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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요는 그 형식과 장르에 대하여 명확히 규정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고려가요는 구비문학적 성격으로 오랜 기간을 문자가 아닌 가요로 향유되다가 훈민정음 창제 후에 문자화된 것으로 작가나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학성은 고려가요의 작자층과 향유층에 대해서 그것이 창작시가가 아니라는 견해에서부터 민중이나 귀족 중 어느 일방의 것으로 편향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 민중과 귀족 모두를 작가층과 향유층으로 보려는 태도 등 여러 가지 방향으로 논의되어 왔다고 말한다.
김명호의 「고려가요의 전반적 성격」을 보면 유교적 충군관념과 악장 형식의 시가 양식이 미처 출현하지 못한 당시에 궁중음악으로서의 요구로 당시에 유포∙ 전승되던 상사의 민요(「동동」등)나 봉건왕정과 군주를 송축, 연모하는 민요는 그 주제의 성격상 충신연주지사로 쉽게 확장, 전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주제의 민요가 궁중의 속악가사로 많이 수용, 개편될 수 있었다고 논급한다. 최동원은 「고려가요의 향유계층과 그 성격」에서 고려가요를 무신시대 이후 원의 지배하에서의 지배층, 즉 왕실과 권문세족들에 의하여 향유되었던 문학으로 규정하고, 그 성행하던 시기를 원지배하에 있었던 80년여 년간의 왕조로 친다면 충렬왕조에서부터 충정왕조에 이르는 기간으로 보고 있다. 이임수도 <儷歌의 향유층 및 작가의식>에서 고려가요의 작가층의 신분이나 성격을 귀족층으로 한정하며 지금 남아 전하는 고려가요의 문헌은 궁중에서 연주된 악보나 가사를 근거로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본다. 한편 황패강, 윤원식(韓國古代歌謠)은 고려가요가 조잡한 형태를 지닌 백성들의 노래였으나 궁중으로 들어가 노래하는 기녀들에 의해 세련되고 정제된 궁중 가악으로 정착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노래들이 궁중의 퇴폐적인 향락층의 취향에 영합되면서 남녀상열의 내용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결국 오늘날 전하는 고려 속요들의 내용은 대부분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사상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궁중 가악을 향유한 지배층의 취향에 맞게 변조된 내용이라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궁중 연회음악의 가사로 사용된 고려가요는 적어도 전문집단의 예술인이나 왕실의 측근에 있는 권문세족이나 식자들 또는 기녀들에 의해 새로이 창작되었거나, 개인 창작곡을 수정 또는 교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가요는 작가가 없고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는 사실, 후렴구의 사용, 음보율이 일률적으로 반복되며 거의 연장체라는 점, 청자의 이해를 돕는데 기여하는 관용어구의 쓰임, 구어체의 문장화 등을 보면 고려가요가 귀족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중들 사이에서 유전(流轉)되다가 궁중 연회 등의 속악으로 채택되어 후대에 문자로 정착된 노래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고려가요는 작자를 알 수 없는 민중, 귀족, 권문세족, 신흥사대부, 그리고 악공이나 기녀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생산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고려가요는 어느 한 계층의 문학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모두의 노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민중 속에서 형성된 이 노래들이 적나라한 인간성과 풍부한 생활 정서, 그리고 솔직하고 소담한 감정 등을 노래함으로써 당대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공동 소유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