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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 일순위언론입니다.
국민을 기망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배두드리며 살고있는 조선일보입니다.
글이 다소 길다고 느껴지시겠지만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듯 해서 퍼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봐도 너무기네요... 휴)
-출처 "말" 인터넷 안티조선 커뮤니티 펌,
“천황폐하께 조선 출신 범인(犯人) 이봉창이 폭탄 던졌으나 무사히 환궁하시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의 불행”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 위해 체결한 조약”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대근원 기초한 위대한 창업공신”
“일제의 30년 조선통치로 < 문화조선 건설 > 결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 잘 운용해야 항일운동 근절 가능"
“일본육군지원병제도는 조선통치사의 신기원이자 성스러운 일”
(출처- '말')
조선일보가 반공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 냉전시대의 낡은 레코드판을 다시 돌려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병리적 심리의 근저에 자리한 뿌리를 발굴해 보자.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현으로 민족융합의 이상적 경지로 맥진(驀進) ―이는 모두 천황의 존엄스런 위세 때문인 동시에 팔굉일우(八紘一宇) 대건국정신(大建國精神)의 발로.”( '조광' 1940년 10월호 사설) ‘국가안보의 파수꾼’이자 ‘사상검증의 심판관’ 을 자처하는 조선일보 자매지 < 조광 >('월간조선' 의 전신)의 지면을 장식했던 기사의 일부다. 여기서 ‘맥진’이란“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돌진”을, ‘팔굉일우’는 “온 세상과 한 우주”를 뜻한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세계를 위해 좌우를 돌보지 않고 돌진했던 조선일보의 친일 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다.
조선일보와 < 조광 >의 친일보도 경향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인용 기사는 가능한 원문을 살리되 일부는 현대문법에 맞게 고쳤다.)
1. 일제침략에 항거한 민족항쟁을 테러로 매도
“광주학생사건에서 발단이 된 학생시위사건이 전 조선에 확대된 오늘날에 있어 제군이 비상(非常)을 버리고 평상(平常)에 돌아와 고요한 책상 앞에 용기있게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 허다한 불만과 실망 속에 이토록 확대된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1930년 1월 12일자 사설 < 동요 중의 학생제군―책상 앞으로 돌아가라 > )
한국근대사의 ‘상식’은 광주학생사건을 청년학생들의 반일민족항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학생들에게 배일운동을 즉각 중단하고 학원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한 의거를 ‘비정상적이고 불행한일’로, 망국의 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의 영달을 위해 공부나 하는 것을 ‘정상적이고 용기있는 일’로 본 것이다.
“천황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 앵전문앞에 이르렀을 때 사고가 발생하였다 …… 전방 약 18간에 수류탄과 같은 물건을 던진 자가 있어서 궁내대신 마차의 좌후부 바퀴 부근에 떨어지어 차체 바닥에 엄지손가락 만한 손상 두셋을 나게 하였으나 천황의 마차에는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 50분에 무사히 궁성으로 돌아오시었다. 범인은 …… 조선 경성생 이봉창(32).”(1932년 1월 10일자 기사 < 천황 폐하 환행도중 돌연 폭탄을 투척 > )
결국 요지는 이봉창이라는 한국인 출신 ‘범인(犯人)’의 폭탄 테러에도 불구하고 천황폐하께서는 천만다행히도 무사하시었다는 말씀이다. (부끄럽게도 이 사건을 항일투쟁사건으로 특종 보도한 것은 중국의 < 국민신보 >였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은 사회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 운용을 잘못하면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 가는 사상운동에 도발적 반동기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사유한다.”(1936년 12월 13일자 사설 <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 )
조선일보는 항일을 지향하는 독립운동과 사상운동을 말살하려는 이 악법의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총독부가 이 악법을 잘 활용하여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독립운동과 사상운동의 싹을 아예 밟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2. ‘황민화’ 기사로 ‘천황폐하’께 복종과 충성을 서약
자칭 ‘1등 신문’ 조선일보는 일제시대에도 수많은 1등 기록을 남겼다. 조선 신문으로는 최초로 새해 첫날 신문 1면에 일왕 부부의 초상을 대문짝만하게 싣기 시작했으며(1936년 1월 1일자), 가장 먼저 일본군을 ‘아군’ 혹은 ‘황군’으로 표기한 것이다(1937년 7월 19일자).
일본군의 침략전쟁에 돈을 대라고 조선 동포들에게 강요한 '국방헌금’ 사고(社告)를 제일 먼저 낸 것도 조선일보였다(1937년 8월 12일자). 그런 조선일보였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의 민중’을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표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1937년 8월 23일자). 특히 ‘조선일보의 황제’인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나 ‘천장절(天長節)’이 되면 조선일보 지면은 ‘천황폐하’의 은혜로운 통치에 대한 감격으로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조선 침략의 괴수’ 히로히토의 생일을 맞이해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가 지어 바친 ‘용비어천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춘풍(春風)이 태탕하고 만화(萬花)가 방창(方暢)한 이 시절에 다시 한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바이다. 성상폐하께옵서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鴻遠)한 은(恩)과 광대 (廣大)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적성봉공(赤誠奉公) 충(忠)과 의(義)를 다하야 일념보국(一念報國)의 확고한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1939년 4월 29일자 사설 < 봉축 천장절 > )
봉건왕조시대에 정도전이 이성계에 바친 헌사도 이보다 더하진 못했으리라. 조선일보는 같은 용어를 쓰면서도 항상 극존칭을 사용했다. 예컨대 ‘황공(惶恐)’을 ‘성황성공(誠惶誠恐)’으로, ‘경하(慶賀)’를 ‘동경동하(同慶同賀)’로, 충성(忠誠)을 ‘극충극성(克忠克誠)’ 이라고 과장되게 표현했다. 아니 조선일보는 신문 사설을 아예 교주에게 바치는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왕을 ‘지존’이라고까지 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천황 지존’에게 “황공무지와 감격을 못 이기겠다”고 토로한 뒤 이번에는 “신동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 황도일본의 위광을 빛내자”면서 충성맹세를 늘어놓는다.
조선일보는 ‘조선 백성의 신문’이기를 포기하고 ‘일본 천황의 신문’이 되기로 작정했다. 사설 말미에 “천황의 무강과 황실의 번영을 받들어 축하하면서 우리가 경행하는 이유를 강조하여 둔다”고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러한 충성서약은 매년 되풀이 된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동안 조선의 백성을 천황의 ‘신민(臣民)’이라고 한 것도 부족했던지, 이 무렵부터는 아예 ‘신자(臣子)’라고 바꾸어 표기했다는 점이다.
3. 내선일체 미화하고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 동원
“황국의 위무선양(威武宣揚)과 동양평화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제일선에 선 출정장병으로 하여금 안심과 용기를 가지고 신명을 다하게 하는 데는 총후에 선 일반국민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1937년 8월 12일자 사설 < 총후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의 목적 > )
1937년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중국 대륙을 침략하면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즉각 조선 민중의 임전태세를 강조했다. 후방에서 조선 민중이 일본군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당연히 발휘해야 하는 의무와 성의의 일환”이라고도 주장했다.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38년부터 조선일보의 ‘친일보국’과 ‘전쟁미화’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해 1월 1일자 1면에 일본군 지원병들의 열병식 사진을 ‘대문 짝만하게’ 게재한 조선일보는 특집기사를 통해 당시 미나미 총독이 제창한 ‘내선일체’를 미화하는 일에 열중한다. 조선일보는 내선일체의 목적을 “조선 민중을 상대로 한 국민으로서의 신념상 의무, 권리의 동등을 전제로 한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동족적 친화감을 깊게 하려 함에 있다”고 해석하고 “물론 이 실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조선 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조선일보는 ‘에포크 메이킹’이라고 영어식으로 표현했다)이자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 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란에 수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 있거니와……금번 지원병제도의 실시는당국에서 상(上)으로 일시동인(日視同仁)의 성려(聖慮)를 봉체 (奉體)하고 하(下)로 반도민중의 애국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황국신민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장래 국가의 간성으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1938년 6월 15일자 사설)
일제는 1938년 4월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만들어 냈다. 한국 청년들을 그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제도를 가리켜 '조선통치사의 신기원’이라고 찬양했다. 아울러 전쟁에 나가는 것은 “천황과 일본의 신하이자 백성인 조선의 민중으로서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갈충진성’이란 말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갈충진성’ 중의 ‘갈진(竭盡)’은 “다하여 없어짐”이라는 뜻이다. 결국 한국 청년들에게 천황과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하여 싸우다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4. 조선일보 폐간 뒤 더 노골화된 친일매국의 길
조선일보는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1940년 8월 11일 폐간된다.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저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고백한 폐간사의 한 대목처럼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은 아니다.(‘숙야분려’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최선을 다하고 고민했다”는 의미인데, 결국 친일행각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는 자랑이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월간지 < 조광 >(요즘의 < 월간조선 > 을 연상하면 된다)을 확대 개편하고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국책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는 데 일단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 조광 > 1940년 7월호 권두언 < 일본제국과 천황에게―성은(聖恩) 속에 만복(萬福)적 희열을 느끼며 >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상태였다. 특히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은 방응모가 일제의 조선 통치 30년을 맞이해 쓴 다음의 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능멸이고 배반이며 반역이었다.
“일한양국은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데라우찌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大本)을 정(定)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30년 동안 7대에 이르는 총독들은 그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특색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 건설을 결실……2천3백만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를 실천해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사려 깊은 시정(한일합방을 말함)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명하게 관찰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의 노력을 더하여 그 영예를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 조광 > 1940년 10월호)
친일매국신문 조선일보, 역사의 법정에 서야
조선일보는 지금까지 이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대해서 시인하거나 사죄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도리어 해방 후에는 이를 은폐한 채 민족지를 자처하면서 독재찬양의 길을 걸었다. 그런 조선일보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하나―친일파에 맞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세력과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진보세력을 ‘반공’의 이름으로 때려잡는 일이었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도 크게 보면 그런 친일콤플렉스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8년 12월 13일 언론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현 회장)은 이철 의원이 조선일보의 친일전력을 언급하자 도리어 역정을 내며 이렇게 큰소리 쳤다. “조선일보가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했단 말이요? 악랄한 조선총독부 아래 선열들이 독립을 지키기 위해 고문당하고 피흘린 것을 매도하지 마시오. 그렇게 매도하면 우리 역사가 모두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이오.”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비판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것이 역사를 매도하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비판하면 한국의 역사가 모두 뒤집힌다? 그러나 조선일보 사주와 경영진,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들은 알아야 한다.
프랑스가 항독 해방전쟁이 끝난 1945년 나찌 독일에 협력했던 매국노들과 반역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숙청시켰다는 사실을. 실제로 프랑스는 민족과 나라를 배신하면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그 중에서도 ‘지식을 팔아’ 나찌를 도운 언론인들이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친나찌 행위로 떼돈을 번 언론사 사장 알베르 르죈느와 친나찌 보도를 주도했던 언론사 주필 조르주 쉬아레즈 등 많은 언론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이 썼던 사설과 기사가 사형선고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첫댓글 정말 싫다규~너희 조선~을 비롯하야 중앙 동아 췟. 스크랩해요~
조중동은 다 쓰레기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는 건물에 폭탄던지고싶어요
사람들 신문볼때 조중동 선물준다고 무조건 그거보는거 진짜 싫다긔... 그돈이 다 어디서 나온돈인데....땅값비산 서울에서 그 큰집에 사는거보믄 말 다했죠뭐...
요즘 욱일승천기 패션?? 막 떠돌아다녀서 아주 좌증나 죽겠어..ㅠㅠ 에라이..다 느그들 때문이다..
난 위에 모든것도 짜증나지만 조선일보 잘못됐다고 말만 했다하면 빨갱이로 모는것도 정말 짜증났다긔.........사회학과 수업들을때 친조선일보 선배랑 오지게 싸웠었다긔........
저런인간들이 기득권을 잡고있는 이나라 현실이 한탄스러워요ㅠ_ㅜ
너무 눈물나네요 아우 진짜
매국일보 !!
이런 것들은 꼭 법정에 세우고 사죄하게 해야합니다.
친일 청산 제대로 했어야하는데.......휴.................
우리 나라부터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무조건 반사적인 반일감정 말구요) 일본과의 과거청산은 어렵지 싶어요. 일단.. 저딴 친일파 새끼들부터 때려 잡아야 되는데
친일하는 것들은 왜 다 잘먹고 잘사는거지?? 하늘이 왜 가만냅두는거야!! 그리고 친일청산 반대한 인간들 또 떠오르네 아 열올라
좆선일보....조중동은 좀 보지 말아야 한다긔.-_-
친일만 했나...독재정권에 붙어서는 정권의 나팔수 노릇이나 해놓고는 .
저희집 조선일보보고있는데 조낸 싫네요..바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