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훈아의 노래 ‘테스형’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20년전의 금진항에서의 맑스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 금진항은 내 할머니 친정이다.
할아버지가 백봉령 밑 飛天 마을에서 일본놈을 두둘겨 패고 만주로 도망가다 잠시 들린 곳이 금진항이다.
飛天은 그 후 아내가 죽고 잠시 스님 생활을 할 때 내 법명이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해방될 때까지 숨어지내시다가, 해방되고 그 동네에서 제일 이뻣던 할머니와 결혼을 하고, 옥계면 낙풍리 습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고 천석지기가 되셨다.
지금도 금진항에는 진외갓댁 고모가 횟집을 하고 있다.
처음 내가 대게를 인터넷 쇼핑몰로 팔게 된 이유가, 우연히 고모집에 들렀다가, 회를 얻어 먹고 후식으로 나오는 대게를 쟁반채로 먹고 시작된 것이다.
대게는 12월부터 5월까지가 集魚 기간이고, 그 이외의 시간은 操業禁止 기간이다.
그런데, 그때는 여름이라서 조업금지 기간이었는데, 광어 그물에 걸린 어쩔 수 없는 대게였다.
그것을 버려야 하는데 그냥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겨울부터 금진항에서 대게 장사를 시작하고 더불어 옥계면 북동리 북동분교 부지에서 배추 옥수수 감자 등을 심어, 농산물 쇼핑몰도 같이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금진항 대게가 모자라서 동해안 어항들을 돌아다니다가, 내 사춘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던 이곳 묵호항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절임 배추는 바닷물에 절여서 선풍적인 인기를 소비자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있었던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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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 아저씨 광어 그물에 광어가 억수로 많이 걸렸다. 그래서 경매하고도 남아서 고모네 횟집 어항에 보관을 할 지경이 되었다. 역시, 가을이 되니 고기도 풍년이었다.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바닥을 헤엄치는 특성이 있는 광어와 함게 비슷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대게와 아구가 같이 엄청나게 걸린 것이다. 무슨 행운이냐고? 천만의 말씀. 아귀는 대충 벗겨내어 고모네 횟집에서 매운탕 거리로 쓸 수가 있지만 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 물론 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더구나, 가을 동해안 꽃게인지라, 그 맛의 명성은 어민들이 더 잘 안다. 대게와 같이 삶아서 保管을 해서 하룻만에 먹어보면 대게는 살이 물렁거려 제 맛을 잃어버렸지만, 동해안 꽃게는 살이 단단하여 그 맛이 여전하다. 그런데도 게는 찬밥이다.
그물을 다시 쓰기 위해서는 게를 벗겨내야 하는데, 그것이 만만치 않는 작업이다. 만약, 게의 앞발로 그물에 매달려 있기만 해준다면 별 문제 아니지만, 게란 놈은 무식하게도 빠져나갈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그물로 온통 자기 몸에 철철 감아 옷이라도 해 입은 모양새다, 그것을 벗겨내는 것은, 대단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어렵게 벗겨내어 상품으로 제 값을 받는다면 수고스럽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데, 동해안 꽃게는 그 맛에 비하여 동해의 대게와 털게에 밀리고, 서해안 꽃게의 名聲에 주눅이 들어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마디로, 그놈의 상품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그물에서 벗겨내는 과정에 이미 상품성을 잃어버린다.
그물과 어촌 아낙네들의 손가락과 치열한 싸움을 하느라 온전한 다리가 붙어 있는 놈이 거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은 그 껍데기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지라, 그것으로 이미 상품이 될 수 없는 處地다.
동해안 꽃게 입장에서는 무지 억울한 일이지만 자본주의 상품사회의 노동과 특성상 눈물만 찔끔 흘려주고 그 안타까움에 슬쩍 동의만 해 줄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게를 벗겨내는 작업은, 한가할 때만 하게 되고 바쁘면 대부분은 망치로 짓이겨서 그물에서 털어내는 입장이다. 게를 벗겨낸다 해도 그 작업은 온전히 어촌 여자들의 몫이다. 힘든 어촌일에 남자들의 노동이 대부분일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배를 타고 나가는 것도, 과거와는 다르게 부부가 같이 간다.
어부를 할 사람이 없는 탓이기도 하고 사람을 써서는 수지 타산이 맞지도 않는다. 바다의 힘든 일은 대부분 남자들이 하지만, 고기를 팔고 나서 그 다음의 번거로운 작업은 순전히 여자들이다.
그믈을 손질하고 수선하고 미끼를 걸고 청소를 하고....새벽 두 세시에 바다에 나가 아침에 판장에서 고기를 팔고 남자들은 대부분 집에 들어가 모자란 잠을 보충하지만, 여자들은 그런 일 때문에 낮에 겨우 토막잠을 자기가 대부분이다.
광어 그물에 걸린 게 역시 여자들의 차지다. 어촌에는 돈이 되는 고기와 안되는 고기가 있다.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그 고기가 가지는 맛과 영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광어보다 동해안 꽃게가 훨씬 맛있고 어민들도 알아주는 것이지만, 상품으로는 광어가 꽃게 알기를 우숩게 안다.
남자들의 노동은 상품이 되는 광어를 위한 것으로 집중이 되고, 여자들의 노동은 돈이 안돼는 그물 벗기기 같은 노동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게를 벗겨내는 여자들은 비록 팔리지 못하는 게에 대한 휼륭한 유용성을 알고 있다.
만약 횟집을 하는 사람이라면, 게는 대단한 반찬거리에 단골 손님을 유혹하는 미끼도 될 수 있고 게장을 담가서 손님에게 주면 그 맛에 황홀해 하는 손님들의 얼굴을 보고 흐믓해 할 수 있다.
또, 비록 다리가 떨어져 볼품이 없어졌지만 그것을 삶아서 서방님 식탁에 올려 놓으면, 평소에 딱딱대던 신랑의 얼굴에 흐믓한 미소가 퍼지면서 반주 한잔 기분 좋게 마시는 모습도 상상 할 수 있기도 하다.
게장을 담가 멀리 있는 자식들에게 택배로 보낼 생각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 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게를 삶아서 동네 여자들 둘러 앉아 잡담을 하며 소주 파티를 벌리는 것도 괜찮은 일 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만 그 작업에 걸려 든 것이다. 아니, 걸려든게 아니라 내 스스로 휘발유를 들고 불구덩이에 뛰어 든 꼴이었다. 평소에 나는 게를 그물에 벗겨내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고모에게 입버릇 처럼 이야기 했다.
그 아까운 것을 왜 망치로 짓이겨서 버리느냐고 속 편한 소리도 수 없이 했다. 그럴 때마다 고모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제, 드디어 나에게 게를 벗겨내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광어를 엄청 잡아서 도저히 숙모와 종대 아저씨만으로는 게를 벗겨낼 시간이 없었다. 물론 그럴 경우는 당연히 망치로 게를 부셔버려야 하지만 평소에 내 얘기를 눈여겨 들어 왔던 고모가 자청을 해서 그물 한 망태기를 내 몫으로 가져 온 것이다.
어쩌면, 고모는 평소에 나의 그런 입놀림이 얄미워 골탕을 먹이려고 한 짓일 거라고 나중에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아직, 요거 밖에 벗기기 못햇어?"
내가 그물을 들고 씨름을 하면서, 고모와 종대 아저씨와 숙모에게 이 소리를 열번 이상이나 들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의 경박스런 입이 후회되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시간을 다투는 일에 나 같은 얼치기 끼여 들은 일에 미안하여 그들 앞에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는 그물에 두 손들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온몸으로 휘감고 있었다.
손가락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제는 왜 그리 비바람이 몰아치던지, 판장 천막 사이로 비바람이 새어 들어와 내 등짝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들의 작업 속도에 비하여 열 배 이상은 느린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오대주 육대양을 주름 잡던 대한민국 해군 SSU 대원이 아니었던가. 심해 잠수사로 스쿠버 강사로 죽음의 문턱을 수 없이 넘나 들었고 거친 파도 쯤은 우습게 알던 놈이었다.
그런데, 그물에 걸린 게를 벗겨내는데 이렇게 자존심을 상할 줄이야.
짓이겨진 자존심이 바닥에 내려 앉고, 내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 자포자기에 빠졌을 때 쯤, 문득 떠오르는 그 분이 있었다.
칼 맑스 형! (나는 그의 역사인식에 동의하여 절대로 그에게 형님에서의 '님'처럼 권위적인 접미사를 붙이지 않는다. 나도 역시 새까만 20 살 어린 후배들에게도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아! 나는 이미 게를 벗겨내는 일에 포기를 하고 심정으로는 어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몸따로 마음따로의 상태가 된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프로레타리아는 될 수도 없는 룸펜 부르주아지 인 것이다.
한때 사모하던 칼 맑스 형의 자본론이 떠오른 것이다.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상품 생산을 위해 착취되는 노동과 자신의 유용한 사용가치를 위한 노동. 한쪽은 돈으로 계산되어지는 사회적으로 응고된 노동 일반이지만, 한쪽은 그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돈으로 계산이 되어지지도 않고 되어서도 않되는 인간 생존의 필수적인 노동인 것이다.
맑스 형은, 심지어 이런 이야기 까지 했다. 사용가치를 위한 유용 노동은, 자연과의 물질 대사이다.
신성한 노동의 의미인 것이다.
광어를 잡기 위해서 하는 노동이 상품생산의 노동이라면, 게를 벗겨내는 작업은 유용노동일 것이라고, 130년 전에 돌아가신 맑스 형의 귀신을 금진항으로 불러 물어 보았다. 형은 네말이 맞다고 해 주었다.
한 때 憧憬하던 형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게 벗겨내는 일 보다 맑스 형과의 대화가 더 좋았다. 내가 자본론을 엉터리로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자화자찬했다.
강원도 동해안 금진항에서 누가 감히 맑스 형의 자본론을 생각하겠는가. 나는 이미 게를 벗겨내는 일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조카야! 뭐 하고 있냐? 게가 다 짓물러진다."
아! 나는 맑스형과의 대화에 빠져, 그물에 걸린 게 다리를 하나씩 때어 내고 있었다.
야속한 고모는, 틀림없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게 그물을 나에게 안겼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