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림산방 [雲林山房]
조선 후기 화가 허유(許維:1807∼1892)가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
지정번호 전남기념물 제51호
지정연도 1981년 10월 20일
소재지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51
시대 조선시대
분류 유지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있다. 허유의 《몽연록(夢宴錄)》에 따르면 이곳에 다양한 화훼와 임목이 있었다고 전하나 오랫동안 황폐해 있었다. 1982년 손자 허건이 복원하였고 1992년과 1993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 지었다 한다.
경사지에 세워졌으며, 맨 위쪽에 허유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오른쪽 뒤편에 사천사(斜川祠)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진 안쪽에 살림집이 있고 그 전면 우측에 허유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다. 살림집 앞에 1978년에 재건한 운림산방이 있다. 그 앞에는 가로 33m, 세로 27m 크기의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허유가 심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운림산방은 ㄷ자형 한식 기와로 정면 우측 3칸은 화실이며 나머지는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이다. 안채는 一자형 초가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각 1칸씩 방, 부엌, 안방, 웃방, 광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4칸 규모의 一자형 초가집이다. 왼쪽 끝 1칸은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로 만들었으며 오른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의 방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안채와 비슷한 민도리집이며, 기단은 낮은 토단이다.
운림사는 1983년 건립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1고주 5량 구조이며, 공포는 주간마다 1구씩의 공포를 배치한 다포식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천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구조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원형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식이다.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복제된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기념관에도 복제화·수석·단지·그릇 등 허련의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허련의 3남 미산 허형과 손자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고, 한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이 이곳에서 그림을 익혀 한국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허유 [許維, 1809~1892]
조선 후기의 서화가.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 글,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스승을 따라 추사체를 쓰기도 했다. 《하경산수도》 등의 작품이 있다.
본관 양천
호 소치·노치
별칭 자 마힐
활동분야 미술·서예
출생지 전남 진도
주요작품 《하경산수도》 《추강만교도》
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노치(老癡).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생. 후에 연(鍊)으로 개명하였다. 서화를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그림·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茆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송순 [宋純, 1493~1583]
조선 중기 문신. 구파의 사림으로 이황 등을 비롯하여 신진사류와 대립했다.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치사했다. 강호가도의 선구자로 시조에 뛰어났다.
본관 신평
호 면앙정 ·기촌
별칭 자 수초, 시호 숙정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기촌집》,《면앙집》,《면앙정가》
본관 신평(新平). 자 수초(遂初). 호 면앙정(俛 仰亭) ·기촌(企村). 시호 숙정(肅定).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급제, 1547년(명종 2)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1550년 이조참판 때 죄인의 자제를 기용했다는 이기(李芑 ) 일파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구파의 사림(士林)으로 이황(李滉) 등을 비롯한 신진사류(士類)와 대립하였다. 1569년(선조 2)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치사(致仕)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시조에 뛰어났다. 담양(潭陽)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에 《면앙정가(俛仰亭歌)》가 있다.
면앙정 [俛仰亭]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정자.
지정번호 전남기념물 제6호
지정연도 1972년 8월 7일
소재지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402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3칸, 측면 2칸
분류 누정
1972년 8월 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1533년(중종 28) 송순(宋純:1493~1583)이 건립하였는데, 이황(李滉:1501~1570)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이다.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백년 살고자 한다”는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추녀 끝은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목조 기와집으로 측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며, 1979년에는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였다. 최초의 모습은 초라한 초정으로 바람과 비를 겨우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송순은 면앙정에서 면앙정가단을 이루어 많은 학자·가객·시인들의 창작 산실을 만들었다. 정자 안에는 이황·김인후·임제·임억령 등의 시편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송순의 시문활동의 근거지이며, 당대 시인들의 교류로 호남제일의 가단을 이루었던 곳이다.
정철 [鄭澈, 1536~1593]
《관동별곡(關東別曲)》 등을 지은 조선 중기 문신 겸 시인.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본관 연일(延日)
호 송강(松江)
별칭 자 계함(季涵), 시호 문청(文淸)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
본관 연일(延日). 자 계함(季涵), 호 송강(松江). 시호 문청(文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양응정(梁應鼎)의 문하생.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궁중에 출입하였는데 이 때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뒤에 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자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다녔다.
1551년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창평(昌平)으로 이주,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할 때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우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유하였다. 1561년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15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8년(선조 11)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珍島)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詩作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 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군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양산보 [梁山甫, 1503~1557]
조선시대의 문인이며, 담양 소쇄원의 창건자이다. 조광조 아래에서 홍문관대사헌을 지냈으나, 1519년 기묘사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1614년 재건되었다.
호 소쇄옹(瀟灑翁)
별칭 자 언진(彦鎭)
국적 한국
출생지 전남 담양군 창평
주요업적 담양소쇄원 창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의 창건자로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공(瀟灑公)이며 양사원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상경하여 당시 사림들의 우상이었던 조광조(1482∼1519)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으며 1519년 17세 때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어 귀향을 가게되자 유배지까지 스승을 모셨다. 그해 겨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벼슬길을 등지게 되었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소쇄원을 지었다. 이때 양산보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전하지만 그의 학문적 행적은 뚜렸하지 않다. 그가 지은 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가 전하고 있다. 소쇄원의 형태는 1528년까지 정자 한 채만 있었고 그의 말년에 이르러 '원(園)'을 갖추었으나 별서원림(別墅園林)을 직접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적 제304호 담양소쇄원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1568∼1637)이 1614년에 재건한 것이다.
소쇄원 경영에는 송순(松純:1493∼1583)과 김인후(金麟厚:1510∼1560) 등도 참가했다. 송순은 양산보와는 이종사촌 간이었으며,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그밖에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林億齡:1496∼1568)과 인근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金允梯) 등도 참가하여 풍류를 즐겼다.
담양 소쇄원 [潭陽瀟灑園]
1530년(중종 25) 조광조의 제자 소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南面) 지곡리(芝谷里)에 건립한 원우(園宇).
지정번호 사적 제304호
지정연도 1983년 7월 20일
소장 담양군
소재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시대 조선
크기 전체 면적 10만 8531㎡
1983년 7월 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은 10만 8531㎡이다. 이곳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정원이다.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고암정사(鼓巖精舍)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고,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또한 광풍각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다.
홍문관(弘文館)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담양 후산리 명옥헌원림 [潭陽后山里鳴玉軒苑林]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있는 조선시대 오희도가 살던 집의 정원
지정번호 전남기념물 제44호
지정연도 1980년 6월 2일
소재지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
시대 조선시대
면적 1,386평
1980년 6월 2일 전라남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1574∼1615)이 명옥헌을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었던 정원이다. 소쇄원과 같은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정원의 면적은 1,386평이며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이다.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이 모두 원형이 아니라 네모 형태를 한 것은 세상이 네모지다고 여긴 선조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계곡의 물을 받아 연못을 꾸미고 주변을 조성한 솜씨가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그대로 담아낸 조상들의 소담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소쇄원이 그러하듯이 이 명옥헌의 물소리도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다고 여겨, 명옥헌이라고 하였다.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후산리 은행나무 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行)이라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300년 이상된 노거수로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온 말을 매둔 곳이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