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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
16세기 |
훈구파 |
사림파 |
주체적, 민족문화 발달 |
사대적, 이기론 발달 |
단군 중시 |
기자 중시 |
궁궐, 관아, 성곽, 성문, 분청사기(실용적 성격) |
서원(주택+사원+정자), 백자(사대부의 담백한 취향 반영) |
* 성리학(주자학)에서 이(理)와 기(氣)
사물의 본질 - 이(理), 사물의 현상 - 기(氣).
* 주리론과 주기론의 특징
주리론은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서 이와 기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원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의 심성을 파악하는 면에서도 이는 선하고 악하지 않은 것이지만 기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것이라 하여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반면 주기론은 우주 만물의 근본이 기에 있다고 보며,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한 이론이다.
* 이황 사상의 특징(주리론).
이황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사물의 본질인 이와 현상인 기는 상보적인 관계이지만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며, 인간의 심성에도 이(본연의 성)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고, 기(기질의 성)는 가선가악(可善加惡)한 것이라고 하여 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주리론은 가시적 현상보다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주리론은 가시적 현상보다는 보편적 원리를 중요시하는 것이고, 근원적 절대가치인 이로 돌아가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된다는 주장으로 인간중심으로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였다(주리설에서 보면 개개의 사물의 법칙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우주의 근원이 되는 생명력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했다. 나아가서는 그 생명력에 근본을 둔 인간의 도덕적 의욕이 중요시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향적인 경향이 있으며 내적인 경험을 존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도덕적 신념과 이를 실천함에 있어서 절조와 기백을 중히 여김은 그 때문이었다)
* 이이의 사상과 그것이 현실에 반영된 예(주기론).
이황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미는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체제 정비와 수취제도 개혁(수미법) 등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이는 현실을 중시하는 주기론을 발전시켰다. 우주만물의 기원은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이 기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으로 여기서 이는 기가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하며, 이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기의 작용에 따라 착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 즉 형이하의 현실이 형이상의 관념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형이하 세계를 개혁해야 형이상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제도개혁사상으로 연결된다..인간의 심성에서도 이보다 기를 더욱 중요시 하였다.따라서 주기론은 그러한 현상이 비롯된 까닭을 추구하면 갈등은 자연히 해소된다는 주장으로 자연의 이치를 중심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학설은 서경덕에서 시작되어 이이가 집대성하였는데, 이 학풍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정엽 등에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이는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설에서는 사물의 법칙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들도 주자의 학설을 이은만큼 도덕 법칙의 탐구를 중요시하였지만 그 방법은 외향적이요 지식주의적 입장에 서 있어서 외적 경험과 박학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 이이가 이황에 비해 사회/정치의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 사상적 배경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도덕적/이상적 문제보다 현실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 황 |
이 이 |
주자학설 중시(주리론) |
정치/경제 등 현실문제에 관심 |
동방의 주자로 불림 |
10만 양병설 |
주리론(도덕적 원리 중시) |
주기론(현실문제 중시) |
이언적에서 시작 → 이황이 대성 |
서경덕에서 시작 → 이이가 대성 |
* 이황과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학파와 붕당
이황학파는 남인, 이이학파는 서인(노론, 소론으로 분리된 후에는 노론)을 형성하였다.(주리론은 이후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주리론은 이후 북벌론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으며, 개항기에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론에 영향을 주었다. 주기론은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사회 개혁론으로 나타났고, 이는 이후 북학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개항기에는 개화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유교사상의 본질 - 인(仁)/성(誠)/경(敬)
- 유교윤리사상의 근본정신은 천륜(天倫)을 바탕으로 한 인륜(人倫)의 생활화에 의하여 인간사회에서 도덕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 인(仁) : 인(仁)이란 공자가 매우 중요시한 가르침으로서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순박한 마음(애인 : 愛人)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온갖 정성으로 예의범절을 지켜 나가는 마음(극기복례 : 克己復禮),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충서 : 忠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인은 항상 공손하고, 너그러우며, 믿음성이 있으면서, 민첩하고 은혜를 베풀며(恭(공), 寬(관), 信(신), 敏(민), 惠(혜)) 살아가는 마음속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인이란 자기를 억제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고, 굳센 의지와 과감한 기상을 가지면서 또한 순박함을 나타내는 등의 마음상태를 말한다고 하겠다. 특히 공자는 인의 기본성격으로서 자기억제, 겸허, 너그러움을 강조했다. 유교의 윤리사상은 이러한 인의 정신을 성과 경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 성(誠) : 성(誠)이란 우주의 근본바탕이며, 또한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도리이다. 중용에 의하면 참된 그 자체는 하늘의 도(道)요, 참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한다. 따라서 성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참되고 거짓 없는 마음바탕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을 말한다.
- 경(敬) : 경(敬)은 성을 바탕으로 하여 일상생활에서 항상 참되려고 노력하는 마음자세와 실천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경이란 온갖 정성을 다하여 한 가지 일에 힘쓰는 것,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히 간직하는 것, 오만 방자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대하는 마음자세, 허위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마음자세, 표리부동하지 않은 마음자세와 그렇게 살아가려는 지속적 노력을 모두 포함한 의미로 풀이된다. 이와같이 경의 정신이 윤리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오륜이다. 우리의 전통윤리인 오륜은 유교사상의 본질인 인/성/경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서원의 설립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
초기의 서원은 본래 기능인 학문 연구와 보급, 그리고 선현에 대한 제사를 충실히 지키는 편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붕당과 연결되면서 중앙의 고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서원들은 향촌의 막강한 권력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이들은 지방의 수령보다도 더 높은 권위와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향촌에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서원은 붕당의 근거지가 됨으로써 붕당정치를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서원과 함께 사림들의 세력 강화에 기여하였던 향약에 대해 설명.
향약은 향촌에 성리학적 질서를 보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향약은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등의 유교 윤리를 향촌사회의 자치조직 속에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향약을 처음 보급한 사람은 조광조였으나, 본격적인 보급은 이황과 이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향약의 보급으로 인해 향촌에서 사림들의 농민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 향 약
- 서원과 함께 지방 사림들의 지위를 강화시켜 준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 등이 보급에 힘썼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시행되다가, 사림세력이 중앙정계에 자리잡은 16세기 후반부터 널리 보급되었다.
- 향약은 전통적인 공동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였다
- 향약은 향촌사회의 질서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였다.
- 향약은 지방 유력자들이 주민들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 향약은 사림의 세력기반을 이루고 상민층까지 유교의 예속을 침투시켜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 향약을 통해 사림들은 농민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견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 조선의 사회신분과 관련하여 반상제도에 대하여 설명.
조선의 신분제도는 법제적인 양천제도보다는 실제적인 반상제도가 강조되면서 점차,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체제가 확립되었다. 즉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을 차별하는 제도이다.
* 조선 전기에 민족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던 계기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이두나 향찰을 사용하였으나 고유문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다. 즉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문화민족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었으며, 민족 문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 이성계와 최영이 대립하게 되는 원인을 대외관계와 사회 개혁 면에서 설명
대외관계에서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는 반대하였다. 사회 개혁 면에서는 최영이 보수적 성향을 띤 반면, 이성계는 개혁적 성향을 띠었다(최영과 이성계는 고려 말에 홍건적을 무찌르고, 권문세족을 축출하는 데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요동 정벌문제를 둘러싸고 대외관계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최영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고, 이성계는 개혁적인 성향을 띠었다.)
* 이성계의 4불가론
- 소국이 대국을 거역할 수 없다
- 여름철에 군대를 일으킬 수 없다
- 거국적으로 원정하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것이다
- 지금은 덥고 비가 많아 활이 약해지고 대군은 질병에 시달릴 것이다.
* 조선을 건국한 혁명파가 실시한 전제개혁의 목적
혁명파는 과전법(1391)을 공포하여 국가 재정확보, 신진 관료의 경제적 기반마련, 농민 생활 보장을 목적으로 하였다(혁명파는 이성계 세력과 급진 개혁파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혁명파는 권문세족이 점유한 대농장을 혁파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며, 농민들로부터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1391년에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 조선시대의 관리등용
조선시대의 음서는 2품 이상 고관의 자제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 등용하는 제도로 과거보다 중시되었고 재상으로 승진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문과는 소과, 대과로 구분되어 대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으나 후기에는 이러한 제한이 완화되었다. 조선시대 과거는 문과와 무과 모두 3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식년시와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나 성균관 유생을 격려하기 위한 별시가 있었다. 탐관오리 아들이나 서얼에게는 문과응시를 제한하였으나 무과나 잡과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 조선시대의 외교정책인 명분론과 실리론.
명분론으로는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정책이 대표적이고, 실리론으로는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중립외교를 들 수 있다(조선시대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에 입각한 명분론이 중시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정권의 친명배금정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명분론은 대외정세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하여 두 차례의 호란(정묘/병자)이 발생하였다. 반면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외교정책은 실리 외교로, 명분론의 원칙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정책은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의 지지를 얻지 못해 인조반정을 유발하였다.
* 시의와 대세에 따라 탄력적 대응 - 현실주의적 입장에서의 외교론
- 광해군의 중립외교
-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한 북학론
* 의정부 서사제와 6조 직계제
- 의정부 서사제는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들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으로 왕권과 신권과의 조화를 꾀한 제도이다(세종 때 실시 : 왕권견제)
- 6조 직계제는 정치업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에서 곧바로 국왕에게 올려 국왕으 재가(승인)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이다(태종과 세조 때 실시 : 왕권강화).
* 붕당(사림의 내부분열)의 변천
- 성종 때 사림의 등용(김종직. 전랑과 삼사의 언관직에 임명. 훈구비판. 사화발생)
- 연산군-명종 : 사화(훈구와 사림의 대립)
- 선조 : 이조전랑과 척신정치 잔재청산방법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
정여립 모반사건(정철의 건제의 사건으로 이어짐)으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
- 광해군 : 북인집권. 중립외교. 인조반정 초래
- 인조 : 서인집권. 친명배금. 병자호란 초래
- 효종 : 북벌론(서인의 병자호란 초래의 책임회피)
- 현종 : 1/2차 예송(서인과 남인의 대립)
- 숙종 : 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 경신환국 이후 일당전제화. 경신환국 때 허적 의 처벌문제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됨.
- 영조 : 사도세자 문제로 시파와 벽파로 분리됨.
- 정조 : 노론의 시파 중용
- 순조 : 노론 벽파 등용.
- 외척세력의 세도정치 시작
* 붕당정치가 정치면에 기여한 긍정적인 면.
정치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붕당정치는 사림 간의 갈등으로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견제와 협력의 원칙이 무너지고 붕당의 이익만 추구하게 되었다)
* 붕당정치가 변질되게 된 배경
서인과 남인의 공조체제 붕괴, 지주 전호제와 신분제의 동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17세기 후반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도 인해 정치집단 사이에서도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고 향촌 사회에서도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로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가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붕당정치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붕당정치가 변질되었다)
* 붕당정치는 일제 강점기에 식민사관으로 이용되었는데, 그 사관의 대표적인 내용.
타율성론, 정체성론, 반도적 성격론, 만선 사관, 당파성론 등.
(식민 사관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역사는 만주와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존재했고, 반도적 위치로 인해 외세의 침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의도한 것이 식민 사관이다)
* 이이가 이황에 비해 사회/정치의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 사상적 배경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이상적 문제보다 현실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 16세기 사림들이 편찬한 역사서를 통한 이들의 역사인식.
이이의 ‘기자실기’, 박상의 ‘동국사략’은 모두 존화사상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사를 소중화의 역사로 파악하는 사대적 역사관이 주를 이루었다.
* ‘동문선’, ‘칠정산’, ‘향약집성방’, ‘농사직설’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당시 문화의 특징을 설명 : 민족적, 자주적, 실용적 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우리나라의 실정을 고려한 저서들이다)
* 15세기와 16세기에 유행한 건축.
15세기는 주로 궁궐, 관아, 성문, 학교 등이 건축의 중심이 되었고, 16세기에는 서원건축이 유행하였다(15세기는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데 필요한 건축이 유행하였고, 16세기에는 집권층이 되면서 그들을 배출한 교육기관과 관련된 건축이 유행하였다)
* 15세기와 16세기 주도세력이 남긴 문화유산의 특징.
15세기 관학파(훈구파)는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중시하였기에 실용적인 문화유산을 남겼고, 16세기 사림파는 정신세계를 강조하는 문화유산을 남겼다
* 유향소와 경재소의 기능.
유향소는 지방의 덕망있는 인사들의 모임으로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의 규찰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경재소는 중앙 정부와 유향소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여 유향소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 수령/향리/유향소
- 수령 :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 관할(조세징수, 농업장려, 호구조사, 교육장려, 재판, 지역방어)
- 향리 : 수령이 지시를 받아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이/호/예/병/형/공의 6방으로 조직됨)
- 유향소 : 그 지방의 양반들을 중심으로 구성(향회 소집, 백성교화, 수령에 대한 자문, 향리/수령 감찰)
*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통해 추구하고자 한 이념.
조광조는 왕도정치와 향촌자치를 실현하고 성리학적 통치체제를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해 사림을 대거 등용하고, 이들은 3사의 언관 직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 훈구세력과 사림 세력 간에 전개된 권력다툼의 양상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다툼을 사화라고 한다. 사화는 당쟁(붕당)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로, 각 파들이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모든 정권을 주도하게 된다.
* 양반의 지위 강화라는 관점에서 향약의 의의
향약은 사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것인데,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인 양반들이 피지배 계급인 일반 농민들을 억압하는 조직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 양반들의 향약의 주도
사림양반들의 자치기구인 향청의 좌수(座首 : 우두머리), 별감(別監 : 총무), 유사(有司 : 서기) 등이 향약의 임원인 약정, 부약정, 직월 등을 겸임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는 점에서 양반들이 향약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일본이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 정치적 목적과, 조선이 이에 응했던 이유 :
- 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외교문화사절단이다. 통신사는 선린우호를 위해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이었다. 일본은 실질적인 통치자인 쇼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통신사의 규모는 400-500여 명이었으며, 체재 기간은 대략 6-12개월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에도를 방문하여 막부 장군을 직접 만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각지의 일본인들과 주자학, 문학, 의학, 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하였다. 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일본이 지출하는 총 경비는 100만 냥, 동원 인원 33만 명, 말 7.600두에 이르렀다. 이 경비는 각 지역의 영주에게 부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일반 민중에게는 화려한 외국 사절단의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막부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 일본은 통신사라는 외교 사절단의 방문을 국내에 보여줌으로써 막부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였고, 조선은 이에 응함으로써 일본과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신사는 강화도 조약이후 일본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기 위해 파견한 단체이다. 제2차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준셴을 만나 가져온 책이 ‘조선책략’이다. 조선의 러시아 견제책으로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을 주장하여 이 책은 영남 유생의 반발 즉 영남 만인소를 유발하였다)
* 수원 화성
- 정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에 맞설 왕권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수원 화성을 축조하였다.
- 수원으로 사도세자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자주 찾았는데 이같은 행차를 통해 정조는 백성을 직접 만나 여론을 파악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 화성은 방어를 주목적으로 했던 이전의 성곽들과는 달리 유사시 방어와 공격을 겸하도록 설계되었다.
* 규장각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문필, 즉 글쓰는 일)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시험의 주관과 문신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 탕평책
- ‘탕평’ 이란 말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 정조의 탕평책을 노론의 시파와 벽파를 중심으로 설명
-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붕당체계는 노론의 벽파와 시파체제로 전환되었다. 벽파는 사도세자 죽음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룹으로 노론의 대다수였다. 반면 시파는 사도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그룹으로 기존의 소론과 노론의 일부 그리고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배제되었던 다수의 남인들이 속하였다.
- 사도세자의 아들로 벽파의 견제를 딛고 즉위한 정조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영조는 왕권으로 억눌러 실재하는 붕당자체를 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음에 비해, 정조는 붕당 그 자체는 현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논리적으로 붕당을 해체시키려 했다는 점이 다르다.
- 정조는 모든 붕당의 인사들을 일단 정계에 불러놓고 개인의 선악을 가려, 곧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있는 사람을 찾아 중용하려 하였다. 영조 때 왕권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세력을 키워 온 척신/환관세력 등이 제거되고, 이들과 노론벽파를 비판하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 그리고 재야의 남인계열이 중용되었다. 이들은 시파로 분류되며, 갑술환국 이후 재기가 불가능하였던 남인도 시파에 속함으로써 다시 정계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즉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여 시파가 등용될 수 있도록 사전 정지 작업을 마친 후에, 벽파와 시파를 같이 정계에 두어 탕평을 시도한 것이다.
- 그 외에 초계문신제, 규장각과 장용영 등도 정조의 탕평책과 관련있다.
* 중농학파와 중상학파의 핵심적인 주장.
중농학파는 주로 농촌에 거주하는 남인 학자들에 의해 발달하였다. 이들은 조선 후기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영농의 몰락에 있다고 보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한 토지개혁, 즉,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중상학파는 서울 거주의 일부 노론 집권층 학자들에 의해 발달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혁신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실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사회 변화와 관련하여 서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기여하였던 성리학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회 모순들을 해결해 내지 못하였다. 이에 성리학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침 청에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관념적인 사상을 비판하고 실사구시를 추구하였던 고증학이 발달하고 있었는데, 이 고증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 청의 고증학의 영향과 성리학에 대한 반발이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실학을 출현시킨 배경이 되었다.
* 조선 후기 역사서의 특징.
조선 후기 역사서의 특징은 이제까지 잊혀졌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와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주체적이고 체계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역사서로는 고구려사를 쓴 이종휘의 동사, 발해사를 쓴 유득공의 발해고, 단군 조선으로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역사를 중국 중심적인 역사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독자적인 정통론에서 서술한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이 있다. 또한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실증적이고 객관성을 중시하여 자료의 사용을 엄밀히 하여 다양한 사료들을 비교 분석하려는 경향들도 나타났다.
* 김홍도의 풍속도와 신윤복 풍속화의 차이점.
김홍도의 풍속화는 주로 밭갈이, 대장간, 씨름 등 농촌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많이 묘사하였다. 또한 김홍도의 작품은 대체로 먹선이 굵고 간결하여 소탈한 필체를 보이며, 흑백으로 그려진 그림이 많다. 반면 신윤복의 풍속화는 도회지 양반의 풍류와 부녀자들의 풍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였다. 신윤복의 작품은 섬세하고 세련된 필치로 그렸으며, 컬러로 된 작품들이 많이 있다.
* 조선 후기에 양반층의 분화
집권 당파의 권세있는 양반과 향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반, 몰락한 잔반으로 분화되었다.
* 조선 후기에 경제력 있는 평민들은 왜 양반이 되려고 하였는가 ?
자신과 자손이 무거운 군역을 면제받으며,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하고 향촌 사회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정약용 등 중농학파 실학자들이 토지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시한 이유
대토지 소유의 발달로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몰락한 것이 농촌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 조선 후기 민화의 유행이 서민문화 발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근거
민화는 전문 화가가 아닌 민중들이 미적 감각을 발휘하여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가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
조선 후기에는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것을 알자‘ 라는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국학 연구가 확대되었으며, 진경산수화가 대두되었다.
즉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때 여진족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는 움직임과 더불어 조선이 곧 중화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런 조선 중화주의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문학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 이용후생 학파(중상주의 학파 = 북학파)가 주로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무엇인가 ?
경세치용 학파는 정치적 대립 과정에서 밀려난 경기도 남인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주로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자영농의 육성에 개혁의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용후생학파는 집권층이었던 서울 노론출신들이 중심이었으며, 청나라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즉 청의 발달된 문물의 수용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국부의 증진에 관심을 기울였다.
* 박제가의 ‘북학의’ - 북학파(중상적 실학자 : 청의 문물 적극 수용)
- “ 비유하건대 재물을 대체로 샘(우물)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수공업자)이 도야(기술을 익힘)하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게 되므로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모두 곤궁하여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사농공상(士農工商) : 양반, 농민, 수공업자, 상인).”
* 조선 후기 실학자
‘우서’ 에서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 유수원
‘성호사설’에서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 이익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 유형원
지방 행정 개혁을 주장한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 정약용
* 조선 후기 신분제를 폐지하기 위한 노력.
1884년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서 신분제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인민 평등권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군은 폐정 개혁 12개 조를 통해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신분제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신분제도를 폐지하였다.
* 정조의 탕평정치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대표적인 기구.
규장작(학술 및 정책 연구기구), 장용영(친위부대)설치(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규장각은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왕권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기구로 육성하였다).
* 사회 개혁론으로서의 실학 - 중농학파와 중상학파가 분석했던 당시 사회 모순의 근본원인.
중농학파는 지주 전호제(지주제)의 확산에 따른 자영농의 몰락을, 중상 학파는 상공업과 기술 발달의 부진을 근본원인으로 제기하였다(중농학파는 농촌생활의 경험이 있는 경기 지방의 남인들이 주축을 이루어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방안을 연구하였고, 중상학파는 도회적 분위기에서 생활하였으며 청 왕래 경험이 있는 서울의 노론 출신이 많았다.
* 조선 후기 속오군 체제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이유
양반들이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재되는 것을 회피하면서 속오군에는 상민들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 숙종의 탕평책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
숙종의 탕평책은 편당적인 조처로 인해 명목상의 탕평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약화된 왕권으로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 영/정조의 탕평책의 기본적 성격 및 방향.
영/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통해 붕당을 억제하고 관직의 안배를 추구하였다.
* 영/정조의 탕평책이 갖는 한계
영/정조의 탕평책은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정국이 안정만을 추구하였다는 한계를 지녔다.
* 세도정치 하에서 나타난 인사관리의 문제점.
세도정치 하에서는 과거제가 문란하여 부정이 심하였으며, 매관매직이 격심하였다.
* 세도정치기 농민의 수탈이 심하게 된 배경
세도정치 시기에는 지방 수령직에 대한 매관매직이 극심하였는데, 지방 수령들은 관직 매수에 들인 돈을 벌충하기 위해 농민을 수탈하였다.
* 삼정의 문란에 대한 농민의 대응
농민들은 초기에는 유랑이나 벽서 등의 소극적 저항을 보이다가 점차 민란 등의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 실학사상
- 중농학파 : 경세치용
1) 유형원 - 반계수록, 균전론(자영농 육성)
2) 이익 - 성호사설, 한전론(자영농 육성)
3)정약용 - 실학 집대성. 목민심서. 경세유표. 여전론 주장, 후에 정전제 실시 주장. 백성을 위하여 통치자가 존재, 백성의 의사사 존중되는 형태의 정치제도로의 개선방안 모색, 과학기술과 상공업발달에 많은 관심.
- 중상학파 : 이용후생
1) 유수원 - 우서, 상공업 진흥과 기술혁신 강조,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 주장.
2) 홍대용 - 임하경륜, 의산문답. 기술혁신과 문벌제도 철폐,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 강조, 중국 중심의 세계관 비판(지전설).
3) 박지원 - 열하일기, 수레와 선박 이용, 화폐유통의 필요성 주장, 양반문벌제도의 비생산성 비판. 농업생산력 증가에도 관심(영농방법 혁신, 상업적 농업장려, 수리시설 확충.)
4) 박제가 - 북학의(청의 문물 수용주장), 청과 통상강화, 수레와 선박이용. 절약보다 소비권장.
- 실학사상의 의의 : 실증적/민족적/근대 지향적 특성,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으로의 계승.
경세치용 :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있어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중농학파의 사상. 중국 주나라 토지제도인 정전제를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이용후생 : 편리한 기구들을 잘 이용하여 살림살이에 부족함이 없게 함.
* 동학과 동학 농민운동
- 창시 배경 : 최제우가 창시, 세도정치하의 농민피폐, 서양세력 접근으로 인한 위기의식.
- 사 상 :
인내천(인간 존엄성, 평등의식), 성리학, 불교/서학 배격, 후천개벽의 주장으로 조선 왕조 부정(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보국안민으로서
서양과 일본침투 경계(민중적/민족적 성격).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의 죄로 정부로부터 탄압 당함.
- 교조신원운동 :
삼례집회(1892) → 서울복합상소(1893) → 보은집회(1893, 정치적 성격으로 전환) → 고부민란(1894, 전봉준 주도. 황토현, 장성에서 동학군 승리) → 청일군대 동시 출병 → 전주점령(전주 화약성립. 집강소 설치) → 양국 군대 공동철수 요구 → 교정청 설치(개혁추진) → 일본군 경복궁 점령 → 청일 전쟁(1894.7) 발발 → 제1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 중심) → 청일전쟁에서 일본 우세로 일본 내정간섭 심화 → 동학의 2차봉기 →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 패배 → 제2차 갑오개혁 → 청일전쟁에서 일본승리로 시모노세키 조약 맺음 → 삼국간섭(1895, 러/프/독) → 을미사변(1895) → 을미개혁 → 아관파천(1896) → 대한제국과 광무개혁
- 동학 농민운동의 성격 :
반 봉건 - 갑오개혁에 영향(전통질서 붕괴촉진)
반 침략적(반 외세) - 동학농민군 잔여세력의 의병참여(구국 무장투쟁의 활성화)
* 강화도 조약(1876)의 불평등성
- 해안 측량권과 치외법권
* 조선책략
- 청의 외교관 황준셴 저술,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가져옴.
- 러시아 침략을 막기 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 주장
- 영남 유생들의 영남 만인소 유발. 조/미 수호 통상조약에 영향을 줌.
*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
- 이 두 사건 이후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된 일본은 경제적 침략에 주력, 이로 인해 청/일 상인간의 치열한 대립 격화. → 방곡령(1889) 유발.
* 거문도 사건(1885-1887)
- 러시아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의 대응.
- 중립화론 대두(부들러, 유길준).
*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의 공통점
- 신분제도의 폐지
- 재정과 조세제도의 개혁
*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공통점
- 신분제도의 폐지
- 재정의 일원화(호조, 탁지아문)
- 청의 종주권 부인
- 경찰제 실시
- 내각중심의 정치운영
* 갑신정변과 독립협회가 추구한 정체 : 입헌군주제
* 신민회가 추구한 정체(정치체제) : 공화제(왕을 부정)
* 의 병
-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서 시작되었고,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본격화,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이후 가장 격렬하게 일어남.
- 을미의병(1895) : 을미사변, 단발령.
- 을사의병(1905) : 평민 의병장 등장(신돌석).
- 정미의병(1907) : 고종퇴위, 군대해산.
* 독립협회(1896-1899)
- 목표 :
1) 자주 국권(자주 독립) : 국권과 국익 수호(고종의 환궁요구, 열강의 이권침탈 저지)
2) 자유 민권 :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참정권, 의회설립운동 전개)
3) 자강 개혁 : 국력의 배양(신교육, 산업개발, 국방력의 양성)
- 의의 : 국민들의 자주의식 고취(민중의 지지획득), 민족운동의 이념제공
- 한계 : 외세 배척은 주로 러시아를 대상으로, 미,영,일에 대해서는 우호적. 동학군과 의병을 적대시 함.
* 대한제국(1897)과 광무개혁
- 고종의 환궁 후 국호를 ‘대한제국’, 광무개혁 추진
- 광무개혁 목표 : 근대국가로 발전추구(산업, 교육 진흥)
산업의 발전 - 공장과 회사설립.
교육의 진흥 - 실업학교 등 설립.
군제 개편 - 궁궐과 서울을 방위하는 군대증강, 지방에도 군대주둔.
- 한계 : 보수 정치인의 반대, 외세 의존적 태도, 열강의 간섭으로 성과 미흡.
* 외세배척(반외세=반침략)과 봉건적 : 위정척사 사상
* 외세배척과 반봉건(근대 지향적) : 동학농민운동
* 반봉건과 외세의존 :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 개화사상
(독립협회는 미국, 영국, 일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였고 러시아에 대해서만 외세배척을 주장하였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서는 외세의존에 편입시켰다)
* 간 도
- 고구려와 발해의 땅 : 발해 멸망 후 말갈족 거주 → 여진족의 발상지라 하여 청이 관리했으나 우리 민족이 곳곳에 거주.
- 백두산 정계비 건립(조선 숙종) :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 간도관리사 파견
- 19세기 말 이후 :
일본침략으로 우리 농민들의 간도 이주 증가 → 훗날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삼음.
- 간도 협약(1909) :
일본은 안동-봉천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
* 독 도
- 신라 지증왕 :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우리 영토에 편입.
- 조선 초 : 울릉도민의 본토이주로 관리 소홀.
- 조선 숙종 : 안용복이 일본 어민축출l.
- 개항 이후 : 울릉도에 관청을 설치하여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고 독도까지 관할.
- 러/일전쟁 중 : 일본의 독도 강탈.
* 항일 민족운동의 흐름과 사상적 배경
1) 성리학(주리론) → 위정척사 사상 → 의병항쟁(무력에 의한 직접적인 항일투쟁)
2) 주기론 → 실학(중상학파=북학파) → 개화사상(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 → 애국계몽운동(교육과 산업발전을 통한 부국강병 추구)
* 애국계몽운동 단체
- 보안회(1904) :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좌절시킴.
- 헌정 연구회(1905) : 입헌 의회제도 주장.
- 대한 자강회(1906) : 고종의 강제퇴위 반대운동 전개.
- 신민회(1907)
* 신민회 :
-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비밀단체
- 민족 교육 : 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
- 민족 산업 : 자기회사와 태극서관 운영.
- 민족 문화 : 대한매일신보(베델, 양기탁)를 통해 국민을 계몽.
- 독립 운동기지 건설 : 만주 삼원보에 한인촌 설치. 신흥학교/군사학교 설립.
- 해체 : 일제의 105인 사건(안명근의 총독암살 사건) 날조.
* 헌병 경찰통치(1910 - 1919.3.1) : 무단통치
- 토지조사사업(기한부 신고제, 미신고 토지 등 국토 40% 를 강탈,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나눠줌), 회사령(허가제, 한국인 기업설립 방해)
- 3.1 운동(1919) 및 그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상하이)
* 보통 경찰통치(1919.3.1 - 1931) : 문화통치
- 산미증식계획(농촌인구의 도시유입으로 쌀 부족 초래), 회사령 폐지(신고제. 일본재벌 한국진출 용이)
* 민족 말살통치(1931 - 1945)
- 병참 기지화
- 일선동조론,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창씨개명
- 징병, 지원병, 정신대.
* 봉오동, 청산리 전투(1920)
- 봉오동 전투(1920.6)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군, 국민회군 등이 참가.
- 청산리 전투(1920.10)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등이 참가. 봉오동 전투보다 성과가 큼.
* 간도참변(경신참변 : 1920.10) → 자유시 참변(1921) → 미쓰야 협정(1925) → 3부 결성(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3부 통합(→국민부와 혁신의회) → (1931년 만주사변 후 → 한/중연합 작전) → 한국광복군 창설(1940)
* 의열단(김원봉)과 한인 애국단(김구)
- 의열단 : 김익상(조선총독부), 김상옥(종로경찰서),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1920년대 주로 활동.
- 한인 애국단 : 이봉창(일황 마차), 윤봉길(상하이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거는 중국이 항일투쟁에 협력하는 계기가 됨. 1930년대 주로 활동.
* 민족 실력 양성 운동(1920년대)
- 물산장려운동(평양, 조만식)
- 민립대학 설립운동(일본의 방해. 일본은 경성제국대학 설립)
* 6.10 만세운동(1926) : 학생과 사회주의자들이 계획. 사회주의자들의 모의 발각, 발각되지 않은 학생들이 주도함.
* 신간회가 만들어진 배경(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
1920년대 초반까지 민족 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일제와 타협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일부는 조선 독립을 포기한 상태에서 자치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와 타협을 거부한 소수의 민족주의자들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더 이상 활동이 힘들어진 사회주의자들은 친일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조선 민족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서로 연합을 추진하였고, 1927년 2월에 이상재를 회장으로,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하여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 신간회가 해산된 이유
신간회는 1931년 해산할 때까지 농민 운동과 노동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29년에 광주학생 항일운동을 보고대회를 하는 중에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구성된 새 지도부는 이전의 지도부와는 달리 일제에 타협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지회를 주로 장악하고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은 지도부의 타협적인 경향을 비판하면서 지도부와의 갈등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신간회 해산의 한 원인이 되었다.
* 광주 학생 운동(1929)
- 3.1운동 이후 최대 민족운동
* 근대 문물의 수용이 보여 주는 이중성.
서양의 근대 문물은 우리 민중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생활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특히 철도의 경우,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한 달이나 걸리는 것이 12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전화나 전신, 근대적 병원을 비롯한 의료 시설은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측면 이면에 근대 문물은 서양 열강의 이권침략이나 침략 목적이 있었다. 일본은 철도를 우리나라에 건설하면서 철도 주변의 많은 땅을 강제로 빼앗으며, 조선을 식민지 기지로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 카이로 선언,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 카이로 선언(1943.12.미/영/중)과 포츠담 회담(카이로 회담 내용 재확인 : 1945.7) : 한국의 독립 약속.
- 얄타 회담(1945.2. 미/영/소) 소련의 참전 결정
*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 미/영/소 외상, 5년 간 신탁통치 결정 → 이후 좌/우 대립 격화), 미소 공동위원회(1946/1947. 신탁통치 및 정부수립 논의, but 결렬)
* 광복 직후 정부수립을 둘러싼 이승만과 김구 노선의 차이점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독립국가 수립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단독 정부수립의 움직임이 일어나자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으며, 남로당 등 좌익은 1948년 2월 구국선언을 계기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은 남한에 강력한 정부를 수립해야 공산세력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반면, 한국 독립당의 김구와 민족 자주연맹을 조직한 김규식 등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이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한다고 주장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남북한의 정치지도자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하였다.
* 1948년 대한민국 수립.
- 1948. 8.15(대통령 : 이승만, 국회에서 간접선출)
* 우리나라 분단의 원인
국내적으로 좌/우익의 대립, 남한의 친일파 단죄실패, 민족내부의 자주독립 역량부족 등을 들 수 있고, 국외적으로는 미/소의 냉전 질서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 4.19 혁명(1960)과 5.16 군사 정변(1961), 그리고 경제개발
- 3.15부정선거(1960)
- 4.19 혁명(1960)
- 5.16 군사정변(1961)
- 경제개발 추진(1962)
* 197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
- 유신체제 출발(1972).
- 5.18 광주민주화 운동(1980).
- 1987년 6월 민주항쟁(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 요구).
* 남북 간 화해와 협력
- 이산가족 상봉, 체육 분야 교류, 한반도 비핵화 선언. 식량원조, 금강산 관광사업, 6.15 남북공동선언.
* 노태우 : 서울 올림픽 개최, 북방외교(정책),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공산권과 수교.
* 김영삼 :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화해/협력 -→ 남북연합 -→ 통일국가)제시, 문민정부 표방
금융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외환위기 초래.
* 김대중 : 평화적인 여야의 정권교체.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개최. 한일월드컵 개최. 외환위기 극복.
* 노무현 : 참여정부 표방, 과거사 정리사업 추진,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 이명박 : 인재 대국,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경제 등 국정지표 제시.
* 우리 역사에 있어 대규모 농민 반란 시기
- 9세기(신하 하대 진성여왕), 12세기(무신집권기), 19세기(세도정치기, 동학포함).
*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토인비는 한 문명이 붕괴되는 원인을 기술부족이나 지리/환경보다는 특수한 도전에 대한 응전의 실패에서 찾았다. 즉 토인비는 문명의 발전과 쇠퇴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개념으로 설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