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님께 먼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불교를 공부하려면
제대로된 부처님 가르침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간화선을 공부하신 분들은
결론을 들고나와서
과정에 매이는 분들을 질타하시죠.
특히 교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사과 맛을 보려면 한 입 맛 보면 되지
'백날 떠들어 봐도 그 맛을 알 수 없다'
라고 비판하시죠.^^
생각을 떠난 그 자리를 말씀하시는데
백날 알음알이 내서 생각을 일으켜 봐야
이미 세존의 종지와는 십만팔천리란 말씀이시겠지요.
여기 까지는 보리수 님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지켜나가시는 것은 수행의 자세로 존중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부처든 중생이든 무아다. 이건 보리수님의 입장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이해한 보리수님의 견처를 풀어서 말해본다면
생각을 내려 놓으라 했는데 생각을 일으키니 그르침이요
생각 이전자리로 들어갔다면 윤회고 죽음이라는 '생각'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 이전 자리는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중생이며
이는 오온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말로 푼다면 삶을 경험한 그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착각을 했을 때는 윤회가 존재한다고
세존께서는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세존의 오도송을 보시지요!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anekajātisaṁsāraṁ
나는 헛되이 치달려 왔다. sandhāvissaṁ anibbisaṁ
집 짓는 자를 찾으면서 gahakāraṁ gavesanto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dukkhā jāti punappunaṁ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보여졌구나. gahakāraka diṭṭhosi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puna gehaṁ na kāhasi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gahakūtaṁ visaṇkhataṁ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visaṇkhāragataṁ cittaṁ,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taṇhānaṁ khayam ajjhagā ti
(법구경 153-4)
이 글에서 나타나는 것은 깨달음 이전의 세존께서는 골재, 서까래에 해당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셨고 그래서 집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또한 숙명통을 설명하시는 문구에도 윤회는 잘 나타납니다.
M4
두려움과
공포의 경
(Bhayabheravasutta)
숙명통(pubbenivāsānussatiñāṇā)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번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합니다.
보리수님, 이런데도 윤회를 부정하시겠습니까?
제가 이해하기로는
윤회란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법륜이 돌아가는 이치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제 스승이신 부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이해한 부분 만큼이야 제가 맛을 본 것이지만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이야 세존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는 윤회가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이치적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보이구요.
세존께서는 숙명통과 천안통을 천명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보리수님께서 도솔 삼관의 자리에 있으시다면
윤회를 부정하심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신 것입니다.
그것 또한 한 생각이십니다. 중도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제 이해는 그래서 그 자리에는 윤회가 붙을 구석이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래서
'무아의 상태에서는 실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면서 긍정하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단지 중생들이 그렇다고 말 할 따름이지요.'
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한 너무나 많은 어려운 이론들이 있어서
그 알음알이가 문제로 보이실 수도 있겠으나
그 내용을 제대로 정리해야지 정법을 알게 되지
과정과 결과를 섞어서 이야기해서
주관과 객관과 '불성'의 자리를 혼합해서 언어를 사용하시면
불법에 대한 혼란만 야기시키며
그 또한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려됩니다.
참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윤회를 인정한다고 고정된 실체(자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윤회라는 현상은
한 생각이 일으킨 법륜이 돌아가는 것이고
법륜이 돌아감에 따라 한생각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계속 변화하면서 돌아갈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부르는 하나의 흐름은 있지만
그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눈 병일 따름이라는 것이 제 이해입니다.
첫댓글 요가케마님의 오온무아가 고라는 이야기가
다시 생각이 나는군요!^^
그렇군요.
부처님의 오도송은 저도 여러번 읽어 보았답니다.
부처님의 오도송을 비롯한 가르침은 문자를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전달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신앙이나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가진 기준과 믿음에 따라 평행선을 달립니다.
그러한 기준과 믿음을 버리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 동안 법우님들께서 많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나는 헛되이 치달려 왔다>
문자를 따라가지말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라 하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크리어한 설명울 할수 있어야 합니다.
뗏목님도 의미를 보라고 많이 이야기 하던데
정작 무슨 의미냐고 물으면 답변이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