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국익수호연합 원문보기 글쓴이: 權進士
磻溪 柳馨遠의 敎育改革思想 - 公敎育體制를 中心으로
金 在 燮
目 次
Ⅰ. 서 론 (序 論)
Ⅱ. 磻溪의 平等的 人間觀과 學問觀 (반계- 평등적 인간관- 학문관)
1. 天賦的 平等思想에 입각한 人間觀 (천부적 평등사상- 입각- 인간관)
2. 道·器一體의 學問觀 (도·기일체- 학문관)
Ⅲ. 土地制度에 기초한 諸制度의 改革 (토지제도- 기초- 제제도- 개혁)
Ⅳ. 公敎育體制로의 改革과 敎育 (공교육체제- 개혁- 교육)
1. 各級學校의 制度와 敎育 (각급학교- 제도- 교육)
2. 貢擧制를 통한 人才選拔과 敎育(공거제- 통- 인재선발- 교육)
Ⅴ. 結 論 (결 론)
Ⅰ. 序 論
새로운 세기와 함께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현상은 기존의 사회체제나 권위에 대한 도전과 함께 끊임없는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국가·사회의 구조적 위기상황에 처해있던 왕조체제에 있어서도 제도개혁의 필요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있어 이러한 상황변화를 인식한 반계 유형원은 국가경제의 기틀인 전제와 교육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국가와 사회를 구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보장할 구제책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는 주자학의 변용기로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진작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실학'이란 국가나 시대에 따라 그 용어적 개념을 달리하고 있다. 송·명대의 이학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理'는 '實理'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도덕적 지식을 '實學'이라고 하였다. 우리 학계에서는 조선 후기의 신학풍을 일반적으로 실학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그 新思潮의 공통적 성격을 '自由性'·'科學性'·'現實性'있는 학문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실학의 시점을 역사·철학계에서는 반계 유형원의 사상으로부터 보고 있다. 근대 계몽기(구한말·일제초)의 애국적·선각적 학자들(박은식·장지연·신채호)이 인식한 영·정조시대 이래의 신학풍을 현실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실학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반계 유형원을 이러한 실학의 鼻祖로 通稱하였다.
반계 유형원(1623∼1673)은 壬辰·丁酉의 난을 겪은 지 20여년 후인 162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와 조부도 관직을 지낸 사족의 가문으로 공음의 혜택을 받은 사대부의 가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영민하고 근면하여 백가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그의 지식은 철학·역사·법률·공학·지리·서학 등 다방면에 걸쳐 造詣가 깊었다. 그는 23세에 조모, 모친, 조부를 잇따라 여의었고, 조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에는 진출하지 않고 선대의 賜牌之地인 전라도 부안에 거처를 정하고 고금의 서적 만여권을 쌓아놓고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저술은『理氣總論』,『論學物理』,『經說問答』,『記行日錄』,『續綱目疑補』, 『東史綱目條例』,『正音指南』,『歷史東國可攷』,『朱子纂要』,『東國文 』,『紀 新書節要』,『書說書法』,『參同契抄』,『武經四書抄』,『地理郡書』 等이 있다고 洪啓禧는「傳」에서 밝히고 있다. 반계의 사상은 그의 저서 『수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전제, 교선지제, 임관, 직관, 녹제, 병제 등 교육·정치와 관련된 모든 제도를 망라하고 있다. 그 중에서 반계가 가장 중시한 부분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경세의 근본인 田制와 人才를 선발·육성하기 위한 교선제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였다.
지금까지 반계 유형원에 대한 연구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다. 이러한 연구에는 역사·철학적인 연구와 사회경제적 연구, 교육학적 연구등이 있다. 그러나 전제와 교선제를 관련지어 이루어진 연구는 보기가 어렵다. 본 연구에서는 그의 저서『隨錄』의 田制 上·下와 敎選之制의 上·下, 그리고 敎選攷說의 上·下의 내용을 통해 그의 인간관과 학문관, 그리고 전제에 기초한 제제도의 개혁과 교육제도, 인재선발 및 육성에 관한 공교육체제로의 개혁사상과 그 교육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Ⅱ. 磻溪의 平等的 人間觀과 學問觀
1. 天賦的 平等思想에 입각한 人間觀
반계는 본질적으로 만인은 평등한 것으로 보았고, 어떤 신분에 의해 결정된 것보다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활동을 달리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의 사상은 조선말 왕조시대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으로써 현실개혁을 가로막은 신분제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파헤친 용의주도한 논변이었다.
혹자가 묻기를 '國俗에 兩班, 庶孼, 庶族은 각각 그 品類를 구별하여 나이로써 차례를 정함은 어찌된 까닭인가?'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다. 禮에,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가 없다고 하였다. 천자의 아들도 입학하면 연령으로 순위를 정하였는데 하물며 士大夫의 아들에 있어서랴. 우리나라는 한갓 門地만 숭상하여 습속이 구차하여 오직 문족의 華楚만 논할 뿐, 그 사람의 行義의 修行 여부는 논하지 않음으로써 閥閱의 자손은 庸才鄙夫라도 대대로 卿相에까지 올라가고 가문이 寒素하면 비록 그 자손이 碩德茂學이라도 士類에 들지 못하므로 세상 도덕이 향상되지 않고 인재가 배출되지 않고 政形의 문란이 모두 이 때문이다.
반계의 논리는 "모든 인간이 天民으로서 평등하게 태어나나, 士民의 구별이 있는 것은 선발된 인재로서 그들에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직위를 부여하여 경대부로 삼는다는 것이다. 士는 장차 벼슬에 채용되기를 기다리는 자들로 일정한 직위와 정원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천민이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탄생 그 자체보다는 천부적인 소중하고 존엄한 인간을 지칭한다. 그렇기에 조선 사회의 편협한 서사에 따른 인간 불평등은 모순된 사회구조로써 사회·국가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신분제에 따른 사·민의 구별이란 자신의 능력에 따른 직업적 위치지움에 있고, 그 직분에 맞는 일을 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하고 자신의 할 일을 한다는 직업관을 제시한 것이다. 그가 천부적인 평등관을 바탕으로 노력과 능력에 따른 사회참여의 기회와 사회적 위치지움을 강조한 점은 교육적 관점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그는 노예제도 개혁론에서도 노비제도를 삼국시대부터 역사적으로 조명하면서 노비세습제의 폐습을 지적하였는데, 근본적으로 그의 노비제 폐지론은 천부적 인간 평등사상을 기저로 한 인본주의적 사상의 발로인 것이다.
2. 道·器一體의 學問觀
玄相允은『朝鮮儒學史』에서, "그는 學問을 함에 靜을 爲主로 하며 讀書함에 前人의 語言을 死守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今을 度하여 古에 質하며 心에 會한 것을 事物에 參考하되, 精微를 究極하여 조금이라도 얻은 바가 있으면, 夜半이라도 반드시 일어나 明燭疾書하기를 常例로 하였다. 그 友人 鄭東稷에게 與하여 四七理氣와 人心道心을 論함과 如한 것은 많이 前人未發의 것을 말한 것이었다. 每日 日暮時에는 必曰 '今日도 또 虛送하였다. 義理는 無窮하고 歲月은 有限한데, 古人은 무슨 誠力으로 成就한 바가 저와 같이 偉大하냐'고 하여 歎息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고『隧錄』行狀과 傳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또 "하늘이 士農工商의 네 백성을 내니 각각 그 職分이 있거늘 나는 祖上의 음덕을 빌어서 편안히 앉아 밥과 죽을 먹으니 이는 天地間의 한 좀벌레이다. 다만 마땅히 先王의 道를 講究하고 내가 선비된 本分을 充備할뿐이다"하여, "옛성현의 본뜻을 남은 經書의 사이에서 찾아 연구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르지 않고 진실됨을 쌓고 오래도록 힘써 의문을 갖지 않은 것에 의심을 갖음으로써 얼음 녹듯이 풀리게 되어 古今의 天理·人慾의 분별과 事物의 本末의 原理가 마음과 눈에 환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自己自身도 모르게 欣然히 즐겨하고 탄식하여 글로 써서 세상을 구원하는 측은한 뜻을 우려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磻溪隨錄』이다"고 홍계희는 반계의 학문 연구적 태도에 대해「傳」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반계는 편향된 학문사조로 흐르던 시기에 선학의 사상에만 따르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옛 것을 바탕으로 사색하며 사물에 유추하고, 그 정밀함을 끝까지 추구하는 진리탐구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해결과 미래지향적인 발전적 대안 수립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吳光運도『磻溪隨錄』序에서 "반계 유선생이 은거하여 글을 지어 그 백성을 측은히 여겨 구제하는 뜻을 우하고 이름하여 말하기를『隨錄』이라하니 그 글은 田制로써 근본을 삼고 井田의 形을 긋지 아니하되 井田의 實을 얻고 그런 뒤에 선비를 기르고 어진이를 가리고 벼슬을 맡기고 군사를 마련하고 禮敎 政法의 규모와 節目이 拘泥되지 아니하고 滯되지 아니하고 沛然히 모두 天理에 합하고 있다"고 하며, 선생이 지은 理氣·人心·道心·四端·七情說은 순수·정밀하고 깊이에 있어 여러 선비가 미칠 수가 없어서 道와 器가 분리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반계의 학문은 道·器一體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반계는『周易』「繫辭上傳」의 天地乾坤의 원리를 응용해 저술과 학문의 세계에 응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자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학문의 세계는 爲人의 체계를 지향하여 形而上·下가 분리되지 않은 道器의 제도개혁안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반계가 도기일체의 학문을 연구하고 현실적인 개혁안을 제시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唐堯·虞舜과 夏·殷·周 3代의 政治를 하는 기구에는 반드시 節次와 條目의 자세함이 있었는데, 周나라의 末葉에 諸侯들이 그 자기의 私利를 해롭게 함을 싫어하여 없애버리니 先王의 典籍이 부셔지고 흩어져서 잔존하는 것이 없었다. 그 정치를 하는 大體는 孔子·孟子·程子·朱子의 여러 聖賢을 힘입어 발휘함이 남김이 없었으나 節次와 條目에 있어 여의치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스리는 道를 말하는 자가 그 大體를 들 때에는 반드시 唐·虞·三代를 일컬으며 그 節次와 條目과 施行處理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秦·漢以來의 野俗한 法規이다. 천하 사람들이 이에 안정하여 다시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고 經界·賦稅·학교·군사제도와 같은 것도 世間의 선비로 하여금 大體를 논하게 하면 條理에 밝지 못한 허물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정치에 대한 절차와 조목의 자세함이 진·한나라 이후에 전하지 않음으로써 이론과 실제간의 괴리된 실책이 나올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학문하는 태도 역시 天地造化의 理致와 동일하게 보았다.
공부는 비록 움직이고 고요함을 通貫하는 것이나 고요하지 않으면 근본을 삼을 것이 없으며 다만 學問을 하는 자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天地 造化의 流行하는 것도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고 있으나 그 主體되는 곳은 고요함에 있으므로, 이른바 다물어 모이지 않으면 發散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물건이 각각 그 處所에 머무는 것은 고요함을 主體로 하는 뜻이니 聖人의 井田法이 땅을 근본으로 하고 인재를 고루 펴놓는 것도 고요함으로 인하여 움직이게 하는 뜻이다.
이와 같이 반계는 천지의 위치에서나 인간의 학문 태도, 사물의 위치, 정치적 논리에 있어서 道·器의 理致가 동일하게 통한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자신의 학문자세에서도 이러한 이치를 취하였다. 承旨 梁得中도 "乾은 쉬움으로써 知하고 坤은 간략하여 能하며 쉬우면 알기 쉽고 간략하면 따르기 쉽다고 하며, 그의 글은 참으로 그 알기 쉽고 따르기 쉬워서 깊이 乾坤의 간략한 理를 얻으니 더욱 亡師의 말이 속이지 아니함을 믿었습니다."고 그의 疎에서 반계의 글을 乾坤의 理致로 파악하였다.
반계는 學者가 敬의 태도로 학문에 임하고, 孝悌忠信으로 그 道를 실행해야 하며, 학문의 과정은『소학』에서부터 『대학』, 『논어』, 『중용』, 『근사록』 등 六經·四書와 先賢의 글로 이어지는 일련의 課程을 제시하였다. 그가 도학을 통한 인도의 실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아직 성리학적 틀 속에 잠겨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는 본원 유학적 관점에서 경학을 연구했고, 이를 토대로 현실적 관점에서 사물과 인간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론과 실제적 체험을 토대로 사회·국가적 상황에 대한 개혁안을 주로 제시하였다.
Ⅲ. 土地制度에 기초한 諸制度의 改革
반계는 약 20여년간 연구활동을 통해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사회문제는 물론 역사, 지리, 언어 등의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현재까지 전하여진 부분은『磻溪隨錄』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저서는 모두 26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전제, 교선제, 임관제, 직관제, 녹제, 병제의 6개 분야로 나누어져 있고, 속편에는 奴隸, 言語, 度量, 家舍, 用車 등의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그는 국정 각분야에 있어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자기의 개혁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각 분야마다 故說을 붙여 그 제도에 대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고증·서술하였다.
반계는 임·병란 이후 문란해진 경제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근본 대책을 田制의 改革에 두었다. 모든 산업의 근본이 토지제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정치·세제·사회·교육·일반 제도의 개혁을 이룰 수 없었고, 왕조국가를 발흥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학문에 대해 천관우는 다음과 같이 선유의 글과 비교하여 실학적 관점에서 평하였다.
반계의 사상에 대해 물론 동양의 전통적인 정치사상인 왕도 및 동양의 전통적인 경제 사상인 중농주의와 균산주의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또 봉건국가의 집권강화를 최후의 목적으로 하는 농민보호의 합리적 정책으로 보면서도, 조선 중기의 역사적 제약은 반계의 입론으로 하여금 앞서 말한 동양적인 사회정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반계 이전의 여러 사상과 다른 점은 사회개혁의 구호와 목전의 구구한 현실의 고식적인 관찰연구에 그치거나 유교적 정론과 밀착된 추상적 시책에 반해, 반계는 자신의 농촌생활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 불합리의 근원을 색출하고 구폐의 대책을 반드시 조선·중국의 문헌의 역사적 논거위에 두되 정밀한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홍계희도 전에서 밝혔듯이 "반계의 글은 土地로써 근본을 삼고 井田의 형용을 긋지 아니하면서 다만 井田의 實을 찾으며 그런 연후에 선비를 가르치고 재주를 뽑고 벼슬을 주어 직무를 나누고 봉급을 펴고 군사를 마련하고 郡縣을 차리게 하는 法을 모두 이로부터 미루어 행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그는 井田法과 같은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정치와 인재선발 및 교육, 행정, 군사제도 등을 시행해야 함을 설파하였다. 즉 "옛적의 정전법은 지극한 것이다. 토지의 경계가 한번 바로 잡히면 만사가 모두 바로 서서 백성은 항구한 생업을 튼튼히 가지게 되고 병정은 수색하여 모으는 폐해가 없고 국민의 귀천·상하가 그 직분을 얻지 못함이 없기때문에 인심이 안정되고 풍속이 두터워지는 것으로 옛적에 나라를 견고히 유지하고 예악을 흥행한 것은 이 정전법의 근기가 있었기 때문이며, 후세에 토지제도가 와해되고 사적 점유를 제한하지 못해 만사가 폐하여 모두 바로 잡을 수 없게 되었다"하였다. 반계는 정전제를 정치·경제·교육·사회·문화의 근본적 터전으로 인식하였고, 후세에 그 근본이 왜곡되어 모든 인간 삶에 있어 제도문제의 발단으로 작용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을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치적으로 가장 이상시했던 三代의 법을 근간으로 밝히고 있는데, 제도에 대한 그의 사상은 道에 대한 器의 일단으로 主靜的 思想을 드러낸 것이다.
토지는 천하의 큰 근본이니 이미 바로 서면 모든 제도가 따라서 하나도 당위성을 얻지 아니함이 없고 큰 근본이 이미 뒤엉키면 일백제도가 따라서 하나도 마땅함을 잃지 아니하기에 진실로 정치의 본체를 깊이 아는 자가 아니면 또한 어찌 천리와 인사의 잘 되고 잘 못되고 이롭고 해로움의 귀결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것인가, 그러나 후세의 뜻있는 자가 이것을 그 당시에 행하고자 한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산과 시내로 된 땅에 정전의 경계를 이루기 어렵고 공전과 실지를 만드는 일에 의혹과 애로와 같은 어려움이 있다.
고 했다. 즉 지금까지 제도의 개혁과 그 운영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는 제도의 개혁을 위한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天下를 다스림에 있어 公田과 貢擧로 하지 아니하면 모두 구차할 뿐이고, 公田을 한번 행하면 一百制度가 擧行되어 빈부가 스스로 정해지고 戶口가 저절로 밝아지고 군대가 저절로 정돈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한 뒤에 敎化를 행할 수 있고 禮樂이 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큰 근본이 이미 뒤엉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듯 그는 오직 공전제와 공거제의 실현을 통해 위민정치를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가 구상한 전제개혁의 기본방안은 周代 井田法의 精神을 근본으로 삼아 토지를 公田으로 하는 均田法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는 정전법의 제도가 실시되기 어려운 여건일 때는 현실에 맞는 제도를 입안해야 한다는 상황론도 제시하고 있다. 정전법을 이상으로 하는 이유는 그것이 私田이 아니라 公田이기 때문이며, 공전은 '有恒産 有恒心'의 인정을 펼 수 있는 기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국정을 바로 행하기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바로 잡고, 산업의 안정과 균등한 세제와 부역, 정확한 호구, 군대의 정돈, 송사, 형벌, 뇌물 등에 대한 해결 등 풍속을 돈독히 하면 정치와 교육, 그리고 학문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관료제도 개혁안은 지방관의 임기와 관련지어 제시하였다. 즉 감사의 임기가 1년이며 수령들의 임기도 3년밖에 되지 않으므로 임지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소신있는 행정을 펼 수 없음을 지적하며 감사의 임기를 6년, 수령의 임기를 9년으로 연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임지에 부임할 때 가족을 동반하여 부임할 수 있게 해서 침체된 지방행정을 활성화시키는 임관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율곡 이이의 관직임명에 대한 주장과 重峯 趙憲의『東還封事』의 내용, 西涯 柳成龍의『箚子』의 내용을 살펴 참고로 제시하였다. 그의 인재 천거방법은 選士와 顯職을 지낸 자와 학행이 현저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공거제를 제안하였다.
군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은 서울의 중앙군, 즉 오위의 제도에 대한 개혁을 강조하였다. 중위, 전위, 좌위, 우위, 후위에 각각 군영을 설치하고 각각 장수를 두어 그들로 하여금 현역에 근무하는 번상군을 거느리게 하여 궁궐을 지키고 훈령을 하게 하는 것이다. 또 훈련도감은 지금의 제도를 따르되 그 규정은 고쳐야 하고 지방군은 각 지방의 큰 고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사는 그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하여 국방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함을 제시하였다.
반계는 노비제도를 원칙적으로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제도를 일시에 개혁하기 어려움을 감안하여 고공제의 채택을 통한 노비제도의 점진적 폐지로 신분세습제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가 이러한 사회의 제제도의 개혁을 통해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안을 주로 제시했다는 점은 인간적인 삶을 통한 평등사회의 구현과 국가발전의 도모라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개혁론은 토지, 조세, 관료, 군사, 노비제에 관한 개혁론 등 그 범위가 광범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간략히 그 중요한 내용만 살펴보았다. 이러한 제제도 개혁의 철학적 배경은 "形而上學的 仁을 實事面에서 仁政으로, 仁政은 公田의 均田法的 分配制度를 구체화시킨 것으로써, 形而上과 形而下가 만나는 道器不相離의 哲學"을 현실개혁안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Ⅳ. 公敎育體制로의 改革과 敎育
1. 各級學校의 制度와 敎育
위의 제제도에 대한 개혁론과 함께 반계 유형원의 교육사상은 그의 철학사상과 경세적 시각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철저히 현실 지향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조선 왕조시대의 유학에 사상적 토대를 두었지만 현실개혁에 모든 사상을 결집하였다. 반계는 경제제도의 개혁 즉, 토지와 세제의 개혁과 더불어 인재의 선발과 양성측면에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를 통한 학제의 체계적 개혁으로 국가 기강의 확립과 발전을 기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후기 인재양성을 통한 국가발전과 사회교화라는 교육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 성균관과 사학, 향교 등의 학교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교육체제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는 체계적인 학제안을『敎選之制』上의「學校事目」에 주로 제시하였다. 그는 국립교육기관으로 중앙의 고등교육기관인 태학을, 중등교육기관으로 서울에는 중학과 각도에 영학을 두고, 다음에 서울에는 4학과 부·군·현에는 읍학, 그리고 공립 초등교육기관으로 坊에는 방상과 鄕에는 향상이라는 4단계 형식의 학교체제를 계통적으로 제시하였다.
먼저 高等敎育 體制로서의 太學은 국립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1개교를 설치하는데,이 곳에서는 選士들이 기숙(居)하면서 교육을 받는 곳이다. 태학의 교수요원(교관)은 태학장과 부학장(이관)이 맡아 지도하는데, 스승상으로 太學長과 貳官은 반드시 그 道德이 推尊하여 스승을 삼을만한 자이어야 하고, 직제의 품직으로서 大司成은 마땅히 정이품으로 상향 조정하며, 一品이면 行職, 從二品이면 守職이라 칭하며, 동시에 吏曹判書·大提學은 知館事를 겸임한다.
다음으로, 그는 中等敎育 體制으로서의 中·營學과 四·邑學을 제시하였다. 중등교육기관으로 서울에는 중학을, 각도의 監營에는 영학을 설치한다. 중학의 학생은 四學에서 추천하는 선비를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경기도에는 따로 영학을 설립하지 아니하고 州縣에서 선발된 선비(擧士)를 서울의 중학에 입학시킨다. 중학과 영학의 교육자(교관)로 중학의 교관은 司敎로 정삼품 堂上官이고 司導는 종삼품이다. 영학에서는 '감사'와 '도사'만이 그 교육을 맡게 된다. 그 학교의 직제로서 감사는 학교장(長)이 되고 도사는 부(貳)가 되며 도사는 '참리'라고 그 직함을 고치고 등급을 종삼품으로 상향조정한다. 중학의 스승은 敎監을 맡으며, 道의 都事도 그 일을 겸임할 수 있어 敎授를 겸임한다. 또 교육활동으로, 학생(擧士)은 스승에게 찾아와서 학습(講讀)한 내용을 평가(考査)받고, 여가를 통해 학교에서 사제 권학하고 격려할 것을 강조했다.
또 서울과 지방에는 중학과 영학 밑에 四學 및 邑學의 교육을 실시하는 데, 서울의 東西南北 네 곳에 4학을 설치하고, 지방의 府, 郡, 縣에는 읍학을 설치한다. 4학과 읍학의 교육자(교관)의 자격은, 종사품의 敎導를 4학에 두고, 敎授는 6품으로 학교의 교관으로써 교육에만 전념한다. 그 직제로, 대부, 도호부, 부에 있는 학교의 교육자(교도)는 대부, 도호부는 정5품, 부는 종5품, 군현의 학교의 교육자(교수)로 군은 정6품, 현은 종6품이다. 주현과 서울의 교육자(교관)는 가족이 함께 임지에서 임기를 채우며, 임기후 근무평정에 따라 승급을 결정한다. 4학과 읍학의 학교시설은 內舍와 外舍가 있는데 내사는 額內生이 기숙하는 것이고, 외사는 增廣生이 기숙하는 곳인데, 증광생이란 당시 액외생이라고 일컫는다. 내사는 안에 있어 동재와 서재로 구분하고, 외사는 밖에 있는데 역시 동재와 서재로 나눠 설치하고 그 내외의 두 건물은 동일한 담으로 둘러싸인 낮은 담으로 막고 중문을 열어 놓는다. 당시 외방의 향교에서도 이와같이 양반은 동재에 기숙하고 서민(庶類)을 서재에 기숙하는데, 서재나 동재가 비어있어도 서로 들어가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양·서 구분없이 함께 기숙하도록 하는 서사평등적 동·서기숙제의 운영방안을 제시하였다.
州縣의 중등학교는 聖廟, 講堂, 東西齋食堂, 典祀廳, 祭器庫, 藏書閣 등을 설치하고, 앞행랑, 南樓, 傍學 등을 지으며 교관의 官舍를 짓는 등 교육시설을 완비하여 활용한다. 학교와 부속건물의 관리는 국가의 경비로 수령이 관리하고, 감사는 그 수선여부를 점검하고 교관의 봉급을 체계화한다. 이와 관련해서 반계는『수록』「녹제」에서 학교경비에 대한 회계와 봉급체계를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또 학생정원으로, 4학의 학생정원(儒士)은 서울과 지방에 따라 달리하고, 외사생은 내사생의 배수로 한다. 이와 같이 증광생수를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교육의 기회를 배우고자 하는 서민들에게도 널리 제공하려고 했다. 이러한 진학의 기회는 마을의 里塾과 鄕黨의 庠을 통해 모든 백성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며, 면학과 덕행의 결과로 사·민이 구별됨을 원천적인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반계는 인재의 선발과정을 매듭에 비유해서 국가교육체계의 원리와 그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교육방법으로 중학, 영학, 4학, 주현학에는 學賓을 두고 觀光法을 태학처럼 동일하게 해서 스승에 대한 공경과 윤리적인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자 하였다. 또 각 학교에는 도서(經籍)를 많이 확보하여 학력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 경적은 경서뿐만 아니라 역대의 全史를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고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학교에서도 확보할 것을 권장하였다. 또 학교는 射圃를 만들어 학생들의 체육과 윤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교육자(교관)가 선비의 교양을 주관하므로 그 예를 엄하게 하여 도를 높게 하는 것이 피교육자로 하여금 학문을 공경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서울과 지(외)방의 학교에서는 제생중에서 단정(敬服)하고 연령이 많으며 학행이 우수한 자 1명을 掌議으로 선출하고, 有司 2명을 선출하여 차례로 直月을 삼아 교육활동에 필요한 제반 사항, 즉 물품의 출납, 학교의 하인을 부리는 일, 서책, 즙물을 보관하는 일까지 도맡아 관리하게 하는데, 그 임기는 1년으로 정했다. 이와 같이 반계는 교육을 바로 세우는 방안으로 국가나 사회적으로 교육자에 대한 선발뿐만 아니라 교육자에 대한 스승 존경 풍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교육자에 대한 존경풍토는 학문을 공경하는 교육풍토로 발전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교육목적 실현을 위한 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반계는 또 初等敎育 體制로서의 坊庠과 鄕庠교육을 구상하였는데, 학교교육이 발전하면 학교를 넓혀서 서울안의 각방에는 坊학교를 설치하고, 주현의 각 향에는 향의 학교를 두어 아동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한다. 향상과 방상은 오늘날 洞이나 面단위의 행정구역에 설치하는 公立 初等敎育機關을 말한다. 당시에는 사립교육기관으로서 서당이 마을단위로 설립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는데, 반계는 이를 공교육화하여 국가가 주체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의 중학과 영학, 4학, 읍학의 운영체제나 교육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에 비해 방상과 향상에 대한 교육내용이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은 미완의 교육구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의 교육체제는 다섯가지 특징들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종래의 성균관, 4학, 향교, 서원 등의 독립적 학교제도를 국가 행정 단위와 관련지어 학교를 단계적으로 체계화하였다는 점이고, 둘째, 현대 교육기관과 유사한 공교육체제로서 연계된 계통성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셋째, 교육체제에 따른 공거제라는 인재선발 방식과 관련지어 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를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 기존 학교의 교육적 기능 상실과 과거제라는 인재선발 방식의 문제점 등으로 교육력 낭비를 초래한 기존 교육체제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교육체제를 염두에 두었다. 그의 구상은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통해 서원 난립을 막고, 서당이나 서원이 없는 각 향에 鄕庠을 설립하여 교육적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지치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였다. 넷째, 그는 교육체제나 인재선발과 교육에 있어서 기존의 중앙에서 지방으로 하향적인 체제보다는 지방민들의 교육을 통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상향식 교육과 인재선발방식을 구상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그는 전백성을 대상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계몽적 교화로 의식수준을 향상시키고, 백성이 사는 모든 생활환경에서 유용한 인간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학습사회와 교육국가를 구상하였다.
2. 貢擧制를 통한 人才選拔과 敎育
반계는 인재선발과 교육을 위한 방법, 즉 학생의 선발과 교육자의 선발에 있어 貢擧制를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반계는 사민 평등사상을 기초한 인재선발원칙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 동안 문벌지체 숭상으로 인재를 구할 수 없었고, 정치·형벌이 난무하여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시킬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양반, 서얼, 서족간의 차별을 철폐하여 숨은 인재를 선발하고 교육시켜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본래의 목적실현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鄕黨學校에 있어서 사회 윤리적 풍속과 교화를 두텁게 하는 곳으로서 문벌과 지체가 아닌 學行과 才能으로써 추천하고 太學에 입학한 자는 연령에 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반계는 '주자가 향약에 士類가 아니면 班列하지 말라'는 글의 내용에 대해, 사족과 서민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사족과 사류의 개념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만일 문벌과 지체를 진학의 준거로 삼을 경우 그 문벌때문에 투쟁의 단서가 될 것이라 염려했다. 향상에서 태학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지(외)방의 학교에 입학하는 유생원수가 정해져 있을 때 학문의 정도가 균등하면 최종적으로 활쏘기로써 선별해야 하고, 정원 미달시 공석으로 두어 학업에 전념하는 자를 선발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둘째, 반계는 과거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이를 폐지하는 대신 공거제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浮虛한 글짓기를 하는 과거를 영원히 없애고 잡스러운 놀이의 풍습을 엄하게 금해야 한다" 고 했다. 과거제를 페지하고 공거제를 실시하면 인심을 바로 세우고 사회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庭試, 謁聖試, 燭刻試, 喜慶事時의 科擧試驗은 해독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모든 과거제도를 없애고, 공거제의 법령을 수립해 실시함으로써 인재를 바로 선발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이 제도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국정을 바로 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셋째, 반계는 그동안 차별화된 인사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역간·계층간 인재의 균등한 선발과 임용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상급학교 진학시 선발기준을 제시하였는데, 4학과 각 주현학교에서 태학에 추천하는 선사의 정원이 150명이면 1.5배인 225명으로 중학과 각 도 영학의 정원을 제안하였는데, 이 정원제는 호구의 차이에 따라 학생정원을 조절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중국의 제도에 대해 논하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지역별 할당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지역별 정액제는 고려 태조이후 지역간 인재등용 차별책이 오늘날까지 지역간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 영·정조의 탕평책과 함께 반계의 지역간·계층간 인재의 균등한 선발과 임용으로 사회·국가의 발전을 기해야 한다는 그의 균형있는 시각이 인재등용론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 선발과 임용의 방법으로, 그는 교육의 진흥을 주장하였고 이를 위해 그는 貢擧法의 시행을 강조하였다. 공거법의 시행에 있어 처음 3년동안은 주현에서 선비를 천거하여 정원외에 어진 선비를 더 뽑아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 쓰면 백성들의 인심도 근면해지고 경계할 줄 알게 될 것으로 여겼다. 그 밖에 종학과 의학, 율학, 음양학, 역학 등에서 인재를 선발 방식과 교육은『經國大典』의 규정을 참작해 운영할 것을 제시하면서 고대 중국의 인재선발의 예와 우리 나라의 선거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였다.
반계가 주장한 공거제의 방법은 州縣에서 道로 추천하고 도에서 太學으로 태학에서 朝廷에 인재를 추천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기본적인 인품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교육을 통한 인격의 형성을 기본으로 그 행실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인재육성은 농후하게, 교육은 두텁게, 선발은 정밀하게, 살피기는 자세하게, 명하기는 직위로써 하고, 맡기기는 전임으로 하며 직위에 맞는 인재를 얻어서 정치와 교육(치화)을 행하면 백성이 안정을 기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효과가 클 것으로 보았다. "貢擧의 法은 鄕黨의 公共한 論議를 널리 취하고 공명하게 인재를 천거하여 학교의 모든 인재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으로 禮를 흥하게 하고 보증·임용(保擧)함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選擧의 제도는 인재를 얻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기풍을 조장하고 인심을 淳厚方正하게 할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공거제에 있어 특이한 점은 천거한 자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천거자와 피천거자의 연대책임을 특히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국립대학인 태학의 교원을 임용하는데 있어서도 공거제를 통한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사표가 될만한 인재를 교원으로 추천·임용하고, 국가에서 충분한 예로써 대하는 제도를 제시하였다. 또 주현의 교원(교관)도 각도내의 고을이나 이웃 고을에서 학술이 밝은 선비를 감사에게 추천하고 감사는 이조에 천거하면, 조정에서는 신중히 선별·임명한다는 것이다. 또 교육자로 발탁된 교관에 대한 예와 평가 및 전문성 신장을 위한 내용을 언급하였는데, 監司가 친히 巡行하며 望闕禮와 儒生의 講讀考試 등을 통해 교육자(교관)에 대한 평가를 봄, 가을에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교육자에 대한 임용과정과 평가의 내용은 교육의 질과 학문의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로서 학교교육의 발전과 직결된다. 그래서 반계는 학교교육의 진흥을 위한 방법으로, 지방관(수령)이 經學에 밝고 덕을 성취한 자를 교관으로 삼아 지극한 정성으로 존경 풍토를 조성하여 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즉 觀光法과 같은 모델링 학습법으로 사회를 敎化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操行이 정직하고 先儒의 經義를 확실히 지켜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자를 스승으로 삼아 교육시키면 그 교육적 효과가 높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각 학교의 입학규정을 제시하였는데, 사대부의 자제는 15세이상의 재주가 준수한 자를 대상으로 4학의 교관과 수령교관이 학문에 뜻을 둔 자를 평가하여 증광생으로 선발한다는 것이다. 주로 소학과 사서를 강독하여 입학을 결정하고 이들은 외사에서 기숙하며 1년이상이 되어야 내사에 입실할 수 있다. 학생들의 학업성적을 평가하여 내사에 입실시키고 보포를 면제하는 등 조세와 토지제도와도 관련지어 학사를 운영한다. 제적생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장학 형식의 토지를 반환하는 등 그 학칙을 엄격히 적용하고, 다만 공장, 상인, 시정잡배의 자식이나 공·사천은 입학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반계의 교육사상에서 일반적으로 사민 평등사상을 주장하지만, 중등학교의 입학생에 대한 제한 사항만은 자신의 일반사상과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다.
반계는 교육과정의 내용으로 "三物 즉, 6德·6行·6藝를 모두 강의할 것을 주장하였고, 수기와 치도는 모두 성현의 經傳에 근거해서 人倫에 근본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힐 것을 강조하였다. 또 그 가르침은 소학에서의 절차와 순서 즉, 쇄소응대, 효제충신과 周旋의 절차 및 예악을 닦고 권유하고 격려하고 연마하고 성취하는 길을 강조하였다. 그 교육목적은 선한 것을 가려 몸을 닦아 천하를 교화시키고(化成), 향인으로부터 성인의 도에 이르게 함이 주요지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교육자(교관)는 교육과정을 작성하여 통독과 강론이라는 교육방법으로 교육시키는데, 서울의 4학은 교도·교수가 학교에 모여 강독하고 주현의 학교는 지방관인 수령이 학교에 나와 강독하고 매월 1, 15일 유생들을 상중하로 평가한다. 나아가 4학에서는 교관이 매월 1일 돌아가면서 유생들을 데리고 태학에 가서 통독하고 성묘한다. 한편 중학과 영학에서는 4월 1일 두학교의 학교장(사장)이 돌아가면서 유생들을 태학에 데리고 가 글을 통독하고 성묘하게 한다. 반계는 학교에서 강독과 작문을 평가하는 것은 행실을 살피고 힘쓰는가를 평가하기 위한 자료로 삼는 것으로써, 과거제와 같이 그것 자체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닌 과정평가라는 점에서 과거제와 차별된다. 또 상급학교 진학에 있어서 문자구독이나 문벌과 지체의 귀천으로 구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반대하였으며, 교육의 목적은 오직 현명하고 재능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으로써 교육과 고선을 주관하는 자의 책무를 강조하였다.
인간의 윤리와 경학을 중심으로한 교육과정은 유학의 내용을 주로 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보이지만, 공거제를 통한 전국가적 개념의 인재 선발과 교육, 그리고 능력있는 모든 사민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 그리고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교육체제와 교수방법, 평가 면에서의 변화를 촉구한 내용에서 거시적 교육체제의 학제안과 함께 그의 교육적 예지를 찾아볼 수 있다.
Ⅴ. 結 論
반계 유형원의 생존 시기는 조선 후기 국가와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당파적 정쟁의 상황이 계속되어 제도 운영의 미비 및 사회적 혼란과 함께 백성들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사상계의 흐름은 대의 명분을 중시하고 비현실적이며, 편협된 사고를 조장한 도당적 성격을 띠는 학문 성향이 주를 이루었다. 이와 달리 반계의 사상은 현실에 입각해서 위민적·위국적 성향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민생과 직접 관련된 田制와 稅制, 그리고 敎育制度의 改革을 가장 강조하였다. 특히 교육제도에 있어서 그는 그 동안의 제도와 다른 새로운 공교육 체제 및 인재 선발책을 제시하였다. 그의 개혁 사상의 교육사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계는 모든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하드웨어로서의 토지제도와 소프트웨어로서의 교육제도 개혁에 중점을 두어 연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행정구역과 인구수에 걸맞는 근대적인 교육체제를 구축하였다. 즉, 향상·방상 → 읍학·사학 → 영학·중학 → 태학으로 연계되는 공교육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그는 인재의 선발과 육성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제도로서뿐만 아니라 교육국가 개념으로,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 체제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물론 교육내용은 유학에 근본을 두는 한계를 보이지만 당시 새로운 학문의 도입이나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사상을 생각하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사상은 현실적이었고 합리적이었다. 그는 조선후기 국가·사회의 현실 문제를 정치·경제에 두었고, 이것은 백성의 민생 해결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토지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기반 위에 그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인재양성 체제의 수립을 또 하나의 근원으로 삼았다.
둘째, 반계는 사민 평등사상을 통해 능력있는 모든 백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는 또 천부적으로 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에게 교육의 기회뿐만 아니라 사회활동과 직업활동에 있어 참여의 기회를 동일하게 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인간의 개별능력에 근거한 사농공상의 분별된 직업관을 제시하였다.
셋째,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를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교육자를 추천받아 선발하고 관리로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성의 교육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반계에 있어서 인재등용은 각종 폐단이 많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백성들이 모여사는 가장 기본단위인 향촌사회의 교육기관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하고 학식이나 덕망이 있는 능력있는 인재를 추천하여 후속 학교에 진학시키게 하는 등 공거제를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공거제를 시행할 경우 모든 백성이 다양한 위치에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종사하며 국가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서 쓸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결국 과거제라는 하향식 방식을 탈피해 학교 교육과정 속의 평가를 통해 선비들의 양성과 진학을 결정하고, 공거제라는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상향식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반계의 사상은 실학적 학통을 형성하였으며, 개화사상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상은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실학세계를 열어가는 단초가 되었다. 이제 새로운 세기와 함께 우리의 학교교육은 제7차 교육과정 체제에 들어와 있다. 이 교육과정에서는 10학년의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6-3-3-4학제인 공교육체제의 변화, 즉 새로운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바뀐 새 교육과정에 맞는 교육체제와 교사양성 체제로의 변화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계의 교육사상을 통해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방안과 공교육 및 입시문제, 경쟁력이 떨어진 대학교육의 문제와 같은 복잡한 교육현안 해결을 위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고문헌
『周易』
김낙진. 유형원 실학 사상의 철학적 성격.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실학의 철학. 서울: 예문서원, 1997.
渡部學. 柳馨遠の鄕庠論にみられゐ書堂. 朝鮮敎育史. 梅根悟. 世界敎育史大系. 東京: 株式會社講談社, 1975. pp.151-153.
安在淳. 柳磻溪 實學思想의 哲學的 基調. 道原柳承國박사화갑기념논집, 1983.
안정복. 양홍렬 역 국역. 順庵集ⅠⅡⅢⅣⅤ.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96.
禹龍濟. 朝鮮後期 敎育改革論 硏究. 博士學位論文: 서울大學校大學院, 1995.
유형원 외. 강만길외 역. 한국의 실학사상. 서울: 삼성출판사, 1990.
柳馨遠. 磻溪隨錄. 國譯註解ⅠⅡⅢ. 忠南: 忠南大學校 刊, 1962.
李丙燾. 韓國儒學史略.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6.
李佑成. 實學硏究序說. 歷史學會編. 實學硏究入門. 서울: 一潮閣, 1973.
李佑成. 初期實學과 性理學과의 關係-磻溪 柳馨遠의 경우. 동방학지58, 1988.
李銀周, 朝鮮後期 實學者들의 學校制度 改革案 硏究, 동남보건전문대논문집6, 1989.
李乙浩 編. 實學論叢. 광주: 全南大學校出版部, 1975.
鄭炳連. 柳磻溪의 理氣 心性論. 東洋哲學硏究會. 동양철학연구13. 1992.
丁淳睦. 韓國書院敎育制度硏究. 慶北: 嶺南大學校民族問題硏究所, 1979.
千寬宇. 近世朝鮮史硏究. 서울: 一潮閣, 1979.
千寬宇. 磻溪 柳馨遠 硏究(下)-實學發生에서 본 李朝社會의 一斷面. 역사학보3, 1953.
千寬宇. 磻溪柳馨遠 硏究. 歷史學報 3, 1953.
崔成哲, 朝鮮後期 實學의 改革思想, 한양대, 한국학논집6, 1984.
何佑森. 明末·淸初의 實學. 한양대학교. 도전과 도약. 서울: 한양대학교출판원, 1990.
韓國敎育學會敎育史硏究會 編. 韓國敎育思想家評傳. 서울: 敎學硏究社, 1987.
韓國敎育學會敎育史硏究會 編. 韓國儒學思想과 敎育. 서울: 三一閣, 1976.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실학의 철학. 서울: 예문서원, 1996.
韓 劤. 李朝 實學의 槪念에 對하여. 震檀學會. 震檀學報 7(19호, 20호합본). 서울: 乙酉文化社, 1958.
韓 劤. 韓國通史. 서울: 乙酉文化史, 1970.
玄相允. 朝鮮儒學史. 서울: 玄音社,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