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의 비유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강론>(2023. 11. 22. 수)(루카 19,11ㄴ-28)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2ㄴ-13.15-17)”
‘미나의 비유’는,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마태오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와 사실상 ‘같은 가르침’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로,
또 심판자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먼 고장’으로 떠났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를 구성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신 뒤에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마태 28,20).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종들’은 신앙인들입니다.
‘미나’는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생활이고,
그 은총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은총의 열매’는 ‘구원’입니다.
<성경의 부록에 있는 도량형 표에 의하면,
‘한 미나’는 60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계산 방식에 따라
‘한 미나’를 백 데나리온으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미나를 나누어 주면서 벌이를 하라고
지시한 일은, 일종의 ‘자격시험’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격.>
따라서 종들의 돈벌이는 주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위한 일입니다.
25절을 보면, 주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돈을 차지하지 않고,
종들에게 줍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첫 번째 종은 ‘열 미나’를 벌어들여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고, 두 번째 종은 ‘다섯 미나’를 벌어들여서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는데,
이 비유에서 ‘열 미나, 다섯 미나’, 또는 ‘열 고을, 다섯 고을’은
중요하지 않고, 주인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끝까지 꾸준하게,
또 성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무슨 업적을 얼마나 남겼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끝까지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업적입니다.>
세 번째 종은,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또 돈벌이를 하려다가 원금까지 잃는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한 미나를 잘 보관해 두었다고 말하는데(20절-21절),
그의 말은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인이 그를 엄하게 혼내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슨 거창한
신심행위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희생과 봉사도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
바로 그것을 바라십니다.
주님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강제노동’이 아니라,
‘은총의 생활’이고, ‘기쁨의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이 말은, ‘헌금’과 ‘이웃 사랑 실천’에 관한 말이지만,
신앙생활 전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냥 ‘빈말’입니다.
만일에 ‘불우이웃 돕기’를 억지로 한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은 받았으니까 고마워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 없이’ 억지로 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 실천’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사랑 없이’ 억지로 주는 것을 받는 일은,
받는 쪽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고, 상처를 입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이고 특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신앙’과 ‘구원의 길’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딴 생각만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렸으니
불쌍한 것이고, 정말로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헛된 것만 찾고 있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이고
특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