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사 초대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6>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 2,3년 동안은 불고기라든가 잡채 등 우리나라 음식을 키위들에게 맛보여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사명감이 있었다. 무슨 행사에서든지 우리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한 몫 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 학교 바자회에서 불고기 꼬지를 만들어 바비큐 대에 구워 팔고, 김밥, 심지어는 녹두전까지 열심히 부쳐대었다. 교회에서 친교를 위해 함께 점심 먹는 행사가 있었다. 먹으러 갈 사람과 음식을 준비할 사람이 각각 신청하여 먹으러 갈 사람은 일정한 회비를 내고 음식을 준비할 사람은 몇 사람을 초대할 수 있는지에 따라 그 회비를 받아 가지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음식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설거지하는 일을 택하는 내가 이때에도 음식을 만들어서 초대하는 쪽을 택했다, 과감하게. 그리고 12명을 초대할 수 있다고 신청서에 썼다. 뷔페식으로 식탁에 음식을 차린다 해도 아이의 책상 의자까지 다 동원해야 앉아서 먹을 수 있었는데도. 사실 몇 명을 초대해야 하나를 생각하면서 우리 집 의자 수를 세어보았다. 우리 집 거실에 빼곡이 들어앉아 먹었다. 서양식은 앙뜨레, 메인, 디저트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우리 음식을 대접한다는 고집으로 흰 밥 대신 볶음밥을 한 것과 샐러드를 만든 것 말고는 김치까지 선을 보였다. 그리고 내 나름으로 후식은 수정과와 떡을 내면 그런 대로 우리 식이겠다 싶었다. 떡은 여기서 쉽게 구하는 중국제 찹쌀가루로 볼을 만들어 카스텔라를 체에 쳐 가루를 묻혔으니 이것도 순 우리식은 아닌 셈이지만.
어쨌거나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모든 그릇 동원해서 12명이 식사를 시작했다. 먹는 것보다 대화를 나누는데 더 열심인가 싶게 다들 느긋했다. 수정과와 떡을 후식으로 먹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분들이 거의 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라 별로 다른 일들이 없어 느긋한가 어째 갈 생각들을 안 하실까 하다가 혹시 커피나 홍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이구동성으로 "very good" 이라는 대답에 예정에 없던 차를 끓였다. 나는 수정과와 떡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커피나 홍차를 들고서 마시는지 아닌지 한없이 또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한국인 이민 교회를 두 달 다니다 지금 이 키위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라 나는 대화에 별로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무엇을 또 내놓고 먹으라고 해야 하나를 고민하는데, 그래도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남편은 다행히 잘 버티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분이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니 모두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설거지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을 애써 말려서 그냥 가시게 한 뒤에 시계를 보니 3시간이 지나갔다. 그 뒤에 이곳에서 다시 대학을 다니던 남편의 학교친구들을 불렀을 때도 3시간, 남편이 졸업 후 취직한 법률회사의 동료가 왔을 때도 3시간이 지나야 가겠다는 표시들을 했다, 점심의 경우.
우리가 키위 집에 초대를 받아가도 마찬가지로 3시간이었다, 그 집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감자 칩을 디핑이라고 하는, 예를 들어, 아보카도 으깨서 양념한 것에 찍어 먹는다든가, 짜지 않고 밍밍한 워터 크래커 위에 치즈나 햇빛에 말린 토마토를 얹어 먹는 것으로 앙트레를 하고 물론 포도주나 주스와 함께. 이 시간이 거의 30-40분 이상, 저녁의 경우는 1시간 이상 걸라는데, 배가 고파도 앞으로 나올 음식을 기대하며 우아하게 참아야 한다.
칩 한 두 개, 크래커 한 두 개를 먹으면서. 그리고 나서 메인을 먹는데, 키위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무척 빨리 먹어치운다. 이야기를 하면서 사이사이 먹는데, 꿀꺽 삼키나 싶을 정도로 소리도 안 나게 먹어 치운다. 이야기에 끼어들다 보면 다들 이미 다 먹고 빈 접시를 앞에 놓고 앉아 있어 나도 허둥지둥 급하게 먹고 나면 배에 가스가 차 버린다. 게다가 포크와 칼질에 서툴러서 키위처럼 음식을 작게 썰지 못해 입에 한 입 가득 집어넣으니 씹는 소리 안 내고 먹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야기에 끼지 않고 접시에 코 박고 부지런히 먹기만 하면 또 너무 빨리 먹은 게 된다. 남들과 음식 먹는 속도 맞추는 것이 보통의 기술로는 쉽지 않다.
그리고는 메인 먹은 것을 주인이 깨끗이 치우고 정리한다. 디저트와 차를 준비하고 차리는 것이 딴 상을 다시 차리는 것과 같다. 서너 가지 디저트와 차를 앞에 놓고 우아하게 약간 더 이야기하다 보면 3시간이 지나간다. 그러면 집에 가겠다고 말해도 된다.
1시간 내지 1시간 반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고 초대를 받아들였는데 이렇게 느리게 진행되는 점심식사로 다음 약속 시간이 다가와 2시간도 안되어 일어났다가 주인이 자기네가 뭘 잘 못했나는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바람에 같이 당황스러웠다는 이야기를 같은 동네 한국 분으로부터 듣고 내가 경험한 3시간 식사들을 말해주었다. 영어 중에서도 사적으로 수다 떨고 농담하는 것은 알아듣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제일 힘든데, 주로 그런 말을 나누기 위하여 모이는 사교모임 식사에 초대받는 것은 그래서 3시간의 인내시험장이다.
<2003.09.03>
남자와 가사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7>
가야겠다고 다들 일어나서 나가는데, 에릭 할아버지는 설거지를 해주고 가시겠단다. 내 남편이 설거지 해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남자들이 다 그렇지 않느냐고 눈을 꿈쩍 하시면서. 그래서 걱정 마시라고, 그 사람도 설거지가 이렇게 많으면 도와준다고. 그랬더니 정말 믿을까 말까 하시면서 주일 날 확인하시겠단다. 우리 교회 할아버지들은 교회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설거지는 당연히 자기 몫이다. 적어도 마른 행주 질은 할아버지 몫이다. 이렇게 설거지를 해주니까 음식 준비도 하리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었나 보다.
속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되고, 그래서 배도 고파지지 않고, 또 위염인가 싶었다. 서울서는 그런 증세가 있었을 때 위염이라고 진단을 받았으니까. 며칠 버티다 병원에 갔다. 약을 처방하면서 의사는 그런데 내 눈꺼풀 안쪽이 너무 하얗다고 피 검사를 해야겠다고 검사요청서를 써 주었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 다행히 의료검사소가 붙어있어서 곧장 피를 뽑으러 들어갔다. 5시가 문 닫는 시간인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간호원이 나와 문을 잠갔다. 내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직 세 사람 있어서 그 간호원이 퇴근 시간을 못 지키겠구나 싶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이가 쉰은 훨씬 넘어 보이는 간호원이었다. 오늘 바쁜 모양이라고 내가 말을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소연을 했다. 오늘 따라 왜 사람들이 그리 밀려드는지 정신없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두 사람 앉으면 나머지 사람은 서서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두 사람 서 있으면 더 들어갈 수도 없이 작은 대기실에 그보다 약간 큰 검사실이 있는데, 혼자서 일하는 간호원에게 내가 왔음을 알리려면 대기실에 있는 벨을 흔들어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는 것은 정말 혼자서 바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일이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했다고 말하면서 덧붙이는 말, 이제 퇴근하면 슈퍼에서 장을 보고, 집에 가자마자 앉지도 못하고 저녁을 해야 하는데 오늘 같은 날 남편이 저녁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키위들은 남자들도 음식을 잘 한다는데, 당신 남편은 안 하느냐고. 30년 넘는 결혼 생활에 단 한 번도 남편이 밥을 차린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스물이 넘는 아들도 아버지 닮아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나는 우리 남자들도 거의 그렇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면서 잠시 남성에 대한 공동 전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할아버지들이 설거지는 잘 하는데, 음식을 할 줄 아는지, 부인이 힘들면 밥을 차리는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졌다. 얼마 후 일레인 할머니가 요새 할아버지를 훈련시킨다는 말씀을 하셨다. 일흔이 넘으시니까 두 분 중 어느 분이 먼저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혹시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사실 경우를 대비하여 할머니 없어도 사실 수 있게 간단한 음식 만드는 법 등 집안 살림을 조금씩 가르치신다고 했다. 딸과 며느리와 함께. 그 동안 할아버지에게 그런 일을 전혀 시키지 않아 버릇을 못 들였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끔 취미가 요리임을 말하는 남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키위 남자들은 거의 다 할아버지 급이라 그런가, 내가 아는 한 식사 준비는 여전히 주로 여자의 몫임을 알게 되니, 인류 역사 속에서 정해져 내려온 여자 남자의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요지부동으로 확고한가를 새삼 느낀다, 여성참정권이 세계 최초로 시행된 이 나라에서도. <2003.09.04>
에릭 할아버지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8>
키위 친구들에게 가끔 받는 질문이 있다. 뉴질랜드에서 계속 살거니 아니면 언젠가는 돌아갈거니?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결국은 돌아갈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질문을 하나 라는 게 나의 처음 생각이었다. 실제로 정착 못하고 돌아가는 아시아 이민자들이 꽤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98년 홍콩 중국 이양을 앞두고 이민 왔던 홍콩 사람들은 홍콩이양 후에 아무 일 없음이 확인된 후 거의 다 도로 가버려 그 사람들 몰려 살던 곳이 텅 빈 적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문화적인 배경보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더 크다. 이곳보다 홍콩에서 돈을 더 벌 수 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이민 올 때 다시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살 거라고 이민 온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뉴질랜드에 살러 가는 거라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능곡에 살다가 영등포구로 이사를 갈 때 영원히 영등포에서 살 건지 아니면 다시 이사할 건지를 생각하지 않았듯이.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처음엔 당황했다. 뭐라고 대답하나. 이런 저런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인데.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 거라고 장담하기도 우습고,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고 대답하기도 얌체 같고. (왜 얌체 같은 느낌이 드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니까 여기서는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그래서 결국은 모르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글쎄, 그러면서 실없이 웃기도 하는 게 내 대답이다.
처음 우리 교회에 간 날 내 옆에 앉아있던 분은 에릭 할아버지와 프리다 할머니이다. 찬송가를 엔간히 따라 부르는 내가 귀여워 보였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속한 같은 장로교이지만 미국 장로교 영향을 받아 미국 찬송가가 주종을 이루는 우리나라 교회의 찬송가와는 달리 영국 찬송가라 거의 아는 찬송가가 없고, 더구나 악보는 없이 가사만 있는 찬송가라 정말 적당히 따라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워낙 찬송가 곡들은 예측이 가능해서 슬금슬금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 이름이 뭐냐부터 시작하여 다정하게 대해주셔서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친절 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 분이다. 그 이후 할아버지 할머니는 남편과 나의 보호자가 되셨다. 평소에는 없지만 마침 크리스마스를 위해 성가대 모임이 있으니 성가대를 하자는 그 분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더니 운전을 못하는 나를 위해 우리 집까지 일일이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셨다. 이런 저런 무료 콘서트에 대한 정보도 주고 그분들이 가실 때는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에릭 할아버지는, 커크 더글러스를 닮았다고 나 혼자 생각하면서 그 말을 하면 실례인지 아닌지를 몰라 말은 못했지만, 아주 젠틀한 영국신사였고, 프리다 할머니는 종달새처럼 명랑한, 나보다 작은 날씬한 할머니였다. 그 분들을 키위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런데 가까워지고 그 집에도 놀러 가고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우리보다 1년 먼저 영국에서 이민 오셨다는 것이다.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대학 시절 뉴질랜드에서 유학 온 청년과 연애하여 결혼했고, 남편 따라 뉴질랜드로 왔기 때문에 몇 번 뉴질랜드를 방문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엔지니어였는데, 은퇴하고 나서 할아버지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영국에는 더 이상 가족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외동딸이 결혼하여 살고 있는 뉴질랜드로 아예 이민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성공회 교인이었는데,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사돈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같이 우리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어느 날 집을 팔려고 내놓으셨다고 했다. 놀라는 나에게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신다고 말씀하면서. 지금부터 4년 전 일이다. 같은 영연방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여전히 영국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을 하시는데, 뉴질랜드 달러 가치가 많이 떨어져 처음 오실 때에 비해 소득이 줄기도 했지만 고향이 그립다고. 할머니는 돌아가서 친구들 만나는 것은 좋지만 여기서도 친구를 다시 사귀었고 무엇보다 이곳에 하나 밖에 없는 딸도 있고 손자 손녀도 있어서 떠나고 싶지 않은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자고 우긴다며 살짝 눈을 흘기셨다. 여자들은 어디 가나 잘 사는데, 남자들은 다 저렇다고 말씀하면서.
얼마 후 끝내 집을 팔아버리고 그 두 분은 영국으로 돌아가셨다. 그곳에서 이곳을 그리워 하신다는 이야기를 사돈 할머니를 통해서 듣다가 1년 후에 그분들이 다니러 뉴질랜드에 다시 오셨을 때 뵈었더니 그 사이에 많이 늙으셨다. 그리고 가신 후에 나도 전화 한 번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도 오고 갔으나 2년 뒤 할머니가 치매로 기억을 거의 상실해 사돈 할머니가 전화해도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그런 상황에 영어로는 어떤 식으로 위로의 말을 하여야 할지 혼자 답답해하다 소식은 끊겼지만 누가 나보고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거냐는 말을 물어보면 그분들 생각이 난다. 겉보기에는 모습도 같고 언어도 같은 언어라 우리처럼 말에서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고, 텔레비전의 한 채널은 영국 프로그램만 방영하는데도 고향이 아니어서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모를 일이다 싶다. <2003.09.05>
계속 살거니 아니면 돌아갈거니?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9>
이 나라에서 계속 살 건지 아니면 언젠가는 돌아갈 건지를 키위가 물어볼 때 결국은 돌아가게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얌체 같은 느낌을 주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사와 이민의 차이일거다. 내 나라 안에서 생활의 근거지를 옮겼다면 고향에 돌아갈 거냐는 질문에 언젠가 가겠지라는 대답이 어색하지 않을 거다. 사실은 고향에 돌아가 살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모르겠다. 실제로 고향에 돌아가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어색한 질문이기에. 이 어색한 질문에 어색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내가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제도가 너무 완벽하다 못해 그 때문에 경제가 망가질 정도로 이르렀던 이 나라는 90년대에 들어 열심히 자유경제 제도를 도입하여 복지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복지 혜택이 있다. 아시아인들이 병원 계산대에서 골드 비자카드와 함께 이 나라 최저소득층에게 발급하여 병원비를 보조해주는 social service 카드를 함께 내밀어 그걸 본 키위가 분개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자녀의 수에 따라 주는 보조비를 타는 사람이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다고 같은 이민자끼리 비난하는 소리도 들렸다. 노인들에게 주는 수당 (물론 나이 들어 자녀 따라 이민 와서 세금 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최저로 받아 용돈 정도이지만)을 받으면서 해외여행을 세 번 했다고 그 수당을 금지 당한 할머니 이야기도 듣는다.
이런 이야기를 듣거나 볼 때마다 내가 키위라도 세금 한 푼 낸 적 없이 이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곱게 보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소비를 함으로써 간접세금을 내고 또 우리나라에서 번 돈을 가지고 와서 어쨌거나 이 나라에서 소비를 하는 거니까 이 나라에 기여를 하고 있는 거라고 혼자 우겨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결코 떳떳한 느낌을 주진 못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얌체 같아 보이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편 월급 오르는 것에 따라 세율이 무섭게 올라 월급이 오르나 마나라는 불평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정초라고 몇 집 건너 사는 일레인 할머니가 티 타임에 초대하셨다. 큰 딸네도 오고 다른 이웃도 오니까 10시 이후 아무 때나 오라고 하시면서. 할머니네와 그 큰 딸네, 우리, 그리고 다른 두 부부와 혼자되신 지 오래된 할머니, 이렇게 모여 오전과 오후에 걸쳐 시간을 보내었다. 연말연시라 전화연결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보고 서울에 전화 거는 데 힘들지 않았냐고 누가 물었다. 우리는 별 문제없었다고 대답했더니, 일레인 할머니 사위는 부모님에게 전화하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안 되어서 결국 포기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설명하는 말이 자기 부모님은 1953년에 이민 오는 배에서 만나 결혼하셨는데, 뉴질랜드에서 35년을 사시고 난 다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셨다는 거다. 그 분들이 뉴질랜드 오실 때와 영국으로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그래도 거기서 다시 적응을 잘 하고 계시다는 말을 했다.
혼자되신 할머니도 영국에서 이민 오신 분이다. 고향이 그리워 몇 십 년 만에 영국을 가는데, 딸이 어머니가 영국에서 아주 살겠다고 할까봐 걱정을 하더란다. 자기도 그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서 얼마 있어보니 다시 뉴질랜드가 그리워서 딸에게 걱정마라, 집에 돌아갈거다라고 전화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웰링턴에서 온 할머니도 그 말에 동의했다. 자기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웰링턴이나 오클랜드 같은 큰 도시에서 언제까지나 살 건 아니고 아이들 다 키우면 은퇴하여 시골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정작 은퇴할 때가 되니까 지금 살고 있던 곳 말고 갈 데가 없더란다. 그래서 이 오클랜드에 와서 처음 살던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살고 있다고. 그리고 가끔 고향에 가보아도 머리
속에서 그리는 고향은 이미 아니라고.
사실 뉴질랜드가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뉴질랜드에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영국인이 뉴질랜드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 120년 정도이니 뉴질랜드에서 제일 오래된 집안이라 해도 4대를 넘어갈 수 없고 3대째 살았다는 집도 보기 드물다. 부모님 대에 왔다고 하는 집이 보통인데, 그나마 댓 집 건너 한 집 있을까. 물론 마오리인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 올라가면 400년은 되지만, 그들 역시 이민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민이라기보다는.
그래서 너남 없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2,3 대가 살았다 하더라도 뿌리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나라가 바로 이 뉴질랜드이고, 누구나 고향이나 뿌리를 찾아갈 가능성을 염두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의 키위 친구들도 나에게 가끔 묻는 것이리라. 계속 여기서 살거니 아니면 언젠가 돌아갈거니? <2003.09.06>
한 번 뉴질랜드인이면 영원한 뉴질랜드인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0>
캄캄했던 대학 시절 우린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었다. 1학년 때부터 청운의 꿈을 안고 해외유학을 가겠다고 이를 악물고 영어공부하고 또 공부 잘 해서 간신히 장학금이라도 타야 나라 밖을 나가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외국에를 다녀왔다는 2000년도의 통계 숫자를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학생 말고는 외국에 나가는 일이 그리 떳떳치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권력층과 연관이 있어서 소위 복수 여권을 가지고 있다든가 아니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미국 영주권 내지는 시민권이 있다고 하면 별로 곱게 보이질 않았다. 더구나 북한과 대치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정부에 의하여 우리는 항상 준전시 상태임을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정부의 말대로 여차하면 일어날 수도 있는 전쟁에서 안전하게 피할 기회를 가지고 있는 미국 영주권자들이 이뻐 보일 수 없었다.
그런 느낌이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국민정서를 만들어낼 리 만무였다. 미국 시민권이었는지 영주권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10년 전쯤 연대 총장으로 뽑히신 분이 그 둘 중 하나를 가진 분이어서 총장이 되려면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시비가 붙었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 분이 장관이 될 때 다시 문제가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일개 시민으로 살다가 전세 뺀 돈 단돈 2천만 원 들고 용감하게 자기 나라 아닌 나라에서 살겠다고 이민 왔는데도 외국에 사는 일이 그리 떳떳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런 국민정서 때문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분위기인지는 모르겠다. 남편은 한국에 그냥 머물러 있고 아이만 데리고 이곳에 이민 온 엄마가 7년 전 여기 올 때 그리고 그 후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다니러 갈 때 주변 사람들이 못된 사람 취급했는데, 작년부터는 어쩌면 그렇게 선견지명 있었냐는 말을 듣는다니 말이다.
일레인 할머니와 차를 마시다가 할머니 아들네 이야기가 나왔다. 언젠가 만났을 때 의사가 돈 벌 생각으로 의사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해서 나를 감동시킨 30대 의사인데, 몇 년 전부터 호주에 가 있다, 박사과정을 하느라고. 그 아들이 학위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 돌아오겠네요 하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당분간 거기서 일할 것 같다고, 여기서는 그 아들이 공부한 것을 써 먹을 자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오면 좋겠지만 이 나라는 젊은이들을 꼭 이 나라에 붙들어 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피터 블레이크 경의 예를 들었다.
그는 소위 바다의 왕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요트 조종을 세계에서 제일 잘 하는 사람이었다. 요트를 잘 몰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 엮고 지도력이 있어서 아메리카 컵 대회라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또 그 역사 속에서 미국 말고 다른 나라가 우승한 적이 한 번 밖에 없었던 미국 요트 대회에서 뉴질랜드가 최근 연속 2회 우승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5년 전 우승하여 그 컵을 들고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날 온 국민이 열광하였고, 환영행사 참석하도록 학교 수업을 하지 않은 학교도 많았다. 그런데 그가 작년에 브라질에서 피살당했다. 브라질의 열대림이 훼손되면서 생기는 생태계 파괴에 대한 연구조사를 위해 강을 따라 배를 몰고 다니다가 해적의 습격으로 변을 당했다. 50대의 많지 않은 나이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그는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정복한 힐러리 경과 함께 이 나라의 국민영웅이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영국에 가서 살았다, 힐러리 경과 마찬가지로. 그 부인은 영국 사람이다. 그래서 일레인 할머니 말이 그의 장례식도 그가 살던 영국에서 치러지고 장지도 영국이라고 했다. 그가 뉴질랜드인이고 또 뉴질랜드 사람들이 사랑하는 국민영웅이기에 뉴질랜드 사람들은 그가 뉴질랜드에 묻히기를 바라지만 그의 부인이 영국 사람이고 아이들도 다 영국에 있고, 또 그가 20년 넘게 영국에서 살았으니 아쉽지만 그가 영국에 묻히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뉴질랜드 사람들이 자손을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이건 일레인 할머니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해마다 연초에 이 나라에서는 여왕으로부터(뉴질랜드는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나라 여왕이고. 물론 뉴질랜드는 독립국가이고 여왕만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여왕에게 실례가 될 테고 영국 여왕이 이 나라 여왕도 겸직한다.) 작위를 받는 사람들 명단이 발표된다. 우리로 치면 훈장이지만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으면, (물론 뉴질랜드에서 추천하여 뉴질랜드 총독이 뉴질랜드에서 그 수여식을 집행하지만) 힐러리 경, 블레이크 경 하는 식으로 이름에 붙이는 존칭이 달라진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작년부터는 영국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뉴질랜드 정부에서 직접 주는 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 작위가 아니라 Companion of New Zealand라는 뉴질랜드 자체의 훈장이 되었지만. 올해 발표된 인물 중에도 역시 이 나라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육상선수로 30년 째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외국에서 수십 년 씩 살고 있어도 한 번 뉴질랜드인이면 영원한 뉴질랜드인이기 때문이다. <2003.09.08>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31>
외국의 저명인사들이 오면 공항에 나간 기자가 공식처럼 묻는 말이 있었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떠날 때도 묻는다. '한국을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그가 유명한 가수이건 배우이건 스포츠맨이건 정치인이건 상관없다. 이 말을 물어보고, 원더풀이라는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큰 나라에 가면 남이 자기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안하고 당연히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지도 않는다고 누군가 이야기할 때 맞는 말이라고 나도 끄덕였었다. 다른 나라에 가보지도 않은 주제에.
뉴질랜드 기자들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걸 보고 놀랐다. 조금이라도 뉴스거리가 될 만한 사람이 오면 텔레비전 뉴스 기자가 공항에 나가 물어본다. 뉴질랜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전과도 같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을 2년 전 뉴질랜드 북섬에서 촬영을 했다. 그 때 촬영 중간에 배우들이 수도 웰링턴에 나들이했을 때도 이 질문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대답은 뉴질랜드가 판타스틱하다는 것이었고.
얼마 전 테니스대회에 안나 코니코바라는 여자 선수가 왔었다. 작년에 세계 8위까지 올라갔던 것이 최고의 성적이고 지금은 부상으로 몇 달 연습을 못해 70-80 위로 떨어졌다는 선수인데, 늘씬하고 금발이라서 세계 순위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고 그래서 광고 수입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선수가 도착하는 날 당연히 스포츠 기자가 공항에 나갔고 뉴질랜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조나 로무를 아냐고 물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거의 전 국민이 열광하는 럭비 경기에서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그를 모르면 간첩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 질문에 안나는 그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기자는 다시 올 블랙을 아냐고 물었다. 올 블랙은 럭비 국가대표팀 이름으로 이름 그대로 항상 새까만 유니폼을 입는다. 럭비선수는 이 팀에 들어가는 게 최고의 꿈이다.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이 팀이 호주나 남아프리카 팀에 지는 날이면 한 명 정도는 심장마비로 생명을 잃고 스포츠 심리학자는 충격 받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무료 상담해준다는 광고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 선수는 감히 그게 뭐냐고 또 되물었다. 머쓱해진 기자는 이 선수가 뉴질랜드에 관하여 공부를 많이 하진 않은 것 같지만, 좋은 경기를 기대한다고 마무리를 했다. 그 선수가 첫 경기에서 이기자 코트 옆에서 즉석으로 몇 마디 인터뷰가 있었다. 또 오클랜드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이 선수가 그 동안 며칠 시내도 구경하고 해변에도 가보았는데 좋다고 대답하자 모두들 흐뭇했다.
사람만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싶다. 나라도 이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한다. 초등학교 지리 시간에 배운 뉴질랜드는 양을 키우는 목초지가 너른 평화로운 나라였다. 생각보다 남극에 가까이 위치하여 있는 조그만 이 섬나라가 (우리나라보다는 면적이 넓지만 인구 면에서는 10분의 1도 안되니까 작은 나라라고 치자)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에 참여해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1,2차 대전 뿐 아니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도 참여했고, 최근 몇 년 간 일어난 걸프전, 코소보 사태, 인도네시아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동티모르 사태 등 세계평화를 위해 뉴질랜드가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다. 비록 군대가 아니라 군의관만 파송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세상에서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면 사람뿐 아니라 나라도 서운해 한다. 95년에 2차세계대전 종전 (그리고 승전) 50주년 희년 축하가 유럽에서 성대했다. 뉴질랜드에서 유명한 뉴스 토크 쇼 진행자인 폴 홈즈가 런던에 득별 파견되었다. 그가 런던 거리에서 흘러가는 사람들 가운데 서서 그 분위기를 전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뉴질랜드가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것을 아느냐고? 20대로 보였던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뉴질랜드가 참전했었느냐고 되물었다. 좀 더 나이든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더라면 혹시 알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시청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2003.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