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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4 : 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 고전 4 : 3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
고전 4 : 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오늘날도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충성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 갈 5: 22-23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오늘날 교회의 모든 직분자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 24) 하였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되고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고 하였다.
* 고전 9: 16-17 –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주의 종들은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직분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 엡 3: 3-4 –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1]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복음은 만세 전부터 구약시대까지 감추었다가 말세에 밝히 계시된 비밀의 말씀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즉 관리인으로서 그 복음을 충성되게 해설하고 전파하였다. 신약 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바울은 지도자의 겸손과 권위를 동시에 강조한 후에 이에 덧붙여서 '히나'(*, ' ... 하기 위하여')가 이끄는 또 하나의 목적절을 제시한다.
청지기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뿐이며 자신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실할 따름이다.
칼뱅(Calvin)은 이와 같은 삶을 '건전하고 지혜로운 생각으로 양심의 순결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2] 구할 것은
어떤 사본(*)에는 '구하다'라는 동사가 명령형(*, 제테이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너희는 충성을 구하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렇게 해석하더라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충성'이 청지기의 필수 불가결한 자질이라는 점이다.
복음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 31)고 하였다.
진정한 전도자는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상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것이다. 진정한 전도자는 말로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고전 4: 6).
바울 사도는 말한다.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 25).
이것이 말씀 따라 충성하는 진정한 주의 종들이다.
3] 충성이니라.
'충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문자적으로 '신실성이 발견되는 것'을 뜻한다. 충성(忠誠) 충 자를 보면 中心(忠) 성 자를 보면 言成(誠) 그래서 충성이란 말은 마음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린다는 것이다.
다윗처럼 법궤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했으면 방법도 말씀대로 제사장들 어깨에 메고 가야 하는데 수레를 만들어서 소로 끌어가려고 하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인정받아야 하며 완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된다(Lenski),
특히 '충성이니라.'에서 수동형 '휴레데'(*)를 사용하여 나타낸 것은 '충성되다'라는 인정이 개인이나 인간들의 판단에 있지 아니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본 절에 사용된 충성의 의미는 구별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가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12: 28).
* 엡 4: 11-12 –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딤후 1: 11 -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 벧전 2: 9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 즉 그들이 충성된 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충성되다.’는 것은 항상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 갈 5: 22-23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범사에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미쁘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미쁘시므로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언약을 지키신다.
* 수 21: 45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이러한 충성에는 세 가지의 시금석이 있다.
첫째, 양(量)의 시금석이 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셨다.
* 마 25: 21, 23, 26 –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신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작은 의무가 있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는 일이나 음식을 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 매일 성경을 조금씩 읽는 일 등은 작은 일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일을 맡기신다.
보디발의 종으로 일하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베들레헴 땅에서 양치던 다윗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
둘째, 시간의 시금석이 있다.
잠깐의 충성은 쉽다. 그러나 오랫동안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는 제자로 신용을 얻어 회계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은 30에 주님을 팔아버린 배신자가 되었다.
바울을 돕던 데마도 얼마 후에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배반하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중국 역사 가운데 전한, 후한이 있다. 한 나라가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 데에는 왕명이라는 재상이 있다. 그는 30년 동안 충신으로 있었지만 이후에 역적이 되었다. 그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셋째, 환경의 시금석이 있다.
녹음방초가 성한 여름에는 송죽의 절개를 모른다. 겨울이 되어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면 송죽의 푸르름(절개)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집이 가난할 때 어진 아내를 알고,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을 안다고 했다.
왜적이 침략하여 강산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충무공 같은 충신이 나타났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다.
* 딤전 1: 12-15 –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전 4 : 3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 -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의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의 일을 힘 있게 할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의 판단을 작은 일로 여기고 그것으로 자책하거나 교만하지 않기에 힘쓴다고 말한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서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한다.
1]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관적인 소욕(所慾)을 따라 함부로 판단했다.
그들의 판단은 마지막 날에 공력을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판단이다.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아나크리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판단이 심판이라는 의미보다는 편견에 의한 분별 또는 식별(discern)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2]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당시 교회의 비난과 배척은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심판대의 공정성과 위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매우 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설령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칭찬하며 천사와 같이 높였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아무런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주인에게 충성할 자세를 가졌으며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자신의 선한 양심조차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판단의 기준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판단은 사도 바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선포한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선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분쟁과 분열을 조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 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몫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께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절대적 판단으로 각 사람의 운명이 영원하게 결정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판단을 아예 안 하겠다’는 그런 선언이 아니다. 판단은 필요하지만, 나의 관점에서만 본 나에 대한 판단은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지렛대, 자기 판단의 기준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언제나 극단적인 두 개의 경향에 빠지기 쉽다.
(1) 하나는 자학이다.
자학은 지나친 과도한 자기비판의 결과입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사람이 지나친 자기비판을 하게 되고 자학에 빠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스스로자학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상실하게 된다.
다시 재기하기가 어렵다. 자존감이 상처를 입고 자신이 무너진 사람들은 인생을 향한 다른 도전이 시작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학은 결코 인생의 어떤 복음이 될 수가 없다.
(2) 극단적인 자기 판단은 교만이다.
교만은 지나치게 과도한 자기 사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스스로 교만에 빠지면, 사람들은 거짓된 자기 허상을 바라보고 자기 실제 모습이 아니라 허상의 자기 이미지를 설정해 놓고 그것이 ‘자기’라고 착각한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되지도 못하고 된 줄 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 갈 6: 3 –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자기가 굉장히 이상적인 인간인 것처럼 착각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일종의 나르시스적인 자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기 판단, 그것은 유해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판단의 오류, 즉 인간 판단의 주관적 오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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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