어설프게 뜨고 말았다. 그러나 난 이내 시야 가득 들어 오는 밝은 빛 때문에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눈 좀 떠봐~!"
또다시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누군지는 몰라도 지독하게 예의없는 놈이 분명했다.
그 누군가가 내게 보인 행위에 내가 보일 수 있었던 최대한의 반응은 '음~' 하는 괴로운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반 바퀴 굴리는 것 뿐이었다.
"아이~ 참! ... 좀 일어나 보라니까!"
그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가까스로 눈을 뜨자 1m도 넘을듯한 초대형 바나나 같은 것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얼마나 마셨길래 이정도야, 난 또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쟎아."
난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 바나나 인간이 하는 말에 대꾸할만한 소재를 찾아서 주위를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대답을 안하면 잡아먹을지도 몰라.
"저건 커텐 ...저건 책상 ...저건 컴퓨터 ...넌 ... 음 ...넌 이름이 뭐냐?"
난 바닥까지 잠김 목소리로 방안의 물건을 하나하나 가르키다가 나를 깨운 그 바나나 인간에게 이름을 물었다.
"난 유령이고, 여기는 오빠 자취방이고, 지금은 오후 4시야.그러니까 일어나"
혜진이가 조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긴 이름을 가졌구나."
난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웠던지 혜진이는 내 말에 한참을 웃었다.
"이건 ... 침대가 확실하지?"
난 침대를 가르키며 다시한번 혜진이에게 물었다.
"응, 그거 침대야."
"그게 확실하다면 ... 자는 수 밖에."
난 눈을 감고 다시 쓰러졌다. 거짓말이 아니라 전날은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그러지말고, 좀!"
혜진이가 다시 나를 열성적으로 흔들어 깨웠다.
"아악~! 종로 한복판에서 여자 모델들이 누드로 행진하기 전까지는 잠잘 때 나 좀 깨우지마. 이 지지배야~!"
내가 짜증적인 목소리로 소리치자 혜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듯 했다.
... 쳇, 삐진건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혜진이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게 내밀었다.
"그건 또 뭐냐?"
"쨔쟌~ 술이 확~깨는 드링크!"
"너 .. 정말 깬다."
내 말에 혜진이가 다시한번 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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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취침이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고 세면대로 가서 차가운 물 속에 머리를 담궜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차가운 물을 0.5ℓ정도 마시고,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나자 외출했던 정신이 반정도 컴백했다.
"웬일이냐, 이 이른 아침에?"
난 라디오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며 물었다. 블랙사바스의 '체인지스'가 조금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 내가 이렇게 음악을 크게 들었던가.
"오래비한테 부탁할게 하나 있어 왔지."
"부탁? 어허...허... 나 그거 열 개 있어. 안 살래."
"앙~ 오빠 그러지말구~"
혜진이가 다시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몸이 흔들리자 속이 뒤집혀 오바이트를 할 뻔 했다. 지지배, 힘도 좋지.
"아침부터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같은 차림으로 나타나서 잠자는 사람 깨워 가지고 한다는 소리가 '부탁'이냐? 내 얼굴이 그렇게 인간성 좋아 보이는 얼굴이냐?"
아닌게 아니라 혜진이는 노란색 셔츠에 노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건 꼭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같이 보였다.
잠에서 깨어나 얼핏 바나나 인간으로 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 겨울에 그런 차림으로 다니다니 춥지도 않은건가.
"오빠,오빠,오빠 ... 뭐해줄까? 응? 뭐해줄까?"
"하다니 ... 너랑? ... 에이~ 좀 더 잘빠진 여자를 데리고 와야지."
난 시시한 농담으로 부탁을 거절하려 했다.
혜진이는 말뜻을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리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배게를 들어 나를 두들겨댔다.
"아유~ 짐승!"
... 배게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 그거 빨기가 얼마나 힘든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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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이는 내 친구의 동생 친구 .. 아니, 친구 동생의 친구의 친구였던가..
음 ... 그런 식으로 만났다.
고 2때 ... 음 ... 고1때였던가 ... 그 정도에 만났다.( ...아, 힘들다 -_-;)
난 그 당시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와 시시한 농담을 쉴 새 없이 해대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같이 미세한 존재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될 것만 같던 그런 시절이었다.
혜진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고, 키는 20센티미터 작았다. 얼굴도 작고, 손도 작고 ,팔도 작았다. 가슴은 ... 모르겠다. 하하 ...
하여튼 만화 그림이 그려진 티를 입을 때면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그런 아이였다.
얼굴은 객관적으로 귀엽고 예쁜 편이었다.
사실 내가 그 당시 혜진이와 동갑내기였고 한 여자에게 푹~ 빠져 있지만 않았더라면 죽자사자 쫓아다녔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분명히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첫 만남이 그랬기에 혜진이와 난 '오빠/동생'이상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괜히 이상한 로맨스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 글이 끝날 때까지 그런 것은 좁쌀만큼도 나오지 않는다.
인류 생성 이후 이런 여자들은 주위에 남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긴 생머리에 얼굴은 조그맣고, 피부는 뽀얀 색이며, 날씬하고, 애교 많고, 착하고
... 이정도면 게임은 오버다.
이런 여자들만 넘치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전쟁발발의 이유는 절대적으로 미인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혜진이를 얼핏 알게 된 내 후배 한 놈이 혜진이에게 용감하게 대쉬하고 있는 상태였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인간성도 좋은 놈이었는데 혜진이는 매번 그놈에게 얄미울 정도로 쌀살맞게 굴었다.
그래서 그놈에게 붙은 별명이 '강백호'.
혜진이와 나의 공통점은 음악과 노란색을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는데 그 두 가지 만으로 도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친해졌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족속이다.
아 ... 부연 설명은 이정도로 끝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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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이는 내 앞으로 노란 색의 조그만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좀 부탁할께요."
"이게 뭔데?"
난 상자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흔들며 물었다. 공짜로 주는 건 폭탄이라도 받아 주마.
"초코렛"
"나 주는거야? 오~ 그러고보니 내일은 발렌타인 데이, 마녀가 공주에게 독이 든 초코렛을 먹이고, 잠이 든 공주의 유리구두를 훔쳐 장에 대다 팔아서 마술 강남콩과 바꾼다는 그런 날이지."
"오빠는 가끔가다 정말 바보같아."
"그래?"
그래 ..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이큐 테스트를 받으니 3년이 넘었으니 그동안 아이큐가 제로로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뭐, 바보라고 해도 그다지 크게 불편할 건 없지만.
"시간이 없어서 오빠 초코렛은 준비 못했어. 나중에 줄께."
"무.어.시.라?"
"미안해요. 정말 시간이 없었어요."
혜진이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그건 진지하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존댓말을 쓴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버릇이 있었는지는 혜진이 자신조차 몰랐다.
어찌되었건간에 혜진이는 그 때 나에게 뭔가를 진지하게 부탁하려 하고 있었다.
"뜨으으~~~ 술이 덜 깨서 머리가 울리는데 우리 나가서 바람이나 온몸에 둘둘~ 감고올까?"
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제안했고 혜진이가 다시한번 맑게 웃으며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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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이와 난 밖으로 나와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한겨울의 아이스크림 가게는 이처럼 고요함의 매력이 있다.
"부탁할게 뭔데?"
난 주문한 스트로베리 아이스크림 두통을 들고 자리로 어며 혜진이에게 물었다.
"아까 그거, 진철이한테 좀 전해줘요."
"진철이?"
혜진이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철이는 '강백호'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도도하게 굴던 애가 웬일이지...
"오빠, 그거 알아요?"
"뭘?"
"살다보면 무슨 말을 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씩 있는거래요. 부모님한 테도 못할 말이나 친구들한테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얘기들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
"청각 장애인?"
혜진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시한 코메디 프로그램이 장수 프로그램이 되는 것은 이런 아이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지난 주 일요일에 진철이를 만났어요."
혜진이가 웃음을 멈추고 아이스크림을 나무스틱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으흠?"
흥미있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학원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 급한대로 주위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안그치는 거에요. 그래서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갈까 하고 그 건물 안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거든? 그런데 진철이가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더라고."
"음 ... 방학 중의 일요일에도 학원을 .. 너무한거 아니야?"
"난 오빠처럼 머리가 좋지 않아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야."
"바보 같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누구보고 머리가 좋데?"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바보"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살짝 웃었다. 귀여운 놈.
"진철이가 뭐 맛있는걸 사줬길래 초코렛까지 사고 그랬냐?"
난 다시 흥미있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누나가 하는 조그만 커피숍인데 방학동안 잠깐씩 봐주기로 했대요. 손님이 나 하나밖에 없어서 한가하다고 진철이가 내 앞자리에 앉았어요.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놀았지."
"얼음공주가 ... 별일이네."
혜진이는 조금 씁쓸하게 한번 웃었다.
"나 비밀이 있어요"
"글쎄, 난 그런거 열개 있어서 안산다니까"
혜진이는 또 웃었다.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이거보여요?"
혜진이는 머리를 돌려 긴 머리를 쓸어올리며 뒷 목 부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큼직한 수술자국이 남아 있었다.
솔직히 난 조금 놀랐다.
누구라도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갑작스럽게 자기 몸의 흉터를 보여주면 놀랄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음 ... 10대 1정도로 붙다가 사시미칼에 긁힌 거겠지?"
"수술자국이에요"
"수술?"
"초등학교 3학년 때, 뇌하수체 종양이라는 것 때문에 수술을 받은거에요."
"네 비밀이라는게 결국엔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냐?"
"오빠, 좀!"
혜진이가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깃거렸다.
혜진이의 그 표정에 나 조금 진지해지기로 했다.
나 역시 인생은 가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큰 수술이었나봐?"
"뭐, 대단한건 아니고.. 근데, 나 조금 커서 그런 쪽으로 책을 읽다가 발견한 건데 사춘기 이전에 그 수술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게 불가능하데요. 그런 쪽의 호르몬하고 신경작용이 사라진다나 ... 뭐, 그렇게.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총각 선생님이나 연예인들에 대한 짝사랑 같은 것도 없구."
혜진이는 말을 끊고 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진철이가 좋은 아이라는 거 처음 볼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 남자랑 같이 영화도 보고 자전거도 타러 다니고 그러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 하지만 웬지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화가 났어요. 진철이를 볼 때마다 일부러 쌀쌀맞게 굴었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요. 난 어떻게 해도 상대방에게 상처만 줄 테니까... 난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는데."
"흐음?"
"그런데 지난 주 일요일에 진철이를 봤을 때는 뭐랄까 ... 헤어지기가 싫은 그런 기분이 드는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앉은 체로 4시간이나 얘기를 했죠. 날이 그렇게 어두워졌는지도 몰랐어요. 집에서 걱정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밖을 쳐다보는데 계속 비가 내리고 있는거 있죠? 당황스러웠어요. 그런데 갑자기 진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장싱에 잠깐 다녀올테니까 꼼짝말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나갔어요. 그리고 10분정도 지나서 온몸이 흠뻑 젖어가지고 우산을 하나 들고 오는 거에요. 우산 파는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헤맨 것 같았어요. 온통 다 젖었었거든 ..."
"역전, 감동의 똥침!"
"솔직히 누구라도 감동했을걸?"
"태초에 얼음공주의 해빙기의 시대가 있으라 하였다."
혜진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한 번 활짝 웃고 얘기를 이었다.
"진철이는 내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새서 젖었다고 했어요."
"니 주위에는 바보만 모이나보지?"
"귀엽쟎아?"
"바보가 귀여워서 초코렛을 먹이겠다 ... 결론이 그렇게 되냐?"
"오빠는 말을 해도 ..."
"지도 재밌으면서.."
"재미없어"
혜진이는 아이스크림을 한 스픈 가득히 떠서 입에 넣었다.
"달리 할말은?"
"응?"
"그런 자랑하려고 자고 있는 날 깨웠다면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아 버릴거야."
혜진이는 뭔가를 내게 말했지만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 때문에 부정확한 발음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입에 있는 건 다 심키고 말을 해야지, 임마"
내가 손가락으로 볼을 콕콕 찔러가며 핀잔을 주자 혜진이는 한참을 더 오물거리 다가 말을 꺼냈다.
"나 내일 수술한다고."
"뭐?"
"내.일.수.술.한.다.고."
"무슨 수술을?"
"또 무슨 종양이라는데 ... 병 이름 같은거 잘 몰라, 나."
"삼류 하이틴 소설은 아까 그 우산 얘기까지가 떡 적당한데 말이지 ..."
"의사선생님이 대단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 그냥 오빠 얼굴 이나 한번 보고 갈라구. 진철이 줄 초코렛도 부탁할까해서."
적당한 침묵의 시간이 있었다.
원래 남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거나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뭐라고 해야할지 생각 하지도 못했고, 뭔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 어색함을 깰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우뢰매 하이바 같은거 쓰고 윙윙 거리는 짓 하지 말아요"
혜진이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몇 가닥을 빙빙 돌려가면 말했다.
"뜬금없이 무슨 우뢰매 타령이야?"
"오빠,예전에 그러다가 사고 한번 났쟎아."
"그건 우뢰매 하이바가 아니라 오토바이 헬맷이야, 임마."
"그거나,그거나 ... 다시 하지 말라구, 보기 안 좋으니까."
"네 부탁 들어주면 넌 나한테 뭐해줄거냐?"
"뭐해줄까? 잘빠진 여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내년 발렌타인 데이 때 네가 나한테 초코렛 한웅큼 먹여준다는 조건으로 진철이 초코렛건 및 우뢰매 하이바건 접수하마."
"이따~ 마시한 걸로 사다줄께"
혜진이는 그 조그만 팔을 넓게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혜진이의 그 행동은 내게 있어 혜진이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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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안녕하세요? 박혜진입니다. 곧 연락드릴께요."
호출기의 인삿말은 아직도 그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했다.
"살아있으면 연락해, 임마."
메세지를 녹음하고 별같이 생기지도 않은 별표를 눌렀다.
"호출하였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뚜~뚜~뚜~
... 이 아줌마야, 이용같은건 당하기 싫단 말이야.
짜증이 났다. 이게 무슨 짓이람.
난 아직도 사람의 머리 속에 나쁜 세균이 들어가서 그것 때문에 사람이 죽고 하는 것 따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안실로 가봐도 시체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같은건 해주지 않는다.
현실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부족한 정보들만이 허공에 날아다닌다.
하루끼의 소설 중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잊혀지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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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월 14일
"일어나 봐"
오래간만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어설프게 뜨고 말았다.
그러나 난 늘 그랬듯이 이내 시야 가득 들어오는 밝은 빛 때문에 반쯤 떴던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눈 좀 떠봐~!"
또 다시 그 누군가는 나를 흔들어깨웠다. 도대체 누구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반 바퀴 굴렸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굴러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좀 일어나 보라니까!"
포기하지 않는 방해자.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건 1급범죄로 규정해야 한다.
"오빠, 안일어나면 나 그냥 간다?"
몽롱한 의식 속에 들리는 혜진이의 목소리 ... 혜진이?
난 눈을 비볐다.
노란 색 셔츠에 노란색 반바지... 혜진이었다.
아 .. 그래그래 .. 이건 꿈이다.
"왜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지어? 또 내 이름이 생각 안나?"
혜진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이상하다 ... 혜진이는 작년에 죽었는데...
난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혜진아?"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왜?"
"혹시 말이다 ... 너 작년에 죽지 않았었냐?"
나 참 ...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하게되다니 ...
하지만 혜진이의 대답은 몽롱한 의식 속의 나를 현실로 확실히 이탈시켰다.
"응. 왜?"
"......"
"왜 그러는데?"
혜진이는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 그게 ... 죽은 사람이랑 대화하는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흠 .."
내가 말을 머뭇거리자 혜진이가 손을 뻗어서 내 이마를 짚었다.
"오빠, 열 있네 ... 감기 걸렸어?"
"아니 ... 뭐 ... 심한 건 아니고 ..."
"나 작년에도 왔었쟎아"
"뭐?"
"작년에도 진철이 줄 초코렛 들고 오빠 찾아왓었쟎아. 생각안나?"
"너 ... 혹시 ... 그때도?"
"놀랄까봐 말 안했더니 아직까지 내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구나?"
혜진이가 다시한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난 혜진이가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게으르구나, 오빠는."
"뭐, 그렇지. 넌 어때? 건강하지?"
말을 하고 나서 난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미 죽은 사람에게 건강하냐고 물어보다니.
"그냥 그래."
"응..."
"놀랐구나?"
"조금"
난 덤덤한척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놀랄게 뭐있어? 그냥 죽었다는 것 뿐인데..."
그 말이 맞다. 조금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TV에서 자주 봤던 일이다.
"쨔쟌~ 오빠 줄 초코렛~!"
혜진이가 내게 노란색 포장지의 박스를 내밀었다.
"이거 ... 약속했던만큼보다 안큰데?"
"초코렛은 너무 큰거 먹으면 몸에 안좋아."
"거짓말하지마, 정성부족약속위반위선자야"
"초코렛에는 '페닐아틸아민'이 들어있단말이야."
"페닐...뭐?"
"페닐아틸아민"
"그게 뭐하는건데?"
"사람 몸에 그게 들어가면 에너지 수위를 높이고 심장박동수를 높여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거야.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뇌가 분비하는 화학물질 하고 똑같은거래."
"그럼 좋은거네"
"그런건 실연당한 사람이나 무식하게 먹는거야.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을 깊이 사랑하기만하면 초코렛 같은거 안먹어도 돼."
... 초코렛 따위에 그런게 들어있다니 ...
"난 애인 없으니까 큰걸로 바꿔줘"
내가 투정을 부리자 혜진이가 맑게 웃었다.
그 맑은 웃음소리는 내 앞에 있는 존재가 혜진이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오빠, 우리 나가서 바람이나 몸에 둘둘 감고 오자, 응?"
혜진이가 제안했고, 난 흔쾌히 승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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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스크림 두개를 들고 자취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해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1년동안 뭐하고 지냈어?"
"그냥 ... 유령하고 아이스크림 먹는 것만 빼놓고는 다하고 다녔지. 넌 뭐하고 지내냐?"
"나도 그냥 그래 ... 아~ 오빠 옛날 여자친구 만났어."
잠시 충격.
그래 ... 잊고 있었지만 ... 그 아이도 죽었었다.
"어떻게 알아봤냐, 본 적도 없으면서?"
"오빠가 예전에 사진 보여준 적 있었쟎아. 그 언니 반만 닮으면 첩 삼겠다고 그러면서 ..."
... 그런 말을 했었군.
"그 유령은 잘 지내?"
"죽은 사람들은 다 그냥 그래보여. 사실 그렇기도 하고."
"그래 ..."
그렇겠지. 거기라고 뭐 특별한게 있을라구.
난 잠시 그 아이를 떠올렸다.
"진철이는 만나보고 온거야?"
이번에는 내가 혜진이에게 물었다.
"그냥 멀리서 한 번 보고 왔어"
그리고 혜진이는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만이 있는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웃음을 지었다.
"결국,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거에요. 마음은 좀 아프더라도 ... "
말을 마친 혜진이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혜진이의 옆모습은 마치 만화 속 백설공주의 얼굴처럼 핏기가 없이 창백해보였다.
주위는 멸망한 도시처럼 고요했다.
아니, 정말로 이 도시가 몇시간 전에 멸망했을런지도 모르지.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따위 것 알게뭐야.
하지만 웬지 그 고요함은 어색하다기보다는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고요함이었다.
내가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고 그것을 다 태울 때까지도 혜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있쟎아, 내가 만약에 오빠같은 상황이라면 난 궁금한게 되게 많을 것 같아. 오빠는 안그래?"
오랜 침묵을 깨고 혜진이는 그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래?"
난 잠시 생각했다.
궁금한 것 ... 그리고 난 오래된 시시한 농담거리 하나를 기억해냈다.
첫댓글 마음이 아프면..시간이 약이라져..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