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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들음과 행함
약 1:19-27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19-27 /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말은 적게 하고 듣기를 즐겨하며 화는 잘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0) 분노는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21) 그러므로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은 모두 다 제거하여 버리고, 우리가 받아들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또 듣기만 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23) 만일 누가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 사람은 거울 앞에서 떠나면 곧 자기 모습을 볼 수가 없고 또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인간을 죄에서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 착실하게 지켜 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대로 실천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큰 복을 내리십니다. 26)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면서 함부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27)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순수하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주님 앞에 늘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의 땅에서 믿음의 시련을 겪지만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9-21) 본서신의 수신자인 유대인 성도들을 내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믿음의 형제가 된 이들에게 신앙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소리와 감정과 욕망이 앞서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겸손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22-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완전치 못하고 사람을 속박하는 모세의 율법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9:12)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믿음의 법’(롬 3:27), ‘생명과 성령의 법’(롬 8:2), 등으로 불립니다.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에 심겨지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행하는 데 이릅니다. 실천하는 자의 행실이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서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일이 다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26-27) 26절에서 말하는 경건의 의미와 27절에서 말하는 경건의 의미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심이 깊다는 의미와 기도, 예배 참석 등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도 중요하지만 경건의 기준이 스스로가 정해 놓은 경건이냐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정해진 경건이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경건의 차이는 ‘모양만 있는 경건이냐’하는 것과 ‘모양과 함께 행함도 따르는 경건이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경건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 각자의 생활 가운데서 경건의 모양도 드러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는 경건은 관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를 경건하게 하시면 행함이 동반되는 참 경건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의 경건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당신의 생활 가운데 실천하고 드러내는 경건입니까?
히브리인들에게 방황은 ‘옆길로 빗나가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방황하다’는 ‘낭비하다, 허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건강과 지혜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허비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윤리 도덕적으로 옳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으면 방황한 것입니다. 과녁을 빗나간 것이 죄이듯이 방황하면 옆길로 빗나가서 죄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 설 교 >
새 삶을 위한 명령
약 1:19-20 / 정근도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이웃 여러분, 야고보서 1장 19, 20절은 여러분이 보는대로 18절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18절 끝 부분을 보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 사람은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님을 위한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피조물의 첫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눈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때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안타까워 하지시만 그래도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된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지금 하늘 아버지의 심정으로 지상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기본적인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명령을 귀담아 듣고 주께 순종할 때 우리의 모습은 날로 하나님의 자녀다워질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성도들의 위로가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말씀과 관계를 가집니다. 말씀으로 태어난 신자는 태어난 순간부터 말씀에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진리의 말씀에 반응을 보일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의 축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축복받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본적인 명령을 들어보십시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라, 말하기는 더디하라,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것은 얼핏보면 누구라도 따를 만한 교훈같습니다.
신앙이 없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수긍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에 듣기를 속히 하고 말하기를 좀 절제하고 성내기를 좀 더 통제하라는 것은 누구든지 쉽게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결코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야고보 선생은 지금 자기가 사랑하는 신앙의 형제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는 형제들에게 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이 충고를 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즉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것을 안다면, 자신이 수긍하는 이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반영을 시키라는 것이 야고보 선생의 논지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마 이 야고보서가 신약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지금보다 훨씬 더 이론적이고 추상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선생은 우리가 새 생명으로 태어난 여부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증명하려고 합니다. 새 사람이 된 것을 가장 구별하기 쉬운 우리의 일상 생활영역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남의 말을 듣고, 또한 말하고, 성내고 하는, 보통사람들이 생활하는 영역에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새 생명으로 태어난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이 야고보선생의 논지입니다.
그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난 첫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1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의 특성은 말씀에 대한 신속한 반응입니다.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잘 듣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말씀을 잘 듣고 있습니까? 듣는 것은 새 생명으로 태어난 첫 번째 증거입니다.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까?
좋은 신앙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말씀을 읽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경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의 징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잘못을 지적하면 수긍하고 고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따라 삶을 바꾸는 것을 기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통한 책망을 기뻐하고 훈계를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다릅니다. 그리고 위선자도 다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신구약 어디를 펴어놓고도 졸고 있을 뿐입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벌써부터 졸고 있는 사람은 새 생명으로 태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영적 건강이 심각한 상태일지 모릅니다.
물론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말씀이 그 삶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수긍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듣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시간마다 듣는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일주일동안 생활하면서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이 매일 읽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 받은 메일을 소개하면 좀 더 알기 쉽겠습니다. " . . . 목사님의 설교는 제 인생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기에, 정식으로 교회에 등록하고 새신자교육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설교에서 들은 말씀만큼은 실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교회표어로 ‘말씀읽기’가 선정되던 해부터 저는 다시 성경읽기에 매진하였고, ‘공동체’를 강조하던 해부터 ‘구역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해’가 되고나서는 그간 잊고 지내던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감사를 표하고, 또 대접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서서히 믿음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학부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신앙인 학과 선배들 그리고 SFC 선배들은 제가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주었습니다.
그들과의 대화는 제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생각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것보다도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으며, 사회복지에 열정을 느끼고, 학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울산교회와 또 목사님의 설교는 그렇게 저와 제 아내의 삶의 방향을 제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새로 태어난 사람은 순전한 젖을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생명은 말씀의 젖을 사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신생아의 특징이요 영적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의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이 말씀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제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왜 신속히 듣지를 않을까요? 자기가 배워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무지나 얕은 지식을 내뱉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앙생활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누리기를 소원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먼저 배워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제일 답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자기 얘기만 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지낸다는 것은 부부관계로 만나도 괴로운 것이고, 친구지간으로 만나도 괴로운 것이고. 같은 직장인으로 만나도 괴로운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알고 있다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들을 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문제가 나와도 한마디 할 것이 있는 사람은 함께 성경공부를 해도 괴롭습니다.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고 붙잡은 것이 있다면 함께 공부를 하는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그러나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무슨 문제가 나와도, 자기 말만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도 자기 말만 많이 하는 것은 좋지 못한 매너입니다. 같은 친구끼리도 자기얘기만 할려고 들면 “자기 잘난체 한다”고 따돌림을 당합니다. 말도 안되는 논리를 장황하게 전개하면 사람들은 속으로 “아이구 잘났어” 하는 핀잔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명령의 심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기를 속히 하라는데 있습니다. 이 명령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하는 권면입니다. 신앙인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친구지간에도 서로 상대방에게 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선생님의 말씀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자기 말만하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남의 이야기를 듣는 척합니다. 수긍을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내고 들어보면 그전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놓고, 그 전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안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중에 자기 얘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얘기가 귀에 안들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전반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면 어떤 설교도 별반 유익이 없습니다. 귀에 들어오는 말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이 그럴 듯 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릴 리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래선 안되겠구나”라고 인정합니까? 그 정도 가지고도 안됩니다. 더 고민하십시오. 괴로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뒤에 가서는 흐지부지되어 버립니다. 더 이상 변화는 없습니다. 들은 말씀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옛 습관대로 살기 일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있습니까? 들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 위치에 비해서 얼마나 들으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리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그처럼 원하실까요? 그것은 조물 중의 한 첫 열매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피조물 중에 내놓아도 부족이 없는 수준의 삶을 기대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수준을 향해서 이끌어 나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의 성숙한 모습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신앙 생활을 한 세월은 꽤 흘렀는데 영적 수준은 아이로 머물기를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들을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우리는 신속히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대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새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수단인 동시에 여러분을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훈련이 제대로 안되면 영적 성장이 제대로 안됩니다. 주님과의 교제에 틈이 생깁니다. 사실 새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달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는 땅위에서 성도들이 받아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새 삶을 위한 지침을 말해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개를 흔들고, 진리의 길을 막고, 우리 생각을 굳히고 있으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좌우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얼마만큼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속히 들을 수 있습니까? 말씀과 조용히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경을 통독하셔도 좋고, 성경을 연구하여도 좋고,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거나 성경을 암송하셔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방법은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 시간마다 다 참석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라면 나가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말씀이 듣고 싶으면 새벽이든지 낮이든지 저녁이든지 나아오십시오. 말씀이 있는 곳에는 모두 참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자랍니다. 듣기를 속히 할 때 신앙을 자랍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거룩한 새 욕망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은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습니까? 예배시간 마다 나와서 들어십시오. 가장 손쉽고도 권장할만한 방법입니다. 또한 시간을 내어서 성경을 읽어십시오. 토요일 아침에는 가끔 조찬모임이 있습니다. 언젠가 하루 아침에도 조찬모임에 참석하고 오면서 장로님 주차장에 차를 대었기에 들렸습니다. 거기서 장로님을 만나 뵙고 감동했습니다.
일찍부터 일터에 나오셔서 업무에 착수하신 것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수 준비해서 대접하는 야생 복숭아 차도 시원했습니다만 그보다 제가 감동한 것은 그 바쁘고 더운 곳에서 책상 위에 성경을 펴둔 모습이었습니다. 차량 입출입을 점검하는 컨테이너 박스로 된 관리실은 아침 9시였는데도 벌써 데워져 있었습니다. 덥고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경을 읽고 계신 장로님을 만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노소를 불문하고 그 말씀을 귀히 여기고 읽는 분들입니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께서 빛 잘드는 밝은 곳에 앉아 성경 읽는 것을 볼 때마다 감동이 됩니다. 컴컴한 이층 침대 아래 편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을 읽고 있는 청소년 시절의 아들을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식구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글을 읽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면, 그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것 만큼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모든 중생한 사람들의 양심속에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난의 자리에서는 더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양심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 .”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실 때에 거기에 정직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교회 안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거절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양심을 떠나서 존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나님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 못할 때,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말씀 읽는 생활도 자연히 게으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때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듣는 말씀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하는지, 양심의 소리도 아예 귀를 막아버리고, 책을 펴서 조용한 시간에 읽고 뮥상하면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이야기해 주실 것을 알면서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요? 시간은 확보하십시오. 사람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는 어떻해도 시간을 냅니다.
혹 교회를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좋은 책들도 있고 좋은 테이프고 있으며 좋은 방송도 있습니다. 설교집도 있지 않습니까? 신문 읽는 시간만큼 할애해도 상당히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일을 하면서 극동 방송을 틀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극동 방송을 들으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앉아서 성경을 읽기가 힘든 가게를 보시는 분은 좋은 설교 테이프나 성경 테이프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갈급해 하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10톤 트럭을 모는 기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일반 기사들과 달라서, 하는 일 때문에 주일에 교회를 못나갈 때도 있지만 대형트럭을 몰면서 극동 방송을 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소위 대형트럭 기사의 횡포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주일 성수가 안되니까 이 직장을 그만 두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 성수되지 않는 직장은 굶어 죽어도 못 다닌다면서도, 다른 문제는 기독교인답게 처신하지 않으면 일관성이 없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덕도 안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을 받습니다. 주일 성수 때문에 토요일에 천리길을 왕복해도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예수? 저렇게 믿으려면 차라리 안믿는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난 두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명령은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어떤 주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게 됩니까?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르면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들으려고 하지 선뜻 자기가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기 전에는 아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말하려고 하면서 듣기는 싫어합니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좋은 신자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 놓으면 아직은 영적으로 어린 사람입니다.
좋은 신자는 들으려고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형제자매를 통해서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더 잘 안다는 교만이 남보다 먼저 튀어나오게 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난 세 번째, 마지막 증거는 무엇입니까? 3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급히 화를 냅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좋은데 사람들이 안들어 주면 화가 납니다. 화내는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내 생각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누가 내 얘기 안들어줘도, 거절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단한 생각인데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화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할 때, 당회나 제직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선한 뜻을 내 놓을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형제들이 잘못 생각해서, 아니면 다 알지 못해서 묵살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면 화를 내는 금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화가 납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서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안 받아드리기에 기분을 상합니다. 그대로 두면 일이 안되니까 화를 낸다고 하지만 사실 정직하게 보면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화를 냅니다. ‘내 생각이 옳은데 왜 안 받아들이냐’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물론 의분을 터뜨려야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실 자주 그런 자리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화를 낼 때는 그것은 인간적인 분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상을 뒤집어 엎고 의자를 던져야 할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는 그냥 웃고 지나가고, 별로 화를 낼 이유가 없을 때는 화를 내곤 합니다.
아이들한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친구한테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화를 안내면 일이 안된다고’고요? 뒤집어 놓으면 그래서 나는 화를 내야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화를 내어야 일을 성취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말이 맞을까요? 성경입니까? 여러분의 주장입니까?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지 못하느니라”는 말을 꼭 명심하십시오. 여기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대치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그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를 안내면 말을 안듣는다고 아이들을 향해서 고함칠 때 여러분은 벌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에 실패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랫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쉽게 소리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기를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이 내는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화를 내게 됩니까? 그것은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까 사소한 것도 화가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그 시간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도 귀를 기울이도록 변화시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합니다.
남의 이야기도 받아들이게 되니까, 내 의견만 옳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생각도 옳고 아이의 생각도 옳으니까, 내가 화내기에 앞서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화가 나는 그 때만 넘기면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훨씬 쉽게 풀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번 화를 내고 나면 얼마나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화를 내어서 안됩니까? 분노가 판을 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자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를 속히 합시다. 말하기는 더디 합시다. 성내는 것을 더디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방법입니다. 분노는 신뢰할 것이 못됩니다. 의롭지도 못합니다.
오직 조용하고 온유한 마음만이 경건을 낳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분노나 흥분이 아닌 인내와 침착이야말로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증거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정말로 이루어야 하는 좋은 목표는 화내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반성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받아들여라
약 1:19-21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선생은 기독교의 진리를 아주 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행히 학위를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기가 더 쉬웠는지 모릅니다.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왜 저리 설교를 못할까”하는 입방아를 통한 스트레스는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를 향한 그의 사랑이 쉽게 말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어떻게든 알아듣도록 쉽게 해야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말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기독교의 독특한 진리일까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오묘한 진리를 쉽게 말하는 사람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판단한다면 사도들 중에서 야고보가 가장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쉽게 말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환히 꿰뚫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철학강의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철학강의를 대가들에게 들어보면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을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대가는 아주 쉽게 설명합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천박한 내용을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대가다운 방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19절을 어렵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낱말이나 문법이 어려워서 못 알아듣겠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 말이 어려워서 못 알아들으면 세상에 알아들을 말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성경본문은 전체의 5%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95%는 순종의 문제이지 이해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도 알지만 듣기에 속히 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신속히 해라. 그리고 말하기는 좀 기다려라. 또 성내는 것은 좀 참으라. 이것이 거룩한 삶의 기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 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사흘 밤 철야하고, 40일 금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열두 사도 중에서 한 사람도 40일 금식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부터 규제하지 않으면 헛수고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도대체 신앙인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말을 자제할 줄 알아야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나, 자녀들에게나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부터 낸다고 하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힘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변화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말로 전하지 않아도 기독교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평범한 삶을 살 때, 듣고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달라진다면 우리가 우리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우리가 신앙인인줄 알 것입니다.
아파트 현관문을 닫아 놓고 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다 못해 엘리베이트에서만 겨우 만나도 우리의 삶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셋집에 산다면 더 더욱 그 차이는 들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대로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듣고 말하고 화내고 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참된 종교란 그런 것입니다. "저 집은 틀려"라는 말을 들으면 복음 전하기 위한 좋은 토양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종교란 수년을 다녀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면 삶이 즉시 변합니다. 일상적인 삶을 바꾸어 놓는 것이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는 큰 유익의 하나입니다.
18절에서 야고보선생은 우리가 진리로 새로 태어난 사실을 말하고 그 다음은 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다음은 자랍니다. 참 신기합니다. 태어난 아이는 한 달 지나면 자라고 두 달 지나면 그 만큼 자랍니다. ‘낳아만 놓으면 자란다’고들 말합니다. 자람은 생명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새생명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측정해 보는 방법은 처음 예수 믿을 때와 비교해서 지금 어떻게 달라지고 있느냐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 말씀이 듣고 싶고 또 듣고 싶은지, 아니면 주일날은 여기 와서 말씀을 듣는 거니까 그냥 앉아 있다가 가는지, 그냥 말씀이 귓전을 스치기만 하는지 아니면 말씀이 의미있게 다가오는지, 그것이 여러분이 새 생명으로 자라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에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드리는 순간에 우리가 거듭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도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 생명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토양 속에서만 자랄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이 생명은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신생아의 성장이 어머니의 젖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신자의 성장도 말씀이라는 영적인 젖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갓난 아이같이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벧전2:2)고 베드로는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변화와 직결되어져 있는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듣기에 속히 하는 그리스도인, 말하기에 더디하는 그리스도인, 성내기에 더디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것은 신속한 말씀의 수납 여하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 명령은 쉬운 이야기이니까 다 깨달았을 것입니다. 지난주일부터 제가 말씀 드렸으니까 다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여러분은 신속하게 듣는 연습을 해보았습니까? 말씀을 듣는 일을 빨리 하려고 마음을 먹어보셨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있는 예배의 자리에 1분이라도 빨리 도착하려고 시도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말하는 데는 좀 천천히 하려고, 생각을 하고나서 말하려고 애를 써보셨습니까? 정말 이제는 내 기분대로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규제하려고 이 말씀을 듣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 노력이 있어야 말씀을 듣는 유익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주간 전에 들은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여기 와서 앉아있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앞절은 ‘피조물의 첫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피조물답게 살아가는, 피조물 중에 영광을 돌리는 삶, 20절의 표현대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숭고한 삶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밥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연인은 먹기 위해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연적인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로서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구체적인 도움말을 본문 21, 22절은 주고 싶어 합니다. 여기 두 가지 중요한 명령이 있습니다. 왜 듣기에 신속하지 못하는지, 왜 말하기에는 재빠른가? 왜 성내는 일은 신속하고 변화가 오지 않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삶은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표준과는 정반대입니다. 듣는 데는 더디고 말하는 데는 빠르고 성내는 데는 재빠른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모습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쓸 것을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자신의 삶을 관찰하면 알 것인데 속아서는 안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자신의 삶을 보면 알 것인데 왜 속고 사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된 삶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치유책을 오늘 우리 본문은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성경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오면 항상 그 말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뒤 말이 어떻게 연결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택동 어록처럼 앞뒤 상관없는 말을 엮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맥이 통하고, 생명이 통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 했던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앞에 말한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원리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분노는 새로 태어난 자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어떤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목표’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에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행동’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행동을 산출하는데 성내는 것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은 “하나님의 공의를 증진시키는데 실패한다”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화내는 것은 선을 이루도록 바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실패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내는 것은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화를 내지요? 하나님의 목표달성이 안되면 화를 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 화를 냅니까? 우리가 바라는 기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대상 불문하고 화를 냅니다. 자기보다 아랫 사람이다 싶으면 더 쉽게 화를 냅니다. 자녀들에게도 화를 내고 배우자에게도 화를 냅니다. 구역장에게도 화를 내고 장로님에게도 화를 내고 교역자라고 봐주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어떻게 속입니까? 마치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화를 내는 것처럼 먼저 자신을 설득하고 다음에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이룩하는 데는 인간적인 분노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실을 고려해 볼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번째 명령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갖다 내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라”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버리는 작업을 먼저 하라고 합니다. 교회 나오면 일단 세상 살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야기를 내어버리십시오.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귀바퀴까지 더러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파종해서 무엇을 거두느냐는 것입니다. 그때는 농경사회라 그렇게 하면 알아듣습니다. 호세아도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이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가득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배실에 나왔을 때는 집안의 무슨 일이든,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다 잊어버리십시오. 비우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신약도 마찬 가지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벗어버리는 작업이 먼저 필요합니다. 헌옷을 벗지 않으면 새옷을 갈아 입을 수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으면 입고 오신 헌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옷을 입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고 말하고 나서 “긍휼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옷입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오면 하나님이 새로운 옷을 준비해서 새옷을 갈아 입혀줍니다. 옛 사람을 다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십시오. 예배시간은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옷을 갈아입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컴퓨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볼까요? 컴퓨터 디스켓이나 칩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에 가까워지면 ‘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백이 생기면 다시 받아줍니다. 가득 차 있으면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예수님 모르고 살던 삶의 태도를 버리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다 벗어버리십시오. 성경을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옛 습관들’을 버리라고 합니다.
‘음란한 것들을 벗어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적인 잘못된 욕망을 없애 버리라, 그것이 가득하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 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욕, 악한 정욕, 탐심”할 것 없이 내 욕심이 가득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일단은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느껴야만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은 가득 고이면 넘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자신이 가진 나쁜 습성은 자신 뿐 아니라 그것을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런 것을 다 내어 버리십시오.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악들을 내어버려야만 합니다.
“악한 정욕, 탐심,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에 부끄러운 말”들을 내어버리십시오. 여기는 본문 21절 보면 “모든 더러운 악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라”고 했으나 다른 곳에는 그 구체적인 목록들이 나옵니다. “분과 노,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분노와 악의와 훼방과 우리 입의 부끄러운 말들을 통제하십시오. 분한 마음에서 터져 나오면 좋은 말 나올리 없지요? 안에 끓던 것이 폭발하는 것이니까 한 마디 말을 해도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이 훼방입니다.
자신의 모든 ‘더러운 습관’을, ‘모든 옹졸함을' '내어버리라’고 합니다. ‘생명을 손상하는 모든 것을 내어버리라’고 명합니다. 죄인들 속에는 더러운 악은 넘칩니다. 선한 것은 우리에게 여간해도 잘 넘치지 않는데 악한 것은 늘 넘칩니다. 늘 과다하고 늘 풍성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것은 연습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화가 날 때 화 내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사람한테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자연인들이 화 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화나서 화 내는 것은 그들에게는 잘못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화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나타나면 잘못입니다.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본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기생적인, 암세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잘라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암세포와 같은 비정상적인 조직이 있으면 잘라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잘못과 추함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진리 안에서 바뀌어야 합니다. 변한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화내는 것, 더러운 말하는 것, 거기에서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두번째 명령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즉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능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러니까 18절에 진리의 “말씀”과 여기에 나오는 마음의 심어진 “말씀”라는 것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을 지금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어떤 성경은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남의 말이 나의 말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야 귀에 들어 옵니다. 상대방의 말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이 안들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생각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귀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온유하다”는 것은 앞의 “화 내는 것”과 대조적인 말입니다. 화는 무엇때문에 납니까? 자기가 옳은 데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화가 납니다. 내가 옳은 데도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나거든요. 교만의 극치가 분노로 나타납니다. 화내는 것은 겸손과는 정반대입니다.
또 어떤 성경은 “조용히” 받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져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 마음이 한참 번잡하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영국의사당에는 빅밴이라고 불리우는 아주 큰 시계가 있습니다. 얼마나 시계가 큰지 그 가는 소리를 사람들이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낮 시끄러운 때를 피하고 고요한 새벽녘에는 빅벤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낮에도 가고 있지만 주위소리가 시끄러워서 들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성경은 이 부분을 말할 때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받아드리라고 번역합니다. ‘우리가 받은 놀라운 말씀을 겸손히 기뻐하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겸손한 자세로서 ‘이것이 정말 옳구나’하는 수긍하며 마음으로 들을려고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표시해야 합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교리는 심령으로 스며들어 행동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열매 없는 자로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우리의 심령에 스며들어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 말씀을 설명하는 귀절이 있는데 “너희 마음에 심어진”이라고 되어 있지요? ‘심긴’하고 ‘뿌린’하고 어떻게 틀립니까? 비슷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뿌렸다”고 할 때보다 “심었다”고 할때 더 정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었다”고 할때에 주어가 나타나 있지 않을 때에는 대개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심어준 그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말씀을 그 심령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마치 이 새로운 습관들이 우리의 본성처럼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빨리 듣고, 말은 생각해서 하고, 화는 억제하라고 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의 제 2의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듣다보면 화낼 일이 자주 생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훈련시키고 그러는가 봅니다. 그 결국은 무엇입니까? "능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이런 작업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주는 보상입니다. 결과적인 축복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자라면 우리는 이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받아들인 적이 없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말씀을 수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듣고 있습니다. 말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 마음 속에 심기운 말씀을 항상 새롭게 들을 수 있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사람이 꼭 같이 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잘 듣기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저는 누가 바른 자세로 나오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지나가며 그냥 한 마디 던지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마음속에 심기운 말씀을 항상 새롭게 듣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성령으로 예비된 흙 속에 이 말씀이 뿌리를 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자양분을 뽑아 올려 부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성격을 이루어가십시오.
우리 마음의 밭에 심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면 확실히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성품이 변화되고 있다면 이미 우리 안에 그 구원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위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삶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해야 합니다. 듣고 있는 말씀이 듣는 자리에서 끝나 버리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오늘 들은 말은 한주간 내내 우리 마음에 남아 있어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붙잡읍시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도록 합시다. 말씀에 붙잡혀서 하루하루 살 때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먼저 더러운 것을 ‘내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귀에 들리는 그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때에 그 말씀이 우리를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
아버지, 저희에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새 사람으로 변화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귀한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심령에 심긴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역사하기를 원합니다. 단 마음으로 듣게 하시고 말씀에 집착하게 하옵소서,
제게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들을 만나게 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변화하는 일에 돕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말씀이 이들의 심령을 사로잡게 하시고 이들을 삶을 통해서 제 자신의 삶이 변화되게 하시며 서로 서로 도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자리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는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올 한해도 성장의 한 마디를 남기게 하옵소서, 성장을 위해 몸부림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19-21 / 이대성 목사, 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온유함으로 받으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온유함으로 받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디모데후서 4장 15절 말씀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아멘. ‘성경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대 나를 두고 떠나가지 마라. 토요일은 밤이 좋아. 그대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 이 밤은 영원한 것 그리움이 흐르네….” 혹시 이 노래 기억나십니까? 토요일은 밤이 좋다고 외쳐댔던 가수 김종찬씨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저랑 동년배이기 때문에 저 또한 김종찬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사랑이 저만치 가네.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잇따라 그의 노래들이 빅히트를 치면서 세상모르고 교만했던 그가 그만 사업에 실패하면서 급기야 엄청난 빚을 지고서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곤두박질 친 그는 감옥에서 미움, 분노, 증오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보내던 중 조금 전 우리가 함께 불렀던 바로 이 찬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여러분? 다같이 4절 함께 찬송하십시다. “그 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님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 합니다. 귀하고 기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그 날부터 그는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롬10:17)
이 말씀을 붙잡고 그는 두 가지를 서원했습니다. “하나님, 지나온 삶을 잘못 살았으니 나머지 인생은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또 절대로 세상의 노래 안 부르고 주님만을 찬양하겠습니다.”
그 후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그대로 세상 노래 대신 주님만을 찬양했으며, 주의 복음만을 기뻐 전하던 중 마침내 지난 달 22일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김종찬 목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 노래를 버리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달려가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굶기시지 않더라고요. 그게 바로 주님이 원하는 삶인데… 그게 바로 인생의 정답인데... 하나님께서 세워주실 것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야고보는 이미 18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존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인 줄로 믿습니다.
다. 때때로 내 수중에 있는 사과 씨앗 몇 알을 잃어 버렸다고 해서 괴로워하거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당하는 화를 복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사과 씨앗 몇 개 대신에 엄청난 축복과 열매를 안겨다 주실 분이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내 힘으로는 그 시험을 해결할 수 없으십니까? 나는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에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말씀 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이 찬양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진실된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함과 같이 우리는 늘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같이 1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왜 귀는 두 개로 만드시고 입은 하나만 만드셨을까요? 두 번 들을 때에 한 번 말하라는 것입니다.
귓구멍은 늘 열려 있지만 입은 평소에 다물어져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주장대로 되지 않는다고 쉽게 성을 내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와의 인간관계에서도 이러 하다면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듣기는 속히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말씀 속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온전히 정할 수 있습니다.
악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하나님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모든 문제가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늘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처해 있는 난제들을 깨끗하게 해결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뜻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물론 자신의 생각과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언제나 그것이 내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고, 또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나의 지혜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무한합니다.
어느 길이 내게 가장 좋은 길인지 아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꺾고서 내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되어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신 길이 괴롭다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절 말씀도 함께 읽습니다. (시작)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잠깐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광야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성내면서 돌을 들어 하나님의 종 모세를 치려고까지 했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이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예비 하셨는데,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성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결국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축복의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축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을 통해 지금도 우리를 연단시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너무 힘들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성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21절 상반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이 어찌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 속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화랑에 전시되었습니다. 때를 맞춰서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는 친구들을 먼저 그림들 앞으로 인도하지 않고, 지하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음료수를 간단히 대접하고 난 뒤에 갑자기 불을 꺼버렸습니다. 지하실에 불을 꺼버렸으니까 얼마나 캄캄했겠습니까? 놀란 친구들을 향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10분 동안만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세." 그는 10분 뒤에 다시 불을 켰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인가?"
그 때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나? 자네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보느라고 눈이 너무 타락했어. 그냥 그대로는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네. 그러니 캄캄한 곳에서 우선 눈을 깨끗하게 씻고 난 뒤에야, 내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걸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눈이 깨끗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림들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 속에 더러운 욕망들, 세상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이 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먼저 마음속에 있는 인간적인 더러운 욕심들을 깨끗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생각과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념 등을 다 떨쳐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이 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제대로 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설교자와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감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 설교자가 아무리 천사의 말로 은혜로운 말씀을 준비해서 전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 마음의 문이 열리겠습니까? 그가 은혜를 받겠습니까?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섰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던 공회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이 은혜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를 치면서 스데반이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그리고 돌로 때려죽였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나쁜 말을 했습니까? 바르지 못한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회원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들의 마음속에 고정관념, 선입견 등이 가득 차 있으니까 아무리 스데반이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도 그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옥토에 떨어진 씨앗들은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 밭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좋은 땅, 옥토가 될 때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제대로 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랍비가 자기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진리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우리는 쉽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단다." 이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진리는 저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입니까?"
랍비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왜 세상 사람들은 그 흔한 진리를 쉽게 터득하지 못합니까?" 그 때 랍비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깨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얼마든지 진리를 쉽게 주울 수가 있을 텐데, 마음이 교만하고 뻣뻣해서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터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밭을 성령의 기름으로 먼저 기경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욕심, 교만한 생각, 뻣뻣한 마음, 고정관념, 선입견 등이 없어지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깨끗한 마음 밭에 하나님 말씀이 온전히 뿌려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말씀이므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21절 하반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때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 앞에 그것이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성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나아만 장군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람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신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야 말았습니다.
살이 썩어 들어갑니다.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에서 기르고 있는 여종 하나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조국 이스라엘에 가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데, 그에게만 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종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황급히 떠났습니다. 드디어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엘리사가 뛰어나와서 자기를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을 내 비치기는 커녕, 그저 사환을 보내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전갈만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그래도 자기는 큰 대국의 위대한 장군이니까 이곳까지 찾아왔으면 나와서 기도라도 해주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나아만 장군은 그의 자존심 때문에 종들에게 그냥 돌아가자고 명령을 내립니다.
여러분? 그 때 만약 나아만 장군이 성을 내면서 그냥 돌아가 버렸다면 그는 영영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로 작정합니다. 엘리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단강물이 깨끗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마침내 일곱 번.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 순종할 때에 그의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닌 하나님 말씀으로 치유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성내고 마음 문을 닫아 버리면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면 온유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할 때에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힘든 일을 당하셨습니까?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이런 저런 일로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 차 있으십니까?
그럴수록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바로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진정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에 참 평안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들의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식사 때가 되자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리아는 무얼 했습니까?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고요히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와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아마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해 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얘, 마리아야. 네 언니가 혼자서 수고하고 있는데 가서 좀 도와주거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눅10:41-42절 말씀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까요? 주님께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을 귀히 여기고,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을 진정 기뻐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복된 말씀을 늘 언제나 귀히 여기고, 그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모든 문제를 온전히 해결함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늘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새 힘을 얻고 첫 사랑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여 다시금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됩시다
약 1:19-27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과 뒤따르는 2장 전체에 있어서의 중심주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서의 “행함” 또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제일 먼저 거론하는 문제는 “시험과 시련과 인내”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언급한 것이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인지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받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서의 “행함” 또는 “실천”의 당위성에 관해 언급하기에 앞서 오늘 본문 19-20절에서 사람들 사이의 “말하기”와 “성내기”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여기서 “말하기”란 첫째로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한 것처럼 남의 말을 잘 들어본 후에 말하지 않고 성급히 말해버리기 잘 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며, 둘째로는 뒤따르는 2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 했듯이 주로 더러운 말이나 악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여 “말하기”와 “성내기”를 나란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더러운 말이나 악한 말이 주로 성낼 때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0절에서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한 것은 왜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며 성급히 말하고 더군다나 더럽고 악한 말을 막 쏟아 붓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을 내며 거친 말을 내뱉을 때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으며 의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화를 내며 거친 말을 토해낼 때에는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강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렇게 성을 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특히 구약성경은, 도처에서 성을 잘 내고 말을 헤프게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고, 냉철하며 말을 아끼는 것은 지혜로운 일임을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을 몇 절 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3).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7-28).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18:2).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18:13).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전7:9에 보면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엡4:26-27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이야기를 하면서 일반적인 “말하기”와 “성내기” 이야기는 왜 하는가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즉 19-20절 말씀은 18절과 21절 이하의 말씀 사이에 아무 상관없이 끼어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절 첫머리에서 “그러므로”라고 한 것은 19-20절 말씀과 21절 이하의 말씀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겠습니까?
2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한 것은 사람이 성 잘 내며 급하게 말하고 거친 말을 잘 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있지 않고 모든 더러운 것과 악이 넘치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고 볼 때 그 연관성이 인정됩니다. 따라서 21절 말씀은 성내지 않을 수 있고 성을 내도 말을 성급하게 함부로 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결책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또 뒤집어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입술에 채워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러운 말, 악한 말을 마음과 입술에 담아서는 안 될 것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생활과 언어습관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21절 끝에서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했는데, 여기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영향을 주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2-25절에서는 이 “말씀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2절에서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함으로써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그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참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3-24절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합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보고 더럽거나 흉하게 뭐가 묻었다던가 하면 얼른 지우든가 씻든가 해야지 돌아서서는 곧 잊어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지 각자 한 번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울을 통해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거나 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25절은 이에 반대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잊어버리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고 했는데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거나 듣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는데, 우선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에 계시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해석된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진리를 깨달아 알 때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으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빛 아래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율법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율법은 우리를 노예 되게 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8:31-36에서 증언하기를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며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하셨다 하고, 사도 바울은 롬8:2에서 쓰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합니다.
21절에서 “말씀을 받으라”로 시작해서 22절부터 25절까지는 “말씀을 행하라”로 나아간 야고보는 이제 본문 26-27절에서는 이 그 실제적인 적용에 관한 언급으로 오늘 본문을 마칩니다. 즉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실제로 말씀을 행하는 것인지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혀를 재갈 물릴 줄 알고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26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본문 첫 절에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한 것과 맞닿는 것입니다.
둘째는, 도움이 필요한 형제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27절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의 참된 증거로서 과부와 고아들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명기의 여러 곳에서 과부와 고아를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떠한지를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18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 하고, 14:29에서는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며, 24:19-21에서는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19-21)., 또 신27:19에서는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합니다. 시68:5에서도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합니다.
셋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27절 하반절에서 야고보는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롬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물론 위의 세 가지가 참된 경건, 즉 참된 믿음의 전부이거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익숙한 평소의 교훈과 권면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야고보가 이 편지를 써서 보낸 흩어져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가장 심각하고 중요했던 문제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개개인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나, 공동체의 건덕과 평화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일들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고보의 편지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 각자와 우리 교회에 주시는 살아있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잘 지켜 행하는 일은 우리의 경건과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5절 끝에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합니다.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함으로써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경건한 성도
약 1:19-27 / 김정호 목사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확연하게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잘 모르면 기독교인이면서 마치 다른 종교처럼 기독교를 믿게 됩니다.
① 다른 종교는 잘못하면 벌을 주고 잘하면 천당에 간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에 기초를 두지만 기독교는 잘못하든 잘하든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살전 5:9) 기독교는 착하게 살면 천국으로 보내고 악하게 살면 지옥으로 보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② 다른 종교는 세상의 끝을 멸망(종말)이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세상의 끝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新天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여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멸망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요 12:47) 기독교인들은 인류가 멸망하고 지구가 혜성과 충돌하고 그런 엉터리 얘기에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그러든 말든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③ 다른 종교는 불확실한 세상 가운데 막연히 갖고 있는 인간들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해결해주는 방법으로 참선, 마음수련, 수도 같은 행위를 통해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해결해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은 하나님이 그 마음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게 되면 그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딤후 1:7) 기독교이면서 기독교를 다른 종교처럼 믿지 마십시오.
모든 성도는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경건한 성도를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과 사라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때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온 교회와 성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도매금으로 비난을 받고 욕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를 대표하는 대표 선수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늘 조심하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향력 있는 선교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성도가 되는 것은 필수이고 명령입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소원이고 작품이며 명품입니다. 경건치 못한 가짜나 짝퉁 성도가 아니라 진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국에서 한 가닥씩 하는 유명한 ‘김밥’들이 모여서 10M 달리기 시합을 했습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각 ‘김밥’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김밥이 달리다가 옆구리가 터져버렸습니다. 하지만 밥, 단무지, 시금치, 계란. 맛살, 햄, 참깨는 시합을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단무지가 뒤돌아보니 ‘김’이 달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단무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김아, 빨리 뛰어! 김아, 어서 뛰란 말이야!” 그때 김이 말했습니다. “안돼~ 나는 양반김이야”
우리 모두 경건을 향하여 달려야 하는데 ‘나는 양반 김이야’하면서 걸어가는 성도는 없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함께 달려가는 경건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성내지 맙시다
본문 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도 속히 그리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논쟁에 빠지면 안 됩니다. 성도는 말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하였습니다.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내는 것은 성도의 마음을 해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위배됩니다. 우리의 분노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깨뜨리게 된다면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듣고 말을 생각하면서 하게 된다면 성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순환의 삶이 되어야지 악순환의 삶이 반복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욱하거나 발끈하는 분노는 제발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냄의 피의자이고 가해자이고 피해자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성내는 행위는 청산해야 합니다. 분노의 사람이 아니라 온유와 말씀과 사랑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분노와 성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큰 손해와 사고를 낼 사람이기에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있고 힘이 있으면 못할게 없고 돈 없고 힘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죄수들을 만나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돈’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돈’이 있었다면 이렇게 긴 형량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심지어 감옥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죄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서 부동산, 주식투자, 부자 되는 법을 배우려고 기를 씁니다. ‘돈’이 있어야 다시는 감옥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는 기독교인 죄수들마저도 교도소 안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예수님보다도 더 믿는지 만날 때마다 ‘돈 버는 책’을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요한 형제’이야기를 해 주면서 세상에는 돈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설득합니다. 요한 형제는 결혼 1년 만에 주차문제로 다투다가 이웃을 죽게 하고 15년형을 받았습니다. 재판중일 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요한 형제는 아내를 15년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자기 욕심이라며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출소할 때까지 아이를 키우며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직장에 다니면서 매달 면회를 와 남편 옥바라지를 합니다. 한없는 아내의 사랑 때문에 요한 형제는 벌써 모범수가 되어 ‘특별 가석방’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요한 형제의 이야기를 들은 죄수들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감등을 하며 자기들에게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기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답니다.
분노와 성냄은 싸움과 살인을 부르지만 인내와 사랑은 행복을 부릅니다. 우리는 작은 말과 작은 손해와 불편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싸우다가 모든 것을 다 잃고 깨뜨리고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조금 더 생각하고 기도하고 인내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게 됩니다. 성내는 사람이 있으면 가정과 자녀와 가족과 교회가 불행해 집니다. 빠르고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은 물론 가족과 성도와 남까지 불행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는 어떠한 일, 상황, 분위기에서도.....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성내지 아니하는 온유하고 사랑이 충만한 경건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됩시다
본문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성도는 마땅히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되며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말씀으로 구원을 받고 말씀으로 온유해집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드려야 하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서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은 자는 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와 면류관을 받으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거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행하고 그대로 순종할 때 분명해 지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말씀은 어떠한 경우에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완전한 구원의 책입니다. 그대로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상황에 따라서 변형하면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며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되며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과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돈이 있고 분위기가 감동적이라고 하여도 말씀과 다르면 아무런 가치나 의미에도 없고 주님께서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한 마을에 두 친구가 살았는데 이상하게 한 친구는 점점 재물이 늘어 부자가 되는데 다른 친구는 재산이 점점 줄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친구는 부자 친구들 찾아가 말했습니다. “이보게 친구, 거 어떻게 하면 나도 자네처럼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자네와 나는 어릴 적부터 친구이니 내 가르쳐 줌세. 잘 보게.”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외양간의 소를 끌고 나와 지붕 위로 좀 올려라.” 그런데 아들놈이 아주 큰소리로 “예. 아버지!” 하고 대답하더니 이유도 묻지 않고 소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 색시가 보고 뛰어나와 “무슨 일 이래유?” 하고 묻자 “몰라! 아버지가 소를 지붕으로 끌어 올리려고 하시네.” 색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소 엉댕이를 때리면서 “이놈의 소야, 빨리 올라가”하고 거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뛰어나온 부자 친구의 마누라도 부지깽이를 가지고 나와 소 궁댕이를 때리며 거들었습니다. “아들아! 이제 그만 소를 외양간으로 끌고 가라” 큰아들은 두말하지 않고 소를 외양간으로 다시 끌고 갔습니다. “친구야, 잘 봤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르쳐줌세. 내일은 자네 집에 가서 더 가르쳐 주겠네.” 다음 날 부자 친구가 가난한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어제 잘 보았지? 자네도 한번 해 보게나.” 가난한 친구는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외양간의 소를 끌고 나와 지붕위로 좀 올려라.” 그런데 그 아들놈은 눈을 크게 뜨고 “뭐라고요? 하, 우리 아부지 큰일났네. 벌써 망령드셨네.” 그 색시가 보고 뛰어나와 “무슨 일 이래유?”하고 묻자, “몰라! 아버지가 소를 지붕으로 끌어 올리라고 하시네.” 색시는 “아주 미쳐버리셨구먼.” 이 모습을 보고 뛰어나온 가난한 친구의 마누라도 “네 아버지가 드디어 실성을 했구나. 귀신은 뭐하나 저 영감탱이 안 잡아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자친구 왈 “식구들이 이렇게 서로 뜻이 안 맞아서야 어떻게 부자가 되겠나!” 하면서 자리를 떴습니다.
내 맘에 안 맞는 어른의 말이라도 그대로 행하면 잘 되고 부자가 되는데 합당한 말이라면 목숨 걸고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 부족하고 미련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작은 판단과 경함과 지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가감하고 불순종하면 결단코 축복과 기적을 맛 볼 수 없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아귀까지 부으라 하면 붓고, 일곱 바퀴를 돌아라 하면 돌고, 일곱 번 목욕을 하라 하면 하고, 믿으라 하면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 그대로 행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섞으려고 합니다. 말씀 순종의 함량과 순도가 2% 부족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불경건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100% 행하는 경건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고아와 과부를 돌봅시다
본문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본 절은 경건의 정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종교 예식에 있어서 정결하고 흠 없는 제사가 요구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라고 하였습니다. 어렵고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부모의 사랑과 도움 없이 살아가는 고아가 얼마나 힘들고 불쌍합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찢어집니다. 부모와 남편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환난 중에 가장 큰 환난입니다. 이보다 더 큰 환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문에서는 고아와 과부만 언급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말씀에서는 나그네나 병든 자, 헐벗고 갇힌 자를 제외시키지는 않습니다.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어쩌면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지체들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은 더 많은 사랑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인생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돌아보고 위로하고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합니다. 변명과 핑계와 판단과 정죄는 멀리 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성화시키는 성도가 어려운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과 자기 성화는 정비례하고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미국의 대부호 데일 카네기도 젊은 시절 사업에 파산하여 모든 걸 잃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뉴욕 허드슨 강을 찾았습니다. 강에 투신하려는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연필 한 다스만 사 주세요.” 카네기가 돌아보니 남자는 두 다리 없이 판자를 개조해 바퀴를 달아 만든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딱한 마음에 카네기는 주머니에 있던 1달러를 꺼내 쥐어 주고는 다시 뒤돌아섰습니다. “선생님, 여기 연필 가져가세요.” 카네기가 필요 없다고 말해도 남자는 기어이 쫓아와 연필을 주려했습니다. “연필을 가져가지 않으신다면 이 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결국 카네기가 연필을 받아들며 남자를 쳐다봤습니다. 남자의 얼굴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순간 카네기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 자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훗날 카네기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살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 사내를 보고 나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쩌자고 두 다리가 없는 남자는 마냥 웃는 것일까? 감히 말하거니와 그에게 생명은 그 자체로 축제였을 것입니다. 그는 “살아 있음”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깨달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혹자가 왜 사느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적절한 언어를 찾아 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의 답은 그냥 해맑은 미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날 능력이나 성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또 건강이나 소유나 지위와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값을 매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 자체로 소중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모두가 사랑받고 축복받아야 할 최고의 명품들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경건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사순절 기간에 더 경건한 성도가 됩시다. 평소, 지난해, 남보다 더 경건한 삶을 삽시다. 경건한 성도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며 절대적 사명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더욱 경건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경건한 삶으로
약 1:19-27 / 오세원 목사
사탄의 두목이 전 세계 ‘마귀 대총회’를 소집했습니다. 개회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교회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성경을 읽고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할 수 없다. 구주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막는 일조차 할 수 없다. 만일 예수와 그런 관계를 구축하고 나면, 우리는 그들을 장악하는 권세를 행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 가는 것은 놓아두되 그들의 시간을 도적질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시간이 없도록 만들자. 나는 너희들이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 ‘그들이 구주를 굳게 붙잡고 사활이 걸린 예수와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끔 마음을 빗나가게 하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부하 마귀들이 외쳤습니다.
“인생의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바쁘게 만들고 그들이 마음을 몰두할 수많은 계책을 짜 내라.”고 마귀 두목이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쓰고, 또 쓰고 그리고 빌리고 또 빌리도록 유혹하라. 그들의 헛된 생활양식을 유지할 돈을 벌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일터에 나가서 일하도록 아내들을 설득하고, 남편들이 매일 10~12시간씩, 매주 6, 7일 동안 일하도록 만들라. 자녀들과 함께할 시간을 빼앗아라. 그들의 가정이 깨어지면 그들의 가정은 일의 압력에서 아무런 피난처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과도하게 자극하여 그들이 저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들라. 그들이 운전할 때는 언제나 라디오를 틀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틀도록 꾀어라. TV와 PC가 가정에서 끊임없이 켜있게 하고 세상의 모든 상점과 음식점에 비 성경적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게 만들라. 그러면 그들은 마음에 그 음악이 가득 차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깨뜨릴 것이다.
거실 탁자에 잡지와 신문을 올려놓아라. 하루 24시간 내내 그들의 마음을 뉴스로 두들겨라. 운전하면서 볼 수 있도록 길거리를 광고로 가득 채워라. 우편물 함에 잡동사니 우편물, 우편 주문 카탈로그, 온갖 형태의 뉴스레터 그리고 무료 경품권 등이 넘쳐나게 하라.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델들이 잡지들과 TV에 계속 등장하게 하여 남편들을 외적 아름다움에 매혹시켜 아내들에게 불만족하게 만들면 그들은 다른 곳을 쳐다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가정이 신속하게 깨어질 것이다.
여가를 즐기게 하되 과도하게 하라. 그리하여 돌아올 때에는 기진맥진하여 지치게 하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계를 명상할 시간을 낼 수 없게 바쁘게 만들라. 그 대신 오락 공원, 스포츠 이벤트, 연극, 연주회 그리고 영화관에 가도록 만들라. 그들을 계속 바쁘게, 바쁘게, 바쁘게 만들어라.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들이 영적 교제를 위하여 교회에 모일 때에 한담과 시시한 대화에 몰두하게 하라. 정치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를 하게 하라. 그리고 목사를 비판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개운치 않은 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영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로부터 능력을 구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게 유혹하라. 그리하면 머지않아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일하게 될 것이며 그 일을 하다가 건강과 가족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야, 정말 훌륭한 계책이구나! 그래서 심기일전한 마귀들은 그들의 과업을 행하러 나가서 그리스도인을 더욱 더 바쁘게 만들고, 더욱 더 이리 뛰고 저리 뛰게 조정합니다. 하나님이나 가족을 위하여 시간을 낼 수 없게 하고 삶을 변화시킬 예수님의 능력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줄 시간이 없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귀들은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고 만세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 하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경건 생활의 최대의 적은 우리 시대의 템포입니다. 많은 사람이 서두르고 허둥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바쁩니다. 아이들도 바쁩니다. 우리는 자명종, 사이렌, 텔레비전 그리고 핸드폰 벨 소리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에 시간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도 없습니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말씀 볼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연습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연주할 때 자신이 그 차이를 알고, 이틀을 하지 않으면 스승이 알고, 사흘을 하지 않으면 청중들이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도를 포함한 경건 생활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성도 여러분! 추석을 맞아 긴 연휴기간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혹시라도 흐트러진 부분은 없습니까? 명절이나 휴가 등 지나치게 흥겨운 일을 만나면 우리의 경건생활이 흐트러지지는 않았을까 염려가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앞에서 보았듯이 사단은 우리가 경건생활을 잘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경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경건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경건하게 살아야 될 것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기의 전부를 드리려는 절대귀의의 감정 또는 의지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도덕이나 신앙고백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큰 유익이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이 됩니다.(딤전 4:7, 8), 말씀에 충실하려는 마음(행22:12)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핍박이 있다고 디모데후서3장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성도들이 경건하게 사는 것을 사단이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사는 성도는 미움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경건한 본을 보여준 사람들을 보면, 구약에서는 에녹(창5:22,24), 아브람(창 17:1), 요셉,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삼상 1:11), 선지자 다니엘(단 6:4-5), 오바댜(왕상 18:3-4), 느헤미야(느 2:2-3) 등이며, 신약에서는 세례요한(요3:1-4)과 안나 할머니(눅2:37,38)와 시므온(눅2:25), 그리고 바울과 이방인 출신 고넬료(행10:2) 등이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경건한 삶을 강조하여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습니다. 야고보 장로도 경건을 강조한 것을 본문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건한 삶은 예수님을 닮는 삶인데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 갖추어야 할 요소는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우선 경건한 삶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말이라고 합니다.
왜 말을 조심해야 하는가 하면, 아무리 우리가 선행을 하고 좋은 일을 했더라도 말로 인해 덕을 세우지 못하면 좋은 이미지가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듣기를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듣는 것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알아들어야 합니다. 들었다고 바로 반응하지 말고 생각하며 천천히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설명 드리면, 자기의 입장에서 함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말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화를 내어 노를 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화내는 것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감정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화가 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표정과 말투입니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투가 거칠어집니다.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위입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이 구절에서의 경건이란 단어가 헬라어 ‘드레스코스’입니다. 이 단어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되는 ‘드레오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이는 예배의 외적인 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아무리 유창하게 기도하고 금식 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더라도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이 올라오는 대로 해버리면, 결국 악담을 하거나 남의 마음에 상처 되는 말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면 경건한 삶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아무리 방언을 하고 남에게 의를 나타내는 행동을 하더라도 헛된 경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고 주일성수, 기도생활, 헌금생활 등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천국 간다고 야단법썩을 떨어도 우리가 하는 말에서 덕이 되지 못하면 그런 경건은 헛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를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추석명절에도 서로의 말 때문에 혹시라도 화를 내거나 말 때문에 서로 말다툼을 했다면 이미 경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주고받았더라도 말로 인해 덕을 잃었다면 그것은 헛된 경건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의 삶의 자리에서 경건을 해치는 더러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악을 내버려야 합니다. 왜 이런 것을 내버려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함입니다.
21절 말씀,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서 ‘내버리고’라는 헬라어는 ‘아포데메노이’로서 ‘옷을 벗어버리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탐욕과 정욕 등을 내어버려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것은 생각지도 말아야 하고, 신앙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은 경험하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5장18-20절 말씀에 보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등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내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생각까지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항상 좋은 생각,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에게 전한 편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4장7절에 보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운동도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의 훈련을 위해 악한 것과 잘못된 교리를 버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사는 삶은 이 땅에서도 유익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약속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가장 좋은 경건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은 듣는 것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아는 것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행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으로 화한 것입니다. 도성인신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영광스러운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결국 천국 들어갈 줄 알고 있다가 들어가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실 거울로 자기를 보지만 자기 얼굴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거울로 본 자신을 계속 기억하지 않습니다. 금방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실천의 삶이 경건의 삶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구체적으로 행함 있는 믿음, 참된 경건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여기서 고아와 과부만 언급하고 있는 데, 사실은 이들이 구약시대부터 구제받아야할 제 일순위로서 모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자들, 사회적으로 약자를 가리킵니다. 우리교회가 금년에 목표를 세운 “성령의 능력 받아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에서의 작은이들이 바로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마음에서 생성된 경건한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건이 되려면, 즉 참된 경건한 삶이 되려면 이런 사회적 약자들이 설상가상으로 환란을 당할 때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형제를 돌아보고, 이웃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고, 알지 못하는 나그네를 돌보고, 이방인들 가운데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돌보아 줄 때 진정 경건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추석을 맞아 이미 계획된대로 진행한 것이지만 추석 당일에 갈데도 없으시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분들을 모시고 늦은 아침상을 차렸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거두절미 하고 한 분이 이런 고백했습니다.
“오랫만에 밥을 한공기 다 먹었습니다”
한 공기 밥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다 먹어본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혼자서 밥을 먹지만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요양원에서 어렵게 사시는 어른들을 심방한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도 가족들이 수시로 찾아가시지만 명절이 되면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더 기다려지는데 가족들이 명절 준비에 바빠서 가보기 어렵습니다. 명절날 온 가족이 모이면 다 가보시겠지만 제가 화요일 점심을 일찍 먹고 담당목사님 들과 함께 출발해서 11개 병원 15분의 병실을 찾았습니다. 이미 먼저 찾아본 분들은 제외하고 열다 섯분을 뵈었지만 그래도 빠진 분이 한 두 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병원을 돌아보면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병원을 옮기시면 곧 바로 교구 목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교구 목사도 가족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금방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줄 알고 찾아갔는데 옮긴 것을 제대로 몰라서 가보지 못한 분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더 자주 해야 하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꾸중들을 것만 같아서 설과 추석에는 이렇게 심방을 합니다.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말씀, 2장14-16절에 보면 구체적으로 행함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그러면서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성도 여러분!
행함 있는 믿음으로 참된 경건의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27절에 하반절에 보면,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이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행함이 있더라도 세속에 물들면 이중적인 신앙인이 됩니다. 참된 경건은 세속화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함 있는 믿음이 나타나야 하지만 아울러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단순히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면 그것은 사회 자선 사업가들도 잘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어도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더 잘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자기 이름만을 위해서 한다면 이것이 바로 세속적인 구제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웃을 돌보는 행위와 함께 개인적으로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성을 지켜야 참된 경건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세속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우리의 세속화된 삶은 어떤 것인지를 다음주일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참된 경건의 삶을 위해서는 말을 조심하십시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행함 있는 삶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그치는 신앙은 경건한 삶도 아니요, 죽은 신앙이 됩니다. 반드시 약한 자를 돌보는 삶이 수반될 때에 경건한 삶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경건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빠를수록 좋은 것
약 1:19- / 백장흠 목사
유쾌, 상쾌, 통쾌라는 초고속 통신망의 광고나 속도 너 마음에 든다는 휴대폰 광고에서 보듯이 속도는 구매동기를 유발하는 인기 있는 항목입니다. 속도를 파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을 스피드 문화라고 합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지구촌은 강자와 약자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며 빠르면 승리하고 느린 자는 패배라고 스피드에 대하여 진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비행기로 간다면 한 시간 거리도 안 됩니다. 미국은 서부에서 동부까지 가려고 하면 비행기를 타고 5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와 비교해 보세요. 한국은 너무 작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특급 새마을호 보다 더 빠른 고속 전철이 개통된 답니다.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빨라서 좋지 못한 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말이 빠르면 실수가 많습니다. 말할 때에는 생각해 보면서 해야 합니다. 혀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습니다. 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기는 배후를 보세요. 말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잘하면 상대방이 감동을 받게 합니다.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였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잘하기 위해서 더디 하라는 말입니다.
성내는 것도 더디 하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분노하면서 하면 상대방이 상처를 입습니다. 자기는 정당하고 의로운 생각으로 화를 내지만 결과는 좋지 아니합니다. 화를 더디 하는 방법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화날 일이 생기면 양보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대응책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하간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건강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성내는 것은 더디 할 수록 좋은 겁니다.
그런데 빠를수록 좋은 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듣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대화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할 줄 모릅니다. 내 말만하면 말이 되는 줄 압니다. 상대방이 들어주어야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가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경청기술을 터득하여야 합니다. 잘 듣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합니다. 부부간에 대화를 합니다. 어떤 분은 등에다 대고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대화할 때에는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합니다. 들을 때에도 얼굴을 바라보고 들어야 합니다.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자세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충고하는 자세로 말하면서 들으면 안 됩니다. 요즘 너무 피곤해요. 그렇게 말할 때 그러니까 쉬어가면서 하지 뭐 그렇게 해 당신이 무슨 쇠덩어리야? 그보다는 그래 피곤하게 생겼지.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일이 되는 거지 그 대신 누구인들 피곤하지 않겠어. 이게 나은 겁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말을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분은 도와달라는 말을 하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들어야 하겠습니까? 긍정적으로 듣고 위로와 격려하는 말을 해주면 그들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듣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순종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빠를수록 좋은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가나 라는 동네에 혼인이 있어 참석하였습니다. 그 집에 포도주가 모자랍니다. 우리나라같이 결혼식이 하루 잔치라면 지나면 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혼인은 대단하였습니다. 무려 13일 동안이나 잔치가 열립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모자랍니다. 이건 낭패입니다. 그때 하인들을 불러 물을 항아리에 채우라 하십니다. 하인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즉시 이행하여 물을 채웁니다. 이것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인들에게 조금도 어려울 게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가져다가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겁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포도주입니다 라고 물을 갖다 주었다가는 상전을 놀리는 것이 됩니다. 그들의 생명까지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이렇게 맛 좋은 포도주를 마시다니 칭찬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원하신다면 즉시 순종하십시오. 요한복음 2:9절을 보세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에서 낫는지 모르나 하인들만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의 태도를 보세요. 무조건 순종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믿음 좋은 게 무엇입니까? 순종에서 보여줍니다.
네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려라 하실 때에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내일 하겠습니다. 그랬더라면 못합니다. 마음에 변화가 생깁니다.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축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우리는 연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일이라는 말은 함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음부터나 순종하자 그럽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즉시 순종하여야 합니다. 순종이 믿음의 전부입니다. 지금 빨리 할수록 좋은 게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순종은 최고의 섬김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높여줄 때에는 순종을 잘합니다. 그래서 결혼한 부부가 있습니다. 지독하게 사랑할 때에는 예, 예 하다가 사랑이 조금 식으면 그래요 알았어요. 그 다음에는 왜요 왜요 그러다가 더 식으면 못해요 못해요 그런 답니다. 순종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였습니다. 부부윤리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이것이 부부가 실행하여야 할 도리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려고 할 게 아니라 순종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무엇을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순종합니다. 순종하면 사랑해 줄 것입니다.
순종이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신명기 28:1-14절을 보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나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말합니다. 헌신하자고 강하게 말합니다. 좋은 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해야 할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할 때에 순종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습니다. 장자에게 말합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랬더니 예, 예 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가지 아니 하였습니다. 둘째에게도 부탁하기를 너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랬더니 못 간다고 합니다. 시간이 가서 생각을 합니다. 이건 아닌데 그리고 아버지의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큰아들은 간다고 약속은 했으나 안 갔습니다. 누가 아버지 말을 들은 사람이냐 묻습니다. 물론 둘째 아들이라고 말할 겁니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순종의 원칙이 나옵니다. 순종하려면 처음부터 했어야 순종입니다. 순종은 빨리 하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순종이 영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랜시스 같은 이는 그의 삶이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자신을 채우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마음에 예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온전히 예수로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그의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순종하였습니다. 세속을 떠나 주님을 따르고 제자의 삶을 산다는 이들이 불순종하는 것 보았습니까? 순종은 영성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무엇입니까? 온전히 예수에게 붙잡힌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천이라는 이름대로 사는 이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이후에는 축복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성경을 보세요. 아브라함 같은 이는 순종 하나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사울 같은 임금은 불순종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선택 하셨습니다. 그는 준수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삼상 9:2) 겸손한 젊은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11:1-11) 백성들이 신임하였습니다.(삼상 11:12) 그런데 왜 실패자가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순종에 실패한 겁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합니까? 오늘에도 제2의 사울 같은 이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 사람들이 인정하고 그 교회 목사님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중직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잘 하다가 나중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여지고 불순종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에 실패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전에도 이렇게 해왔는데라는 말입니다. 전례를 듭니다. 또 다른 말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던데 라고 말합니다. 순종에 실패하는 사람이 가진 특성은 교만입니다. 순종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왜 나를 무시합니까? 나와 왜 의논하지 않습니까? 이치가 맞으면 내가 왜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다면 이는 순종이 아닙니다. 평생 자신은 예수를 잘 믿은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순종에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슬픈 일입니다. 다른 것은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순종에는 성공자가 됩시다. 그럼으로 불순종은 빨리 버릴수록 좋고 순종은 빠를수록 좋은 겁니다.
2. 화해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는다면 먼저 알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회전이 잘되어야 합니다. 속된 말로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다음은 아는 것을 자기의 삶을 통하여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좋은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할 줄 모릅니다. 사용할 기술이 없다면 있어도 무용지물입니다. 삶에도 그러합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삶에 기술이 없습니다. 사랑도 기술입니다. 어느 부부를 보면 누가 보아도 행복의 조건을 갖춘 가정 같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어느 가정은 누가 보아도 잘 맞지 않는 것 같고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아주 행복하게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기술입니다. 사랑하고 사는 것이 삶의 기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는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화해는 빠를수록 좋은 겁니다. 왜요? 화해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불화는 불행입니다. 불화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화해하지 않는 사람이 먼저 상처를 입게 됩니다. 불화하면 서로가 만나도 인사가 없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불화하면 기도의 응답도 없습니다. 화해하지 아니하면 기쁨이 없습니다. 만일 가족들이 화목하지 못하면 집안에 기쁨이 없어집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생기면 제일 곤란한 게 시어미니가 보면 아들이요, 자신의 입장에서는 남편입니다. 요즈음은 담을 없이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에도 담이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에도 담이 없어야 합니다. 담이 있으면 보아야 할 게 보이지 않습니다. 가족간에 성도 사이에 담이 무너져야 합니다. 서로가 담을 허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화해할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데 불화하고 기도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화해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요?
1) 불화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불화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획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만한 말을 하였다든지 과격한 행동을 하였기에 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행에 대하여 항상 조심하지 아니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하여 화목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이 상대방에게는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너무 좋아서 자랑한다는 게 듣는 이는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에 상처가 되고 그 다음부터는 그와 관계가 멀어지는 예도 있습니다. 혹은 오해로 인하여 불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오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지나친 욕심 때문에 불화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정리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산권문제로 형제가 모였습니다. 형이 자기는 적게 갖는 것으로 하고 동생들에게 후히 분배하려고 한다면 좋을 것인데 물질 앞에 사람은 악해집니다. 욕심을 부리는 형이 있습니다. 자연이 동생들과 사이가 나빠지기 쉽습니다. 이기심이 없으면 화목하게 됩니다. 시기심이나 질투로 인하여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족관계 중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좋아지는 게 쉽지 아니합니다. 현명한 가족들은 이 사이를 좋게 가질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시어머니가 딸의 말만 들으면 꼭 시험에 듭니다. 며느리 말을 들어야 합니다. 딸이 친정에 왔습니다. 그때 딸 말만 들을 게 아니라 사위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아니합니다. 듣는 이들은 항상 화해시키려고 하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이간하는 사람의 말에 의하여 화나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과 귀는 간사한 겁니다. 한 번 잘못 보면 계속 잘못 보게 됩니다. 진정으로 잘했어도 잘한 것 같지 아니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자꾸 쌓이고 쌓이면 불화 하게 됩니다. 화해하려고 하면 먼저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2)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상처를 입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용서해 주세요 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화해하겠다는 마음으로 상대를 만나야 합니다. 한국 사람은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자꾸 만나면 사이가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해가 풀려지게 됩니다. 마음으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상대방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가고 그 후에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3) 사랑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부흥사 무디가 (1837-1899)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 동네에 경쟁하는 두 가게가 있었습니다. 한쪽 주인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고민이고 괴롭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해줍니다. 당신가게에 손님이 오면 무조건 경쟁 상점으로 보내세요. 이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만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경쟁가게에서도 손님을 보내주더랍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면 화목입니다. 사랑하면 주는 겁니다. 용서해 줍니다. 용서하면 사랑입니다. 위해 줍니다. 도와줍니다. 협력해 줍니다. 미음은 불화이고 사랑은 화해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미워하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배신자 가룟 유다 얼굴의 모델을 미운 사람으로 정하고 그렸습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그리려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는 미워하는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예수님의 얼굴처럼 보여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우면 가룟 유다이고 사랑하면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나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하는 게 화해입니다. 화해는 빨리 할수록 좋은 겁니다. 오늘 즉시 화해합시다. 용서합시다. 용서를 구합시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것은 속히 하라 하였습니다. 빠를수록 좋은 순종의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빠를수록 좋은 화해를 하고 축복을 받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듣기만 하는 사람
약 1:19-27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듣기만 하는 신앙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데, 그냥 듣기만 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과연 신앙인가? 알아봅니다. 오늘 야고보를 통하여 듣기만 하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서,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속에 임하시고, 예수님이 그냥 내 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7장 산상수훈 마지막 결론이 뭐냐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 얘기입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 그리고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치않는 사람, 산상수훈 결론입니다.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뭐가 어리석은가? 바람불고 홍수가 날 때,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 모래위에 지은 집이 홍수가 나면 그 무너짐이 심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분명히 성경에 나오지만, 단지 듣기만 하는 신앙은 어리석은 신앙, 헛된 경건, 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런 신앙, 초대교회 시절, 1세기때부터 야고보 사도가 눈여겨보니까, 듣기만 하는 신앙,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들은 뭐가 문제였는가? 1장 초반에 보면 시련과 환난이 올 때가 문제였어요. 당시 이미 교회에 핍박과 시련이 밀려왔는데, 고난과 시련이 오니까, 그것을 딱 보고 아! 지금이구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할 시간이구나, 지금 여기 출구가 안보이는데 하나님앞에 간절히 지혜를 구하고 출구를 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시련을 견디며 믿음이 굳건해지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고난과 시련을 보고 아무 대책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지혜가 없는데 지혜를 구하는 일을 안해요. 그래서 믿음이 붕괴되어버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다, 마음이 바람에 밀려 요동치는 바닷물결같으니! 그러니까 뭐예요?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는데,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그랬던 겁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면 실제로 시련과 고난이 오면 그걸 견딜 실력이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듣기만 하는 신앙인가? 오늘 본문에 알려주는 것이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잊어버려요. 둘째는 더 심각한데 그는 자기를 속여요. 야고보는 이들을 헛된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내면의 장치가 고장났어요.
오늘 이 두가지 고장난 장치가 내면에 있는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기 모습을 보고도 잊어버린다.
23절,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 얘기를 합니다. 저는 야고보사도가 이런 신자들을 직접 겪어봤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이 부분을 말한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안에 이미 많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23절은 아침마다 자기 얼굴 거울로 보는 사람 얘기입니다. 거울을 보는데 거울의 기능이 뭔지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붓는 사람이 있고 머리가 산발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머리가 산발이 되어 까치머리가 됐어요. 아이구야 내 머리가 뒤죽박죽이네! 그러면 그 다음 뭘 해야 맞아요? 머리를 감든지 샤워를 하든지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딱 보고, 머리가 까치머리가 됐네! 하고 그냥 욕실을 나와버려요. 그리고 회사에 출근합니다. 사람들과 인사를 합니다. 굿모닝 안녕하세요? 근데 이대리 머리가 왜 그래? 거울 좀 봐! 아 제 머리요? 머리가 어때서요? 아침에 거울보고 나왔어요. 아니 거울 봤는데 그래? 왜요? 거울 다 보고 나왔다니까요? 봤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예요? 자기 상태가 어떠한가를 금방 잊어버린 겁니다.
야고보가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보고 금방 잊어버립니다. 눈껍이 끼고 까치머리인 것을 확인했지만 그 사실을 잊어버려요. 이런 신앙이 바로 듣기만 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신앙은 자기 얼굴 거울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24절도 보세요. 자기의 모습을 봤는데, 그 얼굴 상태가 어떤지 금방 잊어버려요. 그럼 거울은 왜 봤나 이 의문이 들죠. 그런데 1세기 초대교회에 이런 현상이 왜 생겼나를 역사적으로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가지 배경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유대종교 배경이고, 하나는 이방종교 배경입니다. 유대교는 당시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리새인종교가 가장 세력이 큽니다. 바리새인 종교 특징이 뭡니까? 종교 외부적인 행동은 열심히 하지만 자기 속 내면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속사람은 더럽고 겉만 신경썼어요. 말씀을 계속 보고 듣지만 속은 그대로입니다. 이방종교를 믿다가 예수믿은 이들도 사실은 이 문제입니다. 이방종교라는 것이 이방신전에 가면 사제들이 있어요. 우리나라로 말하면 무당입니다. 무당종교의 특징은 한마디로 사람의 내면의 변화, 삶의 변화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종교가 무속신앙입니다. 우리도 그래서 신앙과 삶이 따로 놀아요. 성경말씀은 거의 대부분 우리 내면의 문제는 다루지만, 무속종교는 우리 내면에 대해서, 내면을 강하게 하거나, 내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여기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무당은 단 한번도 당신의 삶이 변화되어야 복이 온다 이런 얘기 안해요.
그래서 야고보가 교회다녀도 성품의 변화가 안되는 문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내는 문제로 언급합니다. 19절 20절 보십시오. 성급하게 말하는 것, 성급하게 화내는 것, 이게 교회를 오래 다녀도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거죠. 이것이 바로 듣기만 하는 신앙의 대표적 문제라고 야고보가 말한 것입니다. 교회다니면 주일날 설교 다 듣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자기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거울을 집집마다 설치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거울보고 자기 얼굴 씻는 일, 자고나서 까치머리 정돈하는 일은 자기가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목사가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말씀듣고 집에 가서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속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나 교회갔다 왔다! 나 예배참석했다. 나 헌금냈다. 나 봉사했다! 이걸로 다한 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들을까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은 염려도 많습니다. 이 설교말씀을 듣기만 하려고 할까? 자기 삶에 적용시켜 자기가 변화되려고 할까? 설교는 뭡니까? 듣고 실행에 옮기라고 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에,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그랬어요. 네가지 유익이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여러분이 듣고나면, 교훈을 받습니다. 깨닫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습니다. 잘못된 것이 생각나야 정상입니다. 바르게 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교정입니다. 구부러진 생각과 구부러진 행동을 곧게 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아무 구부러짐없이 곧게 펴져있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의로 교육하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좁은 길로 성도가 자기가 그 말씀으로 셀프 트레이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수가 코치한테 폼을 배우면 그 폼으로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실력이란 기본폼과 연습량에 비례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겨야 그 사람은 신앙이 자랍니다.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 여기서 교훈은 뭘까? 주님이 책망하신 건 뭐지? 내 삶에 구부러진 것이 뭐지? 그럼 내가 매일 스스로 훈련해야 하는 것이 뭔가? 이것을 매일 하는 성도는 1년 지나고 3년 지나고 10년 지나면 믿음이 엄청 자랍니다. 믿음의 실력이 늘어요. 특히 자기 성품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혹
쉽게 화를 내는 습관이 있나? 내가 혹 아직도 게으른 면이 있나? 내가 아직도 무책임한 면이 있나? 내가 아직도 누군가를 섬기는 일에 얼른 못일어나고 있나?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는데, 빛이 뭡니까?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둘째, 자기를 속인다
사실 이 두번째 문제는 더 심각한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인다이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22절, 그리고 26절입니다. 다같이 22절을 읽어봅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 되지마십시오. 듣기만 하는 사람,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런가? 자기 내면에 자기를 속이는 장치가 있어서 그렇다 이 말씀입니다. 듣기만 하고 변화가 안되는 사람의 속에 있는 자기속임 장치가 뭘까요? 내가 이 말씀 다 들었으니 이제 됐다! 마치 설교 1시간 들었으니 내가 변화된 것처럼 속에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증상이 이미 1세기때 예루살렘 교회, 초대교회때부터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나의 내면의 실상을 내가 속이는 겁니다.
여러분 모든 속임은 마귀적인 일입니다. 누가 나를 속이는 걸 사기라고 합니다. 사기 당하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장 억울한 상황이 정말 친한 사람으로부터, 정말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사기당하는 것입니다. 가족, 친구, 남편, 아내,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본래 사기를 당할 때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 사기당합니다. 아 내가 저 사람에게 속아넘어갔어? 저 사람이 나를 속였다고? 비통합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는 뭐예요? 내가 나를 속이는 증상, 즉 자기기만 증상입니다. 너 교회갔다 왔잖아? 너 설교듣고 왔잖아? 그럼 된거야. 그거면 충분하다구! 더 이상 할 것이 없어!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속일 때 이미 마귀가 그를 속여서, 속아넘어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3인데 수능이 내일 모레인데, 누가 그 고3 수험생을 속여요. 이번에는 수능없이 대학 아무데나 지원이 가능하대! 그래? 처음에는 안믿어요. 수능이 없는데 어떻게 아무 대학이나 원하는데를 가? 그게 말이 돼? 아니야,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이 이번에 발표를 했어. 우리나라 입시제도를 근본적으로 고친댔어! 아 그래? 발표가 됐어? 그렇다니까! 그때 속아넘어갑니다. 그럼 놀아도 되겠네? 그렇다니까! 그렇게 편하게 놉니다. 수능당일날 속인 친구는 어디로 가버렸어요. 그럼 수능 당일날 그렇게 속아넘어간 고3 그는 어떻게 돼요? 입시 망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도 속이는 일은 장난입니다. 마귀는 거대한 음모로 성도를 속입니다. 그래 교회 열심히 다녀라. 예배참석만 부지런히 해라. 그래 설교도 잘 들어라.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어. 이렇게 해. 듣기만 하는거야! 그래도 신앙생활 잘 할수 있다! 그래? 그래도 돼? 그렇다니까?
본래 신앙생활이란 게,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되는거야! 이렇게 성도를 속입니다. 그래? 그럼 나 교회 다니기만 되는거지? 뭐 아무 변화가 없어도 상관없는 거지? 그렇다니까! 그렇게 마귀에게 속아넘어간 사람은 이제 자기가 자기를 속입니다. 듣기만 하면 된대! 여러분 그래서 오늘 야고보 사도가 진실을 드러내 말합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다! 우리 예수님도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행치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비바람이 치고 홍수가 나면 모래위에 세운 집은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 인생에서 비바람과 홍수는 두 차원으로 올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동안 비바람이 칩니다. 그것이 1장에 말한 시련과 고난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기를 속인 사람은 수능당일까지 무한정 놀다가 시험지를 받아든 고3학생과 같습니다. 수능 시험문제를 받고보니 풀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 사람은 다릅니다. 말씀을 듣고 자기 내면,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날마다 그 말씀을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매일 자신의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은 시련과 고난이 왔을 때 견뎌냅니다. 어떻게 견뎌요? 부지런히 지혜를 구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출구를 주시기를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시련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래위에 세운 집은 비바람 몰아치면 곧바로 비틀비틀 무너져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오는 시련은 마지막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비바람과 홍수는 주님의 재림날에 있습니다. 그날 주님이 그 믿음이 모래위에 세워졌나 반석위에 세워졌나 심한 비바람과 홍수로 테스트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상급받을 것입니다. 칭찬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25절입니다.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 반석위에 집을 세워가는 것은 실제로 뭘까요? 27절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이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진짜 경건은 뭔가? 27절 확실하게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고난을 겪고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오염되지 않게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정말 강조하고 있는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명확합니다. 지금 나는 누구를 돌봐주고 있는가? 지금 나는 누구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는가? 내가 누구의 위로가 되고 있는가? 나로 인하여 일어날 힘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요즘 있는가? 여러분 이런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있지 않다면 반석위에 집을 짓고있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26절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봅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경건해! 그렇게 생각하는데, 혀를 다스리지 않아요.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뭐예요? 그 사람이 바로 듣기만 하는 신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자기를 속이는 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짜증이 계속 나오고, 갑자기 화를 내는 습관이 그대로 나오고, 약속 안지키는 습관이 지금도 그대로고, 친절과 온유한 모습이 아직도 안나오고, 그러면서 교회안에서는 2장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은 환영하고, 남루한 옷차림한 사람이 들어오면 냉대하고, 이런 모습이 아직도 있으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는 이미 자기를 속이는 장치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생활을 하면, 듣기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니까 누구든지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가 점점 달라집니다.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오늘 여러분 나는 듣기만 하는 사람인가? 듣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인가? 내 현재 속모습이 어떠한가? 보시기 바랍니다. 헛된 경건은 듣기만 하는 신앙입니다. 자기 입술에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삶에서 아무도 돌보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듣기만 한 사람은 비바람치면 바로 넘어져버립니다. 듣기만 한 사람은 주변에 그를 통해 힘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야고보서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절대로 듣기만 하고 잊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자기 얼굴을 거울에 보고 금방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참된 경건의 신앙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예배
야고보서 1:19-27 / 권호만 목사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말함으로서 다른 성경과 달리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루터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과는 정반대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됨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인용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사람들을 율법과 행위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야고보서는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교훈이나 주의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단지 두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았기에 성경으로서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런 평가를 내리게 된 이유는 당시 천주교의 공덕, 선행을 중시하는 사상에 정면으로 대항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 훼손된 서신의 가치를 정상으로 올려놓은 사람이 감리교회를 창설한 존 웨슬리입니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천을 소홀히 여김으로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 세상에서 소외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믿음으로 신분이 변화된 성도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하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절하 했던 야고보서를 다시 살려내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것은 종교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종교생활을 다 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기도, 찬송, 말씀, 예배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경건의 삶을 강조하면서 경건에도 헛된 경건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경건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종교’ ‘예배’라는 말인데요,
이 말대로 ‘경건하다’ 는 말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장로는 그것 뿐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진실한 예배, 진실한 경건은 많은 성도들이 모여 정성껏 예배드리고 웅장한 찬양대의 찬양에 은혜 받고 정성을 다하여 헌금을 드리는 예배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봉사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순결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의 이런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날 한 번 교회 가서 예배드렸으니까 신앙인으로서 내 할일은 다 한 것이라며 더 이상의 신앙생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이제 남은 시간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내 시간이고 내 세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면서 나는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렸으니까 기독교인이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주일날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것만 틀리고 나머지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50보 백보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꼭 해야 될 일이지만 그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삶의 현장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신앙이고 경건이고 예배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생활은 무엇입니까?
1. 먼저는, 자기 혀를 재갈 물리는 삶입니다.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바꿔 이야기하면 참된 경건은 ‘자기 혀를 재갈 물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혀를 재갈 물리는 것은 말들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억제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자신의 혀를 재갈 물리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헛된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경건은 자기의 혀에 재갈을 물려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을 절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언 17장 27절에 보면,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했고요,
28절에서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10장 19절에서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말을 많이 하게 마련이고 말이 많으면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고 화를 내는 일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혀를 재갈물리지 아니하고 남을 비방하고 화를 내고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를 잘 드려도 그의 경건은 헛된 경건입니다.
어떤 대학교수의 글을 보니까 오랜 경험상으로 입학한 신입생들 가운데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을 아주 쉽게 구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생들은 비기독교 신앙의 학생들에 비해 말을 잘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생활에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말을 잘 하면서 행함이 그만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말은 잘 하는데 그 말이 남을 비판하고 험담을 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이 사회의 위기는 상당 부분 잘못된 말에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말해 이웃을 곤경에 빠뜨리고 불필요한 말로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거칠고 무례한 말을 내뱉기 일쑤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상에서 익명으로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많은 욕과 인격을 파괴하는 말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로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까지 종종 생기지 않습니까?
데이 C 셰퍼드는 ‘세 가지 황금 문’이란 글에서 언어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말하기 전에 언제나 세 가지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이다.
첫째 문, 그것은 참말인가?
둘째 문, 그것은 필요한 말인가?
셋째 문, 그것은 친절한 말인가?
이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하지 말고 크게 외치라.”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문을 더 통과해야 합니다. 기도의 문입니다.
말하기 전에 기도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말인가를 생각할 때 진실한 말, 필요한 말, 친절한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참된 경건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2.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도들의 경건, 예배, 종교가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고 신앙의 핵심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교는 교회 안을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되는 일을 통하여 증거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를 쓸 당시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당시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혼자된 과부의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일에 힘쓰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경건이요 예배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야고보 장로가 처음 한말은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했습니다.(68:5)
미가 선지자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미 6:8)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구하시는 것은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아니라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이런 말씀은 정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생활비가 없어서, 먹고 살 돈이 없어서, 모자가, 모녀가, 일가족이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하고 풍요롭다고 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질병과 기아 속에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먼 나라의 일로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면서 못 본체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더 풍성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런 것만을 걱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관심 갖고 도와주어야 할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야고보 장로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거울로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럽게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고쳐나가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하시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27절에서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생활에 대한 성도들의 잘못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해서 경건한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세상과 등지고 산과 수도원으로 기도원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다가 결국 세속에 물들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다 잘못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세속에 물들어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경건생활입니다.
이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19절 말씀처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21절 말씀처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질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요즘 새벽마다 사사 삼손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만 삼손의 생애를 보면 몇 가지 단점이 나타납니다. 항상 혼자서 활동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규합하고 함께 힘을 합했다면 더 크게 역사했을 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블레셋 지방을 자주 드나들었고 세 번째는,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블레셋 지방을 자주 드나드는 것이 결국은 여자를 사귀는 것하고 연관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스스로 이것이 블레셋을 물리치기 위한 계략이라고 변명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실패의 첩경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 좋은 대로 행하였고 아버지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장소와 사람을 계속 가까이 했습니다.
너무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세속에 물들고 유혹에 넘어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못할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4:7)고 했습니다.
못할 것이라면 아예 말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 훈련할 때 조금씩 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입니다.
평화를 깨는 큰 죄 – 분노
약 1:19-25 / 곽창대 목사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고 나누는 우리가정 우리교회”입니다. 그렇게 표어를 정한 것은 우리의 가정은 물론 교회와 우리나라에 평화가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올해가 6.25 동난 7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다시는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내치가 안정되고 주변의 나라들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에 진전이 있기를 우리 모두는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화를 깨는 주범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누려면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려면 먼저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연구한 바대로 평화를 깨는 죄 가운데 대표적인 죄, 7가지가 있습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입니다.
3개월 전에 교만과 시기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코로나19 비상사태를 맞아 지난 3개월 동안 다른 주제로 설교했는데 오늘부터 다시 “평화를 깨는 7가지의 큰 죄”에 관하여 시리즈 설교를 재개합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로 분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를 가히 “분노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25일에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흑인남성이 백인 경찰관의 강압적인 체포 과정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 시위가 번졌고, 일부에서는 폭력과 방화와 상점 약탈 등으로 도시들의 치안이 무너졌습니다. 미국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민족과 집단 간에 분노가 폭발하여 폭력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종교와 이념과 정파 간의 갈등과 대치로 인해 도처에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집단적인 분노의 표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분풀이도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불편함과 손해를 참지 못하여 성급하고 과도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원한관계가 아닌데도 행인이나 여자나 약자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이른바 “묻지마 폭행”이나 “우발적 살해”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 간에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여 상습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악스러운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에서 악의의 글을 올려 분노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적절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에 울분이 쌓여 화병이나 우울증으로 시달리다가 자살을 감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벌한 세상, “분노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회가 도래할 것을 오래 전에 예고했습니다.
(딤후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분노의 정의
[네이버 지식백과] “분노, 분하여 몹시 성을 냄. 사람의 분노는 죄의 원인이 되며,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성경은 분노를 삼가고 마음을 지키도록 경고한다(잠 14:17, 29, 16:32, 27:4, 29:22). 그러나 불의를 향한 분노, 즉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의로운 분노는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출 32:19. 레 10:16, 민 31:14, 삼하 12:5, 왕하 13:19, 요 11:33, 38, 행 17:16). 성경에는 하나님의 분노(진노)를 자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분노하시는데, 이는 죄인을 파멸하기 위한 분노가 아니라 곁길로 나가는 자식을 경책하는 부모의 심정, 곧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볼 수 있다(신 6:15, 시 79:5, 막 3:5). 여기서 사람의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에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반면에(약 1:20)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을 이룬다(롬 1:18).>
[라이프성경사전] “분노는 원어(‘아프’)로 ‘코로 숨을 내쉬다’는 뜻인데, 인간의 내면(內面)에서 극심한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일어나 거친 숨을 거듭 몰아 내쉬는 상태를 뜻하는 표현이다. 히브리어로는 ‘코가 불타올랐다’로 표현된다(창 30:2, 출 4:14).”
분노의 종류 (세 가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존 플라벨(1628-1691, 내 마음 다스리기 Saint Indeed, 미션월드)은 세 종류의 분노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분노, 거룩한 분노, 악한 분노입니다. ‘자연스러운 분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분노로서 죄라기보다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잘 조절하여 분을 내면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 촉발된 의분으로서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두 가지 경우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악한 나라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의로 압제한 애굽에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시편 78:43-53 참고).
다른 하나는 배은망덕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우상들을 열렬히 숭배했으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힘없는 서민들을 괴롭히고 압제했습니다. 이방인들보다 더 악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방 나라들인 앗수르와 바벨론을 불러 징계하셨습니다(왕하 23:26-27).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몇 번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크게 화를 내셨고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도 엄중하게 책망하며 저주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길을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선 베드로에게 정신이 버쩍 들도록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마 16:23).
신앙의 선배들도 분노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 두 돌판을 받고 하산했을 때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절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로 던지며 분노했습니다(출 32:19). 다윗도 소년시절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능욕하고 조롱하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에게 분노하여 외쳤습니다(삼상 17:45-47). 느헤미야도 가난한 동족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을 놓아 자기 배를 불리는 귀족들과 민장들에게 분노했습니다(느 5:6-7).
이처럼 불의에 대한 분노, 선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노입니다. 즉 거룩한 의분입니다.
분노의 종류 가운데 또 한 가지, ‘악한 분노’는 도에 지나친 분노로서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과격한 분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가 악으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 34장에 나오는 야곱의 두 아들, 레위와 시므온의 복수극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으로 외출 나갔는데 그때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이 디나를 강간하고는 연모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디나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몰이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야곱의 집에 왔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들에서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분노했습니다(34:7). 디나를 자기 아들과 결혼하게 해주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크게 보답하겠다고 제안하는 하몰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나서서 말합니다. 우리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통혼할 수 없으니 너희 족속의 모든 남자가 우리처럼 할례를 받아야 통혼이 가능하다고 속였습니다. 세겜의 남자들이 할레를 행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야곱의 두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성읍을 기습하여 칼로 세겜 족속의 남자들을 모조리 살해합니다. 마음에 품은 분노가 폭발하여 대 복수극을 낳은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야곱은 가나안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 힘을 합쳐 자기 가족들을 응징할까봐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면 이웃과 자신을 해치는 분노로 변질됩니다.
분노의 원인 (세 가지)
신원하 교수는 그의 책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에서 분노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상처와 좌절된 욕구와 교만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첫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올린 제사에 믿음이 결여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아벨이 드린 제사 때문에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다고 오해했습니다. 그 오해가 깊어져 마음에 새겨진 큰 상처와 피해의식으로 분노하다가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살해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근 10년간 다윗을 죽이려고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습니다. 사울이 시기심과 분노의 노예가 된 것은 그가 바랐던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욕망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칭찬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아야 할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칭찬을 다윗이 받는 것을 보고는 다윗에게 분노를 쏟아 부었습니다.
교만한 자일수록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크게 모독을 당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고 앙갚음을 하려고 합니다.
과도한(악한) 분노의 결과 (세 가지)
1) 과도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드러내지 못합니다(약 1:20).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유함과 인내로 이끈 지도자 모세가 한순간을 참지 못하여 분을 내었습니다. 므리바 물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외쳤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리고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반석에서 큰 물이 솟아나서 회중과 가축들이 흡족히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노한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 20:12).
2) 과도한 분노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성경은 성내는 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어 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엡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앞서 언급했던 존 플라벨은 <내 마음 다스리기>라는 책에서(p.126), “사탄은 불만이 가득하고 분노하는 영이기 때문에 화를 품고 있는 마음에 머물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환경 가운데 하나는 악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마음입니다.
숯불이 화로 안에 있을 때에는 안전하고 유익하지만, 화로가 넘어져 숯불이 방안에 쏟아지는 순간, 불길이 방바닥을 태우고 금방 집 전체로 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화로를 쓰러뜨리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의 숯불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서 “악한 분노”가 터져 나오려고 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휘저어 분노의 불길을 거세게 지피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거기서 지나쳐 마음의 화로를 쓰러뜨리면 분노가 밖으로 분출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춤을 춥니다. 삽시간에 주변이 분노의 불바다가 됩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큰 해를 입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죄와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가 있지만 그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조차도 급히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성급하게 화를 내면 실수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로 인해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급히 성을 내면 관계가 깨어지고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파괴될 가능성이 큽니다.
3) 과도한 분노는 자신을 파괴합니다.
분노는 부메랑처럼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박힙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몸도 상하고 마음의 병이 들 가능성이 큽니다. 영적으로도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살았다 하나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분노의 극복
사회심리학자들은 분노를 처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들을 제시합니다. 화가 난 원인, 화를 표출한 방식, 그로 인한 변화 등을 꼼꼼히 조사하고 기록해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인지치료라고 합니다.
성경은 분노가 폭발하려고 할 때 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라고 권합니다.
(시 37:7-8)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가장 좋기는 분노의 강렬한 에너지를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자기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으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 처방을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라.
오늘 봉독한 야고보서 본문에서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말씀을 받으라, 말씀을 들여다보라, 말씀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약 1:21절에서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환영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거듭 환영하라(기쁘게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말씀 속에 푹 잠겨 살라는 뜻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말씀을 기쁘게 환영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약 1:25절에서는 말씀을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여기 들여다본다는 뜻은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굽혀 본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들여다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세 가지를 야고보는 말씀합니다(19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라는 뜻은 말씀을 듣는 일에 부지런 하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준행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경청하라는 뜻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기에 앞서서 먼저 배우기에 힘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약 3: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는 듣는 것보다 말하는데 얼마나 조급한지 모릅니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중에 말을 가로채어 자기 생각을 쏟아 붓기에 아주 바쁩니다. 그로 인해 관계가 나빠질 때가 종종 생깁니다.
(잠 10:19)『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뜻은 쉽게 흥분하거나 화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전 7:9)『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잠 14:17)『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어떤 과학자가 자신의 집 연구실에서 오랜 기간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험이 거의 끝나갈 때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과학자의 어머니가 작업실에 잠시 들어갔다가 실험 도구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과학자는 연구실의 모습을 보고 몸이 굳었습니다. 그 동안의 실험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실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옆에는 과학자의 어머니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서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바라보던 과학자는 바깥으로 나갔다가 5분 후에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과학자의 표정은 온화했고 다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가 찾아와 위로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5분 동안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네."
자신의 업적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험의 좋은 결과보다도 부모공경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더 우선적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잠깐 묵상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면 화를 삭일 수 있습니다.
급히 말하고 싶을 때 더욱이 화가 치밀어오를 때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은 물론 형제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약 1:22절과 25절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추적하는 사울에게 10년 동안 인내와 온유함으로 대했습니다. 요셉도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최선을 다해 보살폈습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순교했습니다. 남아공의 성공회 주교, 데스몬드 투투는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의 주모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분노하는 흑인 군중들에게 용서 없이는 결코 남아공의 매래가 없다고 외치면서 화해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에게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이처럼 분노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라.
앞서 언급했던 존 플라벨은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입을 급히 열지 말고, 성급하게 칼을 빼지 말고, 화로를 발로 차 넘어뜨리지 말고, 그저 엎드리십시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분함과 원통함에 대해 하소연하고 소리 내어 우십시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바라보시며, 내게 귀를 기울이시는, 정말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고 있는 엘가나의 첫째 부인 한나가 아이를 낳은 둘째 부인 브닌나로부터 멸시를 당했을 때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그 분함과 원통함을 극복했습니다. 결국 한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남자들에게 기도가 더더욱 필요합니다.
(딤전 2:8)『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남자들에게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분노와 다툼입니다. 졸장부들의 특성은 조그만 일에도 분을 내고 싸웁니다. 하지만 대장부들은 좀처럼 분을 내지 않습니다. 시시한 일 따위로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열정 없이 무덤덤한 것은 아닙니다. 열정이 있어도 가볍지 않고 묵직합니다. 따뜻하면서도 듬직한 영성의 소유자가 바로 분노와 다툼을 극복하는 믿음의 대장부들입니다.
그런데 묵직한 대장부의 영성이 기도에서 나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교회의 형제들이 시기와 분노와 다툼의 시대적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 가장 주력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야 믿음의 대장부가 됩니다.
기도하되, “각처”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남자들이 우선적으로 주력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야 자기는 물론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되,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그 당시 성도들의 기도하는 자세 중의 하나였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기도하는 겉모습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면의 자세를 중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의 풍조를 거슬러 살겠다는 결단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도와주시기를 겸손하게 간구하는 내적 자세를 뜻합니다.
남자 교우들이 깨어 일어나 거룩한 손을 들고 각처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대장부가 됩니다. 그래야 분노와 다툼을 극복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과 교회와 조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들을 보면 다윗이 기도로 분노를 극복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시 55편 참고). 다윗은 기도를 통해 믿음의 대장부가 되었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 데렉 쇼빈이 비무장 흑인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강압적으로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목을 짓눌러 질식사했는데 그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번지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과 방화와 상점 약탈 등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에 플로이드가 사망한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오랜 기간 사역해 온 존 파이퍼 목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문을 발표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미니애폴리스에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교회, 정치, 스포츠, 음악, 영화, 산업, 미디어, 천국, 지옥에서 모든 이름 위에 당신의 이름만이 존귀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
우리는 이 도시(미니애폴리스)를 사랑합니다. ... 이 도시의 사람들, 오래 전에 스웨덴에서 온 이민자로부터 소말리아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 흑인과 아시안, 남미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 우리는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이 이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2:11). 그래서 우리는 ... 묻습니다. 주님, 무엇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 우리의 마음을 열어 당신의 답을 듣게 하소서.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7).’ 그렇습니다. 주님, 이것이 미니애폴리스를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의 친지들을 위로해주십시오. 8분 46초 동안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렀던 경찰관 데렉 쇼빈을 위해 기도합니다. 회개의 긍휼을 구하게 하시고 정의의 심판이 내려지게 해주십시오. 그 옆에서 동료의 가혹행위를 방치한 3명의 경찰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슬픔과 공포가 정의로운 회한으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그 심각한 살인과 비겁한 공모가 적합한 형벌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
경찰서장 메다리아 애러돈도, 카운티 검사 미이크 프리맨, 시장 제이콥 프레이, 주지사 팀 윌즈 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이 도시의 리더들로 하여금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게 하시며 힘들거나 위험한 상황에도 진리를 위해 굳건히 서게 해주십시오. ... 어떤 권력이나 특권들로 인해 진리가 숨겨지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진실이 특권층이나 부자나 힘 있는 자나 가난한 자 등 어느 누구라도 어둠의 불의로부터 정의의 빛으로 인도되게 해주십시오. 증오하는 자와 쓴 뿌리를 간직한 자, 적개심으로 충만한 자와 참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고린도전서 4:4)’를 보게 하시옵소서. 그 복음의 광채로 인해 교만과 인종주의와 이기심의 어두움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그들 모두 상한 심령을 품게 해주십시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주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51:17). 미니애폴리스가 진리와 의의 길에 기초를 둔 화해의 기적과 영원히 지속될 조화로움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비이러스의 재앙으로 인해 미국에서 10만 명 이상이 죽었고 지금도 매일 20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우리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고 이제는 폭동으로 인해 평생 일해야 할 직장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어 우리의 일상을 산산조각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슬픔이 우리 죄를 경감시키지 않게 하시되 우리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부활하신 구주,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오 예수님, 이를 위해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절망적이고 적개심 강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고 서로 간에도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 주님, 이 도시 미니애폴리스에서 그 일을 행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마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게 기도를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몰았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분노를 잠재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라.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씀대로 죄는 미워해야 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죄인을 살릴 수 있습니다. 형제를 향해 화를 낼 때에도 형제와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지 않고 형제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도 분노를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신앙의 친구들과 선배들을 우리 주위에 두셔서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 즉 극심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달아날 때 사울의 아들이요 자신의 진실한 친구였던 요나단과 먼저 상의함으로써 다윗은 요나단의 적극적인 격려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에게 큰 힘이 되어 그 이후 10년간의 역경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딤후 2:22-26)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4.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에게 찾아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라.
말씀과 기도와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분노가 가라앉았으면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와 화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분노를 제대로 극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입니다. 소통의 효과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가 "I-Massage 전달법"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때 나는 아주 슬펐습니다. 크게 놀랐습니다. 가슴이 정말 아팠습니다. 여러 날 밤을 잠을 설쳤습니다. 지금도 슬픔과 고통의 쓰라린 앙금이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편도 공격적인 언행으로 반응하는 대신에 자신의 감정상태를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써 상대방과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마음에 쌓인 울분이 해소되고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라, 기도하라, 신앙의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라,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라.”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종합하면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가 그 품에 안기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예수님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마 26:52-54)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분노를 극복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분노를 안고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 분노를 분출함으로써 가족과 이웃과 자신까지 해치는 이들을 품고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함으로써 평화를 확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 424장
요약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존 플라벨은 세 종류의 분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분노, 거룩한 분노, 악한 분노입니다. ‘자연스러운 분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분노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잘 조절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 촉발된 의분으로서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입니다(시편 78:43~53). 선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이러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악한 분노’는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과격한 분노입니다. 분노는 악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창 34장)
신원하 교수는 분노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상처’와 ‘좌절된 욕구’와 ‘교만’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일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 분노하여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백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을 보고는 다윗에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도한 분노(악한 분노)의 결과는 어떨까요? 첫째, 과도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드러내지 못합니다(20절).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가 한순간을 참지 못하여 분을 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민 20:12). 둘째, 과도한 분노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성내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어 죄로 발전하게 합니다(엡 4:26~27). 성급하게 화를 내어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을 내면 관계가 깨어지고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셋째, 과도한 분노는 자신을 파괴합니다. 분노가 지속되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에 병이 들고, 영적으로도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분노를 멈출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려면 말씀을 항상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21절). 말씀에 푹 잠겨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25절).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준행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경청하라는 뜻입니다(19절). 그리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22, 25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에게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이처럼 분노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분노와 다툼의 시대적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 주력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딤전 2:8). 교회와 가정, 일터에서 남자들이 우선적으로 기도에 주력하면 자기는 물론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며 살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내적 자세를 뜻합니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가정과 교회와 조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로 분노를 극복했습니다(시 55편). 기도를 통해 믿음의 대장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이처럼 기도야말로 분노를 잠재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셋째, 신앙의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는 것으로도 분노를 극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신앙의 친구들과 선배들을 우리 주위에 두셔서 그들에게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딤후 2:22~26).
넷째,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에게 찾아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상담을 통해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면,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와 화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입니다. 소통의 효과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가 ‘I-Massage 전달법’, 쉽게 말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상대편도 자신의 감정상태를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써 상대방과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마음에 쌓인 울분이 해소되고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마 11:28~30; 26:52~54).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분노를 극복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분노를 안고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 분노를 분출함으로써 가족과 이웃과 자신까지 해치는 이들을 품고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함으로써 평화를 확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절제(자제)의 비결
약 1:19 / 김우생 목사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파탄시킨 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한 예를 사무엘상 18장 10-11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그를 위하여 있는 다윗을 향하여 질투하고 그를 향하여 격정을 나타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보게 되면 악신이 사울에게 내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평소같이 사울을 위하여 손으로 수금을 탔습니다. 그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자기에게 독백을 합니다. 어느 때는 자기가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유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사울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창을 던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두 번 다윗이 민첩하게 피한 사실을 봅니다. 사울은 절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준수하고 건장한 지도자상으로서 위대해질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쓰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을 비극적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사무엘상 24장 1-15절 말씀 속에서 다윗이 자신을 어떻게 자제를 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엔게디 황무지에서 일어난 일인데 다윗이 굴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깊은 곳에 피하여 있었습니다. 사울은 3천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의 격정대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찾다가 쉬려고 들어온 굴은 바로 다윗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게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인 사울이 굴속에 들어왔으므로 단칼로 없앨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이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의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라고 다윗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이와 같이 부추기는 그들의 감정의 말을 듣고 사울을 죽였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벱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절제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또한 다윗은 원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옷자락을 벤 일로 그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가 결코 실수와 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리의 사람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감정대로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야고보는 우리가 어떻게 절제할 것인가,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인 절제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비결을 말하고 있는데,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듣기는 속히 하고"
첫째로 야고보는 절제하는 사람의 특징은 듣기를 속히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리요법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제가 있는 사람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들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30분, 심지어는 2시간 동안 마냥 들어주는 것이 정신적인 문제를 돕고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왜 문제가 생깁니까? 한쪽에서는 말만 하고 한쪽에서는 들어주지 않는다든지, 또는 서로간에 말만 한다든지, 서로간에 들어주지는 않기 때문에 가정에 파탄이 일어납니다. 잘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에 있어서도 지대한 낭비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육과 훈련은 잘 듣는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잘 들을 줄 모르면 훈련이 없고 교육이 없으며 자제와 절제가 없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일 때 진정한 예배가 되지만, 듣지 않을 때는 마당만 밟고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라"고 말하는데, 특별히 하나님 말씀을 속히 들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듣고 또한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이 있습니다. 시작은 들음에서 일어납니다. 즉 듣기 시작할 때 믿음이 생기게 되며 소망이 있게 됩니다. 듣지 않는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들을 줄 알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에서나 상담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듣는 것입니다. 서로간에 듣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생의 비극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말씀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는 감정의 내에서만 받아들이기에 사실상 듣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 속에 변화가 없고 쓰이지 않게 되므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4장 14절과 19절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며 매번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있는 교회들에게 말씀하실 때도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들음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들을 줄 알 때 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은 들을 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때 말씀이 그 안에 와서 쌓이게 됩니다. 그러할 때 그는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Ⅱ. "말하기는 더디 하며"
두 번째로 야고보는 절제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 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대 철인 제노 (Zeno)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있는 것은 말하기 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해야 함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거친 말을 마구 합니다. 잠언 21장 23절과 잠언 10장 19절, 그리고 잠언 17장 27-28절에서는 말을 절제할 때 얻게 되는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속히 듣고 말씀이 다스리게 하면 확실하고 가치 있는 것만을 말하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더디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6-37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은 그가 한 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말을 해보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말로 나타내는 것, 즉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의로운 사람인가, 정말로 절제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속에 있는 것이 말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10분간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그의 전 생활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Ⅲ. "성내기도 더디 하라"
세 번째로 야고보는 절제하는 사람의 특징은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서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성내는 것,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우리가 전혀 분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을 낼 수 있는 정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노하려면 예수님처럼 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 즉 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 더럽히는 이들을 향하여 성을 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노하시는 중에서도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감정의 폭발과 어떤 격노가 아니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이 오래가면 바로 그것이 죄가 됩니다. 건전한 생각을 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균형있는 결정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분노는 정신 이상의 직전이라고 합니다. 분노할 때 비합리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세의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인도자로서 온유함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물을 원하면서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로 인해 낙심케 되고 격노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반석을 치라고 했지만, 그 다음에는 분명 반석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윌 목사님은 "50년의 사역을 5분만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 사람 앞에서 나타내는 극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그처럼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속히 들으면 성내기도 더디 합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심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절제가 있고 거룩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노하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노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순한 대답도 해야하지만, 과격한 말로 다른 사람을 격동시키는 일을 해서도 안됩니다. 잠언 25장 28절에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무너지면 폐허가 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도성이 되는 것과 같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삶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말에 있어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할 때 그분의 삶이 세워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체를 주님께 드려서 그분께서 지배하시도록 하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자신을 드려야겠습니다.
화는 낼지언정 죄는 짓지 말라
약 1:19-20 / 엄기호 목사
여러분은 하루에 화를 몇 번이나 내십니까? 혹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되면, 하루에 몇 번이나 화를 내는지 자문해보기 바랍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화는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일상에서 빚어지는 크고 작은 일이 원인이 됩니다. 출근 시간 전철 안에서, 매일 부딪치는 직장 상사에게서, 혹은 옆 사람의 말 한마디나 사소한 행동 한 가지가 화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시로 일어나는 화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행복한 감정을 누릴 겨를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화를 다스린다는 것은 생활에서 놓쳤던 작은 행복들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면서 동시에 불행을 차단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특히 믿는 성도들에게는 감정의 절제가 영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화’를 다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화’로 인해 인생에 오점을 남긴 성경인물 중에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산 했을 때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며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깨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순수하고 깨끗한 십계명의 두 돌판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40일간의 금식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출 34:1~5, 20-25 이하).
우리 역시 경험을 통해 화를 내는 것이 좋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화가 대부분 어리석은 결과를 낳고, 또 죄와 연결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에 항상 화를 다스리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화를 다스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쉽게 뗄 수 없는 화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화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화’가 치미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라는 책에도 보면 화는 신체 장기와 같아 함부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며, 마음의 상처에서 생겨 끝내 습관이 되고 마는 것으로, 화는 곧 '마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화를 내는 것과 죄를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는 내면서도 죄는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화를 내는 것에 대해 부정하기 보다는 화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게다가 성경에는 하나님도 ‘진노의 하나님’, 혹은 ‘분노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거룩한 일로 분을 냈던 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1:13).
우리는 거룩한 일과 정의를 위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화를 나쁜 것, 혹은 악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억제할 것이 아니라 그 화의 근원이 우리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스스로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화’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격이 있어서 비록 성경에서 ‘화 내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화를 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화가 죄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오늘 본문에는 분명히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고 했습니다.
이는 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화를 낼 때, 사람들은 대부분 분별이 없어져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좋던 관계를 원수의 관계로 만들기도 합니다.
옛말에도 칼로 받은 상처는 고치기 쉽지만 말로 받은 상처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편 37편 8절에서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고 했고, 잠언 15장 1절에서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케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할 때 생기는 갈등에 화를 내는 것,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해서 타인에게 분을 발하고 싸움을 건다거나, 화가 난다고 폭언을 함으로써 타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화가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되게 해서도 안 됩니다. 비록 어떤 상황에서 화를 냈다고 해도, 거기에서 멈춰야지 다른 곳으로 그 화를 전가시켜서는 안 됩니다.
요즘 뉴스의 사건과 사고를 보면 홧김에 이혼했다거나, 홧김에 남의 차에 불을 지르고, 홧김에 흉기를 휘둘렀다는 등의 보도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보도들은 화가 단순한 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죄와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잠언 16장 2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살면서 생길 수 있는 사소한 일들에 화를 내는 것은 결국 화목을 파괴하고 인간의 마음과 관계를 다시 미움과 고통으로 이끄는 무서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들에 화를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 사탄에게 틈을 보이는 일이라는 것이며,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좇아내는 것이고, 스스로 죄의 길에 한걸음 다가간 것임을 기억하면서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화를 극복하려면
그러면 어떻게 화를 극복 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 방법은 화를 드러내기 전에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심호흡을 크게 몇 차례 한다든지, 세수나 양치질을 하거나, 묵상기도를 하는 것도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화를 돋우는 상황이나 상대방과 함께 있지 않고 잠시 피하는 것도 화를 극복할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웃긴다”라고 생각하며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좋다, 까짓 것”이라는 큰마음으로 문제를 보면 세상에 화를 낼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만사 “세옹지마”입니다.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면 화를 낼 수밖에 없어 보이는 상황도 화를 내지 않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화를 극복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화를 이겨내도록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화가 정당한 것이건, 잘못된 것이건 간에 우리는 모두 자신의 화와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를 이기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처럼 화를 내야할 때를 오히려 ‘묵은 땅을 갈고(렘 4:3), 굳은 마음을 제하는’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가 화를 낼 때 받는 가장 큰 손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앞서 바울이 말했듯(엡 4:26~27) 화를 내는 것은 마귀가 역사 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화는 하나님의 나라인 ‘의와 희락과 화평의 축복’을 파괴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과 초조를 가져다주며, 세상적인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본인은 물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통과 괴로움을 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화를 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화를 내는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화를 극복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세입니다.
이에 성령의 도움으로 지혜롭게 화를 극복하는 성도가 됩시다. 화를 내야 할 때도, 선으로 악한 상황을 이기고, 믿음으로 화를 극복함으로써 죄가 우리의 문 앞에 엎드려있지 못하게 하는 성도가 됩시다.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 1:19-21 / 박상훈 목사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임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이미 18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난 존재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내어버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한 심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지금 이 말씀을 나를 위해서 주시는구나!" 늘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복있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해서 옥토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양의 격언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Any fool can count the seeds in an apple, but only God can count apples in a seed(아무리 바보라도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의 수는 쉽게 셀 수가 있다. 그러나 씨앗 속에 있는 사과의 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세실 수 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뜻입니다.
사과를 쪼개봅니다. 그 속에 기껏해야 10개 이내의 씨앗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라도 쉽게 그 수를 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땅에 심습니다. 자라서 나무가 됩니다. 수백 개, 수천 개의 사과가 달립니다. 그것도 매년 그만큼 많은 사과가 달리게 됩니다. 또 거기에서 나오는 씨앗을 땅에 심으면 나무가 되고, 거기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과가 달리게 됩니다. 그 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세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과라고 하면 대구가 유명합니다. 대구의 근교는 과수원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구에 사과나무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 100년 전에 스코틀랜드의 선교사님 한 분이 대구로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대구의 기후풍토가 자기가 살고 있는 고향 스코틀랜드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과를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 뒤뜰에 사과나무 씨앗을 몇 개 심었습니다. 그 때 그 선교사님은 자기 손바닥에 있는 사과씨앗의 수를 쉽게 셀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 근처가 사과나무로 빽빽이 둘러싸일 것을 미리 예측하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 그 분이 심었던 몇 개의 씨앗을 통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과가 열렸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과가 열릴 것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내 수중에 있는 사과씨앗 몇 알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가 당하는 화를 복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잃어버린 사과씨앗 몇 개 대신에 엄청난 수의 축복과 열매를 안겨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유한한 인간의 힘, 인간의 재주, 인간의 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또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셨습니까? 보잘 것 없는 내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일이 더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으로 내 문제를 쉽게 풀어주실 것입니다.
야곱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났습니다. 20년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금의환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큰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군사 사백 명을 끌고 그를 치기 위해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제야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가 모아놓은 모든 것들이 쓸데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 동안 욕심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세상적인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되기는 되었습니다. 자녀에 대한 욕심도 남달리 많았습니다. 큰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지경에 처했습니다.
야곱이 그 때 그 큰 시험을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그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인간적인 욕심들을 깨끗하게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얍복나루에 홀로 남았습니다. 자기 가족들과 가축들을 모두 먼저 건네 보내고, 자기는 밤새도록 하나님과 1:1로 대면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야곱은 그날 밤에 자기의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사람의 환도뼈에서 인간적인 힘이 나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육적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야곱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더러운 욕심들을 다 포기하고 내어버릴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났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보는 순간 뛰어와서 그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누가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누가 에서의 마음 속에 있는 동생 야곱에 대한 분노를 눈 녹듯이 녹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까? 나는 이겨낼 수가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지혜, 사랑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그리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더욱더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서 모든 어려운 문제들도 해결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함과 같이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말씀을 늘 가까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이 소생하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것이 19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지금 야고보는 우리가 잘 아는 속담 같은 말을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귀는 두 개로 만드시고 입은 하나만 만드셨습니까? 많이 듣고 말은 적게 하라는 것입니다. 귓구멍은 늘 열려 있습니다. 입은 평소에 다물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것입니다. 또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주장대로 되지 않는다고 쉽게 성을 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와의 인간적인 관계에서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듣기는 속히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용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새 힘을 공급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형통합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정할 수가 있습니다. 악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모든 문제가 말씀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처해 있는 어려운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아울러서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에게는 물론 예수님의 생각과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지혜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무한하십니다. 어느 길이 내게 좋은 길인지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꺾고서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기도는 내 마음에 품은 소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되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신 길이 괴롭다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잠시 잠깐 동안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성내면서 돌을 들어 하나님의 종 모세를 치려고까지 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했는데,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성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축복의 땅을 밟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축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그러니 힘들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성내지 맙시다.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순결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21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 속에 들어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화랑에 전시가 되었습니다. 때를 맞춰서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는 친구들을 먼저 그림들 앞으로 인도하지 않고, 지하실로 그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음료수를 간단히 대접하고 난 뒤에 갑자기 불을 꺼버렸습니다. 지하실에 불을 꺼버렸으니까 얼마나 캄캄했겠습니까? 놀란 친구들을 향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10분 동안만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세."
그는 10분 뒤에 다시 불을 켰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인가?"
그 때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나? 자네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보느라고 눈이 너무 타락했어. 그냥 그대로는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네. 그러니 캄캄한 곳에서 우선 눈을 깨끗하게 씻고 난 뒤에야 내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을걸세."
마음과 눈이 깨끗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림들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 속에 더러운 욕망들, 세상적인 생각들로 가득차 있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 속에 있는 인간적인 더러운 욕심들을 깨끗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생각과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념 등을 다 떨쳐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 제대로 심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설교자와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감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 설교자가 아무리 천사의 말로 은혜로운 말씀을 준비해서 전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이 열리겠습니까? 그가 은혜를 받겠습니까?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섰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던 공회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이 은혜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를 치면서 스데반이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성밖으로 내쳤습니다. 그리고 돌로 때려죽였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나쁜 말을 했습니까? 바르지 못한 말을 했습니까? 그는 그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회원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고정관념, 선입견 등이 가득차 있으니까 아무리 스데반이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도 그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앗들은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땅, 옥토가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 제대로 심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랍비가 자기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진리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우리는 쉽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단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진리는 저 길바닥에 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입니까?"
랍비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왜 세상 사람들은 그 흔한 진리를 쉽게 터득하지 못합니까?"
그 때 랍비는 중요한 일깨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얼마든지 진리를 쉽게 주울 수가 있을 텐데, 마음이 교만하고 뻣뻣해서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터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더러운 욕심들, 인간적인 욕망, 교만한 생각, 뻣뻣한 마음, 고정관념, 선입견 등이 없어지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말씀이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내가 기꺼이 받겠습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1절 하반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때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것이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성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람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신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살이 썩어 들어갑니다.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에서 기르고 있는 여종 하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조국 이스라엘에 가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데, 그에게만 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종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왔습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엘리사가 뛰어나와서 자기를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을 내비치질 않았습니다. 그저 사환을 보내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전갈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자기는 큰 대국의 위대한 장군이니까 이곳까지 자기가 찾아왔으면 빨리 나와서 기도라도 해 주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나아만 장군은 그의 자존심 때문에 종들에게 그냥 돌아가자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만약 나아만 장군이 성을 내면서 그냥 돌아가 버렸다면 그는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종들이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었습니다. 그리할 때 그의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성내고 마음의 문을 닫아놓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우리는 그저 온유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을 때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일을 당하셨습니까?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이런저런 일로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차 있습니까?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른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심령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들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식사 때가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습니다. 고요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구의 마음에 평안이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괜히 분주해서 마음 속에 이 걱정 저 걱정, 염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급기야 마르다는 속이 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아마도 마르다는 예수님이 이렇게 답변해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얘, 마리아야. 네 언니가 혼자서 수고하고 있는데 가서 도와주어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눅10:41∼42의 말씀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 섭섭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기뻤을 것입니다. 말씀을 귀히 여기고,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 심령에 평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고보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사는 존재로 삼아주셨으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욕심, 교만한 생각, 미움, 증오, 원한 등이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까 이 시간에 바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구나!"라는 온유한 마음가짐으로 말씀을 받을 때, 영혼구원의 역사와 말씀으로 승리하는 체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누가 말씀을 전하든지 간에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늘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길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높이는 길입니다. 늘 말씀을 귀히 여기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모든 문제를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령의 평안함과 영혼의 소생함을 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약 1:19-27 / 안병호 목사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누리는 참된 축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데서 오는 축복이다. 신앙 생활을 하지만 말씀을 듣는 일과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의외로 오늘날 교회를 다닌 사람들 중에 말씀에 대해서 도무지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일에 복이 있으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말씀을 듣고 행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1. 말씀을 들으라
듣기는 속히 하라.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입을 벌리는 것 보다 귀를 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의 응답이 있기 전에 먼저 들려져야 한다.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은 자신이 배워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태도를 간직하라는 말이다. 자신의 무지나 얕은 지식을 내 뱉기만 하면 주님의 지혜를 흡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요즈음 듣기를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설교가 자꾸 짧아진다. 찬양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가고 있다. 찬양은 두시간 설교는 10분으로 예배가 끝나는 모임이 유행이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 든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듣는 훈련이 제대로 안되면 영적 성장이 둔화되고 주님과의 교제에 금이 생긴다. 이런 점에서 말씀을 듣는 것보다 입으로 찬양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런 풍조는 참으로 미래의 교회에 있어서 큰 위험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용기 있는 목사는 참으로 말씀 중심의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큰 교회에서의 청빙을 거절하고 지하실을 빌려서 말씀 중심의 교회를 개척했다. 매주 성경 한 장씩을 풀어서 설교를 하는데 약 두시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용기이다. 그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행복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들지는 않는 것 같다. 정말 말씀을 듣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말하기는 더디 하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19절)
어떤 사람은 도무지 말을 하지 않아 답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말을 너무 많이 하여 깊이가 없는 사람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은 말을 더디 하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성내기도 더디하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19절)
잘 듣지 않거나 급히 말을 하면 화가 나기 쉽다. 성내는 일은 위험하다. 비록 의로운 분노라도 자제해야 한다. 의로운 분노도 쉽사리 악으로 발전되어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성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0절)
분노는 신뢰할 것이 못되고 의롭지도 않다. 사람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실샐활에서 공평하고도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바르게 행하는 것이며(미가 6:8), 사람의 성내는 것과 변덕스러움과 고집은 하나님의 원하심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다. 오직 조용하고 온유한 마음만이 경건을 낳는다. 한국 사람들의 큰 약점은 쉽게 분 낸다는 것이다. 조금만 참고 감정을 죽이고 합리적인 길을 찾으면 얼마든지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을텐데 감정이 앞서 싸우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얕잡아보며 하는 말이 한국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아주 쉽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슬 감정을 상하는 말을 하면 쉽게 화를 내고 화를 내도록 좀 기다리다 보면 자기 풀에 죽어서 결국 모든 것을 양보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회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느라 아무 일도 못한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르는 바른 자세이다. 이런 자세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21절)
'더러움'은 암처럼 영혼을 좀먹는 투기, 정욕, 악덕과 같은 죄의 오염성을 의미한다. ?넘치는 악?은 인간의 마음속에 제거 되어야할 악이 많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이런 것을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힘들다.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라고 하였다. 마음에 심긴도는 생명의 말씀 곧 복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전파된 말씀을 마음에 간직함을 의미한다. 설교자들에 의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받아야 하는가? 온유한 마음, 곧 겸손한 마음으로 받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교만한 자세로 부인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2. 말씀대로 행하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절)
'너희는' (기네스세)라는 말은 ?너희는 ....임을 확신하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듣는자'(아크로아 타이)란 말은 정기적으로 강의를 들었으나 참된 제자가 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가르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음으로 계속 들을 수 있으나 단지 듣는데 그치고 말씀이 행함으로 성취되도록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뜻이 이 말 속에 담겨져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 위에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위에 축복하셨다(눅 11:28).
진정으로 말씀을 듣는 자는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만약에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많이 있는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23-24절)
거울을 보고나서 자기 얼굴을 기억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을 곧 잊어 버림 과 같이 아무리 감명을 깊이 받은 말씀도 곧 잊어 버린다. 우리가 들은 말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가? 나는 성도들을 만나면 지난 주일날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지요? 하고 물는다. 거의가 대답을 하지 못한다. 지난 주일 설교말씀 중 기억나는 말씀이 있으면 말씀해 보라고해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왜 그런가?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5절)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은 복음이다. 곧 신구약 성경이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율법을 실행하는 자라고 하였다. '들여다 보고 있는 자'란 무슨 뜻인가? 자세히 살펴 보고 그 곁에 거한 사람을 의미한다(one who looks intently and abides by it). 이런 사람은 율법을 잊어 버릴 수 없다. 그 율법대로 행하게 된다. 그 행함은 바로 축복을 내포하고 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는 곁코 행함으로 나타나며 그리할 때 큰 복을 받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 : 17)고 하였다.
비록 우리의 신앙이 어리다고 할지라도 항상 말씀을 자세히 듣고 읽어서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할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계속 자라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속이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신앙 성장이 없고 은혜도 없다.
3. 특별히 이것들을 행하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26-27절)
참된 경건을 가져오기 위하여 행해야 할 기본적인 일 세가지를 야고보는 제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윤리적인 반응을 측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늠자이다. 사실 이 세가지 측면들은 야고보서의 전체에서 행함의 기본 요소이다. 이 세가지 기본적인 일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 혀를 통제하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절)
여기서 혀가 지닌 구체적인 문제는 남을 나쁘게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높이는 이기적인 교만한 정신이다. 욕설, 거짓말, 추잡한 농담, 독설, 뽐내는 자랑 등은 교만한 정신과 경건치 못한 마음의 표출인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통제되지 않고 함부로 내 뱉는 언사는 모두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다. 그 악한 말버릇을 가지고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이며 그의 경건은 헛 것이다. 성화의 한 증거는 우리의 혀가 통제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해 갱신된 마음에 가득찬 은혜들이 더욱 많이 발언되는 것이다. 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둘째, 긍휼을 베풀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27절)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행해야 할 일은 고아와 과부와 환난 중에 있는 자를 돌보는 일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고아와 과부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당시 고아들은 거지 생활을 하며 사는 버림 받은 자들이었다. 누구도 공식적으로 돌봐주거나 입양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직업도 없고 재산도 없고 힘도 없이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아와 과부는 오늘날의 경우와 다르다. 오늘날 아무리 고아라도 어려서는 고아원에서 길러 주고 학교도 보내준다. 그러므로 마음만 잘 먹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과부들도 오히려 생활력이 강해서 더 부유하게 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과부와 고아들은 참으로 누가 특별히 도와 주는 사람이 없이는 생존 자체에 위험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교회의 이와 같은 사랑과 긍휼의 사역은 여러 방면에서 수행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연로한 성도들을 찾아가서 도울 수 있으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집의 자녀를 양육하거나 입양 시킬 수 있으며, 외롭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 친구가 되어 주거나 후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환난당한 자를 돌보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들어내 보여준 방법이다.
셋째, 세속에 물들지 말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을 알면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서 주님과 연합되는 기쁨과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실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에 헌신해야 하며 말씀에 헌신해야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구별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이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싸워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참신앙과 거짓신앙
약 1:19-27 / 이종윤 목사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습니다. 종교신앙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신앙의 진,위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Ⅰ. 거짓 신앙
①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26절에서는 ‘경건’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종교’ 또는 ‘신앙’으로 번역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종교적, 신앙적)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신앙, 종교)은 헛것이라”(약1:26). 즉 26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내용, 영성, 확신도 없는 형식, 위선, 거짓으로 덧입힌 종교습관은 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②자기 절재를 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 입으로 자기 신앙을 배신하는 결과를 자초하게 됩니다(마12:34). 즉 더러운 말, 거짓말, 악한 말, 남을 해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들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그 사람의 인격, 특히 신앙과 중요한 연관이 있습니다(약3:2). 말을 절재 할 수 없는 자는 바른 신앙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말에 실수를 범하지 아니하려면 진리의 말씀(약1:18)을 듣기를 애써야 하며, 말하기를 조심(자기에 대한 자랑, 자기에 대한 과장, 남을 경멸, 공격적으로 비난)하고, 성내기를 더디 하여야 합니다(약1:19). 특히 주님에 대한 말조심(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햐 함)을 해야 합니다. ③열매 없는 신앙이 거짓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26절에서는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성도에게 있어서 순종의 열배가 없는 제물은 의미가 없으며 영적인 헌신이 없는 아름다운 봉사 역시 아무러한 가치도 없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나 자기집단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거짓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Ⅱ. 참된 신앙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야고보는 믿음 보다는 그 믿음의 열매를 강조하면서, 행위의 열매가 있는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①타인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본문27절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거듭난 자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열매를 의미합니다. 참된 신앙은 환경의 억눌림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에게 신앙적, 경제적 이익을 주는 신앙입니다. 즉 이기적, 자기중심적 세상에서 남을 돕는 산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열매입니다. ②참된 신앙은 개인적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약1:27). ㉮오늘 성도에게 있어서 대신관계는 영적이어야 합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남에게 주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대아관계에 있어서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맺는말
오늘 하나님 면전에서(Coram Deo) 깨끗한 성도의 열매를 맺어 신행일치(新行一致)의 삶을 사는 참된 신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크신 복을 다 받고 누리시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경건
약 1:19-27 / 양인순 목사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경건’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경건과 절제’의 훈련을 하자고 매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들을 보면 ‘저분은 참 경건해 보여’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요?
경건하면 먼저 고상하고 뭔가 신비로움이 느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풍겨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제가 아는 동기 목사님 가운데 대단히 경건해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양복 깃에는 언제나 번쩍이는 금 십자가 붙어 있습니다. 걸어갈 때는 성경을 가슴에 대고 천천히 걷습니다. 사람들과 말할 때는 저음으로 깔면서 약간 쉰소리를 냅니다. 친구를 만나면 오른손을 들어서 ‘할렐루야’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동기 목사들은 경기를 합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항상 그렇게 사람들을 대합니다. 겉으로는 대단히 경건해 보입니다. 우리들과는 뭔가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사에 자기중심적입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밥값을 낼 때면 항상 화장실에 갑니다. 모처럼 밥 한번 사겠다고 카운터에 가면 그날따라 결제되지 않는 카드만 내놓다 결국 다른 사람이 냅니다. 그리고 뒤로 돌아다니며 정치를 합니다. 결국은 외톨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3장 5절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가운데 뵐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분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갖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목소리가 크거나 남 앞에 잘 나서지도 않습니다. 항상 후배를 배려해주고 격려해 줍니다. 언제 보아도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깍듯이 예우를 갖춰서 대해주십니다. 그 분 곁에 가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경건의 모습이 아닐까요?
‘경건’이란 단어의 헬라어는 ‘유세베이아(eusebeia)’인데 그 뜻은 ‘거룩하다(holy)’와 ‘경외하다(God-fearing)’입니다. 경건을 영어 표현으로 'Godliness'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경건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습이 바로 경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의 모습만 보아도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면에서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제 안에 있는 경건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목사는 마땅히 모든 면에서 경건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한 경건의 능력이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바울이 고민했듯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를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정욕을 따라 삽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것처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렘17:9)”이기에 언제나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경건의 모양도 잃어버리고, 능력도 잃어버린 무력한 모습에 빠지게 됩니다.
진품명품 TV프로에 나오는 물건들처럼 모양은 진짜 같은데 전문가가 감정을 해보면 형편없는 가짜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저의 모습이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참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참된 경건의 모습을 세 가지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경건의 능력은 바른 언어생활에 달려있습니다.
26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경건한 삶의 첫 걸음은 바른 언어생활입니다. 우리는 말하는 자세나 태도, 내용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경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른 언어생활을 하려면 먼저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이것은 절제된 언어생활을 말합니다. 말의 절제를 하려면 먼저 말하기보다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19절 말씀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명하십니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최고의 상담은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건성으로 듣거나, 듣는 척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면서 듣는 공감적 경청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 마시고,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그것이 경건한 삶의 출발점입니다.
바른 언어생활의 또 다른 방법은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화를 내면 좋지 않은 말을 쏟아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말씀하십니다. 화를 내면 결국 자신의 마음이 상합니다. 마음이 상하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말이 나옵니다. 그 나쁜 말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극복하는 비결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감정 따라 상황 따라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21절에 화를 이기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먼저 상대방을 보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나는 옳고 잘 했는데 너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화가 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상대적입니다. 화를 삭이지 못하고 흥분하면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서로 간에 잘못이 있고, 모자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정죄합니다. 그러면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언젠가 충돌합니다.
그리고 화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 내 삶을 다스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 생각이나 내 뜻이나, 내 경험의 지배를 받으면 언제나 혈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절제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혈기가 오르고,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심겨진 온유한 말씀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는 말을 하다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합니까?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교훈을 얻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이 땅에서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분으로 인정받은 자입니다(민12:3). 그런데도 한 순간의 화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그토록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그 무대가 바로 광야 여정 가운데 므리바의 물 사건입니다.(민20:7-13)
모세는 물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백성들을 향해 한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립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세에게 백성을 모으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그들을 마시게 하리라” 명하십니다. 그런데 혈기가 오른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이 한 순간의 분노와 혈기로 인해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분노하거나 혈기를 부리지 마십시오. 내가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보기에는 아무리 밉고 패역한 모습으로 보였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을 패역한 너희라고 정죄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정죄한 행위와 같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온유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혈기를 부리지 않고 온유와 겸손함으로 허리를 동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온유함으로 자신을 참아내는 능력이 바로 참된 경건입니다.
경건의 첫걸음은 바른 말을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옵소서. 성령께서 내 혀를 재갈 먹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절제하고,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경건의 첫 걸음은 바로 올바른 언어사용에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잘 절제함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경건의 능력은 나눔과 섬김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다같이 27절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아멘!
참된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일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의 사랑의 섬김과 나눔임입니다. 참된 경건의 모습은 행함으로 드러납니다. 계속해서 야고보 장로는 2장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15-17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경건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신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알고도 지나칩니다. 다음으로 레위인 역시 그냥 지납니다. 자기들의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랑은 말하고, 외치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습니다. 바로 형식적인 경건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오히려 강도 만나 자의 상처를 싸매주고, 돌보아 준 사람은 당시 개 취급을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냥 지나쳐도 아무도 욕할 사람이 없습니다. 속으로 오히려 쾌재를 부르며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려운 이웃을 돌봅니다. 자기의 돈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의 모습입니다.
돼지가 하루는 길거리에서 암소를 만났습니다. 돼지는 암소에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니? 사람들은 내 고기를 가지고 햄도 만들어 먹고, 베이컨도 만들어 먹잖아. 어디 그것뿐이야? 내 창자를 다 빼 가지고 순대로 만들어 먹고 심지어 발가락도 족발이라고 해서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 암소만을 좋아할까?"
암소가 말합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위해 열심히 먹잖아. 그러나 나를 생각해봐. 나는 살아있으면서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주고 또 맛있는 우유를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하는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누군가에게 다 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고 나서 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베풀고 나누면 칭찬을 받습니다. 제가 편지 한 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움켜쥐고는 나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신은 나의 것이지요. 나는 아주 쉽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우선 당신은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한히 값지며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포기의 풀도 살 수 없듯이, 내가 없으면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고 말 것입니다.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은행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내게 어떤 신비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들과 수없이 만납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순전히 나 때문에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난 어쩌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사람들,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이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나의 힘은 사실 무한하답니다. 그러니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일까요? 돈입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일시에 나에게 맡겨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바르게 사용될 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배부르면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많은 손길들이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해서 식사를 할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안타까운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우리가 도움을 주었을 때 갚을 수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자들을 찾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장기기증 서약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나눔과 섬김은 바로 내게 주신 거룩한 몸을 다른 생명을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막을 나눌 수 있습니다. 뇌사시 장기기증을 통해 내 몸 안에 있는 장기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신장을 기증함으로 신장투석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후 찬양예배에 나올 수 없는 분들은 헌금 드리는 시간에 작정하셔서 내주십시오. 오후예배에 오시는 분들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으시고, 기쁨으로 동참해 주십시오. 내게 주신 소중한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것보다 놀라운 경건은 없습니다.
셋째로, 경건의 능력은 거룩한 삶에 달려 있습니다.
27절 하반절에 참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바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와 같아야 합니다. 물고기는 바다 속에 살지만 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한 복판에 살지만 세상에 물든면 안됩니다.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그들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 속에 살았지만 이방나라의 종교나 풍습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방해를 받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숭배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험 앞에서도 기도했으며, 풀무불의 두려움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 이유는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경건은 날마다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몸은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실수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한 순간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모세는 자신이 백성들에게 물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자기과시,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입니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싶을 때입니다. 자신의 인물이나 학벌이나, 재물이나, 권세를 자랑하고 싶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나타내고자 할 때 경건에서 멀어집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 내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할 때 불경건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와 부활,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것이 경건의 비밀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물속에 사는 물고기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짠맛을 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을 지켜 승리하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경건한 삶을 살 때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첫째로,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 32편 6절에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휩쓸려 갈 때 하나님은 경건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경건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둘째로, 시험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베드로후서 2장 9절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경건하게 살려고 애쓰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시험 속에서도 붙들어 주십니다. 악의 유혹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번성하는 복을 주십니다.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아멘!
여기서 ‘공경한다’는 말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를 의미합니다. 경건하게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창고를 가득 채우시고, 축복의 잔이 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가짜이지만 진짜처럼 행세했어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 회개와 결단을 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경건한 신앙의 회복을 위해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이제부터는 혈기를 부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겠습니다. 위로와 칭찬과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웃을 섬기고 나누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한 모습으로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처럼 한 순간에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려 비극적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날마다 경건한 삶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일꾼으로 우뚝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라
약 1:22-25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야고보 선생은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무엇보다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는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의 실천여부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데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소원이 없다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인정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그렇게 살고 싶은 소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데 실패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가장 보편적인 문제는 실천결여의 문제입니다. 이 실천결여의 문제는 보편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실천적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면 종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야고보가 우리에게 전한 기독교는 우리의 삶을 떠나서 설명될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는 한번도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평범한 우리의 삶으로 우리 자신의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도록 요청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야고보선생은 노련한 선생답게 자기의 청중을 몇 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문제는 아예 말씀을 듣는 자리에 정규적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어떤 날은 예배의 자리에 오고, 어떤 날은 예배시간에 빠집니다. 바쁜 날은 바빠서 못나오고 한가하면 깜박 잊어버리고 못나옵니다. 말씀을 정규적으로 듣는 것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게다가 듣기에 속히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말은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는 사람의 입에는 자기의 말로 가득합니다. 웬 핑계는 그렇게 많은지. . .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 선생은 듣기는 속히 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시간마다 나와서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문제가 꼭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주 빠지는, 듣기에 느린 발걸음의 청중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고 보편적인 위험은 듣기만 하고 끝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나와서 앉아 있으면서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더 심각한 문제라고 야고보는 분석합니다.
왔다가 갔다가 하는 사람은 누구나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신앙생활하는데 문제가 있구나”하고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해줍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마다 나와서 앉아 있는 사람, 앉아있을 뿐만 아니라 듣는 것 같고, 고개도 간간이 끄덕이고 있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더 큰 문제라고 야고보 선생은 분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치 공예배에 나와 말씀을 듣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여기 나와서 지금 듣는 말씀, 선포되는 말씀은 실생활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중에서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실천해야 한다는데 대해서 다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살아갈 때에 들은 말씀을 과연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들은 바의 말씀은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 선생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설교든지, 성경 공부든지, 혹은 혼자서 가지는 조용한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깨닫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닫는 것은 깨달은 대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선생은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무익합니다.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3, 24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같습니까? 여기 큰 거울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그 거울 앞에 가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태어난 자기 모습을 봅니다. 죄인된 자기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곧 떠나버립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자기 모습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허상입니다. 자기의 모습이 비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는 그냥 돌아가버립니다. 거울 속에 그 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거울에 비쳤던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마치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때는 “아! 내 삶이 여기가 잘못 되었구나, 여기를 고쳐야겠구나”하고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사람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을 쳐다보듯이 자기 자신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듣지만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듣는 순간에만 그것을 고쳐야지 했다가 그것으로 끝나 버리니까 마치 거울을 볼 때에 “여기 내 얼굴에 뭐가 묻었구나!”해 놓고는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보는 순간에는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사람, 죄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곧 관심을 다른데 팔아버리고 맙니다. 흘깃 쳐다보고는 곧 제 길로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죄 가운데 태어난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어가려는 모습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괴로와하지 않습니다. 세속에 물든 추한 모습과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통해 빚고자 하는 모습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괴로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거울은 왜 쳐다봅니까?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볼 터인데 왜 봅니까? 자신의 추한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생김새에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쳐다봅니까? 거울을 쳐다볼 때는 혹시 머리 모양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나 해서, 잘못된 것을 찾아 손질하려고 보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듣습니까? 듣는 순간에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고 자학하기 위해서 듣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괜찮은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서 듣습니까? 야고보 선생은 거울을 보고 제 모습을 잊어 버리는 자만큼이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추한 모습을 보고 그냥 물러서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의 얼굴에 흙이 묻어 있으면 그냥 물러가지 않고 씻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그냥 물러가는 자는 어느 정도 됐다고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그럴 듯하게 생겼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 죄악된 모습을 보면 곧 바로 망각할 수는 없습니다. 더러움을 물로 씻고, 추한 모습을 바로 잡기 위해 행동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그대로 물러나듯이, 말씀을 듣고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은 그런대로 어느 정도 됐다고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선생은 거기서 비유를 끝내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을 보여 주는데 그 사람은 거울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25절에 보니까 ‘율법’을 쳐다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진(眞)모습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대조적인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주일마다 나와서 들어도 자신의 신앙에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물론 들으면서 가끔 가책도 받습니다. 그 말씀의 완전한 요구 앞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에 안타까와도 합니다. 여기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지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인데, 이 사람은 거울로 자신을 비쳐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요구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와하게 됩니다. 완전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생긴 얼굴을 비쳐주는 것은 거울의 기능이지만 우리의 속 모습이 어떠한가를 비쳐주는 것은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의 완전한 요구 앞에 비쳐볼 때 우리는 얼마나 죄인인지를 보게 됩니다.
완전한 율법을 자세히 응시할 때에 거기에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흘깃 쳐다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이라고 했어요. 여러분 우물 물을 들여다 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물 속을 들여다 보고 거기에 자신의 얼굴이 떠오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거울을 쳐다보듯이 앞에 서기만 하면 내 형상을 비쳐주지 않습니다. 한참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어야 거기에 떠오르는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온전한 율법을 시간을 들여 가만히 들여다 볼 때에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들여다 본다”는 것은 마치 마리아와 베드로가 부활절 새벽에 예수의 빈 무덤 앞에 가서 거기 무덤이 빈 것을 보고 혹시 어디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을까 해서 두리번거리며 들여다 본았다고 할 때 사용된 꼭 같은 말이 여기 쓰여진 것입니다.
마치 하늘의 천사들이 죄인인 우리에게 이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해서 들려졌는지, 이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히 살펴볼 때만이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냥 급히 와서 몇 마디 들음으로써 여러분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안됩니다.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와서 말씀을 듣는다고 여러분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만 거기서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함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명령 앞에 절대무능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기독교의 역설이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다운 매서운 역설이 있습니다.
자신을 보면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거울로 자기를 보려고 하면 자기 자신을 볼수 없습니다. 자기의 겉모습만 신경 쓰는 사람은 자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 겉모습에 신경 쓰는 대신, 율법이 보여주는 모습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은 온전케 되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된 신자는 거울로 흘깃 제 모습을 보듯이 말씀을 보지않습니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이 있는 신자는,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입니다. 듣는 말씀의 진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내 실제적인 삶에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묵상해 보는 사람입니다. 첫눈에 비록 알아보기 힘들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파악할 때까지 살펴보는 사람입니다.
복된 신자는 자유를 주는 온전한 율법을 샅샅이 살펴봅니다. 더 이상 돌비에 새겨져 있는 그런 계명이 아니라 신자의 자원하는 심령에 새겨진 온전한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더 이상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지 말라”하는 계율이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중심에 소원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주는 살아 있는 능력,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본래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은 여러분에게 어떤 역할을 합니까? 여러분에게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속박하는 율법입니까? 그것이 영적인 상태를 말해 줍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다가올 때에 여러분은 움추려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밝아오는 율법으로 인해 여러분의 심령이 기뻐하고 있습니까?
율법이 여러분에게 설명될 때 죄인된 여러분을 폭로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기소된 죄인처럼 여러분이 움추려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율법이 밝아져 올 때 마치 달려갈 길을 환히 보는 육상 선수처럼 기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구속하는 율법”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자유하는 율법을 맛보았습니까? 강제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참된 자유를 율법은 보장합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보장하여 줍니다.
말씀을 알면 알수록 우리를 정죄 아래로 빠뜨린다면 무엇인가 잘못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저는 한동안 말씀을 보면 볼수록 제 자신이 정죄 당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소리쳤기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닥했습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파괴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뜻이 여지 없이 참패를 당해도 그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음미하면서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 눈 떠서부터 잠 잘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내 마음속에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이 찾아왔고 즐거움이 자리했습니다. 옛날에는 이 말씀을 보면 볼수록 움추려 들었는데 이제는 말씀을 보는 것이 제게는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는 데에 더 이상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정죄 아래 이끌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앞에 나온 이상, 이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그 길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를 사로잡아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람의 몸에서 나를 구출해 내랴”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바르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 이래서는 안된다는 자기와 그렇게 안되는 자기와의 싸움을 보십시오. 솔직하게 평가하면 항상 패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구는 있지만 선을 행하는 삶은 없습니다. 자연인의 우리의 힘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뜻대로 바르게 살 수 있다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기준에 부합하게 살 수 있다면 왜 고민합니까? 왜 교회에 나와야 합니까. 왜 하나님께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까? 정말로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실패하고 있는 자신의 추한 모습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기로서는 어쩔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정말 곤고한 자로다”하며 외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구원자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삶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대신 싸우는 싸움입니다.
신자에게서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더 이상 “이것 하라 저것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포되는 십계명은 자유를 얽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이상 짓누르는 부담이 아닙니다.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분은 이제 해방자 예수를 만나보십시오.
신자는 그 계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기꺼이 순종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된 신자는 말씀을 들은 뒤 나가서 신속히 잊어버리는 자가 아닙니다. 말씀에 머무는 자가 복된 신자입니다. 율법과 함께 거하며 매일 연구와 묵상을 하는, 기쁨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주야로 그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로다”하는 시편 1편의 모습이 신자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구약의 시인들은 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내가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하며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로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님을 찬송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번씩 하나님께 나아와서 기도하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하나님의 규례를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내가 하루 일곱번씩 찬송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율법을 계속 자세히 응시하는 자입니다. 들은 율법을 능동적으로 실행하는 자입니다. 완전한 자유를 말씀으로 맛본 자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런 성도를 향해서 본문이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한 번은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벙어리된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기를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 들렸다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성령이 충만해서 그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들이 모든 죄는 사함을 받지만, 말로 인자를 거역한 것조차도 사함을 받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사역으로 폄하하는 자는 이 세상과 내세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고 무섭게 경고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설교는 아주 능력이 있었습니다. 듣던 사람 중 한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밴 배가 복이 있도소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말을 받아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주님의 축복여부는 우리의 관심의 초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해서 거기에만 항상 신경을 쓰면, 겉모습만 관심을 두면 우리는 주님의 축복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이 어떠한가 해서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때 떠오르는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여러분이 나와서 앉아있는 것은 이미 축복의 시작입니다. 들은 말씀에 집착하십시오. 말씀을 들여다 보십시오. 들여다보되 새로와져야 할 당신의 모습이 환하게 비쳐질 때까지, 우물에 비췬 것처럼 자기의 모습이 환히 떠오를 때까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들여다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들여다 볼 때에 고쳐야 할, 수정되어야 할 여러분의 모습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쉽게 망각할 수 없습니다. 거울 앞에서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대로 거울 앞에서 사라질 수 없습니다.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깨끗이 하는 사람을 향해서 성경은 축복을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하는 일마다 다 형통할 것이다. 아마 여러분이 교회 나올 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통된 소원이 ‘복’을 받고 싶다는 것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형통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 모두에게 복을 선언합니다.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 하는 일마다 형통하리라고 복을 선언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지금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더 거룩한 자리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듣고 자기를 속이므로 더 추한 자리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 말씀을 실행하는 축복된 반열에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아멘.
“거룩하신 아버지, 저희들은 하찮은 일, 쓸데 없는 일에 어찌 그리 바쁜지요? 하루만 지나면 아무 가치가 없는 일들에 신경을 쓰면서, 그런 것을 읽고 듣기에 바쁘면서도,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들여다 보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우리의 게으르고 추한 모습을 주님이 보여 주셨사오니 원컨데 우리를 권고하여 주셔서 이제는 이 율법을 통해서 저희의 참 모습을 보기까지 율법을 묵상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삶을 고쳐가는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 행하는 일마다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축복이 각 심령과 가정에 임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직 행함으로
약 1:22-27 / 인명진 목사 20160309
개신교회에서 10월은 대단히 의미 있는 달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회가 새롭게 시작된 달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이 되면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1517년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공로주의와 보속 신앙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관습과 전통 앞에서 오직 성경으로, 인간의 선한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구원 앞에서 오직 은혜를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은혜 Sola Gratia를 슬로건으로 삼아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중세 카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으로 밀어내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공로주의와 보속신앙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는데 성서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전통과 예전만 남아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카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된 Vulgate 성경을 사용했는데 당시 사제들 중에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또한 공로주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건물우상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짓다가 돈이 모자라자 연옥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터첼이라는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보함에 너희 아버지의 이름으로 드린 헌금이 딸랑하고 들어가는 순간 지옥에 있던 너희 아버지의 영혼이 연옥으로 올라간다.” 이뿐 아닙니다. 모든 교인들을 죄인이라고 규정지어놓고 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면죄부를 사야 천국 갈수 있다고 종교사기극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 5백돌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루터와 칼빈이 한국교회에 온다면 과연 무엇을 개혁하라고 외칠 것 같습니까? 올해 2월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설문조사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천주교(29.2%), 불교(28.0%), 개신교(21.3%) 순으로 신뢰도가 나타났습니다. 왜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기독인들이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24.8%). 교회 내부적 비리/부정부패가 많아서(21.4%), 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배타적이어서(10.2%), 결국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의 44.3%가 믿음에 동반되는 행함이 없다는 평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지적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의 판단 앞에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무조건 맞추어야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그 기준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도 거룩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도 비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공동체와 로마제국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사회의 걸림돌처럼 여겨졌습니다. 로마 황제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외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관직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습니다. 예수라는 분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회에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비난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비판받고 있는 대목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라는 진리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교회가 진리와 동떨어진 길을 걸어가고, 사랑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을 행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라는 걸림돌 때문에 사회에서 비난 받았습니다. 중세교회는 믿음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회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비난받고 무엇 때문에 타락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분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예수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비난받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비난 받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에 동반되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비난 받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선포할 때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으로 그 포문을 열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고, 인간의 공로를 찬양하던 시절 루터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루터가 한국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한다면 어떤 말씀을 전할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서 과연 어떤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설까요?
사실 저는 이 본문과 제목을 정하면서 찹찹한 마음이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본문과 제목을 바꿀까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루터가 외쳤던 “오직 믿음”과 정반대 반향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말하면서 로마서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행함”을 말하면서 야고보서를 들고 섰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터는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종교개혁을 이야기 하면서 야고보서를 들고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오직 믿음이 아니라 오직 행함을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모순입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도 루터가 한국교회에, 이 갈릴리 강단에 선다면 야고보서 말씀을 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종교개혁의 선언문을 들고서 그대로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는“오직 믿음”으로를 외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비난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오직 행함으로”를 말하는 것이 가장 종교개혁적이고, 루터의 믿음을 이어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신학계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Reformed Church is Reforming Church" 개혁교회는 개혁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과거의 개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개혁하고 있는 교회가 개혁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 앞에서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해 왔습니다. 하나는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요,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입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주로 야고보서에 그 기반을 두었고,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바울서신 중에서도 로마서에 그 기반을 두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가 속해있는 개신교회는 율법주의는 틀렸고, 복음주의가 옳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주장이 틀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율법주의자를 옹호하거나, 인간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하지 않으면 정말로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동반되어야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십시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바울 서신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직선적으로 거침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이었습니다. 희미합니다. 희미한 모습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결국 말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진술은 과연 타당한 논리입니까? 그런데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 솔라 피데’개념을 아는 분이라고 한다면 야고보의 이 진술이 매우 불편하게 들릴 것입니다. 루터는 신자가 의로움을 얻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여 ‘오직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행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어떤 집사님이 딸 혼수비용으로 얼마를 모아 놓았는데 같은 교회에 돈이 없어서 큰 수술을 받지 못하는 신자의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혼수비용 얼마를 수술비용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대로 행하는 자일까요? 물론 그런 행위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행위를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이 협력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너는 내 딸이다, 내 아들이다, 할 때 딸과 아들의 행위를 보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루터는 이런 의인론에 관점에서 중세교회의 인간 공로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믿음 없는 행위를 비판할 때 주로 쓰인 본문이 야고보서였습니다. 루터는 바울 서신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로마서 말씀을 최고의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반면에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와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그것을 신약성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논쟁이 되었던 믿음과 행함은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비교하면 그 근거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제단에 바친 행위에 대해 강조합니다. 바칠 때 행함으로 물론 야고보가 행함만을 주장한 건 아닙니다. 믿음과 더불어 행함도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는 정 반대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하나님을 믿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똑같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전통을 이어받는 루터에게 야고보는 율법을 추종하는 몽학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야고보의 편지와 바울의 편지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는 무척이나 당혹스럽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 행함인가요, 믿음인가요? 아니면 야고보 편입니까? 바울 편입니까?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야고보와 바울을 데려다 놓고 삼자대면하면 속이 시원하게 풀리겠지요. 그러나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두 분 때문에 골치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우리가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야고보보다는 바울에게 기울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루터가 명확하게 분석한 뒤로는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 중심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옮겨간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행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한 외적인 행위보다는 마음의 변화를 위한 수행이 우선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을 단순히 도를 닦는다는 식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수행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다운 기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행위는 넘쳐납니다. 교회 안에 말도 많고 행위도 너무 많습니다. 교회에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과잉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무슨 프로그램을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심심해합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신자의 영성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도 적지 않겠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떨어집니다. 수행의 성격이 축소되고 행위의 성격이 강조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과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결혼식 며칠 전에 사진 찍기에서 혼이 빠지고 결혼식 날도 친구들과 친척들에 휘둘립니다. 두 사람의 관계의 의미를 묻고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 결혼의 준비라면 결혼식은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초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이 결혼이라면 행위는 결혼식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영적인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를 열어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믿음의 차원이지 행위의 차원은 아닙니다. 이런 수행을 뒤로 하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수행에 관점을 두었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야고보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복음의 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유행 지나간 패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결코 폐기처분해야 할 지푸라기 서신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는 일단 저는 루터에게 양해를 구해하야겠습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진리투쟁에 급급하여 야고보서를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한국교회에 루터가 와서 강단에 선다면 제일 먼저 야고보서를 펼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큰 틀에서 분명히 신학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유대-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고, 바울은 이방-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야고보의 행위를 부정한 것처럼, 야고보는 바울의 행위 없는 믿음을 부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대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 뿐입니다. 공동체의 정황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야고보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위를 내다버린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며, 부활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행위 배척주의는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책임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니골라 당이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니골라 당이 에베소 교회에도 침투할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에도 니골라 당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구원파가 그들입니다. 오대양 사건의 주범이고, 세월호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한번 회개했으면 다시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죄 사함의 비밀,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에 병적으로 집착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눈에는 구원파와 개신교인들이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입니다. 영혼 구원에만 매달리는 교회,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전하는 교회와 차이점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니골라 당이나 구원파의 위험성은 없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시하고 예수=구원이라는 수학공식 하나 외우는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수행을 거부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천국행 티켓 보장되어 있다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것 아닙니까? 구원과 믿음이라는 자기만의 성채에 숨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역사적 책임이냐, 하고 난처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집을 팔고, 은행의 적금 깨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사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그 분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나만 위해 살던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는 곳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나누어서 세상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행함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은 바로 행함이 있는 이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어나가다 보면 비슷한 정신을 말하는 성서기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와 가깝고 요한과는 사촌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미가 선지자와 가깝고 마태와는 사촌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천천의 수양보다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보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음과 행함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주일 앞두고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수학공식 외우듯이 예수=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닮아가는 수행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될 것이고, 좋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 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합니다
야고보서 1:22-25 / 김병삼 목사 - 만나교회
믿음 생각하기
미국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던 시절 가슴에 깊이 와 닿았던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가 주로 했던 일은 행려병자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인도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영국에서 수많은 선교사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제가 공부하던 시절 선교학에서 많이 썼던 단어가 있습니다. ‘presence’(현존 선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사셨던 것처럼, 선교란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은 더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듣기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보이는 복음이
오늘 그래서 말씀의 제목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쉐인 클레어본이 쓴 책의 제목입니다. 이 책에는 아주 과격한 문장이 나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면 세상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 훨씬 과격한 것입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만큼이나 강력한 영향력을 주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성경을 보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제가 택한 본문이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초대교회에 ‘행함’을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가 히브리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는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서신인데 야고보서는 ‘행동장’이라고 부르지요.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로마서를 읽다 회심하고 난 후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죠.
당시 로마 교회는 하나님의 의와 믿음보다는 어떻게 행위로 구원을 받고 보상받을지를 강조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 루터의 눈에 ‘행위’라는 것은 이중적이고 바리새적인 율법으로 비췄던 것이죠.
히브리서는 고난을 참은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믿음으로 순교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시 박해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영웅처럼 받들어지고, 일부러 순교의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참 위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어쩌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보다 믿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기자에게 행함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거나, ‘의’로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 22절을 보세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도 사실이고, 우리의 마음으로 믿어 ‘의’를 얻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여 믿음을 확증할 때, 구원에 이르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듣기만’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듣고, 믿고, 시인하는 것이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으로 온전한 신앙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23~24절입니다.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무엇이었는지 곧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참 많이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말씀을 보다가, 기도하다가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되는 경우죠. 그런데 그 뜨거움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곧 식어버립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마치 거울로 얼굴을 볼 때는 선명하게 보였는데,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하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곧 잊어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렇습니다.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믿는 믿음을 ‘Print’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겨지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기억되는 많은 사람은 ‘믿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믿은 대오 살았던 사람들’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선교역사에서 우리는 참 위대한 선교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고 이 땅 조선에까지 온 사람들, 행동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특별합니다. 그들이 믿음이 있어서 결단했을 뿐 아니라, 이곳 조선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살면서 복음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을 증명한 사람들
선교사들은 조선의 낯선 토착 언어와 문화, 종교, 풍습에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이 보여준 사랑의 실천이었다. 봉건적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당했던 빈곤계층, 여성들을 향한 섬김, 희생과 봉사의 실천은 마음을 열기에 충분했다. 복음의 씨앗이 토양 속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_이덕주 교수의 [한국교회 이야기] 중에서.
한때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던 책이 있습니다.
[연탄길]이라고 기억하시나요? 이철환 씨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묶어서 낸 책이죠. 왜 사람들이 그 책을 보면서 감동했을까요? 그 책에는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행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죠. 제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한 이야기를 소개할까요?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아저씨, 자장면 두 개 주세요.”
“그런데, 인혜 언니는 왜 안 먹어?”
“응,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
“우리도 엄마, 아빠가 계셨으면 좋겠다.”
바로 그때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나왔습니다.
“너 혹시 인혜 아니니?”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나 모르겠니? 영선이 아줌마, 네가 어릴 때 한 동네 살았는데.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들 사니?”
그제서야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가 맛있는 것 해줄게.”
잠시 후 자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내어 왔습니다. 음식을 먹는 동안 그녀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거라. 자장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네.”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힘겨워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물었습니다.
“누구네 집 아이들이지?”
“사실은 나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공짜로 음식을 주면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엄마 친구라고 하면 아이들이 또 올 수도 있고 해서….”
이 이야기가 감동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런 상황을 보고 마음이 아프지 않거나,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식당 아주머니처럼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마음이 증명되지 않는 이유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이 빠르게 민중들에게 파고 들어갔던 이유는 바로 이런 행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우리 국내 성지순례 팀이 방문했던 곳은 공주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가장 강하게 느꼈던 것이 ‘진실한 삶’을 살았던 선교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외세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환경이었음에도 선교사들이 강력한 감동을 주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요?
행하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토양이 아닐까요?
영상을 통해서도 우리가 접하는 것이지만, 공주 지역에는 샤프 선교사와 그의 부인 사애리시의 영향이 참 컸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사랑의 실천이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까지 끌어냈기 때문이죠.
이들의 믿음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잊힌 얼굴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었죠.
샤프 선교사 부부는 언덕 위에 2층짜리 붉은 벽돌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는 2층짜리 벽돌집이 생소했고 많은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1905년 11월 사택이 완공되자 샤프 부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공개했습니다. 현관, 응접실, 식당, 서재, 침실 구경꾼들이 감탄사를 연발했죠. 그 당시 구경꾼이 샤프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 당신은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겠소.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사니 천당인들 이보다 더 낫겠소.”
샤프 부부는 몰려드는 구경꾼들로 개인생활과 선교에도 차질이 생겼지만, 식탁에 앉아 기도하고, 서재에서 성경 읽고, 응접실에서 오르간을 치며 찬송 부르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 곧 천당생활이 어떤 것이지 보여 주었던 것이죠.
흥미롭게도 이런 전도 방법을 ‘구경 미션’이라 하며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습니다.
선교초기에는 이처럼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국인 최초 목사 김창식, 광주 최초 목사 최흥종, 민중 목회자 전덕기도 선교사 가족의 생활 모습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곳 공주에서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샤프 선교사의 부인인 사애리시의 실천적 행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샤프 선교사는 공주를 거점으로 천안과 조치원, 멀리 청주까지도 나가 전도하였는데, 조선 백성이 생각하는 천당 같은 집에서 살기보다, 위생과 환경이 열악한 시골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샤프 선교사는 1906년 2월 말 사경회 인도를 위해 논산 은진 지방에 갔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손도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죠. 하나님께서 더 사용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들이라면 장티푸스가 왔다가도 도망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던 공주의 백성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샤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천당 사람도 죽는구나!’라는 실망감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시골 곳곳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죽은 그의 모습에 감동한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남편을 잃은 샤프 부인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편이 하던 일을 30년 넘게 계속하며 공주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인재를 길러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 최초의 여자 목사인 전밀라, 여성 교육자 박화숙, 최초의 여자 경찰 서장 노 마리아 등이 샤프 부인의 가르침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지만, 샤프 목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부인을 통하여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공주 사람들이 샤프 목사도 존경했지만, 한국 이름 ‘사애리시’로 살았던 샤프 부인을 더욱 우러러보았습니다.
‘사애리시’의 뜻이 ‘사랑의 이치를 베푼 부인’이라는 의미처럼 남편의 죽음 후에도 계속해서 이 민족을 섬겼던 이유는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행한 예수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기독교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복음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복음 때문에 산 사람도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라는 책에서 썼던 글입니다.
나는 초대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순교사를 배울 수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 폴리갑이었다. 그는 서머나의 감독으로서 86세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가 화형에 처해지는 순간에 로마의 군사들도 신망이 높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그를 죽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한마디만 거짓말을 하시오”라고 회유했다. 그때 서머나의 위대한 감독 폴리갑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수님은 86년 동안 나에게 한 번도 거짓을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예수님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구차한 생을 살겠다고 거짓을 말하겠소. 어서 나를 죽이시오.”
그리고 폴리갑은 원수를 위해 기도한 후 장작더미에 올라 장렬하게 순교했다.
이것이 충성스러운 사람, 신실한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는 교회가 이런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공주의 선교 역사를 보면, 1905년 ‘양반고을’ 공주에 복음이 들어갔지만, 교인을 얻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시작된 부흥 운동이 공주에서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진으로 보는 교회의 이름을 ‘협산자 예배당’이라고 부르는데, 1907년 4월에 열렸던 공주읍 교회 부흥회를 통해 교인들이 변화되고 전도하기 시작해 지은 예배당입니다.
당시에 ‘ㄱ’자로 지어 300명을 수용할 벽돌 예배당을 지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독특한 이름 ‘협산자’는 우산을 끼고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교회는 부흥이 되었지만 건축할 돈이 없어 미국감리교회 선교국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낯선 신사가 찾아와 감독과 이야기를 하던 중 한국의 소식을 듣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놓고 갔습니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우산을 들고 왔던 사람으로 밖에는 기억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믿음으로 산다는 것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일, ‘실천하는 자’ 그가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될 뿐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재미 교포인 하형록 회장이 쓴 [성경대로 비즈니스 하기 P31]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소개하려고 합니다.
세계적인 건축설계 회사 '팀하스‘의 회장인 하형록은 심장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생명의 위협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며 성경대로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잠언 31장의 원리를 따라합니다.
그중 하나의 원리가 “Extra Mile"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이고, 다른 표현으로는 ‘beyond door' 즉 문밖까지 배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41절의 말씀처럼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에 근거한 것입니다.
잠언 31장 24절의 말씀,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모시로 만든 고급 제품을 띠까지 둘러 보낸다는 것이 바로 엑스트라 마일입니다.
나는 직원을 채용할 때 이 엑스트라 마일에 관한 질문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당신은 회사 일을 할 때 엑스트라 마일을 실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미국인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맡은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늦게까지 일할 수 있습니다. 그게 엑스트라 마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일 고객에게 일을 부탁받은 프로젝트의 마감일이 내일이라면 그 일을 끝내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을 엑스트라 마일이라 할 수 없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엑스트라 마일은 무엇인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해주라는 게 아니다. 성경 구절에 나오는 때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애인이 “커피가 마시고 싶은데 커피 한 잔 사다줄래?”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정말 커피만 사다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커피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쿠키도 사다 준다. 엑스트라 마일은 바로 쿠키다. 고객은 커피뿐 아니라 쿠키까지 곁들이는 엑스트라 마일을 반복해서 받으면 어느덧 마음이 열려서 그를 신뢰하게 된다. 애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연인의 마음으로 고객을 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땅에 복음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extra mile’을 간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믿기에 성경대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국내 선교팀들은 영명학교를 돌아보며, 작은 야산에 잠들어 있는 선교사들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영명동산(묘지)에 잠든 선교사들에 대한 간단한 기록입니다.
공주지방에서 활동한 34명의 선교사 중에서 샤프 선교사와 선교사 자녀 4명이 영명동산에 잠들어있다.
① 샤프(R. A. Sharp) 선교사는 1904년 갓 결혼한 아내 엘리스(Alice H. Sharp)와 함께 공주에 부임한다. 오두막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벽돌을 찍고 기술자를 불러와 직접 집을 지었다.
1905년 11월 입주한 집이 지금도 현존하는 선교사의 집이다. 새집에서 신혼 3개월만에 강경지방 선교활동 중 풍토병으로 순교했다.
부인 엘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 선교사는 1906년 미국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1908년 다시 공주에 돌아와 여성교육에 앞장섰으며, 유관순을 양녀로 삼아 신교육을 주선하는 등 30여년을 활동했다.
② 테일러 선교사의 딸 에스더(Ester, 6세)
1911~1916년, 풍토병으로 사망.아버지 테일러(Corwin Taylor, 한국명 대리오) 선교사는 1916~1922년까지 공주지방 감리사로 활동했다.
③ 아멘트 선교사의 아들 로저(Roger, 2세)
1927~1928년 풍토병 사망. 아버지 아멘트(C. C. Ament, 한국명 안명도) 선교사는 1919~1933년까지 공주지방 감리사로 활동했다.
④ 윌리엄스 선교사의 딸 올리브(Olive, 10세)
1909~1919년, 풍토병으로 사망
아버지 윌리엄스(F. E. C. Williams, 한국명 우리암) 선교사는 1906년~광복 이후까지 영명학교 설립운영(교장) 임시정부 농업정책 고문 등을 역임했다.
⑤ 우광복(Geor Zur Williams, 1907~1994)
아버지 윌리엄스(우리암) 선교사와 함께 공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살 아래 여동생(Olive, 1919년)이 사망한 후 미국의 할머니에게서 자랐다.
그의 이름 우광복은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빼앗긴 이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콜로라도 주에 있는 덴버의대를 졸업하고 해군 군의관이 되어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당시 하지 중장의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공주에 잠든 동생 “올리브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영명동산에 잠들어 있다.
아버지 윌리엄 선교사는 영명학교 설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애국애족 교육을 통한 광복의 꿈을 심어주었으며, 농업 전문가로서 임시정부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그 멀리 이국땅에서 죽어 무덤에 묻혀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나요?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듣고,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 그 들은 것을 행하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죽어서, 그들의 무덤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보여주죠.
2016년 8월 20일 weekly biz ‘why’에서 97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사실은 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이 된 분이죠.
기자가 ‘철학과 신학의 차이’에 관하여 물었을 때 참 인상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철학은 인간에 대해 알려주지만, 인간이 처한 문제는 해결을 못 해줍니다. 그러면 종교가 해결을 해 주느냐? 아닙니다. 나는 그 답을 예수에게서 찾았어요. …
신앙을 가지려면 성실성에 경건성이 더해져야 합니다. 성실한 사람은 악마가 건드리지 못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이냐? 호수가 잔잔해야 달그림자와 별그림자를 볼 수 있어요. 그 잔잔함이 바로 경건이지요.”
저에게 아주 인상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성실함과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신앙인이 세운 공주의 영명학교가 이 민족에게 진실함과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죠.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은 이화학당 출신으로만 아는데, 사실은 공주에 있던 영명학교를 다니던 중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진학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습니다.
우리 일행이 영명학교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아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요,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 샤프와 그의 아내였던 엘리스 샤프가 선교사로 와서 세운 학교의 이름은 남학교인 명설학당과 여학교인 명선학당이었습니다. 후에 이 두 학교를 모태로 윌리암스 (한국명 우리암) 선교사가 영명학교를 세웠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영명학교는 3.1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1929년 벌어진 광주 학생 운동에도 동참하여 민족운동의 요람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선교 초기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였던 우리 선조들을 보며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적어도 복음이 들어간 자, 복음을 들고 온 자들이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았을까요?
초기 선교 역사가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으로 믿음을 살았던 선교사들을 보았던 조선 사람들의 삶에서도 믿음을 증명하는 일들이 누룩처럼 번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누룩의 비유’가 아닐까요? “천국은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라도에는 ‘오방 최흥종’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참 많습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처음 예수 믿고 세례 받은 사람, 최초의 장로, 그리고 최초의 목사, 3.1 만세시위를 지도하고 태극기를 흔들다 체포되어 2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민족 운동가, 문둥병, 결핵환자들의 아버지와 같았던 사회사업가.
최흥종 역시 예수를 믿기 전에 자기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는 왈패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선교사 집을 찾아간 이유는 선교사의 일을 돕고 돈을 벌어 출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909년 4월 광주 선교 개척자 오웬을 모시던 최흥종은 선교사가 전도를 나갔다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선교사 포사이드를 데리러 갑니다. 영산포에서 마중을 나가 포사이드를 안내해 광주로 오던 중, 걸인이나 나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최흥종은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그런데 선교사 포사이드는 걸인에게 가더니 자신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이 최흥종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오웬 선교사는 숨을 거두었고, 포사이드는 나병환자를 데려다 돌보기 시작합니다.
최흥종의 마음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인데도 피해 도망쳤는데, 포사이드는 그를 자식 안듯이 안을 수 있다니….”
포사이드의 행동에 감명을 받은 최흥종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도 믿음의 행동을 시작합니다.
한국 최초 나병 전문 요양원인 광주 나병원(현 여수 애양원)이 최흥종의 감동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이 놀랍기는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애양원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손양원’ 목사님이 생각나지 않나요?
지금까지도 많은 신앙인에게 ‘사랑의 원자탄’으로 많은 울림을 주는 그의 삶과 신앙이 어디서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줬던 누군가를 통해, 행동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지난해에도 여수에 들러 기념관에서 다시 보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아홉 가지 감사기도를 보았습니다. 늘 보던 것인데 왠지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내어놓고 드린 기도가 감사라는 것이, 그리고 그의 감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열매가 없고, 교회에 생명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썩어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홉 가지 감사의 기도입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내게 맡겨주신지 감사합니다.
3) 4남 3녀 7남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남과 차남을 주님께 바치게 되어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감사하고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함께 순교를 했으니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복인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6) 두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가려 했는데 그보다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을 마음에 부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 열매로 무수한 천국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며 감사합니다.
9) 견디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걸음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믿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죽어 수십 년이 흘렀어도 믿음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가 믿음을 행동으로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남길 선명한 믿음의 흔적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다음 세대가 따라올 선명한 발자국은 무엇인가요? 한 알의 밀알이 그렇듯이, 누룩이 그렇듯이, 믿음으로 살아간 삶의 행동 역시 절대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청강생
약 1:22-25 / 채규현 목사
제가 전에 다른 교회 있을 때에 여름 수양회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는 크지 않아서 전 교인이 수양회를 갔습니다. 수영장 있는 곳으로 갔는데, 각 구역별로 수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운동경기를 하게 되면 집사고 목사고 없습니다. 저도 약한 구역에 들어가서 같이 수구를 했습니다. 한참 열심히 뒤엉켜서 공을 쫓아다니고 하다 보니까 상대편에 제 또래의 한 집사님이 갑자기 “어어…” 하더니 넘어가요. 쥐가 난 것입니다. 자기는 한참 뛸 만하니까 기분대로 뛰어다녔는데 마음은 청춘이어도 몸은, 특히 물속에서 수구는 격렬한 운동이라 잘 안 되거든요. 금방 쥐나 났어요. 결국 그래서 그 구역은 지고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민 와서 생활하다보니까 운동을 하지 못하고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까 자기는 운동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지나서 갑자기 운동을 하니까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얼마만큼 건강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직접 운동을 해 보면 압니다. 해보기 전에는 다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마음대로,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는 무리가 따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내가 행해봐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도 깨닫고, 얼마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큰지도 깨닫고, 그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읽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제일 먼저 22절에 말을 꺼냈죠?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전체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사람” 에 대해서 23절, 24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 잊는 사람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거울을 보면, 자기 얼굴의 부족한 부분, 머리를 빗어야 할지 안 빗어야 할지, 또 화장을 고쳐야 할지 안 고쳐도 될지가 다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거울을 보면 나의 부족한 점, 고쳐야 할 점, 보완해야 할 점들이 다 나타나요. 그런데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 잊으면 머리는 헝클어진 대로 그냥 다니고, 얼굴을 깨밭이고, 거울을 본 효과가 전혀 없다는 얘기예요. 거울을 봤으면 본 만큼 고치면 용모가 단정해지지 않습니까? 아름다워 지지요. 그런데 거울을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초양육훈련을 한 분들도 같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같이 모이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 계속해서 큐티하자.” 그런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계속 큐티를 하고, 계속 함께 모임을 갖고, 이런 면이 없으면 하루 이틀 지나고, 한 달 지나고 나면 언제 그것 했었나 싶습니다. 원위치로 돌아가요. 그냥 거울보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계속해서 말씀에서 은혜 받은 대로 행해봐야 그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먹어봐야 맛을 알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광고 카피에 나오던 말입니다. 자, 식당에서 메뉴를 읽는 것과 실제로 먹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아프다고 병원에 갔어요. 처방전을 보니까 내가 어디가 약하고, 어디를 보완해야 될지를 압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요. 처방전만 보고 그대로 약을 타서 먹지 않으면 그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읽고, 깨닫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그대로 돌아가서 행치 않으면 마치 처방전만 받고 약은 안 먹는 것과 똑같고, 메뉴는 읽고 식사는 안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엄청난 차이죠. 중년이 되어서 예수님을 새로 믿게 된 분이 고백을 하더라구요. 고등학교 다닐 때 미션스쿨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션스쿨에서는 성경 과목이 있죠? 그 성경과목에서 자기는 성적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안 다니고 몇 십 년 뒤에 느지막하게 교회에 온 분이 있어요. 과연 그 분에게 미션스쿨에서 성경을 배운 것이 그 사람에게 과연 무슨 유익이 됩니까? 전혀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열매도 못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장도 없고, 지식만 늘어나고, 오히려 행동이 없고 순종이 없고 성경 지식이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독이 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언젠가 목사님 한 분이 병원에 입원을 해서 저를 포함해서 목사 세 사람이 모여서 문병을 간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때 목회를 할 때였고, 또 다른 분도 목회를 하고 있었고, 한 분은 목회를 않고 계속 공부를 해서 박사과정에 있던 분이었습니다. 두 분 다 저보다 연배가 위였던 분들이셨는데, 그 두 분과 같이 문병을 갔다가 나올 때입니다. 나와서 이제 병원 로비에서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데 그 자리에서 제일 많이 말을 하는 분이 누구냐면 바로 목회를 안 하고 계신 분입니다. 교회는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고, 목회자는 이렇게 변해야 되고, 교회 구조는 이렇게 바뀌어야 되고, 그래야 교회가 잘 되고…, 하면서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목회하고 있는 두 사람은 그냥 아무 소리 않고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그 분이 하는 얘기에 할 말이 없었어요.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고, 대꾸를 해 봐야 그 분이 전혀 이해를 못 하는데 어떻게 대꾸를 합니까?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속으로는 답답하죠. 그래서 거기서 얘기가 대충 끝나고 나서 서로 눈짓도 안 했는데 그 박사과정 하는 분을 먼저 보냈어요. 그리고 목회하는 두 사람이 남아서 커피숍에 가서 따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 정말 목회 안 하는 사람과는 같이 이야기 못 하겠다. 그지?” 서로 그래가면서 아주 속 터놓고 목회의 어려움, 목회에 대한 서로의 지혜도 서로 나누고 그랬습니다. 실제로 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누구나 다 옳은 소리해요. 그러나 과연 그때 그 장소에, 그 경우에 적절한지 그건 모릅니다. 해 본 사람만 아는 거예요.
성경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말씀의 옳고 그름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런 적이 한번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데 하나님 일을 하고, 전도하는 일에 대해 공부하는데 “계속해서 하나님 뜻을 위해 일을 할 때에는 하늘의 상급을 잃지 않으리라.” 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던 여 집사님 한 분이 “아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일을 하는데 상급을 바라고 해야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말이 맞죠? 치사하게 꼭 초등학교 학생들이 노트 한 권 타려고 열심히 운동장을 뛰듯이, 무슨 상급을 바라고 하나님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건 수준이 낮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일리뿐이에요. 그 말씀이 정말 와 닿는 사람은,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 하면서, 이 더운 날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전도지 들고 다녀본 사람입니다. 전도지 들고 다닐 때 내 어린애 데리고 다니는데 애가 목마르다고 짜증내고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그럴 때 봐야 안다니까요. 그런 순간에 바로 그 사람에게 “네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 하늘의 상급이 있으리라.” 하는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겠습니까? 꼭 상급을 위해서 일을 합니까?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해보라 이겁니다. 그러면 성경의 말씀이 비로소 그 때 제대로 보이고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마치 거울을 보고 내 부족한 점 다 앎에도 불구하고 돌아서 있는 사람과 똑같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경말씀이 이해되지도 않고, 그 말씀이 주는 유익도 그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비해서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지 보십시오. 25절을 봅시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고 했죠? 이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들여다보고 돌아서서 있는 사람이 아니고 계속해서 들여다본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들여다본다는 의미가 뭘까요? 제가 전에 미국에 살 때, 제 삼촌 가정이 한국에서 여행을 왔어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워싱턴(Washington D. C.)에 구경하러 갔습니다. 제일 먼저 우주항공 박물관과 그 맞은편의 자연사 박물관을 봤습니다. 그리고 국회 의사당을 들어가는데, 자동차를 가지고 가서 삼촌의 가족과 제 아내를 내려놓고 저는 따로 주차장에 주차하고 들어갔어요. 그게 한 10분 정도 걸렸습니다. 들어가서 우리 일행을 찾는데 1층, 2층을 다 돌아다녔는데도 없는 거예요. 다행히 제 아내가 있으니까 길을 잃지는 않았겠지만 한참을 찾아도 없어서 밖으로 나와 봤더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제 아내에게 따로 물어봤더니, 제일 먼저 들어가면 국회 의사당 돔이 크게 있습니다. 거기가 제일 중앙인데 거기 서셔서 좌우로 한번 살피시고는 “가자.” 하셨다는 겁니다. 다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가서 제가 주차하는 사이에 이미 나온 거예요. 그런데 거기는 한나절을 봐야 됩니다. 상원도 가봐야 되고, 하원도 가봐야 되고, 위원회도 가보고, 기념품 파는 데도 있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 사무실도 있어서 직접 볼 수도 있고 다양하게 볼거리가 있고 안내하는 사람이 다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도 안 보고 좌우 한번 살피고는 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저희 삼촌뿐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 관광이 다 그래요. 하루에 몇 개 봤냐가 중요합니다. 정신없이 몰아쳐서 봅니다. 시간 정하고, 1분 1초라도 늦으면 벌금내고 막 뛰어다닙니다. 그리고 몇 개 보고나서 멋있는 호텔에 밤늦게 들어와서 자고, 또 다음날 일찍 나가서 휘리릭 돌아다니고, 갖다오면 뭘 봤는지 몰라요. 전부 휙 둘러보고는 “가자.” 하는 겁니다. 얼른 사진만 찍고 옵니다. 그게 아니고 계속해서 자세히 차근차근 보는 것입니다. 돌도 한번 두드려보고, 자세히 보고, 뒤집어도 보고, 새로 보고, 물어 보고, 의미를 보고…, 이게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거기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요.
성경의 말씀도 계속 들여다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그런가 하고 행해보고, 행해보면 그 말씀이 새롭게 이해가 됩니다. 또 행해보고, 그러면 또 이해가 됩니다. 행하고 보고, 행하고 보고, 행함이 없이 성경을 아무리 봐도 깊이 있게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참된 지혜로써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행해보지 않으면요.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게 뭡니까? 행하면 행할수록 그 의미의 깊이가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 말이 이 말 같고 저 말이 저 말 같아서 모르겠습니다.” 하는 게 곧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나는 성경말씀대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이 말도 저 말도 다 비슷하네요.” 그 말하고 똑같습니다. 어떻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말이 있고, 네 부모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관계가 됩니까? 보통 실제로 하나님을 따르면서 우리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가려는 노력이 없으면, 바로 네 부모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냥 미워하라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죠. 내가 주님을 따를 때에 믿지 않는 부모 형제들이 나를 핍박하고 어렵게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를 때의 아픈 마음, 그게 느껴질 때 그게 실제로 내가 경험될 때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없어진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들이 나를 어렵게 하는 과정에서도 매몰차게 주님을 따라가야 되는 아픈 마음,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이 말인가, 저 말인가 하고 “왜 성경은 다 말이 이렇지?”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자, 그렇게 되면 그 율법이, 그 말씀이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자유케 한다? 그게 서로 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은 마치 나를 속박하는 것 같애요. “왜 율법이 나를 자유케 할까? 율법은 계속 하지 마라만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죠. 그런데 자유는 크게 두 종류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의 자유도 있습니다. 그때 누리는 자유, 이건 엄청난 차이입니다. 어떤 차이냐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유는 마치 거지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스스로 더러움에 처박히고, 또 아무데나 가서 자고 아무거나 먹고 그냥 거지 노릇하면서 이 세상을 마음껏 다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 안 나오고 열심히 낚시 하러 다니고 놀러 다닐 수 있습니다. 그게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예요. 그러다가 교회 오려고 하면 속박당하는 기분이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교회에 와야 되니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내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뇌물 받는 것도 못 받을 수 있고, 내가 세상적 방법으로 뭔가 지름길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가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요. 마치 내게 속박을 주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율법을 느낄 때는 나를 속박하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것을 실제 내 삶 속에서 행해보기 전에는, 행하면서 그 율법의 효과를 내가 느껴보기 전에는 율법은 내게 있어서 나를 속박하는 율법이지, 자유케 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거지의 자유함도 있지만 정반대의 자유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전부 가짐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껏 살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거지의 자유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유죠. 하나님을 안 믿는 자유는 바로 거지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함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보기만 하면 마음이 뒤틀립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힘든 명령을 했지?” 이렇게 생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예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으라.” 이게 하나님의 진짜 명령이에요. “그러나 단지 하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한 가지 지킬 것만 이야기하고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유의 법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하나님의 속박의 법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은 나를 속박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죠. 벌써 하와의 대답 속에서 나타나죠. “하나님은 왜 내게 먹지 말라고 했지?” 거기에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뱀이 속삭이죠. “네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질투하는 분, 하나님은 마음이 냉정한 분,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분으로 점점 바꿔가기 시작합니다. 사탄의 뜻을 받아들여 홀딱 먹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인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에덴동산에서의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죄인이라는 의미예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왜 괜히 하나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요. 그런데 그 마음을 치고 한번 순종해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려고도 노력해보고,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려고도 해보고, 열심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또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줌으로써 내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을 계속 해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내게 손해인 것 같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것 같지만, 그렇게 생활하기 시작하면 이것이 어느덧 습관이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아, 이 말씀이 나를 속박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고, 나에게 자유를 주시고 내게 기쁨을 주시고 내게 안식을 주시고 진정 천국 생활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율법에 있구나.” 이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뜻을 알기 위해서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해보고, 순종해보고, 또 말씀을 생각하고 해보면 25절에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겁니다. 우리의 원래 감정에서는 율법을 싫어하고 율법을 지겨워합니다. 율법이 나를 속박하는 도구인 것처럼 우리는 느낍니다. 그러나 일단 믿음으로 결단하고 율법의 뜻대로 행하기 시작하면 드디어 오히려 이것이 내게 자유를 주는 놀라운 축복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이 경험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쳤는데 가르치다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집니다. 학기 초가 되면 제 강의를 듣겠다고 수강신청한 사람들이 수강신청서를 내고, 또 일부 사람들은 “교수님 강의가 좋아서 청강하러 왔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청강하러 온 사람들은 4주나 5주 되면 다 떨어져 나갑니다. 강의가 별로 재미가 없어져요. 간혹 질긴 사람들은 학기 끝날 때까지 청강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어요. 그런데 학점으로 신청해서 한 사람들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청강생은 숙제를 안 해도 됩니다. 청강생은 시험을 안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시간 숙제를 내주고 시험도 보고 그럴 때 열심히 그것을 공부해 오고, 숙제해 오고, 또 시험보고 이렇게 한 학기를 지나면 실력이 엄청나게 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강의도 또 숙제를 충분히 해서 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데, 청강생은 아무런 숙제도 없이 그냥 몸만 와서 듣다 보니까 이해도 안 되고 그렇게 뼈저리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러니까 점점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믿음의 청강생 없습니까? 주일날 와서 “한번 들어보자.” 하고 청강하러 옵니다. 처음에는 “좋네.” 그러다가 몇 번 들으면 내가 그 말씀을 깊이 내 심령에 뿌리내리게끔 다시 반복해서 듣고 생각하고 하면서 실제로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몇 번 들으면 그 말이 그 말이예요. 별거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그저 다 그렇던데 뭘.” 그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그 말씀대로 행해보지 않으면, 주일날 한번 나왔다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냥 또 6일을 평소대로 살다가 다시 주일날 안부 묻고 가고, 청강하러 왔다 가고, 그 인생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들었으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으니까 뭔가 느끼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는 순간 느낍니다. 그런데 느끼고 돌아서면 까먹는 거예요. 문에 나가면서, 인사하면서 다 까먹습니다. 모든 말씀을 다 반납하고 갑니다. 그게 청강생이에요. 여러분,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청강생 아닌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듣기는 듣고, 들을 때는 좋은데 그저 좋은 것으로 끝나는 것, 그 말씀이 내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사는 것대로 살고, 그냥 주일날 교회는 나오고, 이런 청강생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청강생이 아니고 진짜 학생이기를 바랍니다. 진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약 1:22-25 / 박상훈 목사
옛날 어느 성에 아주 오래되고도 낡은 악기 하나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 악기는 누가 보더라도 값지고 귀한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오랫동안 악기를 사용하지 않아서 악기의 외부에 하얀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습니다. 또 창고에 있는 습기 때문에 줄도 축 늘어져서 제대로 소리가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악기에 대한 전문가들이 나타나서 그 악기를 한 번 고쳐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악기의 구조가 너무나도 복잡해서 누구도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악기의 외부에 묻어있는 먼지를 다 털어내고, 거기에 예쁜 색칠을 해서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하게 만들뿐이었습니다. 악기의 본질은 소리를 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연주할 수가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노인이 그 성에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그 악기를 보더니 대뜸 팔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그는 먼저 다른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악기의 외부에 칠해 놓은 페인트칠을 깨끗하게 벗겼습니다. 그리고 외부에 치장해 놓았던 것들도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뒤 그는 악기를 하나씩 분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속속들이 악기 속에 있는 먼지들을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다시금 악기를 조립했습니다. 축 처진 악기의 줄을 팽팽하게 조이고 또 조율까지 마쳤습니다. 모든 작업이 끝난 뒤 노인은 그 악기를 손수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도 멋지고 황홀한 멜로디가 그 악기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악기를 그렇듯 손쉽게 고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노인은 다름 아닌 그 악기를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악기를 자기가 만들었으니까 악기의 본질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점을 찾아내어 악기의 본질대로 다시금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어쩌면 악기와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죄라는 먼지 때문에, 세상이라는 습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살아야 할 본질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가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야지 치유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윤리, 도덕, 교양 등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저 악기의 외부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연주하시도록 만들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본질적인 소리를 내는 삶, 곧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차를 새로 살 때 그 차와 함께 따라나오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을 매뉴얼이라고 부릅니다. 안내서입니다. 거기에 보면 차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차를 어떻게 작동하며, 또 몇km정도 뛰고 나면 엔진오일을 바꾸어주어야 되고, 타이어를 갈아 끼워주어야 하는지, 또 간단한 고장이 났을 때 수리는 어떻게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매뉴얼대로 차를 몰면 차의 수명이 다하기까지는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그 매뉴얼을 만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차를 설계한 사람,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그것을 작성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써 주신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우리는 탈없이 행복하게 본질적인 소리를 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사도 야고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 앞에서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야고보는 세 가지로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마음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주신 말씀이니까 내 경험에 어긋난 것 같고, 내 상식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 살아 역사합니다. 구원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물론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다른데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며, 말씀을 실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여기서 동사형을 쓰지 않고 명사형을 썼습니다. "말씀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더 강조적으로 말씀해 준 것입니다. 예컨대 "싸워라"고 하지 않고, "싸우는 군사가 되라"고 하면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삶 전체가 싸우는 일에 바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쳐라"고 하는 말보다는 "교사가 되라"고 하면 삶 전체를 가르치는 일에 종사해야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집을 지어라"는 것보다 "건축가가 되라"고 하면 그 일에 더 철두철미하게 전념해야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행하라"고 하는 것보다도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일에 쓰임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산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17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죽은 시체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어야 역사합니다. 믿음이 죽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였습니다. 그 때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동란 중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잡혔습니다. 일정 가운데는 부산에 있는 유엔군 참전 용사들의 묘소를 참배하는 계획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미8군 당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전시입니다. 말이 묘지이지, 거기에 무슨 잔디가 있었겠습니까? 황량한 벌판일 뿐이었습니다. 그저 시체가 생기면 땅 속에 파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니 황량한 모습의 묘지를 어떻게 대통령 당선자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늦겨울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잔디를 구하겠습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습니다만, 당시 현대상사의 정주영사장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8군 당국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묘지에 풀이 나게 할 테니까 돈을 주겠느냐?"
그들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좋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 방법을 한 번 들어보자."
그러자 정주영사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법을 말해주는 것은 좋은데 그 방법만 듣고서 돈을 주지 않으면 나만 손해볼 것 아니냐? 그러니 먼저 계약을 체결하자."
미8군 당국자들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좋다. 돈은 실비의 3배를 주겠다. 좌우지간에 그 날 묘지가 새파랗게 되도록 바꾸어만 달라!"
그 길로 정주영사장은 그 주위에 있는 보리밭을 모두 사들였습니다. 때마침 눈속에는 보리싹이 새파랗게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부들을 시켜서 그 보리를 다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때를 입히듯이 그것으로 묘지를 다 입혔습니다.
예정한 날 아이젠하워장군과 그 일행은 유엔군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습니다. 묘지마다 새파란 보리싹이 덮여 있었으니까 보기에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에 그 묘지는 다시금 누런 색깔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리에 뿌리가 없으니까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결국은 그 영혼이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병들어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맙시다.
둘째로,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저 듣기만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대로 나아가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것을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23∼24절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앞에 거울이 있습니다. 얼굴을 쳐다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빗을 가지고 머리를 바르게 빗어야 할 것입니다. 얼굴이 더럽습니다. 그러면 가서 물로 깨끗하게 세수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거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얼굴이 더러워져 있는데 그냥 다른 일을 하려고 깜빡 잊었다면 거울을 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늘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고쳐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깨끗이 씻어버려야 할 더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으면 나아가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씨뿌리는 자가 좋은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크게 네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단계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싹이 터야 합니다. 깨닫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내가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인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내게 깨닫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셋째로, 꽃을 피워야 합니다. 깨달았으면 작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내가 이제는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러한 결심이 서야 합니다.
넷째로, 열매를 맺는 단계입니다. 깨달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65세에 자기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가 므두셀라를 낳기까지는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되는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고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너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고쳐라!"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바르게 살지 못했구나!" 그는 결심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는 결심한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로부터 300년 동안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려졌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이국 땅에서 허랑방탕하면서 자기의 재산을 모두 허비해 버렸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더러운 돼지나 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배가 고프니까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탕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왜 거기서 주려 죽으려고 하느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구나! 불효막심한 죄를 지었구나!"
그는 깨닫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야지. 가서 나의 잘못을 구하고 용서를 구해야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영접해 주었습니다. 비단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손에 금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하고서 아들의 잃어버렸던 지위를 다시금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내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겠구나!"라고 결단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 결심이 섰으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내가 만난 시험은 나에게 오히려 엄청난 축복을 안겨주는 하나의 놀라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잊어버리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실행하는 자가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25절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특별히 두 가지의 축복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5절 상반부에 보면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자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자유하게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 곧 사람이 만든 법은 우리를 구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에서 해결해 줍니다. 근심, 걱정, 염려, 고통,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2차전 당시에 그는 화란에 있는 자기 집에 유대인을 감추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만 나치에 의해서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언니도 죽었습니다. 코리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뒤에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조국 화란뿐만 아니고 미국, 영국을 순회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지친 심령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가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서 늘 이러한 마음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독일에는 가지 않을거야! 그 사람들은 더 고통을 당해야 돼! 더 괴로움을 당해야 돼! 독일은 망해야 돼!"
그러나 성령께서 강령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는 독일 사람들에게도 화해와 용서의 복음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도 교회에서 화해와 용서의 복음을 독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난 뒤 관례에 따라서 그는 그곳에 참석한 교인들과 함께 일일이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갇혔던 포로수용소의 악명높은 감독이었던 것입니다. 코리는 그 사람 때문에 말로 못할 고통을 당했습니다. 언니도 그 사람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코리는 속으로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만큼은 제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을 제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코리야! 나는 지금 너에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용서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그를 사랑해라. 용서해라."
코리는 다시금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 그 남자가 자기 앞에 섰습니다. 그는 물론 코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코리는 그를 마주하기가 싫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란 사람인 당신이 이곳에 오셔서 용서의 복음을 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독일 사람들이 전쟁 중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과거의 제 잘못을 용서함 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이렇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코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너무나도 기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는 그 때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순간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누리에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 속에 그토록 짓누르고 있던 고통 속에서 나는 완전한 자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 걱정,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2. 약속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법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부족합니다. 자꾸 뜯어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을 온전하게 채워줍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줍니다. 병든 것을 다시금 본질대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기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는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밤새도록 노력했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쩔 수 없이 빈 배를 바닷가에 갖다 대고 그물을 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물은 밤에 내려야지 아침에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깊은 데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깊이에 내려야 합니다. 경험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는 동료들을 손짓해서 불렀습니다. 고기를 잡은 것을 배에 채우니까 두 배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하게 채워지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시면 아침에 그물을 내리십시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시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십시다. 상식에 맞니 맞지 않느니, 경험적으로 틀린 말이니 옳은 말이니,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자유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부족함이 채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을 붙들고, 깨닫고, 결심하고, 결심한 바를 실천에 옮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 믿으시고 그 말씀을 붙들면, 내가 당하는 시험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는 가운데 그 동안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깨달았으면 잘못된 것은 과감히 고치고, 바르게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십시다. 그리고 결심한 바를 실천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부족했던 것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가족의 문제, 나와 너와의 관계의 문제, 이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실천의 영성으로 성숙하라
약 1:22-27 / 황광민 목사
옛날 경남 함안에 있는 어느 교회에는 충성스럽지 못한 김집사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이 20여명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은 두명 뿐이었습니다. 그들 중의 하나가 김집사인데 믿은지가 오래되어 주동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정월이 되면 월정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면 김집사님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그 교회에서는 제일 많이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 분은 해마다 제일 먼저 작정하고, 제일 많이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이 다 되어도 한 달치도 내지 않고 해를 넘기고는하였습니다. 또 새해 첫 주가 되어 월정헌금을 작정합니다. 그러면 그 김집사는 예외없이 제일 먼저 손을 들고 가장 많이 작정을 합니다. 그것도 작년 수준보다 20% 정도 올려서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 12월이 되어도 한달치도 내지 않고 해를 넘겨버립니다. 김집사는 해마다 상습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전도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월정헌금 정해놓고 한달치도 내지 않습니까?", "형편이 되어야지요.", "그럼 왜 형편도 안되는데 제일 먼저 손들고 그것도 제일 많이 작정을 하십니까? 형편대로 하셔야지요.", "그야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지요. 내가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올려 정해야 다른 교인들이 따라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사님이 물었습니다.
"내지도 않을 것,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작정하면 무엇합니까?"
그랬더니 그 집사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도 작정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요. 그래도 내가 이렇게 해야 교회가 운영이 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일도 중요하지만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해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야고보의 실천적 영성을 잘 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하여 <실천적 영성으로 성숙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고보의 실천적 영성
첫째로 야고보의 실천적 영성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고보의 영성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싱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 실천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논리적인 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사실 믿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도 믿음이 주제인 로마서 2:13에서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야고보의 영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절하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아래 신앙지상주의의 신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공로사상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천주교회의 지나친 공로사상에 대항하다보니 루터는 신앙일변도의 신학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루터의 후예들 가운데는 도덕무용론이라는 가르침까지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천적 영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루터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야고보의 실천적 영성을 찬양합니다. 웨슬리의 영성 훈련은 로마서의 신앙제일주의의 영성에서 야고보서의 실천적 영성에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물론 웨슬리도 은총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천적 영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이것만으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를 더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실천적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웨슬리는 성도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속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 세상에서 소외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야고보서의 실천적 영성이 아주 중요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웨슬리는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절하했던 야고보서를 다시 살려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야고보의 실천적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회는 바울의 신앙지상주의의 영성에 빠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이 실천적 영성에 다소 무관심한 칼빈의 사상으로 교육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리교인들도 웨슬리 신학에 바로서지 못하고 루터식의 '오직 믿음' 사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석교의 가족 여러분! 웨슬리는 야고보의 영성으로 성결에 이르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실천적 영성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도가 되십시다.
실천하는 자에게 복이 임함
이제 두 번째로 실천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잘 살피며 또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나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요,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천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도 않고 다 잊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실천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말씀을 듣고 배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배워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를 지 몰라도 자신은 압니다. 양심이 가책을 줍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속이고 실천하지 않으니 큰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람을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는 잘못된 곳을 고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가 바로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석교의 가족 여러분! 말씀을 듣고 행치 않으므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마십시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도 말로만 떠벌리고 실천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말로 떡을 하면 조선이 먹고도 남는다"는 비웃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도 싫어하고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이 얼른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둘째 아들에게도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밭에 나가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묻습니다.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는가? 두 아들이 다 문제가 있지만 두 번째 아들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말보다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아들이 부모를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또 그런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니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일제 때, 오종덕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교회에서 강제로 쫓겨나 산골에 들어가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1938년 섬기던 풍천교회에서 쫓겨나 산골로 들어가 천수답을 사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1942년 극심한 가뭄이 온 나라를 덮쳤습니다. 봄에만 약간 비가 왔을 뿐 계속 가뭄이었습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곡식들은 다 타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그렇게 고대하던 비가 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기뻐하며 다투어 나가 논에 물을 댔습니다. 그러나 오목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4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의 논에는 물이 그득하였으나 오목사의 논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논에서는 벼가 시퍼렇게 자라는데 오목사의 벼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오목사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마침내 오목사는 벼를 베어버리고 메밀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가뭄은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의 벼도 다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논에는 아무것도 거둘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목사는 메밀을 거두었습니다. 메밀은 가물어도 잘 자라는 곡식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때를 놓쳐 메밀도 심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일성수를 실천한 오목사만이 수확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실천적 영성에서 본 경건
이제 마지막으로 실천적 영성에서 본 경건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실천적 영성의 경건은 구체적입니다. 26-27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경건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도가 경건의 전부가 아닙니다. 찬송부르는 것이 경건의 전부가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경건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 찬송을 부르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그리고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다 중요합니다. 이것들은 경건을 이루는데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은 기도, 찬송, 예배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유럽 문명의 기원은 6세기의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네딕트 수도원의 훈련에는 3가지 계율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공부하는 것이요, 둘째는 기도하는 것이요, 그리고 셋째는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학문의 진실성을 추구하게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일하는 것은 학문의 실용성을 성취하게 합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종교의 미신화를 예방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일하는 것은 종교의 생활화를 이룩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노동의 기술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노동의 신성화를 성취하였습니다. 노동의 기술화는 생산성을 높였으며 노동의 신성화는 직업의 귀천의식을 타파하고 일에 대한 사명감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삶속에 뿌리를 내린 경건생활의 훈련이 유럽의 문명과 문화를 꽃피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경건은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우리의 삶에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를 들었듯이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떠들어대는 사람,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떠벌리는 사람들은 경건과 거리가 멉니다. 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중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다. 삶속에서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실천해야 할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고보의 실천적 영성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영성으로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나아가서는 영국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러한 실천적 영성이 필요합니다.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순수 종교적 경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 실천적 영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십시다.
자유케 하는 율법
약 1:23-27 / 곽선희 목사
청바지 차림의 한 신사가 은행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는 사업상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은행에서 의논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마침 담당 직원이 외근 중이라서 만날 수가 없었고, 해당 부서에 상담해 줄 지점장도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상담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이야기 하는 여직원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여직원에게 자동차 주차권 확인 도장을 좀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탁을 했는데, 여직원은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와서 저금을 한 것도 아니고 인출 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 찍어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은행의 방침이고 규칙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신사는 아주 불쾌했습니다. 다음날 다시 와서 150만불을 모두 인출해 갔습니다. 그는 IBM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은행과 거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돈을 찾아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법이 무엇입니까? 방침이 무엇입니까? 규칙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한 규칙이고 무엇을 위한 법입니까? 좀 더 성숙한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자동차를 운전하십니까? 운전하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 앞에 신호등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너무 많다고 할 만큼 신호등이 많습니다.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이 번갈아 꺼지고 켜집니다. 그 앞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저 신호등은 참으로 고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저것은 왜 있어서 남의 길을 가로막나? 이렇게 생각 하십니까? 저기에 서 있는 경찰을 보면서 이 더운날, 추운날.. 나와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시는구나.. 참 고맙다. 이렇게 인사를 못해도 고맙다 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저 양반은 왜 저기에 서서 남을 못가게 만드나?..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법을 통해서 자유를 느낍니까? 아니면 속박을 느낍니까? 그것은 내 마음에 달렸습니다. 당신은 어느쪽입니까? 그것이 바로 당신의 수준입니다. 당신의 인간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5장 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인간은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의 영역을 사는 것입니다. 자유만큼의 인격을 사는 것입니다. 자, 얼마나 자유를 느끼고 있습니까? 저 신호등을 보시며 자유를 느낍니까? 속박을 느낍니까? 경찰서 앞을 지나가며 자유를 느낍니까? 두려움을 느낍니까? 그것이 당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생의 원문의 뜻은 ‘겐네세 아노센’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위로부터 난다는 말 뜻입니다. born from above.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출생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을 합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그는 노예입니다. 불평불만의 사람입니다. 만사가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살고싶지 않습니다. 고마운 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원망하고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그 사람은 노예입니다. 노예적 성질 속의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모순된 것 같으나 현실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원목으로 오래 있던 제 동기 동창 친구가 있습니다. 그 분이 제게 아주 자세하게 말해 준 실화입니다. 연세대학에 한 학생이 있었는데, 아주 데모를 많이 하는 친구입니다. 공부는 안하고 밤낮 거리에 나서서 데모하는데 선두에 서고 학생회장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감옥에 들락날락하고. 이런 학생이 있었는데, 학교도 세상도 정치도 누구도 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학생이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이 없었지만, 의사들이 그 젊음이 너무 아까워서 의사들이 자신들의 돈을 모아서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고 보니, 암세포가 꽉 차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대로 봉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잘 살면 6개월을 살 것이니, 뜻있게 살기를 바란다고 병원에서 나설 때에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병원문을 나서는데, 문간에서 그대로 마당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더랍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하나님, 1년만 살게 해주세요. 좀 보람 있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병원언덕을 내려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늘을 푸르게 보십니까? 어둡게 보십니까? 여러분이 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모든 역사가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 같아도 중생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이렇게 복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유케 하는 율법 2장 12절에 보면 자유의 율법.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자유케 하는 율법. 자유의 율법.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고 양심의 법이 있고 도덕의 법이 있고, 나라의 법이 있고 규칙이 있고 규례가 있습니다. 이 법은 있어야 합니다. 법이 있어야 질서가 있고 있어야 우리가 자유합니다. 그런데 이 법을 통해서 내가 자유를 얻느냐. 아니면, 속박을 느끼느냐. 이 법을 통해서 무한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느냐. 아니면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사느냐. 그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유케 하는 율법을 향유할 수 있을 까요? 먼저는 율법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아는 순간 진리의 깊은 뜻을 아는 순간 내 영혼은 자유한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합니다. 율법의 본 뜻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알고 율법을 느끼고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 뜻을. 그 깊은 뜻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그 본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아주 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그것은 엄청난 질문입니다. 말을 바꾸면,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느냐? 하나님의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많은 규례를 주셨습니다. 규칙을 주고 법을 주었을 때에 이것은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본래적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대요리문답 속에 그가 해석하는 십계 해석을 저는 사랑합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해석이었습니다. 보세요. 중간에 몇 말씀만 드립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우리의 순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우리의 사유재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의 인격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할 때는 통쾌할지 모르지만, 속으면 아주 괴롭습니다. 인격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거짓증거 하지 말아라. 모두가 거짓증거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격이 얼마나 아름답게 지켜져 나가겠습니까?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내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깊은 뜻을 알면,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율법을 알고 율법의 뜻을 배우는 것만 아니라,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 사랑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윤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이것은 종교개혁 신학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논리입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고 이것을 지키면 구워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 가지 재앙과 큰 능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건져서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오게 하고, 광야에 갖다놓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라.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으니 지켜라. 그리하여 자유하라. 그리하여 행복하라는 것이 율법의 근본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 입니까? 그러므로 율법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마음대로 학교 다니기 전에 뛰어 놀다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1학년 2학년 다니다 보니 얼마나 속박이 많습니까? 시간 지켜야지 일찍 일어나야지. 그러다 겨울방학이 되었습니다. 살았다. 이제는 늦잠을 잘 것이다. 밤늦게 까지 돌아다니다가 이제는 늦잠을 자도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아버지께서 보통 때보다 더 일찍 깨우셨습니다. 일어나라. 산책 가자. 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졸려죽겠는데,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어느 동물이 늦잠을 자느냐. 참새도 일찍 일어나고, 소와 닭도 일찍 일어나고 모든 동물이 부지런해야 사느니라. 일어나. 아침마다 깨우십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바이오리듬이 깨지면 안 된다. 한 평생을 통해서 일이 있어도 없어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 데리고 아침마다 산책을 합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가 몇 살이 되어야 아버지에 대해 고마워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철이 나서 우리 아버지는 훌륭하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그 분의 자식이 된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언제 철이 날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이 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이 많은 규례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런데 아직 불평스럽습니까? 원망스럽습니까? 언제 철이 날 것입니까?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율법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또한 나아가서는 지켜 행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그 행한 일에 복을 받으리라. 행한 일에 복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행해야 합니다. 행하면서 깨닫고 행하면서 자유의 법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르치라 곧 잊어버릴 것이다. 보여주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참여시켜라 동참하게 하라. 행동하게 하라. 그러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이 경험할 것만큼만 압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컴퓨터니, 뭐니해서 많이 배우기는 하지만, 세상에 무식합니다. 왜요?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데, 실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데 그 산 교육이 없습니다. 말만 많습니다. 생각만 많습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헬라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있습니다. 그의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그는 선을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선이요. 공부하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의 6대 덕목 중에도 첫째가 공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 안하는 것이 죄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것이 제일 덕입니다. 두 번째 덕목은 도덕적인 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건물을 지어야 건축가가 됩니다. 하프를 연주해야 하프연주가가 됩니다. 피아노를 쳐야 피아니스트입니다. 이제 말씀드립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만이 피아노의 소리를 압니다. 저희 교회 피아노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입니다. 스타인웨이. 여러분 피아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피아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냥 피아노가 아닙니다. 이것이 연주가들이 때때로 나에게 와서 저를 괴롭힙니다. “목사님 제가 연주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피아노 한 번 쳐보면 안 되나요? 꼭 쳐보게 해주십시오.” “안됩니다. 왜요? 교회 물건을 누구에게 줍니까? 피아노 많은데 아무거나 치지.” “아닙니다. 그것을 한 번 곡 쳐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피아니스트여야 피아노를 압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만이 피아노 소리를 압니다. 그와 같이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만이 율법을 앞니다. 사랑하라 할 때에 사랑한 사람만이 압니다. 희생하라 할 때에 희생한 사람만이 압니다.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를 저본 사람만이 십자가의 능력을 압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그 깊은 뜻. 그 율법 속에 있는 깊은 사랑. 어떤 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십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의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이다. 여러분,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하는 이야기와 십계명과 사랑하라는 말이 같은 것으로 들려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보면서 사랑을 알아야합니다. 아가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하라는 것의 그 뜻을 압니다. 그리고 감격합니다. 미워하는 자와 불평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는 영영 율법을 모릅니다. 율법을 통해서 두려움만을 느낍니다. 절망, 저주만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율법을 통해서 사랑과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지그 지글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정상에서 만납니다] 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왜? 법을 지키기를 싫어할까? 3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지켜보려고 해도 지켜지지 못할 것, 맹세해 보아도 소용이 없는 것 되는대로 살자. 부정적입니다. 둘째는 망설임 때문입니다. 오늘 하지 말고 다음부터 하자. 다음에 하지, 다음에. 그러면서 한 세상 다 살았습니다. 세 번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지켰을 때에 그 다음에 오는 후속 결과는 무엇인가 유인인가 불이익인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말씀에 따라 자기의 생명의 의탁하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그 다음에 들은 세상에 대해 묻지 마십시오. 죽든 살든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습니다. 사람이 알아주든 몰라주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모든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이스라엘 랍비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질문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느라 고생을 하더군요. 그래요. 24시간 지키는 것이지만, 실수를 할까봐 25시간을 지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5시간을 꼼짝 못하고 all stop하고 안식일을 지키니 얼마나 힘들겠냐고, 장사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질문을 했더니, 랍비가 껄껄 웃으며,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저는 안식일이 없다면 어떻게 살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밖에는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바쁩니다. 이렇게 돌아가다. 안식일이 되면 땡하고 그 다음에 전화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신문도 안 보고 텔레비젼도 보지 않고 all stop하고 회당에 아이들과 같이 갔다 와서 식사를 하고 또 아이들과 놀고 하루를 지냅니다. 이 안식일이 없다면 제가 어떻게 안식일을 살겠습니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완패입니다. 얻어맞았습니다. 여러분 주일을 어떻게 지키십니까? 하나님의 날을 어떻게 지키십니까? 감사하면서 지켜야 합니다. 자유케 하는 율법, 나를 행복하게 하는 율법 사랑으로 충만한 율법을 지켜나가면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참된 경건
약 1:26-27 / 최승윤 목사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름은 있지만 열매, 즉 실질적인 내용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6절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26절은 이런 뜻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경건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야! 믿음이 좋은 사람이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 근거도 없다면,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경건한 사람”은 그 범위를 크게 잡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전체를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경건한 사람”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어떤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보통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을 떠올립니까? 여러분들은 다른 기준을 갖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 기도와 찬양,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 헌금생활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외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 쓸모없는 것,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경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참된 경건”의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경건한 모습, 종교적인 태도가 몸에 배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언어생활과 태도가 절제있고, 규모가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그 경건은 아무런 유익도 없고, 헛된 것이요, 참된 경건이 아니라는 큰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을 갖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건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혀를 재갈 먹인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다. 말을 적게 하면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처럼 보인다. 한 두 마디 말로 하면 될 것을 열 마디 스무 마디 하지 말라.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피곤하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를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찌니라”(잠언20:19절), “자기 혀를 재갈 먹인다”는 말씀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보다는 좀더 구체적입니다.
우선, 야고보 사도가 말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에 대한 교훈이 야고보서가 다섯 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매장마다 말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3장은 거의 대부분이 말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언어생활에 있어서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 판단하는 것, 시기와 다툼에서 나오는 허튼 자랑, 서로를 향한 원망, 저주하는 것”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절제하거나 여과하지 않고 쏟아내는 것을 야고보 사도는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에서 나오는 허튼 자랑은 자기가 남보다 낫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원망과 저주를 쏟아내는 것은 어떤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요, 미움과 상처와 울분을 저주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저거 없어지지 않나?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길래 저런 인간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시나? 벼락을 때려서라도 없애시지. 왜 살려두어서 남들을 힘들게 만드나? 정도의 차이가 있고, 기질에 따라서 속으로 하기도 하고 밖으로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난할 때, 판단하고 정죄할 때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틀린 구석도 있고, 모자란 구석도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은 그냥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그런 행위는 정당한 것이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시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겼다고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 아닙니까?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동일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경건한 사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어생활 가운데 이런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속으로 하든 겉으로 하든 그것이 특징이라면 그것은 유명무실한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헛된 것, 쓸모 없는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경건은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이기에 그것을 마음에서부터 잘라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자기를 통해서 입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참된 경건은 마음에서부터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건은 마음에서부터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요,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건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과 불성실함과 게으름을 정죄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탓 입니다. 내탓 입니다. 나의 큰 탓 때문입니다”(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의 태도가 언어생활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참된 경건이기에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자기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키면 그것 자체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런 거짓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잘못된 경건, 무익하고 헛된 경건을 털어내고 벗겨내지 아니하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언어생활과 태도에 고착되어 우리의 인격이 됩니다. 우리의 그런 모습들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인격을 고상하고 고급하게 만들고, 정신을 아름답고 성숙하게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이 단지 외적인 종교적인 모습, 종교적인 생활에만 열심을 내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어서 우리 자신을 이중적인 인격과 삶으로 살게 만드는 근본원인으로 작용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처와 아픔을 주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줘서 교회에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런 경건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렇다면 참된 경건은 무엇인가? 어떤 모습이 우리의 참된 경건을 증명해 주는 것인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예로 든 것은 그것 만이 참된 경건이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을 알 수 있는 특징적인 열매를 두 가지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소자 중에 소자들입니다. 과부도 돈이 많다거나 사회적인 신분이 있는 과부는 해당되지 않겠지요? 물론 그들도 외롭고 나름대로 힘든 일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돈도 없고 그들을 도울 만한 울타리도 없는 고아와 과부는 사회에서 힘겹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진국처럼 사회 보장제도가 잘 발달된 나라에서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인생살이 자체가 고달프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은 그런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를 돌아보되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적인 사랑,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으로 그들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아보다”는 단어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뜻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선 그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라는 사회적인 신분이 그들의 인격까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2장에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 모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일에 교회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당시는 귀족도 있고 노예도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귀족들이 좋은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교회에 나오면 교회 사람들이 대우를 해줍니다.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친근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옷도 허름하다 못해 더러운 옷을 입고 나오면 그 사람들을 천대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라면 그 사람들은 분명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깔보고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뿐 아니라 그들을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무시하는 태도로, 동정하는 태도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 따뜻하고 자비로운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면서 2:8절에서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는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초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상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절-2절) 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have not love, I am nothing.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본질과 핵심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요한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엄청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음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로서 존재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다는 것이요, 교회를 없애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회의 교회됨을 증명해주는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일을 아무리 잘하고, 모든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하여도 사랑을 상실하면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세련되고, 열심있고, 뜨겁고, 고상하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그런 자세와 태도가 고착이 되어서 도저히 고쳐질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단체는 될 수 있지만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다면 자신은 Nothing라고 말하고, 에베소 교회가 놀라운 일을 오랜 세월 동안 아무리 많이 했다고 하여도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행위를 갖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 저와 우리 모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잊고 사는 순간부터 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자신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입니까? 바로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속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세속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 순전하고 정결한 경건은 그렇기 때문에 세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4:4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좇아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외모 지상주의가 판을 치면 외모 지상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외모만을 가꾸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면 그런 가치관을 내가 갖고 있으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수다”라는 TV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나온 출연자 한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은 루저”라고 말을 한 모양인데, 그 사람의 신상을 까발리고 학교도 다니기 어렵게 만들었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이 싫다고 말한 것이 그렇게 큰 죈가?” 라고 하면서 한국사회의 광기와 폭력, 인터넷 상의 폭력이 무섭다고 했습니다. 이런 광기와 폭력,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예의도 없고 관용도 없고, 이해도 없는 그런 분위기와 문화를 그대로 교회에 갖고 들어온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침없이 말을 한다는 것은 솔직한 것이 아니라 무례한 것입니다. 무례한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기본적인 소양도 없다면 기독교는 천박한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을 가진 것으로, 신분으로, 학벌로 구분하고, 끼리끼리 자신들과 통하는 사람들만 사귀고 교제하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용서와 관용이 없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없이 사람을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인격적인 차원에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차원으로만 사람을 보는 사회, 그런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셨다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교회 봉사를 얼마나 열심으로 하고 있는가? 구제와 선교에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가? 하는 것이 경건을 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종교적인 행위들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종교적인 행위를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구제를 하고 자신을 불사르는데 내여줄 정도의 열정을 갖고 일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 없이, 하나님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경건생활을 하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유명무실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기 위함입니다. 내 안에서 그런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향해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대로 살지 않느냐?”
참된 경건은 종교적인 생활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존재의 변화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변화, 사고의 변화, 인격의 변화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은혜로운 말로 다른 사람에게 격려와 소망을 주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용서와 사랑과 관용이 인격적인 특징으로 자리잡을 때 확인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소자들이라도 외모를 갖고 차별하지 않고, 그들이 어려울 때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속적인 가치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가치와 목표를 향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으로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돈이 없다고 경건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요, 배우지 못했다고 사랑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돈이 없다고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이 많아도 그 지식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의 유무, 지식의 차이란 단지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가능성이 많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없다고 전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경건이 말을 통제하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세속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공평한 것입니다. 공평한 것이기에 핑계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충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사랑과 진실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매일매일 참된 경건을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도전하고 권면하고 있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면 그런 경건은 아무런 유익도 없고 헛된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 순전하고 정결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명무실하지 않고 본질에 충실하며, 광기와 폭력이 난무하고, 천박한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이 세상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며, 특히 소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건하게 삽시다
약 1:26-27 / 마경훈 목사
경건한 신앙생활
어느 교회에서 주일 저녁예배 시간에 외부 강사를 모시고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한 여집사님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 잘 말을 해서 그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강사는 설교를 마치고 회중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돕는 기도를 해 줬습니다. 강사는 회중에게 "이 중에서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강단 앞으로 나오십시오, 제가 영접하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을 모시고 온 부인 집사님은 남편을 쿡 찌르며 "여보 앞으로 나가세요"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 아내가 남편에게 왜 앞으로 나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남편이 대답합니다. "예수를 믿는 당신이나 믿지 않는 나나 다를 것이 없으니 내가 꼭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자의 경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불신자에게 신앙적인 영향력을 미치려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모양은 믿음이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아닙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태도라고 해서 중심만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스스로 자신은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신비로운 체험을 하거나 남 보다 앞장서서 일하기 때문에 자신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신자의 경건은 체험이나 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경건한 백성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책망하셨고 특히 세리나 죄인들보다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심한 책망과 저주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토대로 나의 경건은 하나님 앞에 인정되는 경건인가 아니면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그럼 우리가 읽은 본문을 살펴보며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1. 참된 경건은 올바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26절).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않는 사람의 경건은 헛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언어생할을 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경건하다는 말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올바른 언어생활은 어떤 것입니까?
1)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기를 원합니다. 말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어생활은 불신앙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말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민14:28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그 사람들의 말에 의하여 결정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화를 당하느냐 복을 받느냐가 그 사람들이 말한 대로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2)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속고 살았기 때문인지 진실을 잘 믿지 못합니다. 꼭 믿어야 할 사림인데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남의 말을 믿어줄 수 있는 단순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만을 말하는 좋은 언어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마 5:48을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진리의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의해서 진실을 말하느냐 거짓을 말하느냐를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객관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행동에 대해서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말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와 대화를 나눠보고 확실하게 알기 전에는 나의 판단대로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또 내가 상대와 확실하게 대화를 나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말하면 거짓을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나와 대화를 나눈 상대가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판단대로 말한 것이라면 그것도 진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해야 할 시기에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진실을 외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해서 상대의 인격이 드러날 수 있는 경우, 내가 말하지 않으면 상대가 피해를 보는 경우에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 말하지 않는 것은 진실을 숨기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거짓말에 대한 심판을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신자는 항상 진실을 말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3) 정결한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은 깨끗한 말과 더러운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말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들쳐 내는 말도 정결하지 못한 말입니다. 그 말은 상대로 하여금 곤란에 처하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를 일이라면 그리고 몰라도 될 일이라면 입을 다무는 것이 좋습니다. 억지로 말해서 허물을 들쳐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다.
음란한 말도 정결치 못한 말입니다. 흔히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우스개 소리로 음란한 말을 합니다. 심지어 교인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쉽게 그런 농담을 합니다. 좋은 것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상처를 건드리거나 상처를 내는 말도 정결하지 못한 말입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에게는 독이 됩니다. 몸에 칼을 데는 것이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니 마음의 상처가 더 큰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4)맛을 내는 말을 해야 합니다.
시기 적당한 말을 하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입을 다물어야 할 때 다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골4:6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소금은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 부패 방지의 기능입니다. 둘째 맛을 내는 기능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소금과 같이 부패를 방지하는 말을 하려면 진리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이미 그 말 자체가 썩은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소금과 같이 맛을 내려면 적당해야 합니다. 너무 조금 들어가면 싱겁습니다. 반대로 너무 많이 들어가면 짜서 먹을 수 없습니다. 적당하게 넣어야 제 맛이 나는 것처럼 너무 많은 말을 해도 안되고 너무 말을 안 해도 안됩니다.
2. 참된 경건은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27절).
27절에 보면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항간에 떠도는 루머 중에 기독교는 말만하고 사회 봉사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의 번성을 막는 사단의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나라에 세워진 많은 사회복지 시설 가운데 기독교 시설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 단체에서 자원봉사하는 봉사자의 숫자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1월 5일자 국민일보를 보면 자원봉사자들의 종교별 분포는 기독교가 44.1%, 무교 29%, 천주교 15.2%였습니다.
성경도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추수를 할 때 떨어진 알곡을 줍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이삭이라도 주어서 생활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교회 안에서 발생한 큰 문제를 몇 가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보십시오. 그들이 헌금을 하면서 사도를 속이다가 그것이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되어 죽게 된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사도들이 그것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돕는 일이있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 일에 동참하기는 했는데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일부를 드리면서 모두 내놓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다가 큰 변을 당했던 것입니다.
행6장에서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에 대한 차별 문제가 대두되면서 교회에서 안수집사 제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도 사도들이 과부들을 돕는 일을 하기는 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다보니 부주의로 차별이 생기게 된 것 아닙니까?
기독교 역사에 이름이 남은 영성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헌신한 일군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에 힘을 쓰는 것도 그것이 기독교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것을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소망교회는 최소한 교회 예산의 50%를 선교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가 영적인 일에 힘을 쓴다고 구제사업에 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적이며 영성적인 교회들이 이런 일에 더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인생의 여러 가지 목표 중에 섬김의 목표를 정하십시오, 일생동안 최소한 이러 이러한 섬김의 삶을 살겠다는 목표를 정하십시오.
진짜 경건은 모여서 기도하고 교회 봉사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3. 참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27절).
기독교인들은 바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와 같아야 합니다. 물고기는 바다 속에 살지만 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그리스도인 속에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와 같아야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 속에 살았지만 이방나라의 종교나 풍습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방해를 받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숭배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험 앞에서도 기도했으며, 풀무불의 두려움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문화 앞에 굴복하여 다 음란해지고, 사악해져도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말세가 되어 속고 속이는 일이 많아져도 그리스도인은 속여서는 안됩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속는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이유는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일반인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경건하게 살려면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삶을 사는 비결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딤전 4:5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화는 쌍방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듣게 만듭니다. 그리고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십시오(딤4:7)
경건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옹아리부터 시작해서 훈련되어 어른처럼 풍성한 언어생할이 가능한 것처럼 경견도 훈련돼야 합니다.
참된 경건
약 1:26-27 / 박상훈 목사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무엇인가?"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경건의 의미를 깨닫고, 매일매일 순간마다 경건의 실천이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골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늘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자기의 믿음이 제일 좋은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가 넌지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만약 자네에게 소가 열 마리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소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다네."
친구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말이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또 쉽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한 마리뿐만 아니고 열 마리라도 다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말도 없는걸 어떻게 하겠나."
친구는 마지막으로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돼지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그 농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역정을 냈습니다.
"자네! 간밤에 우리집 돼지가 새끼를 열 마리 낳은 것 어떻게 알았어?"
물론 우스개이야기입니다만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돼지 가운데 한 마리를 하나님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앞으로 소나 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큰소리 치는 사람은 언제나 시원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사실 언제나 말이 없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 한 유명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서 깊은 사막 속에 들어가 수도하는 일에 전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이 생기면 그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기도 하고 또 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수도사님, 우리가 수도사님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렇게 먼길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뜻밖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으면서도 실천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듣기만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이미 들은 것을 가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미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새로운 말, 신기한 말, 무엇인가 재미있고 유익한 말을 자꾸 듣기를 원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1:22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2:17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고,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해서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3:13이하에 보면 지혜도 참 지혜가 있고, 거짓 지혜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지혜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지혜도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경건을 참 경건과 거짓된 경건으로 구분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전연 기뻐하시지 않는 삶도 있습니다. 거짓된 경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속에서 참된 경건의 척도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언어생활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과연 경건한 사람인지 경건하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물질생활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물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경건생활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회생활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이 아니고, 교회 밖에서 곧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진정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경건의 모양만 보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첫번째 척도는 언어생활입니다.
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모름지기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데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먹여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말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그 자체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지, 조금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원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해방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곧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죽겠다! 다 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말 그대로 광야에서 다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14:28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러나 욥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얼마나 큰 시험을 당했습니까?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열 자녀도 다 죽었습니다. 그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생각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누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욥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참된 경건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동료 유대인들이 돌로 떼려 죽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서 어떻게 말을 했습니까?
"이 못된 놈들아! 너희가 잘될 줄 아느냐?"
만일 그가 그렇게 말했더라면 그의 순교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마음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들을 마음으로 감싸주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삶인 줄 압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삶이 경건한 삶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조심 해야되겠지만, 사람들 앞에서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근거없는 말, 지어낸 말, 또 듣기는 적게 들었는데 크게 확대해서 하는 말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상처를 줍니까?
여러 해 전에 논산훈련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관이 훈련병들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설명을 자세히 했습니다. 이제 훈련병들이 한 사람씩 사선에 올라서서 목표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실습을 하는 차례였습니다. 한 훈련병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습니다. 힘껏 던졌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목표물에 떨어진 것이 아니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대편력 중간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금 집어서 던질만한 시간적인 겨를도 없습니다. 옆에 있던 중대장이 그것을 보고서 자기 몸으로 수류탄 위를 덮쳤습니다. "쾅!"하면서 중대장의 몸은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누구였습니까? 강재구대위입니다. 나중에 추서되어서 소령이 되었습니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커녕 자기 동료를 죽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혀를 재갈먹이지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리게 되면, 교회를 부흥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문을 막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가운데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그 사람은 자기의 목에 연자맷돌을 매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
자기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교회의 문을 막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나는 경건하다. 내가 지금 예배 드리고 있으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 파숫군을 세워주옵소서. 성령께서 내 혀를 재갈 먹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급적이면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하다면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발명가 에디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의 정원을 정말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나와 보았더니 정원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꽃도둑이 와서는 꽃을 다 따간 것입니다. 꽃을 딴 것 까지는 좋은데 줄기를 잡고 흔들어놓아 어떤 것은 뿌리까지 뽑혔습니다. 그가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에디슨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큰 종이 위에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꽃도둑님 귀하
앞으로 꽃을 꺾으실 때는 손으로 꺾지 마시고 부디 여기에 매달아놓은 가위를 이용해서 잘라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위와 함께 그 메모지를 정원의 잘 보이는 곳에 메달아 놓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았습니다. 거기에 회신이 적혀 있었습니다. 회신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집주인님 귀하
주인님이 달아놓으신 가위는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숯돌에 잘 갈아서 다시금 매달아 놓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까? 내가 조금 속이 상했다고 해서 가시 돋힌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결국 그 말이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희의 오른뺨을 치느냐? 왼편 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고 하느냐? 겉옷까지 주어라.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느냐? 십리까지 가 주어라."
그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모습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경건의 첫걸음은 말을 조심하고 혀를 함부로 굴리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두번째 척도는 물질생활입니다.
우리가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경건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27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는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무슨 사회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었겠습니까? 일자리가 충분했던 것도 아닙니다. 또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주는 입장에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 보상하시리라는 마음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경건입니다. 불순한 동기가 없으니까 정결하고 깨끗한 경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물질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쉽게 대답합니다.
"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선한 목적에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 가운데 일부를 떼어서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돼지가 하루는 길거리에서 암소를 만났습니다. 돼지는 암소에게 다가가서 평소에 자기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을 토로해 놓았습니다.
"얘, 암소야. 반갑다!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느냐? 사람들은 내 고기를 가지고 햄도 만들어 먹고, 베이컨도 만들어 먹잖아. 어디 그것뿐이야? 내 창자를 다 빼 가지고 순대로 만들어 먹고 심지어 발가락도 족발이라고 해서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 암소만을 좋아할까?"
암소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이유는 뻔해. 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먹잖아. 그러나 나를 생각해봐. 나는 살아있으면서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주고 또 맛있는 우유를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하는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어차피 죽으면 남에게 다 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고 나서 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나쁜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베풀어주고 나누어주면 다른 사람에게서 칭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칭찬해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편지 한 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움켜쥐고는 나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신은 나의 것이지요. 나는 아주 쉽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우선 당신은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한히 값지며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포기의 풀도 살 수 없듯이, 내가 없으면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고 말 것입니다.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은행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내게 어떤 신비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들과 수없이 만납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순전히 나 때문에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난 어쩌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사람들,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이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나의 힘은 사실 무한하답니다. 그러니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입니까? 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이웃들에게 내 주머니를 털어서 돕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나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사랑의 실천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입니다.
경건의 세번째 척도는 사회생활입니다.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교회에서는 모두 경건한 척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경건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2:16에서 말씀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유혹합니다. 타락한 성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명예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세상에 물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짭니다. 그러나 바다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들은 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빛과 소금된 우리들은 세상이 어두우면 더욱더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부패했으면 더욱더 짠맛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Sunday Christian"이 되지 말고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얼음공장에서 생긴 일입니다. 여름철이 되면 얼음 주문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얼음공장은 항상 시끌벅적합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큰톱으로 얼음 덩어리를 자를 때 나는 소리, 또 인부들의 이야기 소리로 왁자지껄합니다. 거기다 얼음공장의 바닥은 톱밥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그 톱밥 위로 떨어지는 얼음조각들이 뒤범벅되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산란합니다.
거기서 일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시간을 좀 보려고 하는데 손목에 있던 시계가 없어졌습니다. 어딘가에 풀어놓기는 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값도 비싼 시계이지만 결혼할 때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받은 예물시계였습니다.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료들에게 같이 찾아보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작업장을 벗어나서 식당으로 갔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제 집에 가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무엇이라고 변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다보니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식사시간이 끝났습니다. 다시금 작업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에도 얼음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꼬마아이가 자기의 시계를 찾아서 손에 들고는 공장 입구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얘야, 나는 잃어버렸던 내 시계를 그토록 찾아다니느라고 애를 썼지만 찾지 못했는데 너는 어떻게 쉽게 찾았느냐?"
아이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인부들이 모두 식당으로 갔습니다. 시끌벅적하던 작업장이 조용해졌습니다. 아이는 공장 안을 지키기 위해서 책이나 읽으려고 한 곳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재깍재깍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톱밥을 헤쳐 보았더니 거기에 시계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주합니다. 세상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일에 찌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서 예배 드리는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건성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건성으로 듣고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십 번, 수백 번 통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 한 말씀을 읽고 듣더라도 그 말씀에 집중해서 그 말씀을 붙드는 심정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살아 역사하면서 내 영혼을 살찌우고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일과 속에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과 1:1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치 얼음공장의 식사시간처럼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이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제 우리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된 경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입술에 파숫군을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가급적이면 말을 아끼십시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다.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나온 그 소리대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꼭 말을 해야 된다면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서 쓰지 말고 환난 중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켜서 우리 마음을 늘 하나님께로 집중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기도생활 이대로 좋은가
약 1:26-27 / 김이봉 목사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무엇인가?"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경건의 의미를 깨닫고, 매일매일 순간마다 경건의 실천이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골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늘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자기의 믿음이 제일 좋은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가 넌지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만약 자네에게 소가 열 마리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소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다네."
친구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말이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또 쉽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한 마리뿐만 아니고 열 마리라도 다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말도 없는걸 어떻게 하겠나."
친구는 마지막으로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돼지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그 농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역정을 냈습니다.
"자네! 간밤에 우리집 돼지가 새끼를 열 마리 낳은 것 어떻게 알았어?"
물론 우스개이야기입니다만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돼지 가운데 한 마리를 하나님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앞으로 소나 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큰소리 치는 사람은 언제나 시원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사실 언제나 말이 없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 한 유명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서 깊은 사막 속에 들어가 수도하는 일에 전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이 생기면 그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기도 하고 또 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수도사님, 우리가 수도사님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렇게 먼길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뜻밖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으면서도 실천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듣기만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이미 들은 것을 가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미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새로운 말, 신기한 말, 무엇인가 재미있고 유익한 말을 자꾸 듣기를 원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1:22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2:17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고,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해서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3:13이하에 보면 지혜도 참 지혜가 있고, 거짓 지혜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지혜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지혜도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경건을 참 경건과 거짓된 경건으로 구분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전연 기뻐하시지 않는 삶도 있습니다. 거짓된 경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속에서 참된 경건의 척도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언어생활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과연 경건한 사람인지 경건하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물질생활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물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경건생활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회생활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이 아니고, 교회 밖에서 곧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진정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경건의 모양만 보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첫번째 척도는 언어생활입니다.
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모름지기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데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먹여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말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그 자체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지, 조금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원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해방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곧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죽겠다! 다 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말 그대로 광야에서 다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14:28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러나 욥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얼마나 큰 시험을 당했습니까?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열 자녀도 다 죽었습니다. 그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생각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누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욥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참된 경건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동료 유대인들이 돌로 떼려 죽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서 어떻게 말을 했습니까?
"이 못된 놈들아! 너희가 잘될 줄 아느냐?"
만일 그가 그렇게 말했더라면 그의 순교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마음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들을 마음으로 감싸주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삶인 줄 압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삶이 경건한 삶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조심 해야되겠지만, 사람들 앞에서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근거없는 말, 지어낸 말, 또 듣기는 적게 들었는데 크게 확대해서 하는 말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상처를 줍니까?
여러 해 전에 논산훈련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관이 훈련병들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설명을 자세히 했습니다. 이제 훈련병들이 한 사람씩 사선에 올라서서 목표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실습을 하는 차례였습니다. 한 훈련병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습니다. 힘껏 던졌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목표물에 떨어진 것이 아니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대편력 중간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금 집어서 던질만한 시간적인 겨를도 없습니다. 옆에 있던 중대장이 그것을 보고서 자기 몸으로 수류탄 위를 덮쳤습니다. "쾅!"하면서 중대장의 몸은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누구였습니까? 강재구대위입니다. 나중에 추서되어서 소령이 되었습니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커녕 자기 동료를 죽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혀를 재갈먹이지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리게 되면, 교회를 부흥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문을 막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가운데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그 사람은 자기의 목에 연자맷돌을 매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
자기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교회의 문을 막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나는 경건하다. 내가 지금 예배 드리고 있으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 파숫군을 세워주옵소서. 성령께서 내 혀를 재갈 먹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급적이면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하다면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발명가 에디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의 정원을 정말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나서 아침에 나와 보았더니 정원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꽃도둑이 와서는 꽃을 다 따간 것입니다. 꽃을 딴 것 까지는 좋은데 줄기를 잡고 흔들어놓아 어떤 것은 뿌리까지 뽑혔습니다. 그가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에디슨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큰 종이 위에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꽃도둑님 귀하
앞으로 꽃을 꺾으실 때는 손으로 꺾지 마시고 부디 여기에 매달아놓은 가위를 이용해서 잘라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위와 함께 그 메모지를 정원의 잘 보이는 곳에 메달아 놓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았습니다. 거기에 회신이 적혀 있었습니다. 회신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집주인님 귀하
주인님이 달아놓으신 가위는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숯돌에 잘 갈아서 다시금 매달아 놓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까? 내가 조금 속이 상했다고 해서 가시 돋힌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결국 그 말이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희의 오른뺨을 치느냐? 왼편 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고 하느냐? 겉옷까지 주어라.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느냐? 십리까지 가 주어라."
그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모습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경건의 첫걸음은 말을 조심하고 혀를 함부로 굴리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두번째 척도는 물질생활입니다.
우리가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경건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27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는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무슨 사회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었겠습니까? 일자리가 충분했던 것도 아닙니다. 또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주는 입장에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 보상하시리라는 마음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경건입니다. 불순한 동기가 없으니까 정결하고 깨끗한 경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물질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쉽게 대답합니다.
"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선한 목적에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 가운데 일부를 떼어서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돼지가 하루는 길거리에서 암소를 만났습니다. 돼지는 암소에게 다가가서 평소에 자기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을 토로해 놓았습니다.
"얘, 암소야. 반갑다!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느냐? 사람들은 내 고기를 가지고 햄도 만들어 먹고, 베이컨도 만들어 먹잖아. 어디 그것뿐이야? 내 창자를 다 빼 가지고 순대로 만들어 먹고 심지어 발가락도 족발이라고 해서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 암소만을 좋아할까?"
암소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이유는 뻔해. 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먹잖아. 그러나 나를 생각해봐. 나는 살아있으면서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주고 또 맛있는 우유를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하는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어차피 죽으면 남에게 다 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고 나서 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나쁜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베풀어주고 나누어주면 다른 사람에게서 칭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칭찬해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편지 한 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움켜쥐고는 나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신은 나의 것이지요. 나는 아주 쉽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우선 당신은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한히 값지며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포기의 풀도 살 수 없듯이, 내가 없으면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고 말 것입니다.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은행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내게 어떤 신비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들과 수없이 만납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순전히 나 때문에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욕망이 없다면 난 어쩌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사람들,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이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나의 힘은 사실 무한하답니다. 그러니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입니까? 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목적에 사용하십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이웃들에게 내 주머니를 털어서 돕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나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사랑의 실천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입니다.
경건의 세번째 척도는 사회생활입니다.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교회에서는 모두 경건한 척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경건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2:16에서 말씀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유혹합니다. 타락한 성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명예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세상에 물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짭니다. 그러나 바다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들은 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빛과 소금된 우리들은 세상이 어두우면 더욱더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부패했으면 더욱더 짠맛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Sunday Christian"이 되지 말고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얼음공장에서 생긴 일입니다. 여름철이 되면 얼음 주문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얼음공장은 항상 시끌벅적합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큰톱으로 얼음 덩어리를 자를 때 나는 소리, 또 인부들의 이야기 소리로 왁자지껄합니다. 거기다 얼음공장의 바닥은 톱밥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그 톱밥 위로 떨어지는 얼음조각들이 뒤범벅되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산란합니다.
거기서 일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시간을 좀 보려고 하는데 손목에 있던 시계가 없어졌습니다. 어딘가에 풀어놓기는 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값도 비싼 시계이지만 결혼할 때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받은 예물시계였습니다.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료들에게 같이 찾아보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작업장을 벗어나서 식당으로 갔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제 집에 가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무엇이라고 변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다보니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식사시간이 끝났습니다. 다시금 작업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는데 뜻밖에도 얼음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꼬마아이가 자기의 시계를 찾아서 손에 들고는 공장 입구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얘야, 나는 잃어버렸던 내 시계를 그토록 찾아다니느라고 애를 썼지만 찾지 못했는데 너는 어떻게 쉽게 찾았느냐?"
아이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인부들이 모두 식당으로 갔습니다. 시끌벅적하던 작업장이 조용해 졌습니다. 아이는 공장 안을 지키기 위해서 책이나 읽으려고 한 곳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재깍재깍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톱밥을 헤쳐 보았더니 거기에 시계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주합니다. 세상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일에 찌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서 예배 드리는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건성으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건성으로 듣고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십 번, 수백 번 통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 한 말씀을 읽고 듣더라도 그 말씀에 집중해서 그 말씀을 붙드는 심정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살아 역사하면서 내 영혼을 살찌우고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일과 속에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과 1:1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치 얼음공장의 식사시간처럼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이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제 우리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된 경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입술에 파숫군을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가급적이면 말을 아끼십시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다.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나온 그 소리대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꼭 말을 해야 된다면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서 쓰지 말고 환난 중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켜서 우리 마음을 늘 하나님께로 집중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