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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 19. 너희는 가서
마 28: 19. 너희는 가서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이 전도의 명령은 일차적으로 열한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 딛 1: 3 -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전도의 임무는 먼저는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이어 목사들과 선교사들에게 있고, 또 넓게는 모든 성도에게 있다. 이 전도의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이다.
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계로 가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야 한다. 전도는 영혼들에게 찾아가는 것이다. 오는 사람들도 가르치지만,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가야 한다.
'가서'(*,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 형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 마 2: 8, 13 –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 마 9: 13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 11: 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 마 17: 27 -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이다.
이 명령은 일차적으로 열 한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 딛 1: 3 -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이 사역 혹은 사명은 사도들에 이어서 주께서 교회에 세우시는 전임(專任)사역자들, 즉 목사나 선교사나 전도사들에게 적용된다.
물론 평신도들은 그들이 다 전도를 위해 파송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전도의 대 사명을 위해 생각과 정성과 힘을 모아야 한다.
전도 혹은 세계 복음화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mission)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계로 가라고 명하셨다.
전도하기 위해서는 어느 곳이든지 가야 한다. 전도는 교회에 오는 사람만 돌보는 것이 아니고 영혼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오는 사람도 가르치지만, 오지 않는 사람에게도 가야 한다.
* 마 4: 23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눅 10: 1 -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전도의 대상은 모든 족속이다. 자기 동네, 자기 나라 사람뿐 아니라, 온 세계 사람에게다. 즉 주의 명령은 세계 복음화의 명령이다.
세계복음화는 세계가 다 복음에로 돌아온다는 뜻이 아니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고난 겪으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 가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 마 10: 5-6 –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마 15: 2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오늘도 그것이 필요한가? 그렇다. 겨우 백 년 전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다. 아직도 세상에는 복음을 받지 못한 민족들, 나라들이 있다.
세계 복음화의 과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내전도자 뿐만 아니라, 해외전도자 혹은 흔히 말하는 선교사가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 조직적 선교연구소가 필요하고 선교사 훈련원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이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 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 (Hare, Walker).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Trilling, Hubbard, John p. Maier).
마태가 '족속'(*,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 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한다.
* 마 24: 9, 14 – 9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마 25: 32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 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구분 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 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제자를 삼아(*,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한다.
* 마 11: 29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
* 마 12: 46-50 –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 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 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 명령에서 주어진바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 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제자를 삼는다’는 말(마데튜오)은 옛날 영어 번역에는 ‘가르치다’로 번역하였다. 누구의 제자를 삼는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므로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제자란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행동을 본받는 자를 가리킨다.
제자를 삼으라는 주의 명령은 누구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인가? 가르치는 자들의 제자인가? 가르치는 자는 선생이 되고 배우는 자는 제자가 되는가?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제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 마 23: 8-10 –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 고전 3: 5-7 –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세례는 죄 씻음의 표시요 하나님과의 연합의 표시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졌다.
* 행 2: 38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행 8: 16 -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 행 10: 48 -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 롬 6: 3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고전 1: 13, 15 –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고전 6: 11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 고전 10: 2 -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
* 마 3: 16-17 –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 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하게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
* 행 8: 16 -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 행 10: 48 -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또 사도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삼위(Trinty)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 고전 12: 4-6 –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고후 13: 1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요일 3: 23-24 –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름으로’라는 말은 ‘이름 안으로(에이스)’라는 뜻인데, 이것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기에서 영적 연합이란 본질적 연합 혹은 실체적(實體的) 합일(合一)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 그러나 생명적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은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
* 렘 2: 13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엡 2: 1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서 '이름'(*,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 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 '씻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세례' 또는 '침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 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중요한 것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란 죄 사함을 받고 메시아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 (Beasley-Murray, Baptism pp.90-92).
* 왕하 5: 14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시 68: 23 –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 막 7: 4 -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 막 16: 16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눅 11: 38 -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 딛 3: 5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삼위의 이름 안으로 연합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택된 백성의 수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아들의 구속 사역, 중보 사역의 혜택을 받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內住)하심 그리고 성령 안에 거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구원의 복이다. 이 복은 죄 씻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이제 믿음으로 받는 세례는 그 구원의 복, 즉 죄 씻음과 연합을 표시하며 확증한다. 성도가 받는 복이 이것이다.
4] 제자의 사명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주신 기사로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것이며, 이는 흔히 위대한 명령으로 불리어지며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과 대응이 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먼저 지상 명령을 하기 전에 자기가 그러한 명령을 주시는 근거를 밝혀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11: 27. 요 3: 35. 13: 3. 17: 2)라고 말씀하시며 이 지상 명령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이 권세로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명령하셨다.
(1) 너희는 가서
실제로 주님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 8)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향해 복음을 들고 갈것을 명령하셨다.
성도와 교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전도는 성도의 의무요 책임이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도 중요하지만 전도하기 위하여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함과 같도다'(롬 10: 14-15)라고 전도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18절)고 명령하셨다. 결코 복음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이나 특정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것을 가르쳐주는 명령이다.
복음의 대상은 '먼저 유대인에게'의 제한이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장은 허물어졌으며, 모든 족속은 제한 없이 복음을 듣게 된 것이다.
'모든 족속'은 아직 믿지 않는 이방 민족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제자로 삼는다'는 말씀은 가르치고 훈련시킨다는 뜻으로 개인적인 믿음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조직될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자는 성부 하나님을 창조자와 섭리자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유일의 중보자와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보혜사 성령을 그의 위로자로 고백하는 신앙이다.
(3)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들이 3년간 들은 교훈을 가르치라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 마지막까지 전하는 데 교회의 사명이 있다.
복음 전파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깨닫게 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약 2: 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도 요한은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했다. (계 1: 3).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전하는 자의 사상이나 가르치는 자의 사상이 아닌 주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였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세상 끝날까지 중단 없는 영적 임재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이 말은 항상 우리와 함께 현재적으로 같이 계심을 의미한다.
성도는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요 14: 18)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함께 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이미 그의 탄생시에도 있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 25).
그는 태초부터 우리와 함께 하셨고 앞으로 영원토록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신앙 의식이며, 확인이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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