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달려 닿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이곳엔 여러채의 한옥 고택이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른 ‘노송정 종택’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노송정은 건물을 지은 퇴계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의 호다. 하지만 퇴계 이황이 태어난 방이 있다고 해서 ‘퇴계태실’로 더 잘 알려졌다.
종택 대문 앞에 서니 왠지 모르게 위축됐다. 양옆의 행랑(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보다 지붕을 높게 올린 솟을대문의 위풍당당함 탓이다.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임을 들어가기도 전에 실감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노송정(松亭)’이란 글귀가 새겨진 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직접 썼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미리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막상 역사 속 인물이 쓴 글귀를 직접 마주하니 마치 조선시대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자에 이어 찾은 뒷마당에선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을 만났다. 그곳에는 집안 살림살이 규모를 말해주는 넓은 장독대가 한가로이 가을햇볕을 쬐고 있었다. 맛있는 장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수많은 장독과 야트막하게 쌓아 올린 담장, 마루 밑 땔감이 어우러진 모습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종택이 지어진지 500여년의 세월동안 이런 옛 모습을 지키려고 애쓴 종손·종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들의 노력 덕일까. 이곳은 영화 <부라더>에서도 안동의 뼈대 있는 종갓집으로 등장했다.
아픈 어머니를 병원 한번 데려가지 않고 돌아가시게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의절한 아들 석봉(마동석 분)과 주봉(이동휘 분). 형제는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초상을 치르러 종갓집에 모인다. 처음엔 슬퍼하긴커녕 귀찮은 태도로 장례 준비를 하지만 식을 진행하면서 그동안 아버지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치매였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종손인 남편의 평판이 떨어질까 봐 병원 가기를 거부한 것. 아버지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줌과 동시에 두 아들만큼은 종손인 자신과 달리 자유롭게 살길 바라며 연락을 끊은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식이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부모의 발끝조차도 따라가지 못함을 새삼 깨닫는다.
종택을 둘러보는 내내 아버지가 두 아들을 쫓아낸 후 슬퍼하는 모습,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더는 밥을 하기 싫다며 어린아이처럼 우는 모습 등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종택 탐방을 마치고 두번째로 향한 곳은 6월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봉정사다. 이 사찰은 신라시대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봉황이 머무른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려면 누각인 만세루 아래를 지나야 한다. 누각 천장이 낮아 절로 머리가 숙어지며 몸가짐이 조신해졌다. 예의를 갖추고 안마당에 들어서자 대웅전이 가장 먼저 반겼다. 소박한 대웅전은 봉황의 자태처럼 품위 있었다. 관광객들도 이를 느낀 듯 대웅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대웅전 왼쪽에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이 있다. 약 1000년이란 긴 세월을 견딘 탓일까.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안동에서 단 두곳만 둘러봤는데도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지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안동을 여행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찾으리라는 다짐이 절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