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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 도신대사/입도안심요방편법문
禪宗四祖道信〈入道安心要方便法門〉
我此法。要依楞伽經。
나의 이법은 능가경을 따른 것이다.
諸佛心第一。
모든 부처는 마음을 으뜸으로 한다.
又依文殊說般若經。
또 문수설반야경을 의지했으며,
一行三昧。即念佛心是佛。
일행삼매는 곧 염불하는 마음이 곧 부처이고,
妄念是凡夫。
망념은 이것이 곧 범부이다.
第一大段 專明“理入”
제1대단 : “이입“을 온전히 밝힘
文殊說般若經云。
문수설반야경에서 이르기를,
“文殊師利言:世尊。
“문수사리가 아뢰기를,‘세존이시여,
云何名一行三昧?佛。
무엇을 일러서 일행삼매라 하옵니까?’”하니, 부처께서,
法界一相。繫緣法界。
“법계는 한 모습이다. 법계와 말미암아서 매달린것이니,
是名一行三昧。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하는 것이다.
如法界緣不退不壞。
마치 법계와 같아서 물러나지 않고 무너지지 않기때문에,
不思議無礙無相。善男子善女人。
부사의, 무애, 무상인 것이다. 선남자 선여인이여,
欲入一行三昧。
사람이 일행삼매를 하고자하면,
應處空閑。
장소가 비고 조용한곳에 응하여,
捨諸亂意。不取相貌。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용모를 취하지 않고
繫心一佛。專稱名字。
마음을 한 부처에 이어 매달고, 오직 부처의 이름만을 부른다.
隨佛方便所。
부처의 방향이 있는곳을 따라서,
端身正向。能於一佛。
몸을 단정히 하여 능히 한분의 부처에 바르게 향하고,
念念相續。即是念中。
생각생각이 서로 이어지면, 곧 이 염불하는 가운데에서,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능히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를 볼수가 있다.
何以故。
왜 그런가?
念一佛功德無量無邊。
한 부처를 염불하는 공덕이 무량하고 끝이 없기 때문이다.
亦與無量諸佛功德無二。
또한 무량하여 모든 부처의 공덕과 더불어서 다르지 않으니,
不思議佛法等分別。
부사의한 불법등과 분별하여도,
皆乘一如。成最正覺。
모두 일여(一如)에 오르게되어 최정각(最正覺)을 이루고,
悉具無量功德。無量辨才。
모두 무량공덕, 무량변재를 갖추었으니,
如是入一行三昧者。
이와 같이 일행삼매를 하는자는,
盡知恒沙諸佛法界。無差別相。
항하사의 제불법계, 무차별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夫身心方寸。舉足下足。
대저 심신은 방촌이며 발을 들거나 내리는 것이
常在道場。施為舉動。皆是菩提。
항상 도량에 있으면, 거동하는 것이 다 보리를 행하는 것이다.
<普賢觀經>云。“一切業障海。
보현관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업장의 바다는,
皆從妄相生。
모두 망상을 따라서 서로 생겨난다.
若欲懺悔者。端坐念實相”。
만약 참회를 하고자하는 자는,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本體,眞如)을 생각하라.”하였으니,
是名第一懺,
이것이 으뜸가는 참회이며,
摒除三毒心, 攀緣心,
삼독(貪瞋癡)의 마음과 반연(攀緣)하는 마음을 물리치고,
覺觀心念佛。
염불하는 마음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心心相續忽然澄寂。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지다가 홀연히 맑고 고요하니,
更無所緣念。
곧 염불을 따르는 바가 없게된다.
攀緣/반연 : 대경(對境)을 의지한다는 뜻. 마음이 혼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칡덩굴이 나무가 없으면 못올라가듯이,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 경우에 칡덩굴은 나무를 의지하니, 마음은 대경(對境)을 반연(攀緣/잡고 의지하여 올라감)한다, 이 반연은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된다
《大品經》云:『無所念者,是名念佛。』
<대품경>에 이르기를 “염(念)하는 바가 없는 것,
이것이 염불이다”하였는데,
何等名無所念?
어떠한 것들을 이름하여 염불하는바가 없는것인가?
即念佛心,名無所念。
곧 염불(念佛)하는 마음이, 염(念)하는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離心無別有佛,
마음을 떠나서 따로이 부처가 있지 않으니,
離佛無別有心。
부처를 떠나서 따로이 마음이 있지 않는 것이다.
念佛即是念心,
염불은 곧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니,
求心即是求佛。
마음을 구하면 곧 이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所以者何?識無形,佛無相貌。
그런까닭은 왜인가? 식(識)은 무형이고,부처도 형상이 없다.
若也知此道理,即是安心。
만약 또한 이 도리를 알면, 곧 이것이 안심(安心)이다.
常憶念佛,
항상 부처를 깊이깊이 생각하면,
攀緣不起,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니,
則泯然無相,
곧 민연(泯然/민연:자취가 없어)하여 무상(無相)이니,
平等不二。
평등하여 둘이 아니다.
入此位中,
이런 자리가운데 들어가면,
憶佛心謝,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도 버리게되는데
更不須徵。
다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即看此等心,
이제 이와 같은 마음으로 보게되면,
即是如來真實法性之身,
곧 이것이 여래의 진실(眞實)한 법성(法性)의 몸이고,
亦名正法,亦名佛性,
또 정법이라하고, 또 불성이라하고,
亦名諸法實性實際,亦名淨土,
또 제법실성(實性)실제(實際)이고, 또 정토라고하고,
亦名菩提金剛三昧本覺等,
또 보리, 금강삼매, 본각등이라하고,
亦名涅槃界、般若等。
또 열반계, 반야라고 한다.
名雖無量,皆同一體,
이름이 비록 셀수 없이 많지만, 모두 같은 한 몸이니,
亦無能觀所觀之意。
또한 능관(能觀/주관)과 소관(所觀/객관)이 없다는 뜻이다
如是等心,
이와 같은 마음은,
要令清淨,常現在前,
하여금 청정함이 항상 드러나 앞에 있게하면,
一切諸緣,不能干亂。
일체 모든 인연이 간섭하여 어지럽힐수가 없다.
何以故?一切諸事,
왜그런가? 일체 모든 일은,
皆是如來一法身故。
모두가 여래의 한 법신(法身)인 까닭이다.
住是心中,諸結煩惱,
이러한 마음가운데 머물게되면 모든 맺힌 번뇌는
自然除滅。
자연히 소멸하게된다.
於一麈中,具無量世界;
하나의 티끌가운데에, 무량세계가 갖추어져있고,
無量世界,集一毛端,
무량세계는 한 털 끝에 모아지니,
於其本事如故,
그 본사(본래의 일,예전의 일,過去世의 일)에서 까닭이 같은것이니,
不相妨礙。 《華嚴經》云: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화염경>에서 이르기를,
『有一經卷,在微麈中,見三千大千世界事。』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 미세한 티끝중에도 있으며,
삼천대천세계의 일을 드러낸다” 하였다
第二大段 善用其心
그 마음을 잘 쓴다
略舉安心,그 마음을 잘 쓴다
略舉安心,不可具盡,
안심(安心)을 대략으로 들어서, 열거하여 다할 수는 없지만,
其中善巧,出自方寸。
그 가운데 선교는 방촌으로부터 나오게된다.
略為後生疑者,
간략히 후생(후배)의 의혹된 것을 위하여,
假為一問:
가정하여 한 질문을 하겠다 :
「如來法身若此者,
“여래 법신이 만약 이와같은 것이라면,
何故復有相好之身,
무슨이유로 다시 상호의 몸(佛身)이 있어
現世說法?」
현세에 법을 설합니까?”하니
信曰:「正以如來法性之身 清淨圓滿,
도신대사께서 이르시기를 : “여래법성의 몸은 청정원만하여,
一切類悉於中現,
일체의 상류(像類)가 모두 가운데 드러나니,
而法性身,無心起作,
그러므로 법성신은 마음을 일으키고 지음이 없으니,
如頗梨鏡懸在高堂,
마치 수정(水晶)거울이 높은 집에 매달린것과 같아서,
一切像悉於中現,
일체의 모든 상(像)이 그 가운데에 드러나더라도,
鏡亦無心,
거울은 또한 무심하니,
能現種種。
능히 모든 만물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善巧/선교 : 선권곡교(善權曲巧)의 뜻,선하고 공교하게 동작함,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때 그 근기에 맞추어 수단 방법을 쓰는 것이 공교롭고 묘함
相好/상호 : 용모,형상,상(相)은 몸에 드러나게 잘 생긴 부분,호(好)는 (相)중의 세상(細相)에 대하여 말함.이 상호가 완전하여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것을 불신(佛身)이라함
頗梨/파리 : 指状如水晶的宝石(모양이 수정의 보석과 같다)
經云:『如來現世說法者,
경에이르기를 : “여래께서 현세에 설법한 것은,
眾生妄想故。』
중생들이 망상한 때문이다“하였다.
今行者若修心盡淨,
이제 수행자들이 만약 마음을 닦아 정(淨)함을 다하면,
則知如來常不說法,
곧 여래는(온갖 법을 말하여도)
항상 설법을 하지 않는줄을 알고,
是乃為具足多聞。
이는 다문(多聞)을 구족한 것이된다.
聞者,一無相也。
듣는것은, 일법(一法)의 무상(無相)이다.
是以經云:『眾生根有無量故,
이것을 경(經)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근기가 무량으로 있기 때문에,
所以說法無量;
설법이 무량한 까닭이다:
說法無量故,
설법이 무량한 까닭으로,
義亦名無量義。』
의(義) 또한 이름(名)이 무량의(無量義)이다”하였다.
無量義者,從一法生。
무량의(無量義)란 일법(一法)을 따라서 생겨난다.
其一法者,則無相也。
그 일법(一法)이란, 곧 무상(無相)이다.
無相不相,
무상(無相)은 형상이 아닌것이니(不相),
名為實相,
이름하여 실상(實相)이라고 하니,
則泯然清淨是也。
곧 민연(泯然/자취없음)청정함이 이것이다.
斯之誠言,則為證也。」
이것은 진실한 말이니, 곧 증명이 되는 것이다“
坐時當覺,識心初動,運運流注,
좌선시 식심(識心)이 처음 동하여
흘러들어감을 깨달음에 당하여는,
隨其來去,皆令知之,
그 오고 감을 따르고, 모두 하여금 알게 된 것을,
以金剛慧徵責,
금강의 지혜로써 징책하여,
猶如草木,無所別知。
마치 초목 같이 따로 아는 바가 없는 것처럼 하여,
知之無知,
아는 것(知之)이 무지(無知)의 지경이면
(아는것도 무지의 경지와 같으면)
乃名一切智。
마침내 이름하여 일체지(一切智)라고 한다.
此是菩薩一相法門。
이것이 보살일상법문(菩薩一相法門)이다
問:「何者是禪師?」
문 : “어떤자가 선사입니까?”
信曰:「不為靜亂所惱者,即是好禪師。
도신이 이르기를 : “괴로운 바의 것을 고요하게 하거나
어지럽게하지 않는자를 곧 훌륭한 선사라한다.
用心人常住於止,
마음을 쓰는데 사람이 항상 그침에 머물면,
心則沉沒;
마음은 곧 침몰한다.
久住於觀,心則散亂。
관(觀)함에 오래 머물면, 마음은 곧 산란해진다.
法華經云:『佛自住大乘,
법화경에 이르기를, ”부처 스스로 대승에 머물고,
如其所得法,定慧力莊嚴,
그 얻은바의 법과 같이, 정혜력으로 장엄하여,
以此度眾生。』」
이로써 중생을 제도한다“하였다
「云何能得悟解法相,
“어떻게 하여야 능히 법상을 깨달으며,
心得明淨?」
마음으로 명정(明淨)을 얻는것입니까?“
信曰:「亦不念佛,
도신이 이르기를 :"또한 염불하지않고,,
亦不捉心,亦不看心,
또 마음을 붙잡지 않고 또 마음을 보지않고,
亦不計心,亦不思惟,
또 마음을 계량하지 않고, 또 사유하지 않고,
亦不觀行,亦不散亂,
또 관행하지 않고, 또 산란하지 않고,
直任運;亦不令去,
곧바로 운행에 맡겨서, 또한 가지 않게하고,
亦不令住,獨一清淨,
머물지 않게하여, 홀로 청정하여,
至究竟處,心自明淨。
구경처에 이르면, 마음은 저절로 명정하게된다.
或可諦看,心即得明淨,
혹은 가히 자세하게 보면, 마음이 곧 명정을 얻으니,
心如明鏡;或可一年,心更明淨;
마음이 명경과 같아지고, 혹 1년이면, 마음이 다시 명정하고,
或可三五年,心更明淨;
혹 3-5년이면, 마음이 더욱 명정해지고,
或可因人為說即悟解,
혹 가히 사람으로 인하여 설법을 하면 곧 깨달을수 있고,
或可永不須說得解。
혹 오래도록 설법을 할 필요없이도 알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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