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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약 없을 것 같던 침묵의 끝은 금세 찾아왔습니다.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이 고요함으로 가득한 나라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지요. 그 사람의 키는 매우 작았으며 얼굴은 아무렇게나 칭칭 감고 있는 낡은 목도리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새어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코트를 단단히 여며 쥔 손에는 커다랗고 구멍이 숭숭 뚫어진 장갑이 끼워져 있었지요. 만일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거지라고 생각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보통 거지 들이 그렇듯이 구부정한 몸에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거리낄 것이 조금도 없다는 듯이 왕성을 향해 걷고 있었지요. 그는 높이 쌓인 눈을 헤치면서 나아가야 했지만, 마치 나는 듯한 걸음으로 왕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얼어붙은 문을 온 힘을 다해 밀어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든 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왕성에 들어섰지요. 그리고 잠시 동안 왕성의 넓은 홀에 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고 오직 바람소리뿐이었지만 그는 정말 어떤 소리라도 들리는 듯 진지하기 그지없었지요. 그리곤 곧장 자신의 오른쪽에 있던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그는 어떤 문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바로 왕자의 방이었습니다. 여왕이 다녀간 뒤로 그 누구도 방문한적 없는 그 방의 문은 여전히 거미줄로 뒤 덥혀 있었습니다. 그는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한 뒤 천천히 문을 열었습니다. 곧, 여왕이 문을 열었을 때와 마찬 가지로 방안에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송이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사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왕자와 악보가 놓인 피아노가 보였지요. 눈보라가 거칠게 그의 작은 몸을 뒤 흔들었지만 그는 거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홀린 듯이 피아노로 걸어가 그 의자에 앉았지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습니다.
‘딩'
피아노는 그렇게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지만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조급하게 자신의 손에서 너덜너덜한 장갑을 벗겨냈지요. 그러자 고운 손끝이 들어났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손가락은 열두 개나 됐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흠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엔 어디에도 없었지요. 이윽고 그는 왕자의 악보를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연주는 마치 피아노를 처음 치는 사람의 그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수차례 반복을 거듭하면서 그의 손가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건반 위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픔과 비통함, 그러나 눈부신 섬세함이 점차 그의 손가락 끝에서 울려 퍼지는 모습은 마치 돌 속에 숨어있는 아주 진귀한 보석을 캐내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왕자의 악보를 완벽하게 연주하고 나자 그는 잠시 두 손을 건반위에 올려 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스스로 연주한 그 곡에 전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피아노조차 그 소리에 감동했는지 더 이상 요동치거나 눈보라를 뿜어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작은 눈송이를 흩뿌릴 뿐이었죠. 그러고 보니 성 밖에 불던 매서운 바람도 고요히 가라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품안에서 악보 세 뭉치를 꺼내들어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위에 있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죠. 처음 그의 손가락은 조금 어색 한 듯 주춤 했지만 곧 날아오르는 새처럼 날쌔게 건반 위에서 미끄러졌지요. 이번에 연주한 곡은 바람처럼 쓸쓸하지만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다운 곡이었습니다. 울려 퍼지는 음악사이로 피아노가 조용히 뱉어내는 눈송이는 마치 꽃잎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어느 순간 눈은 정말 꽃잎이 되어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는 창밖의 하늘을 뒤덮고 있던 칙칙한 구름도 서서히 개이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런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두 번째 악보를 펼쳤습니다.
그는 작은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던 두터운 코트를 벗어 발치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칭칭 감고 있던 목도리도 풀어서 뒤쪽으로 던져 버렸지요. 그러자 낡았지만 단정한 스커트를 입은 자그마한 몸집을 한 소녀의 모습이 들어났습니다. 그는, 아니 소녀는 이제 힘 있는 동작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했지요. 사자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린 듯 했습니다. 그리고 열대의 화려한 꽃향기가 자욱하게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창밖은 이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호수의 얼음이 갈라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지요. 그리고 녹은 눈들은 작은 시내가 되어 흘러갔습니다. 연주를 마쳤을 때 소녀는 힘에 겨운지 가쁜 숨을 쉬고 있었지요. 소녀는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뒤 숨을 고르고 마지막 악보를 펼쳤습니다.
소녀의 손가락이 다시 피아노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소중한 것을 보듬는 듯이 한없는 부드럽게 움직였습니다. 따스한 햇살과 그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풀밭. 싱그러운 꽃봉오리들이 음악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소녀의 피아노 소리는 봄을 불러 왔습니다.
소리가 퍼지는 곳 마다 작은 새싹이 돋아났지요. 꽃잎들이 쌓여있던 왕자의 방에도, 연주회가 열리던 작은 공원에도. 마치 죽은 듯이 보이던 나무에서 아름다운 초록빛 나뭇잎들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향기로운 꽃봉오리들이 그 들 사이에서 피어났죠. 그리고 차갑게 식은 왕자의 입술에서도 따스한 숨결이 흘러 나왔습니다.
마침내 연주가 막바지에 달하자 피아노는 눈부신 빛을 뿜어냈습니다. 태양보다 몇 배나 밝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뜨겁지 않은 신비한 빛이 아름다운 음악의 나라의 모든 영토를 뒤덮었죠. 너무나 눈부신 나머지 소녀는 마지막 건반을 두들긴 다음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살며시 한쪽 눈을 떠보았고 이제는 그렇게 눈이 부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머지 한쪽 눈도 마저 떴답니다. 그리고 무심결에 창밖을 바라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저주를 받기 전의 아름다운 음악의 나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멍하니 서서 주위를 돌아보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인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분명히 자신들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떠났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은 버리고 떠나야 했던 자신들의 나라였습니다. 사방은 초록의 물결과 달콤한 꽃냄새가 가득했고, 하늘에서는 태양이 부드러운 햇살을 뿌리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태워버려야 했던 그들의 악기역시 언제나 놓여있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창문을 열고 그러한 모습들을 좀더 자세하게 보려던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끌려 뒤를 돌아봤습니다.
‘소녀여. 당신이 나와 이 나라에 걸린 마법을 풀어 줬군요. 정말 고마워요.’
말을 걸어온 사람은 왕자였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아름다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뺨을 생기 있는 붉은색을 띄고 있었지요. 소녀는 자신의 손을 등 뒤로 감추었습니다. 자신의 기형적인 손이 너무나 부끄러워 저 아름다운 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머뭇거리며 왕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름다운 왕자님. 저는 그저 피아노를 연주한 것뿐이랍니다. 허락 없이 왕자님의 피아노를 건드려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저 피아노를 보는 순간, 저는 정말 피아노를 쳐보고 싶었답니다. 아무도 저에게 피아노를 치는 것을 허락 하지 않았거든요. 제 손이 남들과 다르게 흉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손 이야기를 하는 소녀의 목소리는 정말 슬프게 들렸습니다. 왕자는 조용히 다가가 소녀의 두 손을 앞으로 끓어 당겼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죠.
‘아닙니다, 소녀여. 나의 영혼은 그동안 이 피아노 속에 머무르고 있었지요. 당신이 저의 악보들을 연주해주었기 때문에 마법이 풀린 것이랍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연주 할 수 없었던 악보였거든요. 당신은 나와 이 나라를 구했으니 이 피아노는 당신의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은 조금도 흉하지 않아요. 당신의 손은 매우 곱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손을 본적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왕자는 소녀의 손끝에 살짝 입을 맞췄습니다. 소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지요. 왕자는 다시 소녀를 향해 말했습니다.
‘두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바람에 날려 버렸던 저의 악보들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요? 그리고 이곳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나요?’
소녀가 답했습니다.
‘아, 그 아름다운 악보들이 왕자님의 것이었군요. 그것들은 바람이 날라다 줬답니다. 왜 그것들이 저에게 날아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피아노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답니다. 저에게는 피아노 소리가 들렸거든요. 이 아름다운 음악의 나라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 바로 그 날부터 저 피아노의 소리가 들려왔어요. 너무나 슬픈 소리였기 때문에 위로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몰래 왕성에 숨어들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랍니다.’
왕자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아, 당신은 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군요. 저는 연주 할 수 없는 악보만을 만든다는 사실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을 닫았었지요. 그리고 피아노 속으로 도망쳐 버린 거지요. 그렇게 되고도 슬픔은 줄어들지 않아 저는 피아노 속에서 외치고, 또 외쳤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이 끝이 없는 겨울을 불러 왔던 것이죠.’
그때 왕자의 방안으로 놀란 표정을 한 왕비와 왕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여전이 소녀만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아마 그 악보들은 마법의 여왕이 당신에게 가져다 준 것일 겁니다. 그녀는 제가 이 나라에 겨울을 불러 올 것이란 것도, 당신이 나의 악보를 연주 할 것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거군요. 마법의 여왕은 이 나라에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예언을 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소녀여, 저는 이제 그 예언을 이룰 생각입니다. 부디 나를 도와주겠어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여 줬습니다. 왕자와 같은 상처를 가진 소녀는 왕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소녀는 처음 피아노위에 놓여있던 악보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중 첫 번째 장을 연주하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어디선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아아,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뒤늦은 깨달음을 미워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길을 감에 있어 거침없을 것이니. 그대들이여 명심하라. 그대들이 가장 쓸모없게 여기는 것에 의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 날을. 아아, 기억해라, 기억해라. 뒤늦게 후회해도 그대들의 가장 소중한 보석은 이미 손안을 떠났다는 것을!’
그리고 피아노는 사나운 돌개바람을 뿜어냈고 바람이 멈췄을 땐 이미 왕자와 소녀는 사라진 후였지요. 왕비와 왕은 사라진 왕자와 소녀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둘을 보았다는 사람은 그 후로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지요. 아름다운 음악의 나라는 가장 아름다운 곡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가장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동시에 잃고 만 것입니다. 그저 남아있는 왕자의 악보만이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었죠. 이 이야기는 지금도 아름다운 음악의 나라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저는 두 아이를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지요. 대신 저는 이 귀한 손님들에게 따끈하게 데워진 침실을 안내해줌으로써 좋은 이야기를 들은 보답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재빠르게 침대 속으로 뛰어 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저도 그 기나긴 밤에 안녕을 고하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저는 희미한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눈을 떴습니다. 아아, 그 어찌나 따스한 음색인지 떨림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저는 조용히 일어나 홀로 내려갔죠. 그리고 늘어선 의자중 하나에 앉아 손끝으로 부드럽게 건반을 두들기는 소녀와 그런 소녀를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이미 떠날 채비가 된 것인지 잘 챙겨진 꾸러미가 놓여 있었지요. 연주가 끝난 뒤에 제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소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마음대로 피아노를 처서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에 보는 피아노라서….”
저는 웃으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름다운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저로서는 행운이었으니까요.
저의 생각대로 두 아이들은 이만 떠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상당히 아쉬웠지만 저는 빵 두 덩이와 포도주 병을 건네주는 것으로 참았습니다. 제 욕심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잡아서는 안 되니까요. 다행히 저의 작은 선물을 아이들을 매우 기쁘게 받아줬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한번 들려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오기에 저는 커다랗게 웃으며 언제든 환영한다고 답해주었지요.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수줍게 웃으며 제 여관의 문을 나섰지요.
아! 저는 지금도 그때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밤새 내린 눈은 어느새 녹아 나무 그늘 밑에만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멀리 까지 펼쳐진 들판 가득히 파릇파릇한 새싹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지요. 그리고 선명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어깨위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왕자와 소녀의 뒷모습을 향해 축복의 말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저의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지요. 그날은 정말 바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침이었거든요. 그래요, 마치 오늘처럼. 아, 벌써 손님이 왔나 봅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군요. 저는 서둘러 문을 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오늘 하루 여기서 묵어갈 수 있을까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걸립니다. 환히 비치는 아침 햇살을 등진 그들을 향해 저는 반갑게 말을 걸었습니다.
“덕분에 잘 지냈단다. 물론 손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