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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동네방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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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문화재 스크랩 상주시의 비지정문화재
동네방네신문 추천 0 조회 398 06.10.15 17:5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4

非指定文化財

                                      尙州鄕土史硏究所 硏究委員

                                         尙州市 銀尺面事務所  郭  熙  祥











 

 

目    次

 

 

 

 

 

 

1. 석각물(石刻物/10점)                                           190

2. 지석묘(支石墓/4점)                                            206

3. 문  적(文籍/9점)                                              211

4. 민  속(民俗/4점)                                              224

 

 


4 非指定文化財

1. 석각물(石刻物)

화북면 동천암(洞天巖)

소 재 지: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2리

수    량:1기(基)

시    대:조선시대(1809년)

동천암(洞天巖)은 화북면 용유2리에서 문경시 쌍용계곡으로 흐르는 병천을 따라 가다가 도장산 서쪽 자락의 우복동 21세기 애향공원(愛鄕公園) 안에 있다. 일

명 오장비(五丈碑)라고도 한다. 바위는 둘레가 다섯 길이나 되는 자연석으로  10°쯤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데, 그 가운데에 ‘동천(洞天)’이라고 초서(抄書)로 새겨 놓았다. 글자의 길이는 대략 9m가 넘는다. 특히, 일필휘지한 이 글씨의 길이와 바위의 둘레가 똑 같아 신기함은 물론이려니와, 신필(神筆)에 가까운 당대의 명필이라 한다. 바위의 글씨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썼다고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상주 개운리 출신의 개운화상(1790~?)이 쓴 것이라고 한다.

개운화상이 처음에 지은 <유가심인 정본수능엄경 환해산보기(瑜伽心印 正本首楞嚴經 環解刪補記)>의 초고에 ‘동천(洞天)’이 나오며, 그의 게송에도 51세되던 경자년(1840) 8월 세 번째 경일(庚日)에 “주먹으로 ‘동천(洞天)’이란 글자를 쓰고 손톱으로 ‘한좌(閑坐)’하는 글귀를 새기니......”라고 하였다. 이 때에 그는 화북 용유계곡 도장산에 머물렀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 이 글씨는 그 이전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운화상의 속성(俗姓)은 김씨요 모친의 성은 양씨인데, 13세때 문경 봉암사에서 출가하였다.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기적이 많이 일어 남을 본 신도들은 ‘양봉래(楊蓬萊)가 다시 출현했다’고 했으며, 바위에다 몇 가지 흔적을 남겨 그것을 보고 믿고 따르게 하였으니(以待後賢 石上 故留數跡), 이 때가 19세(1809년)였다.

금강산 만폭동의 동벽(洞壁)에는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동명(洞名)이 있으나 이 곳은 동명이 없다. 동명을 넣지 않은 추측으로는 ‘필시 우복동천(牛腹洞天)일진대, 이 곳의 우복동은 천장지비(天藏地秘)한 승지(勝地)라 함부로 밝힐 수 없음’이라는 설이 가장 많으며, 이 곳이 바로 하늘과 통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동천암(洞天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외서면 우산(愚山) 어풍대 암각(御風臺巖刻)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1리

수    량:3점

시    대:조선시대(1604년)

외서면 우산1리 우북산(于北山) 아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의 종가가 있는데, 하우산에서 종가로 들어 서는 입구의 이안천(利安川, 우산천)을 건너 절벽에 새겨져 있다. 우복 선생은 1563년(명종 18) 9월 14일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나 1633년(인조 11) 71세로 영면하였다.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이며, 시호는 문장공(文莊公)이다. 그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관찰사․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쳐 좌찬성(종1품)에 오르고, 예학(禮學)에 특히 뛰어 났다.

1600년에 이 곳에 복거(卜居)하면서 자신이 사는 지역에 각각의 이름을 붙이고,「우곡잡영(愚谷雜詠)」20절(絶)을 병오년(1604)에 지었다. 아마도 이는 우복당대에 새긴 것(1604년)으로 보이는데, 우산 20경(景) 중의 9번째에 ‘어풍대(御風籉)’ 시가 있다. 절벽을 보아 좌측부터 ‘자차대상 지수회동(自此臺上 至水回洞)’이라고 세로로 2열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가운데에는 전서체로 ‘어풍대(御風臺)’를 가로로 새겨 놓았으며, 오른쪽에는 ‘문장공우복 정선생별업(文莊公愚伏 鄭先生別業)’이라고 세로로 2열 해서체를 음각(陰刻)해 놓았다.


연원동 석각신장상(石刻神將像)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연원동(보은 방향 25번 국도변)

수    량:1기(基)

시    대:미상

석각신장상은 상주시 연원동에 있다. 상주시청 제2 청사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서보(西洑) 방향으로 약 600m쯤 가다 보면 우측 논 모퉁이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바위의 서쪽 방향에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다. 이 바위의 크기는 밑부분이 땅 속으로 매몰되어 있는데, 지상부만 높이 1.5m․폭 80cm 내외의 사다리꼴 육면체 모양의 부정형이다. 현재 무릎 밑부분은 매몰되어 있으나, 상주얼찾기회의 탁본에 의하면 하부까지 양 발이 온전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향(西向)하고 있는 신장상의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하고, 오른팔은 들어서 가슴께에 두고 왼팔은 지팡이를 들었다. 규모가 작으며 조각미가 섬세하기 보다는 소박하고, 양각의 표현이 다소 거친 모습이다.

이 신장상의 특징은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어 구성상 불상이나 장승상과도 구분되며, 조심스럽게는 화랑상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이 신장상의 크기 99cm이며, 두부의 길이는 40 cm, 두부의 폭은 24cm이고, 견부의 폭은 38cm이다.


만산동 영암각(靈巖閣)

소 재 지:경북 상주시 만산2동

수    량:1기(基)

시    대:미상

영암각은 상주 삼악(三嶽:淵嶽․露嶽․石嶽)의 하나인 석악산(石嶽山, 일명 천봉산, 해발 435.8m)의 동쪽 산록의 하부에 있다. 상주시 만산2동 안너추리에서약1km정도올라가면성황사(城隍祠)․영암각(靈巖閣)․산신제단이나온다. 이 산은 상주의 진산(鎭山)으로 일찍부터 농경사회의 민속문화가 발생한 곳이다.

성황사는 만민이 평안하고 풍요하며 신공(神功)으로 우순풍조하여 매년 풍년이들것을기원하던자리로,향지(鄕誌)인『상산지창석본(蒼石本,1617년편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곳의 성황신은 초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사수호신으로 관(官)의 치성대상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목백(牧伯)이 관여한 일로, 이는 고을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국가의 공인된 사우(祠宇)로서, 때로는 사직(社稷)  과 여단(厲壇)의 기능과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이 성황사의 편액에 의하면, ‘성황사 무신년 5월’이라고 적혀 있어 1788년 5월에 달았다고 하겠다.

이 성황사 조금 아래에 있는 영암각은 거궁한 바위 한 덩어리에 집을 지어 비바람을 피하고 있다. 이 바위는 암석신앙(岩石神仰)에서 비롯된 ‘우(위)하는 바위’, 또는 ‘미륵바위’의 일종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상주에 부임하는 목사가 북행(北行)을 하면 해(害)를 자주 입었고, 불상사 또한 잦았다. 그러던 중 어느 목사의 꿈에 큰 바위가 나타나 자신의 몸을 풍우(風雨)로부터 막아 주면 재앙을 멸해 주겠다 하여, 집을 지어 모시니 과연 상주에 재앙이 없어졌다.”한다.(『상주지, 문학편) 아마도 이 바위는 옛부터 암석을 신성시할 때, 즉 암석숭배사상에서 불(火)바위 또는 알바위로 숭상되다가 나중에는 미륵바위(彌勒巖)로 변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 곳은 이 바위의 한 덩어리만으로도 농경사회의 산물인 민속신앙의 변천사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내서면 비로골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소 재 지:경북 상주시 내서면 비로골

수    량:1기(基)

시    대:통일신라시대

비로골의 마애불좌상은, 상주에서 보은 방향 25번 국도를 따라 내서파출소 옛터를 조금 덜 가면 오른쪽으로 내서면 평지리 비로골(비루골․비록골)의 계곡이 있다. 이 계곡의 입구에 있는 임마누엘 기도원을 지나 안으로 약 1km 정도 막다른 곳까지 올라 가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3단의 폭포가 보인다. 이 폭포의 중간 부분 좌측의 자연석 절벽에 양각되어 동북향으로 안치되어 있다. 이 좌상(坐像)은 앉은 키가 70cm 정도로, 얼굴이 풍만하고 인자스러우며 친근미를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하고 법의(法衣)는 무릎까지 덮어졌으며, 오른손은 안쪽으로 왼손은 바깥쪽으로 하여 두 손을 모았다.

계곡이 얕아 물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물이 크게 불어 나도 무릎 정도를 스쳐 지나갈 정도의 높이에 조각되어 오랜 세월에도 마모가 심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은, 물이 흐를 때에는호반(湖畔)에서떠 오르는 태양이 반사되어 이 불상(佛像)을환하게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의 조각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본다.


화령 태실(胎室) 및 금표비(禁標碑)

소 재 지: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377-1번지

수    량:2기(基)

시    대:조선시대(1501년)

화서면 상현리 377-1번지 태봉산(해발 345m)의 정상에 태실(胎室)이 있다. 이태실은 조선조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왕자(둘째 왕자?)의 태(胎)를 봉안한 것으로서, 왜정때 도굴된 것을 지난 1994년도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상주분회에서 복원해 놓았다.

조선시대 태실은 왕실의 경우 국운(國運)과 관련이 있다 하여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다음에 왕이 될 왕세자(王世子)나 왕세손(王世孫)의 태는 돌로 태실을 만들었다. 이 태실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형태는 상부와 하부 모두 동그란 원(圓)을 절반씩 잘라 놓은 반원형이다. 상부의 높이는 55cm이고 두께는 22cm이며, 외부의 직경이 95cm이고 맨 윗부분은 평면형태이다. 하부의 둘레는 345cm로 총 직경 104cm․높이 70cm․두께 25cm로서 상부보다는 조금 더 큰 형태이며, 총 높이는 125cm 정도이다. 하부의 밑부분에는 직경 4cm의 구멍이 뚫려져 있고, 태실의 표면에 문양(紋樣)은 없다.

금표비(禁標碑)는 태봉산의 남쪽 산록의 9부 능선에 정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이 비는 화강암 1석(一石)으로 비수(碑首)와 비신(碑身), 대좌(臺坐)를 조성하였고, 비신 전면에는 세로 1열 5×4cm의 해서체로 ‘홍치14년7월건립(弘治十四年七月建立)’이라 새겨져, 이는 1501년(연산군 7)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뒷면에는 글씨의 마모가 심하지만 ‘왕자태실(王子胎室)’이라 새겨 놓았다. 규모는 비신이 가로․세로․높이가 49×22×102cm, 비수가 55×33×50cm, 대좌가 65×35×25cm로서 총 높이는 169cm이다. 이 석비(石碑)는 지금부터 500여 년 전에 세워져 우리 지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이다.


손중돈(孫仲暾)․권기 목사(權祺牧使) 선정비(善政碑)

소 재 지:경북 상주시 남성동 197-1번지 상주시교육청 교육관

수    량:1기(基)

시    대:조선시대(1545년)

이 석비(石碑)는 선정비로서 비신 1개에 목민관(牧民官) 2명의 치적(治績)을 기록해 놓았다. 원래 무양동 189번지 개인 집의 앞마당에 있었던 것을 1973년 3월에 현재의 위치인 남성동 197-1번지 상주시교육청 교육관 앞으로 이건하였다.

형상은 전형적인 신도비 형태로서 비신과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잘 갖추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이수의 상단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나 하단에 조각된 용린(龍鱗)의 사실적인 표현은 주목을 끌고, 중앙에도 액(額)이 마련되어 있으나 명문(銘文)은 없다. 귀부는 두상의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잇빨과 보발(寶髮)이 사실적이며, 15~29cm의 귀갑문(龜甲紋)이 선명하다. 사족(四足)은 있으나 꼬리는 조각되지 않았다. 비신의 앞면 상단에 자경(字徑) 21cm의 해서체로 ‘선정비(善政碑)’라 각자(刻字)하였고, 그 밑으로 우측에는 ‘손중돈(孫仲暾) 목사’를, 좌측에는 ‘권기(權祺) 목사’의 비문을 새겨 놓았다. 뒷면에는 건립연도를 새겨 놓았는데 1545년에 건립되어 지금부터 460여 년 전에 세워져 이 지역에서 현존하는 목민관의 석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이다.

손중돈 목사는 1506년(중종 1)~1509년(중종 4)까지 상주목사로 재임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벼슬은 판서․도승지․관찰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는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의성군 단밀면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져 있고, 경주의 동강서원과 의성의 속수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권기(權祺) 목사는 1537년(중종 32)에 부임하였으나 이임년도는 알 수 없다.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공정하고 맑은 정치로 백성들이 그의 깨끗하고 근신함에 복종하였다. 형조참의를 지냈다.


사서(沙西) 전식(全湜) 신도비(神道碑)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외답동 산24-1번지

수    량:1기(基)

시    대:조선시대(1700년)

이 석비(石碑)는 상주시내에서 낙동방면 국도 25호선을 따라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구(舊) 상주콘크리트(주) 옆의 오른쪽 도로변에 있다. 1700년(숙종 26)에 세워졌는데, 옥천 전씨(沃川全氏) 문중에서 지난 1995년에 비신을 다시 고정시키고 주위를 보수하였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신도비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명(碑銘)은 ‘증좌의정행지중추충간공사서전선생신도비명(贈左議政行知中樞忠簡公沙西全先生神道碑銘)’으로서, 원문(原文)을 찬(撰)한 사람은 정헌대부원임의정부지중추부사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조경(正憲大夫原任議政府知中樞府使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禮文官直提學尙瑞院正趙絅)이1659년에지었고,추문(追文)을찬한 사람은 원임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경연사이봉징(原任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經筵事李鳳徵)이 1700년에 지었다.

석비의 재질은 이수(螭首)와 대좌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해중석이다. 형상은 이수는 장방형의 평면으로 사방 측면에 운룡문(雲龍紋)이 조식(彫飾)되어 있는데용린(龍鱗)은매우사실적이다. 하부에 장방형의 공(孔)을 마련하여 상․하가 맞도록 조각하였다. 귀부(龜趺)는 비좌와 안상(眼賞)이 조각되어 있고, 두부에 눈, 코, 이빨을 조식하였으나 오래되어 마모가 되었지만 귀갑문(龜甲紋)은 힘이 넘  

치고, 사족(四足)과 꼬리 부분도 섬세하지만 위엄이 있어 전체적으로 귀부가 매우 힘차게 조각되어 있다. 비신에는 자경(字徑) 5cm의 전자(篆字)로 앞․뒤면에 걸쳐 병서(竝書)로 비명을 각자(刻字)해 놓았다. 비문은 그 아래 자경 2cm의 종(從) 해서(楷書)로 각자하였는데 전․후면의 하단부에는 마모가 매우 심한 상태이다. 규모는 비신의 높이가 178cm․폭 80cm․두께 16cm이고, 이수는 높이 65 cm․폭 120cm․두께 50cm이며, 귀부는 높이 90cm․폭 160cm․길이 250cm이다.

선생은 1563년(명종 18)~1642년(인조 20)까지 향년 80세를 일기로 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시호는 충간충(忠簡忠)이고, 자는 정원(淨遠), 호는 단우(段郵)․병천(屛川)․안호(雁湖)였으나 늘그막에 사벌국의 서쪽에 산다는 뜻으로 사서(沙西)라 하였다. 선생은 160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울산판관․전라도 도사(都事)를 거쳤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벼슬을 그만 두었으며, 학맥(學脈)은 영남학파로서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더불어 향리에서는 ‘상산삼로(商山三老)’라 불리면서 향토 학문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임란(壬亂)과 호란(胡亂)때 창의하였고, 후일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조참의․대사간․부제학이 되었으며, 사후에 좌찬성에, 그리고 아들 극항(克恒, 胡亂倡義 순절)의 원종(原從)의 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충북 옥천군 동이면 검암리 목담서원(鶩譚書院)에 봉향되었고, 외서면 관동리 사당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정도 2점이 전해 오는데 1점은 목담서원에 있는데 길이 136cm․폭 92cm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어 있고, 다른 1점은 길이 200cm․폭 90cm로 종손 상용(相龍)이 소장하고 있다.

화남면 동관음사(東觀音寺) 사적비(事蹟碑)

소 재 지: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2리

수    량:1기(基)

시    대:조선시대(1707년)

화남면 동관2리 절골(寺洞)에 동관음사 사적비가 있어 이로 보아 이 곳이 동관음사의구지(舊址)였음을알수있다. 지금도 와편과 석탑부재,부도와주초(柱礎)가 남아있어이곳이매우 큰사찰이었음을한눈에알아볼수있으며, 이 사찰은 통일신라시대의 큰 사찰이었으나 소실되었다.

이사적비에의하면,당 나라 정관(貞觀, 재위 627~649)초기에도의선사(道義禪師,생몰미상, 신라 후기의 스님, 호는 원적(元寂) 또는 명적(明寂)이며, 성(姓)은 왕(王)씨로 북한군(北漢郡) 출신)가 이 곳을 두루 살펴 보고 우거진 잡초를 베어 내고 초제(招提:불사의 다른 이름)를 세우고 관음사(觀音寺)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임란 때에 모두 불에 타 중창하였으나, 강희(康熙) 무오년(1678)에 또 화재를 입어민간태사(敏侃泰士)가 주축이 되어 다시 중창을 하자, 이의 공적을 기리고자 강희 46년 정해년(1707, 숙종 33) 5월에 세웠다고 한다.

이외구전(口傳)에의하면, 이 곳은 범찰(梵刹)로써 주위에는구병산(九倂山,해발876 m)하의삼불봉과형제봉을중심으로 12암자가 있었으니, 세조암․명경대암․봉선암․염불암․낙수암․적수암․금선대암․동암․영산전 등(미상 3)이 있었다고 하며, 물레방아도 12개나 되었다고 하니 가히 큰 사찰임에 틀림 없다 하겠다.

이 비의 자리도 당초 경내에서 사찰의 화재로 인하여 일   

주문 밖으로 다시 세웠으나, 최근에 마을 주민들이 현 위치인 기장소 옆으로 옮겨 세웠다 한다. 이 비의 명칭은 ‘경상우도상산서면속리산관음사사적비(慶尙右道商山西面俗離山觀音寺事蹟碑銘竝書)’로, 비신의 크기는 높이 164cm․폭 60cm․두께 44cm이다. 비수(碑首)는 분실되었고 대좌 또한 없으며, 모서리가 일부 훼손되어 글씨의 일부분도 판독(判讀)이 불가능한 상태로 계곡 옆에 홀로 서 있다.


청리면 천주교(天主敎)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4번지

수    량:1기(基)

시    대:조선시대(1903년)

청리면 삼괴리 364번지 석단산(石壇山, 해발 213m) 아래 골짜기에는 천주교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때에 문경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상주목으로 이송되어 순교(殉敎)로써 신앙을 지켜온 시기에, 당시 상주에서 은거하던 천주교 신자 중 김도명(金道明, 1843~1936)이 신앙고백을 위해 깊은 산중이지만 석단 마을의 자연석에 비를 세웠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수비(竪碑)의 내용이 없어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903년으로 추측한다. 이 해에는 상주 최초의 천주교 집회장소가 대구교구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해로써 천주교의 포교사업(布敎事業) 원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다.

비의 형태를 보면 일반적인 비의 형태와 다른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즉, 사람을 형상화한 것과 같이 조각하였는데, 높이 1.5m․폭 2m 정도의 자연석 위에 비의 총 높이가 127cm․넓이 40cm․두께 22cm 규모의 비를 꽂아 놓았다. 비수(碑首)는 사람의 얼굴 혹은 모자 모양이고, 목부분은 사방 10cm의 십자가 형태이며, 몸부분은 어깨 폭이 40cm이고 하단부 허리부분은 34cm이다. 비신의 길이는 70cm로 비문은 앞면에 5단 57자와 뒷면은 3단 40자를 새겨 놓았다.

앞면의 목부분에 십자가를 음각하고 그 안에 세로로 ‘천주(天主)’를, 2단에는 가로로 ‘천주성교회(天主聖敎會)’를, 3단에는 ‘성호십자가(聖號十字架)’를, 4단부터는 세로로 5줄을 새겨 놓았는데 우로부터 ‘제일천주교위함(第一天主敎衛咸)’․

‘제이교화황위함(第二敎化皇衛咸)’․‘제삼주교위함(第三主敎衛咸)’․‘제사신부위함(第四神夫衛咸)’․‘제오교우위함(第五敎友衛咸)’을 새겨 놓았고, 제일 밑줄에 가로 2줄로 ‘봉교인김도명고(奉敎仁金道明告)’를, 그 밑에 역시 가로로 ‘계묘생본분성(癸卯生本盆城)’이라 새겨 놓았다. 뒷면에는 가운데에 세로 1줄로 ‘분성인(盆城人)’이라 새겨 놓고, 그 밑에 가로 1줄로 ‘김복운기자사(金福云己子四)’를, 그 밑에 세로 4줄로 장남부터 4남까지 이름과 손자의 수(數)를 새겨 놓았다.

비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한자를 소리가 나는 대로 새겨져 있다. ‘분성(盆城)’은 지금의 김해(金海)지방으로 이는 관향이 김해 김씨이며, 김복운(시중공파 14세)을 기준으로 하여 그의 소생 4명과 손자의 수를 밝혀 놓았다. 천주교 세례는 2자인 삼록(三祿) 공 뿐이며, 따라서 비를 세우고 관리한 사람도 이 사람으로 생각된다.

다만, 우리 지방에서 비의 명칭을 ‘신앙고백비’로 알려져 왔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감안한다면 사벌 퇴강공소의 승인에 힘입어 이 지역에도 공소를 설치하기 위한 전 단계의 집회장소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비가 세워진 곳이 마을 사람들이 잘 모일 수 있는 마을의 가장자리라는 점과, 주위에서 잘 보일 수 있도록위치를 선정했다는 점이며, 이 때의 석단(石壇)은 법정 리동으로 당시 청동면(靑東面)의 소재지가 바로 이웃 마을인 학하리 축산 마을이기 때문이다.



2. 지석묘(支石墓)

함창읍 증촌리(曾村里) 선돌(立石)

소 재 지:경북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수    량:2기(基)

시    대:청동기시대

증촌리 선돌(立石)은 함창읍 증촌리 사창마 입구 구릉에 선돌 2기가 있다. 상주에서 함창읍으로 드는 어귀에서 시가지로 50m쯤 들어 가다가 오른쪽으로 작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전 고령가야왕릉이 마주 보이는 이 구릉의 밭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이 선돌의 형상은 끝이 뾰족하나 상부가 넓고 하부가 약간 좁아지는 형태의 자연석이다. 입석의 아래에는 기와나 돌, 흙 등을 모아 두었기 때문에 주변의 밭

에 비하여 높게 형성되어 있다. 다른 1기는 이 곳에서 2m 정도 떨어진 곳에 비석처럼 작고 납작한 석재로 세워져 있는데, 크기는 1기의 1/3 정도로 끝이 뭉턱한 자연석으로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이 곳에서 남쪽 구릉에는 논과의 경계지점에 지석묘(支石墓)가 있어 청동기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선돌은 고인돌(支石墓)과 같이 선사시대(先史時代)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물로, 대개 자연석이나 다소 가공된 돌기둥을 세웠다. 이는 지역의 경계표시 또는 경계의 수호신, 분묘의 소재지 표시, 원시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화북면 입석리(立石里) 선돌(立石)

소 재 지: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수    량:1기(基)

시    대:청동기시대

입석리선돌(立石)은당초에 화북면 입석리 544번지의 도로 옆에1기가세워져있었는데경지정리로 인하여 위치가 변경이 되었다.

이 선돌의 크기는 높이 164 cm․두께 25cm이며,상단부의 폭이 50cm이고 하단부의 폭이 88cm로서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자연석을 약간 가공하였다.

화북면 입석리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 선돌이 후환 방지와 득남을 하는 데 영험을 준다고 알려져, 음력으로 정월  

열나흘날 밤에 제물을 차려 놓고 소원을 빌었으며, 제물로 쓴 음식을 먼저 먹는 사람은 그 해에 건강과 무병(無病)이 있다는 속설이 있어 제주가 두고 간 음식을 서로 앞다투어 먹는다고 한다.


은척면 무릉리(武陵里) 선돌(立石)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은척면 무릉2리 87번지

수    량:2기(基)

시    대:청동기시대

무릉리 입석은 은척면 무릉2리 87번지에 있다. 은척초등학교 무릉분교로 향하는 하신리 마을의 진입로를 따라 가다 보면 중간쯤 좌측으로 들 가운데 수로(水路)의 둑에 2기가 세워져 있다. 이 곳도 경지정리로 위치가 다소 변경되었다.

이 선돌은 동․서 5m의 간격으로 서 있으며, 화강암의 자연석이다. 동쪽에 있는 선돌은 끝이 뾰족하고 밑으로 내려 오면서 굵어지는 모양이다. 금줄을 친 흔  적이 있으며, 높이가 192cm로 폭이 윗부분은 47cm이고 밑부분은 72cm이며, 두께가 20~30cm의 크기이다. 서쪽에 있는 선돌은 부정형의 암괴(巖塊)로 바닥의 둘레는 작은 천석(川石)이 깔려 있고, 인두대(人頭臺)의 할석(割石) 1매가 괴여 있다. 높이 175cm․폭 40~70cm․두께 20~50cm이다.


사벌면 매호리(梅湖里) 지석묘(支石墓)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사벌면 2

수    량:5기(基)

시    대:청동기시대

매호리 지석묘는 사벌면 매호2리 상리 마을 일대에 조성된 지석묘를 통틀어 일컫는다. 이는 사벌면 매호초등학교에서 서북쪽으로 500m 정도 가면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북쪽 방향에 형성된 계단식 논의 중간에 4기가 밀집되어 있고, 조금 북쪽에 1기가 더 있다. 이 곳은 해방 전후에는 완경사를 이루는 잡초지대였으나 밭으로 개간되고, 다시 논으로 만든 후 1995년도부터 경지정리를 하면서 이 곳의 유허비(遺墟碑)를 중심으로 농로를 개설하였다. 1996년도에 지석묘로 판 

명되었고, 청동기시대에 만들어 졌다.

대부분 땅 속에 묻혀 있는 상태이나 1996년도 경지정리를 하면서 주변이 절토(切土)되어 독립된 섬처럼 남아 있다. 가장 남동쪽에 있는 1기는 땅 속에 매몰되어 뚜렷한 특징은 없고, 크기가 장축(長軸) 155cm․단축(短軸) 126cm의 마름모꼴이다. 2기는 1기 옆에 장방형으로 가장 크고 반듯하게 놓였는데, 윗면에 석비가 꽂혀 있다. 이 석비에는 ‘우복정선생유허비(愚伏鄭先生遺墟碑)’라고 글씨를 새겨 놓았고 석비의 대좌 역할을 하고 있다. 2기의 크기는 가로 190cm․세로 120 cm․높이 40cm이다. 3기는 사각형으로 비스듬히 노출되어 있고, 4기는 3기와 중간에 포개어져 있는데 이는 경지정리로 옮겨 놓은 것이며, 5기는 이 곳에서 약 200여 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유허비가 꽂힌 돌을 주민들은 ‘칠석(七石)바위’라 부른다. 옛부터 조상들은 지석묘를 ‘칠성바위’라고도 불리었는데, 이것은 지석묘에서 치성을 드린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매호 2리 새마 부근의 평평한 잡초지대에도 동․서 일직선 방향으로 4기의 칠성바위가 있다. 이 곳도 1996년도에 지석묘로 판명되었다.


3. 문  적(文籍)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시장(諡狀)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우복종)

수    량:1첩(帖)

시    대:조선시대(1663년)

이 시장(諡狀)은 조선시대 1663년(현종 4)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시호(諡號)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은 것으로, 총 32매의 첩(帖)으로 되어 있으며 지본묵서(紙本墨書)로 크기는60×20cm이다.

이시장은표지에좌측상단부터종(從)으로‘우복선생시장(愚伏先生諡狀)’이라 묵서하였고, 내용은 종으로 6열씩 해서체로 기록하였으며,끝부분에는판서(判書)․첨정(僉正) ․판관(判官)․주부(主簿)․직장(直長)․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참봉(叅奉)등관련자들의수결(手決)을비롯하여관인(官印)이 날인되어 있다. 또한 말미에는 시장을 올린 다음 봉상시(奉常寺)에서부터예조․이조및의정부를거쳐국왕에이르러시호가최종결정되기까지의첩정(牒呈)․관문(關文)․계목(啓目)등의 공문서 원본이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는 봉상시에 시장이 올려진 것은 1659년(현종 즉위) 12월이었고, 봉상시에는 예조에 첩정을 보낸 달은 1660년(현종 1) 1월이었다. 이 때 시호망(諡號望)으로 문숙․문헌․문장이 올려졌다. 시주(諡註)를 보면, ‘문숙(文肅)’은「근학호문왈문(勤學好問曰文),강덕극취왈숙(剛德克就曰肅)이었고,‘문헌(文憲)’은「문상동(文上同),행선가기왈헌(行善可紀曰憲)이며,‘문장(文莊)’은「문상동(文上同), 이정지화왈장(履正志和曰莊)이었다.

이후 같은 해 2월 예조에서 이조로 관문(關文)을 보냈고, 다시 이조에서 의정부로 보냈다. 이런 절차를 통해 국왕의 최종 인가가 난 것은 1663년(현종 4) 1월 25일이었다. 이 때의 시호는 수망(首望)인 문숙(文肅)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1665년(현종 6) 8월에 예관(禮官)이 파견되어 선시(宣諡) 행사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당초에 결정된 이 문숙의 시호가 1693년(숙종 19) 영남 유생들의 건의에 의하여 말망(末望)이었던 문장(文莊)으로 개시(改諡)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본 문서는 시호가 결정되는 전 과정을 공문서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과, 공문서 원본이 첨부되어 있는 점에서 희귀한 자료이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선생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일묵(一黙)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예학자(大禮學者)이다.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 났으며, 관직생활 외에는 외서면 우산리에서 살다가 노후에 사벌면 매호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상주시 은척면 황령사에서 창의하여 장서(掌書)․소모관(召募官)으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1599년(선조 33) 당시 임진왜란 이후 향촌사회의 질병퇴치를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사설의료국인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선생은 향토를 대표하는 선비로서 사서(沙西) 전식(全湜)․창석(蒼石) 이준(李埈)과 더불어 ‘상산삼로(商山三老)’로 칭하여 왔다.

주요 관직으로는 경상감사, 강릉․대구부사, 성균관 대사성, 전라감사를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정2품)에 올랐으며,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추증되었  

다. 저서로는『우복집(愚伏集)』․『주문작해(朱文酌海)』․『상례참고(喪禮參考)등이 있고, 상주의 도남서원, 우산서원과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에 봉향되어 있다.

현재까지 주요 지정문화재로는 대산루(籉山樓)와 계정(溪亭)이 지방유형문화재 제156호(1982. 2. 24 지정)로, 제321호 신도비(2000. 12. 4 지정) 및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1호로 우복종가(愚伏宗家, 1982. 2. 24 지정)가 지정되어 있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앞으로 보다 많은 값진 유물들의 재평가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상산지(商山誌)

수    량:3(卷)

시    대:조선시대(161717491928년)

 『상산지(商山誌)는 현재 규장각(奎章閣)에 보존되어 있는 필사본과 각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인쇄본 등 두 종류가 있는데, 향토사(鄕土史)를 집대성한 귀중한 문헌이다.「창석본(蒼石本)과「청대본(淸臺本)」및 증보판이 있는데, 16절지의 크기로 7권 3책이며, 3책이 모두 239매이다.

 『상산지「창석본은 상주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의 사찬향지(私撰鄕誌)로,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이 1617년(광해 9)에 강복성(康復誠) 목사(재임 1614~?)의 청(請)으로 시작하였으나 완성을 못하자, 정호선(丁好善) 목사(재임 1617~1619)의 청으로 결국 1․2권이 편찬되었다. 그 후 창석의 손자 이재관(李在寬)이 속록(續錄)을 내었다. 그리고, 1680년(숙종 6)에 향내 유림이 도남서원에 모여 속편(續編)을 편집하다가 유고로 중지하였다.

 「청대본은그후1749년(영조25)에이협(李埉)목사(재임1746~1750)의 권(勸)에 따라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주관하여 속지(續誌)를 내었다. 그 후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가 한 차례 수찬하였다. 증보판은 1928년 홍의식(洪義植) 군수의 권에 의하여 향내 유지들이 속편하였는데, 발문(跋文)을 정동철(鄭東轍)이 썼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상산지는 3권이 되었다. 내용은 신라시대부터 1928년까지의 사적(史蹟)과 사실(史實)을 여지(輿地) 등 10강(綱)과 연혁(沿革) 등을 60목(目)으로 구분하여 소상하게 기술함으로써, 이는 웅주(雄州)의 면모에 한층 빛을 더하고, 나아가 국사자료의 한 몫이 되는 소중한 향지로 평가받고 있다.


함창읍지(咸昌邑誌)

수    량:2책(冊)

시    대:조선시대(18321855년)

 『한국지리총서에 의하면, 현읍지(縣邑誌)가 영조~정조 년간에 처음 편찬되었다고 하며, 그 후는 다른 지방과 같이 1832년(순조 32)과 1871년(고종 8), 1895년(고종 32) 및 1899년(광무 3)에 편찬되었다.『함창읍지(咸昌邑誌)는 근세에 편찬된『한국지리총서』․『경상도읍지』․『영남읍지』등에서 함창현편(咸昌縣編)으로 합철되어 있다. 이 중 1832년 순조때에 편찬된 현읍지는 전국에 내린 어명에 의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내용이 충실하고, 정교하게 편찬되었다고 한다.

 함창지역에 필사본이 두 종류로『함창읍지와『함창현지(咸昌縣誌)가 있다.『함창현지』필사본은 총 23매로 1855년(철종 6)에 증보 수정했다. 맨 마지막 장   에 함풍(咸豊) 5년 을묘 2월 3일 수정(修整) 도청(都廳) 유현필(柳鉉弼)․채서락   (蔡瑞洛)․유사(有司) 정원학(鄭源學)․곽노삼(郭魯三)이라 기록되어 있다.


상산지도(商山地圖)

수    량:35면(面)

시    대:조선시대(1830년)

 『상산지도는 다산(茶山) 정상우(鄭祥瑀, 생몰년 미상)에 의해 1830년(순조 30)에 제작된 상주 최초의 지도이다. 첫 면(面)에 읍내 전도(全圖)인 상주주성(尙州州城)를 시작으로 하여 내동면부터 산북면에 이르기까지 상주전도(尙州全圖)와 면도(面圖) 등 총 32도(圖)와 ‘서상산지도첩자후(書商山地圖帖子後)’를 합쳐 총 35면의 도첩(圖帖)이다. 이 도첩은 주로 산천과 마을을 자세하게 그렸으며, 주요 사적지와 제언(堤堰, 못) 및 거리 등을 명시하였다.

  다산 정상우는 절충장군(정3품, 당상관)으로서, 1830년에 상주진영장(尙州鎭營將)으로 부임하였으나 이임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상주의 산수를 사랑하여 이를 오래 두고 보기 위해 화공(畵工)인 금초(錦樵) 김진우(金鎭祐)에게 시켜 그렸다고 하는데, 이 지도의 궁극적인 목적중의 하나는 상주진영장으로서 군사상 활용에도 비중을 두었을 것은 자명하다고 하겠다.


도선생안(道先生案)

소 유 자:경북 상주시 신봉동 상주향교

수    량:1책(冊)

시    대:조선시(1622년)

 『도선생안의 본 이름은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로서 경상도의 역대 관찰사(觀察使) 명단록(名單錄)이다. 이 명단록은 1078년(고려 문종 32) 도부서사(都部署使) 이제원(李濟元)을 필두로 하여 1886년(고종 23) 관찰사 이호준(李鎬俊)까지 808년 간 총 1,037명(고려 531․조선 506)의 명단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크기는 세로 83cm․가로 39cm․두께 7.5cm로 무게는 약 8.9kg이며, 두터운 한지의 한 면마다 세로로 8칸씩줄을그어기록하였다. 표지는 초록색 명주 바탕에‘도선생안(道先生案) 병진중추장(丙辰仲秋莊)’이라 기록하여 상주향교에서 보관해 왔다.

이는,현재광역자치단체장인도지사(道知事)의선조격으로,관찰사의이름하나만도도부서사(都部署使,1078년)․안찰사(按察使,1112년)․제찰사(提察使,1308년)․안렴사(按廉使,1364년)․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1388년)․관찰사(觀察使, 1465년) 등으로 바뀌었으며, 여기에는 1388년부터 경력(經歷:군사사무  담당)․도사(都事:민정을 살피는 담당)․영리(營吏) 등을 병기해 오다가 1465년(세조 11)부터는 경력을 폐지한 사실도 확인이 된다.

 『도선생안은, 1425년(세종 7) 경상도 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한 경재(敬齋) 하연(河演)이 주부(主簿) 손희(孫凞)의 가장본(家藏本)에 의거하여『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두책을제작하여 경주본영(慶州本營)과 상주행영(尙州行營)에 보관한 것이 그 효시이다.

그 후 다시 2백 년이 지난 1622년(광해 14)에 관찰사 용계(龍溪) 김지남(金止男)이 아전(衙前) 오일섭(吳一燮)의 건의에 따라 당시 경주 아전 최락(崔洛)이 소장해 온 하연본(河演本)을 토대로 증보 수사(增補手寫)하여 경주․상주․안동․대구 등 4곳에 영구 보존토록 하였으나,「경주 하연본과「상주 김지남본두  책만 남아 있다. 그 중「경주본은 1718년(숙종 44)까지만 기록되어 있고,「상주본은 이보다 168년 간이나 더 기록이 되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주본은 이 땅 선비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최근 상주향교에 보관중인 것을 1970년 10월 20일 전 국회도서관장 강주진(姜周鎭) 박사의 주선으로 해제(解題)와 서(序)를 놓고 번역을 하였으며, 부록으로 일제강점기로부터 1970년까지의 도지사 명단과 인명색인을 더하여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상주 선비들의 지극한 정성이 담겼으며, 1392년(조선 태조 원년)에 경상감영이 최초로 상주목(尙州牧)에 개영(開營)되었고, 그 후 좌(경주)․우(상주)영으로 나뉜 적도 있으나 1593년(선조 26) 성주(星州)로 감영을 옮기기 전까지 202년 간「경상감영지였다는 사실과, 역대 지방장관의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음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역사적인 교훈도 지대한 일이라 하겠다.


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

소 유 자 : 경북 상주시 남성동 상주시청

수    량 : 1책(冊)

시    대 : 조선시대(1606년)

 『상주목선생안은 역대로 상주목사를 역임하신 분들의 명단록이다. 본래의 이름은 ‘상주목제명록(尙州牧題名錄)’이라 한 것을 병진년에 개장할 때 지금의 ‘목선생안(牧先生案)’으로 고친 것이다.

이 책의 크기는 가로 38cm․세로 52.8cm․두께 2cm로, 표지는 청남색 비단으로 싸서 꽃무늬 황동편(黃銅片)으로 철하여 묶었다. 내지는 두터운 한지에 붉은 선으로 9칸이 그어졌고, 상단에서 13cm 기점에서 가로로 선을 그어 직명(職名)과 성명을 기록하고, 다음 4cm 폭으로 2칸을 만들어 생년간지와 관향을 적었으며, 아래로 20cm의 길이에 도임․이임 일자 및 사유를 기록해 놓았다.

이 목선생안은 1604년(선조 37)에 부임하여 1606년에 이임한 당시 상주목사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전임자들의 명단록이 없는 것을 민망히 여겨 야로가(野老家)에서 사초(史草)를 얻어 전임자인 전팽령(全彭齡, 재임 1549~1550) 목사로부터 32인을 밝혀 기록해 놓았다. 서문의 말미에도 ‘만력(萬曆) 34년(조선조 선조 39, 1606) 병오 중추(丙午仲秋) 목사(牧使) 김상용(金尙容) 근지(謹識)’로 기록되어, 이는 1606년 추석에 만든 것이라 하겠다.

상주는 기원 전후 고대 사벌국으로부터 역사와 문화를 이룩해 온 고도요 웅주라, 이 땅을 다스린 목민관만 하여도 수 천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문헌의 미비로, 하대는 잦은 병화로 인하여 목민관의 명단이 제대로 구비된 것은 조선 중기부터였다. 선원(仙源) 이후부터 목선생안은 계속적으로 누가(累加) 기록하여 최근(1988년)까지 상주목사 195명․판관(종5품) 26명․군수 58명(시장 6명, 1986년 시․군 분리 후 통합으로 추록)․부군수 9명(부시장 5명 별도)을 비롯하여, 호장․이방 330명(이중 포함)이 수록되어 있으며, 상주시에서는 1995년 7월 1일 민선시장제 실시 이후에도 계속 기록을 이어 가고 있다.

목선생안의 제작목적은 이 땅의 선조들은 한 지역을 다스리고 간 목민관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려는 데에도 있겠지만, 스스로 거울삼아 삼가 경계하려는 자료로 삼고자 한 데에도 있었다고 하겠다.


함창현․읍선생안(咸昌縣邑先生案)

수    량:2책(冊)

시    대:조선시대(미상)

함창현은 상주의 속읍이지만 고령가야국의 고도로 서기 562년에 고동람군(古冬攬郡)을 설치한 이래 자치적인 목민관이 있어 왔으나, 기록은 훨씬 후대에 작성되었다.이선생안도2본으로『함창현선생안과『함창읍선생안으로필사본이다.

『함창현선생안은 1499년에 취임한 조척(曺倜)으로부터 1905년 부임하여 이듬 

 해 이임한 김광묵(金光黙) 군수까지 총 147명의 명단록이다. 크기는 가로 19cm ․세로 36cm․두께 0.4cm이며, 표지를 포함하여 14매이다. 다만, 서문이 없다.

 『함창읍선생안은 1456년에 취임하여 1458년에 이임한 채신보(蔡申保) 현감으로부터 1894년에 이임한 곽치년(郭致秊) 현감까지의 총 135명의 명단록이다. 서문이 없어 언제 중수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 두 본(本)은 서두 몇 현감의 부임서차(赴任序次)가 조금 다르고, 이․취임년대 등의 내용은 읍선생안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갑오경장 이후의 기록은 현선생안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상주사마록(尙州司馬錄)

소 유 자:경북 상주시 신봉동 상주향교

수    량:1책(冊)

시    대:조선시대(미상)

 『상주사마록(尙州司馬錄)은 상주향교의 관할 내에서 사마시(司馬試, 小科 급제자)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으로, 상주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다. 1634 

년(인조 12)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이 만든 이래 1792년(정조 16)까지 279명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25cm․세로 39cm․두께 0.8cm로 총 28매의 단권이다.

조선조 때 과거제도(科擧制度)는 크게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나누어지는데, 대과는 관리선발 시험이며 소과는 자격시험의 성격을 가졌다. 사마시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통칭하는 말로 일명 소과라고도 한다. 소과는 3년에 한 번씩 치루는 식년시(式年試:子․卯․午․酉)와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되는 증광별시(增廣別試)의 두 종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총 229회의 사마시 중에서 식년시 162회와 증광별시 67회가 실시되어, 생원 24,221명과 진사 23,776명을 배출시켰다.

이 사마록에는 1388년(우왕 14)에 급제한 이은(李垠, 蒼石의 선조)부터 1792년(정조 16) 이승배(李升培)까지 총 279명(중복 1)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급제자들의 유형을 보면 생원 122명(장원 3)․진사 149명(장원 4)과 양 시(兩試, 생원 ․진사) 8명(장원 1)이며, 이 중 문과(文科, 대과) 급제자가 46명이었다. 특히, 생원․진사 양 시는 물론 문과에도 장원을 한 사람은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으로, 그는 ‘삼괴선생(三魁先生)’으로 불려졌으며, 상주의 자랑이라 할 만하다.


함령사마록(咸寧司馬錄)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함창읍 신흥리 함창사마소

수    량 : 1책(冊)

시    대 : 조선시대(1698년)

『함령사마록은 일명 ‘함창사마록’으로도 불려지는데, 함창현 출신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분들의 명단이다. 이 책은 함창읍 신흥리에 있는 함창사마소에서 2권이 만들어졌는데, 필사본이다. 표지는 두터운 한지로 상단에 ‘계안(稧案)’이라 쓰고, 정면에는 ‘함령사마록(咸寧司馬錄)’이라 썼으며, 가로 25.5cm․세로 37cm․두께 1.7cm로 모두 47매이며, 144명을 수록하여 1698년에 만들었다. 다른 1권은 표지에 ‘함령사마록’이라 쓰고, 가로 37cm․세로 25.5cm․두께 1.8cm에 향선생안(鄕先生案) 16매, 사마록 35매의 내지에 표지를 합하여 총 53매에 달한다. 1522년(중종 17) 이후 졸재(拙齋) 채소권(蔡紹權, 1480~1547)이 만들었다.

여기에는 1920년까지 누가(累加) 기록되었는데, 1979년에 간행된「함령사마록 부 후손록(咸寧司馬錄附後孫錄)에 의하면, 1411년(태종 11) 류달존(柳達尊)부터1894년(고종 31) 김재룡(金在龍)까지 총 236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 유형을 보면 생원 123명(장원 4)․진사 112명(장원 1)과 양 시(兩試, 생원․진사) 11명이다. 이 중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한 사람은 51명(상주와 중복 4명 포함)으로 상주와 함창에서 문과 급제자는 총 93명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볼 때 총 229회의 사마시를 치루어 생원․진사 합계 47,997명으로,이를 상주와 함창지역의 급제자 총 515명(중복 20명)은 1.19%의 비율로, 이로 보아도 상주는 양반의 고장이었음이 입증된다 하겠다.

4. 민  속(民俗)

견훤사당(甄萱祠堂)

소 재 지:경북 상주시 화서면 1

수    량:1동(棟)

시    대:조선시대(1839년)

견훤사당은 화서면 하송1리(청계리) 청계산 기슭에 있는 동제당(洞祭堂)이다. 이 당 안에는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는 신위를 모시고, 아직까지 견훤의 넋을 기리고 있는 전국의 유일한 신당(神堂)이다. 이는 견훤을 신격화하여 옛부터 마을의 허한 곳을 막아 액(厄)을 차단시켜 주는 골맥이신으로서, 민간에서 민속신앙 즉 산신제(山神祭)로 행해지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제(祭)를 ‘성신제’라 한다.

매년 정월 보름과 시월 보름에는 주민들이 정성껏 제물을 마련하여 견훤사당에 제사를 드리면서 이 곳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셔 왔다. 이는 상주에 견훤과 연관이 있는 산성이 3곳이나 있고, 또 이 곳의 견훤성(일명 城山山城)은 후백제 건국의 본거지요, 총 지휘본부로서 대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당은 성신각 혹은 성신당이라고도 하는데, 한 칸으로 이루어진 맞배지붕의 당집이다. 상량문에는 ‘도광19재(道光十九在)’라는 연호가 붓으로 씌여 있어 1839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벌면 원흥리 솟대(立木, 蘇塗)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사벌면 원흥리

수    량:1구(軀)

시    대:미상

솟대란,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매년 한두 차례에 걸쳐 일정한 장소에서 제관을 선발하여 질병과 재앙을 쫓기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이 제사 지내는 장소를 ‘소도(蘇塗)’라고 하고, 거기에 솟대(立木)를 세웠다고 한다. 이 소도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 제사 도중에는 죄인이라도 처벌하지 않았다고 하며, 민간신앙상 중 산신(山神) 다음 가는 신으로 장승(長丞)과 같이 잡귀신의 출입을 방지하여 한 마을의 안녕을 지켜 주는 오래된 신앙이다.

사벌면 원흥리 동구에는 향나무 두 그루로 세워진 솟대가 있다. 언제부터 이 곳에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갑술년(1934) 대 홍수때 떠내려 갔던 것을 현재의 자리에 모시고 해마다 치성(致誠)을 드린다고 한다. 이 솟대목의 높이는 큰 것은 높이 4.1m와 밑 둘레 66cm, 작은 것은 높이 3.7m와 밑 둘레 48cm이며, 솟대 앞에 제단으로 석상(石床)이 있다. 석상 옆에는 선돌이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 고목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솟대와 달리 솟대목의 끝에 조형물(비들기)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 민속학(民俗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만산동 성황사(城隍祠)

소 재 지:경북 상주시 만산2동

수    량:1동(棟)

시    대:조선시대(1788년)

상주시 만산2동 안너추리에서 1km 정도 올라 가면 성황사(城隍祠)와 영암각(靈巖閣)이 있다. 이 성황사는 만민이 평안하고 풍요하며, 신공으로 우순풍조하여 풍년이 들 것을 기원하던 자리이다.

 『상산지에 의하면, “천봉산에 있는데 단(壇)은 있지만 사당(廟)은 없다. 성황신(城隍神)은 한 지역의 온갖 신의 주재자가 되고, 태수는 한 고을의 주재자가 되니 그 힘이 비슷하다.”하였다. 이로 보아 상주 최초의 성황신은 사당이 없고 단(壇)만 있었으나, 1577~1578년 백곡(栢谷) 정곤수(鄭昆壽, 1538~1602) 목사가 사직단(社稷壇)에 재사를 세우고 직접 집전하였다고 하며, 사(社) 다음으로 여단(厲壇)에도 같이 제사를 모셨으며, 이방과 호장들은 성황사의 신령에게 제사를 따로 모셨다고 한다. 성황사의 사우(祠宇)도 처음에는 상주 북쪽 신계리(현 계산리)에 세워졌다가 얼마 후 천봉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진 것이다.

1990년 10월 경 성황사 신당을 상주시에서 보수할 때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강희 53년(1717, 숙종 40)에 중수(重修)할 때부터 건륭 2년(1737, 영조 13), 건륭 53년(1788, 정조 12)의 중수를 거쳐 함풍 5년(1855, 철종 6) 8월 10일 대들보를 올리면서 중수 상량문을 진암거사 진산 강직공(姜稷公)이 지어 보관해둔 것이었다. 또한, 중수 상량문을 볼 때 이 곳은 서민(庶民)들의 주도가 아니고  관(官)의 주도 아래, 특히 홍종무(洪鍾茂, 1852~1855) 목사의 지휘에 따라 유지들에게 공사비용을 거두고, 백성들은 성황사의 사우를 3년에 걸쳐 건립하였으며, 중수한 뜻을 후대에까지 미치게 하고 천추만세가 지나도록 제사를 지냄에 소홀함이 없도록 맹세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一자 형 평면에 정면 3칸(6.6m)과 측면 2칸(4.25m)인데, 내부는 통칸으로 3칸 전체에 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팔작와가로서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성황사의 신위(神位)로는 목각된 남매신상으로 모셔져 있다. 전면에 걸려 있는 편액은 ‘성황사 무신년 오월’이라 적혀 있어 1788년 5월에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은 성황사를 비롯하여 산신제단이 남아 있고, 암석신앙에서 비롯된 영암각이 있어 상주의 민속문화의 보고(寶庫)로 평가를 받고 있다.


대현리 성황당(城隍堂)

소 재 지:경북 상주시 이안면 대현리

수    량:1구(軀)

시    대:미상

이안면 대현리 마을 입구에 있는 서낭당이다. 서낭당은 원초부터 민간 고유의 민속신앙으로 자생되어 왔다. 중국 송 나라 성황(城隍)이 성읍(城邑)을 수호하는 신으로 이 땅에 들어와 우리 고유의 서낭신과 공존하면서, 마을의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잡귀를 물리치며 액(厄)을 떼어 버리는 민속신앙으로 자리잡아, 고갯마루나 길섶의 돌무더기 누석단(累石壇) 서낭당으로 공존하여 왔다.

서낭당은 후대로 내려 오면서 성황당으로 불려졌다. 이안면 대현리 성황당도 지나던 길손들이 돌을 던져 쌓여진 돌무덤으로 둘레가 10m이다. 위로 갈수록 좁게 쌓여 있으며, 그 높이는 2m이다. 이 돌무덤(累石壇)의 꼭대기에는 세 개의 입석(立石)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1.2m․70cm․40cm의 크기이다. 주위에는 고사(枯死)된 거목의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베어 버렸으며, 최근에 세운 장승(長丞) 2기가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옛부터 마을의 수호신으로 관리를 해 오면서 지금도 매년 정  월 보름에 생기 복덕한 자를 제관으로 뽑아 동제(洞祭)를 모시고 있다. 상주지역의 민속신앙으로서 사벌면 솟대와 함께 가장 오래된 민간신앙 숭배처로서 신성시한 성소(聖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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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5.03 21:57

    첫댓글 어풍대 암각을 병오년에 새겼다면 1604년(갑진년)이 아니라 1606년이 맞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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