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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평안남도 평양시 진향리 출생
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기생촌>이 당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마을>, <초롱불>, <밤길>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41년 평양 숭인 상업 학교를 거쳐 일본 츄우오(中央) 대학 법학부 졸업
1954년 {문학예술} 편집위원
1957년 조지훈, 유치환 등과 함께 한국 시인 협회 창립
1957년 제5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59년 {사상계} 상임 편집위원
1973년 한양대 문리대 강사 역임 및 도미(渡美)
1995년 사망
시집 :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8), {신(神)의 쓰레기}(1964), {새의 암장(暗葬)}(1970), {사슴의 관(冠)}(1981), {서쪽, 그 실은 동쪽}(1992), {그리고 그 이후}(1993), {소로(小路)}(1994)
마을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문장} 9호, 1939.10)
이 시는 그의 첫 번째 추천작으로 평화로운 농촌의 여름날 오후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서경적 경향의 서정시이다. 향토적 분위기의 간결한 시어와 '나른나른'·'대록대록'과 같은 의태어를 3연 7행의 짧은 형식에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인 표현을 이루고 있다.
1연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부분으로 시골 마을의 정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느낀 이미지를 평화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2연에서는 무대를 하늘로 옮겨, '솔개'가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고 있는 원경을 그리고 있으며, 3연에서는 시선을 땅으로 이동하여 솔개에게 겁먹고 뜰안 한구석에 숨어서 눈알만 대록대록 굴리고 있는 암탉의 모습을 근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겁을 삼킨 '암탉'의 눈알을 클로즈업시켜 생동감 있는 표현을 이루는 한편, 오수에 잠겨 있는 외로운 마을 속으로 녹아들게 함으로써 이 작품을 더욱 평화롭고 한가로운 분위기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와 같이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을 풍경 그 자체로 표현해 낼 수 있었던 시작 능력이 있었기에 박남수는 후일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후에도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새>, <종소리> 등과 같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롱불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
({문장} 10호, 1939.11)
이 시는 박남수의 두 번째 추천작으로 그의 초기시가 지향했던 섬세한 서정과 토속적인 시세계를 짐작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초롱'이란 대나무를 잘게 잘라 만든 살 위에 종이를 씌우고, 그 속에다 촛불을 켜는 기구이다. 그것을 막대기에 매달아 들고 다닐 때면, 촛불이 꺼질 듯 흔들린다. 이 '초롱불'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점차 사라져 가는 모든 전통적인 것의 대유로, 시인은 이것을 통해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초롱불'·'원두막'·'옛 성터' 등과 같은 향토적 정서를 드러내는 시어로써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2·3·4연을 모두 산문투의 문장으로 배치시킴으로써 유장한 리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일반적 산문시와는 달리 간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
1연에서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풍경을 제시하여 초롱불을 잃어버린 화자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으며, 2연에서는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과 '풀 짚는 소리 따라'라는 구절을 통해 소멸되어 가는 우리의 향토적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 있다. 3·4연에서는 초롱불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턱 원두막'이나 '무너진 옛 성터'를 찾아갈 때면, 언제나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던 초롱불이었지만,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을 통해 이제는 더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利器)에 밀려 사라져 버리는 현실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5연에서는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의 아련한 모습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말없음표 속에 함축하고 있다.
밤 길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 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문장} 12호, 1940.1)
청록파 세 시인이 등단 초기에 주로 자연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박남수는 그들과 같은 {문장}지 출신이면서도 특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일제 식민지 하의 농촌을 소재로 현실 상황을 암시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이 시는 그의 세 번째 추천작으로 그의 초기시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멀리 산턱에 등불 몇 개가 보이는 어느 농촌 마을의 여름 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한 사내가 논둑이 끊어진 탓인지 번개치는 개천 길을 달려가고, 번개가 그치자 조용하던 논에서 다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서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여름 밤의 서경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시제가 '여름 밤'이 아닌 '밤길'로 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품 전편에 깔려 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전반부의 동적 이미지와 후반부의 정적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방법을 통해 더욱 짙은 어둠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2행으로 구성된 연과 1행만으로 구성된 연을 교차시키는 시행 배열 방법으로 교묘한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시제의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주관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 상황으로 시상을 제시하고 있다.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태양}, 1959.3)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
아침 이미지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사상계}, 1968.3)
이 시는 제목이 말해 주듯 아침에 대한 근원적 본질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박남수는 모든 사물의 원초적 세계로 돌아가, 그 본질적 건강성을 회복하는데 주력하는 시작(詩作) 방법의 하나로 이미지를 중시하였다. 그는 "감각적 체험과 관련 있는 모든 단어가 이미지가 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상력에 호소하도록 의도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창작된 이 시는 결백한 서경적 조소성(彫塑性)에 의한 생생한 이미지로써 건강한 아침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의 신선한 감각은 이 시의 최대 장점이지만, 이 시는 가슴에서 나온 감흥(感興)의 시가 아닌, 두뇌로 쓰는 지적(知的)인 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논리적이라거나 작품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 12행의 단연시인 이 시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으로 기·승·전·결의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2행의 첫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생성을 어둠 속에 있던 '새'·'돌'·'꽃'이 아침이 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는 어둠을 이 시에서는 '낳고'·'낳는다'라는 표현을 통해 '온갖 물상'을 잉태하는 생명의 모태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3∼5행의 둘째 단락에서는 어둠이 아침과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어둠의 소멸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굴복한다'는 표현은 어둠이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6∼10행의 셋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잔치를 노래하고 있다.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무거운 어깨'로 있던 물상들이 마침내 아침 햇살을 받음으로써 자연적 생의 율동을 회복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의욕적인 삶의 움직임으로까지 확대된 건강한 모습을 회화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라는 구절은 시각을 청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이다. 11∼12행의 넷째 단락은 아침의
신비로움을 '개벽'이라는 시어로 집약하여 시상을 응결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삼라만상이 아침 햇살이라는 생명수를 받아 먹고 긴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 같은 아침의 생동감이 '아침이면, / 세상은 개벽을 한다'는 시행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같이 생동감 넘치는 아침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많은 동사(動詞)를 사용하는 한편, 이러한 아침에서 얻어진 밝고 신선한 느낌을 회화적 이미지로 그려냄으로써 이미지스트로서의 박남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종소리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시집 {새의 암장}, 1970)
이 시는 박남수의 후기 대표작으로 관념의 표상으로만 인식하기 쉬운 '종'을 세련된 감각과 심상의 조형(造形)으로 형상화하여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주지적 계열에 속하는 이 작품은 표현 형식면에서도 시인의 지성적 통제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4연이 모두 4행씩인 질서 있는 구성과 함께 각 연의 종결 방법이 동일하다. 즉, 1·2연과 3·4연을 각각 부사형과 서술 종결 어미로 끝맺고 있어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그의 후기시 세계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청동의 벽'인 종의 몸체를 '칠흑의 감방'으로, 울리지 않는 상태의 종소리를 어두운 감옥에 가두어 놓은 '억압'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울려 나오는 종소리를 '푸름'·'웃음'·'악기'·'뇌성' 등으로 변신하며 퍼져 나가는 '자유'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종소리는 '청동의 표면'에서 떠난 한 마리 '진폭의 새가' 된 다음, 마침내 '광막한 울음'을 우는 거대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간의 삶과 꿈, 그리고 역사를 잉태하고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퍼져 나는 것이다.
훈련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 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 보고
국도 끓여 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 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 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시집 {그리고 그 이후}, 1993)
박남수는 언어 표현의 암시성을 중시하는 이미지의 시인이다. 시사적(詩史的) 측면에서 그는 정지용과 김영랑에 버금가는 언어와 형태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언어에 형이상학적 깊이도 부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모더니스트인 그의 시적 경향은 암시적인 이미지로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함축시킴으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성을 지적(知的)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서정을 이미지화하였다.
그러한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 주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생활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음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는 평범한 사실의 제시로만 그치는 하나의 산문적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고도의 시적 장치나 비유로 장식되어 있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생생한 감동의 깊이를 전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시인이 노년에 이르러, 그것도 아내의 죽음을 체험한 후 더욱 깊어진 삶의 깊이를 담담한 어조로 보여 주고 있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시인은 늙어 불편한 혼자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을 단순히 '불편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찌 불편함뿐이겠는가? 그러므로 그 '불편함'의 이면엔 그가 아내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숱한 부침(浮沈)의 긴 세월을 동고동락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팬티 /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 남편의 고충'까지를 예견한 아내가 그러한 불편을 대비하여 자신에게 이런저런 집안일을 '훈련'시켰다는 것을 알고 그간 성가시다며 짜증을 냈던 자신의 무지함을 뉘우치는 과정을 통해 아내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생의 진솔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불편'을 겪을 때마다 시인은 아내의 빈 자리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준비하는 생의 원숙함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