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神通한 解譯이 아닌가!?
갓(冠, God)을 쓰는 조선인
우리나라의 기독교 선교 초기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가 보니 양반들 모두 갓을 쓰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하여 한 유식한 양반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 머리에 쓴 게 뭐요?"
"갓이요."
"아니, 갓이라니...
갓(God)이면 하느님인데,
조선 사람들은 항상 머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다닌단 말 아닌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이
이미 이들에게 임했다는 것인가?"
선교사가 궁금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오?"
양반은 한자로 글자를
써 보이며 대답합니다.
"朝鮮(조선)이요!
‘아침 (조)朝+깨끗할 (선)鮮’
이렇게 씁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더욱 깜짝 놀라 "조용하고 깨끗한 아침의 나라, Morning calm의 나라 맞구나."
라고 생각하며 조선의
'朝(조)' 字를 풀이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양반은 천천히 글자를 쓰면서 대답했습니다.
"먼저 十(십) 자를 쓰고 그 밑에 낮이라는 뜻인
해日(일) 자를 쓰고,
또 十(십) 자를 쓰고 그 곁에 밤이라는 뜻의 달 月(월) 자를 씁니다. 이렇게요."
십자가(十) 해 일(日)
십자가(十) 달 월(月)
선교사는
놀라 중얼거렸습니다.
"낮(日)에도 십자가(十),
밤(月)에도 십자가(十),
온종일 십자가와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이구나."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鮮(선) 자도 풀이해 주시오."
"물고기 어(魚) 옆에
양 양(羊) 字를 씁니다."
선교사가 다시 놀라며 말했습니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의 상징인 '익투스'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고,
또 羊(양)은 '하느님의 어린 양' 이니 鮮(선) 字는 완전히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선교사는 감탄하며 말하길
"朝鮮(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름부터가 낮이나 밤이나
십자가와 함께 생활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이신
어린 양'이라는 신앙 고백적 이름을 가지고 있구나.
조선은 하느님께서
예비해 두신 복음의 나라가
틀림없습니다."
또 한 번 감탄하며 선교사가
계속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을 영어로
어떻게 씁니까?"
"Chosen People
(조선 피플)이라고 씁니다."
"와우!
선택된(Chosen)
사람들(People),
조선은 과연 동방의
선민(選民)입니다!
조선인은
하느님(God, 갓)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낮이고, 밤이고,
십자가와 함께 살아온
깨끗한 아침의 나라 천손민족 (天孫民族)입니다."
누구의 작품일까요?
의도적으로 지어냈다 해도
놀랍고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
199대 1의 승리자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李舜臣(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 있었을리는 없는 것이다.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외친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 하며 임금(선조도 속으로는 동조 함)을 압박 하고 있으니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공은 공, 사는 사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한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오리 이원익 (1547~1634)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 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외쳐도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臣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 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이 말에
선조도 체념을 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 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없는가 보구나.!"
오직 한사람의 곱고 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꺽었다.
드디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
당시
문무백관 199명 대 1
이원익 한 사람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 만 떠 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 하고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세월은 400년이 지나고
시대만 수없이 변했을 뿐
정치는 변한게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알아주는 한사람만 있으면 외롭지 않은것이 대장부의 자존심이요 명예이다.
더구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통에는 더할것이다.
온갖 시기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까지 간 만고의 충신을 알아 보고 199대 1로 임금의 불신으로 부터
믿어준 탁월한 선견지명의 굳은 신념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오리 이원익 대감이야 말로 만고에 길이 빛나는 충신이며 나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 이원익이 나라를 구했던것이다.
한 사람.!
올바른 한 사람이 중요하다.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장군은 행복한 분이셨다.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 하지않고 불의에 뜻을 굽히지 않았던 오리 대감과 같은 분이 시대에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러기에 오리 정승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400년이 지났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 같은 정정당당 했던 청백리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